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흑치상지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8:32

흑치상지(黑齒常之) - 백제의 일그러진 영웅

  서기 660년(의자왕 20)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마침내백제는 멸망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멸망이 곧 백제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백제는 신라와 당 17만 연합군의 기습적인 전략에 휘말려 일시에 패배하였지만, 곳곳에선 여전히 백제출신의 군인들과 귀족들이 한결같은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다.
  흑지상지는 달솔 겸 풍달군장(達率兼風達郡將)으로서 임존성(任存城:大興)을 근거로 단 열흘만에 3만여 명의 백제군을 모아 나당연합군에 반격을 개시, 백제부흥운동 초기의 중심인물이 되어 200여 성을 수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를 병참기지로 하여 고구려를 앞뒤로 공격하려던 당나라의 계획은 큰 차질을 빚었고,  이에 위험을 느낀 소정방은 9월초 의자왕과 귀족들을 끌고 장안으로 철수했다.  또 나당연합군은 백제부흥군을 막기위해 수년동안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신라의 백제 부흥군 토벌작전이 본격화되고, 당나라 역시 백제 주둔군을 대규모로 증파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유인원, 유인궤 두 장군은 매우 유능한 장군으로서, 복신등이 해복한 백제 옛성들을 공략하여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복신의 요구등으로 출병한 일본은 백강전투에서 대패하고 400여척의 전함이 전소됨으로서 사실상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그 후 백제군 내부에 권력다툼이 생겨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백제 왕자 부여 풍이, 역시 백제 왕족 출신이자 승려신분이었던 복신을 죽이고 고구려로 망명함으로써, 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곳곳에서 항복하는 성이 크게 늘어났다.
   이렇게 되자 흑치장군역시 당나라 고종(高宗)이 보낸 사신의 초유(招諭)를 받고 유인궤(劉仁軌)에게 투항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항복한 흑치장군은 돌연 백제 부흥군 토벌작전에 참여 하기 시작하였다. 백제 왕자 부여 풍이 고구려로 망명하는 상황에서 오직 임존성의 성주 지수신만이 항복하지 않고 나당연합군에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 흑치장군이 이 임존성 공격에 유인궤로부터 군량을 지원받아 압장서기에 이른 것이다. 흑치는 장수로써 매우 유능할 뿐 아니라, 백제의 국방전략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가 압장서서 공격하자, 천연의 요새 임존성도 얼마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고 말았다.

  결국 흑치는 그 공으로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佯州刺史)가 되고, 678년(당 의봉 3) 토번(吐蕃) 정벌에, 681년(당 개요 1) 토번의 잔도(殘徒) 찬파(贊婆) 토벌에 참가, 그 후 돌궐(突厥)의 정벌에 공을 세웠다.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를 거쳐 연국공(燕國公)의 작위를 받고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에 올랐으나, 이를 시기한 주홍(周興) 등의 무고로 조회절(趙懷節)의 역모사건 때 옥사했다.

 즉, 장안으로 옮겨간 흑치상지는 664년 웅진도독부의 웅진성 성주로 백제 땅을 다시 밟았으나, 672년 신라의 공격으로 웅진도독부가 완전 해체되면서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당으로 돌아간 그는 양주자사가 되어 678년 토번(티벳)을 정벌전에 나섰다.

  당군은 토번군의 용맹한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패퇴하였으나 오직 흑치상지만이 결사대 5백을 이끌고 토번군을 무너뜨렸고 이후 계속된 토벌전에서 기마대를 이용하여 번번히 토번을 제압하였다. 이어 돌궐 제국을 제압하고 서경업의 난을 평정하여 당의 중앙아시아 지배를 확고하게 하였으며 이런 공로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연국공의 작위와 식읍 3천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당제국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에게 죽음이 다가왔다. 687년 돌궐 정벌에 나섰던 그는 동료장수였던 찬보벽의 패전으로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계속되는 흑치장군의 승리에 조급해진 찬보벽은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 단독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다 결국 전멸당하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총장이었던 흑치장군에게도 그 책임을 묵게되어 공로가 없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이 민족 출신의 흑치가 연국공에 봉해진대 대해 불만을 품은 주흥등의 한족관료는 흑치장군이 조회절 반란사건에 가담했다고 무고하여 강금되고 말았다. 결국 흑치장군은 주흥에게 잔혹한 고문을 당한 뒤 689년 10월 9일(양력 11월 26일)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어 60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아마도  망국의 장수에게 내려진 불합리한 처사와,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었던 백제 장수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했으리라...

    그뒤 장남 흑치준(黑齒俊)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신원을 신청하였고 측천무후로부터 좌옥검위대장군으로 추증받아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1년 뒤 측천무후의 조칙으로 그의 유해는 왕족과 귀족들만이 묻히는 북망산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죽은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검교좌우림위 상주국(檢校左羽林衛 上柱國) 연국공(燕國公)흑치상지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지체있는 집안에서 교육을 받았고 군사일을 많이 경험하였다. 장수로서 군대일을 총괄하게 되어 비로서 공적을 펴게 되었다.

 옛날에 뜬소문을 받아가지고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윽한 분함을 머금고 목숨을 바쳤으니 의심스러운 죄가 분간이 되지 않았도다. 근래에 조사를 해보니까 일찍이 반대되는 상황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허물이 아닌 것 같다. 진실로 깊이 민망스러우니 마땅히 원통함을 풀어주어서 무덤에 가 있는 혼이라도 위로해 주어야겠다. 그래서 총장을 더해서 무덤을 빛나게 해주어야겠다고 하여 좌옥금위대장군(左玉錦衛大將軍)에 추종하고 훈봉을 주었다.


 한편 흑치장군의 무덤은 1929년 10월에 중국 북망산에서 묘지석과 함께 발견되었다.흑치상지 묘지석의 크기는 가로 71cm, 세로 72cm의 정방형 석재에 구양순 품격의 해서체로 41행 1604자가 쓰여있다.
  측천무후 집권기인 당 성력 2년에 묘를 개장하면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문자 가운데에는 측천무후때에만 사용되었던 소위 무주신자(武周新字)가 보이고 있다.


  묘지석에 의하면 흑치상지의 가계는 본래 왕족인 부여씨였는데, 흑치라는 지역의 담로로 봉해졌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이를 씨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지명과 관련하여 동남아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동남아 지역과 무역을 담당하였던 지역의 명칭으로 해석될 수 있어 보다 정확한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또한  증조부 때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백제의 제2관등인 달솔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어, 사비시대의 백제는 특정지역에 왕족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체제로 지방통치체제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역사학자들의 연구결과를입증하고 있다.

 아무튼 그는 백제의 마지막 영웅이었지만, 결국 신라와 당나라의 끈질긴 공격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물론  그는 최선을 다하였고,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인 백제왕자 부여 풍이 고구려로 망명함에 따라 더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을 막기위한 불가학력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변절하고 말았다. 물론 그의 뛰어난 재능은 그대로 사라기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뛰어난 인품과 탁월한 학식, 그리고 백제 관료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연국공과 대총관이라는 최고위급 직위를 받았다.
 오늘날에 비하자면 주지사겸 주방위군총사령관에 해당하는 높은자리로, 당시에는 황족이나 개국공신계열의 사람들 정도만이 임명될 수 있는 높은 자리였다.

하지만... 그 자리가 아무리 높아도 결국은 당나라에 의해 주어진 자리이고, 또 그만큼 당나라를 위해 큰 일을 수행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백제를 멸망시켰던 나라 당제국, 그리고 멸망한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부흥운동의 선두에 섰던 흑치장군...
 최후의 허무한 죽음과 죽음뒤에 신원회복....그의 최후는 고구려계의 명장 고선지와 비슷하지만, 고선지는 고구려가 완전히 사라진 후의 인물로 변절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흑치장군의 선택에 대해 잘잘못을 논할 수는 없다. 그는 분명 최선을 다하였고 백제 부흥운동은 한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 끝까지 저항하였다면 결국 백제땅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사람에겐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흑치장군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백제 부흥운동의 영웅으로서 최후의 순간을 마치지 못하고 오히려 변절자로서의 생애를 살다가 갔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망국의 일그러진 영웅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