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捺文 土器

초기 백제시대 마을 유적이 최대 규모로 출토됐다

吾心竹--오심죽-- 2010. 9. 3. 10:42

남한 최대 ‘고구려 고분군’ 발굴

 연천 | 이고은 기자 freetr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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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연천 임진강 유역서 초기백제 마을 유적도… 댐건설 땐 수몰 위기

민통선 이북 임진강 유역에서 고구려시대 고분군과 원삼국(초기 백제)시대 마을 유적이 최대 규모로 출토됐다. 하지만 이 지역은 경기 북부지역의 상습적인 홍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군남댐 건설지로, 댐이 건설되면 만수위시 유구가 수몰될 수 있어 향후 보존 여부가 주목된다.

민통선 안 임진강 군남홍수조절지 건설사업 예정지에서 2000년 전의 초기백제 마을 유적과 고구려 석실분이 발굴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고려문화재연구원 관계자가 27호 주거지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고려문화재연구원(원장 김병모)은 25일 경기 연천군 강내리 유적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고분 9기와 원삼국시대 주거지 74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4기, 경작 유구와 수혈 유구 131기 등 총 218기에 달하는 유구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특히 이번에 출토된 고구려 고분군은 3대에 걸친 가족묘로 추정되는 대규모로, 임진강 유역이 고구려 장수왕(413~491년)의 남진정책에 따라 일정 기간 고구려의 실효적 지배에 놓여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남한 지역에서 확인된 고구려 고분군으로는 최대 규모다.

고분은 횡혈식 석실묘로 한 고분에 두 사람이 매장돼 있었다. 이 고분에서는 금제 구슬과 유리구슬, 은제 팔찌 등 부장품과 관못, 관고리 등이 출토됐다. 금제품과 유리구슬이 남한지역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예는 드물다.

김병모 원장은 “고분 9기는 모두 부부묘로 보이며 3대에 걸친 가족묘로 추정된다”면서 “일시적인 통치계급이 아니라 항구적인 지배세력 집단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삼국 간의 싸움이 치열하던 때에 부인까지 데리고 와서 팔찌 등으로 치장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 사회의 10관등급 중에서 4~8관등에 해당하는 고위 인사로 보인다”며 “칼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군인이 아닌 민간 통치자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통선 이북인 연천 왕징면 강내리에서 확인된 고구려 석실분. | 고려문화재연구원 제공

원삼국시대 마을 유적에서는 여러 형태의 주거지가 발견됐다. 총 74기 중 철(凸)자·여(呂)자형이 62기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장방형과 방형 주거지도 발견됐다. 주거지 내부 시설로는 ‘ㄱ’자형 구들, ‘ㅡ’자형 부뚜막, 화덕자리, 기둥구멍 등이 확인됐다.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 철도자(칼), 철부(도끼) 등이 있다. 연구원 측은 “마을 규모와 입지로 볼 때 이 일대는 원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세력의 거점마을로 추정되며 경기 북부지역 초기 역사 연구에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유적 수몰과 관련, 문화재청 엄승용 문화재정책국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적들을 보존하도록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보존 여부는 다음달 초 설명회와 문화재위원회의 등에 따라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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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임진강변서 2천년전 마을유적 발굴

 

군남홍수조절지 예정지, 고구려 석실분 9기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민통선 안 임진강 군남홍수조절지 건설사업 예정지에서 2천년 전 대규모 마을유적과 고구려 석실분이 무리를 지어 발굴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고려문화재연구원(원장 김병모)은 한국수자원공사 의뢰로 지난해 3월 이후 현재까지 군남홍수조절지 수몰 예정지에 포함된 경기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일원 임진강변 평탄 충적지대 일대를 발굴조사한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4기와 초기 삼국시대 주거지 74기, 고구려 석실분 9기 및 경작 유구와 수혈 유구(성격 미상의 구덩이) 131기 등 총 218기에 달하는 각종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5일 말했다.


  

呂자형, 凸자형 주거지 밀집도


이 중 한강과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서력기원 전후 무렵 한반도 중부지방 일대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평면 呂ㆍ凸자형 주거지가 무려 65곳이 확인됨으로써 당시 이곳에는 대규모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아가 이들 呂ㆍ凸자형 주거지 대부분에서는 여타 지역 같은 유형의 주거지에서와 마찬가지로 한쪽 벽면을 따라 'ㄱ'자형 구들 시설이 드러나고, 벽체 및 지붕시설까지 불타 내려앉은 채로 고스란히 확인됐다.


  

34호주거지


27호라고 명명한 주거지는 길이 20.6m, 너비 9.7m, 깊이 0.99m에 이르러 지금까지 발견된 呂자형 주거지로는 초대형급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유물로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양대 토기류인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와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를 비롯해 철도자(칼), 철부(도끼) 등이 있다.


   조사단은 "마을 규모와 입지로 볼 때 이 일대는 초기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세력의 거점마을로 추정되어 경기북부지역 초기역사 연구에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고구려 전통이 강한 삼국시대 석실분(石室墳)은 구릉지대 3개 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3기씩 군집을 이루는 형태로 발견됐다.


   이들 석실분은 바깥에서 무덤 내부로 통하는 길을 석실 전면 오른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마련한 이른바 우편재 횡혈식(右偏在橫穴式)이며, 석실은 대부분 장방형에 규모는 대략 길이, 너비, 높이 각각 2.5m×1.4cm×1.98cm 안팎으로 나타났다.


  

8호 석실분


묘실 벽면은 깬돌을 이용해 비교적 정연하게 쌓아 올렸으며, 무덤길로 통하는 길인 연도는 안쪽 묘실에서부터 외부를 향해 약간의 오름 경사식으로 만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고분에서는 관정(널에 쓴 쇠못)과 관고리(목관에 단 고리)가 수습됐다.


   이 중 8호 석실분에서는 남쪽 벽에 가까운 석실 바닥에서 겉면이 반질반질하고 검은색을 띠는 항아리형 토기인 흑색마연호(黑色磨硏壺) 1점과 금제구슬, 유리제구슬, 은제팔찌 1쌍이 출토됐고, 2호 석실분에서는 금제구슬, 유리제구슬, 은제팔찌, 철제품 등이 수습됐다.


  

8호 석실분 유물 출토


조사단은 출토유물 중 관고리가 백제 문화권에서는 보이지 않는 반면, 고구려 지역에서만 보이는 형태로, 원형인 고리에 화판형(꽃술 형태) 좌판으로 구성된 점이라든가, 고분이 강변 구릉지를 따라 몇 기씩 무리를 지은 점 등으로 볼 때, "고구려 석실분이 확실하며, 만든 시기는 빠르면 5세기 후반 무렵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들 석실분은 고분 하나에 두 사람씩 매장된 것으로 보아 부부를 함께 묻은 묘로 추정되며, 나란히 조성된 각 3기의 고분은 가족 또는 가까운 혈연관계의 무덤군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조사단은 말했다.


   아울러 조사단은 "이번 발굴성과는 고구려 장수왕(재위 413~491)의 지속적인 남진정책에 따라 임진강 유역이 일정기간 동안 고구려의 실효적인 지배에 있었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라면서 "만약 임진강유역이 고구려의 남진을 위한 군사기지 기능만을 했다면 귀족계층의 고분이 9기나 축조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남한 지역에서 고구려, 혹은 고구려계 석실분은 용인 보정리와 판교 신도시에서 최근 확인된 적이 있다.


  

8호 석실분 유물출토 정황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0/03/25 09:21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