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서울 땅이름

吾心竹--오심죽-- 2010. 9. 30. 15:58

970905 일제서울 강의 1900(2시간)     연세대사회교육원   땅이름연구 과정   강의-배우리

940317 일제서울 강의 14시(2시간)     서울시립대   시민 교양 강좌    `서울의 지명-배우리

 

 

(글쓴이 : 배우리)

 

 

서울 땅이름과 일제에 의한 상처

 

배 우 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서울 안의 땅이름들은 원래 민중 속에서 자연스럽게 불러 온 토박이 땅이름들이 많았으나, 문자 생활이 한자식으로 거의 일관됐던 왕조시대에 이 이름들은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그 원형을 많이 잃었다. 그래서, '새터'가 '신기(新基)'가 되고 '논고개'가 '논현(論峴)'이 되었다. 한자식으로의 표기 과정에서 원형이 바뀌긴 했으나,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유추해서 본꼴을 알아 낼 수 있는 정도의 변경이었기에 그래도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표기돼 왔던 땅이름들이 핸정 구역의 개편으로 크게 상처를 잃고, 그 원형에서 크게 멀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일제 때에 심했다.

일제는 우리 땅을 침탈한 이후, 행정지명(行政地名)을 대대적으로 크게 바꾸어 버렸고, 산이나 내와 같은 자연물의 이름도 많이 고쳐 버렸다. 행정구역의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때는 1914년 4월이었다.

 

□ '왕(王)'자를 '왕(旺)'자로 바꾼 예 많아

 

행정구역의 개편에 의한 땅이름 변경 작업에 따라 원래의 이름이 아예 없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비슷한 다른 한자로 바뀌어 버리기도 했다. 어느 것은 아예 우리 옛 땅이름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인사동(仁寺洞)', '은평구(恩平區)' 등 법정 땅이름의 대부분은 일제 때 정해진 것이다.

고의적으로 음(音)만 같게 하고, 다른 글자로 취한 것도 있었다.

서울의 '인왕산'은 그 대표적 예이다.

이 산은 원래 지금과는 글자가 다른 '인왕산(仁王山)'이었다. 인왕산은 '인왕도량(仁王道場)'의 그 '인왕'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인왕도량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국가적 행사로 개최된 호국법회의 하나였다. 이 법회는 <인왕경(仁王經)>의 내용에 의하여 개최되었는데, <인왕경>은 인왕(仁王)이 16대국의 국왕에게 교시한 바와 같이 부처님이 제왕들을 대상으로 나라의 평안을 위하여 심법(深法)을 설한 경전이다. 따라서, 이 산은 조선 5백년을 두고 계속 그렇게 불러 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옛 문헌, 옛 지도나 옛 그림 등에는 분명히 옛 이름인 서울 북악 서쪽의 산이 '인왕산(仁王山)'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일제는 어느 때부터인지 슬그머니 이 산에 대한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 바꾼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 초기의 지도엔 '인왕산'이 그대로 우리의 원이름대로 나와 있고, 후기 지도엔 '인왕(仁旺)'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 중기 이후로 정식 절차도 없이 슬그머니 바꾸어 표기한 듯하다. '왕(旺)'은 '일본'의 '일(日)'자와 '왕(王)'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은 '일본이 왕(조선)을 누른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성남시를 흐르는 '대왕천(大旺川)'도 원래는 '임금왕(王)'자 들어간 '대왕천(大王川)'이었다.

서울 인왕산에서 발원하여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줄기의 안쪽을 따라 흘러 지금의 청파동과 용산 전자상가를 지나 원효로4가에서 한강으로 유입하는 서울 서부 지역의 한강 지류는 원래 덩굴풀이 많아 '만초천(蔓草川)'이라고 불렀던 유명한 내였다. 그러나, 일제는 자기들이 집단 주거지 지역을 관통하는 이 내의 이름을 자기 나라에 있는 '아사히가와(욱천=旭川)'란 이름을 옮겨 붙였다.

'안양천(安養川)'이란 이름도 일제가 붙인 땅이름이다. 원래 이 내에는 갈대가 많아 옛날부터 '갈내' 또는 '갈천(葛川)'이라고 부르던 내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 내가 안양 지역을 지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옛날부터 불러 오던 '갈내' 같은 이름은 없애 버리고, '안양천(安養川)'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

^일제의 '땅이름바꾸기' 속셈

일본은 우리 땅의 땅이름을 바꾸어 나갈 때 '행정구역 정리'라는 허울좋은 이유를 붙였다. 행정구역이 달라졌으니, 지역 명칭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지명 변경의 이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구실일 뿐이다. 행정구역을 변경하더라도 이름을 바꾸지 않고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얼마쯤이라도 있었다.

땅이름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 민족의 얼을 묶는 중요한 무형적 재산이다. 따라서, 일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이 땅에 남아 있는 땅이름을 퇴색시켜서 우리의 민족 정신을 말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식민지시대에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하나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한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또, 그들식의 땅이름을, 또는 일본에 있는 그대로의 땅이름을 우리 땅 곳곳에 하나하나 붙여 나감으로써 이 땅이 한국 땅이 아닌 일본 땅임을 새겨 나가려는 저의 깔려 있었음도 볼 수 있다.

식민지시대에 추진해 나간 일제의 '땅이름바꾸기' 작업은 꾸준히 계속되었으나, 땅이름은 한번 붙여지면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 끈질긴 속성과 우리 민족의 비협조로 인해 그들의 목적은 쉽게 성취되지 못하였다.

그런 중에 1945년에 우리가 35년간의 지배에서 벗어남으로써 더 이상의 땅이름의 훼손을 막을 수 있었다.

 

□ '왕(王)'자를 '왕(旺)'자로 바꾼 예 많아

 

광복 이후, 우리는 일제가 붙인 땅이름을 많이 정리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의 행정구역을 거의 그대로 존속시켜 식민지시대 이전의 상태로는 돌려 놓질 못했다.(표1 참조)

1945년 8월 15일, 나라에서는 일제 때 '경성부'라 불리우던 우리의 수도를 '서울시'로 개칭하였다.

1946년 8월 18일엔 법령 108호로 서울을 '특별자유시'로 승격시켰고, 그 해의 10월 1일에는 일본식의 통(通) '정(町)'을 우리식 '로(路)'와 '동(洞)'으로 개칭하였다. 이어서, 그 달 18일에는 군정 법령 108호로 경기도 관할에서 서울을 분리하여, '서울특별시'로 승격시켰다.

우리의 수도를 일본식 잔재인 '경성'을 청산하고, '서울'이란 땅이름으로 정한 것은 잘 한 것이나. 일제 때의 땅이름을 그대로 둔 것이 서울만 해도 무척 많다.

'만초천'이 아직도 일제가 붙인 '욱천(旭川)'이란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가 하면, 일본인의 별장이 있었던 한강가의 흑석동 일부는 당시 일본인 별장 이름 그대로 '명수대(明水臺)'로 통하고 있다. 이 곳의 교회 이름, 성당 이름, 아파트 이름까지도 '명수대'이다. 이 곳의 초등학교 이름도 원래 '명수대초등학교'였으나, 97년 봄학부터 '흑석초등학교'로 바꾸었다.

중국인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이 있었던 곳이어서 일제 때 '태평통'이라고 붙여졌던 곳은 '통(通)'을 '로(路)'자로만 바꾼 채 '태평로'란 이름을 달고 서울 중구의 정식 행정지명으로 자리잡내고 있다.

쌀 창고가 있어서 일제 때 '북미창정(北米倉町)'과 '남미창정(南米倉町)'이라고 불렀던, 남대문 근처의 동네는 해방 후에 왜식 동명을 없앤다고 '북창동', '남창동'이라고 고쳐 짓기는 했지만, 일제가 지은 이름에서 겨우 '쌀미(米)'자만 빼고 정한 것이어서 개운치가 않다.

서울의 구(區)이름 중의 하나인 '은평(恩平)'도 일제의 잔재이다. '은평'은 일제가 1911년 경기도령(京畿道令)으로 경성부의 성외 8면을 정할 때 당시 이 지역의 '연은방(延恩坊)'과 '상평방(常平坊)'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

한강 가운데의 섬을 아직도 '중지도(中之島)'로 부르는 것도 문제다. '중지도'는 지명이라기보다는 '가운데의 섬'이란 뜻의 일본어이다. 일제는 한강의 섬들을 자기 멋대로 이름을 짓거나 고쳤는데, 그 중 몇 개의 섬은 이름 아닌 이름인 '중지도'(일본말로는 '나카노시마')로 불러 왔고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했다.

서울의 예만 들었지만, 이러한 상황은 전국 어디나 마찬가지다. ///

 

□ 서울이 도읍으로 정해진 배경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새 도읍터를 한양(漢陽.서울)으로 정할 때 가장 눈여겨 본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땅모양과 방어상의 우수성이었다. 당시에 무학대사, 조준(좌정승), 김세형(우정승) 등은 지금의 서울터를 보고 경치가 좋고 산으로 둘러싸여 수도로서 가장 알맞은 터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북쪽에 화산(華山;삼각산)으로 진산을 삼았으니, 용이 내리고 범이 쭈그려 앉은 형세가 있고 남쪽은 한강으로 띠를 둘러---- 정말 산과 강이 잘 어울어진 곳이다'라고 하여 서울의 땅모양이 지리.방어상 최적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울은 북쪽의 북악산(北岳山;342m), 동쪽의 낙산(駱山.駱駝山;125m), 남쪽의 목멱산(木覓山.남산;262m), 서쪽의 인왕산(仁王山;338m) 등 4개의 산이 가까이 울타리를 치고 있으며, 그 밖으로 북쪽의 북한산(北漢山;836m), 동쪽의 용마산(龍馬山;348m), 남쪽의 관악산(冠岳山;632m), 서쪽의 덕양산(德陽山;125m) 등 4 개의 산이 외곽을 튼튼히 두르고 있다. 안쪽 4 개의 산을 '내사산(內四山)'이라 하고, 바깥쪽 4 개의 산을 '외사산(外四山)'이라 한다.

내사산의 안쪽을 청계천이 흐르고 있고, 또 남쪽으로 한강이 외곽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면서 수운(水運)에 큰 구실을 하고, 그 유역에 넓은 평지를 이루어 놓아 주거 지역으로 알맞아 수도(首都)로서 최적의 여건이었다.

그리고, 국토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정치 중심지로 삼기에 더없이 좋았다.

태조 이성계는 이러한 서울의 좋은 입지 조건에 만족, 전국의 여러 후보지 중에 이 곳을 선택하고, 나라를 세운 1392년의 2년 후인 1394년에 고려의 5백 년 서울이었던 개성을 버리고 역사적인 천도를 단행했다.

 

□ '서울'은 '머릿도시'의 뜻

 

'서울'이라는 지명을 두고 항간에서 그 유래를 엉뚱하게 전하는 사람이 있어 혼선을 야기시키고 있다.

첫째, 서울이라는 지명이 '눈(雪)의 울타리'라는 뜻의 '설(雪)울'에서 왔다는 설이다. 조선 초에 서울에 성을 쌓는데, 하루는 눈이 많이 와서 그 눈의 녹은 자국을 따라 성을 쌓아 '설울'이 됐다는 것이다.

둘째, 서울은 성(城)으로 둘러싸여 '성(城)의 울타리'라는 뜻에서 '성(城)울'이었는데, 그것이 변해 '서울'이 됐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말일 뿐,아무런 역사적 근거나 문헌-어원적 근거가 없다.

'눈의 울타리'의 '설(雪)+울' 또는 '성(城)의 울타리'의 '성(城)+울'이 변해 '서울'이 되었다는 주장은 우선 '설(雪)울-성(城)+울'이라고 하는, 한자말과 우리말의 복합 관계가 매우 부자연스럽고,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설울-성울'이 '서울'로 되었다는 주장은 우리말의 보편적 변화 과정으로 볼 때 타당하지 못하다.

서울'은 신라 때부터 써 온 말임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울'은 '서벌' 또는 '서라벌'이 그 바탕일 것으로 보이는데, 고 양주동 님이 한글로 풀이한 신라 시대의 향가 <처용가(處容歌)>의 '서벌'도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말로 보고 있다.

     '새벌 발기다래      (東京明期月良)

     밤드리 놀니다가    (夜入伊遊行如何)    

     드러사 자래보곤    (入良沙寢矣見昆)

     가라리 네히러라    (脚烏伊四是良羅)

     두블흔 내해엇고    (二 隱吾下於叱古)

     두블흔 뉘해언고    (二 隱誰下焉古)

     미틔 내해다마난  (本矣吾下是如馬於隱)

     아사날 엇디하릿고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이 노래에 담긴 뜻은 이러하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아내의 것이지만 둘은 또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아내이지만 빼앗은 것을 어찌할 것인가?'

이 노래의 가장 앞에 '새벌(새발 새벌)'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새잘(새절)은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해당하고, 이것은 당시의 말로 '수도(首都)'에 해당하며, 신라 경주의 한자식 이름인 '서벌(徐伐)' 또는 '서라벌(徐羅伐.徐耶伐)'이 바로 이 '새벌'의 음차식(音借式) 표기로 여겨지고 있다.

학자들은 국호인 '신라(新羅)'나 '시림(始林)'도 ' 새벌)새불-새풀'이 음차된 이름으로 보고 있으며, 백제의 수도인 '소부리(所夫里=부여)'나 고려의 수도인 '송악(松岳)'과 태봉의 수도인 '철원(鐵原)' 등도 모두 '새벌'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의 뜻인 이 '서벌-새벌'은 그 뒤로 조금씩 음이 변하면서 지금의 '서울'이라는 말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훈민정음이 나오고 난 후의 조선 시대의 문헌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 '셔블 적신(賊臣)이 잇고'<용비어천가>(37)

  * '슬피 셔울흘 사랑하노라'<두시언해>(초.15;52)

  * '가난 비난 셔울로 도라가놋다'<두시언해>(초.24;45)

문헌들에서는 지금의 '서울'이라는 말이 이처럼 '셔블','셔울' 등으로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보아서 신라 초 이래로 '머릿고을(首都)'의 개념으로 계속 써 왔던 '서울'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소리 변화 과정을 거쳐 정착된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새벌>셔벌>셔블>셔불>셔울>서울  ///

 

-위 내용에서 컴퓨터상으로 옛 글자 지원이 안 되어 요즘 글자로 비슷한 글자로 넣은 것이 있습니다.

  (글 :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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