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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문화재 탐방-11...입장 조립 정려~위례산 산제당~쇄춘이 느티나무~승문원 교리 정자당의 묘

吾心竹--오심죽-- 2012. 12. 27. 15:46

<<< 천안 문화재 탐방-11...입장 조립 정려~위례산 산제당~쇄춘이 느티나무~승문원 교리 정자당의 묘, 운학재 >>>

 

* 효자 조립 정려(孝子 趙砬 旌閭)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가산리 332-5 외 2필지

 

 

 

○ 진보조씨 시조 신도비(眞寶趙氏 始祖 神道碑) : ▣ 由 來 : 始 祖(시 조) : 趙 庸(조 용)

 

始祖(시조)趙庸(조용)은 白川趙氏(배천조씨)의 始祖(시조)趙之麟(조지린)의 11世孫(11세손)으로 1374年(高麗 恭愍王)文科(문과)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고,벼슬은 學行(학행)이 卓越(탁월)하였는데 1392年(太祖1年)朝鮮(조선)이 開國(개국)되면서 벼슬에서 물러나 夜珠郡[야주군:醴泉(주천)]에 隱居(은거)하자 朝廷(조정)에서는 그의 節義(절의)를 嘉尙(가상)히 여겨 眞寶君(진보군)에 封(봉)하였다. 그가 죽은 後(후) 學文(학문)과 品行(품행)을 追慕(추모)한 後孫(후손)들이 醴泉(예천)에 鄕賢祠(향현사)를 建立(건립)하여 그를 祭享(제사)케 했으며, 朝廷(조정)에서는 禮文館大提學(예문관 대제학)을 增職(증직)하였다. 그 뒤 後孫(후손)들이 白川(배천)에서 分貫(분관)하여 眞寶(진보)를 本貫(본관)으로 하였다.

 

○ 유적현황 : 입장면 가산리 1구의 토산마을 서쪽 남향 사면 야산 하단의 도로변에 대지를 평탄하게 조성하여 세웠다. 정려의 내부에는 중앙 상단에 현액이 걸려 있는데, 효 통정대부 조립 지문 숭정기원후 을미 사월 일 (孝子 通政大夫 趙砬 之門 崇禎 紀元後 乙未 四月 日-1655년,효종6년) 라고 각서 되어있다. 정려의 좌우측에 최근에 세운 비가 있는데 좌측은 효부 조운형 처 강능 김씨 지비 (孝婦 趙雲瀅 妻 江陵 金氏 之碑) 이며, 우측은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시 문정 진보 조공 휘 용 신도비명 병서(崇綠大夫 議政府 左贊成 諡 文正 珍寶 趙公 諱 庸 神道碑命竝書)라 새겨진 신도비이다. 조립(趙砬)은 진보인(珍寶人)이다. 고려 말의 충신 조용(趙庸)의 7세손으로 직산군 삼동면 토산리에(현재 입장면 가산리1구 토산마을) 살았다. 입이 어려서부터 출중하였고, 조모와 모친을 섬기매 의복을 손수 손질하여 봉양하였다. 나이가 36에 조모 상(祖母 喪)을 당하여 통곡하며 슬퍼함이 하늘에 닿고, 입의 나이 53세 변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마을이 퇴패하자 처자는 놔두고 노모를 업고 산속으로 들어가 난(亂)을 피했고, 오랑캐가 조립을 검거하려 했으나 그의 노모 봉양의 효성에 감격하여 그대로 내려갔다. 61세에 모친 상(母親 喪)을 당하여 때를 가리지 않고 시묘 살며 삼년상을 초종처럼 애통하였다. 71세에 이르자 부친 돌아가신지 60년이라, 부친상에 어려서 집상(執喪)을 치루지 못한 것을 애통히 여겨 기일에 초상과 여일하게 상복을 입고 슬퍼하며 술과 고기를 멀리 하였다. 이에 도 관찰사는 입의 행실을 조정에 알리어 조정에서는 세금과 부역을 면 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위계(位階)를 내리었다. 입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 진형(震亨)이 또한 효자문 세울 것을 상언하고 이어서 황구하(黃龜河)가 별도로 이 사실을 적어 올리니 마침내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었다.

 

<직산현지>에는 조 립(趙砬)은 진보인(眞寶人)이며, 고려말 충신 문정공 용(庸)의 7세손으로 삼동면 토산리에 살았다. 립(砬)이 탄생할 때부터 영리하고 기이하였는데, 나이 10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성인과 같이 애통하였고, 11살에 모친의 병환을 만나 손가락의 피를 내어 드려서 회생시켰다. 조모와 모친을 받들었는데, 때 묻은 의복이 있으면, 반드시 친히 빨래를 하였고 아내와 자식들이 대신하지 못하게 하였다. 모친이 기쁘지 않은 얼굴빛을 하면, 곧 회초리를 가지고 가서 ‘종아리를 때려 주소서.’하고 유쾌한 음성과 기쁜 표정을 청하였고, 일찍이 얼굴에 다급한 빛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립이 36세에 조모 상을 당하니, 몹시 슬퍼 몸부림을 하며 통곡하였고 정성과 예법을 갖추어 지극 하게하였다. 부친이 계시지 않으니 승중손(承重孫)으로서 슬픔이 더욱 더 많았던 것이다. 53세에 병자호란(1636)을 당하여 병든 모친을 등에 업은 채, 허리에다 식량을 차고 산골에 드나들면서 적병의 칼끝을 피하였는데, 하루는 갑자기 오랑캐 기병(騎兵)을 만났다. 겁탈하여 끌고 가려하므로, 립이 피눈물을 흘려 슬피 울면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다.’고 호소하니, 그 말이 사람들을 감동 시킬 만 하였다. 오랑캐도 그 효성에 감동하여 마침내 그를 버리고 가 버렸다. 이와 같은 일이 두 세 번이나 있었으니, 강혁(江革)이 도적을 감동시켜 칼날을 피했던 것으로 더불어 물연(沕然)히 서로 비슷하였다. 사람 없는 산 속에 눈이 쌓이고 날씨가 몹시 춥기 때문에, 입이 땔나무를 구하여 불을 피우고 돌을 불에 달궈 따뜻하게 싸서 모친으로 하여금 얼어붙는 추위를 면하게 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이 이러했다. 입의 나이 61세에 모친상을 당하니, 죽을 먹으면서 시묘(侍墓)하였고, 상복을 벗지 않은 채, 한 결 같이 옛 사람의 예법과 제도를 따라 삼년상을 하루와 같이 마치었다. 나이 70세가 되니 곧 그의 부친이 돌아가신지 1주갑(1주갑 ; 60년)이었다. 입이 말하기를‘남들은 모두 양친의 상복을 입는데, 나만 홀로 입지 못했으니, 이것이 자식으로서 죽을 때까지 애통한 일이다. 이제 옛 회갑을 아이가 만났으니, 거의 정겨운 일을 추억하여 펼 수 있겠다고 하였다. 곧 상복을 입고 슬퍼하며 초종 절차(初終節次)를 한 결 같이 하였으며, 두 돌이 지나도록 술과 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으니, 마을사람과 친족들이 너무 노쇠하여 위태롭게 여기고 소식(素食)을 중지하도록 권고했으나, 듣지 않았고 몸은 끝내 건강했다. 사람들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앞서 본도의 관찰사가 입의 효행과 의리로써 조정에 보고하여 복호(復戶)의 명령을 내리고 또 입에게 통정대부의 품계를 가자(加資)했다. 입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 진형(震亨)이 또 그 분의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을 바라는 말씀을 올리니, 을미년(1655)에 암행어사 황구하(黃龜河)가 특별히 글을 올려 그 집 대문에 정표(旌表)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일러 하늘이 낸 효자)’라 하였다. 그가 어버이 계신 것은 알면서 그 자신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고 공손히 자식의 직분을 하면서 죽은 뒤에야 그쳤으니, 아! 사람의 자식이 된 자가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

 

 

 

 

 

 

 

 

 

 

 

 

 

 

 

 

 

 

 

 

 

 

 

 

 

 

* 위례산 호당리 산제당(慰禮山 虎堂里 山祭堂)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 산38-1

천안에서 입장면 시장리를 지나 성거산 공군부대로 가는 길로 포장도로를 따라 가면 금성사 입구가 있는 마을이 호계마을(호당1리)이다.

53가구가 모여 사는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초에 마을의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가려서 산신제를 주관할 제관을 선정하고 길일을 택해서 제를 올린다. 제관은 당주 1인과 축관 1인을 선정하고 제를 지낼 때는 이장이 동행하게 된다. 하지만 산신제를 좀 더 정성스레 지내기 위해서 부정이 없는 사람들을 택해서 제물을 지고 동행하게 한다.

이장 보조인 축관 등이 제를 지내며 각 집에서도 떡을 하여 자기 집 안택을 빈다. 산제를 지낼 때 "마중시루 올려라" 하고 소리치면 각 집에서도 떡시루를 마당에 옮겨놓고 제를 올린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냉수에 목욕하고 술, 담배를 끊고 밖에 출입을 금지하며, 제일 하루 전날 제관이 산신제장에 올라 조라술을 담구어 놓고 깨끗하게 청소한 후에 집 문전에 황토를 펴서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산신당은 마을 동쪽 400m정도 떨어진 위례산 밑에 있으며 예전엔 짚을 엮어서 지붕을 씌웠던 것을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부수고 새로이 나무로 벽을 세우고 진흙으로 바른 후에 스레트 지붕을 덮었다. 그리고 1998년 3월13일 콘크리트와 기와를 올려 새롭게 현대식으로 단장했다. 가로 4.3m, 세로 3m의 산제당이다.

산신제는 오후 5시경에 지내게 되며, 제물은 돼지 한 마리를 생으로 사용하고 삼색실과와 백설기를 진설하고 또 포 2마리를 쓴다. 위례산신을 위하는 호당에서는 집안의 기제사와 같은 순서로 제를 지내며 제수비용은 마을의 기금에서 이용하고 부족하면 집집마다 염출한다. 제가 끝나고 나면 전 주민이 모여서 음복하고 하루를 보낸다.

 

百濟城下 山神祭 祝文

維歲次 (癸亥) 正月(壬申)朔 初(二)日(癸酉) 幼學 (金學聖)

敢昭告于 山之靈曰

溫祚舊國 龍泉水石 卜築于玆 歲値豊穰 禮城遺墟 虎溪村閭

老少咸安 事無艱難 逍除疾厄 百祥感華 維神所祐 齎誠報賽

驅逐災害 一村亨泰 旣多且大 僅具菲儀 神其來格 吉日良辰

尙 饗

백제성하 산신제 축문

유세차○○ 정월 ○○삭 초○일 ○○ 유학 ○○○

감소고우 산지령왈

온조구국 용천수석 복축우자 세치풍양 예성유허 호계촌려

노소함안 사무간난 소제질액 백상감화 유신소우 재성보새

구축재해 일촌형태 기다차대 근구비의 신기래격 길일양진

상향

유세차 (계해년) 정월 (임신) 초하루 초이틀 (계유) 유학 ( )

감히 산의 신령님께 소상히 고합니다.

백제 온조(국)로부터 위례산 용샘의 수려한 산하에 점지하시어 매해 풍년 들게 하시고,

예를 올린 위례성 옛터 호계마을 모든 사람에게 두루 평안하고 몹시 힘든 일 없이,

(소지와 함께) 질병과 재앙을 태워없애, 온갖 일이 번성하는 것은 오직 신령님의 도우심인바

정성들여 굿하오니 재액을 몰아내어 마을이 형통하게 하소서. 이미 많고 또 큰 일이라

겨우 향을 피워 예를 갖추오니 좋은날 좋은 때 신령님께서 함께 하옵소서

 

 

 

 

 

 

 

 

 

 

 

 

 

 

 

 

 

 

* 효아촌(쇄춘이) 느티나무제 (孝兒村 樹木祭)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효계리 62

 

입장면 소재지를 향해서 천안에서 나가다 시장리 저수지 아랫동네, 성거산 공군부대로 오르는 마을이 새춘이 마을이다. 예전에는 효자가 많이 난다고 하여서 효아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효계리 동쪽에는 백제초도라 전해지는 위례산성과 성거산이 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이 되면 길일을 택하여 마을의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에서 나무제를 지낸다. 마을의 입구에는 수령 570여년 정도의 큰 나무가 있어 도지정 보호수로 정해져 있으며 밑 둘레는 장정의 팔로 7 아름쯤 되는 거목이다.

 

주민들이 늘 위하는 신목으로 소독을 하고 잘 돌보고 있어 성장상태가 매우 좋다. 이 새춘이 마을에서는 딴 곳과는 달리 개띠생들이 제관이 되는데 개띠생이 나무제를 지내면 마을에 경사가 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제관들이 제일이 되기 일주일 전부터 목욕을 하고 비린 것이나 육식을 하지 않으며 몸을 정결하게 하고 상가(喪家) 등 부정한 곳에 가지 않는다.

 

제일이 되면 제물을 준비하는데 제물은 돼지머리와 삼색실과 포와 떡, 메를 진설하며 제수비용은 가을에 마을의 기금에서 미리 떼어 놓는다. 제가 끝나면 소지를 올리는데 제관의 소지와 본인이 원하는 사람들은 나와서 소지를 사른다. 제에는 동리의 주민들 전체가 참여한다.

 

이 마을에서는 동네에 불상사가 생기면 무당을 불러다 나무 아래서 굿을 한다.

 

 

 

 

 

 

 

 

 

 

 

* 청송 정자당의 묘와 운학재 //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문덕리 1-17 // 운학재(雲壑齋...문덕리 9-1, 문성1길 75-18)

 

* 정자당(鄭子堂)

직산현지(1899년)에 “명신 승문원교리 호 청송 정자당 묘, 이남면 문성리 후록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생졸년 미상. 자는 승고(升高), 호는 청송(靑松). 본관은 동래(東萊).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시(詩)에 뛰어나고 해학(諧謔)을 즐겼다.

증조부는 정규(鄭規)이고, 조부는 정길흥(鄭吉興)이며, 부는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정기(鄭期)이다.

외조부는 정초(鄭招)이다.

 

1469년(예종 1)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였고, 1488년(성종 19) 무신(戊申)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가 되었다.

[진사시] 예종(睿宗) 1년(146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45위

[문과] 성종(成宗) 19년(1488) 무신(戊申) 알성시(謁聖試) 3등(三等) 2위

 

1490년(성종 21)에는 정자(正字)로서 후원에서 활을 쏘아 여러 문신과 함께 활[弓]과 먹[墨] 그리고 벼루[硯] 등을 상으로 받았으며,

이듬해 가주서(假注書)를 지냈다.

1492년(성종 23)에는 《북정일기(北征日記)》를 초창(草創)하여 잘못 내보인 것으로 탄핵을 받았으나, 무재(武才)가 있다는 추천을 받아 겸선전관(兼宣傳官)이 되었다. 또 같은 해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으로 시사(試射)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아마(兒馬) 1필(匹)을 받았다.

 

이후 연산군 때는 광인(狂人)으로 행세하며 사화(士禍)를 면했다고 전한다.

 

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삼은리 자은방(自隱芳)에서 살았다하며, 자은방(잠뱅이)의 마을 지명도 정자당이 숨어 미친척하며 은거해서 살았다하여 붙여진 것이라 전한다. 정자당의 아내 팔거도씨(八莒都氏)의 묘소는 직산읍 군서리 산51번지에 있었으나 1997년 현재 성거읍 문덕리 문성 남쪽으로 이장 합장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조선시대 문인석과 비석이 그의 묘소 앞에 있다. 문덕리에는 그의 종중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으며 정자당을 추모하는 운학재(雲壑齋) 사당을 1997년 새롭게 지었다. 매년 음력 10월 첫째주 일요일 시제를 올린다 (양력 11월초)

저서로 《청송시집(靑松詩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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