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371년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한 까닭은?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8:48

371년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한 까닭은?

2008.04.04 18:09 | 영토 수호戰 | 히스토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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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년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한 까닭은?

 삼국시대 있어서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는 것이 몇가지 있다. 가령 광개토대왕릉비 해석에 대한 논란이라던가, 백제의 대륙 진출설등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백제의 대륙진출과 관련되어서 재기되는 문제가, 아직 신라와 통합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였던 백제가, 서해를 건너 산동지방과 요서 지방을 진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부정적 견해가 지배적이긴 하다.

 여기에 또 하나 재기되는 문제가 근초고왕과 고국원왕이 벌인 평양성 전투인데, 그렇다면 근초고왕은 아직 신라와의 전쟁이 진행중인 상태에서 왜 더욱 강대한 힘을 가진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것일까?
 차라리 그 힘으로 신라를 병합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하지만 근초고왕역시 위대한 왕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문제점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근초고왕에게는 무리수를 두더라고 평양성으로 향해야만 되는 불가피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근초고왕이 평양성으로 향한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고구려와 백제간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백제는 주몽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에 의해 건국되엇다.   

 따라서 백제는 초기, 주몽의 사당에 제사도 지내며 고구려와는 우호적인 과관계를 300년간이나 지속한다.  서기 286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치른 바 있지만, 이때에도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방군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백제 책계왕은 대방군왕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상태여서, 대방군을 공격하고 있었던 고구려와 전쟁을 치루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었다.

 이렇개 백제의 개입으로 고구려의 대방군 축출시도는 무의로 끝났고, 우호적이던 두 나라의 관계는  다소 벌어지게 되었지만, 고구려는 북방민족의 침입에 치중하면서 두나라 사이에 별다른 무력 충돌은 없게 되었다.

 하지만 80년 후인 4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두 나라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고구려를 괴롭히던 전연이 붕괴되면서, 공백상태에 있던 요서지역을 백제가 차지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백제의 요서 진출을 분명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우리의 기록이 단 한 줄도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측의 기록은 송서를 비롯한 10권에 이르는 각종 역사서에서 백제가 요서를 차지하였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간혹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백제의 요서 진출에 대한 최초 기록인 송서를 다른 역사서가 순차적으로 답습하면서 여러권에 나왔을 뿐이며, 또 송서의 기록역시 齊(제)국 잠칭세력을  백제국으로 혼동하여 기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같은 해석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중국 역사서 중 왜곡되지 않은 역사서가 어디있겠으며, 또 역사 자체에 대해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단지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과연 백제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요서지역을 차지할 수 있겠으며, 그러한 역사적 상황이 허락될 수 있겠느냐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342년 전연의 모용환등에 대규모 침입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선대왕의 시신이 유기되는 치욕을 겪었다. 또 전연역시 비록 고구려에 승리를 거두긴 하였지만, 그들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또다른 유목세력인 전진에 의해 370년 멸망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또 고구려는 왕의 어머니와 부인이 납치된 터였기 때문에, 쉽사리 군사행동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리하여 요서지역은, 마치 현대의 국제 분쟁지역처럼 되어 버렸는데, 그 틈을 파고 들어 간 것이 바로 백제였던 것이다.

 
*근초고왕시기 백제의 진출방향, 녹색은 개인적으로 보는 백제의 영역범위임 

 백제는 이 요서및 산동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3세기 들어, 신라와의 전쟁을 최대한 자제하였다. 그리고 전체적인 국제관계나 당시 상황을 고려 해 볼 때, 백제는 이미 산동지방을 먼저 개척하였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그것은 최치원이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시대 오, 월을 침범하였다고 말한것에 그 기본을 둔다. 오, 월은 현재 중국의 양자강 하구 유역지역이다. 이어 유, 연, 제, 노를 흔들었다고 하였는데 유와 연은 현재 북경지역이고 제와 노는 산동지역이다. 

 사실 최치원역시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 사대주의적 사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가 고구려나 백제의 업적을 과장시키기 위해 그러한 표현을 거짓으로 하였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은 백제가 산동지역을 장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백제의 산동과 요서진출을 사실로 간주하더라도 문제는 있다. 만약 백제의 요서진출이 사실이라면, 어딘가에는 고구려나 혹은 유목민족국가들과 전쟁을 치른 흔적이라던가 최소한의 기록이 남겨져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대륙백제설을 인정하는 주장으로는, 369년 근초고왕과 고국원왕이 벌어졌던 치양전투가 요서에서 벌어진 전투라는 견해가 있긴하다.
 그러나 치양전투가 요서지방을 차지하기 위한 두 나라간의 전쟁으로 볼만한 근거도 미약하고, 더구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백제를 쳐 치양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고 나와있다. 당시 고구려 영토가 대동강 유역까지 확장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이 치양전투 역시 평양성 남쪽 지역에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전투에서 고국원왕은 2만 대군을 이끌고 공략에 나섰지만, 근초고왕은 태자를 직접 파견하여 고구려의 공세를 막아냈다.
  백제는 무려 5천명이나 되는 포로를 사로잡을 만큼 대 승을 거두었는데, 고구려는 이 패배를 만해하기 위해 2년 후 浿河(패하)에서 다시 전쟁을 벌였다.여기서 패하의 위치에 대해서는 또다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요서지방에 위치한 대릉하라고 보고 있다.

 즉 패하전투는 백제와 고구려가 요서방면에서 전쟁을 벌였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잠깐 패수 혹은 패하라고 불리는 강이름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그 해석은 참으로 다양하여 북경 동쪽에서 시작되는 난하에서 대릉하 요하의 중국강과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예성강, 심지어 임진강에 이르는 우리나라 중부의 강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좀 더 후대인 광개토 대왕비에 보면 아리수를 한강으로 부르는 것이 확실하고, 또 관미성 전투를 둘러싼 패수라는 강이름이 예성강이라고 볼 때, 패하는 그 이남으로 내려 갈 수 없다. 그렇다고 아직 평양까지 진출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패하를 청천강이나 대동강으로 볼 수도 없다. 이런 역사적 전개를 검토할 때 패하는 요서 방면에 있는 대릉하를 지칭하는 강으로 예측할 수 있다.

 또 요서지역에는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서 축출된 요동과 현도세력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는 이들 세력을 규합하여,  군사력을 갖추었거나, 혹은 이들이 지니고 있던 기본적인 군사력을 이용하여 재 정비 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이렇게 백제는 한반도 중부와 요서 방면에 걸쳐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371년의 한해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향한 이유는 분명해 진다. 두 차례 걸친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륙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고국원왕역시 도읍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였지만 평양성을 방어하기 위해 직접 나서야만 했다. 만약 평양성이 백제에게 점령된다면, 요서지방과 백제영토가 연결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고구려 영토는 서쪽으로 밀려나게 되고, 대륙진출의 기회는 멀어지고 만다. 역으로 백제로서는 서해와 발해를 연결하는 방대한 영토를 개척함은 물론이고, 고구려의 팽창을 막고 중국과 육로로 연결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고구려는 전연에 의해 도읍이 파괴되고, 치양과 패하전투에서 연패를 당하면서 크게 위축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때만큼 좋은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신라에 대해서는 군사적 우위에 있었으니까, 언제라도 공격을 제게하여 통합을 추구할 수 있지만 고구려에 대한 기회는 두번 다시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근초고왕은 서기 371년 평양성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이끈 군사는 3만명, 건국 이래 최대의 병력이다. 하지만 이미 수차례의 패배로 군사동원능력을 상당히 상실한 고구려는 수성전에 주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고국원왕은 화살을 맞고 치명상을 입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성에서의 전투는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근초고왕으로써도 신라의 군사 움직임을 동시에 견제해야 되는 어려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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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색된 부분은 근초고왕시기 백제의 최대판도(개인의견입니다.)

 따라서 근초고왕은 평양성 전투를 명백하게 끊내지 못하고 회군해야만 되었다.  그러나 이 평양성전투에서 백제가 얻은 수확은 상당하였다.
 우선 영토를 한강유역에서 대동강 이남까지 확장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비록 육로로는 요서지역으로 갈 수 없지만, 바다길로는 그만큼 가깝게 된 것이었다. 또 전체적으로 보아도 서해를 장악하여, 고구려의 확장을 상당기간 저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서기 371년 근초고왕은 동북아지역의 패권을 노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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