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토기의 발전
우리나라의 토기제작은 기원전 6000경 신석기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 초기 토기 제작은 불의 발견등에 의해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하게 생겨난것으로 생각되어지며, 기원전 6000년 경에는 본격적으로 토기생산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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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를 빚는 방법은 손빚음법(수타법;手捺法)이라 하여, 한무더기의 진흙을 누루거나 두드려 형태를 갖추어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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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층 한층 올라가며 쌓는 테쌓기법(윤적법;輪積法, ring method)과 뱀이 또아리를 트는 것과 같은 서리기법(권상법;卷上法, coiling method)이 이용되어 보다 다양하고 단단하며 대형화된 토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가마나 물레가 사용된 것은 아니며, 600도에서 800도 이하의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워 완성하였다. 소형의 토기는 손빚음법을 쓰고 있으나 그릇 벽면의 테자국 관찰과 X-ray 사진분석 결과 대부분의 선사토기는 테쌓기법과 서리기법으로 빚었다.
신석기시대 가장 먼저 등장하는 토기는 이른민무늬 토기이지만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된 토기는 역시 빗살무늬 토기이다. 빗살무늬 토기라는 용어는 일본의 고고학자 후지다가 Kammkeramik(comb pottery)라는 독일어를 즐목무늬 토기라고 직역한데서 유래되었다. 현재에는 기하학 토기 혹은 새김무늬 토기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추세이다.
형태는 밑이 뾰족하거나 둥글어 V자 혹은 U자와 같고 임구는 직립해 있다.
제작방법은 그릇을 엎어 놓은 상태에서 입구부터 만들어 위로 올라가므로 그릇을 거꾸로 제작된다.
무늬는 큰 생선의 등뼈 같은 도구를 가지고 빗으로 머리를 빗어 내르듯이 토기 표면을 긁어 빗살무늬를 나타냈는데 지역에 따라서 특징이 다르다.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의 식량 채집 단계와는 달리 식량 생산 단계에 돌입 하였다는 사실이 혁명적인 변화라 할 수 있고,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이 토기의 존재이며 토기의 제작은 불을 발견하여 사용하게 된 사실과 표리를 이룬다.
생활용기로서의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는 단순한 용기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다양한 빗살무늬의 세련된 양상은 그들의 미적 표현의 대상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 청동기시대토기 - 민무늬토기(무문토기 無文土器)
청동은 구리, 주석, 납이 주로 들어가며 이와같은 청동제품을 사용하던 시대를 청동기시대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청동기를 사용한 곳은 B.C 3700년경의 이집트이지만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상한년을 약 B.C 1500경으로 본다.
신석기시대를 빗살무늬토기 문화시대라고 하는 것과 같이 청동기시대를 민무늬토기 문화시대라고도 한다.
민무늬토기라 함은 그릇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모든 토기를 가리킨다. 민무늬토기는 대체로 갈색 혹은 황갈색을 띠고 장석, 석영립등 굵은 모래가 섞인 태토를 사용하였다.
청동기시대는 상당히 발달된 사회구조를 형성하여, 고조선 부여같은 부족연맹체를 이루었던 시대로서 고도의 정치적 사회가 운영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밭농사를 주로 한 정착된 농경사회였으므로 안정된 생활은 토기 제작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그릇의 형태면에서도 전에 볼 수 없었던 실용적인 항아리, 속이 깊은 사발 등과 같은 모양을 기본으로 하여 대전, 굽다리잔 등 일상 용기의 일면을 보여주며 양측면에 손잡이가 달려 물, 술과 같은 음식을 나르는데 편리하도록 된 기형도 있다.
때로는 칠무늬토기와 같이 장식적인 무늬가 시문된다. 이것은 그릇에 채색을 넣음으로써 특수한 용도로서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주위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일면을 공예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이다.
민무늬토기(무문토기 無文土器)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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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멍무늬토기(공열토기 孔列土器) : 토기 입술 바로 아래에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1줄 내지 2줄 로 돌아가며 배치된 토기.
2.골아가리토기(구순각목토기 口脣刻目土器) : 토기 입술둘레나 바로 빝에 눈금을 새긴 토기.
사진은 입술 위에 짧고 굵은 사선을 새겨 두르고 바로 그 아래에 구멍을 일렬로 뚫어 돌렸으므로 골아가리무늬[口脣刻目文]와 구멍무늬[孔列文]가 함께 새겨진 토기이다 | 이처럼 청동기 토기는 여러가지 형태가 결합된 것이 많다.
3. 팽이토기(각형토기 角形土器) : 바닥이 지름 3∼5cm 정도로 작고 그릇모양이 팽이처럼 생긴 토기.
4.붉은간토기(적색마연토기 赤色磨硏土器) : 겉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문질러 광택이 나게 한 토기.
5.가지무늬토기(채문토기 彩文土器) : 사진 오른쪽 무늬가 있는 토기, 어깨부분에 검은색의 가지무늬가 베풀어진 토기. 청동기 시대 등장한 토기 중 가장 후대에 등장하게 된다.
6 .검은간토기(흑색마연토기 黑色磨硏土器) : 겉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의 안료를 바르고 문질러 광택이 나게 한 토기. 검은 간 토기는 청동기에서 철기시대의 과도기가 되어서야 등장한다.
7.덧띠토기(점토대토기 粘土帶土器) : 그릇입술에 진흙 띠를 덧붙여 겹입술을 만든 토기.
8.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 : 화분 모양의 토기.
철기시대토기
철기시대는 크게 두시기로 구분된다.
B.C 300년경으로부터 서력기원 전후까지 '초기철기시대' 서력기원 전후로부터 A.D 300년경까지의 '원삼국시대'이다. 원삼국시대는 청동기의 제작은 사라지고 철기가 본격적으로 양산되는 시기이다.
초기철기시대는 청동기 후기와 겹치는 시기이므로,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 형식이 그대로 계속 되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의 전통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 한(漢)나라의 새로운 토기 굽는 기술이 받아들여져 보다 단단하고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만들어진다 <학계에서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라고 부른다>.
원삼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연질 또는 경질의 타날무늬(두둘긴 무늬)회색토기와 적갈색 타날무늬토기이다. 제작환경은 개방된 노천가마가 아니라 밀폐된 실요, 즉 지하굴식 혹은 터널식 오름가마로 바뀐 것이 가장 큰 변화이다.
이와 같은 제작 환경은 산소의 공급이 차단된 환원염(還元焰) 상태이고 밀폐된 공간이므로 소성온도를 전보다 올릴 수 있어 어떤 것은 쇠붙이 소리가 날 정도의 상태를 보이는 것이 있으니 토기의 일대 혁명이라 볼수있다.
민무늬토기가 한데가마(노천요 露天窯)에서 굽는 것인데 비해 한나라의 새로운 토기 굽는 기술은 굴가마(등요 登窯)에서 굽는다. 그리고 토기를 만들 때 돌림판(도차 陶車) 위에 흙을 올려 놓고 두르림판(박자 拍子)을 사용하여 두드림무늬를 내므로 보다 단단하고 치밀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토기에 색을 입히다.
- 채색토기의 등장
우리나라에서 토기는 기원전 6000년경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지만, 그 토기가 색을 입기 시작하기까지는 40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물론 붉은토기의 연대는 신석기까지 올라가기는 하지만, 채색된 것이 아니라 붉은 색을 내는 산화철이 함유된 흙으로 토기를 빚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다. 간 토기란, 토기 표면을 문지르거나 토기입술 주위를 갈아서 부드럽게 만든 토기를 말한다. 신석기 이전까지 단순이 손으로 빚어 투박하게 만든기법에서 한단계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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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붉은색을 내는 선사시대 토기를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라고도 한다.
따라서 청동기 시대이전까지 채색토기는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없지만,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한 청동기 시대에는 비교적 광범위한 범위에서 붉은간토기가 발견되기에 이른다.
송국리 유적에서 발견된 붉은 간토기 기원전 5세기 추정 |
과거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支石墓(지석묘)]과 돌널무덤[石棺墓(석관묘)]에서 주로 발견되나, 최근들어 송국리 유적처럼 집터에서 발견되는 예가 늘어나고 있으며, 남해안지방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산화철을 바른 토기가 출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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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지금까지 붉은간토기라고 불려 왔던 것은 청동기시대의 것이다. 주로 낙동강유역에 밀집된 분포를 보이고, 북서지방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바탕흙은 정선된 것을 쓰고 있고, 형태는일반적인 항아리 모양이 가장 많이 나오지만, 간혹 둥근바닥목항아리[長頸圓底壺(장경원저호)] 등이 출토되기도 한다.
부산대학교 박물관 소장품 |
가지무늬 토기 (채문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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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무늬 토기는 어깨 부분에 검은색 가지무늬가 있는 토기이다.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의 한 종류로 높이 20㎝, 나비 20㎝ 정도의 항아리형 토기이다.
고운 바탕흙을 썼고 표면이 곱게 손질되어 있으며 밝은 갈색을 띠고 있다. 한국에서는 함경북도 웅기(雄基)를 비롯해 밀양(密陽)·진양(晉陽)·화순(和順) 등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웅기의 것을 빼면 모두 경상도·전라도 등 한반도 남단에 분포되어 있다. |
가지무늬토기는 일반적으로 중국 양사오[仰韶(앙소)]문화에서 많이 보이는데 한국의 것은 내몽고나 만주를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되었으며 주거지에서 붉은간토기와 함께 출토된 것도 있다. 밀양 전사포리(前沙浦里)에서 출토된 것은 토기 전체가 붉은 물감으로 채색되고 간토기에 가지무늬가 새겨진 특수한 가지무늬붉은간토기이다.
검은간토기
검은색의 간토기는 청동기시대 만들어진 토기중 가장 마지막에 나타난 토기로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특히 백제 토기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흑도(黑陶)·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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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간토기목단지(黑色磨硏長頸壺)
이 흑도 역시 배가 부른 몸체에 긴 목을 하고 있는 병형(甁形) 단지이다. 구연부(口緣部)가 밖으로 약간 바라지고, 어깨보다 밑이 부푼 둥그스름한 몸체를 하고 있다. 편평한 밑바닥의 굽은 아주 얕다. 고운 흙으로 만들어졌고, 표면은 반들거리게 갈아져 있다.
1967년 대전시 괴정동의 돌널무덤(石棺墓)에서 출토된 것이다.. 함께 발견된 청동기들이 기원전 4-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이 흑도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측된다. |
이처럼 검은 간토기의 기본적인 형태는 목이 긴 꽃병 모양의 목항아리가 주류를 이루고 철기시대에 와서 주머니항아리 형태의 것이 보이는데, 그릇면이 검고 반들반들한 것이 특징이다. 바탕흙은 일반 민무늬토기에 비해 고운 점토질의 것이 많다. 이 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石棺墓(석관묘)]에서 덧띠토기[粘土帶土器(점토대토기)]와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으며 세형동검과의 반출이 주목된다. 평안남도·전라남북도를 제외한 전국에 분포되어 있으며, 검은 간토기가 출토되는 주요 유적으로는 대전(大田) 괴정동(槐亭洞), 예산(禮山) 동서리(東西里) 돌널무덤, 김해(金海) 내동(內洞) 고인돌 등이 있다.
검은간토기 중에는 손잡이가 달린것과 소뿔장식이 달린 목항아리도 있다.
붉은 간토기의 등장
민무늬 토기 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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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서울시립대)소장 민무늬 토기 사발
높이 : 5.8 cm / 입지름 : 11.5 cm / 바닥지름 : 6.6 cm
신석기시대에 유행하던 빗살무늬토기가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점차 소멸하고 대신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의 무늬없는 토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민무늬토기는 노천에서 낮은 온도로 구워졌기 때문에 흔히 적갈색을 띠고 있다. | 기형(器形)의 측면에서 볼 때, 빗살무늬토기는 뾰쪽바닥과 둥근바닥이 많았지만 민무늬토기는 대부분이 납작바닥이라는 점이 큰 특색이고, 아울러 그릇에 목이 달린 토기가 많아진 것도 특색의 하나이다. 청동기 시대 만들어진 토기중 가장 앞선 형태이며, 점차 민무늬 토기에서 간토기로 발전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붉은 토기(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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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忠淸南道) 태안군(泰安郡)에서 발굴된 붉은 간 토기 발형 지름(입지름) : 10.2 cm / 바닥지름 : 5.8 cm / 높이( : 12.3 cm / 몸통지름 : 13 cm 한양대 박물관 소장
| 홍도(紅陶)를 포함하는 붉은간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문화기의 초기부터 나타나 이 시기의 말기까지 존속되었으며 민무늬토기 문화기에도 계속 사용되다가 중국의 도질토기(陶質土器)가 전해짐으로서 민무늬토기와 함께 소멸하였다.
붉은 간 토기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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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시(安東市)출토 붉은간토기 단지
높이 : 12.0 cm / 입지름 : 7.3 cm / 몸통지름 : 14.4 cm 음식기(飮食器) / 저장운반(貯藏運搬) / 단지 연세대박물관 소장 |
일반적으로 `홍도`라는 용어로도 불리어 지는데 그 어원이나 지칭하는 내용에 비추어 볼때 부적합한 용어이지만 보편화된 용례를 고려하여 붉은 간토기 중에서도 민무늬토기문화기의 둥근바닥항아리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토기의 표면에 적색의 덧칠을 하고 마연하는 수법은 전세계적인 선사시대 토기제작수법의 하나로서 한국의 붉은간토기는 그 일환으로 출현하였으며 이것은 문양효과 뿐만 아니라 방수, 보강의 기능을 지닌 것이다.
빗살무늬토기시대의 붉은간토기는 뾰족바닥의 바리모양토기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일반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일상 용기로 사용되었다. 민무늬토기시대의 붉은간토기는 크게 일상용용기와 부장용기로 구분되고 일상용기는 납작모양의 바리모양, 항아리모양, 접시 등 다양하게 만들어져 사용되었으며 부장용기는 독특한 소형의 둥근바닥항아리로 통일하여 사용하였다. 전자는 기형이 일반 민무늬토기와 같고 방수와 보강의 목적으로 덧칠과 마연을 하였으나 후자는 생명의 부활을 상징하는 피의 색깔을 상징하는 의도로 덧칠과 마연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빗살무늬토기 문화기의 붉은간토기는 주로 조개무지에서 발견되며 따라서 한반도동북지방, 동해안, 남해안지방에 걸친 분포권을 형성하는 반면에 붉은간토기는 한반도 서북지방을 제외한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형태상 둥근바닥목항아리의 적색마연토기는 주로 고인돌과 돌널무덤에서 발견되고 나머지 평저토기와 같은 마연토기들은 대부분 집자리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최근 집자리유적에서도 원저단경호의 붉은간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위와 같은 기능상의 구분설은 재고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붉은간토기의 기원은 빗살무늬토기문화와 민무늬토기문화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각각 연관되어 있으며 빗살무늬토기문화기의 덧칠수법은 토기가 발명된 후 따라온 일반적인 기법으로서 보아야 할 것이다.
붉은 간토기 목항아리(적색마연토기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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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濟州道) 남제주군(南濟州郡)에서 출토된 붉은 간토기 목항아리 입지름 : 7.4 cm / 높이 : 12.8 cm / 두께 : .4 cm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유적에서 출토된 이 토기는 호형의 마연토기로 적갈색을 띤다. 구연부분은 거의 남아 있고 동체, 저부 일부가 남아있어 기형을 복원한 것이다.
붉은간토기는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여 성형한 후 산화철을 바르고 문질러 소성함으로써 붉은 색의 광택이 나는 토기로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 홍도(紅陶), 붉은간토기 등으로도 불리운다. 팽이형토기 문화권인 서북지방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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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물은 청동기 시대의 붉은간토기로 경남 합천군 대병면 창리에서 출토되었다.
호(壺)형의 붉은 간토기로 목이 길고 바닥은 굽이 없이 둥근형태를 이루고 있다. 붉은 칠이 전체적으로 고르게 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간 곳도 보인다. 아가리 부분이 일부 결실된 것을 제외하고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경상남도 합천군 출토 입지름(입지름) : 10 cm / 높이(높이) : 20 cm
한양대박물관 소장 |
참조사이트 http://www.korea-museum.go.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이상의 자료는 위 사이트에 나와있는 설명과 사진중 유물 상태가 양호한 청동기 시대 소장품만을 참조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토기의 3차 혁명 - 와질토기(瓦質土器)의 등장
기원전 6000년경 토기가 우리땅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지기 시작한 후, 약 기원전 4000년경을 전후하여 토기표면에 무늬를 새겨놓는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하면서 1차 혁명이 일어났다. 이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중 후반까지 강세를 나타냈지만, 청동기로 가면서 차츰 쇠태해져 갔다.
이후 산화철을 이용한 붉은 간 토기와 검은 간 토기등 토기에 색깔을 입힌 채색토기가 기원전 500년경 등장하면서 2차 혁명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 청동기 시대 토기는 단순한 저장이나 취사도구뿐 아니라 부장품과 제례의식도구로까지 확대 되면서, 사실상 문화전반에 걸쳐 그 쓰임새가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 가장 말기, 철기시대의 등장과 거의 겹치는 기원전 200년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와질 토기라 할 수 있다. 와질토기는 토기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와질토기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그동안 야외노지에서 굽던 토기가, 본격적으로 가마터에서 구워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청동기 사회가 본격적으로 국가사회로 진입하였다는 신호이기도 할 뿐더러, 경제역시 대규모 집약적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되었음을 뜻한다. 즉 대량생산 시대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굽기 때문에 600~900도의 야외노지보다 고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소성(燒成)의 마지막단계에서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가마[窯(요)] 안에서 환원하도록 하여 회청색을 띠게 한 것이다.
붉은토기[赤色土器(적색토기)]보다 치밀하고 견고하며 진전된 단계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회도는 본래 중국 은(殷)·주(周)시대부터 발전되어 온 것으로 기표면에는 문살무늬[格子文(격자문) 마름모꼴이나 사각형]나 삿무늬[繩蓆文(승석문)새끼줄무늬나 돗자리무늬]가 찍혀져 있다.
이 기법은 형태만 다양해 졌을 뿐 삼국시대 신라나 가야등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와질토기는 가마의 등장과 함께 우리나라 토기시대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토기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조금 복잡하게 만드는것이 와질토기와 함께 등장하는 경질토기(硬質土器)와 연질토기라는 단어이다. 도데체 와질토기와 경질토기 그리고 연질토기는 어떻게 구분해야 되는 것일까? 우선 연질토기나 경질토기는 크게보면 와질토기에서 세분화된 분류라고 할 수 있다. 즉 제작 기법상 모두 기와처럼 단단한 질감으로 굽는 와질토기의 한 종류라고 보면 된다. 백제식 연질토기, 초기붉은간토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왼쪽은 납작바닥 단지형 토기오른쪽은 병모양 토기이다. 모두 기원전 1세기 후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경질이란 단단한 질감을 내는 토기이며, 연질은 좀더 부드러운 질감을 내는 토기이다. 이 경질토기는 회청색의 다소 어둡고 무거워 보이며, 연질토기는 적갈색으로 부드럽고 가벼워 보인다. 단단하기에서도 연질토기보다는 경질토기가 대체적으로 가장 단단하다. 아무튼 이 세 토기는 동시대에 유행하였는데, 단단하기는 과학적 장비가 있어야 함으로 대체로, 색깔과 질감에 의한 구분법을 선호한다. 또한 발굴장소 한곳에서 연질과 경질토기가 섞여 나오는 경우도 매무 많아서, 한가마터에서 두가지 속성의 토기를 모두 만들어서 공급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식 흑색토기 항아리, 질감으로 볼 때 경질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토기는 와질토기의 등장으로 완성되어 갔지만, 개인적으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토기에는 회화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토기를 보던 회화라고 볼만한 작품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동북아 토기의 대체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반면 그리스나 로마의 토기는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을 뿐더러, 그 시대 문화양상을 적나라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토기를 비롯한 동양화토기의 우수점도 있다. 바로 토기가 갖는 다양한 모양과 입체성에 있다. 가야를 포함한다면 고대4국이 성립되었을 때 얘기지만, 토기는 각종동물에서 비롯해서 주택과 심지어 배모양까지, 그 시대 등장하는 문화유산을 보여주기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동서양의 토기들은 나름대로 모두 장점을 가진 우수한 문화유산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토기 역시 고대 4국 문화를 놀랍도록 아름답고 다양하게 보여주게 된다.
검은색 긴목항아리의 발전
둥근 몸통에 긴 목이 붙어 있는 그릇으로 장경호(長頸壺)라고도 한다. 몸통과 목의 높이비가 3:1이상 되는 것을 보통 목 긴 항아리로 부르며 목의 길이가 아주 짧은 항아리와 구별된다. 목 긴 항아리는 조, 기장, 수수, 벼 등 주로 곡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무덤의 껴묻거리로 많이 나온다. 집터, 성터 등 사람들이 생활하던 장소에서는 나오는 예가 많지 않다. 목 긴 항아리는 다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뚜껑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등 형태가 여러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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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검은색의 긴목항아리는, 대체적으로 청동기 중기인 기원전 500년을 전후하여 발생하였다.
토기표면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부드럽게 만들었다하여 흑색마연토기, 혹은 검은간토기라 한다. 대체로 검은색을 띠며 목길이가 토기 전체 높이의 1/5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검은간토기장경호 (연세대 박물관 소장) 출토지:충청남도(忠淸南道) 아산시(牙山市) 높이 : 9.7 cm / 입지름 : 5.4 cm / 몸통지름 : 7.6 cm / 바닥지름 : 5.3 cm |
소형의 연질(軟質) 토기(土器)로, 입구는 약간 밖으로 벌려져 있으며 (외반外反)되어 세워져 있으며, 목은 굵고 길다. 몸통은 둥글며 바닥은 납작한 평저(平底)로, 크기는 작으나 형태상으로는 장경호(長頸壺)의 기형을 보여준다. 표면은 전체적으로 거뭇하게 칠해져 있으며 태토(胎土)는 고운 점토질이다.
이와 같은 검은 간토기는 형태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와 같은 목이 긴 항아리가 주류를 이루며, 검정토기. 흑색토기(黑色土器), 검은간토기(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 검은색 긴목항아리(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 흑색마연장경호(黑色磨硏長頸壺)라고도 불린다. 기형을 중시하여 평저장경호(平底長頸壺)라고 부르는 연구자도 있다. 대부분 고분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일부는 집터와 같은 생활유적에서도 발견된다.
평안남도, 전라남북도를 제외한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대전 괴정동(槐亭洞), 청원 비하리(飛下里,) 아산 남성리(南城里), 예산 동서리 돌널무덤, 김해 내동 고인돌, 경주 조양동 널무덤 등을 들 수 있으며, 장경호는 특히 충청도, 경상도 지역에서만 발견되었다.
긴목항아리 토기
청동기를 거쳐 삼국시대로 들어오면서, 보다 단단하고 무거운 질감의 경질도기류가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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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식 토기 긴목항아리
백제식 검은색 긴목항아리는 신라에 의해 통일되기 이전까지 제작된다.이 토기는 연질토기로써 대체적으로 경질토기가 많은 신라토기와 구분된다. 연질(軟質)이란 연한질감, 즉 가볍고 부드러운 질감이란 뜻이다.
토기 표면에 기하문(幾何文)과 횡선문(가로줄 무늬橫線文)을 배풀었다.
바닥지름 : 8 cm / 입지름 : 10 cm / 높이 : 15 cm 우석대 박물관 소장 |
가야토기 긴목항아리
가야의 긴목항아리들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형성되며, 목과 어깨가 곡선으로 연결되며 대개 몸통에 굽이나 다리가 없고, 그릇받침 위에 얹혀진다. 목 외면의 장식은 주로 물결무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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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제장경호 신라 혹은 가야시대 유물로 추정됨
높이 : 17.4 cm / 입지름 : 14.2 cm / 몸통지름 : 16.7 cm 출토지:경상북도(慶尙北道) 고령군(高靈郡) 소장처:공립(公立) 대가야 박물관
목긴항아리의 특징인 납작밑에서 둥근밑으로의 변화는 김해토기시대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긴 목은 물의 운반과 저장 등 새로운 생활양식의 필요에서 생겨난 신라토기의 자체적 발명으로 보인다. | 본격적인 신라의 목긴항아리는 원삼국시대 말기에 회청색 경질토기로부터 출현하여 서기 300년경 이후에는 굽다리접시나 그릇받침 등과 함께 신라토기의 주류를 이룬다.
백제식 긴목 항아리의 대표적 모습 굽다리단지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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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식 긴목항아리의 대표적 모습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시(金海市)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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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목긴 항아리는 목이 위로 향하면서 크게 밖으로 벌어져 아가리지름과 몸통지름이 거의 같고 몸통이 세로로 길며 다리가 붙지 않는다.
그러나 신라의 목 긴 항아리는 목과 어깨의 접합부가 각을 이루고 바닥에 굽다리(臺脚部)가 달리는 경우가 많으며 각종 기하학적인 무늬를 뚫은 것 외에 조그만 토우를 붙이기도 한다. | 굽다리 달린 긴목항아리 굽다리란 구두굽과 같이, 토기에 굽이 달려 있는데 다리처럼 길게 되어있다는 뜻이다. 굽다리긴목항아리는 목이 긴 토기의 발달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지는 것으로 긴목항아리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다. 제작방법역시 가마를 이용하여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굽게되므로 토기라기보다는 도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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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다리 달린 목긴항아리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 검은간토기에서 한층 발달되고 세련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삼국시대 중기에 특히 많이 제작되었고, 동시대에 발굴된 토기 중에서도 그 수량면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입지름 : 14.8 cm / 바닥지름 : 13.5 cm / 전체높이 : 26.4 cm 출토지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시(金海市) 부산시복천 공립박물관 |
일반적인 의미로서 긴 목이 달린 항아리형태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에서 보이며 청동기, 삼한시대에도 계속 사용된다. 특히 검은간토기는 청동기시대의 토기로 긴 목이 붙은 광택이 나는 항아리인데 여기에 쇠뿔모양손잡이(牛角形把手)와 조합되어 삼한시대 와질토기의 쇠뿔손잡이가 붙은 항아리로 변화되어 간다.
목 긴 항아리가 전성기를 이루는 것은 삼국시대가 치열하게 전개되어 가던 5∼6세기 대이고 이 시기에는 백제, 신라, 가야지역의 무덤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목 긴 항아리가 출토된다.
특히 신라의 굽다리 긴목항아리 경우, 초기에는 굽에 구멍을 뚫지 않다가 전성기로 접어드는 5~6세기경에는 5~6개의 구멍을 뚫게 된다. 하지만 6세기 이후에는 다시 구멍이 줄어들게 된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단일문화권이 형성되고, 중국계 도자기의 대량유입과 더불어 그 기술까지 전수되면서 긴목항아리의 제작도 막을 내리게 된다.
원삼국시대 항아리의 기본형태
원삼국시대란,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이 정립되기 이전에 마한, 진한, 변한이 지역연합왕국 형태로 정립되어 있던 시대를 말하며, 기원전 5세기~기원년까지 약 500년간을 지칭한다.
원삼국시대는 고조선의 준왕이 남하하였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2세기 말을 전후하여, 고조선의 선진문화와 함께 중국의 문화도 대량으로 유입 되었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 세형동검과 그릇을 굽는 가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가마의 전래는 야외노지에서 굽던 방식에서 한층 발전된 것으로, 대량생산과 동시에 토기및 도기류의 질적인 향상도 가져왔다. 그리하여 원삼국시대 중 후반 들어서는 보다 견고하고 훨씬 다양한 무늬와 형태를 갖춘 토기류가 등장하게 되었다.
연질대호 회색 타날문 연질대호] (灰色 打捺文 軟質大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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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두드림무늬 짧은목 큰항아리
이 형태는 짧은 목항아리의 형태를 계승한 것이다.
높이(높이) : 47 cm / 몸통지름(몸통지름) : 46 cm 출토지:경기도(京畿道) 하남시(河南市) 소장처: 한양대 중앙 박물관
이 유물의 구연지름은 27cm이고 바닥은 둥글다. 1.5mm간격으로 돗자리 무늬 형태의 타날문(두드림 무늬)이 시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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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날문 토기란, 토기의 몸통을 다지거나 부풀리기 위해 두들개로 두드려서 삿무늬(돗자리무늬)나 문살무늬(#체크무늬)가 생긴 토기를 가르킨다. 철기시대 토기 중의 하나인 ‘회색연질토기’ 연대는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의 등장을 기원전후로 보고 있기 때문에 적갈색연질토기와 함께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하였고, 회청색경질토기가 출현하기 이전에 주로 유행하였다.
특히 회색연질토기의 발생을 중국(中國)의 회도(灰陶)의 영향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역시 회도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회백색연질토기(혹은 와질토기)와의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며, 이들 토기는 점차 회청색경질토기로 발전되어 갔다.
파상문(波狀文) 원저 장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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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높이) : 31 cm / 입지름(입지름) : 19 cm 소장처: 한양대 박물관
파상문이란 물결무늬를 뜻한다.
이 유물은 넓은 입구와 긴 목, 풍만한 몸체에 둥근 바닥을 한 항아리이다. 목은 돌대문(=가로줄 무늬 突帶文)을 돌려 세 등분하고 아래의 두 부분에 물결무늬로 장식하였고, 어깨에도 한 줄의 파상문대(波狀文帶)를 베풀었다.
몸통에는 음각선(陰刻線)을 돌리고 그 상하에 한 줄씩의 물결무늬를 베풀었다. |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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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 15.5 cm / 입지름 : 13.5 cm / 바닥지름 : 13.8 cm 조선대 박물관 소장
이 토기는 회청색의 단지이다.구연부는 넓게 벌어져 있으며 목은 짧다. 동체 중앙에서 동최대경을 이루며 동체 하부에는 고온으로 인하여 자연유가 흘렸다.
단지란 15cm이하의 작은 항아리를지칭하는 말이다. 정선된 흙으로 빚었으며, 가마에서 구은 경질토기이다. |
질그릇(=토기)은 보통 500-1000 이하에서 구워지지만 그 이상에서 구워진 것은 도기(陶器)라 부르고, 유약을 바른 것을 자기(磁器)라 부른다. 따라서 원삼국시대에는 토기와 도기가 공존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편이상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오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기(土器)라 부른다.
토제우각형 파수부 장경호(土製牛角形把手附長頸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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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이 달린 소뿔 목항아리 입지름(입지름) : 18.8 cm / 입지름(입지름) : 18.8 cm / 높이(높이) : 21 cm
이 토기는 표면에 마름모 꼴의 격자문(格字文)과 가로줄 무늬인 횡선문(橫線文)이 베풀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각형 목항아리가 출현하게 된 이유는, 토기의 운반을 쉽게 하기 위해 손잡이를 달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따라서 손잡이 부분에는 구멍을 뚫어 실이나 줄에 꿰기 좋도록 한 형태도 보인다.
창원대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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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가 벌려져 있으며, 목이 길고 바닥이 둥근형태인 것이 특징이다.
굽다리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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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통지름 : 22.5 cm / 전체높이 : 26 cm / 입지름 : 8.5 cm / 뚜껑지름 : 11.8 cm
소장처: 조선대 박물관
이 유물은 굽다리접시에서 변형된 굽다리 단지이다. 굽다리에는 세로로 긴 사각형 투창이 4개 나 있으며 꼭지잡이 뚜껑이 있다. 전체적인 조형미가 뛰어나며 손상된 부분없이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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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태는 굽다리 단지의 완성형이라 평가 할 수 있으며, 통일신라로 접어들기까지 생산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삼국시대에 널리 유행한 제기로서, 다리가 붙은 모든 그릇은 굽다리접시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변형된 형태가 굽다리단지이다. 즉 굽다리접시의 형태에서 접시 대신에 단지를 붙여 만든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삼국시대, 특히 신라 가야지역에서 유행한 회청색 경질(硬質)의 질그릇 종류이다.
굽다리단지의 기본 형태는 둥근 단지와 같은 몸체에 원통형 또는 꼭지점을 잘라낸 원추형의 다리가 붙어 있는 모습인데, 다리를 장식하거나 아니면 그릇의 중량을 가볍게 할 목적으로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굽구멍(透窓)을 뚫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굽다리단지는 다른 어떤 그릇보다도 그릇 뚜껑이 따로 제작되어 덮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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