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삼각산 유래

吾心竹--오심죽-- 2010. 9. 30. 13:23

 

[삼각산이야기] 삼각산 이야기1| 유익한 정보 모음
智深(지심) 조회 1 | 2010.01.27. 21:06 http://cafe.daum.net/20ILMAC/BJCp/265


      ** 삼각산 ** 1395년 12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새로 지은 경복궁에 들게 되니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새 도읍의 만년태평을 기원하는 가사를 지었다. 그 내용을 담은 '악장가사'에 북한산을 일러 '삼각산'(三角山)이라 쓰고 있다. 또 고려조 성종 12년(993년) 서희가 성종에게 아뢰기를 "삼각산 이북도 또한 고구려 땅입니다"하였고, 그뒤 고려사에 20여회나 삼각산이 등장하면서 각종 문헌과 비석 등에도 삼각산으로 굳어져 세종실록지리지, 대동여지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한결같이 '삼각산'이 북한산의 본 이름으로 사용되어 왔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남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시에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 떠나려.'라며 '삼각산'이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주객이 전도되어 '북한산'이 산의 본명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북한산'은 산이름이라기보다는 백제 건국 이후 한강 이북지역을 뜻하는 이름, 또는 고을 이름이었던 것이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으르렁대며 영토확장에 혈안이 되었을 당시에는 개차산, 열야산, 진악산, 삼년산, 마시산 등 '산'이 붙은 이른바 고을 이름이 많이 나온다. 여기서 '산'은 고구려계 땅이름이 달(達), 홀(忽), 골(骨) 등과 함께 고(高) 또는 성읍(城邑)을 뜻하는 땅이름의 접미어로 쓰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여러 문헌을 눈여겨보면 산을 이야기할 때는 '삼각산'이라 하였고 한성부의 옛 고을 명칭을 이야기할 때는 '북한산'이란 이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각산 이름에 대하여 풀이하기를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솟아있으므로 삼각산이라 부른다 "고 풀이하고 있으나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리... 북한산이 어찌 이 세 봉우리뿐이랴.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과 맞먹는 노적봉, 보현봉, 문수봉 등 여러 봉우리들을 제외하고서 어찌 세 봉우리만 가지고서 논할 것인가? 이것은 뒷날 사람이 '삼각'(三角)이란 한자풀이에 너무 얽매어 부회한 결과일 뿐이다. 여기서 '삼각산'이란 이름은 '서울산'을 한자로 나타낸 것 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서울'의 본딧말이 '셔불'(세불)이다. 그러니까 '삼각'(三角)의 '삼'(三)은 '세'(서)이고, '각'(角)은 '불'(뿔)로 곧 '서불→서울'이 된다.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의 삼각산,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의 삼각산 등 여러 곳에 산이 삼각형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말의 '셔불','세부리'를 한자로 뜻빌림(意譯)한 것 뿐이다. 그것은 옛날 그 지역이 부족국가의 군장(君長)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울'(셔불, 세부리)은 그 지역의 '수부'(으뜸도시)라는 뜻이다. 특히 신라의 17관등급 가운데 첫번째 품계인 '각간'(角干)을 '셔블한'(敍弗邯)으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 '각=셔블'과 '간=한'의 대등관계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삼각산'에서 '삼=셔(서)'와 '각=셔(서)불'에서 '셔'(서)가 다만 중복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북한산=삼각산'에서 뭇사람 사이에 사용해온 산이름은 백제의 도읍 이후 삼각산이었으며 그것은 이 산이 사람들 사이에 '서울산'의 뜻으로 통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 '서울산'이 있음은 온당한 일이다.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이홍님이 쓰신 글입니다.**

 

 

[삼각산이야기] 삼각산의 유래가 된 봉우리1| 유익한 정보 모음
智深(지심) 조회 27 | 2010.01.27. 21:08 http://cafe.daum.net/20ILMAC/BJCp/266

 <▲ 안전고리와 안전모를 쓰고 만경대 릿찌하는 산님들/백운대와 만경대는 <백운동암문>으로 연결되어 있다.09.07.25

 

<▲ 백운동암문에서 백운대를 오르는 방향에서 쳐다본 만경대의 모습>09.07.25

<▲ 만경대(좌)와 우측의 노적봉/만경대 795m, 노적봉 716m>09.07.25

 <▲ 백운동암문에서 백운대 오르는 중간쯤 쉼터 바위에 백조 한 마리가 앉아 있다/만경대를 배경으로 나지막히 앉아서 쉬고 있는 백조도 모처럼 산을 찾아왔나보다>09.07.25

<▲ 백운대 정상에서 바라본 만경대와 노적봉(우측) 노적봉 뒤로는 비봉능선이 파노라마처럼 아스라히 자리를 잡았다>09.07.25

 

 <▲ 당겨서 본 만경대 정상 바위 부근>09,07.25

 

<▲ 백운동암문으로 올라 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가면서 본 만경대/백운대를 향해 올라오고 있는 산님들 뒤로 백조바위가 보인다>09,07.25

 

<▲ 노적봉을 오르면서 바라본 만경대 전경/만경대 아래 둘레 길에 백운동암문으로 가는 산님들의 모습이 보인다>09,07.25

 

 <▲ 노적봉을 오르면서 바라본 만경대 전경/만경대 봉우리를 넘어 산님들이 용암봉으로 오고 가는데 이 구간은 삼각산에서 사고가 가장 많이 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09,07.25

 

<▲ 노적봉 정상 동봉에 올라서 바라본 만경대/백운대(왼쪽)와 중간에 인수봉 봉우리>09,07.25

 

 

3. 만경봉(萬景峯) (3)


가. 문헌

■ 북한지(北漢誌)의 산계(山溪)편

     백운봉 남쪽에 있다. 높고 빼어나고 기이하고 웅장함이 인수봉과 자웅을 겨룰 만하다.

■ 申耆의 書啓

    만경봉과 백운봉 사이에 또 암문이 있습니다. 

■ 신경준의 삼각산기(三角山記)

     삼각산은 다 석봉이다. 그 상봉을 백운대라 하며, 그 옆에 국망봉과 인수봉이 있다. 세봉우리가 깎아 세운 듯

     하늘로 치솟아 있으므로 삼각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 동국여지비고의 삼각산기

    백운봉과 만경봉 일명 국망봉과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삼각산이라 이름하였다.


나. 해석

■ 백운대 옆의 있는 암문은 백운봉암문으로 현재의 위문을 가리키며, 바로 옆에 만경대가 있다. 따라서 위문을

   중심으로 백운대 남쪽에 위치한 봉우리는 만경대를 의미하며, 과거 만경봉 또는 국망봉으로 불리었으나 지금은

   만경대로 불린다.

■ 만경(萬景)의 이름에 담고 있는 뜻과 같이 만경봉이란 전망이 좋은 봉우리로 국망봉이란 이름과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백제시대 온조, 고려 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올랐다는 봉우리가 만경봉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 만경대에서 용암문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위험한 암릉 구간으로 상당히 위험하여 안전장비가 필요하나, 위문

   에서 정상까지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편안한 길이다. 따라서 장비가 없던 옛날에는 만경대가 백운대보다

   상대적으로 올라가기 쉬운 길이다

 

 

 

 <▲ 백운대탐방지원센터에서 하루재 고개 지나 인수산장 -(인수산장 철거되어 자연으로 돌아감)- 내려가는 길에서 쳐다본 인수봉(810m)의 장엄한 모습>사진 위에 마우스를 놓고 두 번 클릭하면 사진을 크게 볼 수 있습니다/09.07.25

 

<▲  인수봉에서 암벽등산을 즐기는 클라이머들/인수봉의 얼굴에 꽃 피어나듯 꽃봉오리처럼 점점이 붙어 있다>09.07.25

  

<▲ 백운동암문에서 백운대 오르면서 바라본 우람한 인수봉/마치 발사되는 대포알 같다>사진 위를 두 번 클릭하면 사진을 크게 볼 수 있습니다/09.07.25

 

<▲ 백운동암문에서 백운대 오르면서 바라본 거대한 알통 바위 인수봉/이무기가 땅거죽을 뚫고 올라와 승천하는 용처럼 그 기상 한번 찬란하다>09.07.25

 

<▲ 백운대 거의 다 올라와서 바라본 인수봉의 우람한 자태>09.07.25

 

<▲ 백운대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정상을 향하여 올라오고 내려가고 쉬면서 막걸리를 앞에 놓고 인수봉을 감상하는 산님들도 있다>09.07.25

 

<▲ 인수봉의 악어능선>영봉에서 보면 알통 같이 둥그런 바위가 백운대 정상에서 보면 인수봉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악어의 몸통처럼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고 있다/인수봉 너머로 도봉산의 주봉우리(자운봉, 만장봉, 선인봉)와 오봉이 자리를 하고 있다>09.07.25

 

<▲ 백운대(836m) 전망대 바위에서 당겨본 인수봉 정상/저 곳은 클라이머의 세상, 내게는 너무나 멀고 먼 '당신' 이다/09.07.25

 

<▲ 3명의 클라이머들이 비들기 길 벽에 붙어서 하강을 준비하고 있다>09.07.25

 

  <▲ 오르는 데는 오래 걸렸으나 내려오는 것은 순간이다/잠시 보고 있는 동안 어느새 세 명이 다 내려왔다>09.07.25

 

<▲ 저 곳(설교벽)은 더 위험해 보이는데 우측에서 또 다른 클라이머 2명이 하간 완료를 하고 암벽에 붙어서 서 있다>09.07.25

 

<▲ 노적봉 동봉에서 바라본 인수봉/역시 원통형인 알봉으로 보인다>09.07.25

 

 

2. 인수봉(仁壽峯) (2)


가. 문헌

■ 북한지(北漢誌)의 산계(山溪)편

    인수봉의 삼각산의 첫 번째 봉우리이다. 사면이 순수한 암석으로 되어 깎아 세운 듯 서 있는데, 한 봉우리가

    이 봉우리 동쪽에 혹처럼 붙어 있으므로 또한 부아악(負兒嶽)이라고도 이름하였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행하여 한산(漢山, 지금의 서울)에 이른 후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살펴

    보았는데, 그 산봉이 곧 이 봉우리이다.


나. 내용

■ 북한지에서는 삼각산의 세 개의 봉우리 중 인수봉을 가장 으뜸 되는 봉우리로 생각하는 듯하다. 문구의 내

   용으로 보아 현재의 인수봉이 분명하며 동쪽에 혹처럼 붙은 봉우리는 귀바위를 뜻한다.

   다만, 온조와 비류가 과연 험준한 인수봉을 올랐을까 하는 데는 이론의 소지가 있으며, 이는 부아악이란 명

   을 북한산이 아니라 인수봉으로 좁게 해석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인수봉은 암벽등반지로 유명한 봉우리이다. 안전 장비 없이는 사실상 올라가기 불가능한 봉우리로 최대 200m

   정도의 대암벽이 있는 등 봉우리 전체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이다.

 

 

 

<▲ 백운대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산님들>09.07.25

 

<▲ 백운동암문에서  백운대를 오르면서 올려다본 백운대 정상의 풍경/저 곳은 상습 병목구간이었는데 철제 계단을 넓게 설치해서 오르고 내려오는데 혼잡이 크게 줄었다>09.07.25

 

<▲ 백조바위가 보이는 부근을 오르는 산님, 내려가는 산님/백운동암문에서 백운대 정상까지는 300m.가파른 오르막 바윗길이지만 잘 닦아놓아 초보자도 문제 없이 갈 수 있는 길이다>09.07.25  

 

 <▲ 백운봉암문에서 용암문으로 가는 길에 바라본 백운대 유관순 바위/왜 유관순 바위라고 부르느지 잘 모르겠음>09.07.25

 

<▲ 노적봉 동봉에서 바라본 백운대 정상의 모습/정상 봉우리에 올라 있는 산님들과 태극기가 보인다>09.07.25

 

<▲ 노적봉 동봉에서 바라본 백운대와 인수봉/사이로 백운대로 향햐는 산님들이 줄을 서서 오르고 있다>09.07.25

 

 <▲ 노적봉 동봉에서 바라본 위풍당당한 백운대와 인수봉>09.07.25

 

<▲ 노적봉 동봉에서 바라본 삼각산의 주봉인 삼봉/이 세봉이 어우러져 삼각을 이루어 삼각산이 되었다고 한다/백운대와 중앙 인수봉, 오른쪽 만경대>09.07.25

 

 

삼각산의 유래가 된 봉우리


1. 삼각산(三角山)의 유래


삼각산은 지금의 북한산이다. 삼각산이란 이름은 고려 성종 때인 993년 고려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당시만 해도 부아악이란 명칭이 같이 사용되었으나 고려 정종 때부터는 부아악이라는 이름이 완전

히 자취를 감추고 삼각산으로 통일된다.

이 명칭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고문헌에 삼각산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기록되어있다.


즉 삼각산은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간직한 이름이다. 삼각산이 삼각산이라 불리게 것은 삼각산의

정상을 이루는 세 봉우리에서 유래하였다. 세 봉우리는 백운봉, 만경봉, 인수봉을 뜻하며, 봉우리 하나

하나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형상으로 인간이 감히 범접하기 쉽지 않은 경외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 상징성이 결국 지금의 북한산이라 불리는 산 전체를 삼각산으로 부르게 된 이유라 할 수 있다.



(관련 문헌)


■ 북한지(北漢誌)의 산계(山溪)편

    삼각산은 인수봉, 백운봉, 만경봉의 세 봉이 있는데, 우뚝 솟아 높고 뾰족한 것이 마치 세 뿔과 같으므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 동국여지비고의 삼각산기

    백운봉과 만경봉 일명 국망봉과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삼각산이라 이름 하였다.



    고려 및 조선시대의 옛 선비들 또한 삼각산의 빼어난 자체에 매혹되어 삼각산의 아름다움을 많은 시로써 남겼다.

    아래 시들은    북한지에 수록된 시 들 중 일부이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존오의 시


三㭆奇峯迥接天    세 송이 꽃 같은 기묘한 봉우리 멀리 하늘에 닿았는데

虛無元氣積雲煙    텅 빈 자연의 원기에 구름 연기 쌓였네.

仰看廉利攙長劍    쳐다보니 날카로운 모습 장검을 꽂은 듯

橫似參差聳碧蓮    가로로 둘러보면 올망졸망 푸른 연꽃 솟아 오른 양.


조선시대 초기의 문인인 김시습의 시


三角高峯貫太淸    세 뿔 같은 높은 산봉 하늘을 꿰뚫으니

登臨可摘斗牛星    높은 곳 오르면 가히 두우성을 딸 만하네

非徒岳岫興雲雨    멧부리는 구름과 비를 일으킬 뿐 아니라

能使王家萬歲寧    왕실을 만세토록 능히 편안케 하리로다


삼각산의 세 봉우리 중 만경봉만이 주능선상에 위치하고 나머지는 독자적인 맥을 갖는다. 

백운봉은 주능선과 연결은 되지만 이어지는 원효능선은 효자동에서 맥을 다하며, 인수봉은

큰 줄기를 갖지 못하고 사기막골에서 그 맥을 다한다.

어찌 보면 평범한 산줄기와의 연결을 거부하는 장군의 기상을 보는 듯하다.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은 다양한 문헌에 그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북한지(北漢誌)의 기록을 보면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 등 옛 문헌의 기록을 그

대로 차용한 부분이 많다. 여기서는 북한지의 기록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내용만 기술한다.



2. 백운봉(白雲峯) (1)


가, 문헌

■ 북한지(北漢誌)의 산계(山溪)편

     인수봉 서쪽에 있다. 일명 백운대라고도 한다. 곧 이 산중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나. 내용

■ 백운봉은 북한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당시에는 백운봉 또는 백운대로 불렸으나 현재는 백운대로 불린다.

백운대는 행정상으로는 경기도 고양시에 속하며 하루재에서 만경대를 거쳐 대남문 방향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상에서 살짝 벗어난 지점에 위치한다.

■ 사방이 깎아지른 암벽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로 조선시대에는 만경대 또는 노적봉보다도 더 올라가기 어려웠던

    봉우리이다.

    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가장 일반적인 위문길을 비롯 호랑이굴길, 여우굴길, 원효능선에서 오르는 길 등 모두

    네 가지가 있다. 위문길은 쇠난간 등 안전시설이 있어 겨울철에도 올라갈 수 있으나 나머지 길 들은 동절기에

    는 위험하다. 특히 원효능선길은 위험한 리지구간으로 반드시 안전장비를 갖추고 경험자의 동행이 필요한

    길이다. 위문에서 올라가는 쇠난간은 최초 일제시대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2. 인수봉(仁壽峯) (2)


가. 문헌

■ 북한지(北漢誌)의 산계(山溪)편

    인수봉의 삼각산의 첫 번째 봉우리이다. 사면이 순수한 암석으로 되어 깎아 세운 듯 서 있는데, 한 봉우리가 .

    이 봉우리 동쪽에 혹처럼 붙어 있으므로 또한 부아악(負兒嶽)이라고도 이름하였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

    류와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행하여 한산(漢山, 지금의 서울)에 이른 후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살펴

    보았는데, 그 산봉이 곧 이 봉우리이다.


나. 내용

■ 북한지에서는 삼각산의 세 개의 봉우리 중 인수봉을 가장 으뜸 되는 봉우리로 생각하는 듯하다. 문구의 내용

   으로 보아 현재의 인수봉이 분명하며 동쪽에 혹처럼 붙은 봉우리는 귀바위를 뜻한다.

   다만, 온조와 비류가 과연 험준한 인수봉을 올랐을까 하는 데는 이론의 소지가 있으며, 이는 부아악이란 명칭

   을 북한산이 아니라 인수봉으로 좁게 해석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인수봉은 암벽등반지로 유명한 봉우리이다. 안전 장비 없이는 사실상 올라가기 불가능한 봉우리로 최대 200m

   정도의 대암벽이 있는 등 봉우리 전체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이다.

3. 만경봉(萬景峯) (3)


가. 문헌

■ 북한지(北漢誌)의 산계(山溪)편

     백운봉 남쪽에 있다. 높고 빼어나고 기이하고 웅장함이 인수봉과 자웅을 겨룰 만하다.

■ 申耆의 書啓

    만경봉과 백운봉 사이에 또 암문이 있습니다. 

■ 신경준의 삼각산기(三角山記)

    삼각산은 다 석봉이다. 그 상봉을 백운대라 하며, 그 옆에 국망봉과 인수봉이 있다. 세봉우리가 깎아 세운 듯

    하늘로 치솟아 있으므로 삼각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 동국여지비고의 삼각산기

    백운봉과 만경봉 일명 국망봉과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삼각산이라 이름하였다.


나. 해석

■ 백운대 옆의 있는 암문은 백운봉암문으로 현재의 위문을 가리키며, 바로 옆에 만경대가 있다. 따라서 위문을

   중심으로 백운대 남쪽에 위치한 봉우리는 만경대를 의미하며, 과거 만경봉 또는 국망봉으로 불리었으나 지금

   은 만경대로 불린다.

■ 만경(萬景)의 이름에 담고 있는 뜻과 같이 만경봉이란 전망이 좋은 봉우리로 국망봉이란 이름과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백제시대 온조, 고려 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올랐다는 봉우리가 만경봉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 만경대에서 용암문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위험한 암릉 구간으로 상당히 위험하여 안전장비가 필요하나, 위문

   에서 정상까지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편안한 길이다. 따라서 장비가 없던 옛날에는 만경대가 백운대보다 상

   대적으로 올라가기 쉬운 길이다

 

 

1395년 12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새로 지은 경복궁에 들게 되니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새 도읍의
만년태평을 기원하는 가사를 지었다. 그 내용을 담은 '악장가사'에 북한산을 일러 '삼각산'(三角山)'이라 쓰고
있다.

또 고려조 성종 12년(993년) 서희가 성종에게 아뢰기를 "삼각산 이북도 또한 고구려 땅입니다"하였고, 그 뒤 고려
사에 20여회나 삼각산이 등장하면서 각종 문헌과 비석 등에도 삼각산으로 굳어져 세종실록지리지, 대동여지 그리
고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한결같이 '삼각산'이 북한산의 본 이름으로 사용되어 왔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남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시에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
수야/ 고국산천 떠나려.'라며 '삼각산'이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주객이 전도되어 '북한산'이 산의 본명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북한산'은 산이름이라기 보다는 백제
건국 이후 한강 이북지역을 뜻하는 이름, 또는 고을 이름이었던 것이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으르렁 대며 영토확장에 혈안이 되었을 당시에는 개차산, 열야산, 진악산,
삼년산, 마시산 등 '산'이 붙은 이른바 고을 이름이 많이 나온다.

여기서 '산'은 고구려계 땅이름이 달(達), 홀(忽), 골(骨) 등과 함께 고(高) 또는 성읍(城邑)을 뜻하는 땅이름의 접미
어로 쓰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문헌을 눈여겨보면 산을 이야기할 때는 '삼각산'이라 하였고 한성부의 옛 고을
명칭을 이야기할 때는 '북한산'이란 이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각산 이름에 대하여 풀이하기를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솟아있으므로 삼각산이라 부른다
"고 풀이하고 있으나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리. 북한산이 어찌 이 세 봉우리뿐이랴.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과 맞먹는
노적봉, 보현봉, 문수봉 등 여러 봉우리들을 제외하고서 어찌 세 봉우리만 가지고서 논할 것인가.

이것은 뒷날 사람이 '삼각'(三角)이란 한자풀이에 너무 얽매어 부회한 결과일 뿐이다.

여기서 '삼각산'이란 이름은 '서울산'을 한자로 나타낸 것 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서울'의 본딧말이 '셔불'(세불)
이다. 그러니까 '삼각'(三角)의 '삼'(三)은 '세'(서)이고, '각'(角)은 '불'(뿔)로 곧 '서불→서울'이 된다.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의 삼각산,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의 삼각산 등 여러 곳에 산이
삼각형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말의 '셔불', '세부리'를 한자로 뜻빌림(意譯)한 것 뿐이다.
그것은 옛날 그 지역이 부족국가의 군장(君長)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울'(셔불, 세부리)은 그 지역의 '수부'(으뜸도시)라는 뜻이다.

특히 신라의 17관등급 가운데 첫번째 품계인 '각간'(角干)을 '셔블한'(敍弗邯)으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 '각=셔블'과
'간=한'의 대등관계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삼각산'에서 '삼=셔(서)'와 '각=셔(서)불'에서 '셔'(서)가 다만 중복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북한산=삼각산'에서 뭇사람 사이에 사용해온 산이름은 백제의 도읍 이후 삼각산이었으며 그것은 이 산이
사람들 사이에 '서울산'의 뜻으로 통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 '서울산'이 있음은 온당한 일이다.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

 

 <▲ 삼각산의 유래/사진위에 마우스를 놓고 클릭하면 사진을 크게 볼 수 있습니다>09.07.25

 

  <▲ 백운대 정상에는 암각문이 새겨져 있습니다/사진위에 마우스를 놓고 클릭하면 사진을 크게 볼 수 있습니다>09.07.25


 
[삼각산이야기] 삼각산의 유래가 된 봉우리2| 유익한 정보 모음
智深(지심) 조회 12 | 2010.01.27. 21:09 http://cafe.daum.net/20ILMAC/BJCp/267

 


1. 삼각산(三角山)의 유래


삼각산은 지금의 북한산이다. 삼각산이란 이름은 고려 성종 때인 993년 고려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당시만 해도 부아악이란 명칭이 같이 사용되었으나 고려 정종 때부터는 부아악이라는 이름이 완전

히 자취를 감추고 삼각산으로 통일된다.

이 명칭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고문헌에 삼각산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기록되어있다.


즉 삼각산은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간직한 이름이다. 삼각산이 삼각산이라 불리게 것은 삼각산의

정상을 이루는 세 봉우리에서 유래하였다. 세 봉우리는 백운봉, 만경봉, 인수봉을 뜻하며, 봉우리 하나

하나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형상으로 인간이 감히 범접하기 쉽지 않은 경외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 상징성이 결국 지금의 북한산이라 불리는 산 전체를 삼각산으로 부르게 된 이유라 할 수 있다.



(관련 문헌)


■ 북한지(北漢誌)의 산계(山溪)편

    삼각산은 인수봉, 백운봉, 만경봉의 세 봉이 있는데, 우뚝 솟아 높고 뾰족한 것이 마치 세 뿔과 같으므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 동국여지비고의 삼각산기

    백운봉과 만경봉 일명 국망봉과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삼각산이라 이름 하였다.



    고려 및 조선시대의 옛 선비들 또한 삼각산의 빼어난 자체에 매혹되어 삼각산의 아름다움을 많은 시로써 남겼다.

    아래 시들은    북한지에 수록된 시 들 중 일부이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존오의 시


三㭆奇峯迥接天    세 송이 꽃 같은 기묘한 봉우리 멀리 하늘에 닿았는데

虛無元氣積雲煙    텅 빈 자연의 원기에 구름 연기 쌓였네.

仰看廉利攙長劍    쳐다보니 날카로운 모습 장검을 꽂은 듯

橫似參差聳碧蓮    가로로 둘러보면 올망졸망 푸른 연꽃 솟아 오른 양.


조선시대 초기의 문인인 김시습의 시


三角高峯貫太淸    세 뿔 같은 높은 산봉 하늘을 꿰뚫으니

登臨可摘斗牛星    높은 곳 오르면 가히 두우성을 딸 만하네

非徒岳岫興雲雨    멧부리는 구름과 비를 일으킬 뿐 아니라

能使王家萬歲寧    왕실을 만세토록 능히 편안케 하리로다


삼각산의 세 봉우리 중 만경봉만이 주능선상에 위치하고 나머지는 독자적인 맥을 갖는다. 

백운봉은 주능선과 연결은 되지만 이어지는 원효능선은 효자동에서 맥을 다하며, 인수봉은

큰 줄기를 갖지 못하고 사기막골에서 그 맥을 다한다.

어찌 보면 평범한 산줄기와의 연결을 거부하는 장군의 기상을 보는 듯하다.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은 다양한 문헌에 그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북한지(北漢誌)의 기록을 보면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 등 옛 문헌의 기록을 그

대로 차용한 부분이 많다. 여기서는 북한지의 기록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내용만 기술한다.


 


 

2. 백운봉(白雲峯) (1)


가, 문헌

■ 북한지(北漢誌)의 산계(山溪)편

     인수봉 서쪽에 있다. 일명 백운대라고도 한다. 곧 이 산중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나. 내용

■ 백운봉은 북한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당시에는 백운봉 또는 백운대로 불렸으나 현재는 백운대로 불린다.

백운대는 행정상으로는 경기도 고양시에 속하며 하루재에서 만경대를 거쳐 대남문 방향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상에서 살짝 벗어난 지점에 위치한다.

■ 사방이 깎아지른 암벽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로 조선시대에는 만경대 또는 노적봉보다도 더 올라가기 어려웠던

    봉우리이다.

    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가장 일반적인 위문길을 비롯 호랑이굴길, 여우굴길, 원효능선에서 오르는 길 등 모두

    네 가지가 있다. 위문길은 쇠난간 등 안전시설이 있어 겨울철에도 올라갈 수 있으나 나머지 길 들은 동절기에

    는 위험하다. 특히 원효능선길은 위험한 리지구간으로 반드시 안전장비를 갖추고 경험자의 동행이 필요한

    길이다. 위문에서 올라가는 쇠난간은 최초 일제시대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2. 인수봉(仁壽峯) (2)


가. 문헌

■ 북한지(北漢誌)의 산계(山溪)편

    인수봉의 삼각산의 첫 번째 봉우리이다. 사면이 순수한 암석으로 되어 깎아 세운 듯 서 있는데, 한 봉우리가 .

    이 봉우리 동쪽에 혹처럼 붙어 있으므로 또한 부아악(負兒嶽)이라고도 이름하였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

    류와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행하여 한산(漢山, 지금의 서울)에 이른 후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살펴

    보았는데, 그 산봉이 곧 이 봉우리이다.


나. 내용

■ 북한지에서는 삼각산의 세 개의 봉우리 중 인수봉을 가장 으뜸 되는 봉우리로 생각하는 듯하다. 문구의 내용

   으로 보아 현재의 인수봉이 분명하며 동쪽에 혹처럼 붙은 봉우리는 귀바위를 뜻한다.

   다만, 온조와 비류가 과연 험준한 인수봉을 올랐을까 하는 데는 이론의 소지가 있으며, 이는 부아악이란 명칭

   을 북한산이 아니라 인수봉으로 좁게 해석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인수봉은 암벽등반지로 유명한 봉우리이다. 안전 장비 없이는 사실상 올라가기 불가능한 봉우리로 최대 200m

   정도의 대암벽이 있는 등 봉우리 전체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이다.

 

 

 

3. 만경봉(萬景峯) (3)


가. 문헌

■ 북한지(北漢誌)의 산계(山溪)편

     백운봉 남쪽에 있다. 높고 빼어나고 기이하고 웅장함이 인수봉과 자웅을 겨룰 만하다.

■ 申耆의 書啓

    만경봉과 백운봉 사이에 또 암문이 있습니다. 

■ 신경준의 삼각산기(三角山記)

    삼각산은 다 석봉이다. 그 상봉을 백운대라 하며, 그 옆에 국망봉과 인수봉이 있다. 세봉우리가 깎아 세운 듯

    하늘로 치솟아 있으므로 삼각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 동국여지비고의 삼각산기

    백운봉과 만경봉 일명 국망봉과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삼각산이라 이름하였다.


나. 해석

■ 백운대 옆의 있는 암문은 백운봉암문으로 현재의 위문을 가리키며, 바로 옆에 만경대가 있다. 따라서 위문을

   중심으로 백운대 남쪽에 위치한 봉우리는 만경대를 의미하며, 과거 만경봉 또는 국망봉으로 불리었으나 지금

   은 만경대로 불린다.

■ 만경(萬景)의 이름에 담고 있는 뜻과 같이 만경봉이란 전망이 좋은 봉우리로 국망봉이란 이름과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백제시대 온조, 고려 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올랐다는 봉우리가 만경봉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 만경대에서 용암문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위험한 암릉 구간으로 상당히 위험하여 안전장비가 필요하나, 위문

   에서 정상까지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편안한 길이다. 따라서 장비가 없던 옛날에는 만경대가 백운대보다 상

   대적으로 올라가기 쉬운 길이다

 

 

1395년 12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새로 지은 경복궁에 들게 되니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새 도읍의
만년태평을 기원하는 가사를 지었다. 그 내용을 담은 '악장가사'에 북한산을 일러 '삼각산'(三角山)'이라 쓰고
있다.

또 고려조 성종 12년(993년) 서희가 성종에게 아뢰기를 "삼각산 이북도 또한 고구려 땅입니다"하였고, 그 뒤 고려
사에 20여회나 삼각산이 등장하면서 각종 문헌과 비석 등에도 삼각산으로 굳어져 세종실록지리지, 대동여지 그리
고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한결같이 '삼각산'이 북한산의 본 이름으로 사용되어 왔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남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시에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
수야/ 고국산천 떠나려.'라며 '삼각산'이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주객이 전도되어 '북한산'이 산의 본명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북한산'은 산이름이라기 보다는 백제
건국 이후 한강 이북지역을 뜻하는 이름, 또는 고을 이름이었던 것이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으르렁 대며 영토확장에 혈안이 되었을 당시에는 개차산, 열야산, 진악산,
삼년산, 마시산 등 '산'이 붙은 이른바 고을 이름이 많이 나온다.

여기서 '산'은 고구려계 땅이름이 달(達), 홀(忽), 골(骨) 등과 함께 고(高) 또는 성읍(城邑)을 뜻하는 땅이름의 접미
어로 쓰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문헌을 눈여겨보면 산을 이야기할 때는 '삼각산'이라 하였고 한성부의 옛 고을
명칭을 이야기할 때는 '북한산'이란 이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각산 이름에 대하여 풀이하기를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솟아있으므로 삼각산이라 부른다
"고 풀이하고 있으나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리. 북한산이 어찌 이 세 봉우리뿐이랴.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과 맞먹는
노적봉, 보현봉, 문수봉 등 여러 봉우리들을 제외하고서 어찌 세 봉우리만 가지고서 논할 것인가.

이것은 뒷날 사람이 '삼각'(三角)이란 한자풀이에 너무 얽매어 부회한 결과일 뿐이다.

여기서 '삼각산'이란 이름은 '서울산'을 한자로 나타낸 것 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서울'의 본딧말이 '셔불'(세불)
이다. 그러니까 '삼각'(三角)의 '삼'(三)은 '세'(서)이고, '각'(角)은 '불'(뿔)로 곧 '서불→서울'이 된다.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의 삼각산,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의 삼각산 등 여러 곳에 산이
삼각형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말의 '셔불', '세부리'를 한자로 뜻빌림(意譯)한 것 뿐이다.
그것은 옛날 그 지역이 부족국가의 군장(君長)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울'(셔불, 세부리)은 그 지역의 '수부'(으뜸도시)라는 뜻이다.

특히 신라의 17관등급 가운데 첫번째 품계인 '각간'(角干)을 '셔블한'(敍弗邯)으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 '각=셔블'과
'간=한'의 대등관계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삼각산'에서 '삼=셔(서)'와 '각=셔(서)불'에서 '셔'(서)가 다만 중복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북한산=삼각산'에서 뭇사람 사이에 사용해온 산이름은 백제의 도읍 이후 삼각산이었으며 그것은 이 산이
사람들 사이에 '서울산'의 뜻으로 통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 '서울산'이 있음은 온당한 일이다.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