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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남한산은 북한산과 더불어 건국 당시부터 백제에 가장 중요한 산이었음에도 말이다.
백제 건국 사정을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는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 일행이 기원전 18년,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한강변에 인접한 강남 벌판에 도읍지를 정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이 때 선택된 도읍지의 지리적 환경에 대해 "북쪽에는 한수(漢水)가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다"고 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산 부아악은 곧 북한산이며, 온조가 이곳에 올라 확정한 백제 도읍지 동쪽편 높은 산이 바로 남한산이었던 것이다.
이후 남한산은 백제가 475년 고구려 3만 대군에 왕도(王都) 한성(漢城)이 함락되어 개로왕이 참살되는 비극을 맞아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500년 동안이나 지리적 위치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산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남한산성 일대에서 백제 소식은 감감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남한산성이 최근 '백제 갈증'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2001년 4-5월 한국토지박물관이 경기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남한행궁지(南漢行宮址)에서 실시한 제4차 조사에서 백제토기가 다량 출토됐던 것이다.
이는 남한산성에서 뚜렷한 백제 유물이 처음으로 확인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조사는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적지않은 유물은 찾았으나 유적이 없었기 때문.
이에 조유전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장경호 기전문화재연구원장 등은 백제 유적 확인을 위한 주변 일대에 대한 확대조사를 요청했다.
그 결과 지난해 7월부터 올해 1월까지 실시된 제5차 조사에서 한성시대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음이 분명한 구덩이 유적 8곳을 확인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구덩이들은 풍화암반층을 뚫고 내려간 원형 혹은 타원형으로, 일부에서는 적갈색을 띠는 연질(軟質) 혹은 경질(硬質) 타날문(打捺文) 토기류가 출토됐다.
아직 그 정확한 용도는 미상이지만 이러한 구덩이는 최근 이천 설성산성을 비롯한 한성시대 백제 산성들에서 사례가 보고되기 시작했다.
조 전 소장은 "그동안 남한산성에서 백제 유물을 참으로 오랫동안 학수고대했는데 마침내 그러한 흔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면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등 인근 한성시대 다른 백제 유적들과의 비교검토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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