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古史

고조선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8:23

우리 역사를 보는 시각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한반도를 주요 무대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와, 동북아 일대를 광의적으로 해석하는 민족주의적 견해로 나눌 수 있다.
  
  한반도 중심설은  우리민족의 독자성과 정통성을 중요시 여기는 시각이다.
그에따라 고조선은 한반도내에서 건국되어도 점차 요동지역으로 확대하여 나갔으며, 고조선 멸망후에는 낙랑군이 현재 평양에 설치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평양 중심설은 일제 식민사관에 집중적으로 연구되어, 고조선의 평양 중심설을 내세우면 마치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외로 평양 중심의 고조선 영역에 관한 주장은 조선시대 실학자들에 의해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것은 중국의 청국땅으로 들어가자, 우리민족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주장하기 위한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식민주의적 사관과는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에 비해 고조선이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확장해 나갔다는 설은, 출토유물의 과학적 분석에 의한다.
 현재에는 이 두가지 설이 절충되어 요동반도에서 한반도로 이동하였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무튼 위만의 고조선 지배는 우리나라 역사에 상당한 요동을 가져 온다.

  이 혼란기에 부여는 고조선으로 부터 독립하였으며, 또 준왕은 위만조선과는 구분되는  韓국을 세웠다. 준왕의  남하와 선진문물에 따라 한반도는 마한, 진한, 변한의 원삼국 시대로 개편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부터 과연 부여를 우리나라의 정통으로 보느냐, 아니면 삼한을 우리나라 정통으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왕조에 대한 서술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

 그렇다면 우선 부여 중심의 서술을 살펴 보자.
부여는 기원전 3세기부터 등장하는 대단히 역사가 오래된 나라이다. 특히 동부여의 시조 해모수는 단군의 세가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지며,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역사의 큰 맥락을 이룬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후엔 발해로 이어지며,  고려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천명한 바가 있다. 
 또 현재 우리나라의 국제적 이름인 KOREA가 고려에서 나왔다는 점을 중시하여, 현재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본다면 신라는 단순히 삼한을 통일한 것 뿐이며, 진정한 통일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의 문제점은
첫째, 우리민족의 통일시기와 형성시기가 늦어 진다는 점과
둘째,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역사가 단절된다는 점과
셋째, 한반도 고유의 독자성과 정통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점등이다.

 더욱이 웅대하고 찬란하였던 과거사에만 집착하여, 자칫 현재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여, 역사학의 주요과제를 등한시 할 수 있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 역대 왕조 본기는 한반도 중심설을 토대로 하고자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고조선의 영역이 한반도에 머물렀다거나, 한반도에서 창조되어 요동방면으로 확대되었다는 이론에는 다소 회의적이다.
 그리고 고구려나 백제의 영토역시 지나치게 국지적으로 해석하려는 문제점은 충분히 고려 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 중심설로 역대 왕조를 본다고 해도,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고, 우리 조상들의 활동무대를 고찰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따라서 고조선을 시작으로 하여 신라 중심의 삼국시대를 정립하고, 고려가 신라의 문화와 체제아래 고구려의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본적인 맥락에서 서술 하고자 한다.
  또한 조선은 고구려의 체제와 문화의 바탕위에 고조선에 대한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는 왕조로써, 당당하게 국가의 독립과 민족적 자존심을 지켜 나갔던 나라이다.

 비록 일제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지만, 조선왕조의 잘못보다는 일제의 반인류적인 범죄행의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의 부활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지향점이며, 그럴경우 영국식의 내각제를 참고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의 헌법체제를 갖추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며 본 가테고리를 개설한다. 

 

고조선(1) - 단군왕검

 단군왕검은 현재 우리역사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으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등에 의하면 최초로 국가를 세운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비슷하면서도, 자세히 살펴 보면 다소 다르게 서술되었다.
  우선 삼국유사는 고려시대 일연에 의하여 1280년을 전후하여 저술되었다고 생각되어지며 제왕운기역시 이승휴에 의해 거의 같은 시기에 저술되었다. 특히 두권 모두 극심한 원제국의 침략 이후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민족적 성향이 강하게 투영되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나와있는 단군에 대해 알아보자. 일연은 주로 魏書의 내용을 인용하여 단군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한 만큼, 현재까지 가장 믿을 수 있는 내용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는데 이는 요 임금과 같은 시대이다."
 
   제왕운기역시 요임금과 같은해 무진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며, 이상의 기록을 토대로 단군의 고조선 건국연대를 설정하면 기원전 2333년이 된다. 하지만 삼황오제를 비롯해 요순시대는,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사이에 있는 과도기적 사회라고 보여지며 실제 인물이라고 보기 힘들다.
 또한 단군역시 실제인물이라기 보다는, 숭상의 대상이 되는 시조신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주장하며 또한 규원사화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는 입장에서는 단군을 실제 인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기원전 2300년을 전후하여 동북아 일대에 국가가 성립하였다고 볼수 있는 움직임이 전혀 발견되지 않을 뿐더러, 삼국유사등의 내용을 보더라도 국가성립 이전단계에서 발생한 건국설화의 성격이 강하다.
 즉 단군은 실존인물이라기 보다는 부족사회에서 통치와 재사를 겸하는 군장을 칭하는 단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한 檀君이란 단어 자체가 제단을 뜻하는 단과 통치자를 뜻하는 군의 합성 어란 점도 유의해 볼만 하다.
 그리고 고아시아족이 곰 숭배와 함께 갖고 있는 샤머니즘에서의 종교적 요소와 단군신화를 비교해 보면, 최고의 샤먼을 지칭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 신화의 ‘단군’, 그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界木) 관념과 단군신화의 신단수 등은, 단군신화의 내용을 고아시아족과 연결시켜 파악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즉 단군왕검의 사회는 부족사회였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이렇게 본다면 조선이란 단어는 국가의 의미보다는 부족자체의 명칭으로 벌수있다.
 아무튼 단군왕검이 이끄는 조선사회는, 시베리아계통의 선진적인 신석기및 청동기 문화와 접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주변 부족들을 통합해 나가는데,
 우리가 익히 알려진 웅녀설화 역시 그러한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요 임금이 즉위한 50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삼국유사는 제왕운기보다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다소 늦게 보고 있는데, 큰 맥락에서 볼때 기원전 2300년을 전후하여 고조선이 부족 연맹체의 성격으로성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단군의 기록은 제왕운기에

 "은 나라 8년 을미년에 아사달에 입신하여 산신이 되었다"
고 나왔는데, 이 기간에 대해서는 최고 지배자가 단군이라는 칭호를 쓴 기간이라고 이해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다만 규원사화등의 내용을 중시하여, 고조선이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1038년에 거쳐 47대에 거쳐 다스렸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기자가 동래하였다는 기원전 1100년을 전후해서는 단군이란 호칭되는 왕이라는 호칭을 쓴 과도기적 기간으로 보고, 조선이 중국의 제도를 받아 들이는 과정에서 기자 동래설의 설화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기자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실린내용과 같이 고조선의 서쪽 제후국인 고죽국에 분봉되었다고 이해되어, 단군의 왕위세습엔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이 된 나이가 1908세로 나왔는데, 아마도 이 기간이 단군왕조의 전 기간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단군왕검은 제정일치사회의 최고 통수권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에 오른 최초의 제사장은 선진문화와 선민사상을 받아들여 우리문화의 초석을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熊족과 虎족등을 통합하여 우리민족의 근원을 내리게 하였다.
 즉 단군왕검은 이름이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부족연맹체를 이룬 사람의 극 존칭어였던 것이다.

 

 

고조선사에서 기자조선이 갖는 위치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실제 기자가 고조선의 건국시조였다고 보는 견해는 거의 없어지고 있다.
 기자東來설은 일제 강점기때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하고 폄하하여, 뿌리깊은 우리민족의 장긍심을 말살하고 식민적 감성을 주입시킬 목적으로 강조된 주장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이러한 식민사관을 배제하더라도, 기자동래설은 역사적 사실과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다소 일치하는 면이 있어 고조선사의 주요 맥락으로 여전히 받아들여 지고 있다.

 특히 중국은 동북아 공정의 일환으로 고조선을 중국내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로 보며, 실질적인 고조선의 건국시조를 단군이 아닌 기자로 보고 있다. 
 요약하자면 단군은 신앙의 대상일뿐 정치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은 몇가지 합리적인 역사적 논증과,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고고학적 근거가 뒷받침 하고 있다.

 우선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등에 실려 있는 단군에 대한 내용을 살펴 보면 국가를 이루는 최소의 법제와 사회조직이 발견되지 않고있다.
 또한 요동방면 일대의 청동기나 고인돌이 기원전 12세기경, 즉 기자가 고조선에 건너왔다는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점도 고려되었다.
 물론 청동기중 오래된 것은 기원전 15세기까지 소급되고, 또 홍산문화 일대에는 기원전 20세기 까지로도 볼 수 있는 청동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발굴성과가 청동기의 등장시기를 올릴 수는 있지만, 국가가 성립하엿다고 보기엔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곳이 역사상 매우 치열한 전쟁터여서 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파괴된 탓도 있을것이다. 그렇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역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도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조선의 건국시기와 결부시켜 홍산문화를 연결하는데엔 다소의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기자란 어떤 인물인가?
 기자는 은말주초의 사람이며, 은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왕의 숙부이며 성인군자로 칭송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주왕은 폭정과 세금수탈로 백성들의 원성이 매우 높았다. 이를 보다 못한 주왕의  다른 숙부 비간이 주왕에게 폭정을 중단할 것을 3일이나 간하였다. 이때 주왕은 "성인의 심장에는 7개의 구멍이 있다는데 이를 확인하겠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숙부였던 비간의 가슴을 갈라 버렸다.
  이에 기자는 화를 피하기 위해 미친척 하며 남의 집 종이 되었으나, 곧 주왕에게 발각되어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이후 다행이도 주왕실이 혁명을 성공시켜 은왕실을 통합하고, 기자는 주무왕으로부터 조선국을 분봉받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는 당나라시대 역사서인<배구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었는데 주나라에서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 되었고, 한나라가 3군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현도, 낙랑,대방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기자 동래설에 대한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한다.
 즉 기자가 분봉받았던 지역은 고조선 전체가 아니라, 고조선안에 지역국가였던 고죽국에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고조선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요동반도가 배제되어 있다는 것도  유의해 봐야 한다.
 더욱이 일연은 고죽국을 현재의 해주지역으로 보고 있었다. 이것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반도로 보던 평양지역으로 보던, 고조선 외곽지역에 해당한다. 한나라가 다스렸다는 3군역시 한나라 관료가 직접 파견된 지역이었던 요하 방면의 지역이라고 해석한다면, 기자조선은 고조선과 주왕실의 완충지대 역활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기자동래설에 대해 회의적이다. 주왕의 혹독한 정책을 고려 해 볼 때 기자가 잡혔다면, 결코 살아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주왕국이 영토를 확장하여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설화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즉 고조선은 15세기에서 12세기경 국가적 체제를 완전히 갖추고 요서지역의 갈석삭과 대릉하 방면으로 진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주왕실과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은왕실의 유민역시 대거 유입되었을 것이다.

  특히 은 왕국은 동이족 계열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막연하게 나마 동족의식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주나라는이미 고공단보때부터 오랑캐의 풍속을 버렷다는 기사가 나올정도로 은나라의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시켰으며, 자신들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은나라를 세웠던 동이족 계열에 대한 박해도 심했을 것으로 보는데, 이에따른 동이족 계열의 고조선 유입은 충분히 고려되야 한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기자를 숭상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箕字族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고조선 토착민과 상호교류가 있어, 고조선 고유의 풍습과 기자족의 계율이 혼합되어 8조법이 탄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8조법은 기자족 순수창작품이 아니라 고조선 고유의 풍습이 주가 되어 만들어진  만민법적 질서체제였던 것이다.

 이상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기자동래설은, 은주교체기때 은의 유민들이 고조선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설화이며 단군계열의 왕위세습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
 더구나 단군조선은 은의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하였으며, 고대 연맹 왕국으로서의 성격이 보다 분명해졌다.

 그리하여 이제는 더이상 기자조선이라는 용어는, 최소한 우리 역사서적에 지워져야 할 것이다.
 이제는 고조선을 분류할때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할 것이 아니라 고조선 초기 중기 후기의 3기로 분류할 것을 제안한다.
 즉 기존의 기자조선은, 부족연맹에서 은의 정치 문화를 받아들여 고대 연맹국가로 주요변화를 겪는 고조선의 중기인 것이다.

 

 

조선왕 侯 그는 누구인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왕호를 사용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의 고대사서를 종합해 보면 朝鮮侯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후'라는 단어가 사람을 칭하는 건지 아니면 제후를 뜻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다면 조선후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동이전에 나와 있는 내용을 살펴 보자

 옛날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퇴하자 연이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어 동쪽으로 땅을 침략하려 함을 보고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병사를 일으켜 연을 치고 주나라의 왕실을 받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 大夫인 禮가 간하여 중지하되었다. 이에 예를 사신으로 보내어 연을 설득하니 연이 계획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三國地 魏志 동이전

 여기서 후는 제후가 아닌 조선왕의 이름이거나 호(呼)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기록에서 否(부), 準(준)등의 이름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만약 후가 주에서 책봉한 제후였다면 周國 제후라는 표현을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
 또한 그는 주나라가 분열하고 연나라가 성립하던 시기에 왕을 칭하였음으로, 대략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 사이가 된다.
 그리고 연나라를 칭하기 위해 병사를 일으켰다는 기록이나 대부라는 관직을 지닌 예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군사적 강국이었으면서 국가적인 관료조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 예는 연나라와의 전쟁보다는 화친정책을 통하여 국제간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을 정도로 외교술도 발달했었다.
 
 그런데 다음의 기사를 보면 과연 대부 예라는 인물의 외교정책이 성공적이었는가란 의문이 생긴다.

 
그  뒤(조선과 연의 평화조약이 체결 된 뒤) 자손들이 교만하고 사나워졌음으로 연은 장군 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2천여리의 땅을 빼앗고 滿藩汗에 이르러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드디어 약해지고 말았다.

 즉 고고선은 연과의 싸움에서 패해 2천여리나 되는 땅을 잃고 말았다. 물론 2천여리라는 거리에 대해서는 정확히 800km가 아니라, 750km쯤 되고 이 역시 진개가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두 배 정도 부풀려 보고 했었을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 경우 실제로 고조선이 잃은 서변 영토는 1천여리쯤인데,  그곳은 갈석산 인근의 난하에서 요동반도 서쪽경계인 요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군사적, 경제적 손실을 상당히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대부 예가 조선후의 뜻을 받들어, 연을 선제 공격하였다면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 가란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 예의 외교정책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적절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동이전 기록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조선후의 자손들, 즉 단군계열의 왕족들은 더욱 강성하여 졌다. 교만하다는 것은 부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나워 졌다는 것은 국방력의 신장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나라는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라도 후방의 조선에 대해 반드시 평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조선후때에 선제 공격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전쟁의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구수의 차이와, 전체적인 군대의 무장정도에서 조선이 뒤떨어져 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국가들은 아직 왕조가 유지되고 있는 주왕실을 받들고 오랑케를 토벌한다는 대의를 내세워 상호 경쟁해 나갔다. 따라서 조선이 주왕실을 받들고 기자의 후예로 자처한 것 역시, 춘추시대의 국가들과 경쟁하기 위해서이지 결코 사대 모화사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조선후는 분명히 단군계열의 왕이었다. 그가 정말 기자의 후손이었다면 조선후라는 명칭대신 기자 후나 기후등으로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더구나 삼국지는 철저하게 중국적 시각으로 쓰여진 것이어서,  기자의 자손을 궂이 조선후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조선후는 연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운 담대한 왕이었다. 비록 그 계획은 평화조약의 성립으로 귀결되었지만, 그것은 고조선이 연과 대등한 힘과 질서를 가지고 있엇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국력의 대등함이 진개의 동진에 의해서 깨어지고 말았지만, 연나라가 소멸 하고, 진이 중국을 통일하고 다시 진이 멸망하는 그 혼돈의 기간에도 고조선은 동방의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그 같은 강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후의 팽창정책이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왕 否와 고조선의 위기

   연나라와 평화조약을 체결한 고조선은, 안정적인 주변정세를 바탕으로 부와 국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주왕실이 붕괴되고, 연나라가 현재의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고조선에서도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고조선의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 기자의 후예인 조선 후가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병사를 일으켜 연을 치고 주나라의 왕실을 받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그 大夫인 예가 간하여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그 뒤 자손들이 교만하고 사나와졌음으로 연은 장군 진개를 보내 조선이 서방을 공격하여 2천 여리의 땅을 빼앗고 滿潘汗(만반한)에 이르러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드디어 약해지고 말았다.
 진이 천하를 통일함에 미쳐서는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왕 否(부)가 섰는데, 진나라가 조선을 습격할까 두려워 하여 책략으로 진에 복속하였으나, 조회는 하지 않으려 하였다.


 
조선왕 부에 관현한 기사의 해석은 비교적 다양하다. 우선 그가 기자의 후예인 箕否(기부)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단군 부로 볼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기자가 동래하였을 때 왕조교체가 일어났는가의 문제와, 또 기자의 동래설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의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이미 설명한 봐와 같이, 은 주 교체기 시절 동이족의 고조선 유입과정에서 성립된 설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두번째 문제는, 연 장군 진개의 동방진출을 어떻게 보느냐와 과연 어느시대에 이루어 졌는가이다.
 현재까지는 조선왕 부 시절에 일어났다고 보고 있지만, 이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조선왕 부가 있던 시절은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기원전 221년)하였던 기원전 3세기 말이었다. 비록 연이 진나라에 늦게 통합되었다 하더라도, 부왕이 집권하였던 시기는 이미 연나라가 쇠퇴기로 접어 들었던 시기이다.
 이런 연나라가 고조선에 대규모 워전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따라서 연나라가 전국 7웅을 형성하고 맹위를 떨치던 기원전 4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마지막으로 연나라가 차지한 고조선의 서쪽 영토가 어디까지였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그런데 위의 내용과 같이 연이 차지한 영토는 만반한에 제한되었다.  요동에 까지 중국의 국경선이 동진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진시황 때의 일임은 구태어 언급하지 않아도 사서에 명시되어 있다.
 현재 중국축은 몽염이 중측한 만리장성의 끝이 압록강변에 있는 국내성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 근거로 국내성 하단부에서 만리장성과 같은 기법인 판축기법의 성벽일부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하지만 국내성과 만리장성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을 가진 유물이 더이상 발견되지 않아, 이상의 논의는 타당하지 않다. 고구려 초창기에 중국식의 성곽 조성기법을 모방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더 타당하다.

 아무튼 진나라의 중국통일은 고조선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고조선은 주변상황에 대해 신중하게 판단해야만 했다. 더구나 만리장성의 중측으로 인해, 고조선의 서변이 상당히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것은 연나라가 요서 지방을 공략하여 차지한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위험한 사건이었다. 요동은 고조선의 도읍인 왕검성과 매우 근접된 곳이어서, 자칫 진나라와 전면전을 벌여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조선왕 부는 골육지책을 썼다. 즉 진나라에 형식적으로나마 봉건관계를 맺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나라의 공격에 대비해야만 했다.
  조선왕 부의 외교전략은 "책략으로는 복속하였으나,조회는 하지 않으려 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잘 알 있다. 상대와 무턱대고 전쟁을 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힘을 우선 알아봐야 하는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살펴야, 책략이 서고 전쟁의 승패를 올바르게 판가름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왕 부의 외교전략은 1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으며, 시간 벌기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왕 부의 판단은 정확하였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을 이룩하였지만, 기원전 206년 통일 달성 15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중국은 또다시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조선왕 부는 잃어버렷던 조선의 영토를 상당히 회복시켰다.
 그리하여 고조선은 새로운 증흥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조선왕준 (上) -위만조선의 성립과 철기문명의 도입


 진나라의 멸망과 楚,漢의 대립은 고조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초와 한의 전쟁이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전쟁을 피해 국경지대로 몰려들고 있었던 유민들이었다.
  하지만 준왕은 이들 유민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여 주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수한 문화와 기술을 적극 받아 들였다.

 이와 관련된 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조선왕) 부가 돌아가고 그의 아들 준이 왕이 된지 20여 년에 진항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제, 조의 백성들이고통을 괴로워 하다가 차츰 도망하여 준에게로 갔다. 준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 와서 살게 했다.
 한이 노관으로 연왕을 삼게 되자 조선과 연은 추수로 경계를 이루었다.
 관이 반란을 일으키로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망명하여 호복차림으로 동쪽으로 추수를 건너 준왕에게 가서 항복하고 서쪽 국경 지방에서 살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망명하는 사람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설득하였다.
 준왕은 위만을 믿고 사랑하여 박사로 삼고 규(圭)를 주어 100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추수와 浿水(패수)는 같은 강을 가르키는 말임, 즉 중국식으로는 추수이며 우리식으로는 패수로 칭하였다고 생각됨]

 한나라가 중국을 재 통일한 것은 기원전 202년, 진나라가 멸망한지 4년만의 일이다.한(漢)이 중국을 통일한 뒤 건국과정에 적극 참여했던 노관(盧)은 이성(異姓) 제후 7명의 한 사람으로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고 흉노(匈奴)로 망명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노관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연나라 사람으로 표현된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위만은 노관과 같이 흉노로 들어가지 않고 호복차림, 즉 오랑캐의 옷을 입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던 것일까? 그것도 단독 망명이 아니라 1천여명의
집단을 포함한 대규모 망명이었다.
 현재 이 사건들 두고, 위만과 그가 이끄는 무리는 고조선계 유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즉 과거 연나라 시대 진개가 2천여리 땅을 빼앗으면서 연나라에 소속되었던 고조선인이, 진한 교체기의 혼란기에 대거 고조선으로 망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관이 왜 한나라에게 반기를 들었는지도 추측 가능하다. 그는 흉노와 고조선 유민의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고조선 역시 그동안 이민족으로서 받아야 하였던 각종 불이익과 차별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새나라를 건국하는 주축세력이 되어, 기존에 가졌던 열악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고조가 통일을 완수하고, 본격적으로 지방의 반발 세력에 대한 토벌에 나서자 노관과 위만은 제각기 살길을 모색해야 되었다. 호복차림을 하였다는 것도, 위만이 중국민족과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조선왕 준도 위만에 대해서는 다른 망명자집단 이상의 배려와 신뢰를 보내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 위만 집단이 고조선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격게되엇던 가장 큰 변화는 철기문명의 본격적인 도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철기문명 시작시점에 대해서는, 고고학 발전에 의존하는 기원전 2~3세기 설과, 역사적 상황에 근거하는 기원전 7~8세기설등이 있다.
 그것은 중국에서도 가장 이른시기에 철기문명을 시작한 연나라의 연원도 그 이상 소급되지 못한다는 배경도 작용하고 있다.
 일부 극단적인 견해로는 기원전 15세기 설도 등장하긴 하는데, 그만큼의 앞선세기에 철기가 존재하였다는 공식적인 자료는 아직 제시된 봐 없다.

 아무튼 고조선도 연나라와 접경하면서 활발히 교류하였고, 또 대규모 전쟁도 있었던 만큼 철기의 보급도 대단히 빨랐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하여 고조선의 철기문명은 기원전 7~8세기경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정도 보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만약 고조선의 철기문명이 그렇게 이른시기부터 적극적으로 보급되어, 군대를 무장시킬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는 연의 장수 진개에게 2000여리의 땅을 빼앗기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철기문명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군대를 무장시킬 정도에 이른것은 위만의 망명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조선왕 준이 위만의 무리를 최전방에 100여리의 봉토를 주고 박사라는 관직과 함께 규[圭:천자가 제후에게 주는 상원하방(上圓下方;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 모양의 의 옥(玉)]를 내린 것도, 위만이 갖고 있엇던 무력적 수단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만은 준왕위 신뢰를 저버리게 된다. 위만은 중국의 유민들을 계속 받아들여, 고조선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고조선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왕조교체가 일어나게 되었다.
 고조선의 왕조교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와 사기에 모두 전하고 있는데,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좀더 상세하게 나와있다.

 "위만은 거짓을 꾸며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한나라 병사가 열 길로 쳐들어 오고 있으니 (왕검성)으로 들어가 숙위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결국 돌아와 준왕을 공격하였다. 중왕은 위만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 좌우의 궁인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를 건너 한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하였다."

 
결국 청동문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준왕세력과, 철기 문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위만이 싸움에서 위만이 최종 승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왕조의 교체뿐만 아니라 문화의 교체도 동시에 이루어 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준왕이 남하는 한반도 선사시대에 대대적인 질서재편을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위만의 왕조교체는 단순한 왕위찬탈 아니라 역사적이고도 문화사적인 대 혁명이었다.

 

 

 

고조선(6) 준왕의 남하와 한반도의 변화

  준왕이 남하에 대해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짤막하게 한줄로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갖는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비파형청동검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한반도에 새로운 청동검 문화가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군장사회에서 본격적으로 국가사회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준왕의 남하에 대해서는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서는 그가 정착한 지역을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조선의 성립이 평양에서 이루어졌다는 설과 함께, 준왕의 남하에 대해 가장 전통적인 학설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준왕의 한반도 남하설에 대해서는 현재에도 많은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요동지방에서 평양으로 남하하였다는 주장을 누차에 걸쳐 한 봐 있다.

  그것은 우선 평양지방에는 전통적으로 단군에 관한 설화가 전승되고 있는데, 아마도 준왕의 남하와 韓國건설에 관련하여 최초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전환되는 시기와 발생지점이 평양인근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며, 그 외에 고인돌과 미송리식 토기등 고조선의 지표로 사용되고 있는 유물의 공통적인 분포지역이 평양이라는 점도 준왕의 평양도래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더구나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가 통합한 마한과 백제가 통합한 마한의 기록의 전혀 별개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준왕이 평양지역에 마한국을 세웠다는 주장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위지의 내용을 인용하여 준왕의 마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의 왕 준이 궁인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의 한 땅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고 불렀다.

 또한 마한은 마읍산에 있다고 하였는데, 마읍산은 평양인근에 있는 산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것은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할 무렵 마읍산을 병참기지로 삼았던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와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준왕의 남하로  당시  辰國으로 대변되던 한반도의 군장연합체역시 국가적 연합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한, 진한, 변한이다.
 

 

위만의 교체와 단군왕조의 이주

 고조선은 아시아 국가중에서는 가장 오래동안 국가를 유지하였던 왕조이며, 최대 2000년에서 최소 1000년에 이르는 단일계열의 왕위계승은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만큼 고조선의 존재는 단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북아와 중국에 이르기 까지 상당한 영향을 가져 왔다.

 우선 동아시아의 문화가 획일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동북아 고유의 문화를 지켰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또한 고유의 청동기 문화에 중국적인 정치체제를 적용시킴으로 인해, 이후 전개되는 동북아 민족들의 다양한 활동에 정치성을 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위만의 교체역시 철기 문화를 보급하고, 본격적인 국가 경쟁 체제를 촉발시켰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지만, 단군 왕조가 와해 된 것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극단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위만조선역시 기자조선처럼 요서방면만을 위임받아 다스렸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나 사기등의 역사책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왕조교체가 일어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단군왕조의 와해는 단군계열의 집단 이주를 촉진하였다. 가장 먼저 준왕이 남하하였으며, 또 일부 집단은 북쪽의 부여와 연결을 꾀하기도 하였다. 특히 부여와 연결을 꾀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해모수를 들 수 있다.

  해모수에 대해서는 가공의 인물이거나 북부여의 제사장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긴 하지만, 해모수역시 단군계열의 인물중 하나로 봐야 한다.
  그것은 삼국유사 고구려 본기에 <단군기>의 내용을 인용하여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가까이 하여 해부루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연은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사통하여 낳았다는 부연 설명을 하며, 주몽과 동부여의 시조 해부루를 어머니가 다른 형제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해모수 역시 단군계열의 인물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해부루가 동부여를 건국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꿈속에 천제가 나타나 장차 이곳에 내 자손이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기에 피해가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천제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웅이라고 볼 때, 고구려 시조 주몽역시 단군계열의 계승자가 된다. 그렇다면 해모수는 분명한 단군계열의 왕조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부여(기원전 100년 전후로 추정) 및 고구려 건국(기원전 37년)과 위만조선 교체기(기원전 194년)와는 시기적으로 150년 가까이 차이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여역시 기원전 4세기경에 건국한 나라임으로, 단군계열이 집단적으로 이주했다고 해서 곧바로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여가 고조선의 속방이었는지 아니면 봉건 제후국이었는지 그 성격은 정확하지 않지만, 위만 교체기부터 독립국의 지위를 확보해 나갔다.
 비록 단군계열의 이주민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대해 준다고 해도, 국가 건국같은 민감한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해모수와 주몽으로 양분되는 단군계열의 국가 건국역시 그만큼 늦어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북쪽에서 이 같은 변화를 보였다면, 남쪽으로 온 준왕은 그 다음세대에 까지 왕위를 물려줄 만큼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세대에 와서 돌연 왕위계승이 중단되고, 이후의 기록은 전혀 나와있지 않다. 다만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은유적인 표현만이 기록되어져 있을 뿐이다.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고, 그후 아사달로 돌아와서 은거하여 산신이 되엇는데, 나이 1908세이다."

  여기서 아사달에 돌아왔다는 표현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아사달은 최초의 수도 왕검성에 이은 두번째 수도로 수도였던 곳이다.
  다만 일연은 고조선 최초의 수도 왕검성을 평양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古語에서 평양은 넓은 곳, 혹은 서울을 뜻한다는 것을 미쳐 파악하지 못한데서 온 해석상의 오류이다.
 
 아무튼 아사달은 백악산이 있는 곳인데, 이 백악산이 어디를 뜻하는지 정확하지 못하다. 그러나 백악산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다는 표현으로 보아, 이것이 준왕 자손의 최후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로 일명 마의태자로 불리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이, 금강산에 은거하엿다는 기록등을 들 수 있다.

 아마도 준왕이 세운 마한역시 비슷한 절차를 밟지 않앗을까 싶다. 즉 위만조선에 의해 흡수 통합되면서, 그의 아들은 적에게 굴복하기 보다는 백악산에 은거하는 길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남하한 단군계열을 영원히 역사에서 단절된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왕족의 혈통만을 놓고 본다면 단절이라 할 수 있겠지만, 一家로 본다면, 여전히 존립하여 위만과 통합이후에도 토착세력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것은 먼 훗날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이어지며, 다시 여기서 발생한 유민집단은 진한으로 건너가 신라탄생의 기반이 된다.
  그리고 단군왕조의 신화적인 종말은, 오히려 삼한세력이 각자 정통성을 주장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군장의 권력을 한층 강화시켜 주었다.

 그런의미에서 볼 때 단군왕조의 종말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두세기 동안의 고난의 시기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단군계열의 정당한 계승자가 고구려가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어차피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우리민족이 세운나라임으로 궂이 고구려를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고구려는 분명 우리민족에게서 크나큰 자긍심을 느낄만한 업적을 이룬 국가이긴 하지만, 고구려가 우리민족역사의 전부는 아니지 않겠는가?
 우리는 오히려 고구려만을 집착한 나머지, 보다 넓고 다양하였던 우리역사의 일부만을 보고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왕 위만 , 고조선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개척하다.

 위만, 그는 단군계열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고조선 초유이자 마지막의 외부왕조를 세운인물이다. 그를 봉건제후 혹은, 중국에서 조작한 인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지만 전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기록을 볼때 그리 설득력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튼 위만은 무리 1000여명을 거느리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였을 정도로, 연나라에서도 상당한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 천명의 주측은 물론 군인이었겠지만, 군인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는 기술공들을 비롯한 학자와 행정관료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들이 처음 머문 곳이 패수를 건너 진나라 옛날 빈 땅 상하 障塞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 장새에 대해서는 요서설과 요동설, 그리고 압록강 이남설등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유적이 확인된 가장 동쪽이 요동지역을 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요하강 유역이라 본다.

 이후 위만은 과거의 연나라와 제나라 조나라등의 유민들을 대거 포섭하여, 단군조선을 교체할만한 힘을 쌓고 그것을 실행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이 갖고 있는 대규모 군사작전수행능력이나 철제무기들은, 이제막 세형동검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고조선 주변국가들을 압도하였다.

 중국에서도 위만 왕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요동태수를 파견한다.  그런데 요동태수의 파견지에 대해서는 현재 요동반도에 파견되었다는 주장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가 요동전체를 관할하였다기 보다는 요하강 유역에 치소를 만들고 고조선의 무력화를 시도하였다고 본다.

 특히 요동태수는 한반도내 군소국가및 위만왕의 고조선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세력들을 부축여 중국과의 봉건관계를 시도하였다.
 이에 위만 왕은 고조선내 군장들의 동요를 막고, 나아가 주변의 크고 작은 국가들을 통합하여 나갔다.
 삼국유사나 사마천의 두 기록 모두가 진번과 임둔을 복속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위만조선은 서쪽의 요서 지방에서부터 남쪽의 평양일대까지 장악하는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眞番(진번)은, 중국의 戰國(전국)때, 연나라를 침략하여 진시황이 얻은 땅임으로 요서지역이고, 臨屯은 정확치 않으나, 훗날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기록 등으로 볼 때 요하강 유역이 아닌가 추측된다.

 위만 왕이 차지한 영토에 대해서는 사기에는 수천리에 이르고 삼국유사에는 사방천리로 나와 다소 다르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조선의 중심지로 부터 사천리로 해석할 경우, 직선거리로는 2천여리가 되므로 두 기록은 크게 차이난다고는 보여지지 않은다.
 즉 위만 왕은 고조선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개척해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군장세력을 통제하는 고압정책을 실시하여 나갔다.

  하지만 위만 왕이 이러한 팽창정책과 고압정책은, 고조선 내의 유력한 군장세력과 한반도 중남부의 군소국가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비록 위만 왕은, 한반도및 동북아와 중국의 국제무역을 통제하여 막대한 부와 힘을 축적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훗날 고조선의 최후를 앞당기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왕 우거시대 한나라와의 외교관계

 右渠(우거)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위만의 손자였으며,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거론되어진 기록이 없다.
 위만조선은 3대 걸쳐 약 100년간 유지되었는데, 이것을 본다면  우거 왕의 선대 제왕의 통치기간역시 결코 짧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거의 기록되어진 역사가 없다는 것은, 선대 왕 시절 한나라의 팽창을 견제하며 극도의 쇄국정책을 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우거 왕대에 이르러 좀 더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우거왕 대에 가장 중점을 두었던 정책은, 한나라 체제에 불만을 품거나 과거 고조선 계열의 유민들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또 한반도 전체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교도보적 위치에 있었던 이점을 최대한 살리려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진번 곁의 진국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해도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햇다고 한다. 이 경우 진번과 진국은 이웃하고 있었던 나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진번과 다른길로 가야하는 진국으로도 해석 될 수 있어 여전히 논란은 있다.
 아무튼 辰國(진국)은 당시 한반도 군장국가들을 대표하고 있었던 세력이었으며,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서는 위만조선을 거쳐가야만 했다.


  이것은 팽창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던 중국의 한나라로서 우려할만한 상황이었다. 고조선의 팽창을 그대로 둘 경우 자칫 동북아 일대 전체를 통합하여 한나라에 상당한 위험을 줄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이에 한나라는 涉何(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고조선의 입장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史記(사기) 기록에는  '달래고 타이르다'로 표현되어 있으나, 아마도 봉건관계를 요구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거가 끝내 조서를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는 다음의 기록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양국의 입장차는 확인하였지만,  고조선으로서는 한나라의 봉건요구가 부정적만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봉건관계 요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협상의 여지는 남아있었고 당장 양국간의 대규모 무력사태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전기미를 보이던 양국간의 관계는 섭하의 전혀 예상밖의 행동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고조선은 朝鮮裨王 長으로 하여금, 섭하를 국경선의 浿水(패수)서 배웅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역시 중국과 전쟁할 뜻이 없음을 보여주는 최고의 예우였다. 그런데 섭하는 조선비왕 장을 기습적으로 살해하고, 강을 건너 요새로 달아나고 말았다.

 더욱이 이 사실을 전해받은 한무제는 오히려 섭하를 칭찬하여 요동동부도위로 삼아, 고조선을 복속시킬 움직임마저 보여주었다.
  이것은 고조선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수 없는 문제였다.  아마도 비무장상태이거나 수행원만을 대동하고 나왔을 조선비왕 장을 살해한것도 중대한 문제인데, 거기에 전통적으로 고조선의 주요 영토인 요동땅을 복속시키려 한다는 것은 분명한 도발행위였다.

 이에 고조선은 패수를 건너가, 섭하를 기습하여 그를 척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곧 한나라에 대한 선전포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와같은 우거왕의 결단에 대해 무리한 도발행위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漢나라의 명백한 주권침탈행위에 대한 정당한 선전포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비왕 장은 그 직책과 호칭에서 볼 수 있듯이, 위만조선의 왕족으로서 패수지역을 분봉받은 인물이었다. 더구나 사신을 배웅하기 위해 비무장과 다름없는 상태로 온 인사를 살해하고, 그 살해한자를 옹호하여 요동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는 것은 漢나라가 고조선을 복속시킬 의도가 있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양국간의 전쟁은 이제 돌이킬수 없는 수순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사기의 기록에는 죄인을 모집하여 고조선을 공격하였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사마천이 지나칠 정도로 중국적 시각에서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양국간의 운명을 판가름할 전쟁에서 언제 배신할지도 모를 죄인집단을 중무장시켜 보낸다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이 같이 서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후 양국간에 벌어지는 전쟁에서 한나라의 치욕적인 패배를 최대한 합리화 시키기 위한 미봉책이라고 판단된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 고조선을 침략한 한나라의 군대는 그들이 자랑하는 정예의 군단이었다.
 그리하여 양국은 최전성기 시절, 서로가 자랑하는 최정의 군사로 상대하게 된 것이다.

 

 

우거왕의 對漢전쟁과 고조선의 운명

 위만조선은 역사적인 기록을 토대로 보면 기원전 194년에 성립되어 기원전 108년까지 3대 86년간 존속된 나라이다.
 위만조선은 한때 동북아 전체에 영향력을 미칠만큼 강성하였으며,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통일한 漢(한)나라와 당당하게 맞섰다.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위만조선에 파견되었던 한나라의 사신 섭하가 조선비왕 장이란 인물을 살해한것이 발달이 되었으며, 더욱이 한나라가 섭하를 요동도위로 임명하는등 위만조선을 복속시키려는 한나라의 의도가 표면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때 위만조선이 국경을 넘어 섭하를  척살시킨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마침내 양국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무제는 산동반도 일대의 齊(제)땅에서  5만 7천명의 군사를 징발하였다. 이어 좌장군 순체는 요동방면으로 육로군을 이끌고 진격하였고,  누선장군 양복은 수로군 7000명을 이끌고 발해방면을 향해갔다.

 삼국유사에는 누선장군이 70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에 도착하였다고 하니, 왕검성은 현재 평양이 아니라 발해방면에 있는 요동반도 안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우거 왕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주력군으로는 좌장군의 육로군을 우선 막고, 누선장군이 이끄는 수로군에게는 직접적인 타격을 줄 계획을 세웠다. 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즉시 나와 공격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우거왕이 이끈 군사의 숫자는 최소한 1만명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요동방면에서도 한나라의 주력군을 수비해야 되었음으로 총병력은 최소한 2만에서 3만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누선장군과 우거왕의 접전은 우거왕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누선장군 양복은 수로군 대부분을 잃고 산속에 숨어 목숨을 부지해야만 되었다. 더구나 좌장군 역시 패수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위만조선의 서군을 격파하지 못한체 차츰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렇게 전쟁이 상황이 다소 한나라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위산을 보내어 고조선을 회유하고자 하였다.

  이때 우거왕은 한나라에게 항복을 청하면서 태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현대적 관점에서 보는 항복이나 굴욕외교가 아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하여, 보다 우위의 관계에 있을 때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봉건관계를 체결하고자 하였던 의도로 보여진다.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 봉건관계는 국제간에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외교관계일 뿐이며, 이점을 과대포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후 태자가 중무장한 군사 1만명을 대동하였다는 내용을 보더라도,  한나라에대해 무력도발을 중지하라고 요구하는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하였다.
 이에 위산 및 좌장군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지만, 우거왕의 태자가 이를 거부하고 패수를 건너가지 않아서, 결국 양국간의 停戰(정전)협정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렇게 정전협정이 무산되자 한무제는 위산에게 책임을 물어 사형시켰으며, 양국은 또다시 치열한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1차 접전과 다소 상황이 다르게 진행되었다. 좌장군 순체가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여 마침내 패수에 진을 치고 있던 고조선의 상군을 격파하였고, 양복역시 왕검성의 남쪽방면에서 진을 치고 압박을 가하였다. 이렇게 되자 우거왕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수성전에 돌입하였다.

 왕검성 최후의 전투, 그것은 무려 1년간이나 진행되었다. 이 길고 지루한 전쟁에서 어느 한쪽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였다. 성밖에 진을 치고 있었던 한나라 군사는 추위와 질병에 시달려야 했으며, 성안의 고조선군은 굶주림과 군수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성안에는 주요 귀족세력들 및 토착세력에 의해 쿠테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위만조선은 고조선 역사상 가장 넓은 영역을 개척하긴 하였지만 완벽하게 중앙통제가 이루어진 나라는 아니었다.
 여전히 지역주의나 부족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농경지의 황폐화는 지역세력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결국 전쟁에서 이긴하 하여도 실질적으로 남는것은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제남태수로 제직한 바가 있던 요서지역의 토착세력 공손 수가 전권을 일임받은 것도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다. 한나라에서 파견된 군사들과의 전쟁은 장기전으로 갈수록 고조선에게 유리하였으나, 공손 수 세력과의 전쟁에선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많았다.
 양쪽 모두 장기전과 지구전을 할 경우 결국 물량이 풍족한 세력이 이기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원전 108년전 어느 날 고조선의 相관직을 맡았던 路人과 한도를 중심으로 이계지역에서 상직을 맡고있던 참과, 장군 왕겹등이 모의하며 우거왕에게 항복을 권유하게 되었다.

 여기서 相이라는 관직은, 한자의 뜻을 헤아려 볼 때 외교직에 종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우거 왕은 이들의  항복 주청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러자 한도와 왕겹은 도주하여 한나라에 항복하고 말았으며, 노인은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계지역의 상 참만은 그대로 살려 두었다.

 우거왕이 왜 참만을 살려두었는지는 기록에 나와있지 않아 추측할 수 조차 없다. 하지만 이것은 우거왕 최대의 결정적인 실수가 되었다.
 이계지역의 상 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살해하고 말았다. 그러나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고조선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 비록 위만조선에 의해 왕조가 교체되긴 하였지만, 여전히 단군계열세력은 건제하였으며, 이 땅을 지키고자 하는 고조선의 열의 또한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이계지역의 상 참은 급히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해야 되었으며, 왕검성은 최후의 일인까지 한나라와 맞서 싸웠다.
 더구나 우거왕의 대신이었던 成己(성기 혹은 성이(已))가 고조선의 부흥운동을 전개하자 공손씨 세력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좌장군은 이간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바로 우거왕의 아들 장을 부축여 성기장군을 살해하도록 만든것이다.
 그리고 우거왕의 아들은, 지난 날 우거왕을 배신하였던 노인의 아들 最(최)와 함께 성기 장군을 謀殺(모살)해 버렸다.

 그리하여 기원전 109년에서 시작된 전쟁은 1년이 넘는 기나긴 전쟁끝에 108년 여름 혹은 기원전 107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서야 끝나고 말았다.
 비록 고조선의 최후는  내부분열에 의한 자멸로 볼 수 있으나, 이간책역시 주요한 전략이라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년이 넘는 전쟁에서 빚어진 국토의 황폐화와 대량의 유민발생등은 이러한 내부분열을 촉발시켰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고조선은 패배하였다. 이후 전개되는 참전장군들에 대한 한나라의 조치등을 중요시 여겨, 한나라 역시 소득이 없는 승리였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패배는 엄연한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패배주의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역사에서는 어느나라나 패배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승리의 역사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역사가 가고 하나의 역사가 오는 과도기적 시점에서, 고조선은 최후까지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이것은 결코 부끄럽거나 감추어야 할 역사가 아니다. 결국 고조선은 우린라역사와 우리민족의 시원이 되었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들이 개척한 역사 위에서 살고 있으니, 고조선은 유구한 역사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한사군의 설치에 대해-삼국사기와 수서를 중심으로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과연 그 전쟁의 승자는 누구였는가?  단순한 결과론적 측면에서 본다면 고조선이 항복선언을 했음으로 한나라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조건적인 항복이 아니었다.
   고조선내의 주화파였던 참, 장군 왕겹, 우거왕의 아들 장항, 노인의 아들 최 등...은 모두 한의 작은 食邑을 받고 한의 제후에 봉해졌는데 비해 누선장군등 조선을 공격했던 장군들은 모두 극형의 처벌을 받았다.

 이와같은 처벌은 전쟁에서 패한장수에게 내려지는 형벌이다.
  더구나 사기의 저술자 사마천 역시 “양군이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에 봉해진 자가 없었다“라고하여 한군의 패배를 우회적으로나마 표현하였다.

하지만 한나라로부터 분봉받은 고조선내 주화파역시 석연치 않은 최후를 맞이 하였다. 漢書17권등에 단서가 있는데 <경무소선원성공신표 5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平州侯로 봉해진 왕겹은 한서의 연표에 따르면 1,480호로 봉해졌다.

사기에는 그가 제후가 된 이유에 대해 조선장수로서 한나라병사가 쳐들어오자 항복한 공이라 적고 있고, 기원전 108년 4월 봉후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하였고 후사가 없었다 기록하고 있다.

荻菹侯 漢陰(한도, 혹은 한음)에 대해서는 그 공이 조선의 재상이자 장군으로서 한나라 병사가 포위하자 항복한 것이고 받은 식읍은 540호이다.
기원전 108년에 봉읍을 받고 17년간 다스리다가 기원전 91년에 죽었는데 한서 역시 그가 후사가 없었다 기록하고 있다.

溫陽侯 崔도 마찬가지로 한서에는 (열양강후 최)로 기록되어 있으며 朝鮮相 路人의 아들이다. 로인은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가장 먼저 항복했는데, 도중에 죽어 그 아들이 물려받은 것이다.
서기전 107년에 임명되었다가 103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후사가 없이 죽었으며 그의 侯國도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홰청후 니계상 참에 대한 기록은 더욱 의문이다. 홰청 역시 위만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투항한 공으로 식읍1천호를 받았다고 사기에 적고 있는데, 서기전 108년에 봉읍되어 기원전 99년에 죽었는데 사인은 病死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달아난 포로를 숨긴죄로 하옥되어 옥사하였던 것이다.
제후로 봉한 인물이 옥사하였다면 단순한 죄라기 보다는 역모죄로 인해 태형또는 장형을 당했을 가능성이 많다.

우거왕의 아들 張降은 하동에 속해있는 其지역에 제후로
봉해진 후 조선의 왕자로서 한나라가 포위하자 항복한 인물이다.
기원전 107년3월 봉후되어 기원전 105년에 사망한다.
나라를 들어 받친후  2년을 더살다 죽었다. 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으로 하여금 모반케 했다가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나라가 고조선 영토내 설치하였던 4군은 어디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사료를 채택하고, 관련유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나오지만, 크게 한반도 서북부설과 요동설 요서설등으로 나뉘게 된다. 본 내용에서는 수서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수양제의 진공로를 바탕으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 보고자 한다. 

 한4군에 대해서는 한서, 사기등에는 한3군, 한4군 등으로 , 당서에는 2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역시 한서를 인용하였을 땐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으로 부르다가 위서와 통전등의 내용을 인용하였을땐 현도, 낙랑, 대방의 3군만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나라 역사에 영향을 미친 것도 현도, 낙랑, 대방의 3군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기서 수서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하기위해 612년 국경북부 ?郡 臨朔宮에서 112만 대군을 좌군12군, 우군12군으로 나누어 평양성에 모이게 한다. 그런데 이  진격로에 한사군의 이름이 나온다.

수서 <양제본기>에 좌군의 7군은 요동도를 거쳐 제8군은 현토도,
제9군은 부여도 제10군은 조선도,
제12군은 낙랑도 평양으로 집결하라 되어 있다.
제4군은 임둔도, 제11군은 대방도를 거쳐 평양으로 집결한다고 되어 있다. 수나라 양제가 정해준 진격로에는 현도,낙랑, 임둔이 등장하고 있다.
좌군 12군은 낙랑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약, 낙랑이 정통적인 학설대로 대동강 유역이 낙랑이라면 탁군에서 낙랑(평양)을 거쳐 다시 평양으로 집결하는 모순이 생긴다.
  더구나 임둔도나 대방도가 평양 남쪽에 있다면, 고구려의 남쪽방면에서 평양을 거쳐 집결해야 되는데, 이것은 당시 벌어졌던 고당전쟁의 상황과 맞지 않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수양제는 110만의 대군으로 요동성을 공략하였지만, 수개월이 지나도록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다른 방책을 강구하였다.
 즉 요동방면에 있는 고구려 성들을 포위하여 고립시킨 후 별동대 30만명을 편성하여 평양성을 직접공격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때 각군의 진격로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좌익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오고, 형원항은 요동도로 설세옹은 옥저도로 나오고, 신세웅은 현도도로 나오게 하는등 총 9개 부대를 편성하였는데 이들의 집합지는 압록수 서쪽으로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최소한 낙랑과 현도는 압록강 서쪽에 위치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한나라가 관리를  파견한 치소와, 평양에 있는 낙랑국이 별도로 존재하였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이상의 기록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현도, 낙랑 , 임둔등 한나라에 속해있던 군들은, 요동방면에 있으면서 동북아 진출의 교도보 역활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군현의 성립과 조선유민의 이동에 대해

 기원전 108년 요서지방과 한반도 북부및 동북아일대를 재패하였던 고조선은 한제국과의 전쟁과 지배계층의 분열등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또한 고조선의 멸망과정에서 중국과 적극적인 우호관계를 주장하던 친중국파가 주도적인 역활을 하게 됨으로써, 고조선 멸망 이후에는 주요지배계층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고조선 유민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대단히 단편적인 역사적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어, 그것을 추적하는 일은 대단히 힘들다.

 우선 한제국과 1년이 넘는 전쟁과정에서 유민이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예측은 당연한 것이지만, 과연 얼만큼의 규모로 어떻게 발생하였는지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전쟁 피난민외에, 친중국 정책에 반발하여 발생한 정치적 목적의 유민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친 중국세력은 고조선의 마지막왕 우거를 살해하고 한제국에 투항할 정도로 모화사상(慕華思想)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친 중국 세력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것이 우거왕의 대신이었던 성기장군이었다.
 하지만 성기장군의 노력역시 또 다시 주화파의 암살에 의해 실패되었다. 더구나 주화파의 핵심세력은 우거왕의 아들 長(장)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지도부의 친중국 세력에 반발하여 대거 정치적 유민이 발생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세력이 해모수와 양산세력이었다.

  해모수를 고조선의 유민 세력으로 보는 이유는, 삼국유사 북부여기에 나오는 내용이 단군신화에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구려기에는 단군이 유하를 만나 주몽을 낳은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해모수는 단군계열의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주몽의 탄생시기가 기원전 58년으로 되어 있어, 고조선의 멸망연도와는 50년차가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적어도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웠다면 최소 20대 중반정도는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학적으로도 70대 중반에 자손을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기록에도 주몽을 낳을 당시 해모수가 대단히 늙은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연관성은 있다고 보여진다. 
 아니면 해모수계의 왕족이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는 없으나, 주몽과 해모수가 혈연적으로 연관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이렇게 해모수세력이 북쪽방면으로 이동하여 북부여를 세우고, 후일 고구려로 계승발전되었다면 알평세력은 남쪽으로 내려갔다.
 알평세력은 고조선의 유민집단임이 해모수 세력보다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삼국사기에 양산을 비롯한 고허, 진지, 대수, 가리, 고야촌등 6부는 고조선의 유민임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알평세력은 이들 6부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으로 알천 양산촌을 세우게 된다.
 또 명활산에 내려와 고야촌을 세운 촌장 호진은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온 것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져 있다. 그렇다면 호진세력은 고조선내 동쪽방면에서 이탈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閼川 楊山村(알천 양산촌)등의 6부 지명은 신라의 고유 지명인지 아니면 고조선의 지명을 붙인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는 이들이 고조선의 유민인 만큼 알천 양산촌같은 지명은 고조선의 지명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또한 신라사람역시 낙랑이라고한 것등을 보아도, 고조선의 유민 집단이 남하하여 신라건국의 중심세력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듯 고조선 유민세력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진출하여, 우리역사의 주요고대 국가를 세우는데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즉 이들은 한제국에 예속되어 사는 것보다, 당당하게 주권을 가진 국가에서 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조선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것은 완전한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민족통합 전쟁에서 신라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그 역사를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당제국과의 정치적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단지 그것만 가지고 신라의 위업을 평가절하 해서는 안될 것이다.

 국제간의 협력이나 공동전쟁작전 수행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것이며 외교적인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주권운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것은 어쩌면 지나친 피해의식이 아닐까?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 중 하나였던 신라는 비록 영토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지만,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키고자 하였던 당제국의 대공세를 막아내고 이땅의 역사와 주권을 온전하게 지켜낸 위대한 대업을 이룬 나라이다.

 그리하여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동등하게 평가돼야 할 것이며,  고구려의 대륙진출이나 백제의 해양진출에만 고무되어 신라의 역사를 깍아내리는 일은 반드시 지양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