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捺文 土器

가야토기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5:17

 

가야토기 1 - 동물모양의 가야 토기들

 

 

 

가야토기 1

동물 모양의 가야 토기들

  가야관련 문화재 발굴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비교적 좁은 지역에서 국가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폭넓은 대외활동과 높은 수준의 문화생활을 누린탓에, 매우 밀집된 곳에서 매우 우수하고 다양한 문화재가 대량으로 발굴된다는 것에 있다.

 토기역시 대량으로 도굴되거나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특히 동물모양의 토기들은 신라토기에도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고 있다.


말모양 토기

네모난 받침대 위에 선 말 모양의 토기이다. 말의 다리는 짤막한 것에 비해 몸체가 커 보인다.

 등에는 안장의 앞가리개와 뒷가리개 사이에 원통형 수구(受口)가 있어, 액체를 부으면,
말의 입에 해당하는 곳으로 액체가 흘러 나나온다,

 발걸이와 운주(雲珠) 등 마구(馬具)가 표현되어 있어, 당시 기마술에 관련한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이 토기는 언뜻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토기》와 유사해 보인다. 특히 네모난 받침대에 서 있는 말과 마구 등의 표현이 친연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말의 키가 작고 다리가 짧아 비율이 조화롭지 않은 점, 마구류의 표현이 정교하지 못한 점, 주구(注口)가 없는 점, 안장 위에 사람 대신 수구(受口)가 놓인 점 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말은 피장자의 승천(升天)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말모양 토기는 제사에 쓰였던 그릇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덤에 껴묻혀 있던 것이다.

오리모양토기 (압형토기鴨形土器)

높이(高): 16.5cm, 15.5cm


한 쌍의 오리 모양 토기이다.  오리모양 토기는 동물모양 토기 중에서 가장 많이 재작되기도 했다.주둥이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소박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네 개의 사각 투창(四角透窓)이 길게 뚫려진 받침(臺脚) 위에 오리가 서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등에는 원통형으로 솟아오른 구멍이 있어 오리의 몸체에 액체를 부을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원통의 아가리 끝은 톱날처럼 처리되고 있다. 머리는 약간 숙이고 있으며 오리의 독특한 부리가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눈과 콧구멍까지도 투박하지만 잘 나타나 있다. 목에는 둥근 목걸이처럼 띠를 두르고 있다. 띠를 보면 이 토기는 집에서 기르던 오리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날개를 따로 만들어 등에 붙였다.

 꼬리는 살짝 치켜들었는데 끝이 잘려져 나갔다. 전체적으로 귀엽고 통통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물오리나 새는 악령을 방지하고 죽은 자의 영혼을 인도한다는 믿음이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있어 왔다.

  가야 지역에서는 신간(神竿)에 오리 모양의 목조(木鳥)를 매달아 신조(神鳥)로 신앙되기도 하였다. 이 토기는 제례 용구(祭禮用具)이거나 물과 관계 있는 의식 용구(儀式用具)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라장식 뿔잔 (臺附鼈形裝飾雙角杯)

 가야 5세기
높이20.0 길이15.4 아래부분8.4cm

동물모양토기중 가장 특이한 형태로, 그 비슷한 형태조차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도데체 용도는 무엇일까?

 크기로 봐서 먹물통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일반 물을 담는 토기로 보이지도 않고, 아마 제사때 쓰였던 제기이거나, 왕족들이 썼던 독창적인(?)술잔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굽다리 위에 자라로 보이는 동물장식을 얹고, 자라의 등위에 한 쌍의 뿔잔을 붙인 토기로서 말장식 뿔잔과 비슷한 수법으로 제작되었다.


자라의 등은 점토판을 맛배지붕모양으로 꺾어 붙이고 양 옆에는 문살무늬를 장식했는데, 실제와 달리 지붕처럼 변형으로 처리한 것이 흥미롭다. 따라서 이 토기는 당시 가옥구조를 연구하는데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어 주고 있다.

 주둥이는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게 만들고 두 눈은 작은 점을 찍어 간략하게 표현하였으며, 목을 길게 빼고 옆으로 틀어 마치 먹이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을 생생하게 형상화시켜 놓았다. 등 위의 뿔잔은 머리에서 꼬리방향으로 대칭되게 붙어 있는데 속은 비어 있다. 굽다리는 나팔상으로 세 줄의 돌대가 있으며, 하단에 작은 삼각형 투창이 뚫려 있는 전형적인 가야양식이다.

말장식 뿔잔 (臺附馬形飾角杯)

높이21.5 길이14.5 바닥9.2cm

 납작한 판이 달린 굽다리 위에 말모양의 토우를 올리고 그 위에 뿔잔을 얹어 놓은 의례용기(儀禮用器)이다. 말은 목 위에 갈기가 있고 두 귀는 쫑긋 솟아 있으며 둥그런 눈과 벌어진 코구멍 등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고 양볼과 코등에는 굴레가 씌워져 있으며 복부(腹部)에는 문살무늬가 장식된 다래가 늘어져 있다.

  높다란 말모습과 등위의 힘차게 굽은 뿔잔이 서로 어울려 전체적으로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전체가 회청색조를 띠고 있는 것으로, 나팔상으로 벌어진 굽다리는 전형적인 가야양식이다.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토기가 가장 멎지고 완성도도 높아 보인다.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것같은 강렬한 역동성도 느껴진다. 특히 말등 위에 얹혀진 초승달 모양의 소뿔장식은, 이 토기의 입체성과 역동성을 한층 더 해 주고 있다.

 이처럼 가야토기들은 대단히 입체적이고도 사실적인 조형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야인 특유의 여류롭고 풍부한 관찰력을 엿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비록 가야는 정치적으로는 고대통일왕국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정서적으로는 일맥하는 문화를 공유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가야토기 2 - 토기로 보는 가야 문화

가야인들은 각가지 동물모양을 비롯하여,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다양한 문화생활까지도 토기로 빚어 놓았다.
 특히 몇몇의 토기는 그릇이라기 보다, 미술 조형작품에 가까울 정도로 정밀하고 섬세한 입체성을 자랑한다.

집모양의 토기  
 


 우리나라 고대시대 일반 주택은 대체로 1층이지만, 이 가옥형  토기의 발굴로 인해 가야지방에서는 2층 형태의 주택도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2층을 이룬 고상 가옥(高床家屋)은 강우량이 많고 습기가 많은 남방 아시아 지역의 가옥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가옥 형태가 유행하지 않았으나 가야 지역에서는 이러한 가옥 형태를 취한 토기가 많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 토기로 미루어 당시 이러한 건축 양식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에는 “집이 무덤과 같고 문이 위에 있다”고 하는 3세기 가야 지역의 주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발굴된 가야의 주거지 유적에는 땅을 파고 바닥을 다지고 기둥을 안쪽으로 세워서 지붕을 만든 수혈가옥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물론 삼국지의 표현대로 봉분같이 둥근 형태의 가옥도 다수이긴 하지만, 이 토기에서 처럼 남방식 가옥을 가진 주택도 다수여서, 반드시 일정한 형태를 띄었다고 할 수 없다.

집모양 토기 (家形土器)

가야 4∼5세기 높이16.8 長길이 5.2

고대 초가귀틀집의 모습을 본떠 만든 명기이다. 집은 정면 두칸, 측면 한칸에 맛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측면 한쪽에 출입구를 만들고, 그 위의 지붕에 이엉을 덧대 빗물이 출입구 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고 있다.

   출입구의 기둥은 원목(圓木)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깍아만든 나무기둥으로 표현되어 있다.

  지붕에는 횡으로 점토띠를 가로질러 새끼줄로 이엉을 얽어 맨 모양을 하고 있다.


지붕 한쪽 측면에는 굴뚝 모양의 큰 원통형이 붙어 있다. 이와 같은 집 모양 토기는 실제 생활용기라기 보다는 부장품으로 사용된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평소 안식하던 집을 만들어, 죽은이가 내세에서도 그와 같이 안락하게 살기를 바라는 명복을 담고 있다

 내부를 비우고 지붕의 한쪽에 원통형의 아가리를 붙여 굴뚝을 표현함과 동시에 용기(容器)로서 기능 하도록 하였으며, 토기의 전면에 지그재그 또는 X자상의 점열문을 장식하였다

 이러한 집모양 토기는 죽은 영혼이 편안히 기거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준다는 내세관념(來世觀念)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또한 당시 가옥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어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 최근 발굴된 원삼국시대 주거지에서 이와 비슷한 가옥구조가 확인되고 있다.




바퀴형 토기

[1] 높이: 15.7cm 바퀴지름: 11.2cm [2] 높이: 16.2cm 바퀴지름:11.2cm  



바퀴를 두 개 단 대각(臺脚) 위에 두 개의 긴목항아리(=장경호長頸壺)를 올려 놓은 듯한 토기로 경남지방 출토로 전한다. 이렇게 일반형을 벗어난 토기를 이형(異形) 토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와서 특히 낙동강 하류 지방에서 유행하였다.

따라서 가야 토기 중에는 이형 토기가 적지 않게 눈에 띤다. 이형 토기는 반드시 속이 비고 등에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에 술잔 같은 목이 달리는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것은 중국 육조를 통해 들어온 근동 지방 토기의 영향이라고 추측된다.
그런데 기마 인물형 토기, 배 모양 토기, 집 모양 토기와 같은 이형 토기는 사자(死者)를 보내는 장송의 의미를 가진 것이 많다. 이 수레 토기 역시 일상 생활에서 쓰였던 토기가 아니고, 부장(副葬)하기 위한 특수 용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후 영혼을 저 세상으로 운반하기 위한 제의용(祭儀用) 그릇이었다고 믿어진다. 이와 같은 형태의 토기는 신라의 무덤에서도 발견되어 주목된다. 

보물 제637호
지정 바퀴모양 토기 (차륜식토기(車輪飾土器)

수레바퀴가 붙은 높이 18.5㎝, 길이 24㎝의 가야 토기로 출토지는 알 수 없다.

토기의 받침은 이 시대 굽다리 접시(고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밑이 벌어진 나팔형인데 긴 직사각형의 굽구멍(투창)이 4개 뚫려 있다. 받침 위에 U자형의 뿔잔(각배)을 얹어 놓았다.

그 등에는 양쪽으로 고사리 모양 장식을 했으나 한쪽은 없어졌다. 고사리 모양의 장식은 가는 흙 줄을 양쪽으로 말아서 만든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U자형의 뿔잔은 액체를 담기 위한 그릇으로 보인다. 뿔잔의 좌우 측면에 수레바퀴를 부착시켰는데, 둥근 바퀴는 축을 중심으로 마름모꼴 모양의 창을 6개 뚫어 바퀴살을 표현하고 있다.



배모양 토기 (臺附船形土器)

가야4~5세기 높이23.5 길이 22.4

   바닥이 깊고 둥근 항해용 배를 본떠 만든 것으로 사공형상의 인물토우는 간략하나 운동감이 넘치며, 이물에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 간단한 형태의 선실(船室)을 갖추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나팔상의 굽다리는 가야형식으로 두 줄의 돌선(突線)이 있으며, 전면이 흑색을 띠고 있다.

   이 토기는 내부에 술을 채워 제사용기로 사용된 듯하며 죽은 사람의 영혼을 배로 태워 보낸다는 생사관을 추측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수레바퀴장식 배모양 토기 (臺附車輪飾船形土器)

가야 4~5세기 높이20.1 길이28.6

  고대의 목선(木船)을 사실적으로 본뜬 다음, 양 옆에 수레바퀴를 붙여 장송용(葬送用)의 의도를 더욱 강화시킨 명기(明器)이다.

  배 바닥이 둥글고 이물(船首)은 뾰족하게 돌출되어 물살을 가르기 좋게 되어 있어, 항해용의 목선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배의 곳곳에 빗살문과 문살문을 그어 장식하였고, 수레바퀴에는 방사상의 바퀴살이 잘 표현되어 있다



 나팔상의 굽다리에는 점열문(點列文)과 작은 투창(透窓)이 있고, 전면에는 자연유가 씌워져 있는데, 굽다리의 형태로 보아 가야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배모양토기는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운반·인도하고자 하는 주술신앙이 반영된 것으로, 가야인의 신앙세계는 물론 당시 교통수단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신발모양 토기 (土履)

가야4~5세기 신발 1:높이 6.8,23.5,  신발2:높이7.2길이 24.0 
 이런 모양의 토기는 거의 유일하여 보물 556 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죽신발을 모방해서 흙으로 만든 명기이다. 신발의 코가 두툼하고 투박하게 솟아 있으며, 둘레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어 끈으로 조일 수 있게 하였다.

  양 옆의 구멍 주위에는 점열선문(點列線文)이 장식되어 있다
.


뒤꿈치는 가죽을 덧댄 형태로 약간 솟아있어 손으로 잡고 신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두 점은 전체형태에서는 비슷하나 구멍의 수나 시문형태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런 신발은 남방족계통에서 발달된 것이지만 당시 실제로 사용한 신을 충실하게 재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왼쪽것은 그릇이라기 보다는 완전한 형태의 조각품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오른쪽 것과 비교해 보면 원래의 용도가 그릇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역시 부장품으로 생각되며, 일본인들의 신고 다니는 신발을 연상시킨다. 이것을 보더라도 가야의 문화가 일본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참조글:http://myhome.hanafos.com/~odorata/index.html
(이주영의 고고학 세상)

 

 

 

 

가야토기 3 받침있는 토기들


            


그릇받침이 없는 형태에서  그릇받침이 있는 형태가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것은 제사와 같은 국가 행사가 점차 발전되고 절차가 세분화되면서 이 같은 형태가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가야토기는 고구려나 백제 신라와 구분되는 매우 다양하고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토기의 굽과 뚜껑, 그리고 그릇 받침대(기대)가 등장하면서, 그 형태가 보다 다양해 지기 시작한다.

   

 

 받침있는 항아리와 그릇받침 (기대器臺)
높이 52.8 바닥 31.3cm
왼쪽의 기대는 토기의 전면에 자연유가 엷게 덮여 광택이 나며 회갈색(灰褐色)을 띤다. 가야지역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이면서, 비례균형과 투창 및 장식문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가야토기의 우수한 작품 중 하나이다. 특히 중간에 2단으로 톱니형태의 전을 돌려 장식한 것이 이채롭다.


이처럼 그릇받침을 기대라고 하는데, 왼쪽 그림처럼 기대가 작고 항아리가 돋보이는 형태도 있지만, 기대에 매우 많은 창문을 내고 섬세한 장식을 붙인 경우도 있다.

가야의 토기를 보면 화려하다기 보다는 단백하면서도 소박한 멋이 느껴진다.

주전자 모양의 가야토기

이 토기 역시 가야토기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는 5세기경 제작된 것이다.

 미술품이야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야 토기중 가장 눈에 띄는 토기이다.
 약이나 차등을 따를 때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이 토기는, 투박하지만 정감있는 뚜껑과 돌림선을 이용하여 토기의 단을 구분하고, 또 높은 굽에 투창을 돌려가며 뚫은 수법 등, 가야 토기의 다양한 제작기법이 잘 농축된 작품이다.

 특히 뾰족나온 주둥이와 도톰한 몸체는, 왠지 만화영화에 나올 법한, 약간은 우수꽝 스런 사람얼굴을 연상하게 만든다.


기대 항아리

짧은 목 항아리를 받치고 있는 기대,

 자세히 보면 중간 부분에 거북으로 추정되는 동물이 힘겹게 위로 올라가는 모양을 조각해 놓은 것이
보인다.

투창모양역시 직사각형에서 반원형등 다체롭다. 



 토기들은 수많은 작품들이 도난, 혹은 훼손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나라의 그 어떤 출토유물들보다보 풍부한 수량을 자랑한다.

 도굴을 피한 대형봉분의 경우 수천점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도 흔하다. 또 과거 귀족들이 무덤군락지 등에도 1기당 수십여점씩 나오는 예도 흔하다.

 따라서 토기들은 현재 상당히 저 평가 되고 있는데, 이 때문이어서인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경우도 극히 드물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토기 중에서도 매우 아름답고 그 시대 문화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도 상당수 이다.

 따라서 토기에 대한 재평가는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되어야 한다.

 

 

 

 

 

손잡이 달린 토기들

 흔히 토기라고 생각하면 항아리 모양의 그릇을 생각하기 쉽지만, 가야의 토기들은 현재에 생산되고 있는 각종 그릇류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우 다양한 형태와 용도로 제작되었다.
 이 중 손잡이 달린 토기는 실용성이 강조된것으로, 특히 가야 지방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며 컵모양의 토기가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컵모양토기 (파수부호把手附鉢)

기하-파상문 (幾何-波狀紋), 기하-원문 (幾何-圓紋)  
높이: 21.7cm 입지름(구경口徑): 20.8cm  



입은 크고 세로로 큰 손잡이가 달렸다. 몸체는 밑으로 갈수록 조금씩 좁혀지고, 바닥은 편평한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오늘날의 컵과 같이 생긴 그릇이다. 그 당시에서도 술이나 물과 같은 액체를 마시는 데 쓴 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몸체에는 2줄이  1조(組)로 된 돌대(突帶)를 4번 돌렸다. 세 부분으로 나뉜 윗 공간에는 물결무늬와 작은 고리줄무늬(圓圈文)을, 중간에는 물결무늬를, 아랫공간에는 큰 물결무늬를 새기고 물결 사이 상하에 작은 고리무늬를 베풀었다. 

 반원형의 손잡이를 달았고, 윗쪽 붙임자리에는 고사리 모양의 장식을 붙였다. 가야 토기에는 고사리 모양의 손잡이가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고사리 손잡이가 퇴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토기는 회갈색의 경도(硬度)가 높은데 컵 모양의 토기는 가야 토기의 특징적인 것인데 이 토기에서 보이는 작은 고리무늬나 돌대는 가야 후기의 토기에 많이 나타나는 문양이다.

손잡이 합

이런 형태를 파수부호 합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신라·가야 토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신라토기, 서쪽은 가야토기로 분류되며, 예외적으로 성주(星州)지역은 서쪽이지만 신라토기로 규정되고 있다. 이 토기는 4세기를 기준으로 1-3세기의 전기단계와 4-6세기의 후기단계로 나누어 변천하고 있다.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형태,
원래는 뚜껑이 있던것으로 보여진다.
 토기 입술 주변을 보면 뚜껑을 올려 놓기 좋도록 자리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토기의 용도에 따라 색깔이 달랐는데, 항아리형토기, 바리, 시루 등의 음식을 끓이거나 음식을 올리는  데 쓰는 토기는 주로 적갈색으로 만들어졌고, 굽다리접시 등 저장용 토기는 주로 회갈색 경질토기로 만들어졌다.

신라양식의 토기는 2단 투창(透窓)이 상하 엇갈린 굽접시를 표지로 하며, 대부분의 토기가 직선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반면 가야양식의 토기는 2단 투창이 상하 일직선으로 나 있는 굽접시를 표지로 하며 대부분의 토기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도록 만들어졌다.

 옆의 토기는 굽다리에 직선상으로 창이 뚤린 것과 부드러운 곡선을 보여주는 손잡이 달린 굽 항아리의 대표적 형태라 할 수 있다.

 

 

 

 

 

굽달린 방울잔 (臺附鈴杯 대부영배)

가야 5세기
높이22.4, 23.0 둘레12.1, 12.4 

방울잔은 그릇 안에 단단한 흙더미나 돌을 넣은 채 구워, 흔들면 방울소리가 나도록 만든 토기이다.


그릇 입술이 넓고 밑이 좁으며, 내부가 깊은 잔의 아래에 둥글납작한 방울이 붙어 있고, 그 밑에 다시 작은 굽이 달려 있다.
잔의 윗부분은 돌림 선을 이용해 4층으로 구분하고, 표면에는 물결무늬를 장식하였다. 방울에는 중앙의 돌선을 기준으로 상하 엇갈리게 작은 삼각형의 투창을 뚫었고, 내부에 흙구슬이 들어 있어 흔들면 방울소리가 난다.

  이러한 토기는 주로 낙동강 서안의 가야무덤에서 출토되며, 주술적(呪術的) 성격을 지닌 의례용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형태는 구형(球形)의 몸체에 작은 원형이나 직사각형의 구멍을 뚫고, 그 위에 V 자형으로 길게 벌어진 입구를 가진 토기를 붙인 모양이다.
몸체에 비해서 목이 길고 큰 것이 특징이며, 목에는 손잡이가 없고 바닥은 납작한(平底평저) 것이 대부분이다.
 주로 백제와 신라 ·가야지역등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출토되는데, 신라 ·가야 지역 출토의 것에는 구형 몸체에 원추형의 굽다리[臺脚]를 덧붙인 것도 있고, 목 부분에 고사리 모양의 장식을 붙인 것도 있다.


백제에서 출토된 방울잔은 몸체에 아무런 장식이 없이 형태가 단순하고 소박한 점이 특징이다.

백제 방울잔

  유물은 보존상태가  양호한 상태로 발견된 백제계 방울잔이다. 회청색의 도질제이며 경부 내면과 외면 일부분에 녹황색 자연유가 두텁게 부착되어 있다.
 
돌대로서 2단으로 나누고 있으며 삼각형투창이 상하 엇갈리게 5개 뚫려있다.

 동체부 내면에 토제 방울이 2개 들어 있다. 토기의 굽부분은 결실되었지만 4개의 투창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높이 : 12 cm / 입지름 : 8.5 cm
소장처: 부산대 박물관



방울잔(鈴杯)의 형태는 배부(杯部), 령부(鈴部), 대각부(臺脚部)로 구분되어진다.


회청색(灰靑色) 경질의 방울잔(영배鈴杯)는 입구부분(구연口緣)이 길게 직립하며, 배부(杯部)는 컵모양이다. 그릇표면은 2중의 돌대(突帶)에 의해 3단 이나 4단으로구획되고, 그 사이에는 물결무늬나 기하학 무늬등을 시문하는 것이 보통이다.

가야 방울잔

 이 유물은 방울잔의 기본형을 잘 갖추고 있는 완제품이다. 이 방울잔을 상중하로 볼 때 상층부가 배부(杯部)로 잔에 해당하며 토기의 구성 중 가장 길다.

중간 몸통이 령부(鈴部)로 방울이 들어 있는 모양이고, 방울이 잘 구르며 소리가 나도록 타원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하층 방울잔의 굽에 해당하는 것이 대각부(臺脚部)이다.

높이 : 16 cm / 입지름 : 9.25 cm /
받침지름 : 7.05 cm / 굽높이 : 3.45 cm
(대구대 박물관 소장)


자세히 보면 토기 배부 2단과 3단에 물결무늬 밀집파상문(密集波狀文)시문되어 있고, 령부 위에도 x자 형태의 기하학 무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표면에 무늬가 있는 것은 대부분 가야계 방울잔에 해당한다.


 
신라의 방울잔

 이 유물은 방울잔 중에서도 매우 드문 도기이다. 도기와 토기는 일반적으로 질그릇이라 부르지만,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토기는 대체로 900도 이하의 야외노지에서 유약처리 없이 구은 질그릇을 말한다.
이에 비해 도기는 가마에서 약 1000도 가량의 고온으로 구은 후 간단하게 유약처리가 된 경우를 말한다.

 유약처리가 되긴 하였지만, 이처럼 1차 초벌구이로만 만들어진 것을 도기라 하고, 2차 재벌구이와 1200도 고온으로 구워진 것을 자기라 한다. 

  이 유물을 보더라도 신라의 토기는, 가야토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입지름 : 7 cm / 바닥지름 : 6.5 cm /
높이 : 13 cm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삼국시대까지의  토기류나 도자기류를 통칭하여 토기 혹은 질그릇으로 부르고 있다. 

 방울잔은 북방 유목문화의 전통을 가진 유물로 보고 있다. 선사시대 이래로 제의용 의기와 악령을 쫓는 주술적 의기로 방울이나 종 등의 사용이 이루어진 것을 생각한다면 방울토기는 바로 여러 가지 상형토기(象形土器)와 함께 의식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도 한국과 유사한 형태의 방울잔이 출토되고 있어서 문화적인 전파의 관련성을 증명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