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古史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8:16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

  고조선의 중심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논고에서 재요령성설(在遼寧省說), 이동설(移動說), 재평양설(在平壤說)이 제기된 이래, 논란이 거듭되어 오고 있다.
 현재 남한학계에서는 이 세 가지 설이 모두 제기되고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그 동안 고조선 중심지가 남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재요령성설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돌연 1993년 가을 평양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었다면서,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평양에서 발굴된 ‘단군릉’에서 나온 인골의 연대측정을 통해, 그 기년이 서기전 3011년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평양의 ‘단군릉’은 모줄임고임 천장의 석실무덤이고, 그 곳에서 출토된 금동관도 삼국시대의 것임을 볼 때, 이 무덤의 주인공 역시 고구려 때 사람으로 보인다.
 더구나 북한의 발표를 인정한다고 해도,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기원전 2300년경과 인골의 상환연대인 기원전 3000년사이에는 무려 700년이라는 시차가 있어, 이것을 고조선의 성립과 연결시킬 수는 없다.
  
  이렇듯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이에 관한 문헌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나마 남겨진 단편적인 기록이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의 지명 중에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 많다.

  가령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를 규명하는 논고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지명 중의 하나가 패수(浿水)이다. 그런데 역대의 사서에 등장했던 패수는 일찍이 정약용이 지적했듯이 여러 개였다.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백제 초기의 북쪽 경계인 패하(浿河)는 예성강이었으며, 고려시대에도 예성강의 일부가 패강(浿江)으로 불렸다.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에 자리잡았던 시기의 패수는 대동강이었다. 또한 요동의 개현(蓋縣) 지역에 흐르는 어니하(於泥河)를 패수라 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패수라고 비정될 수 있는 강은 요하나 대릉하등 여러 개 상정된다.

 이런 현상은 패수가 원래 고유명사였다기보다, 강을 만주어에서 ‘畢拉’, 솔론(索倫)어에서는 ‘必拉(벨라)’, 오로촌어에서는 ‘必牙拉(삐얄라)’라고 했던 예에서 알 수 있듯, 강을 뜻하는 고대 조선어의 보통명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밖에 고대사회에서는 주민 이동에 따라 같은 지명이 여러 군데에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문헌상에 보이는 지명의 위치 비정에 다양한 설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실증상의 문제에 덧붙여 각 시대마다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커 상반된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이 논란이 분분한 고조선 중심지 위치를 비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적으로 보다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또한 요하 유역으로 보는 설과 평양으로 보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선 실물 유적으로 남아 있는, 진·한대의 만리장성의 위치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요동의 양평(襄平)이라고 하였다.

  이 때의 요동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도 이견이 분분해, 오늘날의 북경(北京) 북쪽에 흐르는 난하(金河)가 당시의 요하이고 난하 동편이 바로 ≪사기≫에서 전하는 요하(遼河)라는 주장이 재요령성설을 주장한 논자들에 의해 견지되어 오고 있다.
  그래서 이 입장에서는 진·한대 장성의 동쪽 끝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 부근의 갈석(碣石)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후대의 것으로, 진·한대의 장성은 지금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다. 실제로 오늘날 요령성 서북부 지역 일대에서 진·한대 장성의 유적 일부가 뚜렷이 남아 있다.

  구체적으로 요령성 지역의 장성의 유지는 두 개의 줄기를 이루며 동서로 길게 뻗쳐 있다. 북쪽 성벽의 유지는 화덕현(化德縣) 동쪽에서 영금하(英金河) 북안을 거쳐 부신현(阜新縣) 동쪽에 이르며, 남쪽 성벽은 객라심기(喀喇心旗)와 적봉(赤峰) 남부를 거쳐 북현(北縣)에 이른다.

  능선을 따라 전개되는 긴 장성의 자취는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장성의 자취가 이어지는 군데군데에 요새가 존재했고, 그곳에서 연·진·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장성의 유지가 요하에 이른다면, ≪사기≫에서 전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요동은 현재의 요동이며, 자연 요동군의 동쪽에 있었던 낙랑군은 요동 혹은 평양지방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수경주 水經注≫에 반영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에 관한 고구려인의 증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이 분명해 보인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북위 사람 역도원(麒道元)은 ≪수경 水經≫이라는 지리서에서 전하는 패수의 흐름에 관한 기사에 의문을 품고, 마침 그 무렵에 북위의 수도를 방문했던 고구려 외교사절에게 패수의 흐름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를 통해 얻은 지식에 의거해 그는 패수에 관한 기술을 ≪수경주≫에 남겼다.

  이에 의하면 고구려 수도는 패수의 북쪽에 있었으며, 그 곳에서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 자리를 지나 서쪽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당시의 패수는 대동강을 지칭하며, 그 무렵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 평양시 동쪽의 대성산성 아래에 있는 안학궁터 일대였다.

  이곳에서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오늘의 평양시를 지나게 되는데, 강의 남쪽 남평양 지역에 한대(漢代)의 중국계 유적과 유물이 집중적으로 존재한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이 곳이 분명하다.

  낙랑군 조선현은 서기전 108년 한이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중심부에 설치하였다. 낙랑군은 서기전 108년 이후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기까지 위치에 변동이 없었다. 조선현의 위치가 평양지역이었다고는 하지만,  위만조선의 왕검성과 앞 시기의 모든 시기에 걸친 고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비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면 고조선의 중심지는 시종 평양 일대였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우선 문헌상으로 보이는 조선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조선에 대해 언급한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기록은 ≪전국책≫ 연책(燕策)과 ≪사기≫ 소진전이다.

즉 연나라 문후(서기전 361∼서기전 333)에게 소진이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라고 했다. 이를 통해 서기전 4세기 중반에는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요 세력으로 당시 북중국 지역의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산해경에는 조선이 발해만 북쪽에 있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고, 사마천의 사기역시 고조선의 도읍은 요동군 험독현에 있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사기의 기록은 위만조선 시기에 집중되어 있어, 위만조선의 중심지 역시 요동군 험독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위략 魏略≫의 조선에 대한 기사와 통한다. 또한 ≪위략≫에서는 조선이 연과 각축을 벌이다가, 연의 소왕(昭王 : 서기전 331∼279) 때에 진개(秦開)의 침공으로 서쪽 영토 ‘2,000리’를 상실했다고 하였다.

  이에서 ‘2000리’는 논란을 안고 있는 문제이지만 ≪사기≫ 조선전에서도 고조선이 연에 영토를 상실당했다고 전하므로, 고조선은 이 무렵 서쪽 영토를 상실하고 연과 요하강을 경계로 마주보게 되었다. 

 그런데 서북한 지역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은 에임부분(決入部)을 지닌 세형동검이다. 이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상한은 서기전 3세기로 여기거나, 근래 이를 서기전 4세기 후반까지 올려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분포상의 북한계가 서기전 3세기 초 이후 고조선과 연의 요동군과의 경계였던 청천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북한 지역에서의 세형동검 이전 단계의 주요 금속기 유물로는 비파형동검을 들 수 있는데, 출토된 수가 매우 적고 함께 출토된 유물 또한 빈약하다.


  출토된 유물에서 보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시종 평양이었다는 설명과 부합되지 않는다. 서북한 지역에서 출토된 빈약한 비파형동검 문화단계의 금속기 유물로는, 서기전 4세기 이전 시기에 요동 지역에 세력을 뻗쳐 연과 각축을 벌였던 정치세력의 존재를 이 지역에서 상정하기 어렵다.

  비단 유물의 양적인 면 뿐만 아니라, 만약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라면 요동 지역은 그 변방이므로, 적어도 몇몇 유물의 양식상,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인 서북한 지역의 것이 오래된 것이고 그 영향을 받아 상대적으로 새로 만들어진 유물이 요동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런데 비파형동검 등 금속기 유물양식은 요동지역의 유물이 평양지역의 유물보다 앞선 시대에 만들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분포상의 북쪽 한계가 청천강이라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동검을 특징적인 유물로 하는 금속기 문명을 영위했던 서북한 지역의 정치세력은 B.C. 3세기 초 이후에 성립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정치 세력은  기원전 194년 준왕이 세웠다는 북마한의 성립시기와 일치 한다.

 즉 기원전 4~3세기 걸쳐 고조선은 세형동검 문화를 창조하였지만,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한 위만의 세력확장과, 기습적인 쿠테타에 밀려 평양에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세형동검의 문화가 북쪽으로 올라가지 않고 남하하게 된 것도 위만정권이 성장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기원전 4세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요동 지역을 포괄했던 고조선은 중심지는 현재의 평양이 아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일단 세형동검의 원류인 비파형동검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남만주 요령성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요령성 일대의 비파형동검 문화의 상한은 서기전 10세기 전후 무렵으로 여겨지는데, 이 문화는 다시 요령성 내에서 지역별로 일정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양식에 따라 공병식(尻柄式), 비수식(匕首式), 단경식(短莖式)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공병식과 비수식은 요동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았다.

 토기 양식에서도 대체로 요하선을 경계로 미송리식 토기와 변형 미송리식 토기는 요하 이동지역에서 출토되고 있고, 삼족기(三足器)는 요서지역에서는 풍부하게 출토되나 요동지역에서는 소수만 확인된다.

 무덤양식에서도 고인돌무덤〔支石墓〕이 요동지역에서만 보고되고 있어 참고가 된다. 문헌상으로 볼 때도 앞에서 말했듯이 요동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다. 한편 비파형동검 문화기 때에 요서 지역에서 활약했던 족속은 산융(山戎)과 동호(東胡)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하 이동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추정을 좀더 진전시켜 보면, 서기전 3세기 초 고조선과 연과의 첫 충돌 당시 연군의 진출선이었던 만번한(滿潘汗), 즉 오늘날의 해성현(海成縣) 서남쪽과 개현(蓋縣)을 잇는 일대 지역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고조선의 등장 시기

 고조선이 역사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언제인가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건국 기년을 기원전 2333년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기년은 우리 선인(先人)들이 고조선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는 각 시기의 역사의식을 반영한다는 면에서 사학사적인 의의는 크지만, 고조선사 자체에는 실제적인 의미가 없다.

 조선이라고 할 때, 그것은 ‘조선’의 고대역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 말할 때 이에서 논급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는 한 사회가 국가 형성단계로 접어들기 위한 기본적인 역사적 조건이 마련되기 시작했을 때부터이다.

 그것은 농경과 금속기의 사용이 어느 정도 진전된 이후부터이다.
 한반도와 만주 일원에서 농경과 금속기가 보급된 시기를 볼 때 가장 빠른 지역인 요서(遼西)·요동(遼東) 지역에서도 그것은 서기전 1500년경을 넘지 못한다. 그보다 이전 시기인 신석기 단계의 사회에 있었던 어떤 집단을 고조선과 연관시켜 논급하기는 매우 어렵다.

   농경과 동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어느 시기에 고조선이 역사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이고, 고조선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으로 흔히 ≪산해경 山海經≫과 ≪관자 管子≫를 들고 있다.

  해경≫의 해내북경(海內北經)에서 조선의 위치에 관해 “조선은 열양 동에 있고 바다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 기록하였다. 이 기사에 의거해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의 위치를 비정하는 고찰들이 있어 왔다.

  그런데 ≪산해경≫은 고대 중국의 지리서로서, 춘추시대에서 전한대에, 즉 서기전 8세기에서 서기전 1세기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쓰여진 것들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조선은 기원전 8세기경의 고조선인지 아니면 기원전 2~3세기 조선인지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관자〉의 경우갑편(輕重甲篇)과 규도편(揆度篇)에서 춘추시대의 제(齊)와 조선간의 교역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관자>의 내용이 기전 7세기 제의 재상인 관중(管仲)의 저술이라지만, 실제 주된 내용은 전국시대(서기전 402∼서기전 221)의 제나라인들의 저술로서, 이를 관중의 이름에 가탁한 것이다.

  따라서 ≪관중≫에서 언급한 제와 조선과의 교역에 관한 언급은 기원전 5세기 이전부터의 어떤 전승에 의거했을 수도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에 의거해 조선이 언제부터 제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졌는지를, 바꾸어 말하자면 조선이란 실체가 언제 역사상에 등장했는지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고조선에 관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 기록은 ≪사기≫와 ≪전국책 戰國策≫ 등 한(漢) 초의 사서이다. ≪사기≫ 소진전(蘇秦傳)에 의하면, 소진이 연(燕)의 문후(文侯 : 서기전 361∼서기전 333)에게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방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누번이 있으며.”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연의 국세와 대외관계를 논할 때에 주의할 만한 세력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늦어도 서기전 4세기 중반에는 조선의 실체가 북중국 지역 사람들에게 뚜렷하게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책에서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런데 고조선에 관한 사실을 그 중 많이 기술한 ≪사기≫ 조선전의 기사도 주로 위만조선에 관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앞 시기의 고조선의 역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문헌자료의 한계로 인해 고조선의 역사상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고조선 중심지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 우선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 자체가 분명해야 하는데,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그 동안 고조선사에 대한 연구는, 단군신화에 대한 고찰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중심을 이루어왔다.

 
 

비파형 청동검 시대


 고조선은 분명 실존한 고대국가이다. 그러나 어디서 언제부터 어떻게 존재하였냐고 물으면 각기 다른 대답을 한다. 고조선은 무려 2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단 하나의 문자도 남기지 못하였으며, 단 한기의 왕묘도 발견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과연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 이전에 과연 국가의 형태로 존재하기나 하였는지를 의심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위만정권조차 중국의 주변역사로 취급하거나, 혹은 고조선과 별개의 문화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비록 부족하기는 하지만 고인돌과함께 비파형청동검은, 고조선이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단일한 체제와 문화를 이루며 살았다는 주장에 상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고인돌은 비록 고조선이 고대통일왕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부족연맹체로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며, 최고통치자라 할지라도 대표의 자리일뿐 절대적 권력을 가진존재가 아님을 시사해 준다.
 이와 함께 청동기의 발굴은 당시 고조선이 중국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매우 뛰어난 수준의 문화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무기의 하나. 검신의 형태가 비파와 비슷하며 중국 북동부의遼寧省(요녕성)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어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이라고도 한다.
  한반도에서는 부여(扶餘) 송국리(松菊里) 유적에서 완전한 유물이 수습된 것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함경도지역을 제외한 거의 전지역에서 약 30여 자루가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서지방에 있었다는 주장도 재기되고는 있으나, 이것은 우리민족의 기원자체가 중국의 소주민족에서 출발하였다는 논리로 비약될 소지가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고조선의 대제국론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비약적인 논거는 신중하게 고증해야 할 것이다.

 
 비파형 청동검의 가장 큰 특징은 조립식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에 있다.

 칼자루부분[劍把部(검파부)]은 ㅗ자형태로 내부가 비어 있어 검신과 결합하도록 조립식으로 되어 있다. 주로 돌널무덤·고인돌 등에서 출토되며, 돌널무덤은 시베리아·만주·한반도 등지에 산재하여 있다. 따라서 당시 중국 북동지방과 동일한 문화권이 형성된 가운데 고조선의 문화권이 확장됨에 따라 한반도까지 유입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고조선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시기는 기원전 10세기이며, 지역은 대릉하 최상류에 있는 조양이다.
 비파형동검의 초기 유물이 요서지방이라 할 수 있는 대릉하 상류지역에서 발견된것은 크게 세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그곳이 홍산 하가점문화나 중국의 황화문명과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 고조선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비파형동검이 발생하였다.
 또한 청동검이 실제 무기로 쓰였는지 아니면 부장품과 같은 상징적인 용도로 쓰였는지에 따라, 그곳이 고조선 중심지였는지 아니면 주변 지역이었는지 판단할 수 있다.
 물론  청동검의 의기나 부장품 같은 상징물로 쓰였다고 해서, 곧 그곳이 최고수장이 있던 고조선의 중심지라고는 할 수 없다. 즉 고대에 있어서는 하나의 국가내에서도 주변 선진문화의 유입경로에 따라, 전혀 다르지만 한층 더 세련된 형태의 선진문화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선진문화의 발생은 종종 왕조의 교체로 이어지기도 한다. 고조선역시 기자조선의 성립이라는 대 변혁을 겪은 것으로 보아, 비파형 청동검의 유입은 고조선의 역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9세기 접어 들어서 비파형 청동검은 대릉하 중 하류지역까지 확산된다.  이러한 문화적 확산은 주로 동남지역으로 이루어 지는데, 기원전 6세기에는 심양지방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에는 한반도까지 남하하게 되는데, 그러나 5세기에는 동북아 지역에서도 철기가 제작되던 시기로, 요동과 요서지역에서의 청동검 문화는 거의 사라지게된다.

 또 한반도 서북지역역시 청동검은 거의 사라지고 기원전 3세기 이후부터는 세형동검으로 완전하게 대체하게 된다.
 이와같은 주요변화를 주목해 볼때,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지방에 있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며, 기원전 3세기 이후에도 꾸준히 청동검이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은 여전히 부장품으로서의 상징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파형 청동검 문화는, 고조선이 단일한 문화와 체제에 있었던 고대 왕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다. 비록 고조선이 통일국가였는가 아니면 부족연맹체로 존재하였는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겠지만, 고조선의 각 지역 족장들은 서로가 경쟁적으로 고인돌을 만들고, 무덤안에 비파형 동검을 묻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반드시 절대적 권력의 소유자가 지배하는체제가 위대하고 강력한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민주정이 그러하였고, 로마의 집정관 제도,중세의 봉건제도나 현대의 지방자치제도역시 절대적 권력을 부정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고조선 역시 단군왕조라는 체제아래 유기적으로 결속되어 있었고, 단군왕조역시 절대적인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간의 적극적인 우호관계를 통해 통치해 나갔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연맹체제의 성격상 거대한 왕묘나 대규모 도시의 출현은  상당히 늦어지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고인돌 왕국 고조선

 고조선의  문화적 특징을 대변하는 유물로는 크게 세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고인돌이며 둘째는 비파형 청동검, 세째는 미송리형 토기이다. 이중에서 고인돌은 중국의 묘제와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고조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무덤양식이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고인돌의 기원이 난하유역에서 발생한 것이며, 따라서 고조선은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고조선은 영토는 난하 동쪽의 동북아 일대에 걸쳐 있으며, 동시대에 하나라나 은나라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고인돌의 기원과 전파과정을 살벼봄으로써 고인돌 왕국으로서의 고조선의 특징을 규명하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발견된 곳이다. 한반도에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인돌만 무려 4만기가 넘으며, 이것은 전 세계 고인돌의 40%에 해당하는 양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7만여기의 고인돌 중 절반에 가까운 4만여기의 고인돌이 한반도에 집중해 있다. 남한에 3만여기, 북한에 1만여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 수를 7만∼8만기까지 늘려 잡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황해에 인접한 요령·산둥·저장 일대에서 3백50여기가 있지만, 이곳은 모두 동이족의 활동 무대였다. 일본에서는 한반도와 인접한 규슈지역에 5백50여기의 고인돌이 발견됐지만 그 형태의 다양성이나 분포도에서 한반도에 크게 못미친다.
 또한 일본 규슈[九州]지방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죠몽[繩文]시대 말기에서 야요이[邇生]시대 초기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한국계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는바, 일본 야요이문화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증명한다.
 고인돌에서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민무늬토기와 붉은간그릇 등 토기류와 청동기가 부장된 경우도 있어 역시 모두 한민족의 유품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조선은 동북아의 중심지였으며, 전 아시아 지역으로 그 문화적 영역을 확대하여 넓혀 갔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은 자세히 보자면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후자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이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는데, 이를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한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치를 근거로 볼때 신석기시대에 이미 고인돌이 사용되었다 보이며 이후에 고인돌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기가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움무덤[土壙墓]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요즘 학계의 일반적 판단이다.

 한편, 고인돌이 만들어진 문화적 연원에 대해서는 한반도의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 황해도·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 곳에 수백 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어 분포하는 놀라운 경우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전라북도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한편,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우선 고인돌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계급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뜻하며, 본격적으로 지배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 그 상징적인 조치로 대형묘소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고조선 지역중에서 고인돌이 가장 이른 시기에 발견되는 것은 요동반도 끝에 자리잡고 있는 곽가촌이며,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결과 기원전 20세기에 해당하였다.  그러나 곽가촌의 고인돌은 매우 앞선 것으로 아직 본격적으로 고인돌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고인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연대는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해서 인데, 이에 따라 고조선의 고고학적 상한연대도 기원전 15세기로 보고 있다. 또한 이 시기 발견되는 고인돌이 분포지역 대부분이 요동반도 서쪽에 위치해 있어, 고고학적으로 고조선이 요동반도에서 발생하였다고 보는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묵방리 고인돌 모습

 묵방리 철토 토기


 한편 한반도 내에서는 다소 늦은 시기인 기원전 10세기경부터 고인돌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유적지가 평안남도 개천시에 있는 묵방리 고인돌이다. 묵방리 고인돌은 개석식 고인돌에 해당되며 무덤방 구조를 가지고 있어 다른 고인돌과 차이점이 많다.
 무덤방의 양쪽 측면과 앞면은 벽돌크기의 돌을  차곡차곡 정교하게 쌓았으며, 마지막 한면은 크고 넙적한 돌 하나로 막았다.

 이러한 유형은 주로 묵방리 일대에서만 발견되며, 특히 이 유적에서는 다소 변형되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송리형 토기에 속하는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기자 동래설과 거의 일치하는 시기이다. 즉 고조선은 초기에 요동지역에서 발전하다가 기자세력의 고죽국 건설과 함께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하였다는 중심지 이동설에 부합된다.

 또한 대동강 유역에는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이르는 고인돌도 다소 발견되는데, 늦은 시기로 갈수록 개석식 형태에 무덤방을 갖추고 청동검이나 변형된 미송히형 토기라 할 수 있는 묵방리형 토기가 함께 출토된다.
 이 역시 위만 조선이 성립하면서, 고조선 왕 준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였다는 주장에 주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반도 남부에서도 무덤방을 갖춘 기원전 3세기 이후의 개석식 고인돌이 발견되어야 하지만, 이를 만족할만한 고고학적 발견은 아직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고인돌의 성립시기만을 가지고, 이동설이나 요동 중심설 혹은 한반도 북부 중심설을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인돌은 고조선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무덤양식이라는 것이다.  비록 메소포타미아문명이나 이집트 문명과 같은 초대형 분묘가 발생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고조선의 지배계급의 특징이 절대 권력층이 아니라 부족연합체였다는 것에 기인한다.
 또한 고조선 역시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강상무덤과 같은 대형 묘제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강상무덤은 수장급무덤이긴 하지만, 지배계급의 최정점에 있는 왕의 무덤으로 보기엔 부족하다.

 그리하여 아직은 막연한 예측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고조선의 영토 어디엔가에는 지금까지 발견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단군왕조의 무덤이 역사의 빛을 보기를 기다리며 지하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그날이 오고서야 고인돌 왕국 고조선은, 우리에게 보다 분명한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고조선의 사회·경제

 고조선 후기와 위만조선 때에 박사(博士)·경(卿)·대부(大夫)·상(相)·대신·장군 등의 관직명이 보이고 있어, 구체적인 성격은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중앙통치 조직의 형성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 중에는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닌 이들이 있었다. 한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과 의견이 맞지 않자 휘하의 2,000여 호를 이끌고 남한지역으로 내려간 조선상 역계경(歷谿卿)과 같은 이들이 그러한 예이다.

  한과의 전쟁중에 전선을 이탈해 왕검성이 함락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조선상 노인(路人), 니계상(尼谿相) 참(參), 상(相) 한도(韓陶[陰]) 등도 그러한 인물로 여겨진다. 상(相)은 일정한 세력집단의 대표로서 중앙정부에 참여했던 이들의 관명으로 여겨진다.

  위에 열거한 인물들은 토착 고조선인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들 집단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일정 범위에서 작용했겠지만, 각 집단은 내부적으로 자치적이었을 것이다. 역계경 등의 집단적인 이탈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해준다.

  중앙정부의 왕실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집단들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의 장이었다. 이러한 집단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토대는 당시 각 집단이 지니고 있던 공동체적 관계였다.


  고조선사회는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한반도에 있어서 다른 어느 군장사회보다도 문화상의 발전이 현저히 앞서 있었다. 이러한 고조선사회의 일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것으로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남아 있는 팔조법금(八條法禁)이 전한다.

 그 가운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3가지조목은 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② 사람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배상하게 하고 ③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시적인 복수전투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중재에 의해 싸움을 해결하는 사회의 법칙이며, 이로써 농경사회의 중앙집권적인 정치권력이 성립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법금은 미개사회에 공통되는 만민법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이러한 금법을 통해서 고조선과 같은 부족연맹적인 사회에 있어서는 이미 권력과 부(富)의 차이가 생겨나서 모권사회(母權社會)로부터 부권사회(父權社會)로 이행,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 가족제도가 성립되고 재산에 대한 사유 관념이 생기면서 형벌노비도 발생된 것을 볼 수 있다.

 철기의 사용과 더불어 경제적인 생활은 청동기시대보다 훨씬 발달하였으나 증가된 부는 사회지배층에 점유되어 빈부의 차이는 점점 확대되어 갔다.

 

[고조선의 문화]

 농경생활을 한 고조선시대는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성립되었다. 청동기문화의 유물로서는 청동검(靑銅劍)·청동모와 각종 말갖춤[馬具]·거여구(車輿具) 등이 있다. 그리고 뒷면에 특수한 기하학적 잔금무늬[細線紋]가 있고 2개의 꼭지가 달린 거울인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과 복식용으로서 허리띠에 쓰인 동물형띠고리〔動物形帶鉤〕도 있다.

  이와 같이 고조선인들은 독특한 형식의 청동기를 변형·발전시켜 사용했는데 매우 예리하게 만들어져 세형동검(細形銅劍)이라 불리는 청동검과 청동꺾창[靑銅戈]은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양식으로 유명하다.

  또한 대륙과 만주에 있어서의 정세변화에 따라서 일어난 중요한 사실은 철기문화(鐵器文化)의 전래이다.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나타나게 된 철기문화는 만주에서 다시 북방계 청동기문화와 섞이면서 한반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철기문화와 이와섞인 청동기문화의 전래시기는 BC 4세기에서 3세기에 걸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문화가 한반도로 파급되어 온 경로는, 요동반도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 유적으로 미루어보아 압록강 중류를 거쳐 청천강·대동강 상류유역으로 들어와 한국 서북지방에 정착된 듯하다.

  이러한 철기문화의 영향으로 철제농구를 사용함으로써 농업경제가 크게 발달하였으며, 철제무기도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고조선 전역의 지배계급은 말이나 청동제마차를 타고 청동제뿐만 아니라 철제의 검(劍)과 투겁창 등 새로운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고 석기에 대신해서 괭이·보습·낫 등 발달된 농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철기문화의 보급은 고조선 지방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주거를 한 움집 바닥에는 온돌장치를 하고 가옥은 지하 움집에서 지상의 목조가옥(木造家屋)으로 변해 갔다. 무덤의 축조도 달라졌는데 넓은 구덩이[土壙]에 시체를 묻는 널무덤[土壙墓]과 2, 3개의 항아리를 맞붙여서 널[棺]로 쓰는 무덤의 2가지 양식이 새로이 행하여졌다.

  따라서 한국에는 한족(漢族)의 철기문화와 스키타이 계통의 청동기문화가 들어와 대동강유역은 금속문화(金屬文化)의 중심이 되었다. 이 두 계통의 금속문화는 계속 남하하여 종래의 민무늬토기문화[無紋土器文化]와 혼합되면서 일본으로 전파, 일본의 야요이문화[彌生文化]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