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스크랩] <고골>의 정체성 제고(提高) - "위례문화" 2008년

吾心竹--오심죽-- 2010. 5. 8. 13:08

<고골>의 정체성 제고(提高)

- 하남위례성과 덕풍천의 지명 문제를 중심으로 -

안 임 환

(安 臨 煥)

하남문화원 이사

 

1. 머리말

우리 고장 하남시(河南市)에서 <고골>이라 불리 우는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행정, 교육, 문화, 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단지 주변 외곽지역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골의 역사를 심층 분석하여 이곳의 진정한 역사적 정체성(正體性)을 재조명 하고자 한다. 특히 하남위례성의 위치 비정(比定)과 관련하여 각종 문헌(文獻) 기록과 조선시대 이래로 많은 연구자들의 주장 및 고고학(考古學)적 발굴성과 등 지금까지의 연구동향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을 파악하여 올바른 접근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또한 이곳의 지리적 위치를 통해서 몇 가지 실증적 사례에 입각하여 잘못 명명된 덕풍천(?)의 지명을 <고골천>으로 변경하는 문제도 새롭게 제기하면서 <고골>의 정체성 문제를 고찰(考察) 하고자 한다.

정체성의 사전적 의미는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이다. 어떤 한 지역의 정체성이란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되어 전해 내려온 그 지역만의 고유한 정신문화로서 이를 공유하고 유지하여 정신적 자긍심을 갖게 해준다. 만일 그곳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나 이미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고 그와 관련된 기록이 불분명하여 이를 참고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지명(地名)이라는 단서(端緖)를 통해서나 주변 과학의 도움을 받아 그 실체에 접근하곤 한다.

지명은 땅에 붙여진 이름을 말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 땅에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그곳에 알맞은 지명을 정하고 이를 일상생활에 써왔다. 따라서 그 속에 우리조상들의 생각과 지혜가 담겨진 지명도 있고, 생활모습을 나타내는 지명도 있어서 우리의 역사와 삶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선사시대(先史時代)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학문인 고고학의 연구체제에서도 최초의 자료수집 단계인 지표조사를 실시하기 이전에 사전검토를 위해서 반드시 지명조사를 실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례로 필자의 고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양(漢陽)을 보호하고 수도운영을 보좌(補佐)하기 위해 설치한 수도 외곽지역인 경기(京畿)도, 한성백제시대(漢城百濟時代)의 왕성(王城)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 위치한 지역인 하남(河南)시, 조세(세금)로 나라에 바치는 곡식인 세곡(稅穀)을 인근지역에서 거두어 한양으로 운송하기 전 일시적으로 보관기능을 담당하는 조창(漕倉)이 있던 창고 아랫마을인 하사창(下司倉)동이 그것이다. 이같이 동네, 고개, 도로 길 등 어딜 가든 인간의 삶의 영역에 있는 지명은 그 지역의 유래와 정체성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 해준다.

2. <고골>의 역사(歷史)

오늘날 춘궁(春宮)동, 항(項)동, 상사창(上司倉)동, 하사창동, 교산(校山)동을 아우르는 지역명칭인 <고골>이라는 지명은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견해로는 <고읍→고고을→고골>로 변천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고읍(古邑)이란 광주관아(廣州官衙) 즉 광주목사(廣州牧使)나 광주부윤(廣州府尹)이 정무(政務)를 보던 관청(官廳)인 읍치(邑治)가 있던 곳에서 유래된 것이며 “골”은 고을이 변칭된 것으로 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궐(古闕)이라는 뜻에서 옛날 대궐이 있던 곳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골>에서의 고읍의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1846년 간행된 홍경모(洪敬謨)의 “중정 남한지(重訂 南漢志)” 광주향교(廣州鄕校)를 소개하는 기사에서 “본래 고읍 서쪽 2리에 있었는데, 1703년에 광주부윤 이제가 고읍터로 이건(移建)하였다. 남한산성에서 북쪽으로 10리 거리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광주군지(廣州郡誌)에도 똑같은 기록이 있으므로 현재의 향교자리 근처가 광주관아가 있었던 곳이고, 광주향교의 원래 위치는 현 소재지로부터 향교고개 방면(현 고골저수지 방향)으로 2리쯤 떨어진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옛 광주권역에서도 유독 <고골>일대에만 유물 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사적 제442호인 이성산성(二聖山城)과 광주향교(문화재자료 제13호)를 비롯하여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332호), 태평2년명 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981호), 금암산 마애불(金岩山磨崖佛), 사적 제352호인 동사지(棟寺址)의 춘궁동 3층 석탑(보물 제13호), 춘궁동 5층 석탑(보물 제12호) 등 이곳의 산과 계곡 골짜기마다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사적 제 57호인 남한산성의 북문과 벌봉 일대도 이곳과 접해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현상은 역설적으로 이 일대가 고대 도시지역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과거의 그 위상을 능히 짐작케 해준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천왕사지(天王寺址), 동사지(棟寺址), 약정사지(藥井寺址), 자화사지(慈化寺址), 신복사지(神福寺址), 법화사지(法化寺址), 선법사(禪法寺) 등 수많은 절터가 분포하고 있는 바, 이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이는 “백제 침류왕(枕流王) 때 인도의 승려인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불교를 공인하고 도성 안에 10개의 절을 지었다” 는 기록과도 관련지어 볼 때 예사롭지 않다. 일부학자는 이것을 근거로 백제가 <고골>일대에 최초의 사찰들을 초진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중 약정사에 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약정사는 한산(漢山)에 있다”는 기록과 삼국사기의 “BC 6년(온조왕 14년)에 한산 아래에 백성을 이주시키고 하남위례성을 축조 하였다”라는 기사와 관련 지어 보면 백제의 한성(도성)의 위치를 뒷받침해주는 근거로도 볼 수 있다.

<고골>지역은 조선시대 이래로 많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백제초기 한성백제시대(漢城百濟時代)의 도성(都城)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지역으로 주목 받아왔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선생은 위례고(慰禮考)에서 “온조왕(溫祚王) 14년 도읍을 한수(漢水:한강) 남쪽으로 옮기니 곧 지금의 광주고읍(廣州古邑)이며 당시에는 하남위례성이라 하였다”라 하면서 하남위례성을 고골(광주고읍)로 단정 하였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도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남한산성 북쪽 5리에 있는 광주고읍(고골)을 백제의 하남위례성이라고 하였으며, 홍경모도 “남한지”에서 “백제 온조왕이 한산아래 천도(遷都)한 곳은 광주의 구읍치(舊邑治)가 그 곳이다”라고 하고,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지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선생도 동일한 견해를 보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백제의 왕성(王城)이 <고골>일대에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임을 알 수 있으며, 이후에도 일제시대(日帝時代) 일본 역사학자인 금서룡(今西龍) 부터 최근의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 박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이곳으로 비정(比定)하였다. “하남”이라는 시 명칭도 <고골>일대가 고대 한성백제의 장구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하남위례성의 고장이기에 이를 감안하여 선택된 지명임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의 형성은 관청을 중심으로 성장 하듯이 이 일대가 한성백제시대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행정 및 군사적으로 주변지역을 관활 통치하는 중심지로서 성장하여 왔다. 즉 진흥왕시기인 553년에 삼국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역인 한강유역 일대를 우여곡절 끝에 차지한 신라는 그들의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685년에는 9주(州) 5소경(小京)을 설치하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인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고 그 치소(治所)를 이성산성을 포함한 <고골>일대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이곳은 한반도의 한쪽모퉁이인 경주에 왕도가 있었던 신라가 그 이후 한반도를 경영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12목(牧)중 하나로 양광도(楊廣道) 광주목(廣州牧)의 치소(治所)가 있었다. 당시 광주 지역은 “고려사(高麗史)”에서 “우리나라 모든 목(牧) 가운데 으뜸”으로 평가 하듯이 가장 규모가 큰 고을 가운데 하나로 고려시대를 통해 국가 경영의 중요한 거점지역 중 하나였다.

조선 세종 때부터는 수원에 있던 관찰사(감사)가 정무를 보는 관청인 감영(監營)을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하남으로 옮겨 명실 공히 정3품(正三品) 광주목사가 종2품(從二品)인 경기도 관찰사(觀察使)를 겸하게 하는 등 전국에 목사가 파견되는 지방 중에서 유일하게 광주목만이 종2품의 목사가 관장하였다. 이는 경기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선조 10년(1577년)에는 광주목이 부(府)로 승격되면서 종2품의 부윤(府尹)을 두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이후에는 수도인 한성을 방어해야 하는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인조 1년(1623년)에 부윤체제에서 정2품 유수겸수어사(留守兼守禦使) 체제로 또다시 승격되었다. 즉 전국 8도에 종2품인 관찰사나 감사(監司)가 파견되는 상황에서 강화(江華), 수원(水原), 개성(開城)과 함께 광주지역에만 경기도에 소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형태의 유수부(留守府)라는 특별구역을 설치하게 된다. 이들 가운데서 강화와 개성은 종2품이 파견되는 것과 달리 수원과 광주만이 오늘날 각 부의 장관격인 한성판윤(漢城判尹)과 6조판서(六曹判書)에 해당하는 정2품의 관리를 파견하고 행정을 보좌하는 서리(胥吏)들도 개성부나 강화부에는 50명을 두었는데 광주부(廣州府)에는 80명을 둔 것으로 보아도 중앙에서 이곳이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은 <고골>에 있는 광주향교를 통해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본래 향교제도는 고려 성종조에 전국의 주요 지방에 설치되기 시작 하는 바, 당시부터 국가 경영의 중요한 위치에 있던 광주목에도 당연히 설치했을 가능성이 크며, 조선시대에는 안산, 의왕, 군포, 용인, 강동, 송파, 하남, 광주, 성남을 모두 관할하는 경기도 제일의 큰 향교로 그 이름을 떨쳤다. 이는 조선시대 치러진 과거시험에서 광주향교 출신의 합격자가 다수 배출하고 있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이처럼 광주 고을은 삼국시대 이래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행정 및 교육 군사의 중심지로서 지방의 어떠한 도시와도 구별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그 핵심 도시인 <고골>의 위상은 실로 대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조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亂)을 통해 공주까지 쫓겨 가는 수모를 겪은 조정(朝廷)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군사 방어적으로 더욱 중요하게 고려하면서 인조 4년(1626년) 남한산성에 수어청(守禦廳)을 설치하고 <고골>에 있던 광주의 읍치를 남한산성 안으로 옮기게 된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고골에 광주지역 전체를 다스리는 관아를 두고 광주목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고골>은 이후 중심관아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그 역사적 위치가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은 덕풍역(德豊驛)의 부침(浮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시기의 도로망은 <고골>지역을 중심으로 개설되었는데, 당시 광주지역의 역로(驛路)는 덕풍역을 중심으로 경안역(慶安驛)에 이르는 역로가 편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당시의 주요 도로망은 둔지나루(선동인근) - 온정리(온천마을) - 덕풍역(역말) -고골치소에 이르는 길과 창모루 - 동경주 - 샘재 - 고골치소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읍치가 옮겨진 후 송파진에서 율목 - 산성남문 - 경안역으로 새로운 도로가 부각되면서 덕풍역의 기능도 급속히 축소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 1905년 을사의병(乙巳義兵), 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을 거처 1919년 고종 황제의 승하(昇遐)를 계기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인 항일의병운동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제(日帝)는 조선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이 두려워 항일 반란의 기운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서 읍치(邑治)를 지금의 광주시청이 있는 <경안>지역으로 옮기게 된다. 천호(千戶)에 이르는 산성 내 민가 백성들을 지금의 서울 천호동지역으로 집단 이주시키고, 무기창고와 행궁을 포함한 성내 모든 건물들을 불태우며, 청량산에 쇠말뚝을 박아 민족의 정기를 끊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결국 남한산성도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경안지역이 광주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또한 일제는 식민지 침탈(侵奪)을 더욱 가속화 하기위해 동부면지역에 새로이 신작로(新作路)를 만든 결과 점차 이 길을 따라 신시가지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산곡(山谷)과 엄미리(은고개)를 통해 경안으로 이르는 현재의 43번 국도가 개설되고, 홍수 때마다 범람하던 더우개 및 신평리 일대의 늪지에 제방인 “신장제언(新莊堤堰)”을 쌓아 새로운 농경지가 확보되고, 학교와 관청이 들어서면서 동부면 신장동(新長洞)일대가 새로운 행정, 교육, 생활중심지로 변모 된다. 더욱이 서부면지역에서 조차도 면사무소와 초등학교가 감북동 지역에 설치되면서 <고골>은 역사의 중심무대에서 점차 외면 받게 되어 오늘날 하남시의 주변 외곽지역으로 남아 있다. 지형적으로 이곳은 고대 도시구조에 적합한 분지형태이나 군사 방어적인 필요성이 사라진 일제시대 이후에는 이곳 남쪽으로 남한산성에 가로 막혀 통행이 불편함에 따라 오히려 도시의 성장을 방해한 측면도 있다. 최근 남한산성 북문으로 통하는 도로를 개설하자는 주장이 공식적으로 제기되고, 한 민간사업자의 제안으로 상사창IC의 개설을 포함한 송파와 양평 간 도시고속화 도로의 계획이 발표되는 등 숙원사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 미래에는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변화되리라 기대한다.

3. 하남위례성의 연구 동향과 문제점

지금까지 백제사에 대한 연구는 다소 외면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역사로 기록 되듯이, 백제가 나당(羅唐)연합군의 의한 멸망(660년)으로 패자의 역사로 귀결되면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을 비롯한 신라계통에 의해 의도적으로 상당부분 축소되거나 왜곡되어 전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에게 백제의 역사는 보잘 것 없는 역사로 각인되었고, 이는 고대 삼구시대 연구에 있어서 신라사(新羅史)나 고구려사(高句麗史)로 편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욱이 백제를 한성시기(BC18~475), 웅진시기(475~538), 사비시기(538~660)로 세분할 때 백제사 연구도 주로 웅진(공주), 사비(부여)시대에 치중되어 왔으며 상대적으로 한성백제에 대한 연구는 백제사의 시작으로 그 중요성에 비해서 소홀히 다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한성백제는 680여년의 백제 역사 중 무려 493년(73%)에 걸친 시기로 고려나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필적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 시기의 백제는 일본은 물론 중국의 동해안지역(요서로부터 상해지역까지)까지 진출하여 사실상의 식민지를 경영하던 당시 최강의 해양대제국이었음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한성백제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는 역시 한성시기 백제의 도성에 대한 문제로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그 이유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중국의 몇몇 사서(史書)들의 일부 기사에게만 의지해서 연구할 수밖에 없는 사료(史料)의 빈약한 현실 때문이다. 대체로 도성(왕도)인 하남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크게 하남시 고골일대설, 몽촌토성(夢村土城)설, 풍납토성(風納土城)설로 나뉘어 진채 크게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헌적 기록의 구조적인 한계를 극복하려면 고고학적 연구 성과가 통해 구체적인 한성시대상의 복원(復元)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고고학적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고 오히려 논란만 더욱 가중되는 상황에 있다. 당시에는 고구려, 신라와 치열한 한강 유역 쟁탈전 시기이므로 이 지역(하남시, 송파구, 강동구)의 지배세력이 자주 교체되면서 삼국 시대의 유적 유물이 혼재되어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점도 그 한 원인이다. 즉 처음 이곳에 백제가 터를 잡은 이후 고구려가 이 지역을 공격하여 76년간 차지한 후, 다시 신라가 점령하였으니 그 이후 백제의 궁실(宮室), 능묘(陵墓) 등 왕가(王家)의 유적이 제대로 보존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최근의 이들 지역이 개발로 인한 훼손이 상당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유적 유물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활용할 고고학적 자료의 한계로 인하여 조선시대 정약용 선생 이후로 수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고골>일대가 백제의 고도(古都)라는 고골 백제왕도설(百濟王都說)은 현재 강단사학계에서는 역사적인 인증을 받지 못하고 다소 외면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부 고고학적 유적 유물의 발굴성과를 내세워 풍납토성을 도성으로 보려는 역사학계의 주류적(主流的) 견해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풍납동은 과거 한강이 범람할 때마다 성내천(城內川)이 역류되어 상시 물난리를 겪던 대표적인 곳이다. 더구나 한강상류에 홍수조절을 위한 여러 댐이 건설된 이후에도 성내천에 하수처리펌프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상습적으로 침수가 반복되었던 곳인데 어떻게 그 곳에 왕궁이 있었는지? 의문이며, 단지 군사적 방어를 위한 중요한 최전방요충지(最前方要衝地) 역할을 하던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사에서 한성백제의 도성에는 평상시 왕이 거주하던 “북성(北城)”과 전란 등 비상시에 이용하는 피난궁(避亂宮) 으로서의 “남성(南城)”으로 된 양성체제(兩城體制)를 유지하였던 바, 강단사학계가 내세우는 풍납토성(북성), 몽촌토성(남성)으로의 비정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성내천을 사이에 두고 바로 지척(650m)인 곳에 피난궁을 축조했다는 것인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적어도 피궁성은 산성으로 고구려의 환도산성(丸都山城)에 버금가는 요세지(要勢地)여야 하는 조건에서 볼 때 고골일대(북성), 남한산성(남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한강변의 평지성(平地城)은 외적이 침입하기 쉽고 방어하기에는 너무나 취약한 구조이다. 천연의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외부의 적을 맞아 효과적으로 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용이하고 객산(客山)과 금암산(金岩山)의 자연능선을 따라 약 10리 거리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신속히 피궁하여 전력을 재정비 할 수 있는 이곳이 도성으로 위치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개로왕 21년 한강변을 따라 제방(堤防)을 쌓되 사성(蛇城)의 동쪽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이르렀다”라는 기사가 있다. 풍납토성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당시 한강변을 따라 제방의 성격을 띠며 축조되었던 암사동 토성과 삼성동 토성사이의 “사성”, 즉 사성은 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홍수의 피해를 방지하고 한강을 타고 침입해 오는 적군으로부터 왕성인 풍납토성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으로 축조하였을 것으로 보려는 견해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여기서 숭산은 “숭배 받는 산”이며 백제의 역대 왕들이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던 동명묘(東明廟)가 있는 신성한 산으로 현재 하남시 검단산에 동명묘 제단(祭壇)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학자들은 이곳을 숭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망월지역의 구산(龜山)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성을 중심으로 동쪽인 검단산입구까지 제방을 쌓은 것으로 보이며, 이 또한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설명하는 삼국사기의 기사 “북쪽에는 한수를 두르고”라는 설명과도 형세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현재 풍납토성의 북쪽은 바로 한강이 되어 제방을 쌓을 공간이 없이 풍납토성의 북벽(北壁) 자체가 제방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군다나 풍납토성 부근에는 가장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인 삼국시대의 사찰지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2008년 10월 14일에 하남문화원 산하 “하남향토문화연구소”가 출범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과거 <고골>지역을 왕성지로 비정하였던 기존학설 뿐만 아니라 최근 고골지역 특히, 교산동의 건물지 일대를 도성으로 보려는 재야사학자들의 새로운 연구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백제문화연구회와 한국고대사연구소 등 일부 재야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고골>지역을 정밀 지표 조사하고 도시공학적인 과학적 접근을 통해 고대 도시구조를 분석하는 등 새로운 연구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이성산성의 실체, 몽촌토성, 풍납토성의 연구 성과들과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하게 될 것이다. 향후에는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들을 망라한 한성백제관련 연구자들과 일본의 기쿠치성(菊智城)과 관련된 연구자들도 함께 초빙하여 합동 학술 토론회 을 열고 그 성과물을 토대로 연구서들을 꾸준히 펴내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 고장의 진정한 역사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작은 발걸음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일본학자들의 참여가 필요한 이유는 이성산성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이해의 폭을 넓혀 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본의 백제관련학자들은 구마모토현(熊本縣) 야마가시(山鹿市)의 “기쿠치성”은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귀족들의 지도와 기술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본다. 즉 8각 건물지와 축성기법 등 여러 유사점들을 제시하며 <고골>의 이성산성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든 성으로 그 구조가 매우 흡사하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이들의 참여는 국내학자들의 논쟁에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며 결과적으로 이성산성을 포함한 <고골>일대를 하남위례성지로 위치 비정할 수도 있는 중요한 논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백제와 관련된 성이라는 그동안의 견해를 확실하게 뒷받침해주는 증거인 백제불상 2점의 유물이 성내의 연못지에서 발굴되었다는 보도(일본현지신문보도를 인용한 동아닷컴 2008년 11월 10일자 “백제계 청동불상 일본서 첫 출토” 기사)가 나오면서 이들의 참여는 더욱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산성중에서 이성산성은 두 번에 걸쳐 쌓은 매우 견고한 산성으로 그 입지나 성을 쌓은 방법의 정교함에 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성으로 평가 받는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계에서 유일한 9각 건물지를 비롯하여 8각 건물지 와 12각 건물지 등 다각형 건물지가 한곳에서 이처럼 많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여러 형태의 다각형 건물지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토속 신앙과 관련된 건물이라는 견해에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과연 이성산성이 백제나 신라중 누구에 의해 최초로 축성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이것은 하남위례성의 위치 비정과도 연관되는 문제이기에 중요하다. 물론 한양대 박물관에서 지난 1986년부터 2006년까지 20년 동안 총 11차례에 걸쳐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신라에 의해 초축(初築)된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성산성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그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신주(新州)의 치소 역할을 하던 성으로 추정하여 지금까지 학계의 주류적 견해로 남아 있다.

그런데 삼국이 모두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후 신라의 서북단 변방지역에 과연 행정과 군사적 목적이 아닌 대규모의 전통신앙과 관계된 제단이나 건물을 지을 이유가 있겠는가? 의문이다. 즉 삼국에 불교가 공인된 시기- 고구려(372년), 백제(384년), 신라(528년)에 비추어 보면 신라가 553년에 신주를 설치하고 이성산성 일대에 그 치소를 둔 시점은 이미 불교가 들어온 이후인데 그와 같은 대규모의 전통신앙과 관련된 건물들을 설립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앞서 설명 하였듯이 신라가 백제, 고구려 다음으로 이곳을 차지한 후 통일신라까지 장구한 세월동안 이 성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신라계통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다수 출토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만으로 신라의 성으로 보려는 학계의 주류적 견해에 대해서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일례로 하남향토문화연구소에서 지난 2008년 11월 15일 이곳을 답사하던 중에 동문지(東門址)에서 모골(젓가락모양)이 완연한 승선문양의 기와 와편(瓦片)이 우연히 발견 되었는바 동행한 전문가에 의하면 백제계통의 와편으로 보듯이, 앞으로도 추가적인 연구의 필요성은 충분하다.

결국 한성백제시대의 도성인 “하남위례성”의 가장 유력한 고장인 <고골>지역에서 사비(부여)시대 무령왕릉(武零王陵)에서 나온 지석(誌石)과 같은 결정적인 유적 유물이 발굴 조사되어 <고골>의 진정한 역사적 정체성이 자리매김 되기를 학수고대한다. 최근 일련의 안타까운 일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즉 서울 송파구에서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자기 관내에 있다는 이유로 매년 대규모 한성백제문화제를 열고 있는데 벌써 올해로 9주년을 맞고 있다. 정부에서 하남시, 성남시, 송파구에 걸쳐 추진하고 있는 기존 송파신도시의 공식 명칭이 얼마 전 위례신도시로 확정되는 등 우리 고장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는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하루빨리 이러한 일련의 도전들을 극복하고 허울 좋은 이름뿐인 “하남(河南)”이라는 지명에 걸 맞는 진정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도 많은 연구자들의 다양한 시도와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것은 우리 고장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이며,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후대에게도 물려줄 정신적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4. 덕풍천(?)은 고골천 이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되짚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다. 위와 같이 기존 지명에 대한 역사적 정체성을 밝히는 작업도 중요한 일이지만, 현재 통칭되는 지명이 역사적으로 그 지역의 정체성을 담보하지 못하거나, 현실적인 여러 정황으로 볼 때도 전혀 이해하기 어렵게 명명되어 있다면 이 또한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고골>지역을 관통하고 있는 하천의 지명인 덕풍천(?) 문제를 생각할 때 그러하다. 지명과 명칭이 갖는 의미는 그 지역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한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먼저 <고골>지역의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면 한강을 북으로 하고 정남에는 남한산(南漢山)이 있다. 동쪽에는 남한산성의 벌봉(515m)에서 길게 능선이 이어지다가 객산(291m)과 만나면서 교산동 일대를 동쪽에서 감싸고 있다. 서쪽은 청량산(淸涼山)에서 북쪽방향을 향하여 뻗어 내린 능선이 널무늬 고개(덜미재)를 지나 금암산(322m)을 이루고 향교 고개 길을 지나 이성산(210m)을 거처 덕풍골에 이르는 전형적인 분지의 형태이다.

이러한 천혜의 지리적 환경은 외부의 적을 효과적으로 차단 방어하고 한강을 통해 외국과의 교역을 넓혀 나갈 수 있어 왕성을 포함한 고대 도시가 입지할 수밖에 없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부아악(負兒岳:지금의 북한산)”에 올라 도읍지인 하남위례성터를 지목하는 삼국사기의 기사를 보면 “북으로는 한수(한강)를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검단산), 남으로는 기름진 들판을 바라보며(구 광주평야지대 : 지금의 성남시 둔전동 및 송파구일대), 서쪽으로는 큰 바다(서해바다)에 막혀 있으니 그 천험지리(天險地理)가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도읍을 이루는 것이 좋다”라고 하듯이 <고골>의 지형지세와 정확히 일치한다.

객산과 금암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좌우로 뻗은 이 두 산 사이에는 매우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다. 그 중심 사이로 하천이 흐르는데, 남한산성의 동쪽 끝인 벌봉을 시원으로 흘러내려 <고골>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한강으로 합류 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양옆에 삶의 터를 개척한 이래로 수천 년간 이 하천은 이곳 지역민들에게 일상생활의 젖줄 역할을 하였다.

오늘도 이곳은 과거의 화려한 명성은 사라지고 지난날 영욕(榮辱)의 역사를 뒤로한 채 말없이 흐르고 있다. 필자는 이곳을 지날 때면 남다른 감회에 젖곤 한다. 그러나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리다가도 어린 시절 뛰어 놀던 그 큰 개울가에 “2급하천 덕풍천”으로 씌어 있는 표지판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깝고 착잡하다. 게다가 지난 2008년 6월부터 하남시청에서는 이곳에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여 서울의 청계천 및 성내천과 마찬가지로 한강에서 물을 끌어올리고 수량을 늘려 물고기가 헤엄치며 새들이 날아오는 자연생태하천으로 복원하여 하남시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각종 시설을 조성하고 있다. 거창하게 “덕풍천자연생태하천복원공사”라며 서있는 공사안내도를 보면서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언제부턴가 덕풍천(?)이라는 해괴(駭怪)한 지명이 등장하여 지금까지 무분별하게 공식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심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잘못 명명된 지명이 자손 대대로 고착화(固着化) 되려는 이 시점에서 진정 울분어린 저만의 포효(咆哮)이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덕풍천(?)이란 지명은 일제시대 이후부터 사용되어 온 듯하다. 왜냐하면 일제는 한국을 효과적으로 식민침탈하기 위해 모든 국민을 호적에 올리고 모든 지역의 행정지명 뿐만 아니라 산과 하천을 포함한 자연지형에도 지명을 정하는 작업을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까지 광주 일대의 고지도상에는 “덕풍역”이라는 지역명만 보일뿐 덕풍천이라고 명명된 바가 없으며, 이와 관련된 문헌상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둘째로 현재의 행정체계 관점으로 봐도 전체 하천의 길이인 약 10km중 춘궁동 교산동지역이 약 6.7km에 이르고 신장동이 약 2.6km인데 반하여 덕풍동은 현재 덕풍현대아파트 앞으로부터 덕보교 전까지 약 0,7km에 불과하므로 분명 잘못된 지명이다. 이는 지난 10월 13일에 서울~춘천간 고속도로 중 하남과 덕소를 연결하는 새로운 대교의 명칭이 하남과 남양주간의 첨예한 대립 끝에 “미사대교”로 확정되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증명 되었다. 즉 대교의 전체길이인 1.53km중 81%인 1.24km가 하남시 행정구역에 편입된 사실이 선정위원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천의 2/3을 차지하는 <고골>이야말로 이 하천의 주인이어야 마땅하다.

셋째로 미사대교 선정에서 보듯이 1986년 3월 제정된 국토해양부 도로관리청의 시설물관리 지침에 교량이 남북에 걸쳐있는 경우 남쪽에서, 동서일 경우 서쪽에서 관리 담당하는 것 또한 선정 요인이었다. 하천인 경우에는 상류를 기준해서 명명하는 것이 상식이다. 실제로 산곡천(山谷川), 초이천(草二川), 감이천(甘二川) 등 하남시의 대부분의 하천의 지명은 이와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골>의 심장부를 흐르는 이곳은 반드시 <고골천>으로 명명되어야 한다. 이는 한성백제시대의 중심지이며 그 이후에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500여년의 오랜 세월동안 드넓은 광주 고을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한 <고골>의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거나 현실적인 지리적 위치 및 환경에서 볼 때에도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더욱이 지금 복원공사가 진행되는 이 시점에서 더 늦기 전에 제자리로 자리매김하여 <고골>의 정체성이 반드시 담보 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지명 변경 작업은 앞으로도 더 많은 논거를 찾기 위한 노력이 뒤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덕풍천(?)으로 불리어지게 된 정확한 시기와 과정에 대한 정밀한 조사와 자료수집, 2급 하천의 관리 부서인 경기도의 하천관리규정을 비롯한 공공문서의 수집분석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부족한 부분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확보하여 연구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경기도의 관리규정을 보면 하천지명선정위원회 제도를 통해 하천지명이 결정되는 바, 향후 이러한 논증을 통해 지명 변경을 신청하는 등 지속적인 운동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5. 맺는말

지금까지 <고골>의 정체성 제고 차원에서 그 역사적 위치와 변화과정 그리고 하남위례성의 위치비정(位置比定)을 둘러싼 최근까지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고 이 지역의 지리적 위치를 비롯한 몇 가지 실증적 사례를 통해 덕풍천(?)의 지명변경 문제를 제기하였다. 향후 <하남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는데 우리 고장이 다소 외면 받고 있는 현실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이 지역을 통해 결정적 단서가 발굴 조사되어 잃어버린 한성백제의 찬란한 역사가 복원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오랜 동안 광주 고을의 행정, 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한 이 지역에서 그들의 젖줄 역할을 해온 이 하천이 <고골천>으로 지명이 변경되어 <고골>의 진정한 정체성이 찾게 되기를 소망한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에는 창대하리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이러한 문제 제기가 작은 출발에 지나지 않으나 언젠가는 <고골>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성과가 나타나리라 믿는다.

앞으로 <고골>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자연생태하천으로 거듭나는 <고골천>을 통해서 하남시민 모두가 신장동지역으로부터 고골의 상사창동, 항동까지 도보로 때로는 자전거로 걷고 달리며 역사 문화와 자연생태의 살아 있는 교육장인 이곳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문화가 잘 보존되고,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한 환경 친화적인 개발로 자연생태가 살아있는 훌륭한 관광 명소의 고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고급 전원주택 지역으로 거듭날 것이다.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숨결이 살아있는 우리 고장 <고골>을 복원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데 많은 분들의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기술된 것으로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2008년 11월 청량산 자락에서)

출처 : 하남사랑 안임환 과 경제 문화 도시 만들기
글쓴이 : 하남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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