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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문화재 탐방-9...신사리 선돌~대정리산성~유붕기 효행비~문화유씨 만은재~이규호, 김수필, 이유 정려~장산리 석탑

吾心竹--오심죽-- 2012. 12. 2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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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남 신사리 선돌(城南 新沙里 立石)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신사리 248-1 / 높이 3.5m, 폭 1.8m, 둘레 3.6m

 

* 성남 신사리 검사울의 선돌은 표면 상태로 보아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형태나 규모면에서도 선사시대의 선돌과 유사하다. 선돌의 연대는 주변 일대에 마한, 한성백제기의 용원리 유적과 화성리 청동기 유적이 산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마한, 백제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세성산성의 서쪽에 선돌이 위치한다. 이 선돌은 일명 <미륵댕이>라고도 불리며 매년 정월보름에 제사를 올린다. 제관은 일주일전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정하고 제(祭)를 지내며 부락민 전체가 참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남쪽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함께 마을의 수호신처럼 지키고 서있다.

 

* 성남의 세성산성(細城山城)의 어원 역시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城南面) 화성리(華城里)와 맥이 통한다. 화성리는 화원(花院)+성양(城陽)=화성리(花城里)...세성(細-가늘다,(흙,모래,떡고물이)곱다, 고웁다, 고운, 고운잣(細城), 고운성)

고운(細)>곶(串)>꽃(花), 화(華)의 변천을 거치며, 세성(細城-고운잣)→화성(花城-꽃잣)과 같은 어원이다.

성남~풍세~광덕의 화산(華山) 역시 태화산(泰華山), 대학산(大鶴山)에서 모두 같은 태화산의 별칭 이름이며, 꽃봉오리처럼 뾰족한 산의 형상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大-太-泰는 동의자로 서로 호응, 상응한다.

 

 

 

 

 

 

 

 

 

 

 

 

* 대정저수지와 대정리산성의 모습 //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대정리 산53, 산55-4, 산57-1 / 세종시 소정면 고등리

 

대정산성(大井山城, 백두대간 금북정맥, 해발 304m)

산성

위치

시대

축조방식

둘레

대표 수습유물

大井山城

성남 대정리~

세종시 고등리

백제 추정

테뫼식석축

약 150m

수습못함

 

* 1914년 성남면 대치(大峙)+초정(椒井)=대정리(大井里)이며, 대정산성으로 불린다.

 

초정마을 북서방향으로 산의 정상에 테뫼식산성이며, 석축이다.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하였는데 동쪽, 남쪽 부분은 산의 경사가 매우 심하게 이루어져 있어 경사를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은 경사로 말미암아 상당부분 훼손되었다. 성의 내부는 비교적 평탄한 면을 유지하고 있고 동측부는 돌출된 지형을 이루고 잇어 망루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국립문화재연구소 천안시 문화유적분포지도, 1998>

 

천안시 성남면과 세종시 고등리, 관정리를 잇는 대치(大峙)이다.

바로 남쪽엔 운주산성이 있어 서로 남북으로 마주보며 길목을 지키던 산성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수습하지 못함.

산성의 형태를 가늠하기가 매우 어려움.

 

 

 

 

 

 

* 기계유씨 증동몽교관 유붕기 효행비...대정저수지 위에 있다 //

 

 

 

 

 

 

 

 

 

 

 

* 성남면 대정리산성의 모습 //

 

 

 

 

* 문화유씨 만은재...대정리 //

 

 

 

 

 

* 대정2리 느티나무 //

 

 

 

 

 

 

* 효열 이규호 정려( 孝子 李圭祜 旌閭) //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대흥리 산27

 

* 이규호의 자는 의원(義元) 본관은 경주로서 영조 28년(1752)에 월천 부원군 이정암의 10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34세때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여 병석에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약시중을 남에게 맡기는 일이 없으며 밤을 세워가며 손수 시탕하여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였으나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없이 더욱 위중하여 어머니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게 되었다. 좋다는 약은 모두 구하여 드렸으나 약효를 보지 못하고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 드리니 어머니는 의식을 되찾아 회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계실 때 어떤 사건에 연좌되어 규호는 전라도 임실의 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옥살이의 괴로움을 아랑곳없이 오직 어머니의 병환을 걱정하고 호읍(號泣)을 그치지 않았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사람을 구하여 어머니의 약을 알아보았으며 약이 구해지면 사람을 사서 천리길을 멀다않고 보내니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은 차도가 없어 자나 깨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한의원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 모친의 병세는 죽순이 특효약"이라는 현몽이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놓아 백방으로 죽순을 구하였으나 죽순의 철이 아닌지라 죽순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규호는 '내 손수 구하여도 어렵거늘 남의 손을 빌려 구하려 하니 얻을 도리가 있는가! 이 불효를 어찌 하오리'하고 길길이 울부짖어 호곡하였다. 그날 밤 지쳐서 깊이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또 그 의원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죽순이 없으면 대나무를 빻아 만든 죽을 잡수시게 하리로다. 그대는 너무 상심말고 기다리고 있으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잠에서 깨어나니 아침에 먼동이 트기도 전에 어떤 노인이 옥문에 나타나더니 "내가 병이 있어 대나무를 빻아 만든 죽이 있는데 신령님의 현몽이 있어 이를 공에게 드리고져 가져왔다는 것이 아닌가 규호는 한편 놀라웁고 한편으로 그 약 그릇을 받고 정중히 고마운 마음으로 인사하고 지체없이 어머니에게 보냈다. 과연 신통한 효험이 있어 어머니는 완쾌되었다. 그러나 워낙 춘추가 높으신지라 얼마 후에 노모는 명을 다하여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옥서에 부보(訃報)를 받은 그는 특별히 은전을 받아 출옥해서 천리길을 달려갔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니 이미 출상을 하여 그토록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을 영영 뵐 길이 없었다. 그는 어머니 영전에서 목놓아 울면서 어머니를 부르다가 너무도 격한 나머지 피를 많이 토하고 기색혼절하여 그만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애통하다가 어머니의 뒤를 따라가고 만 것이다. 그의 부인은 경주김씨로 아주 정숙하고 덕망이 높았다. 그리도 목메어 그리던 남편이 출옥되어 집에 돌아오더니 어머니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나니 자신도 남편의 뒤를 따라 죽기로 결심하였다. 땅을 치고 통곡하며 남편의 초종장례(初終葬禮)를 모두 마친 후 6일간이나 식을 전폐하고 누웠더니 결국 자진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남편은 효에 아내는 열에 목숨을 바쳐 효자와 열부가 동시에 나니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도하였다. 철종 13년(1862)에 조정에서는 이 효부열부에 대한 높은 정신을 기리어 효열 정려가 동시에 내렸다.

 

 

 

 

 

 

 

 

 

 

 

 

 

 

 

 

* 효자 김수필 정려(孝子 金壽弼 旌閭)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신덕리 산32-1

 

* 성남면 신덕리 491번지 옆, 중실 마을 서쪽 북측구릉 하단에 단지를 조성하여 세웠다. 정문의 주변은 천안시의 예산을 지원 받아 예전의 시멘트 담을 헐어내고 자연석을 이용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정려의 구조는 정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였다.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면과 좌우측면은 철제로 홍살을 설치하고 후면은 막았다. 자연 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는데 정려의 내부에는 북벽 상단에 현액을 달았다.

현액에는 효자 학생 김수필 지문 성상 12년 임신 명정(孝子 學生 金壽弼 之門 聖上 十二年 壬申 命旌) 이라 각서 되어 있다.

 

김수필은 중화김씨(中和金氏-中華人)로 모친의 병환에 의원(醫員)이 이르되 제비가 약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시기가 마침 겨울인지라 어찌할바를 모르고 부르짖으며 하늘에 빌었다. 난데없이 제비가 날아 들어와 약에 넣어 드려서 효험을 보았다. 또 하루는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런 소낙비를 만나서 바위 밑으로 피하였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얼른 나와 살피는 사이에 바위가 앞으로 구른 적이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친상(親喪)을 박하게 하였기 때문에 임종이 가까워서는 그 아들에게 상사(喪事)를 박하게 하고, 검소하게 하기를 경계하였다. 그의 아들은 집이 넉넉하여 의금(衣衾)과 관곽(棺槨)을 부친의 유언을 넘어서게 되었다. 홀연히 밤에 불이 나서 의금과 관곽을 모두 태우고 그치었다. 당저 정묘년(丁卯年)에 정려를 하사하였다.

 

 

 

 

 

 

 

 

 

 

 

* 효자 이유 정려(孝子 李維 旌閭)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신덕리 270

 

* 가덕마을의 도로변 논 가운데 위치한다. 평탄하게 대지를 조성한 뒤 철책으로 보호시설이 있다. 건물의 구조는 정측면 1칸에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방풍판을 시설하였으며 4면은 홍살을 설치하였다. 8각의 초석위에 원주를 놓았는데 최근에 조성하여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다.

 

내부 중앙 상단에는 현액이 걸려있으며 후면에 행장기가 걸려 있고 비석이 세워져 있다.

현액에는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이유지려 성상12년 계미 명정(孝子 贈 童蒙敎官 朝奉大夫 李維之閭 聖上 十二年 癸未 命旌)라고 각서 되어 있으며 비문도 같은 내용이다.

 

공의 휘는 유(維)요, 자는 상지이며, 본은 공주(公州)이다. 공산 부원군 (公山府院君) 천일의 후손이요, 광록대부(光祿大夫) 사손의 13세손이시다. 천성이 순후하고 독실하여 12세의 어린 나이에도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15세 때 아버님께서 병석에 누우시게 되니, 일 년을 하루 같이 약 시중을 하였다. 겨울철에 아버님께서 붕어를 잡수시고 싶어 하셔서 얼어붙은 냇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울며 기도를 하자 하늘도 효심에 감동하였음 인지 마침내 큰 붕어를 얻어 다려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 장년이 되어 가세가 점차 윤택해지자 날마다 좋은 반찬을 갖추어 어버이께 공양하셨고 부인 파평 윤씨 또한 지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봉양하셨다. 순조 13년(1813)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에서 3년을 시묘하셨으며, 또 순조(1817)에 모친 문화 류씨께서 병석에 눕게 되시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를 하셨으나, 효성의 보람도 없이 병환이 위증하기에 이르자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드리니 3일 간을 더 사셨으나, 끝내 돌아가신즉 비통함이 하늘에 닿는 듯 하였다.

 

공은 정조 3년(1778)에 태어나서 현종 13년(1847)에 돌아가셨다. 고종 20년(1883) 9월 임금님께서 세조대왕 능에 행차 하셨을 때 본도 유생들이 주상님께 공의 효행을 상소하였고 예조판서 조석여가 다시 명에 따라 상소하여 고종 21년(1884) 10월 교지를 내리고 마을 입구에 정문을 세워 모든 사람들은 귀감 하라 했다.

 

 

 

 

 

 

 

 

 

 

 

 

* 좌측의 망경산성과 우측의 운주산성의 모습 //

 

 

* 좌측의 동림산성과 우측의 망경산성의 모습 //

 

 

* 운주산 전경 //

 

 

 

*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

 

 

* 장산리 석탑(長山里 石塔)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142-2

 

* 장명리 3층 석탑은 현재 위치에서 서쪽으로 220m지점인 수신면 장산리 143-3(답)에서 출토되었다.

이곳은 예전 성환역도찰방의 11개 속역인 장명역(長命驛)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장명역은 성환역으로부터 90리 떨어져 있으며 감관(監官) 1명, 수리(首吏) 1명, 마호(馬戶) 10명, 마부(馬夫) 10명, 역장(驛長) 1명, 창사(倉舍) 3칸(間)이라고 성환역지(成歡驛誌)에 기록되어 전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현재의 석탑이 발견된 곳을 발굴하였는데 별다른 유물의 수습은 못하였다고 전한다.

 

예전 수신면 장산리 일대는 청주목의 소속으로 서쪽으로 망경산성과 운주산성이 있고 공주, 부여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동쪽으로 오창, 청주, 진천, 음성으로 통하고, 금강(미호천, 작천)의 상류에 위치하여 육로와 수로의 교통의 요충지에 있었다.

 

석탑의 맨아래 지대석과 우주 하대갑석, 상대갑석은 재질이 서로 같고, 윗부분의 탑신부 우주와 옥개석은 다르게 조합되어 정확한 석탑의 원형을 추정하기가 어렵다. 탑의 전체 높이는 230cm이며, 맨아래 지대석과 기단석의 크기는 124cm x 124cm의 정사각형인데 탑의 밑부분 기단부 하대면석은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대갑석의 크기는 가로 88cm x 세로 88cm의 정사각형 이다. 탑신부의 우주와 옥개석이 얹혀 있는데 아래의 기단부 재질과 육안으로 보기엔 석재의 재질이 다르게 판된되며 2개의 서로 다른 탑이 현재의 형태로 수습되어 임의로 쌓아 놓은 탑이다. 탑신부의 우주는 높이 50cm, 맨 위 우주는 32cm이며 옥개석은 아래 50cm, 위 43cm이다.

 

원래 탑이 발견된 곳의 반대편 동쪽편 마을 입구에 장산리 미륵보살입상(문화재자료 제356호)이 있어 장명역(長命驛) 혹은 이름 모를 사찰, 원(院)의 존재 여부는 연구과제이다. 홍대용 생가와 더불어 조만간 홍대용기념관의 공사가 시작되어 주변 유적에 대한 정밀한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고, 잃어버린 석탑의 부재들이 추가적으로 발견되어 석탑의 전체적인 원형이 밝혀지길 기대해 본다. 마을 여지저기에 잘 다듬어진 커다란 석재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 수신면 장산리에서 본 좌측의 망경산성과 우측의 운주산성...예전 장명역이 있었음 //

 

* 망경산성 //

 

* 운주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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