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 文化財 探訪

천안 문화재 탐방-7...풍세 안동장씨 정려~창원유씨 정려~유후양 정려~연주현씨 경헌사, 현득리의 묘~태학산 봉수대

吾心竹--오심죽-- 2012. 12. 26. 10:04

<<< 천안 문화재 탐방-7...풍세 안동장씨 정려~효열 창원유씨 정려~효자 유후양 정려~연주현씨 경헌사, 현득리의 묘~태학산봉수대 >>>

 

* 충효열 안동장씨 3세 정려...풍세면 가송리 산10-1 // 

 

 

 

 

 

 

 

 

◎ 장핵(張翮)의 충과 그의 아들 사일의 효 그리고 사일의 조카 며느리인 열녀 이씨를 기리기 위한 정려이다. 장력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왜병과 싸우다 전사한 충신이며 아들 사일은 역시 아버지 뒤를 이어 왜병과 싸우다

아버지 묘소로 돌아와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한 효자이고 열녀 이씨는 병자호란 때 남편과 가족을 피신시키기 위해 호병의 앞을 막고 자살한 열녀이다.

 

◎ 송정파의 파조는 22세 휘 翮(핵)조이시다. 자는 운장(雲長)이시고 벼슬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지내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맞아 수차례 싸워 승리하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전사(戰死)하니 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兵曹)참판(參判)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증직(贈職)되시었다. 아버지는 21세 순경(舜卿)이신데 부호군(副護軍) 이시고 할아버지는 20세 훈(訓)이신데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내시었고 曾祖께서는 19세 득기(得紀)공이요 대호군(大護軍)으로 목사(牧使)를 지내시었다. 정사이등공신 장양공 철조(哲祖)가 6대조가 되시니 功臣家門에서 태어 나시었다. 공의 묘가 천안 풍세면 두지골 후록에 모시고 그 자손들이 풍세면 송정부락에 450여년 이어 살아오니 이로써 송정파라 이르게 되었다.

 

* 안동장씨삼세 충,효,열전(安東張氏三世忠孝烈傳)

 

1592년 壬辰 4월에 왜군이 소서행장(小西行長) 휘하일진(麾下一陣)을 선두로 부산에 上陸하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의 후속 부대가 뒤따라 조선을 침략하니 왜적의 수가 15만이나 되었다. 갑작스레 왜군을 맞아 조선의 관군들이 나아가 분전(奮戰)을 하였으나 파죽지세로 달려드는 적의 위세에 밀려 20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宣祖는 평양(平壤)을 거쳐 의주(義州)끼지 몽진(蒙塵)을 하여야 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할 때 천안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집에 내려와 막 삼년상을 마친 장핵(張翮)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때에는 부모의 상(喪)을 당하면 관직을 벗어나 삼년을 채울 때까지 집에 있는 관례가 있었다) 이분이 바로 義兵將 忠臣公 이시다. 먼저 공의 집안을 살펴보면 15세 사길(思吉)조가 태조조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이신데 공의 7대 조이시고 16세 哲祖가 정정조 정사이등공신(定社二等功臣)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6대조이며 17세 영변부사(寧邊府使) 치경(致卿)공이 5대조 가되시고 18세 갑산군수 진충(進忠)가 고조이며 19세 大護軍 득기(得紀)조가 증조부가 되시고 20세 할아버지는 內禁衛將 훈(訓)공이고 21세 순경(舜卿) 부호군(副護軍)이 아버지시니 대대로 관직(官職)을 이어오는 명문가(名門家)에서 태어나시었다. 공께서 1583년 계미(癸未)에 35세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에 임명된 무관(武官)이었다. 창졸간(倉卒間)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이 위태로워지자 나라의 록(祿)을 먹은 武官이 할 일이 무엇인가 분연(奮然)히 일어나 의병(義兵)을 모집하고 500여 軍士로 그해 10월부터 충청도 죽산(竹山)과 진천(鎭川)에 陣을 치고 왜적과 교전(交戰)하여 수차 많은 적병을 격살(擊殺)하는 전과를 올리었다. 다음해 3월18일 왜군과 치열한 전투 중에 평소 아끼고 사랑하던 부장(部長) 박병(朴炳)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니 (박병은 외종으로 과거에 합격하고 아직 보직을 받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던 출신(出身)이었다) 그의 시신(屍身)이라도 고향으로 옮겨 묻어주려고 말에 실어 오려는데 잠복하고 있던 적병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즉시 옷을 벗어 손가락을 잘라 사국(死國)아라 혈서를 써 깃발을 세우고 달려드는 적병들을 베었다. 싸움은 오랜 시간 계속되고 하나가 쓰러지면 또 하나가 달려들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기진하여 마침내 장열히 전사하시니 같은 마을에 단옥근(段玉根)이란 사람이 이를 목격하고 도망쳐 달려와 본대로 이 비보를 전했다. 참으로 원통(寃痛)하고 애석(哀惜)한 일이었다. 1706년 숙정32년 의병장 장핵의 충절정려(忠節旌閭를 세우라 命이 내리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추증(追增)되시었다.

 

아버지의 전사소식을 장자 사일(士逸)이 들었다. 사일은 19살로 힘이 장사(壯士) 이었으니 200근이나 되는 돌을 번쩍 들어 올리고 매우 용맹(勇猛)하였다. 아버지 잃은 슬픔을 뒤로 미루고 남은 의군을 수습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怨讐) 나라의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일어났다. 사일공은 나라위해 죽겠다고 맹서하고 부인의 옷을 속에 입고 또 비단치마로 허리띠를 만들어 띠고 가족과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이것으로 표를 삼아 나의 시신(屍身)임을 알고 찾아 묻어 다오” 하였다. 공은 부친의 상중(喪中)이라 검은 상복(喪服)을 입고 군사(軍士)를 지휘하였다. 공의 행적(行蹟)은 1593년 5월21일에 청도도원수(靑道都元帥) 권율장군(權慄將軍)이 보낸 답신에서 “장핵이 전사한 것이 슬프다. 장사일이 복수 하겠다는 뜻을 가상히 여긴다. 와신상담(臥薪嘗膽)마음을 다하라.”하였다. 이로서 확실한 증거가 된다. 공은 왜적(倭敵)을 모두 베고 아버지 따라 전사하려고 결의(決意)했었다. 그러나 왜적은 멀리 달아나고 없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아버지께 죄인이라 생각되어 묘소 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 사리를 하며 매일 통곡하다가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가고 마침내 병이 나고 일어나지 못하고 1595년 을미(乙未) 9월1일 아버지를 따라 이 세상과 하직 하였다. 공은 통사랑(通士郞) 행 군자감(軍資監) 참봉(參奉)이시고 향천(鄕薦)으로 1743년 영조 19년에 효행(孝行)의 정려(旌閭)를 받았다.

 

* 열녀 이씨전(烈女 李氏傳)

이씨는 양령대군의 후손(後孫) 천안 대동(大東) 사람 이복립(李復立)의 딸인데 타고난 性品이 지극히 孝誠스러워 정성을 다하여 父母를 섬기다 21살에 가선대부(嘉善大夫) 張 翮의 손자 장한(張漢)에게 시집을 갔다.

시아버지 장사준 훈련원직장(訓練院直長)이 임시 목천에 가서 살게 되자 따라가 시부모를 친부모처럼 精誠을 다해 섬기었다. 가난한 살림에 父母를 奉養하기 어려우면 머리털을 잘라 팔아서 음식을 장만하고 언제나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어 아무도 모르게 하였는데 일년이 채 안되어도 머리가 예전같이 길게 자라니 그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기이하게 여기고 지극한 효성 때문이라 말했다. 이렇게 하기를 10년이나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토굴에 숨어 밥을 짓고 있을 때 갑자기 적병(敵兵)들이 나타나 숨을 죽이고 있는데 젖먹이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 하였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밖에 들리면 시아버지와 남편이 잡혀 가게 될 터 인지라 아이에게 급히 젖을 물리고 젖으로 아이의 입을 눌러 막았다. 낌새를 안 적병이 굴 안으로 들어와 큰칼로 남편을 내려치려는 순간 이씨가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몸으로 남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여인에 주린 적병은 이씨를 보고 겁탈 하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여 이씨를 끌어안으려한다 이때이씨가 지기(知機)로 시아버지와 남편을 멀리 피하도록 하고 시간(時間)을 充分이 보낸 뒤에 칼을 꺼내 자결 하였다. 비록 村婦로 깊은 學文은 안했을 것이나 시부모를 供養하고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식을 버리고 自己의 生命을 아낌없이 바친 烈女이었다.

 

[열녀 이씨의 묘비]

어찌 이일이 萬世에 귀감(龜鑑)이 아니리요 1637년 인조 15년에 열녀이씨(烈女李氏)의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명이 내리었다.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송정리 수령 300년은 넘었을 느티나무 십여 그루 숲에 고색(古色)짙은 충효열삼세 정문 어찌 안동장문의 자랑 만이겠는가 悠久한 歷史와 함께 찬란(燦爛)히 빛나리라.

 

* 장씨삼세정려비판후(張氏三世旌閭碑版後)

天有三光日星月 하늘에는 해 달 별세가지 빛남있고. 人有三綱忠孝烈 사람에겐 충효열 세 가지의 강령 있네. 得一於期輝宇宙 이환한 우주에서 하나를 얻었는데 何況全家並綽楔 집안이 온전하고 정려를 세움에야

億昔張公舊義旌 옛날 장공 의기를 떨치던 때 생각하니 板蕩方識誠臣節 판탕하여 바야흐로 신하 정절 알겠네. 胡蝶陳輕初破膽 호접진 깔보다가 간담이 녹았으니 餓鬼旌高意流血 아귀의 깃발 높아 결국 피를 흘렸네!

空鞍白馬歸悲鳴 빈 안장 백마만 슬피 울며 돌아가니 有子號天不反兵 하늘보고 울며 병기 돌이키지 않았네. 先軫如生感狄人 선진이 살아 있는 듯 적인이 감응 했고 灌夫獨出驚吳營 관부홀로 나서자 오 병영 놀랐었지.

殘兵鳥散可柰何 패잔병들 흩어지니 어찌해야 좋을까 天意或令賢人生 하늘은 조금이라도 현인이 살게 한다네. 髮白人間商枕魂 백발의 인간으로 오히려 죽었으니 山靑四時間哭聲 푸른 산 사시사철 울음소리 들리네.

嗟嗟孝子錫爾類 애달다 효자에게 길이 복을 주리니 少婦居貧能養志 며느리 가난하나 능히 뜻 기르도다. 截髮尋常換瀡滫 머리털 자주 잘라 부모 음식 마련 하니 半月梳頭琁委地 반달 같은 얼레빗 땅 바닥에 뒹구누나.

聞說倉黃虜使躁 듣자니 급박히 오랑캐 피하면서 崇禮門前貼靑子 숭례문 앞에다 청자를 붙였다네 廟社徑向甲津口 조정은 지름길로 갑진구 향했었고 香祝己下開元寺 향축은 이미 개원사에 내려왔지

紅纓笮袖彼何人 홍영의 좁은 소매 저들은 누구인가. 不辭濺血膏車輪 피뿌림 걱정 않고 수례는 살아졌구나. 幾處男兒猶苟活 어느 곳 남아들은 구차히 살았지만 如今巾幗能成仁 지금의 여인네 능히 仁 이루었네.

列朝幖揚勵世敎 조정에서 드날리어 世敎로 권면하고 諸公大筆扶彛倫 諸公이 큰 문필로 인륜을 떠받들리. 俄醉作歌貽雲孫 내 취해 노래 지어 雲孫에 주노니 淸風百世吹衣巾 淸風은 百世도록 衣巾에 불었으면.

<출처 : 안동장씨 중앙대종회, www.andongjangc.com/34_21.htm >

 

 

 

 

 

 

 

 

 

 

* 풍세면 남관리...숭인문 // 

 

 

 

 

 

 

* 효열 창원유씨 정려...풍세면 남관리...공사마을 // 

 

 

 

 

 

 

 

 

 

 

 

 

 

 

 

 

 

 

 

 

 

 

* 효자 유후양 정려 ...풍세면 보성리 산1-2 // 

 

* 유적현황 : 보성마을 입구에서 북서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정려 건물은 8각의 고추주석에 원형의 기둥으로 맛 배 지붕으로 되어있는데 최근에 중수한 것으로 확인되며

홍살을 설치한 2칸의 정문으로 내부의 현액에

효자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유후양 지문

(孝子 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副摠管 兪後揚 之門)

효자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 유응채 지문

(孝子 資憲大夫 同知中樞府事 兪應采 之門)이라는 각서가 있으며 이는 상지십년(上之十年)에 임금이 명으로(命旌)세웠다는 내용을 아울러 병서하고 있다. 정문의 주인공인 후양은 정랑 언겸의 종손이다. 본관은 창원유씨.

 

유복자로 태어나 자라서 선친의 묘소를 밀리(密邇)하여 아침 저녁으로 성묘하되 풍설을 피하지 않기를 늙어 움직일 수 없을 때 까지 하였다. 모친을 지성으로 봉양하여 밤마다 문안드리고, 모친 앞에서는 짐승들과 종복도 꾸짖지 않고 항상 안색을 웃는 낫으로 하였다. 부친의 기일을 당하면 애통해하며 통곡하기를 초상(初喪)때와 같이 하니 이웃 사람들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모친의 뜻을 받들어 외조부모를 모셨는데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어머니 섬기듯 하였고 국상(國喪)에는 아침저녁으로 망곡(望哭)하고 3년 동안 소식(素食)하였으며 국기(國忌)를 당하면 목욕재계 하고 3일간 소식하였다. 사부(師傅)의 상을 당하여는 심상(心喪) 3년을 행하고, 벗이 죽으면 3일 동안 좋은 음식을 하지 않았으며, 친족에 화목하고 이웃에 후덕하여 언행이 효제(孝悌)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 연주현씨 경헌사...풍세면 용두리 // 

 

* 충남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용정리 640-1(태학산로 302-7), 산3-2

 

* 연주현씨 시조 경헌공(景憲公) 현담윤(玄覃胤)과 그의 세 아들 현덕수(玄德秀), 현이후(玄利厚), 현덕유(玄德裕)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3월1일과 10월1일 두 차례에 걸쳐 충남 천안시 풍세면 용정리 경헌사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시조 : 현담윤(玄覃胤)은 본래 평안도 연주 출신으로 고려 의종 때에 장군을 지내고 명종 때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의 봉군지명(封君地名)인 연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연주(延州)는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고호(高號)이며, 영변군은 영주(迎州)와 무주(撫州)의 합명(合名)이다. 영주는 본래 고려 때의 밀운군(密雲郡)인데 670년(광종 21) 연주(延州)로 고쳐 지주사(知州事)를 두었으며 995년(성종 14) 방어사(防 使)를 두었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연산부로 승격되고 1413년(조선 태종 13) 도호부로 개편되었다.

무주는 원래 고려의 운남군(雲南郡)인데 995년 무주방어사라 하였다가 공민왕 때 태주(泰州)로 이속되었고, 1391년(공양왕 3) 감무(監務)를 둔 후 태종(太宗) 때 무산현(撫山縣)이 되었다. 1419년(세종 11) 연산과 무산을 합하여 영변으로 개칭하고 세조(世祖) 때 연주(延州)를 나누어 운산군(雲山郡)에 속하게 하고,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 영변군으로 개칭되었다.

 

현씨(玄氏)의 시조 현담윤(玄覃胤)은 본래 평안도(平安道) 연주(延州) 출신으로 고려(高麗)의 의종조(毅宗祖)에 장군(將軍)을 지내고 명종(明宗) 때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功)을 세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현담윤(玄覃胤)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시조의 봉군지명(封君地名)인 연주(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현씨(玄氏)의 본관(本貫)은 연주를 비롯하여, 성주(星州)·창원(昌原)·순천(順天) 등 무려 106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현존(現存)하는 본관은 30여 본에 불과하며 이들의 관향도 모두가 시랑공(侍郞公) 현담윤(玄覃胤)을 시조로 받드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자손들이 살았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므로 1747년(영조 23) 정묘보(丁卯譜)를 편수(編修) 할 때 연주 현씨(延州玄氏)로 단일화(單一化) 하였고, 1982년에 간행된 임술보(壬戌譜) 때도 문중(門中)의 합의(合議)에 따라 본관을 연주로 통일(統一)하였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 담윤(覃胤)의 3 형제 중 덕수(德秀)와 이후(利厚) 두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반적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훈공을 세워 맏아들 덕수가 내시지후(內侍祗候)와 안남 부사(安南府使)를 거쳐 경상도 안렴사(慶尙道 廉使)를 역임한 후 신종(神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라 팔거군(八 君)에 봉해졌다가 수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이봉(移封)되어 그의 후손들이 성주 현씨(星州玄氏)로 분적(分籍) 하였다.

 

둘째 이후(利厚)는 경상도 안렴사(慶尙道安廉使)를 지내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고, 1186년(명종 16)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덕유(德裕)는 시조의 셋째 아들로 이부(吏部)와 예부(禮部)의 시랑(侍郞)을 거쳐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나갔다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후 대사공(大司空)에 이르러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져서 그의 후손들이 창원 현씨(昌原玄氏)로 분관(分貫)하였으며, 성산부원군 덕수(德秀)의 둘째 아들 원미는 영동정(令同正)으로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순천 현씨(順天玄氏)로 분관(分貫)하였다.

고려조에서 무훈(武勳)으로 명성을 떨쳤던 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9세손 규(珪)가 세종조(世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를 지내고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이조 정랑(吏曺正郞)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득원(得元)은 어릴 때부터 기절(氣節)이 탁월하고 효우(孝友) 도한 돈독하였는데, 세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454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민정을 보살폈으나 이듬해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아들 보손(寶孫)과 같이 영천(永川) 묵방동(默坊洞)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종신토록 질의를 지키다가 여생을 마쳤다.

 

한편 빈(彬)의 아들 익수(翼洙)는 가세(家勢)가 빈궁했으나 청백(淸白)하여 처사(處士)로 일컬어졌으며 지릉 참봉(知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노부모(老父母)의 봉양을 위해 나가지 않고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의하면 좌참찬(左參贊) 효생(孝生)의 아들인 석규(錫圭)가 한양(漢陽)에 과거를 보러 갔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제천정(濟川亭)에서 여러 왕자(王子)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있는데 과거를 보려고 몰려든 선비중에 한 선비를 가리키며 불러 오도록 했다.

세조(世祖)는 그 선비에게 예의를 갖추어 손님으로 접대하면서 이름과 사는 곳을 묻고는 좌중(座中)을 둘러보며 "누가 이중에서 처녀 딸을 둔 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먼 길을 오느라고 의관(衣冠)이 해어지고 형용(形容)은 초췌한 그 선비를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효령에게 처녀 딸이 있어 지금 혼인(婚姻)처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하니, 세조(世祖)는 "좋은 사위를 구하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이가 없다'고 했다. 이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가문(家門)이 적합치 않을 것 같습니다' 하니 세조는 "옛날부터 큰 인물은 초야(草野)에서 많이 나왔으니 혼인(婚姻)을 정하기로 하시지요" 하며 권했다. 뒤에 서원군(瑞原君)이 그 선비의 집안을 알아보니 영남(嶺南)에서 문명(文名)을 덜치고 있는 가문이어서 사위를 삼았는데, 그 선비가 바로 석규(錫圭)였다. 그는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청렴하고 공정하게 정사(政事)를 처리하였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밖에도 당대에 이름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손곱힌 상벽(尙壁)이「관봉문답(冠峰問答)」·「관봉유고(冠峰遺稿)」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학자(學者) 약호(若昊), 문장과 글씨에 능했던 덕윤(德潤)·재덕(在德) 등이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고, 한말(韓末)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유명한 병근(炳瑾)과 익철(益哲)이 대(代)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人口(1985년 현재)] 48,154명이 있다. 출처 : 연주현씨 대종회

 

 

 

 

 

 

 

 

 

 

 

 

 

 

 

 

 

 

 

 

 

 

 

 

 

 

 

 

 

 

 

 

 

 

 

 

 

 

 

 

 

 

 

 

 

 

* 태학산=대학산=태화산 봉수대

 

* 천안시 동남구 풍세읍 보성리 산18 /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산31-2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학산(大鶴山) 봉수는 고을 남쪽 18리에 있다. 남으로는 공주의 쌍령(雙嶺)에 호응하고, 북으로는 아산현(牙山縣)의 연암산(燕巖山)에 호응한다고 기록되었다. 조선시대 광여도, 해동지도, 대동여지도, 1872년 천안군 고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태학산(太鶴山)은 대학산(大鶴山), 화산(華山), 태화산(泰華山), 천학산(天鶴山)의 명칭으로도 불리며 천안시 풍세면 용두리(용머리)에서 공주시 마곡사까지 이어진 산으로 한 마리 커다란 용이 기맥하는 형상으로 이해하였다.

백두대간 금북정맥의 태학산은 곡교천(풍서천)의 풍세면 용두리(용머리)에서 시작하여 태학산~태화산~망경산~광덕산을 지나 공주 마곡사까지 이어진 긴 용맥(龍脈) 능선이다. 광덕사와 마곡사의 일주문에 “태화산 광덕사(泰華山 廣德寺)”, “태화산 마곡사(泰華山 麻谷寺)”란 똑같은 태화산이란 명칭의 현판이 걸려있다.

 

* 태학산봉수대는 풍세면 보성리~광덕면 매당리의 경계에 위치하며, 능선 아래 동쪽으로 청룡산성(靑龍山城)이 자무실(매당리)에 위치한다. 천안에서 공주 차현(車峴)을 넘는 요충지에 위치하며 고려산성~세성산성~흑산산성을 바라본다. 촌로(村老)들의 구전(口傳)에 태학산봉수대는 봉호골, 봉화골로 불린다. 다만 풍세면 용정리 뒤편 산정에 절(사찰)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 없어졌다고만 알고 있으며 절터 서쪽 인근 높은 곳이 봉수대 터로 잘못 알고 있었다. 태학산봉수대는 바로 절(사찰) 터라고 불리는 그곳이다. 수많은 석재와 기단석이 무너져 있으며, 기왓장과 토기, 도자기편들이 수습된다. 태학산 봉수대의 유적지의 고고학 조사와 발굴이 필요하며 봉수대의 복원작업도 함께 진행되길 바란다.

 

*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용두리에서 본 태학산(대학산)봉수대...산 정상이 평평한 곳 //

 

 

 

 

 

 

 

<<< 오심죽...천안 문화재 탐방-7...풍세 안동장씨 정려~효열 창원유씨 정려~효자 유후양 정려~연주현씨 경헌사, 현득리의 묘~태학산 봉수대...2012.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