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주류성은 존재 하였을까? 백제군의 원혼이 잠든 주류성을 찿아나서지만..... 그중에서도 임존성을 중심으로한 서방성에서 시작되어 부흥운동의 마지막 항전도, 서방성의 임존성에서 끝을 맺었습니다. 두려워 주둔지를 웅진으로 옮겼다는 기록으로도,부흥운동은 사비성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씀을 알 수 있습니다. 웅진성 동쪽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고, 이지역에서 신라군이 승리하여 웅진의 당나라군대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면서 백제 부흥군이 밀리기 시작합니다. 청양 정산(두릉윤성)에서 승리하고,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에 임존성을 공격하여 부흥군을 진압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산에서의 승리와 주류성의 함락이 거의 같은 날로 기록되어 일부학자들은 두릉윤성이 주류성이라 주장하지만, 기록에는 두릉윤성과 주류성을 함락하였씀을 기록하여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위 내용과 고문서의 기록을 보면, 백제부흥군과의 전투지역은 동방성,북방성, 서방성에서의 항쟁이 대부분입니다. 기록되어 있으나,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의 전투내용은 기록되지 않고 단지 함락하였다는 기록뿐입니다. 비밀본부를 두고 외곽의 백제성을 아우르며 항전하던 부흥운동이, 내분으로 인한 복신의 죽음등으로 산악지역 비밀본부도 부흥군의 지도층이 항복하면서 실체가 드러나게 되고, 산악지역 외곽의 백제성들이 무너지면서 주류성은 와해된 것이고, 당,신라군은 부흥군의 본거지를 무혈입성 하면서, 점령군은 단지 몰려든 백제유민을 해산시키면서 주류성은 역사에서 소멸됩니다. 항쟁은 식량난에 부디치게되어 피성으로 이전하였다 기록하였고, 피성으로의 이전은 "적군과 하루사이 지척의 거리로 거리에 있씀을 알 수 있습니다.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김제지역의 옥토가 부흥군의 수중에 있었다는 의미인데, 이전하여도 그땅이 그땅인데 방어에 유리한 요새지역을 버리고 평지로 이전 할 이유도 없고, 벽골제는 적군과 거리가 떨어져서 설명되지 않고, 더구나 식량난으로 이전하였다는 기록과 너무나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학계의 정설입니다. 힘없이 무너지면서, 당군에 항복하는것은 돌아가신 복신장군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며 임존성에서 마지막까지 항거하였다는 기록들이 많으며, 이지역은 바로 그당시 홍주목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부흥군의 최전방이자 최후의 지역으로 이지역이 무너지면 바로 부흥군의 중심지인 산악지역으로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 부흥군이 전멸당하며 항전한 이유입니다. 지금도 이지역에 남아있는 "은산별신굿제"는 싸우다 죽어간 부흥군의 혼을 위로하던 풍습이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박성흥선생이 주류성이라 주장하는 장곡산성과도 일부 같은 지역입니다. 통치한것으로 보고, 지금의 임존성이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것으로 보여 이같은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부흥운동이 백제유민으로부터 호응을 얻으면서 불어나는 유민, 지원군으로 위 산악지형에서의 항쟁은 식량난에 부디치고, 일치하고, 당나라 수군도 안전한 상륙을 위하여 아산만 지역으로 상륙 주둔하였을 가능성 또한 커서 백강이 아산만일 있었다면, 그곳은 김정호가 "주류성은 홍주목에 있었다" 기록한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그곳은 홍주목의 특정 산성이 아니라, 위 산악지역과 외곽의 백제산성을 포함하는 부흥군의 주요 활동지역을 가리키는것으로 생각됩니다. |


학자들마다 주장이 달라서 아직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부여 가까운곳 금강변에서 고사비성을 찿는학자도 있습니다.











8월17일 적군이 주류에 와서 왕성을 포위하였다 당나라 군은 170척으로 백촌강에 도열하였다.
8월28일 일본 수군과 당나라 수군이 결전을 치렀는데 일본군이 결국 패퇴하였다. 부여풍장은 고구려로 달아났고
9월 7일에 주류성이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에 이르렀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을 종합해 보면,
김법민과 69세 노령인 김유신은 두솔성을 공격하고 남아있었고,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주류성을 공격하였으며, 주류성이 항복할때 주축은 당나라군이었다고 보여지는데요..


충청남도 한산에 있었던 백제의 성으로서 백제가 망한 뒤 복신, 도침 등 백제의 유신(遺臣)이 근거지로 삼아 나당연합군에 항전한 마지막 전쟁터이다.
삼성출판사의 새우리말큰사전에서도 주류성을 '충청남도 한산에 있었던 백제의 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는데, 일본인 쓰다 소우기치(津田左右吉) 등이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성이 주류성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한 이래 이병도박사가 그 학설을 지지하면서 교과서는 물론 사전에까지도 그렇게 올라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면 이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 토지가 자갈이 많고 척박해가지고 농사짓기에 불리하고 오랫동안 항전을 하기가 어려운 지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풍왕이 즉위한 이후에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 그 피성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지역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피성이 주류성에서 가까운 곳으로 설정돼 있어서, 결국 주류성은 부안의 위금암산성이 가장 유력하다, 학자들 사이에 이렇게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백제 부흥군이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일본서기는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개 주(州)를 불태우고, 아울러 덕안성 등의 주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피성이 적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주류성으로 돌아왔으니…
위금암산성의 울금바위에는 3개의 굴방이 있는데, 이 곳 부안 주민들에 의하면 이들 굴방이 각각 원효굴, 베틀굴, 복신굴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큐 역사를 찾아서 에서>

박성흥선생은 피성을 당진군 면천을 피성이라 비정하였고,당진군 신평을 沙平成이라고 비정하면서 면천과 신평의 거리는 불과 12km 지척의 거리로 사평성이 신라군에게 함락당하자 황급히 주류성으로 회군하였다 주장하십니다.

또한 피성은 전시중 2~3개월 짧은 기간 수도였습니다..
피성을 벽골제라고 하기 보다는 김제지역으로 추정하죠..
避城與敵所在之間,一夜可行 지간거리임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봐야죠..
신라본기 신문왕 6년(686) 2월조에 石山(부여군 석성면), 馬山(서천군 한산면), 孤山, 沙平(당진군 신평면)의 4縣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죠..
663년 2월의 사평성은 순천 or 전북 임실군 신평면 or 구례 지역으로 추정하는 걸로 압니다..대부분 백제남방으로 생각하고 있죠. .
박성흥선생은 그 분 나름대로의 생각이겠죠....
'百 濟'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납토성은 백제의 건국지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을 4~5세기경 확대 증축한 한성(漢城)으로서 (0) | 2012.02.24 |
---|---|
청나라 역사서, 중국 요서를 백제 영토로 인정 (0) | 2012.02.24 |
371년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한 까닭은? (0) | 2010.09.02 |
서기 490년 백제의 대륙전쟁 (0) | 2010.09.02 |
황산벌 전투와 계백장군 (0) | 2010.09.02 |
댓글 21 신고 | 인쇄 | 스크랩(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