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어라하, 건길지, 대형, 태대형에 대한 짧은 생각

吾心竹--오심죽-- 2010. 10. 11. 10:47

 

어라하, 건길지, 대형, 태대형에 대한 짧은 생각 (1/3)

2007.06.06 01:29 | 우리 역사 이야기 | buja100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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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하(於羅瑕), 건길지(吉支)는 백제(百濟)에서 임금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백제(百濟)와 관련된 말이므로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올 것
같지만
그 책들에는 나오지 않고 북주(北周)의 역사책인 주서(周書)에 나온다.


김부식(
金富軾, 1075-1151)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編纂)할 때 신라(新羅)의
경우는
임금을 나타내는 말을 신라 말로 적었지만, 고구리(高句麗)와 백제(百濟)는
한자어(漢字語)
인 왕(王)으로 적었다.




[김부식(金富軾)]


신라(新羅) 말로 임금을 칭(稱)하는 말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삼국사기
(三國史記) 권제4(券第四) 신라본기(新羅本紀) 제4(第四) 지증마립간
(智證麻立干)
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論曰                  논(論)하여 말한다.
  新羅王稱居西干者一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이라 칭(稱)한 임금이
                       
한 분이요,
 
次次雄者一            차차웅(次次雄)이라 부른 임금이 한 분,
 
尼師今者十六          니사금(尼師今)이라 부른 임금이 열 여섯 분
 
麻立干者四            마립간(麻立干)이라 부른 임금이 네 분이다.
 
羅末名儒崔致遠        신라(新羅) 말(末) 유명한 유학자(儒學者)인 최치원(崔致遠)이
 
作帝王年代曆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쓸 때
 
皆稱某王              모두 무슨무슨 왕(某王)이라고 부르고
 
不言居西干等          거서간(居西干) 등(等)은 언급(言及)하지 않았다.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그 말이 더럽고(鄙) 세련되지 못해서()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일까?
                       
(요즘 말 : 그 말이 쪽팔려서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일까?)
 
曰左漢中國史書也      말하기를 좌전(左傳)과 한서(漢書)는 중국(中國)의 역사서
                        (歷史書)이지만,
 
猶存楚語穀於(艸+兎)   오히려(猶) 촉(楚)나라 말인 곡어토(穀於(艸+兎))와
 
匈奴語撑犁孤塗等      흉노(匈奴) 말인 탱리고도(撑犁孤塗) 등을 보존하였다.
 
今記新羅事            이제 신라(新羅)의 일을 적는데
 
其存方言              그 말을 보존(保存)하는 것이
 
亦宜矣                또한 마땅하다고 본다.

 

최치원(崔致遠)이 신라(新羅) 임금의 칭호(稱號)를 전부 왕(王)으로 통일한데 반하여,

김부식(金富軾)은 오히려 신라(新羅) 고유(固有)의 말을 그대로 썼다. 


고구리(高句麗)와 백제(百濟)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어떻게 나와있는지 보자.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40(券第四十) 잡지(雜志) 제9(第九)에 나오는 내용(內容)이다. 



  高句麗百濟職官                 고구리(高句麗), 백제(百濟)의 관직(官職)은
 
年代久遠                       연대(年代)가 오래 되고
 
文墨晦昧                       사료(文墨)가 모호해서
 
是故不得詳悉                   이런 연유로(是故) 상세(詳)하게 전체(悉) 내용을
                                
알 수가 없다.
 
今但以其著於古記及中國史書者   이제 단지 옛기록(古記)들과 중국사서(中國史書)에
                                
적힌 것만
 
爲之志                         적도록 한다.
 
隋書云                         수서(隋書)에서 이르기를
 
高句麗官有太大兄次大兄         고구리(高句麗) 관직에는 태대형(太大兄)이 있고,

                             그 다음에는 대형(大兄)이 있으며, 
  ...
                            ...
 
北史云                         북사(北史)에서 이르기를
 
百濟官有十六品                 백제(百濟) 관직에는 십육품(十六品)이 있으니
 
左平五人一品                   좌평(左平) 다섯 명은 일품(一品)이요,
 
達率三十人二品                 달솔(達率) 삼십 명은 이품(二品)이요,
  ...                            ...

 

김부식(金富軾)은 중국의 역사책(歷史冊)인 수서(隋書)와 북사(北史)를 언급했다.


(개인적으로 한족(漢族)과 중국(中國)은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한족(漢族)은 대대로 북방(北方) 민족(民族)들의 노예(奴隸) 민족이었다.

한족(漢族)의 조상들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면 별로 자랑할 만한 역사가 없으니까,

중국(中國)이라는 이름으로 노예들이 자기 주인(主人)들의 역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일본(日本)도 한 때 중국을 지배했는데, 한족(漢族)들이 왜 메이지(明治)도 자기 조상

이라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자랑스럽게 세계 강대국들과 전쟁을 벌였다고 떠벌릴 수 있고 일본 열도(列島)

까지 자기들 땅이라고 우길 수 있을텐데…)



수서(隋書)와 북사(北史)당(唐)나라 초(初)에 이전 왕조(王朝)들의 역사(歷史)들을

정리하면서 쓴 책이다.

주서(周書)도 같은 시기(時期)에 쓰여진 책이다.


김부식(
金富軾)이 주서(周書)를 읽지 않았을 리가 없을텐데 왜 어라하(於羅瑕), 건길지

(吉支)를 빠뜨렸는지는 알 수 없다.

예전의 평가(評價)처럼 김부식(金富軾)이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라서 그런걸까?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여러 부분을 보면 김부식(
金富軾)을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라고

볼 근거(根據)가 없다.

또한 요즘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아마 백제(百濟)의 어느 임금이 어라하(於羅瑕)라는 호칭을 썼는지, 어느 임금이 왕(王)

이라는 호칭을 썼는지 알 수 없어서 뺀 것 같다. 


주서(周書)에 적힌 백제(百濟) 관련기사를 보도록 하자.


여기서 말하는 주(周)나라는 하(夏)-상(商)-주(周)-춘추(春秋)-전국(戰國)의 주(周)가

아니라 우문각(宇文覺)이 AD 557 년에 세우고 이후 AD 581 년에 멸망한 북주(北周)

말한다.


우문각(宇文覺)의 성(姓)은 우문(宇文)이다.

한족(漢族) 출신이 아니라 선비족(鮮卑族) 출신이다.

주서(周書)에 의하면 선비(鮮卑) 말로 하늘을 우(宇)라 하고 임금을 문(文)이라 하기

때문에 "하늘 임금"이라는 의미(意味)로 우문(宇文)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주서(周書) 권49(卷四十九) 열전(列傳) 제41(第四十一) 이역(異域) 상(上)
고리(高麗) 백제(百濟) 만(蠻) 로() 탕창(宕昌) 등지(鄧至) 백란(白蘭) 저()
계호(稽胡) 고모해(庫莫奚) 중 백제(百濟)에 대한 내용이다.


 
百濟者                백제(百濟)라는 나라는
 
其先蓋馬韓之屬國      그 초기(先)에는 대체로 마한(馬韓)의 속국(屬國)이었다.
 
夫余之別種            [백제인은] 부여(夫余)에서 갈라져 나온 종족(種族)이다.
 
有仇台者              구이(仇台)라는 사람이
 
始國於帶方            처음에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웠다.
 
故其地界東極新羅      그러므로 그 땅의 경계는 동쪽 끝에 신라(新羅)가 있고
 
北接高句麗            북쪽에는 고구리(高句麗)와 접(接)하며
 
西南俱限大海          서남쪽은 모두(俱) 큰바다로 막혀있다(限).  
 
東西四百五十里        동서(東西)가 450 리(里)요,
 
南北九百餘里          남북(南北)은 구백여 리(里)다.
 
治固麻城              [백제는] 고마성(固麻城)을 다스린다.
 
其外更有五方          그외에 또한(更) 다섯 지역이 있으니
 
中方曰古沙城          가운데는 고사성(古沙城),
 
東方曰得安城          동쪽은 득안성(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남쪽은 구지하성(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서쪽은 도선성(刀先城),
 
北方曰熊津城          북쪽은 웅진성(熊津城)이다.
 
王姓夫余氏            임금의 성(姓)은 부여(夫余) 씨(氏)다.
 
號於羅瑕              [임금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른다.
 
民呼爲吉支          백성들은 [임금을] 건길지(吉支)라고 부른다.
 
夏言竝王也            화하어(華夏語, 한족어)로 모두(竝) 왕(王)이라는 뜻이다.
 
妻號於陸              왕후(王后)는 어륙(於陸)이라고 부른다.
 
夏言妃也              화하어(華夏語)로 비(妃)라는 뜻이다.
 
官有十六品            관직(官職)은 열여섯 개의 품(品)으로 나눠져 있다.
 
左平五人一品          좌평(左平) 다섯 명이 일품(一品)이요.
  ...                   ...

주서(周書)를 편찬(編纂)한 이는 영호덕분(令狐德, AD 583-666)인데, 우리나라
삼국시대(三國時代) 말기(末期)에 살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백제(百濟) 왕성(王姓)을 부여(夫余)씨라고 한 것은 의자왕(義慈王)
아들들이
부여융(扶餘隆), 부여풍(扶餘豊)인 것을 보면 이해된다.


백제(百濟) 건국세력(建國勢力)은 부여(夫餘)에서 갈라졌으므로 백제(百濟)
초기(初期)의
왕성(王姓)은 당연히 해(解)씨다.  




어라하(於羅瑕), 건길지(吉支), 대형(大兄), 태대형(太大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자료(資料)들이 인터넷에 돌고 있지만 나 또한 나름대로
할 말이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2부에서 계속하도록 한다.

 

어라하, 건길지, 대형, 태대형에 대한 짧은 생각 (2/3)

2007.06.17 01:26 | 우리 역사 이야기 | buja100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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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하(於羅瑕)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한다.


1. 어라하(於羅瑕)

어라하(於羅瑕)의 하(瑕)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받침 없는 것만 빼면 (瑕)는 우두머리, 수장(首長)을 의미하는 우리말의 "한(翰,邯)",

"간(干)"과 음(音)이 비슷하다.

받침이 없으면서 우두머리나 수장(首長)을 가리키는 말로는 "가(加)", "개(皆)"

있다.

, 간, 하, 가, 개에 대해 정리(整理)하면 아래 표(表)와 같다.

 

<ㅎ>으로 시작

<ㄱ>으로 시작

받침있음

(翰, 邯)

(干)

받침없음

(瑕)

(加), 개(皆)


  [사용 예]
  한(翰, 邯) :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
  간(干)     : 각간(角干), 칭기즈칸
  하(瑕)     : 어라하(於羅瑕)
  가(加)     : 고추대가(古鄒大加),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개(皆)     : 개차정(皆次丁)=옥기현(玉岐縣) 
               <玉岐縣 一云皆次丁 : 삼국사기 잡지 제6 우수주>
              
(옥기현(玉岐縣)에서 옥(玉)자는 왕(王)자의 잘못으로 보인다 : 내 생각)

어떤 글자는 <ㅎ>으로 적고 어떤 글자는 <ㄱ>으로 적는데, 이는 실제 발음(發音)이 <ㅎ>과

<ㄱ>의 중간음(中間音)인 <ㅋ>으로 나서 그때그때 들리는 대로 "하, 한" 또는"가, 간"으로

적은 것 같다.


위의 표(表)에서 알 수 있듯이, 어라하(於羅瑕)의 하(瑕)는 우두머리, 수장(首長)을
가리키는
글자군(群)에 속하며 그 중에서도 임금(王)을 가리킨다.

주서(周書)에 백제(百濟)의 임금을 어라하(於羅瑕)로 부른다고 하였으니 하(瑕)가
임금의 뜻
임은
당연하다. 


다음은 어라하(於羅瑕)에서 어라(於羅)를 풀이해 보도록 하자.

임금을 가리키는 백제(百濟)의 또 다른 칭호(稱號)을 보면 그 의미(意味)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주서(周書)에는 백제의 임금을 가리키는 칭호(稱號)로 어라하(於羅瑕) 말고도
건길지(鞬吉支)
적혀있다.

건길지(鞬吉支)에서 건()"크다"의 "큰"을 한자(漢字)로 음차(音借)한 글자다.


어라하(於羅瑕)와 건길지(鞬吉支)를 비교하면 어라(於羅)는 건(鞬)에 대응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어라(於羅)는 "크다"라는 뜻을 갖는다고 유추(類推)할 수 있다.


어라(於羅)가 "크다"의 뜻인데 대한 다른 증거로는 한강의 옛이름인 아리수를 들 수 있다.


한강이 아리수로 불렸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지
못해 늘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참에 한 번 찾아 보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아리수"가 적힌 대목을 찾지 못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에 "아리수"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에서 관련(關聯) 대목을 여기에 적는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아(惟)! 옛날 시조(始祖) 추모(鄒牟) 임금의 터(基)를
                           닦으심이라!

  出自北夫餘天帝之子       북부여(北夫餘) 천제(天帝)의 아드님으로부터 태어나셨다.

  母河伯女郞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女郞)이셨다.

  剖卵降世                 알을 깨고(剖) 세상에 내려오시니

  生[而*]有聖■■■■■    나면서부터 성(聖)스러움이 있었다 [판독불가]

  ■命駕                   [판독불가]멍에(駕)를 명(命)하시고

  巡幸南下                 남쪽으로 내려(南下) 오시다가(巡幸)

  路由夫餘奄利大水         길(路)이 부여(夫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지나가게 되었다(經由).

  王臨津言曰               임금님이 나룻터(津)에 이르러 가라사대

  我是皇天之子             나는 해님(皇天:日)의 아들이요,

  母河伯女郞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女郞)이신

  鄒牟王                   추모왕(鄒牟王)이다.

  爲我連浮龜               나를 위하여 거북이들을 띄어 연결하라 하셨다.

  應聲卽爲連浮龜           그 말씀(聲)에 응(應)하여 거북이들이 떠올라 연결되니

  然後造渡                 그런 후에 [다리를] 만들어(造) [강을] 건넜다(渡).

  於沸流谷忽本西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城山上而建都焉           성산(城山) 위에 서울을 세웠다.

  ...                      ...
  ...                      ...
  ...                      ...
  殘不服義                 백잔(百殘 : 백제)은 의(義)에 복종(服從)하지 않고

  敢出百戰                 감히(敢) 많은 싸움에 출전(出戰)하였다.

  王威赫怒                 임금(王)의 위엄(威嚴)이 혁노(赫怒)하였다.

  渡阿利水                 아리수(阿利水)를 건너(渡)

  遣刺迫城                 [군사들을] 보내어(遣) [위례]성(城)을 공격하였다.

  ■■[歸穴]■便[圍]城     [판독불가][구멍으로 돌아가다][판독불가] 성(城)을
                           포위하였다.

  而殘主困逼               백잔(百殘)의 군주(君主)가 곤란함을 겪었다.

  獻出男女生口一千人       남녀(男女) 천 명(名)과

  細布千匹                 올이 가는 피륙(細布) 천 필(匹)을 바쳤다.

  王自誓                   [백제의] 임금이 스스로 맹세(盟誓)하여 가로되

  從今以後                 오늘 이후(以後)로

  永爲奴客                 영원히(永) 나라(奴, 고구리(高句麗))의 손(客)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

  지금까지 노()는 노비(奴婢)의 뜻으로 해석하여 노객(奴客)을 백제(百濟) 임금이
  자신을
낮춰부르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定說)이었다.

  하지만 고구리(高句麗)의 오부(五部) 중 네 부(部)가 노(奴)를 쓴다.

  (소노(消奴), 절노(絶奴), 관노(灌奴), 순노(順奴))

  노()를 노비(奴婢)의 뜻으로 해석하면 고구리인(高句麗人)들이 스스로를 비하(卑下)
  한 꼴이
되니 노()를 단순히 지금의 한자 뜻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무리(無理)
  가 있다.

  노()자에는 분명 다른 뜻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제사(雜志第四)에 보면


   
黑壤郡本高句麗今勿奴郡 : 흑양군(黑壤郡)은 본래 고구리의 검을노군(今勿奴郡)이다.


 
라는 말이 나온다.

  노(奴)가 흙 양(壤)에 대응(對應)함을 할 수 있다.

  흙은 곧 땅이므로 노(奴)는 나(那) 또는 나라(國)와 같은 뜻으로,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이
자신(自身)들을 지칭(指稱)할 때 썼던 말이다.

  역사스페셜에서 신라(新羅)가 고구리(高句麗) 땅의 일부(一部)를 점령(占領)한 후에
  그 지역
사람들에게 노인법(奴人法)을 시행(施行)했다고 하면서 노인(奴人)은 신라
  (新羅)에 편입된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을 낮춰 부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위의 예(例)에서 알 수 있듯이 노인(奴人)은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을 낮춰
  부르는
말이 아니라 나라사람(奴人) 즉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名稱)일 뿐이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백제(百濟) 위례성(慰禮城)을 치기 위해 건너간 아리수
(
阿利水)가 지금의 한강이다.


[한강-아리수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


그런데 한강만 아리수인 것은 아니다.

한강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또 하나의 아리수가 나온다.

바로 압록강(鴨綠江)이다.


압록강(鴨綠江)은 "
기러기가 노니는 푸른 강"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리강(大江)을 한자
(漢字)로
가차(假借)한 표기(表記)로서 "큰 강"이라는 뜻이다.


지도(地圖)를 놓고 보면, 백제(百濟) 건국집단(建國集團)이 부여(夫餘) 혹은 고구리
(高句麗)
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큰 강을 만날 때마다 "아리수"라고 이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압록강(鴨綠江)과 한강]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아리"가 "크다"는 뜻의 순우리말이라고 하는데, 현대(現代) 한국어(韓國語)에 이 말이
아직 쓰이고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나는 예전부터 마음 속에 점찍어 둔 낱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으리으리하다"이다.

집이 으리으리하다할 때의 "으리으리하다"인 것이다.


국립국어원(www.korean.go.kr) 에서 "
으리으리하다"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으리으리하다 [형용사] 모양이나 규모가 압도될 만큼 굉장하다.
                        <고래 등같이 으리으리한 기와집>
                       
<집을 고급 목재로 으리으리하게 꾸몄다>

글자 풀이에서 알 수 있듯이 "
으리으리하다"의 핵심내용(核心內容)은 "굉장히 크다"이다.
크다는 뜻을 강조(强調)하기 위해 "으리"를 두 번 반복(反復)했다.
내 생각에 "으리으리하다"할 때의 "으리"가 현대(現代) 한국어(韓國語)에 남아 있는
"아리(大)"의 흔적(痕迹)으로 보인다.

"어라(於羅)"의 발음(發音)이 "으리"나 "아리"와 유사(類似)하므로 어라(於羅)의 뜻이
"크다(大)"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상(以上)을 종합(綜合)하면 어라하(於羅瑕)의 의미(意味)가 너무나 뚜렷해진다.
어라(於羅)는 "크다(大)"라는 뜻이고 하(瑕)는 임금(王)이라는 뜻이니, 두 낱말을 합치면
"큰 임금" 즉 대왕(大王)이 된다.
백제인(百濟人)들은 자기들의 임금을 대왕(大王) 즉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른 것이다.

그런데 국립국어원(www.korean.go.kr)에서 "으리으리하다"의 뜻을 찾다가 아주 재미있는
낱말을
발견했다.
그 말은 "엄엄하다"인데, 그 뜻을 아래에 적어 본다.

 
엄엄(嚴嚴)하다 [형용사]
   
1. 매우 엄하다.
   
2. 매우 으리으리하다.
      
<그 저택은 마치 궁전처럼 엄엄하였다./엄엄한 행렬이 그 집으로 갈 때까지는
        우
리가 그냥 서 있어도 되지만
>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엄엄하다"의 "엄"자를 보는 순간 뭔가가 뇌리(腦裏)를 스치고 지나갔다.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에서 고구리(高句麗)의 시조(始祖) 추모(鄒牟) 임금
부여(夫餘)
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만난 강(江)이 엄리대수(奄利大水)인데,
엄리대수(奄利大水)의
(奄) 자와 "엄엄하다"의 엄자가 발음(發音)이 같은 것이 아닌가?

엄엄하다의 뜻이 "매우 으리으리하다"이므로 엄엄하다의 엄(嚴)과 엄리대수(奄利大水)의
(奄), 엄리(奄利)는 "크다"는 뜻의 순우리말로 볼 수 있다.

엄리대수(奄利大水) 이름 자체만 놓고 분석(分析)해도 엄리(奄利)가 "
크다"는 뜻의
순우리말
또는 부여(夫餘) 말임을 알 수 있다. 

엄리대수(奄利大水)의 조어법(造語法)역전앞(驛前앞)이나 매봉산(梅峰山)
조어법(造語法)
과 같다.

같은 뜻을 가지는 우리말과 한자어(漢字語)를 나란히 쓴 형태(形態)이다.

 
매봉산(梅峰山) : 매(梅, 산을 가리키는 의 한자표기) + 봉(峰, 산을 의미) + 산(山)
 
역전앞(驛前앞) : 역(驛) + 전(前) + 앞(前)

엄리대수(奄利大水)도 "크다"는 뜻의 부여어(夫餘語) "엄리""크다"는 뜻의 한자어
(漢字語) "
(大)"
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다

 
엄리대수(奄利大水) : 엄리(奄利, 크다) + 대(大, 크다) + 수(水)

엄리대수(奄利大水)는 아리수(阿利水,한강)나 압록강(鴨綠江)과 마찬가지로 이름 자체가
"큰 강"인 또 하나의 강(江)이다.

재미삼아 외국(外國)에도 이름 자체가 "큰 강"인 강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마침 거기에 딱 맞는 강(江)이 하나 있었다. 

미국 콜로라도(Colorado) 주(州) 산 후안(San Juan) 산지(山地)에서 발원(發源)하여

엘 파소(El Paso)를 지나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國境)을 따라 동남쪽 멕시코 만(灣)으로

흘러 들어가는 총길이 3,034 km 의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江)이 그 강이다.


리오 그란데(Rio Grande) 는 스페인어인데, 영어로 직역하면 그레이트 리버 (Great River)
된다.

스페인어

영어

Rio

River

Grande

Great



멕시코인들이 이름 붙였고, 미국인(美國人)들도 멕시코인들을 따라 리오 그란데 강이라고
부른다.

1948년에 만들어진 존 웨인(John Wayne), 몽고메리 클리프트(Mongomery Clift)
주연(主演)의
서부영화(西部映畵) 레드 리버(Red River)에서 레드 리버(Red River)가 
리오 그란데 강을
가리킨다.


그 이름에서 낭만(浪漫)의 정취(情趣)가 물씬 풍기는 리오 그란데 강이 바로
미대륙(美大陸)의
한강이요, 아리수(阿利水)며, 엄리대수(奄利大水)이다.


2. 건길지(鞬吉支)

건길지(鞬吉支)의 건(鞬)은 우리말의 "큰"을 한자(漢字)의 소리를 따서 적은 글자다.

백제(百濟) 임금들 이름에 나오는"근(近)"도 "큰"의 뜻을 갖는다.

 
근초고왕 (近肖古王) : 큰 초고왕(肖古王)
 
근구수왕 (近仇首王) : 큰 구수왕(仇首王)

건길지(鞬吉支)의 길지(吉支)는 임금, 왕(王)의 뜻을 가진다고 추정(推定)할 수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길지(吉支)에 비교할 만한 낱말이 있는지 생각해 봤는데, 별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다만 고구리(高句麗)의 관직(官職)인 막리지(莫離支), 대막리지(大莫離支)
건길지
(鞬
吉支)의 (支)와 동일한 지(支)가 쓰인 것을 보면, 지(支)는 존칭어(尊稱語) -
그것도 신분(身分)이 꽤
높은 사람에 대한 존칭어(尊稱語)라고 추정(推定)해 볼 수 있다. 

건길지(鞬
吉支)의 가운데 글자인 길(吉)은 뜻이 뭘까?

길다(長)의 "길"이 아닐까?


그래서 길지(吉支)는 기신 분(長人) - 보통 사람보다 긴 사람 - 기골이 장대한 사람

뜻이 되어 임금을 칭(稱)하는 말이 되지 않았을까?

앞에 건(鞬)을 붙이면 "큰 기신 분" - "큰 임금" - "대왕(大王)"이 되어 어라하(於羅瑕)
같은 뜻이 된다.

약간 억지스럽지만 건길지(鞬吉支)를 이런 식으로 풀어보는 것이 전혀 납득(納得)이
안되는
바는 아니다.


- 3편에서 계속 -


[참고한 책]
하신(何新) 지음/홍희(洪熹) 옮김, 신(神)의 기원(起源), 동문선(東文選), 1990

[참고 자료]
개차정(皆次丁)=옥기현(玉岐縣) : 도수희(都守熙) 교수(敎授)가 쓴 내용을 참조함.

[수정 내역]
1. 2007.07.06 (금)
  "皇天之子"를 "하느님의 아들"에서 "해님의 아들"로 바꿈.
  그 근거(根據)는 하신(何新)이 쓴 "신(神)의 기원(起源)"이라는 책에 나옴.


    앞에서도 이미 지적했듯이 옛사람들이 말한 황천은 태양신을 가리킨다.
    (황천(皇天)은 또한 광천(光天)이며, 또 고어에서 말하는 광천화일(光天化日)이다.)
    <신의 기원, 제7장 생식신 숭배와 음양철학의 기원에서 (167쪽)>


  유화부인(柳花夫人)이 햇빛을 받아 추모왕(鄒牟王)을 낳았다는 고구리(高句麗)
  신화(神話)를 고려해도 황천(皇天)을 하느님이 아니라 해님으로 보는 것이 맞다.

 

 

어라하, 건길지, 대형, 태대형에 대한 짧은 생각 (3/3)

2007.06.18 01:27 | 우리 역사 이야기 | buja100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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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형(大兄), 태대형(太大兄)

대형(大兄)과 태대형(太大兄)은 고구리(高句麗)의 관직명(官職名)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대형(大兄), 태대형(太大兄)이 나오는 부분(部分)을 여기에
적는다.


권제40(卷第四十) 잡지(雜) 제9(第九) 직관(職官) 하(下) 무관(武官) 중 관련 부분이다.


  高句麗百濟職官                고구리(高句麗)와 백제(百濟)의 관직(官職)은

  年代久遠                      연대(年代)가 오래되고(久) 아득해서(遠)

  文墨晦昧                      기록(文墨)이 애매(曖昧)하다.

  是故不得詳悉                  이런 까닭에 자세하고도(詳) 전체적인(悉) 내용을
                                얻기가 힘들다

  今但以其著於古記              지금은 단지 옛기록(古記)과

  及中國史書者                  중국사서(中國史書)에 적힌 것만

  爲之志                        적도록 한다(爲之志).

  隋書云                        수서(隋書)에 적혀있기를

  高句麗官                      고구리(高句麗) 관직(官)은

  有太大兄次大兄次小兄          태대형(太大兄)이 있고, 다음은 대형(大兄),
                                다음은 소형(小兄),

  次對盧次意奢次烏拙          다음은 대로(對盧), 다음은 의사사(意),
                                다음은 오졸(烏拙),

  次太大使者次大使者次小使者    다음은 태대사자(太大使者), 다음은 대사자(大使者),

  다음은 소사자(小使者)

  次褥奢次屬次仙人            다음은 욕사(褥奢), 다음은 예속(),
                                다음은 선인(仙人)의

  凡十二等                      무릇(凡) 열두 등급(等級)이 있다고 한다.

  復有內評外評五部褥薩          또한 내평(內評), 외평(外評),
                                오부욕살(五部褥薩)이 있다.

  ...                           ...

  [어려운 한자들]

  俟 : [사] 기다리다, 떼지어 가다.

  褥 : [욕] 요(침구)

   : [예] 깃일산

  薩 : [살] 보살


지금은 "大兄, 太大兄""대형, 태대형"이라고 부르지만, 고구리인(高句麗人)들도

"대형, 태대형"이라고 불렀을까?

당시(當時)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이 어떻게 불렀을지 추론(推論)해 본다.


먼저 형(兄)을 보자.

(兄)을 의미(意味)하는 순우리말은 "언니"이다.

언니는 여자 형제(兄弟)들 사이에서 손아래가 손위를 부르는 말일 뿐만 아니라

남자 형제(兄弟)들 사이에서도 손아래가 손위를 부르는 말이었다.


초등학교(初等學校) 졸업식(卒業式)날 부르는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


라는 노래에서 "언니"는  여자 졸업생 뿐만 아니라 남자 졸업생도 포함(包含)한다.


일본(日本)에서는 형(兄)을 "아니(あに)"라 부른다.

발음(發音)의 유사성(類似性)에서 알 수 있듯이 "아니(あに)"의 기원(起源)은 "언니"다.


고구리(高句麗) 사람들도 형(兄)을 "언니"로 불렀다고 본다.


"대(大)"는 뭐라고 불렀을까?

(大)에 해당하는 현대(現代) 한국어(韓國語)는 "큰(大)"이다.

그래서 나는 "대형(大兄)은 고구리(高句麗) 말로 큰언니다"라고 주위사람들에게
농담삼아 이야기하곤 했
.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대(大)에 해당하는 고구리(高句麗) 말은 "큰"이 아니라

"아리(大)"이다.

근거는 앞에서 살펴본 "아리수, 엄리대수, 어라하"이다.


따라서 대형(大兄)의 고구리식(高句麗式) 발음은 "아리언니(大兄)"였을 것이다.


태대형(太大兄)은 뭐라고 불렀을까?

"으리으리하다"를 떠올려 보면 쉽게 문제(問題)가 풀린다.


(太)와 대(大)는 글자가 틀리기는 하지만 모두 "크다"의 뜻을 갖는다.

"크다(太)"와 "크다(大)"를 합쳐 "매우 크다"는 의미를 만들었다.

"으리으리하다"도 "으리(大)"를 두 번 반복하여 "매우 크다"는 의미를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낱말을 구성한다면 태대형(太大兄)에 해당(該當)하는 고구리(高句麗)
말은
"아리아리언니"이다.


나는 태대형(太大兄) 또한 당시(當時)에는 "아리아리언니"로 불렀을 것이라고
확신(確信)한다.


정리(整理)하면 아래 표(表)와 같다.

한자표기

실제발음 (추정)

대형(大兄)

아리언니

태대형(太大兄)

아리아리언니


대형(大兄), 태대형(太大兄)으로 부르다가 "아리언니", "아리아리언니"로 부르니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실제 고구리인(高句麗人)들이 불렀던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4. 주서(
周書)와 영호덕분(令狐德)

어라하(於羅瑕)와 건길지(吉支)가 나오는 주서(周書)는 어떤 책이며 편찬자(編纂者)

영호덕분(令狐德)은 어떤 사람인지 마지막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영호덕분(
令狐德)은 AD 583 년 의주(宜州) 화원(華原)  명문세가(名門世家)에서
태어났다.
AD 583 년은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3년이고, 의주(宜州) 화원(華原)은
지금의 섬서(
陝西) 요현(耀縣)이다.


(隋) 문제(文帝)의 이름은 양견(楊堅)이다.

양견(楊堅)은  북주(北周) 정제(靜帝) 때 대승상(大丞相)의 지위에 있었는데,
정권(政權)과
군권(軍權)을 장악(掌握)한 후 AD 581 년에 수(隋)나라를 세우고
연호(年號)를 개황(開皇)으로
고쳤다.  

양견(楊堅)은 대승상(大丞相)이 되기 전에 수주자사(隨州刺史)로 있었는데
이후 수(隋)나라를
세울 때 수(隨)에서 주(走)를 빼서 수(隋)라는 새 글자를 만든 후
나라이름으로 삼았다.

(走)는 "갑자기 달리기도 하고 갑자기 멈추기도 하는 등 가만히 있지 않는다"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나라이름에 넣기에는 불길(不吉)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호덕분(
令狐德)은 박학다재(博學多才)하여 청년(靑年) 시절부터 학문의 명성이
높았다.
(隋)나라 말년(末年)에 약성장(藥城長)에 임명됐으나 세상이 혼란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각지(各地)에서 반란(反亂)이 일어나자 이연(李淵)의 사촌동생(從弟) 수하(手下)
에 몸담았다.

이후 이연(李淵)이 당(唐)나라를 세우자 당고조(唐高祖) 때는 기거사인(起居舍人),
비서승(秘書丞)
지냈고, 당태종(唐太宗) 때는 예부시랑(禮部侍), 비서소감
(秘書少監),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태상경(太常卿), 국자제주(國子祭酒),
숭현관학사(崇賢館學士)
를 거쳤다.


80세가 되어 사임(辭任)하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작위(爵位)를 추가로 받았다.
AD 666 년 당고종(唐高宗) 건봉(乾封) 원년(元年)에 84세를 일기(一期)로 죽었다. 

주서(周書)는 영호덕분(
令狐德)이 편찬한 북주(北周)의 역사서제기(帝紀) 8권,
열전(列傳)
42권 모두 합하여 5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북위(北魏)가 동위(東魏), 서위(西魏)로 분열(分裂)되던 AD 534 년부터 581 년
수(隋)나라에
의해 멸망하기까지의 사실(史實)을 담고 있다.


북주(北周)를 이야기하려면 위(
), 촉(蜀), 오(吳) 삼국(三國)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후한(後漢) 말(末) 군웅(群雄)들이 할거(割據)하면서 중국(中國)이 분열됐다가 위(),
촉(蜀),
(吳) 삼국(三國)으로 정립(鼎立)된다.
()는 촉(蜀)을 멸망시키지만 곧 신하였던 사마염(司馬炎)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는
형식으로 멸망한다.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진()나라AD 280 년에 오(吳)를 멸망시키면서 잠시 중국을
통일
하지만 사마염(司馬炎) 사후(死後) "8왕의 난(八王之亂)"이 일어나면서 다시
혼란에
빠진다.

이후 북방(北方) 유목민족(遊牧民族)이 침입하여 진(晉)을 멸망시키자 진왕족(晉王族)인
사마예(司馬睿)가 AD 317 년에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에 동진(東晉)을 세운다.


중국 북방은 다섯 유목민족(遊牧民族)에 의해 열여섯 개의 나라가 세워진다.

5호16국(五胡十六國)의 시대(時代)가 열린 것이다.


  5호(五胡)    :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 저(), 강(羌)

  16국(十六國) : 전량(前), 후량(後), 남량(南), 서량(西), 북량(北),
                
전조(前趙), 후조(後趙), 전진(前秦), 후진(後秦), 서진(西秦),
                
전연(前燕), 후연(後燕), 남연(南燕) 북연(北燕), 하(夏),
                
성한(成漢)


AD 439 년에 북위(北魏)가 중국(中國) 북방(北方)을 통일(統一)하면서 5호16국
(五胡十六國)의 
시대(時代)는 막을 내린다.

북위(北魏)는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갈라졌다가 동위(東魏)는 북제(北齊)에 의해
멸망
하고
서위(西魏)는 북주(北周)에 의해 멸망한다.

AD 577 년 북주(北周)는 북제(北齊)를 멸망시키지만 북주(北周) 또한 수(隋)에 의해
멸망
한다.


  북위(北魏) : AD 386-534, AD 534 년에 동위(
東魏)와 서위(西魏)로 갈라짐

  동위(東魏) : AD 534-550, 북제(北齊)에 의해 멸망

  서위(西魏) : AD 535-557, 북주(北周)에 의해 멸망

  북제(北齊) : AD 550-557, 북주(北周)에 의해 멸망

  북주(北周) : AD 557-581, 수(隋)에 의해 멸망

  수(隋)     : AD 581-618, 당(唐)에 의해 멸망


남경(南京)으로 내려간 동진(東晉)송(宋)에 의해 멸망하고, 이어 제(齊), 양(梁),
진(陳)
으로
각 나라가 흥망(興亡)을 거듭하다가 마지막에 수(隋)에 의해
통일(統一)된다.

 

  동진(東晉) : AD 317-420, 송(宋)에 의해 멸망

  송(宋)     : AD 420-479, 제(齊)에 의해 멸망 
  제(齊)     : AD 479-502, 양(梁)에 의해 멸망

  양(梁)     : AD 502-557, 진(陳)에 의해 멸망

  진(陳)     : AD 557-589, 수(隋)에 의해 멸망
  [참고] 송(宋)은 고리(高麗) 시대의 송(宋)과 다른 나라고, 제(齊)도 북제(北齊)와
         다른 나라다.


남북조(南北朝)라고 할 때 남조(南朝)와 북조(北朝)는 각각 아래와 같이 구분한다.


  북조(北朝) :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
北齊), 북주(北周)

  남조(南朝) :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


5호16국(五胡十六國)과 남북조(南北朝) 시대(時代)의 혼란(昏亂)스러웠던 중국(中國)이

(隋)나라에 의해 통일(統一)되자, 고구리(高句麗)의 하늘에도 서서히 전쟁(戰爭)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당시(當時) 고구리(高句麗)가 느꼈던 압박감(壓迫感)은 삼국사기(三國史記) 평원왕
(平原王) 32년
기사(記事)에 잘 나타나 있다.


  三十二年           평원왕(平原王) 32년에

  王聞陳亡大懼       임금이 진(陳)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크게
                     두려워하였다.

  理兵積穀           무기(兵)를 손질하고(理) 곡식(穀食)을 비축하며(積)

  爲拒守之策         [수(隋)의 침공(侵攻)에 대한] 방어책(防禦策)을
                     강구(講究)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19(卷第十九) 고구리본기(高句麗本紀) 제7(第七)
   평원왕(平原王)>


평원왕(平原王)은 그 해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수(隋)나라의 침공(侵攻)을 겪지 않으셨다.

이어 즉위(卽位)한 영양왕(陽王) 시대에 드디어 수(隋)의 백만대군(百萬大軍)
고구리군
(高句麗軍)이 격돌(激突)하여 세계최대(世界最大)의 전쟁(戰爭)이 벌어진다.


[참고한 책]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하), 을유문화사, 1999

 

[참고 사이트]

야후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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