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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문화재 탐방-10...수신 속창리 은행나무~이동표 정려, 응천사~만경사~망경산성~이춘영 정려~장산리 석불입상

吾心竹--오심죽-- 2012. 12. 27.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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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경산 구룡사 입구 //

 

 

* 망경산에서 본 흑성산 //

 

* 수신면 백자리에서 본 운주산성 //

 

 

 

 

* 효자 이동표 정려(孝子 李東標 旌閭)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백자리 332 (백자1길 40)

 

수신면에서 전동면으로 가는 길로 망경산을 바라보며 가다보면 수신면 백자3리 이정표가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서있다. 마을 회관을 지나 좀 가면 응천사(應天祠)란 사우와 외진 곳에 자그마한 정문이 있다. 곳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낸 경주 이동표의 정문이다 . 1992년(癸酉)에 세워진 이정문은 한 칸으로 원형 초석위에 둥근 기둥으로 맛 배 지붕에 방풍판을 설치하였고 사방에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복 향을 하여 지어 젖으며. 중앙에 현판을 하였고 뒤에는 중건기 가 걸려있다.

현판에는 증 사헌부지평 행 동몽교관 은촌 이공 동표 효려(贈 司憲府持平 行 童蒙敎官 隱村 李公 東標 孝閭)각자되었다.

 

천안시 수신면 남쪽 망경산 아래에 증자동(曾子洞)이라는 마을이 있으니 이곳은 은촌 이선생(隱村 李先生)의 유풍이 전해오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세거지입니다. 마을옆 기슭에 응천사(應天祠)는 곧 은촌 선생을 모신 사우이며 그 옆에는 선생의 효행정문(孝行旌門)이 서있다. 선생의 휘(諱)는 동표(東標)이시고 자는 중건(仲建)이신데 천성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극진하여 부모의 뜻을 조금도 어김이 없으셨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서 성현의 글이 아니면 잃지도 않았으며 소학은 물론이고 사서삼경을 익혀 성현의 언행을 실천했다 전한다. 몸소 밭을 갈아 부모님을 봉양하다가 부모상을 당해서는 예의와 법도에 장례를 다하시고, 천안 북면 전곡리에 모신 뒤에는 내외상(內外喪) 6년 동안을 시묘(侍墓)를 하셨다. 깊은 산골인지라 때로는 호랑이가 와서 함께 하였고, 피눈물이 떨어진 곳에는 풀이 말랐다고 합니다. 선생의 지극한 효성과 덕행이 옛날 중국의 증자(曾子)와 같다고 하여 선생이 살던 마을 이름을 바꿔서 증자동(曾子洞)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암행어사(暗行御史)가 풍문(風聞)에 듣고 선생의 여막을 찾아 본 후 크게 감복하여 임금께 알려 숙종(肅宗)께서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셨고, 그 뒤 10년이 지나 향인(鄕人)과 유현(儒賢)들이 다시 천거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追贈)하고 정려를 명하였으나 가세가 빈약하여 정문을 세우지 못하고 지나오다 종인들의 효성으로 1992년 에 세워졌다.

 

○정려 중건기(旌閭重建記)

천안 수신면 남쪽 망경산 아래 증자동(曾子洞)에 정문(旌門)이 있어서 길가에 높이 선 것은 옛날 효자 사헌부 지평 행 동몽교관(孝子 司憲府持平 行 童蒙敎官) 은촌(隱村) 이선생의 정문이다. 선생의 휘는 동표(東標)요 자는 중건(仲建)이니 평리공(評理公) 휘 인정(仁挺)의 후손으로 경주세가(慶州世家) 이다. 효성이 출천하여 어려서부터 혼정진성과 출고반면(昏定震省 出告反面)에 어른과 같이 행하시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시어 행실에 힘쓰시었으며 몸소 농사에 힘써 부모를 봉양하시되 화한 빛으로 조금도 어김이 없으셨다. 효제(孝悌)로 근본을 하고 학문에 길(道)을 정도(正道)로 잡아서 성현의 글이 아니면 보지 않으시고 소학과 사서로 수신(修身)하는 법을 삼으셨다. 부모가 병상에 계실 때 대변을 맛보시고 병의 차도를 증험(證驗)하시며 하늘에 이 몸이 대신 하기를 빌었고 부친상을 당해서는 애통함이 예절에 지나치고 장례 후에는 시묘(侍墓)를 하고 상을 마치니 산소 앞에 무릎을 꿇었던 자리는 확 모양을 이루고 피눈물 떨어진 곳에는 잔디가 말랐다. 묘소가 북면 전곡리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직 때때로 호랑이가 내려와 호위 하였다. 모친상 때에도 전과 같이 하였다. 어사가 듣고 여막을 방문하여 감복하고 조정에 아뢰어 숙종 때에 동몽교관을 제수 하시고 그 뒤에 선생의 덕에는 부족하다 하여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받으셨다. 선생이 항상 증자의 말씀을 복종해서 실천하니 마을 사람들이 선생의 덕이 증자와 같다하여 마을의 이름을 증자동(曾子洞)이라 하여 이제까지 내려오고 있다. 산소 옆에 나무가 항상 푸르러서 효조(孝鳥)가 누식하니 오호라 무릇 효는 백행의 근원(百行根源)이요 만선의 근본(萬善根本)이니 천지신조(天地神袛)와 금수초목(禽獸草木)이 어찌 감응(感應)치 않으리오, 선생의 6대조 고 호군공(護軍公) 휘 식(植)과 고조고 승지공(承旨公) 휘 광전(光荃)은 다같이 충절로 인하여 안성 원곡에 정문이 있다. 무릇 충과 효는 하나이니 그 부모에 효도하면서 그 인군에 불충 하는 이 없으며 그 인군에 충성하면서 그 부모에 효도 않는 자 없는 지라 선생의 대효는 전해 받은 바가 있어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제 그 후손들이 또 조상을 받드는 데 정성을 다하여 봄과 가을에 제향을 모시니 주시(周詩)에 가로되 군자가 만년토록 길이 효자 효손이 이어온다 하니 선생에게 이른 말이다. 슬프도다 세상의 교화가 쇠퇴한지 오래이다.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부모를 위하여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서 어찌 송구(悚懼)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특별히 이것을 기록하노라. 계유년 정월 기망에 진양 강인규는 짓다(癸酉 正月旣望 晋陽 姜麟圭 謹撰)

 

○응천사 묘정비문 (應天祠 廟庭碑文)

천안군 수신면 남쪽에 망경산(望京山)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 증자동(曾子洞)이 있으니 이곳이 은촌 선생(隱村)의 유풍이 전해 오는 경주이씨의 세거지 이다. 마을 옆 기슭에 있는 응천사(應天祠)는 곧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은촌(隱村) 선생을 모신 사우(祠宇)이고 그 옆에는 선생의 효행을 표창한 정문(旌門)이 서있다. 단기 4324년(서기 1991년) 2월에 유림의 공의로 성균관장에게 천거하여 정문을 세웠고 다음에 봄 3월에 선생을 사우에 봉안(奉安)하였다. 무릇 생폐(牲幣)을 드리고 제사를 모시는 것을 도덕을 존모함이니 도덕을 존모하면서 세덕과 선조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신라 원훈 좌명공신(新羅元勳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이고 여러 대를 내려와 소판(蘇判)벼슬을 지내신 휘 거명(居明)이 기(起) 세조이시다. 휘 금서(金書)는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보좌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 호부낭중(戶部郎中)이 되시고 휘 핵(翮)은 호가 열헌(悅軒)이니 상서 좌복사(尙書左僕射)를 지내시고 휘 인정(仁挺)은 호가 성암(誠菴)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셨다. 그러나 직간(直諫)으로 임금의 뜻을 거스른바 되어 한때 불우한 처지에 있었으나 문정공 이지시(文正公 李之氏)의 상소로 복직되었다. 휘 원선(元善)은 벼슬이 전서(典書)요, 휘 진(進)은 진사로써 감무(監務)를 지내셨는데, 문덕(文德)이 찬란하여 태종의 잠저(潛邸)때에는 교분이 두터웠다. 휘 식(植)은 어모장군 호군(禦侮將軍 護軍)벼슬을 하셨는데 금성대군 옥사(錦城大君 獄事 )에 연류 되어 청하 현(淸河縣)에 은거하시다가 혐의가 풀린 뒤에 승지(承旨)벼슬에 추증(追贈)받았고 충절(忠節)로 정문을 명(命)하니 안성군 원곡면(安城郡元谷面)에 세웠다. 이분의 아들이 후(厚) 인데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고 寒暄堂 金先生의 문인 이였다. 그러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하여 영변(寧邊)으로 유배되었으니 곧 선생의 5대조이시다. 고조의 휘는 광전(光荃)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參議)를 지내셨는데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시고 순절하니 정려를 명하여 조손(祖孫)의 정문이 한곳에 서있다. 증조의 휘는 우신(又新)인데 집의(執義)를 배(拜)하였고 조의 휘는 문서(文瑞)인데 문과 진사(進士)로 광해조의 어지러울 때 시를 지어 이이첨(李爾瞻)과 절교(絶交)하였다. 고의 휘는 무(茂) 인데 승사랑(承仕郞)을 지냈고 승지벼슬을 추증 받았다. 선생의 휘는 동표(東慓)이고 자는 중건(仲建)인데 천성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서 성현의 글이 아니면 접견하지 않으셨으며 소학은 물론이고 사서삼경을 익혀 성현의 언행을 실천하셨다. 몸소 밭을 갈아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다가 부모상을 당해서는 몸이 수척하도록 슬퍼하시며 정예(情禮)를 다하시고 장례를 모신 뒤에 6년 동안을 시묘하셨다. 깊은 산골이라 때로는 호랑이가 나와서 보호하였고 피눈물이 떨어진 곳에는 사초가 말랐다고 한다. 선생의 지극한 효성과 덕행이 옛날 중국의 증자(曾子)와 같다고 하여 선생이 살던 마을 이름을 바꾸어서 증자동(曾子洞)이라 하였다. 장 하도다 무릇 효는 덕의 근본이요 교육의 원천이니 어찌 동인의 감화뿐이랴 어사가 선생의 여막을 찾아보고 크게 감복하여 임금께 상소를 올리니 숙종께서 특별히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셨다 그 뒤 10여년이 지나서 향인의 논의로 다시 천거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하시니 훌륭하도다. 지극한 효는 천지신명(天地神明)도 감흥 하는지라 신명이 감흥하면 풍속이 변하며 지명도 바뀌게 되나니 선생의 덕이 그러하기에 일월(日月)과 더불어 길이 빛나도다. 선생의 묘정(廟廷)에 효조(孝鳥)가 서식하고 장송구목이 충해와 설화도 없으니 과연 신명(神明)의 감흥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아들은 만승(萬升), 만익(萬益)이요 손자는 종진(宗震), 득헌(得獻), 성헌(聖獻), 종환(宗煥)이요 증손은 경상(敬常), 경철(敬哲), 경천(敬天), 경노(敬老), 효순(孝舜), 효증(孝曾)이요 현손은 태진(泰鎭), 형진(衡鎭), 헌진(憲鎭), 정진(定鎭), 관진(寬鎭), 원진(元鎭), 화진(華鎭), 좌진(左鎭), 익진(翼鎭),이요 5대손은 응규(應奎), 학규(學奎), 환규(煥奎), 선규(善奎), 병규(秉奎), 화규(華奎), 인규(麟奎), 용규(龍奎), 완규(完奎), 철규(喆奎), 의규(毅奎), 준규(俊奎)이다. 이상 선조의 5대손까지의 위패(位牌)를 행렬의 순차로 같은 사우(祠宇)에 모시고 매년 가을에 세일제(歲一祭)를 봉행하기로 하였다. 모름지기 세일제는 묘정(墓庭)에서 봉행함이 선현의 예전(禮典)이라 하겠으나 세속의 변천에 따라 사우(祠宇)에서 봉행케 됨을 조상의 영영(英靈)께서도 감흥(感興)하시리라 믿는다. 이 묘정비(廟庭碑)를 세움에 있어 규석, 규진, 종건(圭錫 圭鎭 鍾健)이 나에게 기문을 청함으로 제삼고사하다가 삼가 찬하노니 은촌선생의 덕행과 효성이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것이다. 단기 4325년 3월 일

진향 강인규는 삼가짓다(晋陽 姜麟圭 謹撰)

 

 

 

 

 

 

 

 

 

 

 

 

 

 

 

 

* 망경산 만경사 //

 

 

 

 

 

 

 

 

 

 

 

 

 

 

 

 

 

 

 

 

 

 

 

 

 

 

 

 

 

 

 

* 망경산성 석축 //

 

 

 

 

 

 

 

 

 

 

 

 

 

 

 

 

 

 

 

* 망경산성(望京山城)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백자리 산 49

 

* 망경산성(望京山城, 385m)은 천안시 수신면 백자리와 연기군 전동면 봉대리에 걸쳐있다. 망경산성의 전체둘레는 660m라고 되어 있으나 정확히 측정하기가 어렵다. 성벽은 만경사에서 정상쪽으로 오르다보면 문지로 확인되는 토석혼축의 성벽이 확인된다. 동쪽의 능선을 따라 삭토법으로 산의 지형을 깎아내고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만든 테뫼식산성이다. 남쪽 연기군 전동면쪽의 능선에는 별다른 성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으나 산비탈이 상당히 급경사여서 일부러 축성할 필요가 없어 보이며, 서쪽 고소재고개 방향 역시 급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천, 성남, 수신, 병천을 발아래 두고 적의 움직임을 한 눈에 감시할 수 있는 곳이다. 망경산성 내부에 우물(샘)이 없어 인근 계곡의 물을 활용하여야 하는데 추정컨대 가까운 만경사 부근의 물을 식수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망경산성은 운주산성(고산산성)과 동림산성 가운데 있으며, 북으로 세성산성, 목천토성, 흑성산성, 성거산성, 작성산성, 화계산성(도원산성), 동성산성, 광덕산성, 서림산성, 국사봉산성 등을 한 눈에 굽어보는 전략적, 지형적 우위를 확보하는 곳에 위치하며, 예전 성곽과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연기군 전동면 봉대리(烽臺里)의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쪽 아래에 고소개고개는 연기군 전동면~천안시 수신, 병천을 잇던 고개로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최전방 접경지역에 위치한다.

 

* 성 터 아래 만경사(萬京寺)는 2012년 85세인 석보스님(속명, 김태희)께서 50여년 전에 1960년대에 창건했다고 한다. 절 뒤편으로 장군바위 부근에 돌무더기가 상당히 많은데 축성에 사용된 석재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자연석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만경사 스님의 전설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군이 이곳에서 치열히 교전 할 때 사용된 석재라고 전해진다. 산 정상에 3개의 바위가 있는데 사모바위(思慕岩)이라고 하며 여자가 거울을 보고 머리를 빗는 형국이라 망경산 아래 수신면 백자리 지역에 큰 인물은 없고 승천천(昇天川) 건너편 지역에서 큰 인물이 난다고 전한다. 절 뒤편 등산로 오른쪽에 장군바위가 있는데 정성를 드리면 한가지 소원을 꼭 들어준다고 전한다. 매년 1월 1일 수신면에서 일출(日出) 해맞이 행사를 망경산 정상에서 거행 한다.

 

 

 

 

 

 

 

 

 

 

 

 

 

 

 

 

 

 

 

 

 

 

 

 

 

 

 

 

 

 

 

 

 

 

 

 

 

 

 

 

 

 

* 효자 이춘영 정려(孝子 李春榮 旌閭)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646-9

 

* 장산리 1구의 장명마을 홍대용선생 생가지 동쪽 미륵댕이 쪽으로 가다보면 마을 어귀에 미륵을 모시는 작은 정자가 있고 미륵위의 야산에 동향을 하여 세워져 있다.

 

정려는 정 측면 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하고 있으며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다. 원형 초석에 원주를 놓았는데 내부의 중앙 상단에는 현액을 걸었다.

현액에는 효자 교수 경주 이춘영 지문 공부자 탄강 2478년 정유 3월 일 경성 선성 묘건 (孝子 敎授 慶州 李春榮 之門 孔夫子 誕降 2478年 丁酉 三月 日 京城 先聖 廟建...1927년)라고 쓰여져 있다.

 

이춘영(李春英)은 경주(慶州)인이며 선조 때 사람으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이 이 고장을 침입해 들어옴에 동네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하였으나 이춘영은 유일하게 마을에 홀로 남아 어머니의 병환을 극진히 보살폈다. 왜적이 당도하자 어머니와 가족을 가까운 산중에 숨겨 놓고 왜적을 상대하여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그이 충정과 효를 기리기 위해 효자문을 세웠다 한다.

 

 

 

 

 

 

 

 

 

 

* 수신면 장산리 석불입상...문화재자료 제3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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