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서기 490년 백제의 대륙전쟁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8:43

서기 490년 백제의 대륙전쟁

 백제는 과연 대륙을 진출하였을까? 정말 대륙을 진출하였다면, 우리기록 어딘가에는 그 흔적이라도 남아있어야 되지 않을까? 
  삼국사기는 김부식에 의해 편찬되었지만,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의해 정립된 삼한고기등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하였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본적인 역사적 서술은 신라위주의 역사서를 따랐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영향으로 인해 광개토대왕릉비라던가 장수왕릉비등 당시의 기록과 다소 다른 부분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백제의 대륙진출에 관한 기록역시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5세기접어들면서 고구려 신라등과 치열하게 통일전쟁을 치루기 있는 상황에서 과연 중국으로까지 군사를 보내고 영토를 관리할 수 있었겠냐는 주장역시  설득력이 있다
.

 그렇다면 과연 서기 490년 백제가 북조(=중국 북조지역에 세워진 나라를 통칭하는 말)를 상대로 벌인 전쟁은 어디에서 벌어진 것일까?
 
* 연두색으로 표시한 고구려 영토는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백제의 대륙진출을 알려주는 역사서

 만약  우리역사서에만 그러한 기록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들만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역사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대륙진출에 관한 기로들이 중국역사서인
 [송서]백제전을 비롯하여 [남제서], [양서], [남사]등 다양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남제서 백제전은 6세기 초 양나라의 소자현이 직접 보고 듣고 접한 자료나 사건들을 기록한 사서로 그 신뢰성이 매우높은 역사서이다. 기록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해(490)에 위군 다시 수십만의 기병들로 백제의 지경 공격했다. 백제 모대(동성왕)는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4명으로 하여금 위군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495년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경오년에 험윤이 저희들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침범해 오므로 사법명 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요격하여 크게 이겼고 그들을 베어 적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습니다.' ]]

또한 백제의 동성왕은 이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장군들을 광양태수, 청하태수, 광릉태수, 성양태수로 봉해달라고 남제에 청했다.
 동성왕이 부하 장군들의 임명을 요청한 지역인 광양은 오늘날 북경 부근 대흥현 또는 밀운현, 청하는 북위 때에 하남성 상현 부근, 광릉은 광소성 회음현 동남 지역, 성양은 강소성 또는 하남성 신양현 부근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 전쟁은 북위가 해상을 통하여 백제를 공격한 것으로, 중국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벌인 전쟁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북위는 유목민족이 세운국가로 해상작전을 매우 기피하였으며,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유목국가가 수십만이나 되는 기병을 바다로 이동시킨 경우는 없다. 
 따라서 서기 490년의 전쟁은 중국땅에서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주장이다. 문제는 어디냐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이 외교문서에 언급된 '험윤'이란 명칭이  그들이 주장하는 고구려 내의 영토라고 보거나, 아예 고구려를 낮추어 부르던 이름등으로 해석하고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490년의 전쟁은 고구려와 백제간의 전쟁이 돼, 결국 백제의 대륙진출설은 설득력을 잃고 만다.

 하지만 이 주장역시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험윤' = 고구려라는 주장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주장대로라면  위군이 백제의 국경을 침범하였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북위를 고구려의 역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문제될 것이 없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몇 몇 단어만을 가지고 짜 맞추기한 것으로 합리적인 해석이라 할 수 없다. 

 대륙백제설을 부정하는 마지막 주장으로는 역사기록 자체에 대한 조작론이 있다.  조작론은 크게 두가지 주장으로 나뉘어 진다. 우선은 동성왕이 남제로부터 왕위를 인정받고 외교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허위과장으로 외교문서를 보냈다는 주장과, 남조에 성립된 국가들이 북위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문서형식으로만 백제의 대륙진출을 기술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이미 지나간  일들을 과장하여 기록한 정도로 어떻게 상대국을 견제할 수 있겠는가? 또한 시종 외교적으로 우월한 입장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관점에서 볼 때,  동성왕의 허위과장외교문서를 그대로 채택하였다는 것도 모순이다.
 오히려 남조정권은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북위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백제의 대륙 군사기지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단 한줄의 기록, 그 속에 담긴 역사

 이와관련하여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서도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에 백만의 강병으로 남으로  오월(양자강 하구지역)을 침공하고 북으로는 유연(북경, 요령성지역)제노(산동성 일대)를 뒤흔들어서 중국의 두통거리가 되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서, 백제가 산동지역을 장악한 후 490년의 전투가 중국에서 벌어졌음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6세기 후반 백제의 위덕왕은 북제(북조지역에 세워진 나라이름)로부터 ‘사지절 도독 동청주자사’ 책봉되었는데, 여기서 동청주는 산동반도에 소재한 것이다. 즉 북조정권역시 백제의 산동반도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보다 직접적으로 기록한 우리의 기록은 없는가? 백제의 대륙진출을 뒷받침하는 우리의 기록이라면, 위에서도 살펴보듯 최치원 열전에 간접적으로 나온것이 전부인것처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분명하게 나와있다.

 "(재위) 10년에 위가 군사를 보내어 치러 오다가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遺兵來我 爲我所敗 (십년 위유병래 위아소패)
 동성왕 재위 10년은 서기 488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중국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또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정립된 역사서등을 참고로 한 후대의 기록으로, 2년정도의 오차범위는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488년에서 490년 사이 백제가 위나라와 전쟁을 벌여, 결국 백제가 대승을 거둔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동성왕이 전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태수직을 요구하였다고 해서, 곧바고 그 모든 지역이 백제의 영토화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산동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영토 근거지가 없었다면, 결코 동성왕은 중국 동해안과 발해만을 아우르는 전역데 대한 영토권 주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양상으로 볼 때 양대 적대국 세력이 맞물려 있던 요서지역보다는, 우방세력이 있는 산동성 서쪽 일대가 490년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490년 북위군과 벌였던 전쟁은, 백제가 우리의 영토경계를 지키기 위해 벌였던 영토 수호전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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