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삼각산 유래와 역사

吾心竹--오심죽-- 2010. 9. 30. 13:57

삼각산 인수봉백제초기문화의 발상지 삼국세력의 경합지
삼각산과 우리나라 건국과 연관된 최초의 기록은[삼국사기]에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19년 경에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에 새 나라(백제)를 건국하고자 내려와 지금의 한강이북 지역을 도읍으로 물색코자 지금의 서울인 한산(漢山)에 이른 후 부아악(負兒岳)에 올랐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마치 아기를 업은 어머니 (負兒岳)같이 삼각산은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산으로 우리의 민족사에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부아악은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인수봉(仁壽峯)을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즉 "인수봉은 삼각산의 제1봉이다. 사면이
순 바위로 깎아질러 섰는데 봉우리 등에 한 바위가 덧붙어서 부아악(負兒岳)이라고 부른다" 라고 하였으며, '부아(화)가 치밀어 솟아 오른 곳' 또는 '불끈 솟아 오른 곳' 이라고도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게 되고 백제 26대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손을 잡고 잃어버렸던 한강유역과 부아악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지만 다시 2년뒤 신라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만다. 삼국시대에는 전략요충지인 부아악을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싸움이 끊이질 않아 서기 555년 신라 진흥왕이 삼각산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巡狩碑)를 비봉에 세우고, 한강 이북 지역을 행정구역상 북한산주(北漢山州)로 지명하고, 명산대천의 하나로서 소사(小祀)를 지냈다.

이렇듯 삼국시대에 이미 삼각산이 백제의 건국이나 신라 강역을 표시하는 중요한 산으로 인식되게 된 것은 이 산이 지리적인 면 역시 중요하게 작용했다. 백제의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 횡악(橫岳)이란 명칭은 바로 삼각산을 지칭한다. 당시 남북으로 대치하여 공격을 함에 있어서나 방어를 할 때나 삼각산이 중간에 가로 놓여있기 때문에 그 지역 형세에 따라 '가로 횡자' 를 사용하여 횡악(橫岳)이라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은 서로 군사적 요충지만 이곳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였기 때문에 국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삼각산은 지리적인 면, 또 그 형세 등과 아울러 우리 고대사에 매우 중요한 산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삼각산의 유래 산행정보

2008/04/18 13:38

복사 http://blog.naver.com/mook1122/50038457

 

삼각산의 유래

 

백운대(836), 인수봉(810), 만경대(800)의 세봉우리가 삼각의 모양으로 서 있음

 

※ 시대별 명칭

   삼국시대 - 부아악(負兒岳), 횡악(橫岳), 한산

          (부아악 : 인수봉의 봉우리 북편이 기묘하게 튀어나와 바위가 어린아이를

                       업은 형상과 같다하여 붙여짐)

          (횡악 : 산세가 길게 가로로 이어져 있음)

          (한산 : 산이 높고 크다는 의미)

   고려,조선시대 - 삼각산(三角山), 화산(華山), 화악(華岳)

          (화산,화악 : 부아악의 부아는 '불'이란 뜻으로 '부아 → 불 → 火 → 華'로

                     바뀌었음)

 

 ※ 북한산이라 불린것은 1915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위를 지낸 금서룡(今西龍)에 의한 것으로 그는 삼각산의 유적을 조사하고 그 보고서 명칭을 '경기도 고양군 북한산 유적보고서'라고 하였다.

     → 이는 일제시대에 잘못 붙여진 이름으로 삼각산으로 불려지는 것이 정확한

         명칭이다.

     → 북한산은 산이름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서울의 옛이름인

         한산(漢山)의 북쪽지역을 일컫는 지명임이 마땅하다.

 

  ※ (기타 설)

     . 삼각산은 '서울산'을 한자로 나타낸 것이라는 설. 서울의 본딧말이 '셔블'

       (세불)이다. 삼각의 삼(三)은 '세'(서)이고 각(角)은 '불'(뿔)로 곧 '서불 →

       서울'이 된 것이라는 주장 임.

     . 한강이북의 큰산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

     . 부아악에서 한산으로 불리다 북한산이 되었다는 주장

 

  ※ 봉우리의 유래

   백운대(白雲臺,836) :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잠구시에 "백운(白雲) 가운데 암자

                                 하나 높이도 자리잡고 있네"에서 유래 됨

   인수봉(仁壽峰,810) : 공자의 '인자요산 인자수 (仁者樂山 仁者壽)'에서 유래.

                                 '어진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어진사람은 오래 산다는 뜻'

   만경대(萬景臺,800) : 그곳에 서면 눈아래 산하(山河)가 만경처럼 들어온다는

                                 의미 (별칭으로 국망봉(國望峰)이라 하는데 무학대사가

                                 산에 올라 나라 일을 생각했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그러

                                 나, 고려시대 이미 국망봉이라는 이름이 있어 이 설은 후

                                 세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 함)

   노적봉(露積峰,716) :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모습에서 유래 됨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가 떨어져 고심하던 중 이 봉우리

                                  에 가마니를 덮어 군량미인 것처럼 속여 위기를 넘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원효봉(元曉峰,505) : 봉우리 아래에 있는 원효암의 이름을 따라 붙임

                                 (원효암 : 원효대사가 수도 정진했다는 토굴로 원효는 상

                                  운사와 삼천사도 창건했다 함)

   의상봉(義相峰,502) :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수도 했다고 붙여 짐

                                 (당나라에서 불교공부를 하고 돌아온 의상을 원효가 불

                                  러 의상봉에 있는 석굴로 안내하고 원효는 원효봉에서

                                  의상은 의상봉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참선했다고 함)

    염초봉(662) : 유래를 알 수 없음. '영취봉(靈鷲峰)''염촉봉'이 변해서 됐다는

                       설도 있음. (산악인들은 워낙 위험하고 사고도 자주나서 '염라대

                       왕이 초빙하는 봉우리'라고 부르고 있음)

    문수봉(文殊峰,716) : 봉우리아래에 위치한 문수사에서 유래

                                  (문수사 : 고려 예종 탄연(坦然)이 세움)

                                  (전설) 아이를 원하는 사람이 문수봉 위의 두꺼비같이

                                     생긴 바위 등에 걸쳐앉아 축원을 하면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

    보현봉(普賢峰,700) : 보현보살에서 나온 것으로 문수봉과 나란히 하고 있음

                                  (이는 대웅전에서 중앙에 석가여래불, 좌우로 문수보살

                                   과 보현보살등 협시불을 함께 한치하는 모양 임)

    나한봉(羅漢峰,688) : 유래를 알수 없음 (보현봉과 문수봉에 연이어 불교에 유

                                  래됐을 것이라 생각)

    나월봉(羅月峰,657) : 유래를 알수 없음 (불교에 유래됐을 것이라 생각, 정상

                                  모습이 나한과 같다는 설)

    증취봉(甑炊峰,593) : 유래를 알 수 없음

    용혈봉(龍穴峰,581) : 유래를 알 수 없음

    용출봉(龍出峰,571) : 용이 솟아 오르듯 뾰족하여 이름 붙임

    승가봉(僧伽峰,581) : 승가사에서 유래 됨

                                  (승가사 : 신라 경덕왕 15년에 수태스님이 창건한 비구

                                   니 사찰로 당나라 고종때 천복사에서 대중에게 설법했

                                   던 서역인 승가대사를 봉안했다. 승가대사를 기리기 위

                                   해 제정된 것 임)

    비봉(碑峰,560) : 신라 진흥왕이 삼각산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巡狩碑)

                            가 있음

    향로봉(535) : 멀리서 바라보면 향로처럼 보임

    족두리봉(358) : 멀리서 보면 마치 족두리 같다고하여 붙음

    사모바위 : 사모관대의 사모, 즉 사각모자에서 유래

    용암봉(龍巖峰,616) : 용모양의 바위가 있음

    시단봉(柴丹峰,610) : 유래를 알 수 없음

    형제봉(兄弟峰,463,461) : 두봉우리의 높이가 엇 비슷하고 연이어 있다하여

                                        붙여 짐

    영봉(靈峰,604) : 전세계의 이곳저곳에서 산을 타다 떠난 목숨을 기리는 곳,

                            즉, 영이 머무는 곳

 

※ 삼각산의 유래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를 정리하여 만들었음.

 

                                 

[출처] 삼각산의 유래|작성자 단풍가족

 

 

 

 

삼각산 유래와 역사

 

삼국시대

삼각산과 우리나라 건국과 연관된 최초의 기록은[삼국사기]에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19년 경에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에 새 나라(백제)를 건국하고자 내려와 지금의 한강이북 지역을 도읍으로 물색코자 지금의 서울인 한산(漢山)에 이른 후 부아악(負兒岳)에 올랐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마치 아기를 업은 어머니 (負兒岳)같이 삼각산은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산으로 우리의 민족사에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부아악은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인수봉(仁壽峯)을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즉 "인수봉은 삼각산의 제1봉이다.

사면이 순 바위로 깎아질러 섰는데 봉우리 등에 한 바위가 덧붙어서 부아악(負兒岳)이라고 부른다" 라고 하였으며, '부아(화)가 치밀어 솟아 오른 곳' 또는 '불끈 솟아 오른 곳' 이라고도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게 되고 백제 26대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손을 잡고 잃어버렸던 한강유역과 부아악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지만 다시 2년뒤 신라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만다. 삼국시대에는 전략요충지인 부아악을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싸움이 끊이질 않아 서기 555년 신라 진흥왕이 삼각산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巡狩碑)를 비봉에 세우고, 한강 이북 지역을 행정구역상 북한산주(北漢山州)로 지명하고, 명산대천의 하나로서 소사(小祀)를 지냈다.

이렇듯 삼국시대에 이미 삼각산이 백제의 건국이나 신라 강역을 표시하는 중요한 산으로 인식되게 된 것은 이 산이 지리적인 면 역시 중요하게 작용했다. 백제의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 횡악(橫岳)이란 명칭은 바로 삼각산을 지칭한다. 당시 남북으로 대치하여 공격을 함에 있어서나 방어를 할 때나 삼각산이 중간에 가로 놓여있기 때문에 그 지역 형세에 따라 '가로 횡자' 를 사용하여 횡악(橫岳)이라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은 서로 군사적 요충지만 이곳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였기 때문에 국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삼각산은 지리적인 면, 또 그 형세 등과 아울러 우리 고대사에 매우 중요한 산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고려시대

태조 왕건은 지금의 삼각산 북한리(北漢里)의 노적봉(露積峯) 아래에 중흥사(重興寺)를 창건하여 고려의 중흥(重興)을 기원하였다. 고려 8대 현종(顯宗)이 삼각산에서 승려생활을 할 때, 진관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로 봉하고 1011년 진관사를 창건하였으며, 거란족이 침입하였을 때 중흥성(重興城 – 북한산성의 전신)계곡 중흥동(重興洞)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리고 고려 예종 1109년에는 탄연(坦然)이 문수사를 세웠고, 고려 말 1388년 최영 장군은 중흥성(重興城)을 축조하여 기울어 가는 고려를 중흥시키려고 이 곳에 군대를 주둔시킨 바 있으며, 원증국사 보우가 중흥사를 중건하고 그 옆에 태고암을 지어 나라의 중흥을 빌었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삼각산은 고려시대에서부터 이미 삼각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서희전(徐熙傳)에 의하면, 서희가 성종에게 아뢴 말 중에 '삼각산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 라고 한 말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삼국시대 이래 부아악이라고 불리어 오던 산명이 고려시대부터 삼각산으로 불리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많은 고려유신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 개성을 포기하고 도읍지를 옮기기로 결심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초 새 도읍지로 무학대사가 주장한 계룡산 일대의 신도안에 1년여 동안 왕궁 공사를 벌이다 중단하였다. 그리고 천문지리에 능한 정도전이 삼각산에 올라 남쪽 양지바른 곳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이곳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읍지를 바라보았다하여 망경대(望京臺)라는 봉우리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그의 주장대로 조선 정조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짓게 됨으로서 건국의 구심점을 삼각산에 두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이태조는 1392년 개경에서 조선왕조를 창건한 후 원대한 포부를 안고 1394년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겼으나 518년만인 1910년 경술국치로 멸망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도 한양이 점령당하고 왕이 멀리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된 이후 북한산성 축조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에 대한 오랜 기간의 찬반 양론 끝에 숙종이 1711년 전란시에 피난처와 방어지로 삼기위해 단 6개월 만에 7,620보, 약 8.5Km에 이르는 오늘의 북한산성을 축조하였다.

삼각산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도][여지도서][증보문헌비고][북한지][대동지지] 등의 역대지리지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모두 한결같이 삼각산으로 기록하였고 또 다른 이름으로 화산 화악 또는 중악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는 삼각산의 별명으로서 삼각산이라는 본명과는 구별된다.

북한지에서는 "삼각산은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의 세 봉우리가 우뚝 서서 깎아 세운 듯한 세 뿔과 같다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인데, 일명 화산 또는 화악이라고도 한다" 라고 하였다. 지금도 중국 사람들은 중화(中華)라고 나라 이름을 지칭하는데 이것은 자기네 나라가 세계적으로 중심이 되고 기운이 결집되어 꽃같이 피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동서남북 사방의 중심 또는 기가 최종으로 결집되어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상징하여 화산, 화악 또는 중악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조선 초기의 학자 양성지가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 지리산을 남악, 장백산을 북악, 그리고 삼각산을 중악으로 삼자는 진언을 하였는데, 이것은 화악의 다른 이름으로서 동서남북의 구심점이 되는 즉, 전체의 구심점과 중앙이 된다는 뜻으로서 지기가 결집되고 중심이 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조선에서도 삼각산을 대한반도의 구심점(求心點)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산' 이 고려시대부터 천여 년 간 사용해온 '삼각산' 이란 본래의 산 이름을 제치고 일반화 된 것은 1915년에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을 지낸 금서룡에 의한 것으로 본다. 그는 삼각산의 유적을 조사하고 그 보고서의 명칭을 "경기도 고양군 북한산 유적 조사 보고서" 라고 하였다. 그리고 '북한산은 경성의 북방에 솟아 있는 조선의 명산으로, 이 산은 일명 삼각산으로도 일컫고 달리 화산 또는 화악이란 이름도 있다' 고 기록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본다.

 

일제강점기

조선말기 고종의 재임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었으나 일본의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이어 1910년에 합방조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나라의 주권을 뺏기게 되었다.

이에 천도교의 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 선생은 1911년부터 소귀골(우이동)계곡에 봉황각을 짓기 시작하여 1912년 6월에 완공하였다. 여기에서 천도교 지도자들을 수련시켜 3.1운동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시위운동을 가능케 하였으며 중국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러나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도 삼각산이 지닌 면모와 의미를 예사롭지 않게 여겨서 기미만세운동 이후 일본경찰에 의해 봉황각을 비롯한 북한산성안에 있는 대부분의 시설과 사찰을 불태웠다고 하며 1927년에는 민족정기를 훼손하려 백운봉에 쇠난간을 설치하고 철심을 박았다. 하지만 광복이 된 지35년이 지나서 1980년대에 그때 박았던 철심을 모두 찾아 철거되었다.

 

삼각산(三角山)은

도성 북쪽 30리 양주(楊州) 땅에 있는데 일명은 화산(華山)이요,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연이어진 봉우리와 첩첩한 묏부리가 잇따라 뻗어와서 서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러 서남쪽에서 도봉산(道峯山)이 되고 또 북산(北山)이 되니, 사실 경성의 진산(鎭山)이다.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으니 곧 이 북산이다. 백운(白雲)ㆍ만경(萬景)을 국망(國望)이라고도 하고, 인수(仁壽)의 세 봉우리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세종이 규표(圭表)를 바로할 때에, 세조 및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다른 유신(儒臣)들을 시켜서 이 산의 보현봉(普賢峯)에 올라가 해의 출입하는 곳을 관찰하게 하였는데, 돌길이 위험하고 그 아래가 한량없이 깊으니 안평대군 이하는 눈이 아찔하고 다리가 떨려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지만, 세조는 걸어가기를 나는 듯이 하며, 순식간에 올라가고 내려오니, 보는 이들이 절찬 탄복하면서 따를 수 없다고 여겼다. 만경봉이 동쪽으로 굽어 돌아서 석가(釋迦)ㆍ보현ㆍ문수(文殊) 등의 여러 봉우리가 되었는데, 보현봉의 갈라진 산기슭이 곧 도성의 주맥(主脈)이기 때문에 총융청(摠戎廳)에서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주관하여 보축(補築)하였다.

문수봉의 동쪽 가지가 형제의 두봉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구준봉(狗蹲峯)ㆍ백악산(白岳山)이 되며, 문수봉의 서쪽 가지가 칠성봉(七星峯)이 되고, 거기서 두 갈래로 나뉘어 떨어져서 나한(羅漢)ㆍ증봉(甑峯)ㆍ혈망(穴望)ㆍ의상(義相)의 여러 봉이 되어 중흥 수구(重興水口)에 이르며, 한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서 승가사(僧伽寺)의 비봉(碑峯)과 불암 향림사(佛巖香林寺)의 후봉인 백운봉(白雲峯)이 되며, 서쪽으로 돌아서는 영취(靈鷲)ㆍ원효(元曉)의 두 봉이 되어 중흥 수구에 와서 멈춘다. 

태조(이성계)가 잠저에 있을 때에 일찍이 이 산에 올라 시를 짓기를, “손 내밀어 덩굴 붙들며 푸른 봉우리 올라가니, 한 암자 높게도 백운 중에 누워 있네, 눈앞의 보이는 곳 다 우리 땅이라면, 오월(吳越) 강남(江南)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리.” 하니, 그 넓은 마음 큰 도량을 언어로 형용할 수 없다.  

 

고려 정종(靖宗) 원년에 적석정(積石頂)에 운석(隕石)이 있었다. 예종(睿宗) 원년에 이 산의 부아봉(負兒峯)이 무너졌으며 2년에도 무너졌다. 희종(熙宗) 6년에 산의 중봉(中峯)이 무너졌으며, 공민왕(恭愍王) 23년에도 중봉이 무너졌다. 신우(辛禑) 원년 6월에 크게 비가 와서 국망봉이 무너졌으며, 우리 조정 선조 30년에 산중에서 소리가 우레처럼 났다.  기우제(祈雨祭)에는 초차(初次)에 당상 3품관이, 6차에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며, 기설제(祈雪祭) 재차에는 근시관이 드린다.

 

서울특별시 도봉구·강북구·종로구·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에 걸쳐 있는 산. 높이 837m. 최고봉인 백운대(白雲臺)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仁壽峯), 남쪽에 만경대(萬景臺)가 있어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한다. 그 밖에 한산(漢山)·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嶽)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북한산은 중생대말에 관입한 화강암이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지표에 노출된 뒤 절리와 표면의 풍화작용으로 현재와 같이 산세가 험준하고 경사가 심한 암벽 봉우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상장봉(上將峯), 남쪽으로는 석가봉(釋迦峯)·보현봉(普賢峯)·문수봉(文殊峯) 등이 있다.

 

여기서 다시 문수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나한봉(羅漢峯)·응봉(鷹峯) 등의 줄기가 백운대 서쪽 줄기인 원효봉(元曉峯) 줄기와 만난다. 식생과 동물로는 미선나무군락·나도국선나무·백선나무 등 희귀식물이 분포하고 살쾡이·오소리·흰족제비 등 20여 종의 포유동물과 홍방울새·찌르레기·쇠딱다구리 등 50여 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북한산은 서울에 근접해 있으면서 자연 경관이 뛰어나 1983년 4월 경관의 보존과 합리적 이용을 도모하기 위하여 도봉산(道峯山 )일대와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나한봉에서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1711년(숙종 37)에 축조된 연장 8㎞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있으며, 지금도 14개의 성문 중 대서문(大西門)·대남문(大南門)·대성문(大成門)·보국문(輔國門)·대동문(大東門)·용암문(龍巖門) 등이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이곳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곳을 찾았다고 하며,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조를 위하여 도읍지를 정할 때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에 올랐다가 서남쪽으로 비봉(碑峯)에 이르렀다고 하여 만경대는 일명 국망봉(國望峯)이라고도 불린다. 비봉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국보 제3호)가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밖에 북한산구기리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215호)·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 보물 제611호)·태고사원증국사탑(보물 제749호)·동장대지(東將臺址) 등 많은 유물·유적지가 있으며, 상운사(祥雲寺원효암(元曉庵진관사(津寬寺승가사(僧伽寺회룡사(回龍寺광법사(廣法寺문수사(文殊寺)·원통사(圓通寺)·화계사(華溪寺도선사(道詵寺) 등 30여 개의 사찰이 있다.

중흥사지(重興寺址)는 북한산에서 가장 큰 사찰로 승군의 총지휘를 맡았던 곳이었으나, 갑오경장 이후 승군이 해산되고 고종 말년에 모두 불타 지금은 초석만 남아 있다. 교통이 편리하여 서울 시민의 등산 코스로 많이 이용되며, 정상에 오르면 서울 시가지는 물론 멀리 황해까지 보인다.


칸보이 2010.01.04 12:28

'慰禮城 地名由來'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땅이름  (0) 2010.09.30
국사연표  (0) 2010.09.30
삼각산 유래  (0) 2010.09.30
삼각산이 어디죠?  (0) 2010.09.30
'위례'는 '크고 많음' 또는 '울-우리-울타리'의 뜻으로 추정   (0) 2010.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