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捺文 土器

고구려 토기의 다양함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5:20

고구려 토기의 다양함


 고구려는 백제 신라 가야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를 수 놓은 찬란한 문화를 지녔지만,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는 압록강 유역과 평양일대의 무덤유적군을 제외하면 대단히 드문편이다.

 특히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에서 보았을 때, 우리나라 휴전선 이남에서는 물론 북한지역에서조차 고구려의 토기가 출토된 예는 매우 드문 형편이다.
 이것은 남방의 백제나 신라보다 토기의 구어 제작하는 기술이 뒤지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고 따라서 그 생산과 수요가 많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오랫동안 낙랑이나 요동등의 세력과 접촉하면서, 목기등의 사용이 토기의 사용보다 더 많았거나, 혹은 남방의 문화와는 달리 부장품에서 토기가 그리 널리 쓰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식 목 항아리

 입구가 널게 벌어져 있고, 바닥이 평평하며, 몸체에 간단한 돌림무늬와 물결무늬가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목항아리이다.

고구려 6세기, 평양 만달산 14호,
높이 20.7cm


  이러한 가운데 평안남도 대동군 만달산록(晩達山麓)의 한 파괴고분(破壞古墳)에서 발견된 일군(一群)의 토기는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가장 확실한 유물로 이것의 예를 보면 신라, 백제 토기에 비해서 고구려 토기는 대체로 저화도(低火度)로 구워낸 연질(軟質)의 회흑색(灰黑色) 토기들이며, 회갈색(灰褐色)계의 토기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전혀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에 걸친 5세기 때 한강을 넘어 충청도지역까지 고구려 영토가 남진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고구려의 문화가 정착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어서, 대부분의 유물이 군사관련 유물들이 많으며, 생활과 밀접한 토기유물은 한강유역에서 머문 정도이다.



두 귀 긴항아리, 고구려 5세기,
서울 구의동 높이 52.4cm


 아래 그림은 세발단지로 몽촌토성내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진출한 5세기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이와 비슷한 형태가 평양인근에서도 출토되어, 5세기에는 고구려 문화가 한강유역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몽촌토성 88-6호, 저장공 . 88-방형유구, 높이(오른쪽) 32.1cm


  신라나 백제 토기들이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기형이나 특히 비현실적인 신라 토기의 형태와 기능에 비하면 고구려 토기는 안정성 있는 평저(平底)굽으로 되어 있고, 또 계란형의 몸체에 입이 넓으며 목과 파수(=손잡이把手)가 양면 또는 4면에 달려서 실용적인 기능을 지닌 항아리 종류가 많은 것이 특색이며, 이것은 후한대(後漢代) 동기(銅器) 모습을 닮은 것이다.

  이들 항아리들의 장식의장(裝飾意匠)은 간략한 돌림선무늬(각선대문刻線帶文) 또는 물결무늬(=파상문波狀文)이 약간 있는 경우가 있을 뿐 다른 무늬가 없고, 때로는 표면을 윤나게 한 마연(磨硏)한 것들이 섞여 있다.

  그러나 고구려 토기에서도 매우 특이한 것들이 발견된다.


이 토기의 용도는 요강으로 추측된다.

고구려 5-6세기,
전 부여, 높이 21.0cm



 이 토기는 고구려 토기중 유일한 집모양토기로, 고구려의 가옥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현재 중앙박물관에 소장중이다.


이처럼 고구려 역시 토기를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용도와 형태로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서도 말하였지만 워낙 발굴양이 적고 발굴지역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많은 발굴조사가 필요한 실정이다.
 
 따라서 고구려 문화유적이나 유물에 대해서는, 정치적 문제는 뒤로하고
하루라도 빨리 남북한의 공동학술조사단 구성이 필요한 실정이라고 본다.

 

 

 

고구려는 지리상 북방문화를 수용하면서도 독특한 창조력과 강인한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토기는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고, 손잡이가 네 개 달린 항아리, 배부른 단지, 갚은 바리모양이 대표적인데 대부분 납작밑이다. 서기 3세기 이전, 초기단계에는 모래섞인 바탕흙으로 빚은 어두운 갈색 또는 검은색 토기 등이 있고, 그릇형태로는 단지, 항아리. 잔이 있다. 

중기인 4-5세기 경에는 고운 점토질로 제작되며 회색, 황갈색에 어깨나 몸통부분에 간단한 줄무늬가 있으며 병, 독, 뚜껑있는 대접, 손잡이 달린 잔, 솥, 화덕 등의 실용품이 있다. 또 한 6세기 이후에는 더욱 다양해져 벼루, 베게, 등이 출토 되었는데, 도자기처럼 유약이 발려 지기도 하였다.고구려토기는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고 손잡이가 네 개 달린 항아리(사이호 四耳壺), 배부른 단지, 깊은바리, 시루가 대표적인데 거의 납작밑(평저 平底)이다.

고구려 토기는 고운 점토질의 바탕흙으로 물레를 써서 만들고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것으로 회색,황갈색,검은색을 띠며 토기의 어깨나 몸통부분에 간단한 줄무늬가 베풀어지거나 마연한 암문(暗文)이 나타나기도 한다. 

세발항아리

맞귀단지

항아리

고구려 토기의 특징

첫째, 토기에는 연질 종류와 흑색 계통의 경질토기가 있다.  항아리 종류가 많으며 어깨에는 네 귀가 달리고 간단한 몇 줄의 횡선이나 점렬이 시문된다.

둘째, 중국의 영향은 받은 연유가 시유된 황갈유 도기가 있다.

세째, 기형은 다양하며 실용적인 성격이 강하여 항아리가 많고 아가리는 넓고 밖으로 벌어지며 밑은 편평하다.

네째, 무늬는 돗자리무늬나 타날무늬 계통은 거의 없고 항아리 어깨부분에 무늬대를 만들고 간단한 물결무늬 톱니무늬, 노끈무늬 등이 음각되는 경우가 있다.

고구려의 건국과 관계가 깊은 압록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초기 무덤인 적석총이산재해 있으며, 이들 적석총에서는 흑색 계통의 연질토기도 발견되었다.

♣ 고구려토기의 변천

고구려의 건국과 깊은 관계가 있는 압록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초기 무덤인 적석총이 산재해 있으며 이들 적석총에서는 흑색 계통의 연질토기들이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다. 형태는 바닥이 편평하고 배가 둥글며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항아리와 양측에 물동이모양 손잡이가 아가리가 넓은 그릇과 접시들이 출토된다. 이들은 대체로 4세기 이전의 토기이며, 이 시기의 것으로는 중강군 토성리, 시중군 노남리 남파동 주거지 유적 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다.

평양 대성산 유적에서는 밑이 편평하고 아가리가 넓게 밖으로 벌어진 둥근항아리 짧은목에 뚜껑이 있는 둥근항아리의 안팎 한쌍과 도제 벼루가 출토된 예가 있다.

평양시 만달산 제 14호 석실 무덤에서 출토된 항아리는 회백색의 둥근 몸에 밖으로 휜 아가리와 편평한 밑을 가지고 있고 어깨에는 깊은 횡선을 하나 긋고 그 상.하에 각각 점렬무늬와 네 줄의 파상선 무늬를 시문한 고구려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연질계 토기이다.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송산리 고정호에서 출토된 맞귀단지는 흑색 계통의 경질토기로서 아가리가 벌어진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어께 부분에는 얕은 선무늬가 보이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흑색토기이다.

고구려토기에는 황갈유 도기가 또한 특징을 이룬다. 이것은 중국 육조 칠무늬토기의 영향으로 간주되며 대동군 토포리 출토 황유네귀항아리, 일본 교토대학교 소장의 황유네귀항아리. 화유반 등이 알려져 있다.

집모양토기 (家形土器)

황유토기

도제벼루

저료출처 ttp://chinkim.cafe24.com/dojagi/samkuk/kogu.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