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捺文 土器

가야토기의 변천사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5:24

가야토기 국보전


 차륜식토기(車輪飾土器)

보물 제637호 


차륜식토기(車輪飾土器)

소 유 자 국립진주박물관


수레바퀴가 붙은 굽다리 토기
 높이 18.5㎝, 길이 24㎝의 가야 토기로 출토지는 알 수 없다.



토기의 받침은 이 시대 굽다리 접시(고배(高杯))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밑이 벌어진 나팔형인데 긴 직사각형의 굽구멍(투창(透窓))이 4개 뚫려 있다.
받침 위에 U자형의 뿔잔(각배角)을 얹어 놓고, 그 등에는 양쪽으로 고사리 모양 장식을 했으나 한쪽은 없어졌다. 고사리 모양의 장식은 가는 흙 줄을 양쪽으로 말아서 만든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U자형의 뿔잔은 술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보인다. 뿔잔의 좌우 측면에 수레바퀴를 부착시켰는데, 둥근 바퀴는 축을 중심으로 마름모꼴 모양의 창을 6개 뚫어 바퀴살을 표현하고 있다.

회흑색의 바탕 흙은 쇠가 녹슨 듯한 색깔을 띠며, 간결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가야 토기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두식각배(馬頭飾角杯)

보물 제598호 

마두식각배(馬頭飾角杯)

소 재 지  동아대학교박물관


이 뿔잔은 큰 것이 높이 14.4㎝, 길이 17㎝,
작은 것은 높이 12.1㎝, 길이 17㎝로 크기는 서로 다르나, 전체적인 형태와 제작 수법은 거의 동일하다.


부산광역시 동래구(東萊區) 복천동(福泉洞) 제 7호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특이한 뿔잔(각배角杯)이다. 신라·가야(伽倻)지역의 고분에서는 여러 형태의 각배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 각배는 뛰어난 걸작이다.
뿔잔은 본래 쇠뿔과 같은 동물의 뿔(각)로 만든 것을 말하지만, 넓게는 흙이나 금속 등으로 뿔잔의 형태를 본떠 만든 것도 포함시켜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을 이루는 입구에서 각배의 일반 형태를 따라 뿔 모양으로 연장되다가 끝에 말머리를 장식하였다. 말머리는 위를 향하여 들려 말가슴 부근에서 U자형으로 꺾여 가슴이 바닥이 되며, 이와 대칭되는 후면에 두 개의 발을 달아서 넘어지지 않게 놓이도록 고안되었다.

귀·눈·코, 그리고 긴 입 등 말의 특징을 잘 파악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구연부(口緣部)만 물레로 형성하고 그 밑은 말머리에 이르기까지 대칼 같은 도구로 깎아 내면서 만든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각배가 북방문화(北方文化)의 소산이라는 점으로 볼 때, 여기에 말머리 형태를 장식하였음은 여러가지 문화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토이(土履)

보물 제556호

토이(土履) : 신발모양 토기

소 유 자 삼성문화재단
관 리 자 리움미술관

신발 모양을 한 길이 23.5㎝, 너비 6.8∼7.2㎝의 토기이다



삼국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금속제의 장식용 신발과 같은 성격을 띤 껴묻거리(부장품) 토기이지만 형태는 전혀 다르다.

앞쪽은 코가 우뚝 들려있고, 양 옆과 뒤는 수직으로 서 있다. 바닥은 뒷굽 이 없이 편평하며, 뒤쪽 위에는 턱을 만들어 벗겨지지 않도록 하였다.
코 뒤에 작은 구멍이 하나씩 있고 좌우에도 한 짝은 4개, 다른 짝은 5개의 구멍이 나 있어서 끈을 매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좌우 구멍 위에서 코에 걸쳐 점선으로 한 쪽에는 사선, 다른 한 쪽에는 물고기 뼈와 비슷한 무늬를 얕게 새겼다.

이 신발은 무녕왕릉에서 나온 금속제 신발과 달리, 당시에 실제로 사용했던 신발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흙으로 만든 신으로는 상당히 우수한 작품이어서, 고대 껴묻거리 양상을 밝혀준 점에서 중요한 유물이다.

평저주형토기(平底舟形土器)

보물 제555호 

평저주형토기(平底舟形土器)

소 유 자 삼성문화재단
관 리 자 리움미술관


배 모양을 본 뜬 토기로 높이 9.1㎝, 길이 27.9㎝의 크기이다



전체의 모양은 거의 좌우 대칭을 이루었고 양쪽 배 끝 부분은 길게 연장되다가 끝이 높게 들려서 반원형을 이루었다. 이 반원형 부분에는 구멍이 2개씩 있으며, 배 끝 부분에는 거의 다 부러졌지만 노를 걸었던 꼭지가 여러 개 달려있다.

배 안에는 좌우로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3곳에 칸막이가 있어서 사공이 이곳에 앉아 노를 젓게 되어 있다. 배 좌우 바깥 측면에는 지그재그형으로 점선이 반복되어 전체에 새겨져 있다. 어두운 녹갈색의 자연 유약이 선체의 양면에 일부 씌워져 있다.


이 배 모양의 토기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운반하는 신앙의 표현으로, 무덤 속에 묻었던 의식용 그릇의 하나이다.
5∼6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출토지를 알 수 없으나, 고대 선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국보 275호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소장처:국립경주박물관
가야시대 토기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걸작이다.
완전 무장을 한 체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토기로 높이 23.2㎝, 폭 14.7㎝, 밑 지름 9.2㎝의 인물형 토기이다.

 


나팔모양의 받침 위에 직사각형의 편평한 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말을 탄 무사를 올려 놓았다. 받침은 가야의 굽다리 접시(고배)와 동일한 형태로, 두 줄로 구멍이 뚫려 있다. 받침의 4모서리에는 손으로 빚어 깎아낸 말 다리가 있다.

말 몸에는 갑옷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말갈기는 직선으로 다듬어져 있다. 말 등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무사를 앉혀 놓았다. 무사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데 표면에 무늬가 채워져 있다. 특히 백제, 신라, 가야 삼국의 문화유산중 방패모양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 이 토기가 유일하다.

이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가 지니는 가치는 여러가지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으나 마구(馬具)와 무구(武具)를 연구함에 있어서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라는데 더 큰 의의(意義)를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출토지(出土地)가 거의 확실한 진품(眞品)일 뿐더러,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가야, 신라, 백제 3국의 문화유산중 완전무장한 무사의 모습은 오직 이 토기로만 확인된다.

 

 

 

 

 

 

가야토기의 변천사

 가야토기는 그 변천과정에 따라 전기(前期), 중기(中期), 후기(後期)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 고대국가들은 기원을 전후하여 형성되었는데, 형성초기에는 아직 고유의 문화적 색체를 띄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토기를 굽는 가마가 개발되고, 토기굽는 직업이 전문화 되면서 점차 고유의 문화적 색체를 띄게 되는데, 이것은 도질 토기의 전개과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도질토기란 한마디로 도자기의 질감이 나는 토기로, 가마에서 1200도 이상의 고열로 구워낸 토기를 뜻한다.
전기는 가야 고유의 특징이 잘 드러나던 시대로 토기 중심단계,
중기는 가야식토기와 신라토기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단계,
후기는 신라의 병합으로 인한 가야 토기 소멸로 귀결되는 마지막 단계이다.

1) 도질토기 전기

 도질토기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으며 5세기초까지 약 100년에 걸쳐 그 절정을 이룬다.

 이 단계는 앞 시기의 토기인 후기 와질(瓦質)토기의 가장 표식적인 토기인 노형기대(화로형 그릇받임爐形器臺)가 와질(瓦質),도질(陶質)의 상태로 존재하며, 최초의 도질토기로 나타났던 양이부원저단경호(두귀달린 둥근바닥 짧은목 항아리兩耳附圓底短頸壺)도 이 단계의 가장 대표적인 토기의 하나이다.

 이 단계의 후반대부터는 유개고배(뚜껑있는 굽다리접시有蓋高杯), 소형의 원저광구호(둥근바닥 넓은입항아리圓底廣口壺)와 기대(그릇받침대器臺), 발형기대(鉢形器臺),통형기대(원통형 그릇 받침筒形器臺), 각종의 단경호(짧은목항아리短頸壺),장경호(긴목항아리長頸壺), 파수형토기(손잡이 달린 토기 - 컵모양토기) 등 도질토기의 기종(器種)이 매우 다양해져 가야식토기가 완성된다.

 또한 4세기를 전후한 가야토기의 발전은 신라를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지역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토기역시 가야토기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유관으로 구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며, 출토지역으로 구분할 수 밖에 없다.


손잡이 잔은 한쪽에 있는 경우와 양쪽에 트로피처럼 붙어 있는 것이 있다.


뚜껑있는 굽다리 토기와 발형기대



2) 도질토기 중기
 도질 토기 중기는 5세기 전엽부터 가야가 신라에 완전히 흡수 병합되는 6세기 중엽까지의 시기이다.
 5세기 전엽에 처음으로 상하 엇갈린 투창(透窓)이 뚫린 2단대각(二段臺脚)의 고배, 원통형(圓筒形)의 목을 가진 긴 목 항아리(長頸壺)를 대표로 삼는 전형적인 신라식토기가 가야토기에서 갈려 나오게 된다.즉 신라의 문화가 급진전 함에 따라, 가야 문화의 영향력은 상당히 축소되어 갔다 

  가야토기에서는  장경호(長頸壺) 발형기대통형기대가 이 시기의 기대를 대표합니다. 신라식토기에서는, 5세기 중엽이 되면 뚜껑이 있는 유개고배(有蓋高杯)가 등장하고 대각이 붙는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 초기 가야 토기들의 완성형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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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질토기 후기

가야제국이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중엽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7세기 중엽까지의 시기이다. 가야의 멸망과 동시에 가야식토기는급격하게 사라져 갔으며, 신라식토기의 계보를 잇는 토기가 확산된다. 

중기 도질토기(中期陶質土器)의 대표적인 토기들이었던 발형기대(鉢形器臺)와 통형기대(筒形器臺)가 사라지는 것도 이 시기 토기 구성상의 뚜렷한 특징이다.
이 단계의 도질토기를 신라식토기 양식으로 통일되었다는 뜻에서 일반적으로 「통일양식토기」라고 부른다.

 문화적 통일은 물리적 통일보다 상당히 시간이 걸리고, 저항도 심하기 마련인데, 이처럼 빠른 시기에 문화적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오래전부터 우리민족이 문화적 정신적 동질성을 어느정도이루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