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 文化財 探訪

천안 문화재 탐방-8...채주영 정려~고흥유씨 정려~유청신 신도비~이시백 묘~해주오씨 정려~유언 정려

吾心竹--오심죽-- 2012. 12. 26. 16:02

<<< 천안 문화재 탐방-8...풍세 채주영 정려~광덕 고흥유씨 정려~유청신 신도비~이시백 묘~해주오씨 정려~유언 정려 >>>

 

* 효자 채주영 정려(孝子 蔡冑永 旌閭)

*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용정리 71-8...용머리

 

* 유적현황 : 용머리 마을 입구 슈퍼 있는데서 산 아래 마을 쪽 으로 100여m 떨어진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다.

정려는 정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였으며 방풍판을 하였다.

4면에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8각 고주초석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의 내부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에는

효자 통덕랑 채주영 지려 갑인 정려(孝子 通德郞 蔡冑永 之閭 甲寅 旌閭)라고 적혀 있다. 현판도 똑같이 되어 있다. 특별한 전설은 없으며 평상시에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채주영은 평강인으로 보덕 응복의 증손이고, 정언, 종언의 아우로서 호는 재심제(在心齊)이다. 스스로 밭을 갈아 자미(滋米)를 장만하고, 가난을 낙으로 삼으며 책을 읽었다. 노경에 이를수록 더욱 부지런히하여 향민이 추앙하였다. 상(喪)에는 예를 다하고, 제(祭)에는 성을 다하니 심효는 만물이 감동하였고, 각고(刻苦)는 학문의 도의를 깨달았다.

 

채주영은 부친 섬기기에 극진하여 가을에 알밤을 주어다 모아서 구덩이에 묻어두고 저녁마다 서너 개 씩 꺼내어 구워 부친께 드렸는데 밤이 3년간 줄지 않고 계속 있어 이를 이상히 여겨 파보니 쥐 길이 나 있었다. 미물인 쥐도 효에 감동하여 매일 밤을 물어다 쌓아 놓아 밤이 줄지 않았다 한다.

 

 

 

 

 

 

 

 

* 효자 고흥유씨 정려(孝子 高興柳氏 旌閭)

*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산10

 

유적현황 : 광덕면 매당리 당하리에 있는 유청신 사당에서 남쪽으로 충효산 구릉의 동쪽 방향을 다듬어 세워 졌다.

정려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좌우 측면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으며 자연 초석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내부에는 4매의 현액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은

효자 고려 선충동덕 좌리익조공신 삼한삼중 대광 도참의 정승 판의부사 고흥부원군 증시 영밀공 유청신 지려 려조 정려(孝子 高麗 宜忠同德 佐理翊祚功臣 三韓三重 大匡 都參議 政丞 判宜府事 高興府院君 贈諡 英密公 柳淸臣 之閭 麗朝 旌閭)

충신 효자 유명조선국 효충장 적의 협력 선무 원종공신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 행 어모장군 훈련원첨정 유의신 지려 영종 임술 삼월 명정(忠臣 孝子 有明朝鮮國 效忠仗 迪毅 協力 宣武 原從功臣 贈 通政大夫 戶曹參議 行 禦侮將軍 訓練院僉正 柳義臣 之閭 英宗 壬戌 三月 命旌)

효자 학생 유연지려 영종 임술 삼월 명정(孝子 學生 柳淵之閭 英宗 壬戌 三月 命旌)

효자 수의부위 유흥우 지려 영종 임술 명정 당저 기미 삼월 중수(孝子 修義副尉 柳興雨 之閭 英宗 壬戌 命旌 當宁 己未 三月 重修)라고 되어 있다.

 

유청신(柳淸臣)은 고흥(高興)사람으로 문하시랑 평장사 승무(門下侍郞 平章事 升茂)의 아들이며 은청광록대부 평장사 판호부사 상장군 욱(銀靑光祿大夫 平章事 判戶部事 上將軍 昱)의 손(孫)으로 공은 선충동덕 익조공신 삼중대광 도참의 정승 판의부사(宣忠同德 翊祚功臣 三重大匡 都僉義 政丞 判宜府事)를 역임하고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 책록 되었으며, 시호는 영밀(英密)이다.

 

고려 말에 왜적들이 삼남 일대를 침범하여 마을을 어지럽게 하던 어느 날 부모를 따라 왜적을 피하여 가던 중 왜적들이 칼로 그의 어머니를 해하려 하였다. 이에 자기로 대신할 것을 원하니 적이 감동하여 물러가고 말았다. 사실이 조정에 전하여 저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나이 18살에 급제하고 충숙왕(忠肅王)때 원나라에 들어가 마침내 정승(政丞)이 되고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까지 책록(謮錄)하였다. 공은 연저(燕氐-연길)에서 졸하였다. 사우(祠宇)와 정려(旌閭)가 천안시 광덕면 매당3리 에 현존하고 정려가 있는 곳을 충효산 이라 부른다. 전하여 오기를 에 천안의 호도의 종자를 원나라에서 은밀히 가져 왔다고 하나 믿을 만한 자료와 문헌이 없다.

 

유의신(柳義臣)의 자는 언정(彦正)이며 천안 광덕 사람이다. 의신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향당(鄕黨)에 칭송이 자자하더니 선조16년 계미(宣祖16年 癸未1583)에 무과에 급제하며 선조24년(1591辛卯)에는 이진(利津)의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년(壬辰年)에 왜란(倭亂)이 일어남에 전남우수사 이억기(全南右水使 李億祺)는 황급히 관하장사들 에게 왜적을 물리칠 계책을 물으니 의신은 사리에 지당하고 용병(用兵)에 합리한 방책을 상세히 진언(進言)하고, 의신은 선봉장(先鋒將)으로 훈련도 되지 않은 병사들과 함께 가덕포(加德浦)앞 에서 대적(對敵)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서 크게 승첩하여 이에 조정에서 벼슬을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로 올렸다. 의신은 다시 웅천포(熊川浦)싸움에서 또한 크게 승리하니 벼슬을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으로 특진시켜 그 공을 치하하였다. 왜적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다가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이름 높은 한산도 해전(閑山島海戰)에 참전하여 혼신을 다하여 적을 베고 싸우다 불행히 하여 적의 탄환에 맞아 순절(殉節)하면서 그의 아들 연(淵)에게 지휘권을 주었다.

 

연(淵)의 나이는 19세로 약관(弱冠)이나 부친의 소임을 능히 감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공과 훈을(功勳) 책정 할 적에 의신은 선무원종1등공신 호조참의(宣武一等功臣 戶曹參議)를 증직(贈職)하고 부모에게 봉작(封爵)을 내리고 자손들에게 복호(復戶)를 명하였다. 유연(柳淵)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한산도(閑山島)에서 왜적과 싸우다 장열이 전사한 유의신의 아들이다. 연은 부친 의신과 더불어 진중에 있었는데 부친 의신이 진중에서 장졸을 독려하여 왜적을 거의 물리칠 쯤에 적의 탄환에 맞아 진중(陣中)에서 전사 하였다. 연은 부친의 지휘권을 대신하여 장졸(將卒)들을 독려하여 적을 물리치고 부친의 한을 복수 하고 부친의 시신을 반장(反葬)하여, 3년을 여막을 짓고 시묘를 하였다. 부친이 진중에서 왜적의 손에 전사 한 것을 한탄하여 죽을 때 까지 애회통곡(哀懷痛哭)하였다 한다. 영조 때에 와서 정문이 내리고 이언소(李彦熽)가 시장(諡狀)을 올렸는데 잘되지 않았다.

 

유흥우(柳興雨)는 충신(忠臣) 인 의신(義臣)의 손자이며 지(池)의 아들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대단하여서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자르는 효성이 있어서 어머니는 병이 나아서 천수를 하였다. 영조18년(1742년)에 정문이 세워지고 문간공 이희조(文簡公 李喜朝)가 문헌(文獻)을 찬(撰)하고 이언소(李彦熽)가 시장(諡狀)을 지었다. <출처: 천안향토사학회 김종식 제공>

 

 

 

 

 

 

 

 

 

 

 

 

 

 

* 유청신 신도비는 유청신 사당, 모열제(慕烈齊) 아래에 있다. 2개가 있는데 사당 밑에 있는 것은 1965년 재설립한 것이며

도로변쪽에 세워진 것이 먼저 세워진 것으로 목은 이색(李穡)이 유청신 신도비문을 썼다.

 

* 유청신 [柳淸臣, ?~ 1329], 고려 후기의 역관(譯官).

본관은 고흥(高興). 초명은 비(庇). 그는 부곡리 출신으로 선대의 내역도 알 수 없고 고흥을 관향으로 한 것도 유청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려서부터 몽골어를 습득하여 여러 차례 원나라를 왕래했는데, 원나라에서 응대를 잘한 공으로 충렬왕의 신임을 받아 낭장(郎將)이 되었다. 이때 출신지가 부곡이었으므로 그의 관직이 5품을 넘어서는 안 되나 공을 인정받아 3품까지 허가한다는 교서를 받았으며, 동시에 출신지인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은 고흥현으로 승격되었다. 그뒤 국구(國舅)인 조인규(趙仁規)의 추천으로 장군으로 되었는데, 원나라에서 내안왕(乃顔王)의 반란이 일어나자 왕명을 받고 토벌군으로 원나라에 파송되었다. 돌아와서 대장군이 되었고, 밀직승지로 전임되었다.

1297년 동지밀직사사감찰대부로 승진되었으며 요직을 역임하면서 정치적 지위를 높여갔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잠시 선위(禪位)했을 때 광정부사가 되고 그뒤 판밀직사사가 되었다. 그뒤 찬성사로 임명되어 원나라에 억류당한 충선왕의 환국을 위하여 노력했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자 도첨의찬성사판군부사사가 되었다가, 1310년 첨의정승(僉議政丞)이 되고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해 첨의찬성사 고흥군으로 강직되었고,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한 뒤 첨의정승을 맡았다. 1323년 충숙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는데,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그곳에서 심왕당에 가담하여 조적(曺頔) 등과 함께 심왕 고(暠)를 고려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략를 꾸며냈으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立省策動)이 모두 실패로 끝남으로써 고려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 9년간 머물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청신이 심왕옹립운동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 아니고, 다만 그가 역관출신이었다는 이유로 인해 조선의 〈고려사〉 편찬자들에게 천시되어 오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시호는 영밀(英密)이다. <출처-브리태니커>

 

 

 

 

 

 

 

 

 

* 이시백의 신도비 //

 

 

 

 

 

 

 

 

 

 

 

* 이시백의 묘 //

 

 

 

 

이시백 1581(선조 14)~ 1660(현종 1). 정의1581(선조 14)∼1660(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기(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화(廷華)이고, 아버지는 연평부원군 귀(延平府院君貴)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로 증 참판 민(旻)의 딸이다. 시방(時昉)의 형이다.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다음 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이천으로 달려가서 향병을 모집해 길목을 지켰다. 그러나 이괄이 다른 길을 택해 곧바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안현(鞍峴)에서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병마 3,000을 훈련시키고, 유사시에는 십장기(十丈旗)와 방포(放砲)를 신호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정묘호란 때 병마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하기도 하였다. 1629년(인조 7)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죄로 관직을 떠났으나, 곧 판결사가 되었다가 양주목사·강화유수가 되었다. 1633년 병조참판, 1636년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를 겸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맞이했으며,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했고, 다음 해 공조판서에 승진되어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638년 병조판서 때, 척화신(斥和臣)으로서 청의 강압에 못이겨 심양(瀋陽)에 아들 유(愉) 대신 서자를 볼모로 보냈다가 2년 뒤 탄로되어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다음 해 풀려나서 총융사가 되고,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으로 추궁을 받지 않고, 이어 한성판윤과 형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고 원손이 어려 인조와 중신들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을 것을 희망했으나,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46년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휴가를 받아 공주로 성묘 가던 중 호서에 토적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와 토벌을 자원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이미 토평되어 그대로 돌아왔다. 1649년 인조가 불러 술을 대접하고, 또 세자를 소개하면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사람을 팔다리처럼 하니 너도 뒷날 나와 같이 대접하라.” 하며 위로했다 한다. 그 해 5월 효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좌참찬이 되고, 1650년(효종 1) 우의정에 올랐다. 다음해 김자점(金自點)의 모역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우 시방이 그와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자 도성 밖으로 나가 조용히 지냈다. 1652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를 다녀와 언사(言事)로 견책을 받은 조석윤(趙錫胤) 등을 신구(伸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에서 떠났다. 그러나 바로 좌의정에 이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지고, 1655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다시 벼슬에 나왔다. 1658년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 효종이 죽자 윤선도(尹善道) 등이 수원에 능을 정하자고 건의했으나, 그가 교통이 빈번해 적합하지 못함을 들어 여주의 영릉(寧陵)을 택하도록 하였다.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했고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청빈해 빈한한 선비집 같았다 한다.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조익(趙翼)과 교유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 출처 : 한국민족대백과 >

 

* 병자호란(丙子胡亂) 후에 인조(仁祖)께서는 전란 통에 불타버린 창덕(昌德), 창경(昌慶) 두 대궐을 수리하면서 정원의 화초와 수목도 새로운 것으로 단장하게 되었다. 인조는 일찍이 연양의 집 사랑 뜰에 기묘하게 생긴 반송(盤松: 가지가 사방으로 펴지고 멋있게 생긴 소나무)과, 중국에서 들어온 금사냑양홍(金絲洛陽紅)이란 그곳에서도 유명한 꽃나무가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을 궁중으로 옮겨 심으려고 대전별감이 일꾼을 데리고 와서 왕명이라 하면서 이것을 캐어가려 하였다. 이에 연양공이 대전별감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조석을 보장할 수 없는데 임금께서는 어진 이를 구하지 않고 이런 꽃나무를 구하시니 어찌하시려는가? 내 어찌 미미한 한포기의 꽃과 나무를 아끼오리까? 소신은 성덕의 누됨을 두려워하여 감히 드릴 수가 없거니와 또한 이미 군명(君命)을 거역하면서 그 물건을 남겨두는 것은 신하의 도리로서 황송하온 즉, 별감 앞에서 이것들을 없이함이 당연한 도리라 생각하오.” 하고는 톱으로 꽃나무와 반송을 뿌리째 잘라버렸다. 인조께서는 별감의 이 말을 들으시고 처음에는 매우 노했으나 다시 생각해보고 크게 감탄하시어, “연양이 아니면 어찌 이같이 과인을 아끼어 군왕의 허물을 직언하겠느냐?” 하시고 신임이 더욱 융숭하였다. 연양은 이같이 대인의 풍채가 있던 인물이시다. 인조께서 연평 부자를 신임하심이 극진한 이유는 그들의 공로가 컸음도 있겠으나 그 충직함, 직간(直諫)과 극간(極諫)으로 일관되고 남이 감히 하지 못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하므로 성심을 감동케 한 때문이라 하겠다. 어느날 자기 부인이 남편의 위신과 체통을 생각해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방석을 하나 만들어 그에게 갈기를 권했다. 그는 깜짝 놀라며 부인더러 전날 깔던 부들자리를 뜰아래 깔게 하고 그 위에 마주 앉아 말했다. 『이것이 우리가 옛날부터 깔던 것이요 세상이 바뀌는 바람에 어찌어찌하여 나같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위태롭게 여겨지며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로서 망하기를 재촉한단 말이요. 부들자리도 두려운데 하물며 비단 방석이랴』부인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비단 방석을 없애 버렸다고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시백(李時白) 묘지석 : 서(書):김주신(金柱臣) 연대: 숙종44년(1718)

비문은 숙종의 장인인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수곡(壽谷) 김주신(1661~1721)이 썼다. 이시백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 서성장(西城將)으로서 격전을 치르면서도 갑옷 입은 병사가 없다 하여 자신도 갑옷을 걸치지 않고 싸워 모든 병사들이 그를 따랐다. 1649년 인조가 친히 술을 대접하며 세자에게 소개하기를 "내가 이분을 나의 팔다리처럼 하니 너도 뒷날 나와 같이 대접하라."고하면서 위로하였다.

 

 

 

 

 

 

* 이시백의 묘 동쪽...태화산 청룡산성 //

 

 

 

 

 

* 고흥유씨 유명홍 효행비...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금곡리 //

 

 

* 열녀 해주오씨 정려

* 소재지 :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755-3

*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쇠골 또는 금곡의 상뜸 마을

 

* 유적현황 : 광덕면 매당리 쇠골 또는 금곡마을에서 중뜸 마을을 지나 상뜸 북쪽에 위치한 동향 사면의 계곡의 하단부에 위치한다. 이 정려는 밭 가운데를 돌로 기단을 조성한 후에 잔디를 깔아서 지반을 만들고 기단의 위에는 화강석재의 8각 초석을 놓고 원주를 올리고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서 맞배지붕에 홑치마를 하고 있다, 정려의 4면에는 홍살을 둘렀으며, 정려 좌우에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려의 재부 중앙 상단에는 현액이 걸려 있는데

열여 학생 황홍인처 해주오씨 지려 성상28년 10월 일 명정(烈女 學生 黃弘仁 妻 海州吳氏 之閭 聖上二十八年 十月 日 命旌)이라고 각서 되어 있다.

 

<천안실록>에는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안골에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열녀문(烈女門)이 있다. 그녀는 해주오씨(海州吳氏) 오순석(吳順石)의 딸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10여세에 황홍인(黃弘仁)에게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나이 어려서 시집을 갔지만 항상 부모(父母)님이 말하기를 시집을 가면 남편을 믿고 남편을 섬기며 일생을 사는 것이 우리나라 아내의 도리이며 또한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은 남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정성 것 섬기지 못한 그 아내에게 있는 것이 라고 교훈(敎訓)을 받아서 오씨(吳氏)는 시집을 와서 이집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정성 것 가업(家業)에 종사하였다.

 

새벽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곤히 잠든 부군(夫君)이 잠에서 깨어날까봐 방문도 조심성 있게 열었으며 새벽 일찍 부엌으로 나와서 살림을 챙기며 일을 시작하니 가족들이 말하기를 “아기가 벌써 일어났군!”하고 위 사람이 말한 그 말이 이웃마을까지 통용서(通用書)가 되었다 한다. 사람이란 부지런하면 가난이 있을 리 없고 남을 사랑함을 자기의 몸의 귀중함에 비교하면 남과 다투는 일이 있을 수 없다하니 그녀는 한층 나아가서 생각하기를 사람의 몸은 자주 움직일수록 부지런해지고 남과 다투는 일은 자기의 소양이 부족한데서 나온다고 생각하고선 하루 종일 움직여서 집안을 보살피니 집안은 깨끗하고 위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공평하니 위 사람들은 그녀를 가르켜 효부라 하였고 아래 사람들께는 사랑으로 일을 도와주니 그녀를 따르는 아랫 사람들의 수효가 많았었다 한다. 그녀는 부지런히 일하며 단락한 생활을 꾸며 온지 몇 해되던 해 그녀는 19세에 아이를 갖게 되자 집안사람들은 말하기를 착한 아내에게 자식(子息)까지 생기게 되었다고 기뻐했었다. 그녀가 자식을 가짐으로서 더욱 부부간의 정이 두터워지는데 이건 또 어찌된 일일까? 그녀의 부군(夫君)이 병석(病席)에 눕더니 자리에 누운 지 얼마 않되어 죽고 말았다. 하늘같이 믿고 살아왔던 부군(夫君)이 죽으니 그녀의 시름이 얼마나 컷을 것인가 그녀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어째서 나만 남겨놓고 죽느냐고 시신(屍身)을 붙들고 통곡하였으나 이미 죽은 사람이 무슨 대답이 있을 것인가? 그녀는 생각하기를 부군(夫君)이 죽었으니 자기도 따라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안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며 미리 목을 매달아 죽을 장소까지 마련했었다. 밤이 이슥하여 초상을 치른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목을 매달아 죽어서 부군(夫君)의 뒤를 따라야겠다고 큰 대들보에 새끼를 걸쳐 놓고 목을 매달으려고 하다가 언뜻 생각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집 대(代)가 끊기는데 대(代)를 이을 사람이 없구나. 하곤 자식(子息)을 잘 길러서 대(代)를 이어주는 것도 부군(夫君)에게 바치는 사랑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눈물을 머금고 죽기를 그만 두었었다. 부군 황홍인(黃弘仁)이 죽은 다음날에 그는 자식(子息)을 낳으니 그 자식(子息)은 아들이였다. 그녀는 아들을 잘 키워서 집안 대(代)를 이어야겠다고 마치 금을 다루듯 자식을 키워 나갔다. 허나 자식(子息)을 키워서 집안을 일으키고 죽은 부군(夫君)에게 아내로서의 도리를 한다는 것은 그녀의 생각 이였다. 그녀가 아직 젊음에 부군(夫君)이 죽었으니 그녀가 개가(改嫁)하여야 한다고 친정에서부터 들고 일어났다. 불가 20고비의 딸을 그대로 과부로 일생을 마치게 하는 것도 죄악(罪惡)이 된다고 친정집에서 들고일어났으나 그녀의 결심은 개가(改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죽어도 이집에서 죽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고민 하던 중 병(病)이 생기자 그 병을 구실로 독한 주약(注藥) 침염(針炎)을 맞으니 이제는 수족(手足)이 틀리고 음식(飮食)을 바로 분별(分別)치도 못하고 얼굴도 뒤틀려 갔다. 그녀는 생각하기를 아직 나이가 젊으므로 집안에서 개가(改嫁)에 대한 권장과 여러 사나이들의 강폭(强暴)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이런 방법(方法) 밖에 다른 도리(道理)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폐인(廢人)처럼 행세(行勢)하며 앉은뱅이가 되어서 자식(子息)을 키웠다. 그렇다고 자식(子息)이 자라서 며느리를 맞이하는 아들의 결혼식(結婚式)날 그녀는 아들을 불러놓고 말하기를 오늘은 내가 가장 바라던 정일(定日)이니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실을 가져오라고 하고선 그 실을 붙잡고 일어서서 걸으니 그녀는 그날부터 걷기 시작하였다 한다.

한국의 한 여인이 수절(守節)하기 위하여 독한 약을 먹고 몸이 부서져도 아랑곳없이 수절(守節)을 하며 한국의 열녀(烈女)로서의 길을 걸어 왔으므로 나라에서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고종(高宗) 28년에 정문(旌門)을 내리고 유몽(惟夢) 정 인창(鄭寅昌)이 선문(撰文)을 쓰고 열행(列行)을 칭송하며 여기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 태화산 숭모재...모덕사 //

 

 

* 효자 유언 정려(孝子 柳堰 旌閭)

* 소재지 :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565-2번지(하금곡)

 

* 유적현황 : 풍세면에서 광덕면 방향으로 가다 보면 매당리의 하금곡 쇠골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쇠골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조금가면 마을 회관 앞에 큰 느티나무가 있다. 여기에 주차하고 오른쪽으로 다시 걸어서 100여m 들어가면 마을 끝에 있다. 정려는 남동향을 바라보며 세워져 있는데 주변을 철책으로 보호시설을 한 후 시멘트로 기단을 조성하여 세웠다. 정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4면은 홍살을 시설 하였다. 원형의 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내부의 중앙 상단에 현판을 걸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에 건물이 지고, 이웃간 토지의 경계 다툼으로 진입로가 폐쇄되어 간신히 다닌다.

 

효자 통정대부 유언지려 숙묘 9년 계해 십월일 명정 금상 20년 갑신3월초9월일 중갈(孝子 通政大夫 柳堰之閭 肅廟九年癸亥十月日 命旌 今上 二十年 甲申三月初 九月日 中褐)

 

유 언 (柳堰)은 천안 원일면(지금의 광덕면 매당리1구 쇠골 또는 금곡이다) 사람이니 갑오생(甲午)이다. 모친 정씨가 중병이 있었는데 늘 극진히 봉양하였다. 어느 날 모친이 기절해 언(堰)은 망극하여 칼로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니 얼마 후에 병이 나았다. 갑인 8월에 모친이 또 기절하니 기유(己酉)때와 같이 작지주혈(斫指注血)하고, 다음 해 8월에 모친이 또 기절하니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렸으나 모친을 구하지는 못하였다. 언은 애통하여 하여 늘 묘에서 통곡(痛哭)하면서도 돌아와서는 병든 부친께서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여 뜻을 모아 현감에게 아뢴 지 1년여인 계해(癸亥) 10월에 정문을 세워 이곳을 오가는 모든 이에 귀감이 되게 하였다.

 

 

 

 

 

 

 

<<<오심죽...천안 문화재 탐방-8...풍세 채주영 정려~고흥유씨 정려~유청신 신도비~이시백 묘~해주오씨 정려~유언 정려...2012.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