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捺文 土器

한반도 토기의 역사|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9:32
한반도 토기의 역사| ▶별방전통도기&다기
氣坤 조회 21 | 2010.05.30. 08:02 http://cafe.daum.net/masro/dr7/493

 

우선 선사시대를 1.구석기 2. 신석기 3. 청동기 4.철기시대로 구분한다.

1)구석기시대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줄 모르던 시기이므로 제외한다.


 2)신석기 시대토기



<토기를 만드는 3가지 방법> 



 
 



토기를 빚는 방법은 손빚음법(수타법;手捺法), 테쌓기법(윤적법;輪積法, ring method),서리기법(권상법;卷上法, coiling method)이 이용되고 있으며, 물레는 사용되지 않았다. 소형의 토기는 손빚음법을 쓰고 있으나 그릇 벽면의 테자국 관찰과 X-ray 사진분석 결과 대부분의 선사토기는 테쌓기법과 서리기법으로 빚었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다. 빗살무늬 토기라는 용어는 일본의 고고학자 후지다가 Kammkeramik(comb pottery)라는 독일어를 즐목무늬 토기라고 직역한데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토기가운데 빗살무늬 토기가 제작 되기 이전에 무늬가 없는 무문토기, 즉 민무늬토기가 있는데 빗살무늬 토기보다 하층에 있다.

형태는 밑이 뾰족하거나 둥글어 V자 혹은 U자와 같고 아가리는 직립해 있다.

제작방법은 그릇을 엎어 놓은 상태에서 아가리부터 만들어 위로 올라가므로 그릇을 거꾸로 제작된다.

무늬는 큰 생선의 등뼈 같은 도구를 가지고 빗으로 머리를 빗어 내르듯이 토기 표면을 긁어 빗살무늬를 나타냈는데 지역에 따라서 특징이 다르다.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의 식량 채집 단계와는 달리 식량 생산 단계에 돌입 하였다는 사실이 혁명적인 변화라 할 수 있고,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이 토기의 존재이며 토기의 제작은 불을 발견하여 사용하게 된 사실과 표리를 이룬다.

생활용기로서의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는 단순한 용기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다양한 빗살무늬의 세련된 양상은 그들의 미적 표현의 대상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석기 시대의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 隆起文土器)


토기의 겉면에 진흙띠를 붙이거나 겉면을 맞집어 돋게 하여 무늬를 만든 것으로 부산 동삼동, 통영 상노대도, 연대도 조개더미 등에서 빗살무늬토기층보다 아래층에서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해안에서 주로 출토되지만 북으로는 양양 오산리, 서북으로는 신안 흑산도, 내륙지방으로는 단양 상시리 바위그늘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조사가 진행되면 분포범위가 더 넓어질 가능성도 있다.

※덧무늬토기는...

빗살무늬토기와는 달리 한반도의 남부지역에서 점차 북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처음에 어디에서 이러한 토기문화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일본이나 해안을 통한 전파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빗살무늬 토기[櫛文土器/즐문토기]


서울 암사동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 신석기 시대. 토기의 겉면에 빗같은 무늬새기개[施 文具]를 이용해 만든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합하여 각종 무늬를 그린 토기. 대체로 나무,뼈 연장 또는 그것으로 만든 여러 가닥이 난 빗살모양의 무늬새기개를 가지고 그릇 바깥면에 짤막한 줄을 배게 누르거나 그어서 새긴 것을 빗살무늬라고 부른다. 이러한 빗살무늬는 질 그릇에 따라 여러 모습을 나타내는데, 한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선,점선으로 된 짧은 줄을 한쪽 방향으로 또는 서로 방향을 엇바꾸어가면서 그려서 그 모습이 생선뼈처럼 생긴 것이다. 그릇 모양은 밑창이 달걀처럼 생긴 것과 밑이 납작하여 깊은 바리[鉢]처럼 생긴 것 이 대표적인데, 그릇 종류에는 독모양이 큰 것을 비롯하여 항아리,단지,대접,보시기 등 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바탕흙에는 진흙에 모래만 섞은 것과 석면,활석부스러기 같은 것을 섞은 것이 있으며, 그릇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갈색이 기본을 이룬다. 대체 로 섭씨 600~700 °C 의 열을 가하여 구운 것인데, 땅을 판 구덩이에서 별다른 특별한 시설 없이 장작불을 피워 구운 것으로 생각된다.

3) 청동기시대토기 - 민무늬토기(무문토기 無文土器)


청동은 구리, 주석, 납이 주로 들어가며 이와같은 청동제품을 사용하던 시대를 청동기시대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청동기를 사용한 곳은 B.C 3700년경의 이집트이지만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상한년을 약 B.C 1000경으로 본다.

신석기시대를 빗살무늬토기 문화시대라고 하는 것과 같이 청동기시대를 민무늬토기

문화시대라고도 한다.

민무늬토기라 함은 그릇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모든 토기를 가리킨다. 민무늬토기는 대체로 갈색 혹은 황갈색을 띠고 장석, 석영립등 굵은 모래가 섞인 태토를 사용하였으며 민무늬의 평저(평평한) 기형이 특징이다.

 청동기시대는 상당히 발달된 사회구조를 형성하여, 고조선 부여같은 부족연맹체를 이루었던 시대로서 고도의 정치적 사회가 운영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밭농사를 주로 한 정착된 농경사회였으므로 안정된 생활은 토기 제작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그릇의 형태면에서도 전에 볼 수 없었던 실용적인 항아리, 속이 깊은 사발 등과 같은 모양을 기본으로 하여 대전, 굽다리잔 등 일상 용기의 일면을 보여주며 양측면에 손잡이가 달려 물, 술과 같은 음식을 나르는데 편리하도록 된 기형도 있다.

 때로는 칠무늬토기와 같이 장식적인 무늬가 시문된다. 이것은 그릇에 채색을 넣음으로써 특수한 용도로서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주위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일면을 공예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이다.


 민무늬토기(무문토기 無文土器)종류


 1.구멍무늬토기(공열토기 孔列土器) : 아가리 바로 아래에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1줄 내지 2줄 로 돌아가며 배치된 토기.


2.골아가리토기(구순각목토기 口脣刻目土器) : 아가리에 눈금을 새긴 토기.


3. 팽이토기(각형토기 角形土器) : 바닥이 지름 3∼5cm 정도로 작고 그릇모양이 팽이처럼 생긴 토기.


4.붉은간토기(적색마연토기 赤色磨硏土器) : 겉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문질러 광택이 나게 한 토기.


5.가지무늬토기(채문토기 彩文土器) : 어깨부분에 검은색의 가지무늬가 베풀어진 토기.


6 .검은간토기(흑색마연토기 黑色磨硏土器) : 겉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의 안료를 바르고 문질러 광택이 나게 한 토기.


7.덧띠토기(점토대토기 粘土帶土器) : 아가리에 진흙 띠를 덧붙여 겹아가리를 만든 토기.


8.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 : 화분 모양의 토기. 



 

1,2 구멍무늬, 골아가리토기




        송국리식 토기


    
 

        각종 청동기 시대 토기





      4,5 붉은 간토기, 가지무늬토기



       8.화분형토기 


※송국리식토기는...


기원전 5~4세기의 토기로 충남 부여군 송국리에서 출토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토기 문화는 우리나라 민무늬토기시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이 시기부터 벼농사가 이전의 밭농사에서 논농사로 전환되었으며, 논농사는 생산력의 증가와 함께 인구 증가, 급속한 사회분화의 촉진 등을 유발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철기시대토기

철기시대는 크게 두시기로 구분된다.

B.C 300년경으로부터 서력기원 전후까지 '초기철기시대' 서력기원 전후로부터 A.D 300년경까지의 '원삼국시대'이다.


원삼국시대는 청동기의 제작은 사라지고 철기가 본격적으로 양산되는 시기이다.


초기철기시대는 청동기 후기와 겹치는 시기이므로,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 형식이 그대로 계속 되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의 전통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 한(漢)나라의 새로운 토기 굽는 기술이 받아들여져 보다 단단하고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만들어진다 <학계에서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라고 부른다>.


원삼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연질 또는 경질의 타날무늬(두둘긴 무늬)회색토기와 적갈색 타날무늬토기이다.

제작환경은 개방된 노천가마가 아니라 밀폐된 실요, 즉 지하굴식 혹은 터널식 오름가마이다.


이와 같은 제작 환경은 산소의 공급이 차단된 환원염(還元焰) 상태이고 밀폐된 공간이므로 소성온도를 전보다 올릴 수 있어 어떤 것은 쇠붙이 소리가 날 정도의 상태를 보이는 것이 있으니 토기의 일대 혁명이라 볼수있다.


※한나라의 새로운 토기 굽는 기술은...


민무늬토기가 한데가마(노천요 露天窯)에서 굽는 것인데 비해 한나라의 새로운 토기 굽는 기술은 굴가마(등요 登窯)에서 굽는다.그리고 토기를 만들 때 돌림판(도차 陶車) 위에 흙을 올려 놓고 두르림판(박자 拍子)을 사용하여 두드림무늬를 내므로 보다 단단하고 치밀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중서부 지방의 빗살무늬토기


 


동북지방의 빗살무늬토기


 


  강원도 지방

 


  남부지방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서 고대국가를 형성했던 시기이다. 이 시대의 문화는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토기란

흙을 빚어 구운 모든 기물을 도자기라 말하며 구울 때의 온도에 따라 태토(胎土)의 굳기가 각각 다르다. 굳기에 따라 일반적으로 토기(土器,clay ware), 도기(陶器,earthen ware), 석기(石器, stone ware), 자기(磁器, porcelain)로 구분한다.

토기는 점토질(粘土質)의 태토를 사용하여 섭씨 700 ~ 800도 정도에서 구운 것을 말하며, 유약을 씌우지 않았고, 표면 색은 적갈색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토기가 이에 속한다. 도기는 섭씨 800 ~1000도 정도로 토기보다 약간 높은 온도에서 구워 물이 스며들기는 하나  몸이 비교적 단단 하다.
대체로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가 이에 속한다.
석기는 섭씨 11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소성(燒成)하기 때문에 태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장석이 녹아서 유리질로 변해 태토 사이로 흘러 들어가 그릇의 몸이 매우 단단하며 표면 색은 회청색을 띤다.  그러므로 두드리면 쇠붙이 같은 금속성의 소리가 나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경질(硬質)토기가 곧 그것이다.

자기는 섭씨 1200 ~ 1400도 정도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태토의 유리질 화가 더욱 촉진되어 강도가 매우 높은 그릇을 말하며, 태토로는 고령토를 사용한다. 고령토라 함은 원래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경덕진 부근의 고릉(高陵)에서 고급의 자토(磁土)가 산출되었던 데서 유래했다.
양질의 고령토는 규석 50%, 알누미나 30%, 포타시움 2,5% 등의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석의 유리 질화가 태토의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데, 이러한 흙으로 만든 그릇이 자기이다.

이와 같은 고급 자질의  고령토는 내하도가 높아 그릇을 얇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유럽에는 고령토가 없기 때문에 유리질화의 원인이 되는 규석을 대신하여 석고나 골재를 사용하므로 연질의 인공자기가 되는 까닭에 진정한 의미의 경질자기라로는 할 수 없다.
고급 자질의 고령토로 만든 그릇 위에 다시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재벌구이를 하면 그릇의 표면이 골고루 유리화되며, 이러한 자기가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도자기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도자기) 라는 용어는 고려와 조선시대 문헌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자기, 사시, 도기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백자, 백사기 등으로 기록한 점으로 보아 "도자기"라는 용어는 과거에는 쓰지 않았던 듯하다.
예컨데 조선시대 1424 ~ 1432년 사이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세종실록지리지]의 토산조에는 자기소와 도기소로 구분하여 기재되어 있어서 1420년대에는, 그 기준은 알 수 없으나 자기 또는 도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또, 1481년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의 토산조에도 자기, 사기, 도기의 세 가지 용어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15~16세기에는 자기, 사기, 도기라는 용어는 각각 별도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자기 또는 도기로 엄연히 구분하여 사용되던 용어가 지금은 자기와 도기를 합쳐[도자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토기번조(굽기)방법

 

산화염(酸化焰)과 환원염(還元焰)


토기를 구울 때 공기의 공급이 충분한 불길을 산화염이라고 한다. 산화염으로 구운 토기는 산소의 양이 많은 상태이므로 붉은 색 계통을 띠며, 단단하지 않다.


환원염은 가마를 밀폐하여 공기(산소)의 공급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굽기 때문에 높은 온도를 유지하여, 단단한 그릇을 만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경질토기는 1,100。~1,200。C 정도의 온도로 굽는다. 그릇의 색깔도 산소가 불충분하므로 회청색을 띤다.


한국의 도자기라고 하면 토기-토기, 도기, 석기-와 자기를 모두 가리키는 것이 되지만 대체로 토기는 그릇의 표면에 유리질막이 없는 상태이고 자기는 유약을 바른 것을 지칭한다. 토기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중요한 그릇이었고 자기는 고려시대 이후에 크게 발전한다. 유약에는 섭씨 600~800 도 정도의 저화도에서 유리질화하는 연유(鉛釉)계통과 섭씨 1100도 이상에서 녹는 장석유(長石釉)계통이 있다. 연유의 사용은 고구려토기에서 발견되며 7세기경의 백제와 신라토기에도 나타난다. 장석유의 사용은 고려시대 자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회유란 우리말로 잿물이라고 하는데 소나무, 싸리나무, 그리고 볏짚과 같은 화본과(禾本科) 식물의 재를 물에 타면 재에는 규산분, 산화칼슘, 나트륨, 알루미늄 등이 있으므로 이것이 곧 초보적인 유약이 된다. 그런데 화본과 식물의 회유는 높은 온도를 받으면 유리질로 변하기는 하나 뭉쳐 흘러내려 표면에 골고루 유리막이 입혀지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삼국시대 이후의 토기에는 소량의 회유계 토기와 연유계 토기가 있기는 하나, 통일신라시대까 지는 대개 유약을 씌우지 않은 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이들 토기들은 초벌구이만 한 것이다. 물론 온도에 따라서 그 굳기가 다르지만 유리질막을 형성하는 유약을 바른 것은 아니다. 고온에서 녹는 장석유를 사용하면서부터는 재벌구이를 하게 된다.

재벌구이를 하게 되면 장석유는 녹아 그릇 표면에 씌워지고 고루 유리질막이 형성되면서 경도가 높은 자기가 된다.


◆ 토기를 가마에 넣고 처음 24시간은 장작과 솔잎있는 가지를 화구 가까이에 놓고 약하게 태워 나간다. 이때는 불은 거의 보이지 않고, 불의 온도도 100℃ 정도로서 흰 연기만이 가마 속을 뒤덮는데, 이것은 태토 속에 있는 수분을 서서히 증발시켜 급한 가열, 즉 급한 기벽의 유리화로 인한 균열과 가스화(gas化)를 막기 위한 것이다. 다음 24시간은 본격적인 소성으로, 장작을 터널의 장축 방향대로 세로 던져 불길이 깊숙이 뻗어 들어갈 수 있게 하고, 화력도 1000℃ 이상으로 상승케 한다. 이때 터널벽에 있는 화창의 마개를 빼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도가니까지 뻘겋게 달아오르고 있는데, 이때부터 막불이라 해서 열을 내리고 가마 속에 흑연(黑煙)을 채우기 위해 화구 가득히 솔잎을 틀어 막고 화창으로 부터도 계속 던져 넣은 다음 , 화창과 아궁이를 흙으로 밀폐해서 시커먼 연기의 분출을

막아 버린다. 이 막불은 불완전연소시켜 그을음(탄소)을 내고, 그 그을음이 토기의 미세한 기공에 스며들어 신라토기 특유의 암회색을 띠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탄소착색법은 신라시대에도 실시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태토의 철분이 산화염으로 회청색을 내게 되지만, 신라토기 특유의 회청,암청색 또는 소위 유흑색을 내기 위해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탄소착색법이 사용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막불이 24시간

지나가면 굴뚝에서는 맑고 새파란 연기가 나오기 시작하며, 이로써 3야4일의 소성은 끝나게 된다. 그러나 가마의 문은 열지 않은 채, 그대로 다시 이틀 밤낮의 냉각시간을 둔 뒤에 아궁이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팔을 집어 넣어 재를 한줌 꺼내 본다. 이것은 소성의 성공 여부를 알아보는 방법이며, 이때 재가 많이 잡히면 결과는 불량이고 숯가루가 많으면 성공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숯가루가 많다는 것은 막불 단계에서 불완전연소가 잘된 증거이고, 불완전연소가 잘 되었다는 것은 뜸이 잘 들어 색이 잘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섭씨 1100 ~ 1200 도 정도로 가열할 때는 가마 안의 상태, 이를테면 산소의 공급이 차단된 상태냐 아니면 개방된 상태이냐에 따라서 불꽃의 색이 달라진다. 아궁이가 활짝 열렸다거나 아니면 개방된 야외 같은 곳에서 굽게 되면 불꽃이 밝은 황색에서 밝은 파란색이 되어 소위 산화염의 상태가 된다. 이때의 그릇의 상태는 태토 안에 포함되어 있는 철분이나 유약 안에 포함된 철분이 산소와 결합하면서 제이산화철이 되어 그릇의 빛깔은 황갈색이나 적갈색을 띠게 된다.

그러나 밀폐된 공간에서 그릇을 굽게되면 환원염 상태가 되므로 불꽃은 오렌지 내지는 검붉은 색이 되며 태토나 유약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산소가 빠져나가므로 철분은 제일산화철로 변해 토기의 경우는 회청, 혹은 회흑색이 되고 청자의 경우에는 아름다운 담회청색이 된다.

붉은 색을 띠는 선사시대 토기들은 노천에서 소성 되었으므로 산화염 상태에서 구워진 것이며 철기시대 이후 토기의 색상이 회청, 회흑색으로 된 것은 밀폐된 공간, 즉 수혈가마, 오름가마, 굴가마와 같은 시설에서 구웠기 때문에 환원염 상태에서 소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수혈가마나 오름 가마에서 소성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의 그릇은 높은 온도를 올릴 수 있는 시설에서 구워진 것이므로 몸이 단단한 경질의 석기가 되며 고려시대 이후 오늘날까지는 장석유를 발라 재벌구이한 고급의 경질 자기이다.


 

 

 

신라토기

 

신라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국가로 그 모체는 진한 12개 소국의 하나였던 사로(斯盧)이다. 사로가 중심이 되어 그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여 내물마립간 때에는 큰 연맹왕국으로 성장하며 내물마립간 이후 신라는 김씨의 전제왕권이 수립된다.


낙동강 하류에는 변한 12개국을 이루고 있던 독립된 가야연맹체가 있었다.

가야연맹체는 현재의 김해에 수로(首露)를 시조로 한 미오사마국이 지금의 고령 지방을 중심으로 대가야로 발전하여 신흥 신라와 대치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후원을 받아 법흥왕 19년과 진흥왕 23년에 본가야와 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명실공히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신라의 국호를 정식으로 개칭한 지증왕과 법흥왕 이후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 율령을 반포, 불교의 공인 등으로 통치체제를 갖추게 되며 대내외적인 안정도 얻게 된다. 이를 배경으로 진흥왕은 계속적인 정복 사업을 벌여 경기도, 함경도 일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룩한다.


이와 같이 안정된 귀족문화는 유학을 장려하고 불교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아 고도의 문화를 창출하였다. 특히 전제왕권의 표상인 5-6세기의 대형 적석목곽식고분의 구조적인 특징으로 해서 이로부터 출토되는 막대한 양의 부장토기는 당시 신라문화의 일면을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신라토기특징

 신라토기는 신라 영역내에서 출토되는 회청색의 경질토기와 적갈색의 연질토기를 가리킨다. 토기의 형태로는 목이 길거나 짧은 항아리와 굽다리접시가 기본형태이며, 이밖에 손잡이 달 린 잔, 뚜껑접시, 그릇받침등의 생활용기와 동물, 배, 수레, 등잔모양의 특수한 목적의 이형 토기등이 있다. 무늬는 물결무늬, 점줄무늬에서 차츰 줄무늬, 고리점무늬,세모무늬,톱날무늬등의 기하학적인 무늬로 바뀐다. 그러나 7세기부터는 갖가지 무늬가 새겨진 도장을 이용한 도장무늬가 유행 되는데 후기가 되면 전반적으로 굽다리가 낮아지고

모양도 단순해져 통일신라토기로의 이행 이 일어난다.

초기의 신라토기는 가야토기와 동일한 형태로 제작되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지만 5세기가 되면 토기의 색깔이 회색을 띠며 그릇이 얇아지는 등 신라토기로서의 특징이 뚜렷해진다.

목항아리는 가야토기가 곡선미를 띠고 있는 것과는 달리 목과 어깨의 이음새가 각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고, 굽다리접시는 대체로 굽이 날씬하다. 그리고 가야토기와 구별되는 보다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가 목항아리나 굽다리접시의 굽에 나 있는 구멍으로 가야토기는 아래위 일렬로 배치되는 경향이 많은데 비해, 신라토기는 네모난 구멍을 서로 엇갈리게 뚫은 것이 많다.

또한 가야토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토우장식토기와 상형토기가 신라토기에도

많으나 목항아리나 굽다리접시의 뚜껑에 동물이나 인물을 조그맣게 만들어 붙이는 것이 신라토기만의 특징이다.


▼신라토기와 가야토기의 비교


 고배

신라 ⇒

 1. 대체로 그릇과 뚜껑의 길이나 운두가 높고 뚜껑이 없는 것도 많다.

 2. 대체로 다리가 늘씬하고 다리의 구멍이 위아래 서로 엇갈리게 배치된다.

 3. 뚜껑의 꼭지는 단추처럼 된 것과 구멍 뚫린 고배 모양의 두 가지가 있다.

 4. 무늬는 대칼에 의한 기하학무늬이다.

가야 ⇒

 1. 뚜껑, 그릇 모두 납작하나 다리는 길고, 측선이 곡선이다.

 2. 다리구멍은 좁고 길며 위·아래가 한 줄에 배치된다.

 3. 뚜껑의 꼭지는 단추식으로 한정된다.

 4. 무늬는 빗으로 누른 점선뿐이다.


 장경호

신라 ⇒

 1. 목과 어깨의 접착부가 각을 이룬다.

 2. 굽을 확대한 것 같은 다리가 달리는 경우가 많다.

 3. 무늬는 빗에 의한 물결무늬, 대칼에 의한 각종 기하학무늬 이외에

 조그만 토우를 붙이기도 한다.

가야 ⇒

 1. 목과 어깨는 곡선으로 연결된다.

 2. 다리가 없고 따로 만들어진 굽받침이나 높은 기대에 얹혀진다.

 3. 단경호의 경우는 기대같은 높은 다리가 붙여지는 경우가 있다.

 4. 무늬는 목에 돌려진 물결무늬에 한정된다. 

 

 

5~6세기의 여러 가지 토기


 

 

 

서수형토기 (瑞獸形土器)

국적/시대/년대

한국 (韓國) /신라 (新羅) /5∼6세기

재질 토제 (土製) /경질 (硬質)

크기 높이 : 14.0 cm /길이 : 13.5 cm /지름 : 3.6 cm /바닥지름 : 5.5 cm

용도/기능

사회생활 (社會生活) /의례생활 (儀禮生活) /상장 (喪葬) /명기 (明器) 

출토지

경상북도 (慶尙北道) 경주시 (慶州市) 味鄒王陵地區C地區 3號墳


이 유물은 경주시내 황남동(皇南洞) 고분군(古墳群) 내의 미추왕릉지구(味鄒王陵地區) C지구 3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서수(瑞獸)'는 상서러운 동물이라는 뜻이며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둥근 그릇 받침 위에 거북의 모체(母體), 용의 머리와 꼬리 이 복합된 상상의 동물이다. 몸체는 속이 빈 용기로 등에는 주입구(注入口)가 있고 가슴부분에는 위로 치솟은 긴 대롱형의 출수구(出水口)가 있다. 몸체에는 영락(瓔珞)이 달려 있고 머리에서 꼬리까지 날카로운 이[齒]가 솟아 있다. 매우 특수한 형태의 이형토기(異形土器)로 주입구, 몸체, 출수구가 관통되어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용기의 역할도 가지고 있으나, 무덤 부장용의 명기(明器)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대각(臺脚)의 형태로 보아 5~6세기에 만들어진 토기로 여겨진다. 

 

 

수레모양 토기 (車形土器 )

국적/시대/년대

한국 (韓國) /신라 (新羅) /5~6세기

재질

토제 (土製) /경질 (硬質)

크기

높이 : 13.0 cm /전체길이 : 12.8 cm /너비 : 7.5 cm

용도/기능

사회생활 (社會生活) /의례생활 (儀禮生活) /상장 (喪葬) /고대부장품 (古代副葬品) 

출토지

경상북도 (慶尙北道) 경주시 (慶州市) 鷄林路古墳群 25號 甕棺


이 유물은 경주(慶州) 시내의 계림로고분군(鷄林路古墳群)의 25호 독무덤[甕棺] 안에서 소형토기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살이 촘촘한 2개의 바퀴사이에 적재함(積載函)이 있다. 적재함은 띠를 대고 못을 박아 튼튼하게 하였고 적재함 가운데에는 소나 말이 끌 수 있는 긴 이음대가 나와 있다. 당시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수레을 축소한 것으로 작은 토기들과 함께 무덤의 주인인 어린 아이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경주를 포함한 영남지방의 독무덤은 두 개의 독으로 입구를 맞닿게 한 형태가 많으며 그 크기가 작아 주로 유아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얼굴무늬수막새 (人面文圓瓦當)


국적/시대/년대

한국 (韓國) /신라 (新羅) /7세기


재질

토제 (土製) /경질 (硬質)


크기

현재지름 : 11.5 cm /지름 : 14.0 cm


문양/장식

인물문 (人物文) /인물문 (人物文)


용도/기능

주 (住) /건축부재 (建築部材) /지붕재 /수막새


출토지

경상북도 (慶尙北道) 경주시 (慶州市) 沙正洞 興輪寺址 

신라시대 수막새 기와의 무늬는 연화무늬[蓮華文]이 대부분이며, 보상화(寶相華), 당초(唐草), 천인(天人)과 문자(文字)가 있는 것도 있어 실로 다양하다. 여기에 소개코자 하는 영묘사터[靈廟寺址] 출토 얼굴무늬 수막새는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무늬들과 달리 사람의 얼굴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사람의 얼굴을 막새기와에 쓴 것으로는 익산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백제시대 수막새 1점과 황룡사지 출토의 대형(大形) 망새가 있다. 그러나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것은 수막새에 사람의 얼굴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제작된 지역이 다르며 작품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황룡사지 출토 치미에 새겨진 얼굴무늬는 비록 수막새에 된 것은 아니지만 출토 지역이 같고 제작수법과 제작 연대가 비슷한 것 등으로 볼 때 상통되는 점이 많다. 이 기와는 지름 14.0cm로 보통 크기이며, 비교적 두터운 주연대(周緣帶) 안쪽의 둥근 공감에다 눈,코,입, 양볼 만을 만들고, 귀,머리는 생략하는 등 얼굴의 특징을 강조하였다.

콧대는 오똑하며 그 좌우에는 행실형(杏實形)의 눈을 만들었는데 삼국말 석조불상의 과 흡사하다. 입은 얼굴 왼쪽 턱이 결실되어 확실한 모양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오른쪽 볼이 왼쪽 볼보다 튀어나온 점과 그 아래쪽 입 모양으로 보아 수줍음이 흡뿍 담긴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얼굴의 표면을 깨끗하게 고르지 않았으면서도 천진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기와로 사용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데, 뒤쪽에 수키와를 접합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제작 연대는 얼굴의 전체적인 형태나 분위기가 남산 장창곡(長倉谷) 출토 삼존석불의 협시보살상과 유사한 점과 주연부에 연주문이 없이 돌출되어 있는 점, 황룡사지 출토 치미의 얼굴무늬와 관계 등을 볼 때 삼국말 무렵[7세기]이라 생각된다. 이 기와가 발견된 것은 일정 때의 일이며, 발견장소로 알려진 흥륜사지는 이후의 연구성과에서 신라시대의 흥륜사가 있던 곳이 아닌 영묘사지로 밝혀졌다. 발견 직후 학계에 널리 알려진 이 기와는 광복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에 당시 경주박물관의 박일훈(朴日薰) 관장이 여러 곳에 소재를 수소문하던 중, 일본 후쿠오까현[福岡縣] 북구주시(北九州市)에 살고 있는 田中敏信씨가 소장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후 박관장은 전중씨에게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얼굴무늬 수막새라는 점을 감안하여 경주박물관에 기증할 것을 편지로 문의하였고 얼마 후인 1972년 10월 14일 다나까 씨가 방한하여 우리 관에 기증함으로써 경주1564번으로 국고귀속되었다 

 

가야역사

 

가야(加耶)는 서기 300년 무렵에 변한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 여러 세력집단으로 가야, 가라, 가락, 임나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가야의 영역은 일정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동으로는 황산강(낙동강 하류), 서남으로는 남해안, 서북으로는 지리산, 동북으로는 가야산의 남쪽을 경계로 하였다. "가야"라는 이름은 변한 때에 김해지역을 가리키던 구야국에서 유래하여 이 지역의 모든 세력을 일컫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가야는 때에 따라 5가야, 6가야, 7가야국, 포상(浦上)8국, 임나(任那)10국 등의 형태로 모였으나 하나의 통일된 집권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562년에 대가야(大加耶)를 마지막으로 모두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가야의 역사는 대체로 기원전후, 3~4세기, 5~6세기를 기점으로 크게 달라지고 있다. 기원전,후의 변한시기에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각 지역에서 새로운 정치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삼국지"에서는 "00국"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소국에는 정치적인 지배자로서 세력의 크기에 따라 신지(臣智), 험측(險側), 읍차(邑借)등으로 달리 부르고 있었다. 변한의 후반기인 3세기경에는 소국들이 모이는 정치체인 포상8국이나 진한(秦韓)8국 등으로 발전한다. 이들을 기반으로 4세기를 전후하여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성립하여 발전하게 된다.

이들은 낙동강 하구의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 낙동강 서안의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 낙동강 서안의 함안을 중심으로 하는 아라가야, 남해안의 고성을 중심으로 하는 소가야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외에도 낙동강의 서안에는 작은 규모의 집단들이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가야의 여러 나라에서는 정치지배자를 "한기(旱岐)"라고 불렀다. 이 말은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칸(KHAN)이라는 뜻으로, 신라에서는 "간지(干支)"라고 불렀다. 이들은 6세기경에 한기, 차한기(次旱岐), 하한기(下旱岐) 등으로 분화의 과정을 걷기도 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가야지역을 묶는 정치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시기와 성격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가야는 4세기에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가야는 5-6세기에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 2개 가야에서의 정치지배자는 "왕(王)"이라고 불리었는데, 소국의 한기들을 통합하는 존재였다. 특히 대가야의 왕은 6세기 이후에 금관을 머리에 쓰고 스스로 "대왕(大王)"이라고 칭하면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가야의 개국설화가 금관가야의 수로왕 설화와 대가야의 가야산신(伽倻山神)에 얽힌 설화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야의 여러나라 중에서 금관가야는 532년에 구형왕이 스스로 신라에 투항하였고, 대가야도 562년에 주변 강대국이었던 신라와 백제의 전쟁 속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낙동강을 장악한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가야의 쇠퇴와 신라세력의 확장

 562년 대가야의 멸망이후 가야지역은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되어 급격히 신라문화를 수용하게 된다. 신라의 지방제도인 군(郡),성(城),촌(村)으로 편제되고 신라양식의 토기와 굴식돌방무덤이 유행한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어 갈 무렵 가야의 각 지역마다 특색있는 토기들은 신라양식으로 완전히 통일되면서 같은 토기문화로 바뀌어 간다.

 통일기양식토기란 6-7세기경 신라가 자신의 영역으로 넓힌 한강이남과 강원도지역 및 가야의 전 지역에 걸쳐 출토되는 같은 모양과 세트의 토기를 말한다. 이 토기들은 굽다리가 짧고 무늬도 단순하며 규격화된 같은 모양을 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껴묻히는 양상도

비슷하여 낮은굽다리접시와 목꺾인항아리를 주된 조합으로 하여 출토된다.

 굴식돌방무덤은 고구려, 백제의 그것을 본받아 가야가 멸망하기 이전부터 만들어진다.가야의 굴돌방식무덤은 돌덧널무덤의 그것처럼 긴 네모꼴의 평면구조이지만 신라에 통합된 뒤에는 네모꼴로 바뀐다. 합천 저포에서는 D-1호의 긴네모꼴돌방이 E지구의 네모꼴돌방으로 바뀌고 있어 이러한 평면구조의 변화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굴식돌방무덤은 주검을 여러 차례에 걸쳐 묻을 수 있으므로 부부나 일정 범위의 가족을 같은 무덤에 묻게 되는 등 장례습속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김해 구산동고분을 들 수 있는데 하나의 돌방과 딸린돌덧널 및 딸린무덤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덤길을 통해 세차례에 걸친 매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에서는 6세기 후반경의 통일기양식 토기와 철기 및 꾸미개가 출토되었다.

굴식돌방무덤은 가야의 전 지역에서 확인되는데, 김해 예안리고분군, 창원 가음정고분군, 합천 삼가면 양전리고분군 등이 잘 알려져 있다 


통일기양식문화의 전개는 가야문화가 신라문화에 통합되는 과정으로서 지역마다 특색을 띠고 다양하게 펼쳐진 가야문화가 하나의 통일된 신라의 지방문화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먼저 거대한 봉분의 축조가 사라지고 토기나 철기 등 많은 유물을 껴묻어 주는 풍습도 없어지게 된다.
이 무렵 낙동강하류에서는 껴묻거리 가운데 비실용적인 아주 작은 살포나 덩이쇠가 묻혀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토기의
겉면에 대간(大干), 말(末), 정물(井勿) 등의 문자가 새겨진 것들도 발견된다. 이는 당시 지방에서도 문자를 사용하는 계층이 늘어나고 문자의 해독능력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형고분이나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출토되던 화려한 무늬가 장식된 허리띠가 통일기양식문화로 접어들면 단순하면서 같은 모양으로 통일되고 보다 작은 무덤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아마도 지방의 유력자들이 신라로부터 의복을 하사받아 입게 되면서 널리 사용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야 제국(諸國)은 신라에 통합되는 방식과 과정의 차이에 따라 신라가 베푼 지방지배의 통치양상도 지역마다 차별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금관가야세력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하는데 큰 몫을 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가야의 지역사회는 신라에 통합된 뒤에도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고 발전시키면서 문화역량을 키워갔을 것이다. 

 

 

백제토기

 

백제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나 원삼국시대의 회색토기(와질토기) 등을 만드는 전통적인 제작방법의 바탕 위세 낙랑(樂浪)과 고구려의 토기제작 기술의 영향으로 독자적인 토기문화를 이룩하여 고구려, 신라와는 구별되는 토기공예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백제토기는 중국의 한나라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서력기원 전후 원삼국시대부터 경질토기의 제작이 이루어졌고, 금강이남 지역은 가야와 신라의 영향을 받아 가야.신라식 토기가 만들어진다.

백제토기는 색상 및 경도에 따라 적갈색연질토기, 회색토기, 회청색 경질토기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적갈색 연질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에서부터 발전 변화해 온 것으로 바탕흙이 거칠고 질이 좋지 않으며 화분모양의 그룻이 비교적 많으며 대체로 두드림 수법에 의한 삿무늬가 많이 남아있다. 회색토기는 백제토기부터 말기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었으며 경도는 다소 약하고 흡수성이 강하다. 회청색 경질토기는 위 토기보다는 약간 늦게 나타나지만 1000oc이상의 높은 온도로 구워진 토기로써, 금강이남지역세서는 형태적으로 가야토기와 비슷한 기종도 있다.


백제토기의 그릇 종류를 살펴보면, 연질 적갈색토기, 경질 회청색토기, 황갈유도기 등으로 구분되며 약 20여종의 다양한 기종이 있다. 또 신라와 비교하였을 때 소성기술이 다양하여 고화도, 저화도로 소성하였고 시유토기도 간혹 나온다. 6세기 이전에는 중국의 남조풍이, 7세기에 들어서면서는 당풍의 영향을 받아 기형이 변하고 있으며,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여 물레성형 기술이 매우 익숙하다.

초기에는 밑이 둥근 단지와 항아리가 많지만, 생활용기인 바리,대접,잔,접시,합,시루,병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또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세발토기 방울잔 그릇받침 등의 의례용(儀禮用)토기도 있으며, 벼루 등잔 변기 등 특수용기도 있어 그릇 종류가 매우 다양함을 보여 준다.

중기 이후부터는 납작바닥 그릇이 많이 쓰였으며, 사비백제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火葬)이 유행하게 되면서 크고 작은 뼈단지도 많이 만들어 졌다.

백제토기의 특색을 삼국시대의 다른 나라 토기와 비교할 때 가장 두드러진 점은 삿무늬[繩席文]의 보편적인 사용, 세발토기[三足土器], 납작바닥토기, 특이한 형태의 그릇받침(器臺)등을 들 수 있다.


 

*이형토기

이형토기- 단지 항아리 병 등 일반적인 용기가 아닌 어떤 형태를 본따 만든 토기를 말한다. 이형토기에는 사람이나 동물을 표현한 형상토기와 일반용기를 모양을 약간 다르게 만든 이형용기(異形用器)로 나눌 수 있는데, 이형용기에는 접시 병 단지 등을 변형시킨 것이 많다. 그리고 발견된 예가 드물기는 하지만 부소산성, 부여 군수리절터, 서산 남정리 등에서 호자와 닭모양토기도 발견되고 있다. 

*세발토기

보통 접시에 세개의 다리가 달려있는 토기를 가리킨다. 중국 육조(六朝)문화의 영향으로 발생된 것으로 여겨지며, 다리의 모양도 중국 청동기의 동물다리모양장식에서 점차 바뀌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토기는 주로 백제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백제토기의 독특한 기형으로 분류된다.


 

도기 제조술


백제의 도기 제조술은 아주 뛰어났다. 특히 사비시대의 백제는 도기표면에 녹유(綠釉)를 입히는 선진기술을 습득함으로써 다른 주변 국가를 압도했다.사비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도기나 도제품을 제작한 가마터(窯址)는 현재 충남 청양 본의리(7세기 전반), 부여 정암리(7세 기), 전북 고창 운곡리와 익산 신용리(6세기 중반), 전남 영암 구림리(6-7세기) 등에 남아있다. 이들 가마터는 모두 80년대와 90 년대에 접어들어 발견되었다. 사비시대 가마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상당히 과학적으로 축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사비시대 가마들은 거의가 경사진 언덕을 따라 올라가 축조한 반지하식 등요(登窯)로 이루어졌다. 이는 고화도(高火度)를 효 율적으로 유지, 보다 견고한 도기를 만들기 위한 과학적 법이라 할 수 있다. 청양 본의리 등요는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재 래식 사기가마처럼 계단식 등요로 밝혀졌다. 사비시대 이전의 가마 거의가 평요(平窯)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그리고 익산 신용리 가마는 반지하식 등요로 천정 평면은 독사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일본의 스에무라(陶邑) 가마군으로 연결되었다. 영암 구림리에서 발굴된 가마 역시 반지하식이고 평면은 독사머리를 했다. 다만 영암 구림리 가마는 고화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창불구멍을 낸 것으로 조사되어 기능상

한단계 더 발전한 가마로 여겨진다.사비시대 이전의 가마터도 더러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남 승주 대곡리(3-4세기), 충북 진천 산수리(4세기)등이 이 시대의 가마다. 이러한 최근의 발굴자료들은 3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동안 백제 도기가마의 변천 및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호자 

호자(虎子)란 호랑이 등의 동물모양으로 만든 토기를 말한다. 이 토기는 동물모양 청동기에서 점차 발전된 형식으로 여겨진다. 중국의 예로 볼 때 주기(注器), 다구(茶具), 명기(皿器)등의 목적으로 제작 사용된 특수 용기이다. 부여 군수리에서 발견된 호자는 입을 벌린 채 앉아있는 동물을 간략화시켜 형상화한 것으로 다소 해학적이며 백제의 독창적인 면을 짐작케 해 준다. 소변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백제인의 陶器文化


사비시대 백제도기에서 주목할 그릇은 녹유기(綠釉器)다. 강도가 높은 질그릇에 녹갈색의 유약을 입힌 이 그릇은 7세기 초 기에 나타난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녹유그릇받침(器臺)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릇은 조각으로 출토되었으나 복원작 업을 거친 결과 나팔모양을 한 녹유그릇받침으로 판명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질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기법의 도기 라 할 수 있다.이 선구적 질그릇인 녹유기는 통일신라로 이어져 널리 사용되기에 이른다. 위에 톱니바퀴 모양의 장식이 있고 세로로 붙은 와선무늬 장식의 띠 사이사이에 구멍이 뚫린 그릇받침은 사비시대 백제 녹유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질그릇에 유약을 입혀 녹 유기를 구워내는 백제 도공들의 생산기술은 선진적이었다. 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시유술(施釉術)은 뒷날 고려청자와 같은 본격적 도자기(陶瓷器)를 생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익산 미륵사(彌勒寺)절터에서도 7세기 전반쯤의 도기들과 기와편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표면에 녹갈색의 녹유를 입혔 다. 녹갈색의 산화납을 저화도에서 입히는 방식으로 녹유를 시유했다. 녹유가 시유된 기와에서 백제는 7세기 전반쯤에는 그것말 고도 기와와 같은 도제품에 녹유를 보편화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녹유가 결국은 통일신라에 널리 전파되는 것이다. 백제도기나 도제품의 우수성은 생산기반시설과 견주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7세기 전반에 과학적인 질그릇 가마를 만들었 다. 지난 86년 사비성 고토에서 그리 멀지않은 청양 본의리 한 구릉에서 발견한 반지하의 계단식 등요(登窯)가 그 시기의 가마다 .


 



승석문항아리 (土製繩蓆文壺)


 

백제 (百濟) /경질 (硬質) / 높이 : 34.0 cm /입지름 : 18.4 cm /너비 : 35.5 cm


물상문 (物象文) ,승석문 (繩蓆文) / 항아리 /상장 (喪葬) ,고대부장품 (古代副葬品)


 영암(靈巖) 신연리(新燕里) 9호분 5호 토광(土壙)에서 출토되었다.

몸통이 공처럼 둥그나 바닥은 약간 편평하다. 어깨 위에 목이 약간 바라(外反)져 올라가다 아가리 끝에서 살짝 바라졌다. 전체적으로 연한 회청색(灰靑色)을 띠며 바탕흙(胎土)은 굵은 모래알갱이가 많이 섞인 진흙을 사용하였다. 어깨부분에서부터 삿무늬(繩文)가 거칠게 베풀(施文)어졌는데 둥근 두들개(打板) 흔적이 나타나 있다. 안면에 받침모루(內拍子) 흔적, 안팎면에 회전 물손질 흔적이 잘 남아 있다. 

치미

백제 (百濟) /연질 (軟質) / 높이 : 90.9 cm /지붕재 /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 폐사지


암기와편(片)으로 세로로 긴 장방형의 구획을 나란히 2개 만들고 '공도작(工徒作)'이란 명문을 종으로 양각하였다. 상단부가 파손되어 앞에 부가된 내용이 있었는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구획된면 주변은 어골문(魚骨文)을 성글게 양각하고 있다. 내면(內面)에는 격자상의 포목흔과 함께 와통에서 분리시 포목을 잡아당기면서 형성된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태토는 사립을 정선한 점토질로 회백색을 띄는 연질소성이다.

도용 (陶俑)

백제 (百濟) /연질 (軟質) /상장 (喪葬) ,용 (俑) / 부여읍 동남리 정림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도용(陶俑)의 수부(首部) 7점이다. 출토 도용은 모두 수부(首部)와 신체(身體)가 분리된 채 발견되었는데 총 63점중 수부는 13점이다. 쌍계로 묶은 형태 및 용관의 인물, 곱슬머리의 호인형(胡人形) 인물등 도용(陶俑)은 대체로 이국적인 관모 및 관식(冠飾)을 보여주는데 이목구비가 얼굴 중앙에 몰린 풍만한 안면(顔面)에 둥근 눈, 유난히 강조한 오똑한 코와 작은 입술을 지니고 있다. 파손된 목의 절단면에는 목심(木心)을 꽂아 몸체와 연결시키기 위한 소공(小孔)이 뚫려있는데 이러한 제작방식 및 이국적인 용모는 중앙아시아 및 중국 북수귀(北垂鬼) 도용 양식과 연관되어 백제의 국제적인 문화 교류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변기 (便器)

백제 (百濟) /경질 (硬質) / 높이 : 16.3 cm /길이 : 36.0 cm /너비 : 26.2 cm /요강


충청남도 (忠淸南道) 부여군 (扶餘郡) 부여읍 군수리


 변기(便器)로서 완형이다. 경질(硬質)으로 연한 회청색을 띤다. 소성이 양호하며 태토는 정선되었다. 저부(底部)는 원형인데, 구연쪽으로 올라갈수록 한 쪽이 넓어져 구연은 타원형을 이룬다. 구연 가까이에는 1조(條)의 침선문이 돌려져 있으며, 양쪽에는 대상파수(帶狀把手)가 1조(條)식 붙어있다. 기면 곳곳에 기포가 부푼 흔적이 있다. 형태로 미루어 보다 여성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옹관 (甕棺)

백제 (百濟) /경질 (硬質) / 높이 : 97.0 cm /입지름 : 50.0 cm /몸통지름 : 80.0 cm /뚜껑높이 : 25.0 cm /뚜껑지름 : 57.0 cm /의례생활 (儀禮生活) /상장 (喪葬) /관 (棺) /

부여읍 염창리 상염부락


충남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상염부락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부여지방에서 발견된 독무덤은 주검을 매장하기 위하여 독널을 특별히 제작하기 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항아리를 그대로 쓴다하여 일종의 호관묘(壺棺墓)라고도 불리운다.
이 옹관은
뚜껑부, 항아리로 구분된다. 파손·복원된 상태이고, 항아리는 밑이 둥글며 짧은 목과 구연은 외반된 상태이다.
어깨부에서 최대로 벌어져 서서히 좁아지는
상태이며, 기면에는 소성이 열에 의해 발생되는 기포(氣泡)가 있다.
기면(器面)의 전면(全面)에는
방향없이 조잡하게 타날된 선문이 나타나있다. 항아리 바닥부분의 중앙부에는 관통된 구멍이 있는데 이는 독로 사용할때 배수를 목적으로 뚫은 것으로 보인다.
색조는 회청색 경질토기이며, 뚜껑부는 자배기와 흡사하고 둥근 바닥에 몸통은 약간 넓어지며 올라가다 한단 좁혀 매우 짧은 목을 만들었다. 구연은 두툼하게 접어 돌리고, 몸통 전면에 선문이 교차된 상태이다.
색조는 회갈색 연질(와질)토기이며, 항아리, 뚜껑등은 모두 고운 점토로 제작된 대형급 옹관이다. 

*벼루 


 

고구려토기

 

고구려 토기 특징


고구려는 지리상 북방문화를 수용하면서도 독특한 창조력과 강인한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토기는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고, 손잡이가 네 개 달린 항아리, 배부른 단지, 갚은 바리모양이 대표적인데 대부분 납작밑이다.

서기 3세기 이전, 초기단계에는 모래섞인 바탕흙으로 빚은 어두운 갈색 또는 검은색 토기 등이 있고, 그릇형태로는 단지, 항아리. 잔이 있다.

중기인 4-5세기 경에는 고운 점토질로 제작되며 회색, 황갈색에 어깨나 몸통부분에 간단한 줄무늬가 있으며 병, 독, 뚜껑있는 대접, 손잡이 달린 잔, 솥, 화덕 등의 실용품이 있다. 또 한 6세기 이후에는 더욱 다양해져 벼루, 베게, 등이 출토 되었는데, 도자기처럼 유약이 발려 지기도 하였다.

고구려토기는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고 손잡이가 네 개 달린 항아리(사이호 四耳壺), 배부른 단지, 깊은바리, 시루가 대표적인데 거의 납작밑(평저 平底)이다.


고구려 토기는 고운 점토질의 바탕흙으로 물레를 써서 만들고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것으로 회색,황갈색,검은색을 띠며 토기의 어깨나 몸통부분에 간단한 줄무늬가 베풀어지거나 마연한 암문(暗文)이 나타나기도 한다.


 

       세발항아리                                    맞귀단지                                       항아리 

고구려토기는 실견할 수 없어 그 윤곽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고 기존 유물에 대한 연구 또한 부진하여 삼국 가운데서 가장 모호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지만 몇가지 특징을 들수 있다.


첫째, 토기에는 연질 종류와 흑색 계통의 경질토기가 있다.

항아리 종류가 많으며 어깨에는 네 귀가 달리고 간단한  몇 줄의 횡선이나 점렬이 시문된다.


둘째, 중국의 영향은 받은 연유가 시유된 황갈유 도기가 있다.


세째, 기형은 다양하며 실용적인 성격이 강하여 항아리가 많고 아가리는 넓고 밖으로 벌어지며 밑은 편평하다.


네째, 무늬는 돗자리무늬나 타날무늬 계통은 거의 없고 항아리 어깨부분에 무늬대를 만들고 간단한 물결무늬 톱니무늬, 노끈무늬 등이 음각되는 경우가 있다.


고구려의 건국과 관계가 깊은 압록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초기 무덤인 적석총이 산재해 있으며, 이들 적석총에서는 흑색 계통의 연질토기도 발견되었다.


 

고구려토기의 변천


고구려의 건국과 깊은 관계가 있는 압록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초기 무덤인 적석총이 산재해 있으며 이들 적석총에서는 흑색 계통의 연질토기들이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다. 형태는 바닥이 편평하고 배가 둥글며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항아리와 양측에 물동이모양 손잡이가 아가리가 넓은 그릇과 접시들이 출토된다. 이들은 대체로 4세기 이전의 토기이며, 이 시기의 것으로는 중강군 토성리, 시중군 노남리 남파동 주거지 유적 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다.


평양 대성산 유적에서는 밑이 편평하고 아가리가 넓게 밖으로 벌어진 둥근항아리 짧은목에 뚜껑이 있는 둥근항아리의 안팎 한쌍과 도제 벼루가 출토된 예가 있다.


평양시 만달산 제 14호 석실 무덤에서 출토된 항아리는 회백색의 둥근 몸에 밖으로 휜

아가리와 편평한 밑을 가지고 있고 어깨에는 깊은 횡선을 하나 긋고 그 상.하에 각각 점렬무늬와 네 줄의 파상선 무늬를 시문한 고구려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연질계 토기이다.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송산리 고정호에서 출토된 맞귀단지는 흑색 계통의 경질토기로서 아가리가 벌어진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어께 부분에는 얕은 선무늬가 보이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흑색토기이다.


고구려토기에는 황갈유 도기가 또한 특징을 이룬다. 이것은 중국 육조 칠무늬토기의 영향으로 간주되며 대동군 토포리 출토 황유네귀항아리, 일본 교토대학교 소장의 황유네귀항아리. 화유반 등이 알려져 있으며 이밖에도 북한에서는 황유 토기가 최근 여러 곳에서 출토되는 사실이 보고되고 있다.

 

 

집모양토기                                                *도제벼루 

(家形土器)高句麗시대 /     

고구려 :

8.0cm/國立中央博物館 

 

 

*황유토기  

 

통일신라시대토기


6세기 중엽이후 (진흥왕대)에 고구려, 백제의 돌방무덤이 경주에 들어오면서 토기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즉 짧은 다리에 넓은 굽이 달려 있고 네모, 마름모꼴의 작은 굽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뚜껑사발(유개합 有蓋盒)이 나타나는 것이다.

통일신라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도장무늬이다. 그릇에 도장무늬를 찍는 것은 신라시대부터 나타나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도장무늬만으로 그릇의 표면을 장식한다.또 다른 특징은 굽다리가 낮아지는 것이다. 신라, 가야토기의 구멍 뚫린 높은 굽다리는 진흥왕 때부터 낮아지기 시작하고 굽다리의 구멍도 작아진다.그리고 그릇의 표면에 녹색 유약을 바르는

녹유(연유)토기도 만들어진다.

이러한 토기들을 통일신라의 토기와 구분하여 통일양식의 토기라고 부른다


통일신라시대의 문화는 불교문화가 그 중심이며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 구현한 불국사, 석굴암이 그 대표라 하겠다. 이밖에도 상원사종과 봉덕사종은 공예기술에서뿐만 아니라, 소리의 극치라는 점에서도 공예문화는 절정기에 이른다. 도자기공예에서도 여러가지 변화와 발전을 보인다.


통일신라신대의 토기는 몇가지 성격으로 구분된다.


첫째, 횡혈식 석실분토기가 연구의 대상이 되며 통일 전기양식을 대표한다.


둘째, 통일 이후 왕들이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는 화장법을 사용했으므로, 장골 용기로서의 뼈항아리(골호骨壺)에 대한 연구이다. (뼈항아리는 시대에 따라 형식의 변화가 비교적 뚜렷하다.)


세째, 생활용기이다. 1975~76년에 발굴한 안압지 출토유물과 대중12(858)년명  토기편이 출토된 미륵사지 출토 토기로 알수 있다.


네째, 통일신라시대 토기를 생산했던 가마터 출토 토기편에 대한 조사이다.

 

무덤 출토 토기


경주지방에서 지금까지 통일신라시대 무덤인 석실무덤이 조사된 예로 충효동 무덤 10기, 서악동 석실무덤, 정래동 방형무덤, 장산 토우총, 황성동 무덤등이 있다.

경주 이외의 지역으로는 통일신라 말기에 속하는 울릉도에 20여 기의 무덤이 있다.

석실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를 종류별로 보면 굽다리접시(高杯), 긴목항아리, 뚜껑있는 합, 완, 울릉도 천부동 출토 토기 등이 있다. 신라시대의 석실무덤은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학술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사실상 석실무덤으로부터 출토된 토기의 변천 과정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어렵다. 


뼈항아리


뼈항아리는 불교식으로 화장을 한 후 그 재를 담는 장골용기이다.

통일신라의 뼈항아리는 대체로 기형, 무늬, 제작 기법등으로 미루어 보아 다음과 같이 세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제1형식 -- 통일신라 초기의 뼈항아리로 삼국시대 양식이 많이 남아 있으며 탑모양뼈항아리, 각선무늬뼈항아리, 돌대무늬뼈항아리등이 이에 속한다. 이형식은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많이 유행되었다.


제2형식 -- 8세기에 유행한 각종 인화무늬뼈항아리를 말한다.

 8세기의 통일신라는 조각, 공예, 건축등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 준 시기이다. 뼈항아리

표면이 더욱 화려 정교하여져 역시 8세기에 전성기를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인화무늬 뼈항아리에는 황갈 혹은 황록의 연유계통의 유약 쓰여진 예가 많다.


제3형식 -- 대체로 9세기에 유행한 뼈항아리로 인화무늬는 사라지고 민무늬가 되며 뚜껑에는 돌대선이 부착되는 경우도 있으나 뚜껑과 몸에 1~2줄의 음각 횡선이 돌려지는 것이 특색이다.

생활용기


통일신라시대의 생활용기에 대해서는 안압지 출토 토기편, 미륵사지 출토 토기편, 그리고 최근 발견되고 있는 경주 월성 해자 부근 건물자리에서 출토된 토기편 등을 들 수 있다.


안압지(雁鴨池) 임해전의 정원이었던 안압지의 발굴은 통일신라의 일상용기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안압지 출토 토기의 특징과 종류를 보면, 태토는 정선된 흙을 사용했으며 대체로 소성 온도가 높은 흑회색의 석기질이고 표면장식은 음각무늬, 인화무늬, 그리고 민무늬 등의 종류가 있다.
기형의로는 굽다리접시, 사발, 접시, 항아리, 병, 등잔, 벼루등의 생활용기가 대부분이다.

통일신라말이 되면 도장무늬토기는 민무늬토기로 바뀌어지고 입큰병 등 청자와 유사한 것들이 주로 제작되어 고려토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각종토기종류                                          *녹유인화문사이호(綠釉印花文四耳壺) 
        

             연유대부합(鉛釉臺附盒)


 

*뼈단지 

*생활용기 토기류

고려청자

 

청자


토기에서 자기로의 이행은 커다란 혁신이었습니다.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릇을 만드는 바탕흙이 점토에서 자질(磁質 ,白土)로 바뀌고 유약은 회유(灰釉) 대신 장석계 유약이 쓰이게 됩니다. 또한 높은 온도로 환원염 번조를 하기위한 등요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제반여건들은 이미 통일 신라말에 축적되었으며 그런 기반 위에 중국 청자 기술의 영향을 받아서 9세기 중엽 이후 청자가 만들어집니다.


고려청자는 주로 서남 해안에 분포되어 있는 가마에서 만들어 졌는데 특히 전라도 지방에 많은 가마가 밀집되어있습니다.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은 청자의 주산지로 유명합니다. 특히 부안에서는 청자뿐 아니라 세련된 고려백자도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이 두가마에서 생산된 청자는 양질(良質) 청자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귀족과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입니다.


양질 청자는 정선된 바탕흙에 비취색의유약을 입힌 청자로서 초기에는 중국 당 오대 송나라의 도자기나 금속 그릇으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중국 절강성의 월주요 청자의 푸른 유약색과 장식 의 섬세성 월주요 청자의 인각부조를 모방한 반양각무늬 하북성 정요와 자주요의 문양이나 기형등과 유사한 양식이 고려청자에도 나타납니다. 양질 청자 가마는 전라도 강진, 부안외에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충남서산군 성연면 오사리 등지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양질 청자에 비해 인천시 북구 경서동과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는 '녹청자'로 불리는 거친 청자도 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통일 신라시대의토기 바탕흙을 정선하여 그 위에 고화도의 회유를 입힌 것으로 녹갈색이나 황갈색을 띱니다. 녹청자는 통일 신라시대말부터 지방수요층을 대상으로 하여 지방가마에서 구워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청자로 평가되는 것은 색깔 형태 문양 등이 매우 아릅답고 제작기법이 정교한 양질 청자입니다. 양질청자는 초기에는 중국 도자기의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12세기부터는 고려적인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섬세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조형미를 지니게 됩니다. 11세기말에서 2세기 전반에 걸쳐서는 이러한 특징을 갖춘 상형청자(象形靑磁 동물이나 식물및 인물모양의 청자)가 널리 제작되어집니다. 이처럼 다양하고 세련된 기형을 지니면서 푸른색의 유약은 광택이 은은하고 안정감을 주는 반투명의 비취색을 띠게 됩니다.


기형과 유약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고려자기를 대표하는 상감청자가 등장합니다. 상감기법은 처음에는 나전칠기와 금속공예에 사용되던 기법으로서 고려사기장인의 창의에 의해 최초로 고려도자기에 이기법이 응용된것입니다. 상감청자의 출현으로 고려청자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 하였고 유약은 얇고 투명해져서 파르스름한 유약을 통해 상감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게됩니다.


고려청자는 대체로 아무무늬도 없는 소문이거나 음각 양각 투각퇴화 등의 무늬가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12세기전반기에 상감무늬가 나타난 이후에는 상감청자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진사채가 곁들여 지기도 합니다. 무늬의 소재는 연당초, 모란당초, 운학, 포류수금 등입니다. 또 흔히 접할 수 있는 그릇모양으로는 표주박모양병 주전자.참외모양 병,향로,탁잔,꽃병, 매병,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정병, 연적 등을 비롯하여 일상생활용기인 대접접시 등이 있습니다.


고려자기는 동양 도자사에서 매우 독자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1231년 몽고의 칩입이후부터 쇠퇴하여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로 계승되어집니다


 

1 순청자

순청자는 상감이나 다른 물질에 의한 장식무늬가 들어가지 않는 청자를 말합니다.


음각,양각,투각기법으로 장식된 청자들과 동,식물 등을 모방해 만든 상형청자등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러한 순청자는 고려시대초기부터 점차로 세련되어 12세기초에는 그 정점에 이르며 12세기 중엽이후 상감청자가 만들어지는 때에도 꾸준히 제작되었습니다.


그 절정기인 12세기 초 중기의 순청자는 바탕흙이 매우 정선되었으며 유약속에 작은 기포가 가득차 있어 반투명하며 이러한 유약과 바탕흙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표면이 비취색이라고도 일컫는 청록색을 띠며 유약에는 빙렬이 없습니다. 또 경직된 윤곽선을 지닌 중국 고동기의 영향에서 벗어나 점차 부드러운 선을 띠는 단정한 고려적인 형태를 나타내게 됩니다.


2 상감청자


 청자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낸 것을 상감청자라 합니다.


상감청자란 바탕흙으로 그릇모양을 만들고 그 표면에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이나 글자 등을 파낸 뒤 그 패인 홈을 회색의 청자 바탕흙 또는 다른 백토나 자토로 메우고 표면을 고른후 청자 유약을 입혀 구운 청자를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구워내면 회색을 바탕으로 흑,백의문양이 선명하게 돋보이게 됩니다. 


상감기법에는 정상감과 역상감의 두가지가 있습니다.


정상감은 앞에 이야기 한방법으로 상감무늬를 나타낸것이며 역상감은 이와반대로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이외의여백을 파고 백토나 자토로 상감하는 방법입니다. 상감기법은 청공기에 상감으로 문양을 나타낸것에서 비롯되었지만 이처럼 도자기에 상감한 것은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처음 나타난 것입니다.


고려시대 청자에 상감으로 문양을 나타내기 시작한것은 대략12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가장 세련미를 보인 시기는 12세기 중엽무렵입니다. 특히 1159년에 죽은 문공유의 무덤에서 출토된 상감청자는 정교한 기법과 짜임새 있는 문양의 구도 맑고 투명한 유약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절정기 상감청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감청자는 1231년 몽고 침입이후 서서히 퇴락하여 문양이 도식화 되어 버립니다.

고려말에는 보다 간편하게 무늬를 표현하기 위하여 무늬를 찍어내는 인화기법까지 생겨납니다.

상감청자의 인화기법은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이어지게 됩니다.


3 철화청자


고려청자의 일종으로 청자 바탕흙으로 그릇을 빚고 표면에 흑색의 산화철을 주성분으로 한 안료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위에 청자 유약을 입혀 구워낸 자기를 말합니다. 환원염 번조의 고려청자와 는 달리 대개 산화염 번조였기 때문에 일부의 예를 제외하고는 황갈색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대개의 경우 유약이 얇고 바탕흙속에 모래 등의 불순물이 섞인 것이 많아 표면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철화청자는 중국 송, 원나라의 자주요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11세기 초에 만들어

지기시작합니다. 번조 수법이나 기형 문양에서 그 영향을 크게 벗어나지못한상태에서 고려말까지 계속됩니다. 초기의 청화청자는 조그만 접시나 바래기 등의 안쪽면 사방에 새로선을 긋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성기(盛期)에는 병종류에 당초무늬를 주로 하여 모란 무늬 이형 초목무늬 새무늬 버들무늬 시명 등이 그려지며 말기에는 간단한 당초무늬가 그려집니다.

그릇모양은 매병과 광구장경병 주전자, 기름병 등이 많으며 발색이나 문양 등에도 전형적인 고려청자와는 다소 차이가 납니다. 드물게 중국의 매병모양이지만 무늬가 간결하고 필티가 활달하거나 아니면 중국적인 문양이면서도 소박한 필치와 구도에서 고려적인 특징이 엿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4) 고려시대에도 토기를.....


고려시대하면 여러분은 청자만 생각하는데 의외로 토기도 많이 사용했다.

고려시대의 초기에는 청자는 아주 귀하고 값진 물건이었다.

그래서 청자는 왕실과 관청이나 귀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백성들은 토기를 계속 사용했다.

그리고 청자로 만들기 어려운 장독과 같은 큰 항아리는 토기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청자가 백성들도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시기는 대체적으로 12세기 중엽이후 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원산리 가마터 개성

원산리 가마터 외경. 한반도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청자가마터다. 연구자들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도자기 조각들이

무수히 쌓여있다.

 

        청자과형병                          청자매병

 

청자상감 운학모란국화문             청자상감 모란문 항아리

매병 


 


 

          청자철화 조충문 매병 

 

 

조선백자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백자는 청자보다 안정되고 발전된 상태이다. 즉 백자로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14C 후반 문익점에 의한 목화의 전례로 15C 이후사대부를 비롯한 일반인들이 흰옷을 즐겨 입게 되었다.

또한 유학이 전래되면서 검소 .질박. 결백함 등을 추구하게 되면서 백색을 선호하게 된다.

이렇듯 백자가 가지고있는 청순함과 결백함이 양반들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에 청자에서 백자로 발달되었다.

15C 전반에는 백자의 생산이 거의 없었고 왕실에서 약간을 구워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후반에 들어서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도자기를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도록 하는 변화가 일어나며 백자가 발달하게된다.

16C에는 백자의 발달이 더욱 촉진되며 양질의 백자와 청화백자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17C 초에는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도 하기 전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특히 재료를 수입해서 만드는 청화백자는 그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 현재 남아있는 예가 거의 없다.

이때의 백자는 시대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듯 어두운 회색 회백자의 백자로 거칠게 구워졌다.

17C후반에는 사회가 안정되어가며 백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사용되었으며 철화백자가 제작되었다.

철화백자는 달 덩어리 같은 둥근 항아리에 굵은 필치로 자유롭게 그려진 구름과 용이 주로 등장하는 백자이다.

18C 는 문화의 전성기로 백자에 있어서 고전적인 유백색(乳白色), 설백색(雪白色)의 백자와 간결한 청화백자가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의 백자는 검소하고 질박한 우리의 조상의 평범한 모습이며 그러한 평범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에 공감을 가지게 함을 느낄 수 있다.


 

      

 

 

백자의종류

 

백자는 고려 초기부터 청자와 함께 일부가 만들어졌으며, 그 수법은 계속 이어져 조선시대 자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백자는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 물감(안료)의 종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순백자(純白瓷) : 그릇 표면을 싸고 있는 유약과 색조 및 그릇을 형성하는 선이 순백자의 생명이다. 순백자에는 두 가지 유형(類型)이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백자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부드러운 곡선의 기형(器型)을 이루고, 유약은 투명하여 바탕흙과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 유약이 떨어지는수가 있다. 또 하나는 원(元)나라 때부터 고려자기에 영향을 끼쳤던 유형으로 유약이 대체로 얇게 입혀져 백색으로 발색되며, 때로는 약간 쳥색을 띠고 있는 것도 있다. 그릇 모양은 풍만하여 영감이 있고, 유약은 은은하게 광택을 낸다.

순백자는 다른 빛깔로 장식하지 않으나, 형태 자체에 변화를 주며 부분적으로 장식물을 첨가하거나  혹은 투각(透刻)수법으로 무늬를 표현하는 수가 있으며, 표현한 종류에 따라 (1) 소문백자(素文白瓷), (2) 양각백자(陽刻白瓷), (3) 투각백자(透刻白瓷), (5) 상형백자(象形白瓷)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소문백자 : 그릇 표면에 전혀 장식 무늬가 없고 백색의 단일색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그릇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들어졌으며, 대체로 포용력(包容力)이 있고 청초(淸楚)해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 항아리는 달걀색과 비슷한 순백색의 항아리이다. 얕은 입과 우묵한 받침, 부드럽게 벌어진 몸에서 무한한 품위를 느낄 수 있다. 그릇 일부에 가는 빙렬(氷裂)이 있으나, 조선시대 항아리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2) 양각백자 : 순백자 위에 양각수법으로 무늬를 나타낸 것을 말한다. 무늬는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의 사군자(四君子)가 가장 많고, 그 밖에도 약간의 무늬를 첨가하거나, 그림에 곁들여 문자를 양각하는 수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양각 매화무늬 장방형연적(長方形硯適)은 네 귀를 안으로 접은 뒤 한쪽의 좁은 면에는 파도 무늬를 양각하고 그 위에 해태 모양의 물구멍이 있으며, 그 반대쪽과 뒷면에는 매화를 양각하였다.

(3) 음각백자 : 순백자 위에 음각으로 무늬를 장식한 그릇이다. 부분적으로 음각 수법을 한 것은 있으나, 음각 수법만으로 표현을 장식한 예는 매우 드물다.

(4) 투각백자 : 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헌한 것으로 무늬를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청화(靑華)를 칠하는 경우도 있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투각백자연환문필통(連環文筆筒)은 푸른색이 감도는 유약을 칠하였으며, 밑으로 크게 처져서 가로대를 돌려 상하로 구분하고 위쪽에는 옆으로 고리 세 개씩을 연결하면서 고리는 물론이고, 고리와 고리를 연결한 십자형 줄기의 공간도 투각하였다. 아래쪽은 사십자형(斜十字形) 무늬를 새겼으며, 그 때문에 생기는 사각형 공간도 투각하였다.

(5) 상형백자 : 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떠한 형태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만큼 다양하지 못하며, 조선시대의 도자기에서는 순백자에서보다 청화백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청화를 이용하면 어떤 부분적인 형태를 더욱 효과 있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색을 좋아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때로 효과를 무시하고 백색만으로도 만들었다.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된 백자복숭아연적은 굵은 가지로 받침을 만들고 복숭아에 긴 잎이 붙어 있어 끝이 뾰죽하고 안으로 홈이 패어 있는 사실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2. 청화백자 : 백토로 기형(器形)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華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또는 청화사기라고 불렀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10) 명나라에서 보내온 것이다.
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燔造)하기 사작한 것은 1457년 (세조 3) 중국에서 회청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5년 [세조 11년]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예종 1)에는 전남 강진산(康津産) 토청(土靑 : 나라 안에서 생산된 청화안료)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 후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청화백자는 경기 광주군을 중심으로 번조되었으며 이 일대에는 수많은 관요(官窯)가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듭 변천하였다
대체로 15, 16세기경의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얻기가 어려운 때이므로 안료를 아겨 쓴 흔적과 사용하는데 서툰 점을 볼 수 있으며, 그릇의 형태는 항아리(壺)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곤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17, 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형(球形)에 가까워져 양감이 있으며, 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병(角甁)의 형식이 나타난다.
무늬에 있어서도 표면에 공간을 많이 남기던 초기에 비하여 굵은 필선(筆線)으로 표면 전체를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화재(畵材)도 추초(秋草)무늬와 같은 15, 16세기의 가냘픈 무늬에서 용(龍). 소상팔경(蕭湘八景). 십장생(十長生)등을 그렸다.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백자의 최후를 상징하듯이 표면이 거칠고, 유조(釉調는 회색이 많았으며, 목이 높고 몸이 길어 불안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화의 안료는 서양에서 양청(洋靑)이라는 안료가 수입되어 그릇 표면을메우다시피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도 저속하고 안일하여 격을 잃고 있다.
청화백자의 기형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구에서 문인 계급에게 공급되었던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항아리, 접시, 사발, 떡살 등의 생활용품과 병, 주전자, 잔 등의 주기(酒器), 필통, 연적, 필가(筆架) 등의 문방구, 묘지, 인형 등의 명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화백자에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 각색의 그림이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 동물, 산수, 십장생, 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 넣었다.
대체로 초기의 문양이 간결하고 청초한 데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둔하고 번잡하였다.

3. 철회백자(鐵繪白瓷) : 백토로 그릇을 만들어 낮은 온도에서 초벌구이를 해내고 그릇 표면에 산화철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백색 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으로 백자에 다갈색, 흑갈색 계통의 무늬가 나타난 자기이다. 한국에서 백자에 철분안료로 무늬를 입힌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전기에는 주로 묘지에 쓰였으나 일반화되고 세련미를 띠게 된것은 17세기 이후로 보인다.
철회백자는 대개 광주관요와 지방민요에서 생산된 두 가지로 구분된다.
광주관요의 것은 잘 수비된 백토와 양질의 백자유에 사실적인 무늬가 주로 시문(施文)되어 표도덩굴, 대나무, 운룡(雲龍), 매화 등이 세련된 필치로 나타나고, 지방민요의 것은 바탕흙과 유약이 각기 특색을 지니고, 반추상화된 초(草), 죽(竹), 용(龍) 무늬 등이 자유분방하게 묘사되어있다. 철, 철화(鐵畵), 철사(鐵砂)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붙여진 명칭이고, 원래 한국에서는 석간주라고 하였다. 가마터로는 경기 광주군 일대의 조선 중기 요지 및 북한산록, 용인, 천안, 괴산, 철원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4. 진사백자(辰砂白瓷) : 도자기 바탕에 산화동(酸化銅:辰砂) 채료(彩料)로 그림을 그리거나 칠한 뒤 백자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산화동 채료(진사)가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자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사기그릇을 주점사기(朱點沙器) ,  진홍사기(眞紅沙器)라고도 불렀으며 진사백자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사백자는 고려시대 중엽(12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가장 흔하게 쓰여진 것은 조선 후기인 18~19세기 무렵이다. 진사백자의 가마터로는 광주군 분원리요와 함남의 영흥(永興)일대가 알려져 있다.

         

               백 자 호                                 백자양각용문주전자

                

   백자투각연환문필통                               백자투각용문필통              


   

               청화백자잉어문접시                                   백자진사연화문호

 

               청화백자운룡문호



         철화백자운룡문호


철화자기

 

호암미술관은 1998년 '아미타' 전을 시작으로 일년에 두차례 소장품 테마전을 기획하여 우리전통문화의 다양한 특성을 조명하고 있다. 2005년에는 '연꽃' 전에 이어 11월 1일부터2006년 2월 26일까지 '철화자기-움직이는 색과 힘' 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우리나라 도자사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철화자기(鐵畵磁器)의 미적 특성과 개성, 변화 과정에 집중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마련되었다.

  철화가기는 붓을 사용하여 철(Fe)안료로 그릇의 표면에 갖가지 그림장식을 한 것으로, 고려 초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 말기까지 이어지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철화 장식은 검붉은 안료의 농담(濃淡)으로 수묵화(水墨畵)를 연상시키는 한편, 빠른 붓질과 소탈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문양으로 기운 생동한 멋과 흥취를 자아내고 있다. 또한 호탕한 필치와 강렬한 색의 대비를 바탕으로 한 활력이 넘치는 그림은 오늘날 현대작가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철화자기는 우리 도자사의 한 축을 담담히 담당하며 상감청자(象嵌靑磁)와 분청사기, 청화백자 등 다른 자기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감흥을 주는 도자(陶磁)의 세계를 만들었다.

  분청사기철화어문호 등 총 68점이 출품되어 청자, 분청사기, 백자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철화 장식의 붓맛과 투박하고도 자유분망한 멋을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번 전시는 철화자기 만으로 개최하는 최초의 특별전으로, 우리 도자기 속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고 음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움직이는 색과 힘 : 철화자기 /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에부터 이르러 청자와 백자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갖가지 기법으로 표면을 장식하면서 질(質)과 양(量)에서 풍요로운 자기문화(磁器文化)를 갖게 되었다. 특히 세련되고 우아한 조형미와 아름다운 유색,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장식이 빼어난 상감청자(象嵌靑磁)와 청화백자(靑畵白磁)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철화백자는 오랫동안 우리 자기문화의 한 축에서 독특한 개성과 멋을 가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 졌다.

  <기법> 철화자기는 그릇의 표면 위에 철분이 많이 포함된 철사안료(鐵砂顔料)를 물에 개어 붓으로 그림을 그려 장식한 것이다. 이러한 장식을 철화기법(鐵畵技法)이라고 하는데, 고려 초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 말기까지 사용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철화자기 가운데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거친 흙으로 만든 질이 안 좋은 자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릇의 거친 표면에는 정교함이 요구되는 새기거나 깎는 기법보다는 철화기법이 적합했으며, 빨리 마르는 안료의 특성상 붓의 사용은 매우 재빠르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철화청자(鐵畵靑磁) 

 철화장식은 고려 초기에 제작된 청자와 백자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장고(長鼓)등 일부 특수한 종류에 보이지만, 점차 매병. 잔. 주전자. 유병(油甁) 등으로 확대되어 사용되었다.
문양의 소재로 당초(唐草). 모란. 국화. 등이 즐겨 사용되었으며, 간혹 새나 나비 등도 드물게 보인다. 특히 동일한 소재를 장식한 경우에도 시기적인 차이나 붓질의 속도에 따라 그 맛이 다양하게 변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힘차면서도 활달한 필치로 묘사된 것과 짧고 굵은 붓질로 단순하면서도 자유롭게 그린 장식도 있고, 동식물의 소재가 어우러져 자연의 풍광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예도 아주 드물게 남아 있다. 이런 철화청자는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산이면(山二面) 일대의 가마터에서 가장 활발하게 생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자철화모란당초문호(靑磁鐵畵牡丹唐草文壺)
고려 11~12세기 

검은색을 띠는 철사안료(鐵砂顔料)를 사용하여 뚜껑과 호의
전면에 화려한 모란덩굴을 가득 그려 넣은 작품으로, 문양의
선이 매우 율동적이며 생동감 넘친다.



 철화분청사기(鐵畵粉靑沙器)

조선초기에는 물고기. 모란. 당초(唐草). 연꽃 등 갖가지의 소재가 그려진 철화분청사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릇의 표면에 붓(귀얄)으로 백토(白土)를 칠한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청자의 철화장식과는 전혀 다른 맛을 보여 준다. 특히 백토의 흰 바탕 면과 검붉은 철안료의 색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강렬하면서도 호쾌한 붓 맛이 흥겨운 작품들이 많다. 이들은 문양의 대담한 생략과 변형을 통해 다양하고 재미있게 재구성하여 동화(童畵) 같이 그리거나 때로는 현대 작가의 추상화처럼 그려졌다. 이러한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표현된 환상적인 그림들은 우리를 즐겁게 하며, 철화자기의 진정한 매력을 한껏 느끼게 한다. 철화분청사기는 계룡산 부근의 학봉리(鶴奉里) 가마터에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최근에 고흥(高興) 운대리(雲垈里) 등 전라남도의 가마터에서도 소량 생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분청사기철화 모란문 장군(粉靑沙器鐵畵牡丹文獐本) 15-16世紀

당당한 형태와 힘이 넘치는 현란한 그림장식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장군이다.
전면에 귀얄로 백토를 두껍게 칠하고 검은 색의 철안료(鐵顔料)로 그림을 그렸는데,
모란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꽃과 잎의 표현에는 무척 마음을 쓴 듯하지만 잎의
가장자리가 구획된 공간을 벗어 날 정도로 과감하게 철화분청 특유의 자유롭고 호방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었다.



 분청사기철화 모란어문 장군 (粉靑沙器鐵畵牡丹魚文獐本) 15-16世紀
 
예리한 비늘을 모두 펴고 헤엄치는 물고기의 등 위에 활짝 핀 모란 꽃 두 송이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을 바라보기라도 하듯 물고기의 눈이 꽃을 향해 있다.
언뜻 보아 물고기의 등에서 꽃이 자란 듯도 하고, 혹은 날개가 달린 듯도 한 데,
이것은 꽃이 핀 물속의 풍경을 원근감(遠近感) 없이 앞쪽의 물고기와 뒤쪽의
꽃을 동시에 표현하며 생긴 결과이지만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장식임에 틀림없다.



  분청사기철화 초화문 호 (粉靑沙器鐵畵草花文壺) 15-16世紀

철화장식은 거친 듯 투박한 표면 위에 자유롭게 그려진 시원스런 그림과 분장(粉粧)
한 백토(白土)와 안료의 검은 색이 빚어내는 강렬한 대비가 특징이다.
철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작품 중에서도 형태와 소재·구성이 독특한 작품으로,
투박하고 묵직한 형태의 호에 귀얄로 칠해진 백토가 바탕이 되고 그 위에 풀꽃이
굵직하고 시원스럽게 그려져 있다.



 철화백자(鐵畵百磁)

철화백자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 졌다. 특히, 조선 중기인 1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 시기는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 값비싼 청화안료(靑畵顔料)를 대신하여 철사안료(鐵砂顔料)를 사용하게 되면서 다량 생산되었다. 현존 한는 작품들은 국가에서 사용되던 백자를 전담하던 관요(官窯)인 광주(廣州)지역의 가마터와 그 밖의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생산지의 차이는 그림의 구성과 표현방법에서도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관요에서 제작된 철화백자는 매화. 대나무. 국화. 용 등을 세련된 필치와 사실적인 화풍(畵風)으로 그려 마치 잘 그린 수묵화(水墨畵)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지방에서 제작된 것은 소박하면서 여유로운 우리들의 정서를 반영이라도 한 듯, 우스꽝스럽게 생긴 용. 호랑이 그림과 심하게 변형되어 뭔지 모를 식물들의 그림이 많다.

 철화자기는 오랜 기간동안 검붉은 철사안료를 사용하여 그릇의 종류나 장식소재, 그리고 시대의 분위기를 함축시키면서 참신하고 개성이 넘치는 멋을 보여 준다. 강렬한 붓질에 활력이 넘치고 소탈하거나 자유분방하고 때로는 익살스럽기도 하고 현대의 추상화(抽象畵) 같기도 한 그림들은 어찌 보면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세련되고 화려한 장식보다 신선하게 다가오는 친근한 존재일 수 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백자철화매죽문호(白磁鐵畵梅竹文壺) 조선, 17세기 고36.9, 구경14.0, 저경14.1cm

조선 중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조선시대 선비의 곧은 기개를 보듯 기운차게 그려진 그림 맛이 일품인 항아리이다. 대나무와 매화를 따로 나누어 그렸는데, 수묵화(水墨畵)를 그리듯 대담한 필치로 능숙하게 그렸으며, 철화 발색이 자연스러운 농담에서 속도감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마치 한 폭의 문인화(文人畵)를 보는 듯 하다.


   자료 출처 :  호암미술관

 

동화

 


                   동화백자양각쌍학문연적 장수의 의미를 지닌 쌍학 주이의
                   여백을 모두 황화로 채색하였다. 궆은 19세기의 목가구등에
                   나타나는 모양과 유사하다. 19세기, 높이5.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화란 진사(辰砂)로도 불리느데, 산화동이나 탄산동이 중원료인 안료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린 장식 기법을 일컫는다. 고려 청자에도 동화를 사용했으나 백상감토 위에 일부 채색하거나 간략한 선이나 점으로 시문하는 경우가 많았고, 문양 전체가 동화로 나타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조선 백자와 달리 고려 청자에는 초벌구이 전에도 채색을 하므로, 안료의 내화도나 점성이 조선 백자 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고려 청자가 조선 백자보다 50도 정도 낮은 온도에서 번조 되므로, 조선 백자의 동화 안료는 훨씬 높은 내화도를 지녀야 한다.
  현존하는 유물로 볼 때 조선 전기에는 동화백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난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 경덕진을 중심으로 원대 후반에서 명. 청대가지 동화 안료를 사용한 유리홍(釉裏紅) 자기가 크게 유행했던 것에 비해 조선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는 철화청자에 이어 철화백자가 꾸준히 제작된 반면 동화백자는 왜 제작되지 않았을까? 이를 해결해 줄 문헌 기록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단지 몇 가지 추론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기술적인 문제인데, 청자보다 고온에서 번조하는 백자는 산화동을 환원염으로 번조하면 제대로 색을 내기가 쉽지 않다. 화학적으로 볼 때 동은 고온에서 상태가 불안정하고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특히 초벌구이를 한 백자 위에 안료를 사용하여 채색하는 기법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조선 전기에는 청화나 철화보다도 휘발성이 강한 동화의 색상 표현이 가장 어려웠을 것이다. 붉은색을 내고자 했으나 검붉은색이 되는 경우고 있고, 불 조절에 실패해서 산화가 되면 초록색을 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 청자의 동화 안료는 백상감토와 같은 점토에 산화동과 주석을 혼합하면 어렵지 않게 제작할 수 있지만, 백자에 사용되는 경우는 다르다. 점토 한가로는 어렵고 상당한 내화도를 갖춘 백토에다 카올린, 장석, 규석, 주석 등을 혼합해야만 비로소 번조 후에 제대로 색상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작 기술상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무려 수백 년이 걸렸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안료 제작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동화백자에 대한 수요가 빈번했다면 충분히 제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화백자나 철화백자와는 달리 왕실 행사용 자기로서 동화백자를 사용한 예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정확한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만 선명치 못한 색상과 동화의 붉은색에 대한 반감 등을 이유로 분원에서는 제작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다. [태조실록]을 보아도 진상 기완(器玩)에 붉은색의 사용을 금하는 내용이 있어 이러한 풍조가 자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안평대군이나 영산군이 강화도에서 선홍(鮮紅), 주홍(朱紅)사기 등을 굽게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조선 초기에 왕실 행사용으로 동화백자를 전혀 제작하지 않았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단지 남아 있는 유물 중에서는 1684년(숙종 10)에 제작된 숭정갑자(崇禎甲子)명 동화백자묘지석이 최초의 작품이어서, 17세기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또한 17세기에 접어들어 붉은색 칠기가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전에 비해 붉은색에 대한 반감이 수그러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새대적 분위기으 변화로 동화백자의 제작이 점차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실제 동을 안료로 사용할 때는 보조제와의 혼합과 유약의 두께 조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조제로는 주석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그밖에 장석과 규석. 백토 등을 정제, 가공해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약의 두께가 너무 얇으면 안료가 유약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으며, 반대로 너무 두꺼우면 색상이 굴절되어 나타날 수 있다.
  장식 기법으로는 문양을 시문하는 방식과 함께 기명 전체를 채색하는 방식도 사용되었다. 다만 철화와 달리 동화는 유약으로 사용된 경우가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동의 휘발성 때문에 유약 제조가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동화는 한 기명에 청화나 철화 등과 함께 시문되기도 하였다.

      
 방병선 글 [백자]에서, 돌베개



 
백자 봉황 무늬 항아리 白磁靑畵銅彩鳳凰文壺
국립중앙박물관소장(박병래 기증품)
19세기.

봉황(鳳凰)은 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로 수컷을 봉, 암컷을 황이라 한다. 세상의 모든 새 중에서 으뜸인 봉황은 태평성대와 왕실을 상징하는 고귀한 동물이며, 금슬좋은 부부, 천생연분을 의미하기도 한다. 도자기에 그려진 봉황무늬는 닭의 머리와 원앙의 날개, 길고 탐스러운 꼬리를 지니며, 반드시 암수 한쌍으로 등장한다. 푸른 청화안료로 기본 형태를 그리고 붉은 동화안료로 날개와 수염, 벼슬 등에 부분적으로 색을 입혀 대범하고 시원한 느낌을 강조하였다. 


 
백자 두꺼비 모양 연적 白磁靑畵銅彩蟾形硯滴
국립중앙박물관소장(박병래 기증품)
19세기.

두꺼비는 한민족의 신화와 속담에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동물로, 집을 지키는 수호신(守護神)과 부귀영화를 가져오는 재복신(財福神)을 상징하는 지혜로운 영물이다. 개구리같이 생겼지만 몸집이 훨씬 크고 살가죽이 두꺼우며 온 몸에 우둘두둘한 것이 솟아있다. 이 연적에는 그러한 모든 특징들이 간략하면서도 빠짐없이 표현되어 있다. 피부의 거친 돌기는 작은 꽃모양 돌기점(突起點)으로 귀엽게 양각되었으며, 동체 전반에 자주빛 동화안료(銅畵顔料)를 입혀 살아있는 듯 활기차다. 장난스러워 보이는 미소 띤 얼굴 표정도 인상적이다. 조선후기 선비의 사랑방을 장식했던 다양한 연적 중 하나이다. 

 

 

철화

 


                        백자 매화 대나무 무늬 항아리(白磁鐵畵 梅竹文 壺)
                        16세기. 국보 166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철화는 석간주(石間朱)라는 산화철이 주성분인 안료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린 장식 기법을 말한다. 철화 안료를 사용한 장식 기법은 고려시대 철화청자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고려 초기부터 꾸준히 등장하는 것을 보면 철화 기법의 역사는 실로 천여 년에 가까운 유구한 것이다. 철화백자는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사용되었지만 특히 17세기인 인조에서 숙종대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관요는 물론 지방 가마 가운데 철화 도편이 발견되는 곳은 매우 많다. 이는 원료 자체를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다루기도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백자에 철화 안료를 사용할 때는 철화청자보다 번조 온도가 높으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카올린과  규석 등을 분쇄, 혼합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초기의 조선 백자 중에는 아직 안료의 정제가 원활하지 않아 색상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은 철화백자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철화는 번조 상태에 따라 까맣게 되기도 하고 노랗게 될 수도 있다. 이는 안료와 유약의 두께, 환원염이냐 산화염이냐 하는 번조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데 휘발성이 강한 철화를 채색할 때에는 많은 실험이 필요했을 것이다. 안료를 너무 두껍게 채색하여 그 부분이 까많게 탄 경우도 있는데, 이는 유약의 두께가 얇아 안료가 유약 밖으로 흘러나와 불에 직접 닿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방병선 글 [백자]에서, 돌베개


 
백자 끈 무늬 병 白磁 鐵? 垂紐文 甁
16세기. 보물 1060호.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 전기 백자 병 특유의 풍만한 양감과 곡선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철화 안료로 잘록한 목에 한 가닥 끈을 휘감아 자연스럽게 밑으로 늘어뜨려 끝에서 둥글게 말린 모습을 표현하였다. 극히 절제된 필치로 단순하면서도 여백을 살린 묘사와 부드러우면서도 거침없이 힘차게 그어 내린 선은 장인의 숙련된 경지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청자 버드나무 무늬 병 靑磁 鐵畵 柳文 甁
12세기. 국보 113호.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대담한 의장과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긴다. 다른 철화청자에 비하면 무늬가 비교적 간결하지만 버드나무의 표현이 독특한 세련미를 갖췄다. 반대편에도 버드나무를 그렸는데 뿌리와 등걸의 표현이 대담하면서도 경쾌하다. 이러한 통형 병은 청자 기형 가운데 이례적인 형태이다. 일본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병의 경우, 술에 관한 시가 상감되어 있어 이와 같은 병들이 술병의 용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청화

              백자청화매죽문호(유개)(白磁靑華梅竹文壺(有蓋)), 호림박물관소장

              國寶 222號, 朝鮮 15世紀, 總高 29.2cm 高 25.7cm 口徑 10.8cm 底徑 14.0cm
              蓋高 5.3cm 蓋徑 10.8cm



  청화란 산화코발트가 주원료인 안료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린 장식기법을 말하는데, 백자 점토와 초벌구이 파편, 규석 등을 보조제로 혼합, 사용한다. 청화는 조선 전기 부터 꾸준히 사용되었지만 원료인 코발트, 즉 회회청(回回靑) 자체를 전적으로 중국에서 수입하였기 때문에 수입 가격과 청화의 경제 상태에 따라 사용량과 색상이 좌우되었다.
  청화백자가 원대 경덕진에서 처음 제작될 당시에는 이슬람에서 수입한 안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은 중국이 수입한 안료를 재수입하였다. 이후 명대까지는 이슬람산 소마리청(蘇麻離靑)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점차 중국이 자체 개발한 운남(雲南) 청료(靑料: 청화 안료)와 경덕진 부근의 절강(浙江) 청료 같은 무명이(無名異) 회회청으로 바뀌었다. 절강 청료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점차 가격이 하락되었는데 이는 조선의 청료 수입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청화 안료가 어느 정도의 가격으로 조선에 수입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 후기 북학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한돈에 한 냥 정도로 금처럼 비싸던 것이 당시에는 가격이 하락하여 하품은 50푼 정도라고 적혀 있다. 어쨌든 안료 가격의 하락은 조선 후기 청화의 장식이 난만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청화 안료는 광물 상태의 안료를 한 번 구운 후 유발에 넣어 유봉으로 잘게 부수고 화수(畵水)라 불리는 보조제와 적당히 섞어 만들었는데, 붓으로 자기 위에 시문할 때 붓이 잘 나가게 하기 위해 오동기름을 섞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청료뿐 아니라 다른 안료도 동일했을 것이며 현재도 마찬가지다. 또한 일단 코발트 원광(原鑛)을 고온에서 한번 번조하면 원광 안의 산화망간과 산화철의 함량비가 떨어져 순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슬람산 청료와 중국산 청료의 차이는 흔히 코발트의 철과 망간의 상대 비율로 구분하는데, 이슬람산 청료에는 철 함량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좀더 밝은 느낌이 든다. 중국의 경우 이슬람산 청료를 사용하는 원대와 명대 전반에는 철의 비율이 높다가, 절강 청료를 사용하는 청대에 들어서면 망간의 구성 비율이 높아진다.
  청화의 색상은 온도에 민감해서 밝은 청색에서 검정색까지 다양하다. 따라서 적당한 발색 온도를 찾기 위해서는 오랜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다. 온도뿐 아니라 유약의 두께와 광택, 투명도 등도 발색에 영향을 미치므로,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방병선 글 [백자]에서, 돌베개]


   백자 매화 대나무 새 무늬 항아리(白磁 靑畵 梅鳥竹文 壺)
   15-16세기. 국보 170호.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이 항아리에는 도화서 화원의 솜씨가 돋보이는 한국적인 무늬들이 담겨 있다. 연꽃 봉우리 모양 꼭지가 달린 뚜껑에도 대나무와 매화가 있다. 전면에 걸쳐 매화, 새, 들국화, 대나무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한국적인 정서가 돋보인다. 중심 무늬는 청화 안료의 발색이 짙고 강한 반면, 뚜껑 주위에 베풀어진 매화 가지와 대나무, 그리고 몸체 아래에 장식된 소담스러운 국화, 구연부의 넝쿨 같은 주변 무늬는 의도적으로 색을 옅게 하여 그림의 입체감과 사실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다.


 
백자 난초무늬 항아리 白磁 靑? 蘭草文 壺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넓은 공간을 남기면서 청초한 난초무늬를 간결하게 그리고 있다. 난초무늬는 대체로 실제 주변에서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 표현이 더하거나 모자람 없이 매우 담담하고 순박하여서 순백색의 백자 항아리와 어울림이 자연스럽다. 대체로 18세기 전반경에는 이와같이 여백을 살리고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무늬들을 나타낸 백자들이 많았다. 
 

백자반합


    寶物 806號, 朝鮮 15世紀, 總高 22.7cm 高 15.5cm 口徑 15.5cm 底徑 9.4cm 蓋高 9.4cm
    蓋徑 17.5cm. 호림박물관 소장.

  조선전기에는 많은 백자 명품들이 제작되었지만, 이 반합만큼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것은 드물 것이다. 그만큼 이 반합은 형태나 유색이나 태토(胎土)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이 반합을 가까이서 보고 있노라면, 조선을 건국하고 새로운 성리학적 이념을 신봉한 15세기 양반사대부들의 정신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뚜껑은 반구형(半球形)에 가까우며, 그 중앙부에 보주형(寶珠形)의 꼭지가 붙어 있다. 동체는 밑부분이 풍만하여 안정감이 있으며, 단정한 다리굽형태의 굽은 약간 밖으로 벌어져 안정감을 더하였다. 맑고 투명한 담청색기운이 감도는 백자유약이 고르게 입혀졌으며 광택이 좋다. 뚜껑은 안쪽면에 13개의 태토빚음눈을 받쳤으며 동체의 경우는 굽다리바닥에 고운 모래를 받치고 구웠다. 조선시대의 백자를 통틀어 최고 걸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그릇은 사람이다"

  우리의 자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라의 만사가 모두 이를 닯는다"는 박제가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올바른 그릇을 만들어야 하는 장인 정신이 그 첫번째요, 그릇 하나에도 풍속을 생각했던 조선시대 수요츨들이 두번째다. 결국 그릇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 그 자체라는 이야기다.
  장인 정신과 그릇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수요층. 이 두 가지가 올바로 결합할 때 과거의 영화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올곧게 계승 발전시키는 자랑스런 조선의 후예가 되는 것이다.[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를 통해 나라 안 도자기의 실상을 파악하고 어기(御器)로 백자를 채택했던 15세기 세종대,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며 조선 최고의 자기를 생산하도록 후원했던 숙종에서 정종 연간까지의 18세기 진경시대는 바로 우리 백자의 황금기였다.
  진경시대 이후 300년, 이제 또 다른 황금기를 위해 제작자와 후원자 모두 "그릇은 사람이다" 라는 일념으로  다시 한번 매진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