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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 찿아서...

吾心竹--오심죽-- 2010. 11. 2. 13:49

주류성 찿아서....| 백제 토론방
 
하루신선 조회 367 | 2010.03.04. 11:51 http://cafe.daum.net/alhc/3Cdg/241
 
 

백제 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주류성은 존재 하였을까?
서천,부안,홍성,연기,논산, 심지어 대륙에까지......
서로들 주류성이라 주장하지만, 어느곳도 확실한 유물이 나오지 않아 애태우며,삼년동안 싸우다 죽어간

백제군의 원혼이 잠든 주류성을 찿아나서지만.....

  백제 부흥운동은 동시 다발적으로 백제의 전지역에서 일어 났습니다.
백제는 동,서,남,북,중방성의 5방성을 중심으로 통치하였고, 부흥운동 또한 이 5방성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그중에서도 임존성을 중심으로한 서방성에서 시작되어 부흥운동의 마지막 항전도, 서방성의 임존성에서

끝을  맺었습니다.

고문서에도 백제의 부흥운동은 강 서쪽에서 시작되었다 기록되어 있고, 사비성의 당나라군대도 지척의 부흥군이

두려워 주둔지를 웅진으로 옮겼다는 기록으로도,부흥운동은 사비성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씀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던 신라군의 진격로와 격전지를 보면, 처음 신라군은 고립된 당나라군과의 연결을 위하여

웅진성 동쪽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고, 이지역에서 신라군이 승리하여 웅진의 당나라군대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면서 백제 부흥군이 밀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이 연기,논산지역이 주류성이라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신라군과 당나라 군대는 웅진성 동쪽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의 진압을 기록하였고,

청양 정산(두릉윤성)에서 승리하고,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에 임존성을 공격하여 부흥군을 진압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산에서의 승리와 주류성의 함락이 거의 같은 날로 기록되어 일부학자들은 두릉윤성이 주류성이라 주장하지만,

기록에는 두릉윤성과 주류성을 함락하였씀을 기록하여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위 내용과 고문서의 기록을 보면, 백제부흥군과의 전투지역은  동방성,북방성, 서방성에서의 항쟁이 대부분입니다.
주류성의 설명또한 서방성인 홍주목의 설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류성이라는 특정산성을 찿으려 하다보니 미궁으로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것은 부흥군의 주요거점인 임존성,두량이성,기타 실체가있는 백제산성들의 전투내용은

기록되어 있으나,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의 전투내용은 기록되지 않고 단지 함락하였다는 기록뿐입니다.

차령산맥 끝자락, 홍주목의 중심지역에 해당하는 성주산 만수산등이 있는 험준한 산악지형 중심지역에 부흥군은

비밀본부를 두고 외곽의 백제성을 아우르며 항전하던 부흥운동이, 내분으로 인한 복신의 죽음등으로 산악지역

비밀본부도 부흥군의 지도층이 항복하면서 실체가 드러나게 되고, 산악지역 외곽의 백제성들이 무너지면서 주류성은

와해된 것이고, 당,신라군은 부흥군의 본거지를 무혈입성 하면서, 점령군은 단지 몰려든 백제유민을 해산시키면서

주류성은 역사에서 소멸됩니다.

周留城은 부흥운동의 핵심무리등이 머무르던 곳을 표현한 것이지 어떤 실체가 있는 산성이 아닙니다.

부흥운동의 또 다른 기록은 부흥운동이 시작되어 승리하면서 몰려드는 유민, 지원군으로 험준한 산악지형에서의

항쟁은 식량난에 부디치게되어 피성으로 이전하였다 기록하였고, 피성으로의 이전은 "적군과 하루사이 지척의 거리로
위험하다, 먼저 싸워 사는것이 우선이고 굶어죽는것은 뒤의 일이다"며 반대하였다는 기록으로 피성이 적군과 가까운

거리에 있씀을 알 수 있습니다.

일부학자들은 피성을 김제 벽골제 지역으로 단정하고 그 주변에서 주류성 기록과 비슷한 위금암산성을 주류성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주류성이 위금암산성이라면 피성은 결코 벽골제 지역이 아닙니다, 따라서 위금성 또한 주류성이 아닙니다.
부흥군은 식량문제로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이전하였는데, 위금성에서 벽골제로 이전하였다면, 두지역사이 고부,태인,,,

김제지역의 옥토가 부흥군의 수중에 있었다는 의미인데, 이전하여도 그땅이 그땅인데 방어에 유리한 요새지역을 버리고

평지로 이전 할 이유도 없고, 벽골제는 적군과 거리가 떨어져서 설명되지 않고, 더구나 식량난으로 이전하였다는 기록과

너무나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단, 부안 고부지역이 중방성 지역으로 여기에서도 상당한 부흥운동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류성은 험준한 산악지형에 있었고,금강과 가까우며,하루에도 사비성 공격이 가능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부흥군의 내분으로 인한 복신의 죽음으로 부흥군의 상당수가 당군의 회유에 항복하면서 주류성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어

힘없이 무너지면서, 당군에 항복하는것은 돌아가신 복신장군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며 임존성에서 마지막까지 항거하였다는
지수신의 기록으로, 주류성은 임존성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씀을 알 수 있습니다.

사비성 금강서쪽지역 부여군 은산면지역을 조사하여 보면 부흥군이 마지막 한사람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기록들이 많으며, 이지역은 바로 그당시 홍주목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부흥군의 최전방이자 최후의 지역으로 이지역이

무너지면 바로 부흥군의   중심지인 산악지역으로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 부흥군이 전멸당하며 항전한 이유입니다.

지금도 이지역에 남아있는 "은산별신굿제"는 싸우다 죽어간 부흥군의 혼을 위로하던 풍습이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주류성이 남쪽 부안에 있었다면 왜 이렇게 후퇴하지 않고 싸웠을까요?

임존성에서 가까운곳에 성수산, 만수산등이 자리한 험준한 산악지형이 있고, 이곳은 홍주목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박성흥선생이 주류성이라 주장하는 장곡산성과도 일부 같은 지역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장곡 학산산성을 당시 임존성으로 비정하기도 합니다.
서방성인 임존성이 부흥군의 주요 항쟁지역으로 이지역을 초토화 시키고 지금의 예산임존성으로 서방성을 이전

통치한것으로 보고, 지금의 임존성이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것으로 보여 이같은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처음 부흥운동은 위 산악지역에서 시작하여 외곽의 백제산성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사비성의 당나라군대와 대치하였고,

부흥운동이 백제유민으로부터 호응을 얻으면서 불어나는 유민, 지원군으로 위 산악지형에서의 항쟁은 식량난에 부디치고,
피성(당진 면천-박성흥선생주장)으로 이전합니다,
피성(면천)은 당시 한강유역,평택 아산만지역이 신라군의 지배하에있어 신라군과  아주가까운 거리에 있어 피성의 설명과

일치하고, 당나라 수군도 안전한 상륙을 위하여 아산만 지역으로 상륙 주둔하였을 가능성 또한 커서 백강이 아산만일
가능성이 큽니다.

결론적으로,
주류성이 험준한 산악지형에 있었고, 금강과 가까우며, 하루에도 사비성 공격이 가능하고, 임존성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면, 그곳은 김정호가 "주류성은 홍주목에 있었다" 기록한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그곳은 홍주목의 특정 산성이

아니라, 위 산악지역과 외곽의 백제산성을 포함하는 부흥군의 주요 활동지역을 가리키는것으로 생각됩니다.

주류성 찿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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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금천씨 10.03.04. 14:33
이종학(서라벌군사연구소장)의 논문<주류성.백강의 위치비정에 관하여>내용에서는 군사 사학적 연구방법에 의한 고찰이라고 하여 661년 3월 신라군은 두량윤성을 공격하기 위해 고사비성外에 작전기지를 설치, 고사비성은 고부(古阜)이기 때문에 주류성은 고부의 주변 20Km내에서 찾아야 하므로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를 비정하고 있습니다. 군사지리적 관점에서 전쟁.군사작전의 준비,수행을 위해 지리적 조건을 고려했다고 합니다...그리고 백강을 동진강으로 위치비정을 했네요...(2004년판) (국회도서관에서 카피)...고부(古阜)=언덕
 
하루신선 10.03.04. 16:34
고사비성이 고부(古阜)라 비정한 근거는 무었일까요? 두량윤성은 어디이고요?
학자들마다 주장이 달라서 아직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부여 가까운곳 금강변에서 고사비성을 찿는학자도 있습니다.
 
소호금천씨 10.03.04. 23:57
저도 잘모르겠습니다..고부(古阜)는 夫安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역(일본인 池內宏 주장), 내노라 하는 학자들의 논문으로 봐도 다들 틀리게 비정을 하니 어느 학자의 주장에 비중을 두어야 하는지....ㅠ.ㅠ...OTL
 
 
하루신선 10.03.04. 21:42
어릴적 고향 건지산성이 주류성이라 배우면서 너무나 평지인 작은 야산에서 어떻게 3년이나 버티며 항전할 수 있었나 의아해 하다가, 일때문에 정읍에 머물면서 부안 개암사에 갔다가 위금암성이 주류성이라 설명듣고 공감하다가,박성흥선생의 글을 읽고 주류성에 관심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하루신선 10.03.04. 21:57
위금암산성이 주류성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피성을 "벽골재"로 단정하시는데 벽골재 또한 피성의 설명과 상이한점이 많습니다.
 
소호금천씨 10.03.04. 23:55
아무래도 전쟁사에 대한 위치비정은 군사전문가의 비정이 무게가 실려 그의 논문을 찾아본 것입니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에서 고부군<古阜郡>은 원래 백제의 고묘부리군(古眇夫里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으로 부리(夫里)는 城邑을 뜻하는 백제어로 즉 부안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금의 고부(古阜)이다.라는 일본 사학자 池內宏(前揭書 PP 118-119)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루신선 10.03.05. 11:27
신라군의 진격로를 보면 663년7월 17일 경주를 출발, 논산을 경유하여 8월 초순에 공주에도착, 당군과 합류하여 8월13일 두솔성을 함락하고 17일 주류성을 포위하여 9월7일에함락시켰다 하였는데,위금암산성이 주류성이라면 신라군이 논산에서 부안으로 진격해야지 대군을 이끌고 공주까지 이동한것이 이해되지 않고,古山子 金正浩는 두솔성은 角山에있고 角山은 청양에 七甲山이다 기록하였는데, 칠갑산에서 위금암산성 사이에는 금강,만경강,동진강을 건너 4일만에 도착할 수 없는 거리이고,군사전문가도 현대전에서도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박성흥선생에 주류성고에서 인용.
 
소호금천씨 10.03.05. 10:51
아~두솔성을 주류성과 분리하면 님의 의문처럼 되는데 김유신 열전으로 보면 두솔성은 바로 주류성과 같은 것으로 보여집니다..즉 두솔성=주류성이라는 것이지요..그리고 이종학의 논문 역시 두솔성=주류성으로 하고 있구요..그리고 8월 13일날 두솔성(주류성)을 함락시킨게 아니라 "두솔성에 이르렀다" 로 되어 있지요.다시말해 8월 13일날 주류성에 이르러고 9월 7일 함락 시킨것으로 되겠지요
 
소호금천씨 10.03.05. 11:14
좌우지간 주류성은 왜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백강과의 근거리이면서 강의 서쪽 지역이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지역을 찾아야 되지 않을까요?..그리고 왜 수군의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지역이 되어야 합니다...백강을 동진강으로 비정하면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인 부안의 변산반도 지역인 상서면 지역이 적합하다고 합니다만....^^*
 
하루신선 10.03.05. 15:28
김유신 열전에 8월13일 두솔성에 이르렀다 기록되었고, 두솔성이 정산이다 기록되어 있는데, 두솔성이 주류성이면 주류성은 정산에 있어야 되는데, 부안이라 하시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소호금천씨 10.03.05. 15:37
허겈~정산면은 부여군에 속하는데....그건 그렇고 "<두솔성이 정산>"이다 라는 내용은 혹시 어느 사료에 있는지요?.
 
소호금천씨 10.03.06. 08:53
삼국사기 본기에 의하면 두량윤성과 답설인귀전의 주류성은 같은 사건으로 보여서 흔히 두량윤성=주류성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두솔성 역시 주류성이 되게 되는데 삼국사기 본기 문무왕 8년 왕은 28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이들과 합쳐서 두릉['릉'을 '량'이라고도 한다.]윤성·주류성 등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라는 기사에서 두량윤성과 주류성을 구분시킵니다..이넘의 신라본기가 헷갈리게 만드네요..두량윤성이 정산에 있다는 사료는 안정복 선생이 주장한 것이지만 두솔성(주류성)은 두량윤성과 동일하다는 추론은 위의 문무왕 3년 기사때문에 부정되어야겠지요.
 
하루신선 10.03.08. 17:06
"두솔성이 정산에 있다"의근거는,윗글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金正浩의大東池志에 기록되어 있다 합니다. 청양의 칠갑산은 정산면의 일부에 해당합니다.
 
소호금천씨 10.03.07. 01:39
하루신선님!! 두솔성 함락건이나 주류성 함락건 모두 용삭3년 즉 문무왕 3년(663년)기사로써 김유신 열전에서는 두솔성, 본기에서는 주류성이라는 동일한 내용인데 城의 명칭만 다를 뿐입니다.. 두솔성이나 주류성의 항복을 받고 왜군의 포로를 석방하는 내용 또한 동일합니다..그런데 "그뒤에 계속해서 주류성을 포위하고 부흥군을 진압하였다" 라고 기록 되었다니요??...다시 한번 더 년대 검토를.....용삭3년(문무왕3년:663년)을...주목하십시요...^^*
 
그리운길 10.03.08. 16:56
<일본서기>
8월17일 적군이 주류에 와서 왕성을 포위하였다 당나라 군은 170척으로 백촌강에 도열하였다.
8월28일 일본 수군과 당나라 수군이 결전을 치렀는데 일본군이 결국 패퇴하였다. 부여풍장은 고구려로 달아났고
9월 7일에 주류성이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에 이르렀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을 종합해 보면,
김법민과 69세 노령인 김유신은 두솔성을 공격하고 남아있었고,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주류성을 공격하였으며, 주류성이 항복할때 주축은 당나라군이었다고 보여지는데요..
 
소호금천씨 10.03.08. 20:10
주류성이 항복할때 주축은 당나라군이었다고 보여진다는 것에는 별다른 이의 가없어 보입니다..주류성이던 두솔성이던(=동일한 城으로 보임) 나당연합군이 싸운 것인데 신라측 기록으로는 신라가 주축이 되어 문무왕이 왜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정황으로 보아서는 당 수군에 의해 왜의 수군이 괘멸됨에 따라 주류성이 항복한 것으로 나타나니 아무래도 당이 주축이 되어 주류성을 함락시켰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합니다.
 
 
그리운길 10.03.05. 00:55
금성판 국어대사전에서 '주류성'을 찾아보면,

충청남도 한산에 있었던 백제의 성으로서 백제가 망한 뒤 복신, 도침 등 백제의 유신(遺臣)이 근거지로 삼아 나당연합군에 항전한 마지막 전쟁터이다.
삼성출판사의 새우리말큰사전에서도 주류성을 '충청남도 한산에 있었던 백제의 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는데, 일본인 쓰다 소우기치(津田左右吉) 등이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성이 주류성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한 이래 이병도박사가 그 학설을 지지하면서 교과서는 물론 사전에까지도 그렇게 올라 있습니다.
 
그리운길 10.03.05. 00:57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부안의 위금암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충청남도 홍성이나 연기 지역이 주류성이 있던 자리라는 학설도 제기됐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면 이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 토지가 자갈이 많고 척박해가지고 농사짓기에 불리하고 오랫동안 항전을 하기가 어려운 지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풍왕이 즉위한 이후에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 그 피성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지역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피성이 주류성에서 가까운 곳으로 설정돼 있어서, 결국 주류성은 부안의 위금암산성이 가장 유력하다, 학자들 사이에 이렇게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그리운길 10.03.05. 01:01
지금 사전에 주류성이 있던 지역으로 올라 있는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성의 경우, 충남역사문화원에서 발굴 조사를 한 결과 고려시대의 성으로 밝혀졌습니다.

백제 부흥군이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일본서기는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개 주(州)를 불태우고, 아울러 덕안성 등의 주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피성이 적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주류성으로 돌아왔으니…

위금암산성의 울금바위에는 3개의 굴방이 있는데, 이 곳 부안 주민들에 의하면 이들 굴방이 각각 원효굴, 베틀굴, 복신굴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큐 역사를 찾아서 에서>
 
하루신선 10.03.05. 10:28
피성의 설명에는 피성에는 高蓮旦涇水가 흐른다고 설명되었는데 김제 벽골제에는 설명되지 않는 지형이고, 피성은 적군과 하루밤에도 도착가능한 지척의 거리라 하였는데 벽골재는 너무 먼거리입니다.
박성흥선생은 피성을 당진군 면천을 피성이라 비정하였고,당진군 신평을 沙平成이라고 비정하면서 면천과 신평의 거리는 불과 12km 지척의 거리로 사평성이 신라군에게 함락당하자 황급히 주류성으로 회군하였다 주장하십니다.
 
그리운길 10.03.07. 00:17
약1300년 이상 지난 세월속에서 흔적을 찾을수가 있을까요...??
또한 피성은 전시중 2~3개월 짧은 기간 수도였습니다..
피성을 벽골제라고 하기 보다는 김제지역으로 추정하죠..

避城與敵所在之間,一夜可行 지간거리임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봐야죠..

신라본기 신문왕 6년(686) 2월조에 石山(부여군 석성면), 馬山(서천군 한산면), 孤山, 沙平(당진군 신평면)의 4縣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죠..

663년 2월의 사평성은 순천 or 전북 임실군 신평면 or 구례 지역으로 추정하는 걸로 압니다..대부분 백제남방으로 생각하고 있죠. .

박성흥선생은 그 분 나름대로의 생각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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