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 文化財 探訪

천안 문화재 탐방-6...신자경 묘~박장원 영정~병천 이복장,김인석,이귀웅,이순학 정려~충효열 강릉김씨 정려~한범이 정려~풍세 남양서씨 정려

吾心竹--오심죽-- 2012. 12. 24. 17:43

<<< 천안 문화재 탐방-6...신자경 묘~박장원 영정~병천 이복장, 김인석, 이귀웅, 이순학 정려~충효열 강릉김씨 정려~한범이 정려~풍세 남양서씨 정려 >>>

 

* 신자경 선생의 묘 //

 

* 신자경 신도비 //

 

 

 

 

 

 

 

 

 

 

 

 

 

 

 

* 신자경 묘...기념물 제69호...천안시 동남구 북면 오곡리 //

 

 

 

 

 

 

 

 

 

 

 

 

 

 

 

 

* 북면 위례성로에서 본 작성산성 //

 

 

 

* 병천 고령박씨 종중 재실 //

 

 

 

 

 

 

 

* 구당 박장원 영정...충헌사 //

 

 

 

 

 

 

 

 

 

박장원(朴長遠) : 1612년~1671년

 

1612(광해군 4)∼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습천(隰川). 직장(直長)을 지낸 훤(烜)의 아들이다.

1627년(인조 5)생원이 되고 163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그해에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외할아버지인 심현(沈誢)을 따라 강화도에 피난하였다.

1639년 검열(檢閱)이 되고, 1640년 정언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3년(효종 4)승지로 있을 때에 남인의 탄핵으로 흥해(興海)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58년 상주목사에 이어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1664년(현종 5) 이조판서가 되고 공조판서에 이어 이듬해 대사헌이 되고 예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뒤 자청하여 개성부유수에 부임, 재직 중에 죽었다.

저서로는 《구당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출처 : 네이트 한국학, 역사와 인물>

 

 

* 병천, 수안이씨 숭조단 사적비 //

 

 

 

 

 

* 수안이씨 이복장, 이번 정려 //

 

 

 

 

 

 

 

 

 

* 수안이씨 이복장, 이번 정려 //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성리 523-4, 523-3

 

* 1. 이복장(李福長)의 생애 이복장의 자는 중수(仲綏)요, 호는 송담(松潭) 수안이씨(遂安李氏)이다. 참판 영견(參判 永肩)의 현손이고, 승지(承旨) 익령(益齡)의 증손이다. 9세에 모친이 질병에 걸리매 사당에 자신이 대할 것을 기축하였으며 단지(斷指)하여 화약(和藥)하니 비로소 회소(回蘇)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가동(家僮) 수 백을 데리고 향린(鄕隣)에 격(檄)하여 창의(倡義)하니 공(功)이 심히 컸다. 이복장이 죽으매 정구(鄭逑)가 그의 유고(遺稿)와 예설(禮設)을 찬집(纂集)하였으며, 생전에는 선비들이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세우고 이복장을 원장으로 추대한 일도 있었다. 벼슬은 예조참봉(禮曹參奉)을 지냈고, 사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그리고 숙종때 충효로 정문(旌門)을 이려(里閭)에 세워 그의 독행(篤行)을 수범(垂範)하도록 하였다. 이복장의 아우 인장(仁長)은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었고, 음사(蔭仕)로 세마(洗馬) 벼슬을 하다가 석성현감(石城縣監)을 지냈으며, 그의 장자(長子) 성준(成俊) 역시 문행(文行)이 있어 도동서원(道東書院)의 원장이 되었다. <출처-천원군지>

 

2. 이복장의 임진왜란 전공(戰功)...천안시 동남구 병천읍 매성리 비문 발췌 //

 

* 이복장(1546~1611, 66세...碑文, 鄭逑 寒岡集 비교 참조함)

...매성리 碑文엔 庚午年 正月 十三日(1630.1.13) 卒...잘못됨-

 

“임진란(壬辰亂)에 솔가동수백(率家僮數百)하고, 전격향린(傳檄鄕隣)하야, 창의수험우 목천동 작성산서(倡義守險于 木川東 鵲城山西)할새 축보성시(築堡城時)에 군학(群鵲)이 주야취성(晝夜聚城)하야 불거십여일(不去十餘日)이라. 적대군(賊大軍)이 승야입성(乘夜入城)에 성중인 곤매부지(城中人 困寐不知)어늘 군작(群鵲)이 지지선동고(知之先動故)로 성중(城中)이 뇌이어적성공(賴而禦賊成功)하야 능제칠읍지민(能濟七邑之民)하다“ ...<鵲城山 李福長 事蹟碑 中>

임진왜란 때에 가동(집안의 노복이나 비첩) 수백인을 이끌고 격문을 이웃고을에 전하여 목천현 고을 동쪽 작성산의 서쪽에 창의(의병을 일으킴)하고, 험준함에 의지해 지키고, 성벽과 보루를 쌓을 때에 까치무리가 밤낮으로 작성산성에 모여들고, 까치들이 10여일 동안 떠나지 않더라. 적(왜군)의 대군이 깜깜한 밤을 틈타서 성안으로 들어오니 성안의 사람들이 피곤에 취하여 모두 잠들어 알지 못하매, 까치 떼가 적군이 침입함을 알고 먼저 날아오르니 성안 사람이 까치의 도움에 힘입어 왜적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까치무리로 인하여 일곱 고을의 백성들은 능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작성산 임복장 사적비 중에서>

 

3. 이번(李潘)은 복장(福長)의 손자이다. 장성 하여는 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나이 어려 상복(喪服)하지 못하였음을 죄인으로 자처하여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사람과 더불어 즐거워하지도 않았다. 숙종 때에 와서 정문을 세워서 그 효성을 칭송하고 공의 행실을 귀감 하도록 하였다.

 

* 寒岡先生(鄭逑-정구,1543~1620, 78세) 別集 卷之二 雜著

五先生 禮說分類 跋

余於癸卯春(1603년)。在湖西之木州。亡友李福長仲綏勸令類輯諸先生論禮。以便觀覽。且招呼旁近士子十五餘員。乘筆助役。纔半月而草本成焉。仲綏又欲爲之入梓。余以此事。本爲老病便考。何至刊刻傳播。且草率苟簡。尤不合輕出。力止而停之。投置巾衍中。未幾。余還嶺南。而仲綏下世。辛亥秋(1611년)。星山士友輩。請遂凈寫。余仍敍顚末而弁其首。甲寅(1614년)春。家僮失火。滿架書冊。盡入灰燼。而此書亦不保。徐思遠行甫宋遠器學懋共勉重輯。而余旣遭長子之喪。又遘風痺之疾。憊臥床蓐。與死爲鄰。然而一念猶未忘也。朋徒往來。或寫或校。至于累年而功今始訖。此禮設編次之前後曲折也。辛勤則已甚。而取舍之舛則恐不免焉。豈不爲可懼。而回思癸卯。忽已十有六載矣。仲綏行甫學懋皆不及覩。俯仰之間。悲感亦係之矣。玆用追記。以備後日之有攷云。戊午(1618년)秋九月丁酉。逑。識。

 

* 이복장 정려에서 본 동성산성(구리성이)...삼한시대 농성으로 추정 //

 

 

 

 

 

 

 

 

 

 

* 효자 김인석 정려(孝子 金仁碩 旌閭)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 648-1 (봉항로 784-4)

 

* 유적현황 : 병천리 시장에서 풍산공원묘지 쪽으로 약 9km 정도 들어가면 봉항1리 풍산공원입구 길 옆 동쪽으로 약 2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정려는 예전의 담장을 헐어내 새로이 잔디를 조성하였으며 정 측면 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방충판을 설치하였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으며 8각의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다. 내부 중앙에는 현액이 걸려 있는데,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김인석 지문 상지 18년 신사 4월 일 명정(孝子 贈 童蒙敎官 朝奉大夫 金仁碩 之門 上之 十八年 辛巳 四月 日 命旌)라고 쓰여 있다. 김인석(金仁碩)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에 만뢰산 오르며 하느님께 빌었는데 밤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길 좌우에서 호위해 주었다. 인석이 죽으니 한 떼의 까마귀들이 상여가 묘지에 이르기까지 날아왔다가 장례를 마치자 날아가 버렸다. 권준(權晙)이 행장(行狀)을 정리하여 조정에 알리고 호랑이도 부자(父子)의 인(仁)에 감동했고 까마귀 떼의 일도 효에 감동한 소치라고 하였다. 그의 손자 경손(慶孫)도 또한 효행이 있었다.

 

천안실록엔, 까마귀와 호랑이도 감동한 효자 김인석(金仁碩)은 본관(本貫) 경주(慶州)로 영조 11년(1735)에 김지(金砥)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석은 어려서부터 고결한 성품과 모든 행동이 착하며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모았다. 인석의 지극한 효성과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38년(1762)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인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약을 다려드리면서 간호하기에 심혈을 기울여 그 효성에 마을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은 차도가 없이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인석은 약을 다려 간호하면서 밤마다 만뢰성(萬賴城)에 올라가 아버지의 병환이 쾌유되도록 기도를 올렸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어, 아버님의 병환을 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직도 창창한 춘추시온데 병마에 신음하고 계시니 이 어인 일입니까. 천지신명이시여, 천지신명이시여......”하고 목메어 흐느끼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마니 그 구슬픈 울음소리는 모든 사람의 구곡만장을 메이는 듯 하였다. 삼라만상이 고이 잠든 깊은 산속에서 거의 울음소리는 끊이는 듯하다가 이어지고, 이어지는 듯하다가 끊어졌다. 그러다가 그는 피로와 오열에 지쳐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지 그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삼경이 넘어 있었다. 캄캄한 숲 속의 밤은 깊을 대로 깊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으나 아버지의 병환을 생각할 때 일각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가려고 사방을 둘러보니 큰 호랑이 두 마리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인석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눈을 휘둥 거리며 살펴보니 호랑이는 순한 송아지처럼 좌우에서 꼬리를 흔들며 인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호랑이는 말을 못할망정 꼬리를 흔들며 인석을 보호하겠다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석은 좁고 험한 산길을 두 호랑이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집에까지 돌아왔다. 이러니 사람들은 인석의 출천지효(出天之孝)에 호랑이가 감동하여 보호하여 준 것이라 하여 더욱 그를 추앙하게 되었다. 이토록 인석의 지극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천명을 다 했던지 그의 아버지는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남달리 효심이 지극한 인석은 상여를 붙들고 목이 터지라고 호곡하는 모습은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이지만 상여가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어디선지 별안간 검은 까마귀 한 떼가 날라 와 상여를 에워싸는 것 이었다. 까마귀 떼가 상여를 에워싸고 나서야 비로써 상여가 출발하여 장지에 이르러 하관(下棺)을 마치니 비로써 까마귀 떼는 사라졌다. 까마귀는 원래 반포조(反浦鳥)라 하여 효(孝)를 아는 새로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왜냐하면 까마귀는 새끼가 처음 태어나면 어미 새가 60일 동안 먹이를 물어다 먹이고, 새끼 까마귀가 자라면 60일 동안 먹이를 물어다가 어미 까마귀를 봉양한다는 전설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포조(反浦鳥)는 효자의 상징어로 쓰이며 반포보은(反浦報恩)이란 말도 있게 된 것이다. 인석의 효행은 이렇듯 호랑이나 까마귀 등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까지 깊은 감동과 행동의 호응을 보여주고 있는 것 이다. 인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1년 후며, 어머니 창씨(倉氏)가 돌아가신 후 6년째 되는 해인 영조 49년(1773)에 불과 38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효성이 세상에 이미 진동하고 있었음으로 그 해에 정려를 명하고 교지(敎旨)가 내렸다. 천안시 병천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차량이 겨우 통하는 좁은 산길을 약 8km정도가면 봉항리(鳳項里)에 봉암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두메 마을의 입구에 깨끗이 단청된 효자 정문이 우아한 기품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것이 김인석(金仁碩)효자의 정문이다.

<출처 : 국봉 김종식 제공, 천안향토사학회>

 

 

 

 

* 효자 이순학 정려(孝子 李順鶴 旌閭)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 산147

* 병천에서 풍산공원 쪽으로 대략 15분 달리면 풍산공원 입구 북쪽 산 능선에 2기의 정문이 있는데 그 중 산 밑 북쪽의 정문이다. 정문의 주변은 철책으로 보호시설을 하여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으며 곁에 비를 세웠다. 정문은 정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좌우 측면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고 하단이 4각으로 된 8각의 고주초석위에 원주를 세웠다. 내부 중앙에는 홍살문 형식으로 현액을 걸었는데 현액에는

효자 통정대부 이순학 지문 옹정 칠년 기유 윤칠월 일 명정(孝子 通政大夫 李順鶴 之門 雍正 七年 己酉 閏七月 日 命旌)라고 쓰여 있다.(옹정7년, 1729년 : 영조 5년)

이순학(李順鶴)은 부모가 병고를 겪으면 목욕제계(沐浴齊戒)로 하늘에 대신하기를 정성을 다하여 빌고 손가락의 피를 내어 부모의 생명이 천수를 다 하였다. 

영조(英祖)때에 와서 비로소 정문이 세워지니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목천현 근동면 소근리에 있었다(현재로는 병천면 봉항리 이다).

< 출처 : 국봉 김종식 제공, 천안향토사학회 >

 

 

 

 

 

 

 

 

* 효자 이귀웅 정려(孝子 李貴雄 旌閭)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 800-2, 801번지

 

* 봉항리에 있는 이 정문은 이순학의 정문과 30m 사이로 마주하며 마을의 야산 아래 밭 가운데에 잔디를 입혀 대지를 조성 한 뒤 세웠다.

정려는 정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좌우 측면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고 8각의 고주초석위에 원주를 세웠다. 내부 중앙에는 홍살문 형식으로 현액을 걸었는데 현액에는

효자 병절교위 행 용양위부사과 이귀웅 지문 옹정 칠년 기유 윤칠월 일 명정(孝子 秉節校尉 行 龍讓衛副司果 李貴雄 之門 雍正 七年 己酉 閏七月 日 命旌) 라 쓰여 있다. (옹정7년 1729년, 영조5년)

 

이귀웅(李貴雄)은 아버지의 병에 기(氣)를 입으로 빨아 쾌유(快瘉)시켰으며 어머니 병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소생하였다. 영조(英祖)때 정문이 세워지니 목천현 근동면 소근리에 있었다. (현재로는 병천면 봉항리 이다).

 

< 출처 : 국봉 김종식 제공, 천안향토사학회 >

 

 

 

 

 

 

 

 

 

 

 

 

 

 

 

 

 

 

 

 

* 효자 한범이 정려(孝子 韓範履 旌閭)

*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성리 산39-1임

 

* 병천리에서 매성리로 들어가는 도로변의 동향 사면 야산 기슭에 위치한다.

 

정려는 시멘트 기단 위에 조성하였는데 정면,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였으며 방풍판을 하였다. 4면은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초석 없이 원형의 석주를 세웠다.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에는 현액이 걸려있는데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 한범이 지 정려 함풍 5년10월 일(贈 朝奉大夫 童蒙敎官 韓範履 之 旌閭 咸豊五年十月 日)라고 쓰여 있다.

 

1990년 4월 29일에 준공된 이 정문은 초석 없이 원형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보를 얻고 기와를 올린 옛것을 흉내 낸 현대식 정문이다.

 

* 효자 한범이는 부모의 말씀을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고 부모 공양을 우선하여 조석으로 부모님 입에 맞는 음식을 갖추었으며 부모 병환 시엔 하늘에 대신하기를 기도하며 잠시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하여 두 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소생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6년이나 시묘를 하였고 집이 가난하여도 기일엔 7일전부터 목욕재계 하고 성묘 후에 제사를 모시고 나이가 들으매 후학 들게 정성을 다하여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고 자식들과 동등하게 대하였다.

 

목천의 방백과 유림들이 상소하여 철종 6년(1885) 별세 8년 후 조정에서 교지를 내렸으나 가세가 어려워 세우지 못하고 135년 후 한상운 한상옥 형제분과 종친들의 노력으로 정문을 세워 후세에 그분의 부단한 인품과 덕행 그리고 효행을 귀감하고 있다. <출처: 국봉 김종식 제공> 

 

 

 

 

 

 

 

 

* 사농 청주한공 동수 찬양비...효자 한동수 찬양비 //

 

 

 

 

 

 

 

 

* 충효열 강릉김씨 정려(忠孝烈 江陵金氏 旌閭)

*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도원리 산 3-3

 

* 충효열문이란 현액이 걸려 있는 이 정려는 병천시장에서 풍산공원 방면으로 자동차로 5분여 가다보면 도원리 입구란 큰 이정표 에서 우회전하여 가면 큰 다리를 건너 옆에 강릉김씨 종중소유의 백석탄 팔각정을 지나서 2층으로 되어있는 강릉 김씨 종친회 사무실 앞에다 차를 세우고 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있는 이정문은 정 측면 각 1칸의 맞배지붕 형태의 정려는 최근에 새로이 단장한 것으로 기단 부를 시멘트로 말끔하게 정리한 상태이고 주변은 잔디로 말끔하게 단장하였다.

전면에는 충효열문이라는 큰 현판이 걸려있다. 정려 내에는 열녀와 충신 그리고 효자의 현액이 걸려 있는바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열녀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통훈대부 사직서령 김광열 처증 정부인 창영성씨 지문 (烈女 贈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行 通訓大夫 社稷墅令 金光烈 妻 贈 貞夫人 昌寧成氏 之門)

 

충신 효자 증 순충겸의 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원군 행 통훈대부 제용감 봉사 김철명 지문 (忠臣 孝子 贈 純忠兼義 補祚功臣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五衛都摠府 都摠管 東原君 行 通訓大夫 濟用監奉事 金哲命 之門)

 

효자 통정대부 행 서산군수 홍주진관 병마첨절제사 김도혁 지문(孝子 通政大夫 行 瑞山郡守 洪州鎭管 兵馬僉節制使 金道爀 之門)이라 적고 있다.

 

김철명(金哲命)은 본관이 강릉이며(本貫 江陵)이며 벼슬은 제용봉사(濟用奉事)에 이르렀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아버지 이조참판 광렬(吏曹參判 光烈)을 모시고 피난을 가다가 임진년 5월 11일에 왜적을 만났다. 왜적이 먼저 그 아버지를 칼로 치려 하니 철명(哲命)은 몸으로 아버지를 가리고 대신 맞아 죽었다. 이 소문이 조정에 알게 되어 이조판서를 증직(吏曹判書 贈職)하고 동원군(東原君)에 봉하며 효로서 정문을 세웠다. 그리고 사실들을 삼강실록에 기록하여 모든 국민들에게 효를 귀감 하도록 소개하였다. < 출처 : 국봉 김종식 제공, 천안향토사학회 >

 

* 김도혁은 억울하게 죄를 얻어 유배된 아버지에게 10여년간 공궤하며 조정에 혈서로 상소를 올리고 좌의정대감 송인명(宋寅明,1689~?) 집 앞에서 여러 달 동안 아버지를 풀어줄 것을 애원하여 결국 아비의 죄를 사하게 한 인물이다. 정려는 정·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강릉 김씨 후손들에 의해 최근 단장되었다.

 

 

 

 

 

 

 

 

 

 

 

 

 

* 효자 남양서씨 정려(孝子 南陽徐氏 旌閭)

*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265

 

* 풍세 광덕으로 가다 풍세를 막 벗어나면 들 역엔 송림이 우거지고 아래에 자그마한 정자 있는 곳은 당하마을인데 송림은 풍수의 비보 사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소나무를 심어 우거지면 마을에 우환이 없다 하여 조성된 것으로 일인들이 소나무를 베어내려 할 적에 동리 주민들이 결사 반대하여 보존 되어왔으나 근자에 이르러 토지 소유자들이 그늘 된다하여 베어버려 많이 없어진 것을 시에 건의하여 정자를 세우고 소나무도 옮겨 심고 해서 이제는 제법 송림이 되었다, 송림 맛은 편 도로변에서 서쪽으로 5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정려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방풍판이 설치되어있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으며 사각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다. 내부에는 3매의 현액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은

효자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 서충필 지려(孝子 折衝將軍 行 龍讓衛副護軍 徐忠弼之閭)

효자학생 서충좌지려(孝子 學生 徐忠佐 之閭)

효자 통덕랑 서한장지려(孝子 通德郞 徐漢章 之閭)라고 되어있다.

 

효자 서충필(孝子 徐忠弼)의 자는 언직(彦直)이니 관향은 남양(南陽)이다. 부친 질병을 얻어 다년간 고생하며 병상에 누워 있었다. 공이 둘째 아우 충좌(忠佐)와 더불어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였다. 병이 위독하면 대변을 맛보아 병의 깊이를 살피었다. 그 부친이 고질병을 지니고 8순에 이른 것은 오직 아들 삼형제 효성의 소치이다.

부친이 돌아가심에 장예와 제사를 모두 예문을 따랐으며 죽으로 3년을 살았으며 애훼통곡(哀毁痛哭)하여 뼈만 남았다. 3년 탈상 후에도 집에 제당(祭堂)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약식 제사를 받들어 나이 들어 음직일수 없을 때까지 지성을 더하였다. 어머니 원씨(元氏)도 88세의 나이로 임진란(壬辰亂)에 피난할 때 널판으로 가마를 만들어(板?) 모시고 갔으며 , 우애가 지극하여 마을에서 존경하는 대상이 되니 방백(方伯)이 일향의 이 같은 사실을 감사(監史)에게 전하고 조정에서 논의되어 정문을 세우게 되었다.

 

효자 서충좌 (孝子 徐忠佐)의 자는 경직(敬直)이니 적순복위(迪順福尉) 혼(混)의 아들이며 효자 충필(忠弼)의 아우이다.

충좌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하고 올 곳어 부모를 섬기매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효제(孝悌)로서 극진하였다. 선조는 4년 신미(辛未)에 어머니 원씨가 병을 얻어 고생하며 고통이 심하니 충좌는 아버지가 병을 얻을까 염려하여 형인 충필로 하여금 업어 딴 곳에 모시고 있게 하고 홀로 어머니를 모시었다. 주야(晝夜)로 간병하더니 충좌도 어머니와 같은 병을 얻어 눕게 되었는데도 어머니의 간병은 개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어머니 원씨의 병세가 악화되었는데 충좌가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부엌에 나가 칼을 잡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니 차도가 있었다. 이는 형제의 효행을 하늘이 굽어보았다 하겠다.

 

서한장(徐漢章)의 자는 우천(于天)이며 천안군 원일면 사람이다. 장령(掌令)을 지낸 정연(挺然)의 아들이요 효자 충필과 충좌(忠弼과 忠佐)의 종손(從孫)이다.

아버지가 기절함에 오른쪽 4째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 어머니를 봉양함에 말씀을 한번도 거스른 적이 없고 음식도 달고 맛 나는 것은 어머니를 우선하였다. 또한 매일 일찍 일어나서 사당(祠堂)에 배례(拜禮)하고 저녁때 또한 갓이 하였다. 불행하게도 어머니의 병을 얻었을 때에도 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더니 효험이 있었다. 상(喪)을 당하여 겨울에 오래 머문 것이 병이 되어 상복을 벗은 후 5월에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38세요. 때는 숙종4년 무오년(肅宗 四年 戊午) 이였다.

 

그 후 18년인 숙종 21년에 순무사(巡撫使) 송광윤(宋光潤)이 장계를 올려 정문을 마을 입구에 세워 사람들은 서한장의 효행을 귀감 하도록 했다. 효행을 널리 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여서 한 가문에 효행의 첩지가 여럿이라 군수 최윤이 감사에게 알리니 선조 7년 이었다. 서충우(徐忠右)는 충필 충좌의 막내 동생으로 형들과 더불어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명나라에서 정문을 내리던 날에 공을 형들에게 미루고 양근(楊根)땅 부근으로 옴 겨 갔다 한다. 조정에서는 해읍(該邑)에 합복을 명하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증직(贈職)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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