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古史

왕검성전투 - 고조선 최후의 날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8:46

왕검성 전투 - 고조선 최후의 날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시작된 조중전쟁에서 고조선은 패하와 왕검성등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고조선은 위만세력에 위한 마지막 왕조가 이어지던 시대였다. 따라서 위만조선이라고도 불리는데, 제1기 단군조선, 제2기 기자조선과 제 3기 위만조선을 통칭하여 고조선이라 한다.
 아무튼 이 시기는 무려 2000 여년간이나 이어져 오던 고조선왕조가 몰락하는 마지막 시기임은 틀림없다.

 漢나라의 천자 한무제(漢武帝)는 두 장군으로는 전황이 불리하다고 여겨 위산을 사자로 보내  우거왕에게 항복을 권유하도록했다.

  이 때 우거왕은 항복할 뜻을 밝히고.” 태자를 들여보내 사죄하고 말 5천필과 군량을 헌상하기로 했다. 

▶ ‘사기’ “요동 험독현(險瀆縣)에 조선왕의 옛 도읍이 있다.”

▶ ‘한서(漢書)’ 지리지에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며, 물이 험한 곳에 위치해 험독이라 한다.” 이어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으니 이를 바로 험독이라 한다.

▶〈삼국유사〉흥법(興法) 제3편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 “살펴보건대 고구려 때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일명 안정홀(安丁忽)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태자는 군사 일만여 명을 이끌고  항복을 하기 위해 浿水(패수)를 건너 가려 했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청천강설, 압록강설, 요하강설등이 대표적인데, 개인적으로는 요하강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본다.
 아무튼 패수 서쪽에 주둔하고 있던 위산과 누선장군 양복은 태자가 이끌고 온 군대의 규모를 보고, 자신들이 오히려 역습당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위산은 이미 항복했으니 고조선의 태자에게 무기를 지니지 말아야 된다는 요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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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조선의 항복은 완전한 형태의 무조건적인 항복이 아니었다. 만약 그러한 항복이었던 우거왕이 직접나와 비무장 상태에서 항복의 예를 올렸을 것이다.
 즉 위만조선의 항복은 일종의 종전협상의 성격이 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무장해제를 하고 백기투항을 하라는 한나라측의 요구를 고조선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태자는 병력을 이끌고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그대로 왕검성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일로 인하여 위산은 본국으로 송환되어 한무제에 의해 사형을 받게 되었다. 

 결국 조선과 한나라 사이의 종전협상은, 한나라의 무리한 무장해제 요구로 인해 결렬되어 버렸고, 이로부터 고조선은 최후의 일전을 치루어야만 했다. 

 (이 후) 좌장군 순체는 수차례의 맹렬한 공격을 통하여  패수에 주둔하고 있던 고조선의 上軍(상군)을 격파하고, 왕검성 아래까지 진격하여 북서쪽을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왕검성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왕검성은 난공불락의 요세였다. 한나라는 몇 달 동안 수만명의 병력으로 공격해 보았지만, 왕검성은 전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누선장군 또한 합류해 성의 남쪽에 진을 쳤다. 그러나 우거왕과  대신들, 그리고 고조선의 모든 군민들은 한치의 흩어짐없이 1년에 걸친 대 공세를 막아냈다.
  전황이 이렇게 되자 이미 여러 번 패하였고, 수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한나라 군사들은 압장서 공격하기를 두려워 하였고, 한나라 장수들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했다.

 한무제는 더이상 이 사태를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한무제는 요동지역의 토착 세력인 공손 수를 사령으로 삼았다. 공손 수는 군사 책임자였던 양복을 체포하고, 좌장군 순체로 하여금 총 공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공손 수의 공격은 이전의 공격과 달랐다. 한편으로는 성을 집중 공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이 회유책을 써서 내부 분열을 유도 하였다.

 이런 장기적인 전쟁은 성안의 사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1년이 넘는 포위기간은 성안의 물자를 고갈시키고, 민심을 이반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일치단결하던 고조선의 수뇌부도 주화파와 주전파로 나뉘게 되었다.
 주화파를 주장하던  노인, 한도, 상참, 왕겹등은 모이하여 우거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우거왕은 항복 주장을 일축하고, 이들을 반역자로 규정 하였다. 결국 노인은 도망가다 죽었고 한도와 왕겹은 한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그러나 상참은 직접적으로 항복모의에 관여하지 않은 탓인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참을 살려 둔 것은 우거왕의 돌이킬 수 없는 가장 큰 실수였다. 상참은 끝내 배반하여 우거왕을 살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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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거왕이 살해되자 왕검성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였다. 하지만 왕검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왕검성의 백성들은 여전히 그 땅을 지키고자 하였고, 이들의 중심엔 우거왕의 충신 成己(성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항전은 공손 씨의 세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렬하였다.

그러자 한나라는 또 다시 이간책을 썻다. 바로 우거왕의 아들 장강을 부축여 성기장군을 암살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장강은 과거 우거왕을 배신하였던 노인의 아들 最(최)와 모의 하여 성기장군을 암살하고, 스스로 왕검성의 빗장을 풀었다.

 이로써 기원전 107년 고조선은 최후를 맞이하였다. 무려 2년간이 길고긴 전쟁이었다. 특히 왕검성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도 1년 넘게 한나라의 대 공세를 막아내었다. 최후의 순간에도 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성문을 열었다. 최대 병력 2만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조선으로써는 수십만명이 동원된 한나라 대병에 맞서는데 한계의 상황에 부딫쳤을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은 2000년이나 국가를 존속시킨 나라이다. 우리의 위대한 나라였던 고조선은 중국의 하, 은, 주가 멸망하고 중국이 대분열을 격던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제하였던 나라이다. 또 고조선을 침략하였던 연나라와 진나라가 패망하였을 때도 여전히 동북아의 강자로 굴림하였다.
 따라서 고조선의 멸망은 결코 끝이라 할 수 없다. 역사에서 국가는 끝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지 않는가?  고조선은 멸망하였지만 이후 고조선의 후예들은 낙랑, 신라, 고구려 백제등의 국가를 세웠으며, 다시 신라가 이들 나라를 모두 통일한 후 중국세력을 한반도로부터 몰아내고, 발해가 북방고토를 수호함으로써 우리역사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조선은 연연히 이어져온 우리나라의 시원임이 분명하다. 우리나라가 존재하는 한 고조선의 이야기는 결코 끝난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