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황산벌 전투와 계백장군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8:33

황산벌 전투와 계백(階伯 ; ?-660)장군

 서기 660년 음력 7월 신라의 5만 대군은 백제의 주요국경관문인 탄현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넘어섰고, 당나라의 13만 대군역시 기벌포에 상륙하였다.
 백제는 급하게 군사를 모았지만, 워낙 기습적인 양공작전이었기 때문에 병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당시 사비성일대 백제 총병력은 3만 5천 정도...그러나 2만명은 사비성을 수비해야 되었기 떄문에 단지 1만 5천의 병력으로 18만이나 되는 병력을 상대해야만 될 처지에 있었다.

 이제 백제의 운명은 수많은 전쟁터에서 신라군과 상대한 경험이 있었던 달솔 계백장군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계백 장군에게 허락된 병력은 5000명이 전부였다. 당나라 군대만 없었다면, 1만 5천명 정도의 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만 되었어도, 숫적으로는 열세이지만 유리한 고지를 우선 점령하고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군은 북쪽과 남쪽 전선에 분산되어 간격이 너무 넓어져 있었고, 거기에 국가체제의 난맥상은 끝내 동쪽 전선의 빈틈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러나 몇가지 의문이 든다. 왜 계백장군은 스스로 가족을 죽인것일까? 그리고 왜 황산벌로 가야만 했을까?

 기록에는 단지 승부의 향방에 따라 처자가 노비로 전락하게 될것을 염려하여 목숨을 거두었다고만 되어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우선 당나라와는 협상이 가능하지만, 신라와는 반드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을 계백장군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는 이미 수년전부터 정치적이나 군사적으로 태만하여 있었다. 탄현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신라군이 넘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가뜩이나 숫적으로 열세였던 백제군은 크게 동요하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서 가족과 함께 난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계백장군역시 왜 가족을 사랑하지 않았겠으며, 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지휘장군이 먼저 살길을 찾고자 하였다면, 어느 누구도 패색이 짙은 싸움터에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가족을 희생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였지만, 병사들 모두에 대한 호소이기도 하였다.
 물러설곳도 없고 피할곳도 없으며 숨을 곳도 없는 전쟁터이니, 오직 필사의 의지만이 조국을 구해낼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으리라는 소리없는 웅변이었다.

  그리고 그런 계백장군의 처결을 그 어떤 명연설이나 웅변보다도 병사들 사기를 불태울 수 있었으며, 5천명의 병력은  어느 누구랄것도 없이 모두 죽음을 각오한 말 그대로의 결사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산벌로 향하는 계백장군, 피할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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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현재 논산시 연산방면에 있는 황산벌로 향하였다. 그런데 계백장군의 최후의 격전지가 구체적으로 어디였는가는 정확치 않았다.

 다만 논산지역은 계백장군 최후의 격전지로 추측되는 황산성을 비롯해 10여성이 밀집되어 있다. 그리고 논산시를 지나면 곧바로 부여가 나온다. 더구나 논산시의 동부 산악지대가 끝나면 곧바로 평야지대가 이어져 많은 수의 병력을 방어할만한 저지선을 찾기도 힘들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황산성이 계백장군의 마지막 격전지였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힘들다. 황산성은 함지봉 해발 200m이상의 고지대에 있는 곳으로, 만약 이곳에서 마음먹고 수성전을 펼쳤다면 아무리 숫적으로 열세였다고 해도 며칠은 더 버틸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백장군은 이런 천연의 요세를 방패삼아 장기전을 펼칠만한 입장조차 되지 못하였다.  신라 김유신이 1만 정도의 병력으로 계백장군부대를 묶은다음 나머지 주력 4만 병력으로 부여 사비성을 곧바로 칠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황산의 들에서 3영을 설치하고 신라군을 맞아 싸웠다고 되어있으며, 신라본기에도 계백장군이 먼저 도착하여 요지를 점령하고 있어 세길로 나누어 공격하였다고 되어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요지'라고 표현된 부분은 '부여로 통하는 주요길목'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계백장군은 부여로 통하는 주요 길목 세곳에 진영을 설치한 후, 신라군이 그들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결코 부여로 갈 수 없도록 막아섰다. 


 한편 기한내에 당나라군과 합류해야 되었던 김유신으로서는 최대한 빠른길을 선택하여 가야했지만, 부여로 통하는 주요길목을 계백장군이 모두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돌파하기 위해 처음부터 총력전을 벌여야만 했다..

  그런데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는 부여로 통하는 길목 요지에 3영을 설치하고서는,  삼방향으로 공격해 오는 신라군의 총공격을 필사의 의지로 막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범위는 점점 확대되어 연산면 전역에 걸쳐 이루어 졌을 것이며, 계백장군은 어떻게든 신라군을 황산벌로 밀어내어 어느 한 진영도 돌파되지 않도록 해야 되었다.

  가뜩이나 적은 병력을 셋으로 쪼개어 신라의 대공격을 막아내어야 했던 형편이었지만 넓어진 전쟁터는 그들에게 더욱 불리하였다. 따라서 계백장군은 이미 여러차례 패한 신라군의 사기가 꺽이기만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일단 신라군의 사기가 꺽이면 지공작전을 통해 나당연합군의 합류를 저지할 수 있었고, 그렇게되면 마지막 한가닥의 희망은 찾을 수 있게된다. 그러나 잘 알려진 사실처럼 관창이나 반굴같은 어린 화랑들의 값진 희생을 통해 신라군은 다시 사기가 되살아 났으며, 이미 여러차례의 전투로 칠대로 지친 5천 결사대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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