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22제후국(담로) 거느린 황제국가 백제

吾心竹--오심죽-- 2010. 2. 12. 14:04
동아시아를 아우른 백제의 역사|자유게시판
불로장생 | 조회 37 | 09.12.18 19:42 http://cafe.daum.net/ssaarissuk/Lsss/768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
고구려말과 충청도사투리와 일본어는 모두 고대부여어다.

만주의 대상인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와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의 사이에서 비류.온조가 출생했다.
일부 역사매니아들이 소서노를 골본부여의 2대 단군인 고무서의 둘째 딸-고추모와 결혼했던 공주-라고 하는데,
고무서 둘째 딸은 결혼하지 않는 여자라고 한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다.
결혼하지도 않는 여자가 어떻게 2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말이 안되는 논리다. 소서노는 우태와 결혼하여 비류.온조를 낳았다.

부러진 칼자루를 쥐고 유리가 고추모를 찾아와 고구려2대 왕위에 오르자, 소서노와 함께
진조선과 번조선의 경계지역인 발해만 지역에 어하라를 개국하여 여왕이 되고,비류가 왕위에

오른다.

 온조는 소서노와 함께 배를 만들어 타고 서해를 걸쳐 한반도 인천 소래[소서노가 오다]포구로
들어와 마한의 진왕에게 정착지를  부탁하여 경기지역을 터전으로 한강변에 수도를 잡는다.

이후 비류세력은 온조세력에 합류하게 되고[한단고기], 온조세력은 북쪽에서 내려온 고두막의 후손 구태세력과 함께 통합하고, 근초고왕때부터 본격적으로  다물전쟁에 나서는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모두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세력이기 때문에 정통성을 내세우며 패권다툼을 했다.
그러나, 혈통적으로나 단군승계차원에서 보면 고구려 고추모가 해모수의 손자이고, 고두막이 개국한
골본부여의 2대 단군에 올랐다가 토착세력에게 쫓겨 남하하여 소서노와 연타발과 비류부족의
도움으로 압록강변 골본성을 쌓고 고구려를 개국했으니 골본부여를 개국한 고두막의 후손인 구태는
정통성이 부재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구태백제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본과 중국,그리고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정치경제군사문화면에서 최고의 부국이되었으니

"고두막의 후손 구태백제가 비로소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격찬한 배경이라 하겠다.
 
고구려보다 130년이나 앞선 고이왕때 벌써 법치국가를 실현하고 기술자들를 우대하여
문화국가를 실현하고 마한의 선박술을 통하여 일찌기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하여 무역을 독점하여
부국을 이루었다.

백제의 건축술과 조형예술미가  당시 세계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배경이다.
그래서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한국에서 최고의 나라]로 극찬을 할 정도로 백제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는 섬나라였다.
최고를 의미하는 일본말 '와따'는 사실 한국말 "왔다"다.백제의 고급문화가 일본에 도착했다는 소리다!


구태백제가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관장하기위해  설치한 22담로의 책임자들은 백제황족들이 파견되었다. 흑치상지도 본래는 부여씨인데, 더운 지방의 열매를 먹어 이가 검어지는 바람에 성을 흑지라고 바꿨다는  내용이 흑지상지비문에 나온다.
흑지상지는 동남아시아지역의 담로로 파견된 백제황족임을 알 수 있다.

백제[담로]는 고구려 [담울=다물]에서 왔다. 지금은 벽에 해당하는 [담]으로 남아 있다.
고구려는 성의 나라다. 영토를 확장하여고구려 땅이 되면 반드시 담울[=담으로 친 울타리]했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역을 확인하려면 ㄷ 자 모양의 '치'와 들여쌓기 공법의 성을 확인하면 고구려 성이며 고구려 영역이였음이 증명된다.

압록강변 단동지역의 고구려 성이 만리장성의 끝자락인양 왜곡하는 중국은 역사를 왜곡하는 범죄행위

를 하고 있다.
만리장성의 끝자락은 갈석산이며, 단동지역의 '호산장성'은 천연요새였던 고구려 성이다.

당시 고구려 성을 헐여서 마을의 담벼락 돌로 사용하고, 만리장성 형태로 변경시켜 버렸다.

대진국 수도 '상경용천부'도 당나라 시대의 궁궐로 짓고 있는데, 엄청난 역사의 범죄행위다.
중국의 범죄행위에 대해 국제사회에 고발하여 중단시켜야한다.

아무튼 백제의 [담로]는 고구려의 [다물=담울]에서 온 말이다.
담울=>담우로=>담라=>담로=>담으로 변천되어온 것이다.
따라서 제令돋?나타내는 [탐라=담로]도  백제의 담로지역임을 알 수 있다.
[담안]인 중국의 [대만=타이완]도 백제의 담로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의 담로지역을 알 수 있는 흔적은 [담]이라는 지명을 찾으면 나온다.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은 [담]으로 가득차 있다.
일본 대마도도 [담아도]가 [다마도]=>[대마도]로 바뀐 지명이니 백제담로지역이였던 것이다.
백제의 담로였던 일도열도에는 수없이 많은 [담]의 지명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창세신화는 [담로]로 시작한다. 일본천황가가 바로 백제의 황실임을 알 수 있다.
염제신농.황제헌원.태호복희.여와 등 백두산지역의 동방족의 후손들이 이룩한

 중국문명의 시조들이 중국에서는 거의 신격화되어 신화와 전설로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혈통적으로 명백히 신시배달국의 제후국들이거나 신시배달국 한웅천황의 아들.딸임

은폐하고자하는 동방족에 대한 열등감을 숨기는 위장술의 수단이 신화인 것이다.

그리고, 신시배달국의 제후국들에 속했으면서 중국지역의 동이국가들을 대변하는 염제신농씨의
유웅국의 권력을 쥐고 중국지역의 동이국가들을 결집하여 중앙통치국인 신시배달국에 도전하다가
탁록에서 10년간 70여차례의 전쟁을 통하여 결국 치우천황에게 붙잡혀 신하가 되었던
중국인들이 시조로 모시는 황제헌원이 중국사가들에게는 우주최고의 신으로 과장되고,

치우는 황제헌원에게 붙잡혀 죽었다고 왜곡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씨왕조로 계승된 신라 훈족(흉노족)과  선비족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황족들이 일본열도로 망명하여 일본으로 개국하면서 한반도와의 인연을 끊는 차원에서
음양의 남녀 두 신이 만나서 담로를 기반으로 일본이 탄생했다고 위장을 하며 일본의 건국신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백제의 통치용어인 담로를 드러냄으로써 역사적 진실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담]지명은 많이 남아 있다.
지금은 장족이라는 소수민족으로 불리우지만, 백제인들이 살았다는[백제허]지명과 유물들이 증명한다.

- 윤복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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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제후국(담로) 거느린 황제국가 백제

22담로거느린 황제국가 백제를 증명하는 비석문에 '붕'자가 보인다.

황제격에 사용되는 '붕'자 기록된 공주의 백제 무녕황릉 지석문

비문내용은 삼국사기 기록내용과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소위 민족사학운운하는 자들은 이러한(한반도)고고학 자료도 마치 왜곡조작된 것인양

호도한다.그럼 아래 녹슨 백제왕 창의 명문도 왜곡조작되었다고 할 것인가?

















▲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 위덕왕의 청동 사리함 동체부에 새겨진 명문 기록 .   석함 뚜껑 개봉 직후의 사리함 모습 - "百濟王  昌"이란 이름이 뚜렷히 새겨져 있다.

백제성왕의 아버지 무녕왕이 성왕에게 남긴 유언은 고구려를 이기고 동이의 강국이 되라였다. 고구려의 한성백제공격으로 개로왕이 죽고 결국 남쪽으로 밀려나게 된 백제는 성왕 때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기위해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고,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이전했다. 부여는 당시 서해까지 뱃길이 연결되어(택리지 기록) 중국과 일본,그리고 동남아까지 무역을 할 수 있는 통로였다.
 
 즉,백제 성왕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일본-동남아를 연결하는 22담로권역으로써 백가제해의 꿈을 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백제 성왕은 불교를 국가통합이데올로기로 더욱 활성화하여 불교문화를 백제분국인 일본에 전해주어 일본을 백제의 든든한 군사적 보좌역할을 하게 했다.

당시 일본은 백제의 담로지역으로 일본의 왕은 당연히 백제성왕이였다.백제성왕의 최측근인 소가씨가 왜왕을 내세워 대리통치를 했다. 왜왕이 백제에 반항하는 기세가 느껴지면 여지없이 왜왕을 암살하고 백제왕족으로 왜왕을 세웠다.

 




한반도(백제본국)을 중심으로 중국.일본.동남아에 이르는 22백제담로 
중국영토는 동성왕이 시해당한 이후 친 동성왕계 제후들이 고구려에 복속하여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백제 22담로]-담로제도는 복속지역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지역의 생산물 수취를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근초고왕때부터 담로제가 본격화되어 영역을 분정하고 지방관을 파견해 각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였다. 담로제는 한성시대에서 웅진도읍기까지 시행되었고, 영역의 신축에 따라 가감이 있어 웅진도읍기에는 22담로가 있었다. 담로에는 단군조선시대처럼 왕족을 파견해 다스리게 하였다.



담로제는 사비시대에 방·군·성(현)제[城()制〕로 재정비되었다. 이것은 중앙집권력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방이라는 광역의 행정구역이 만들어졌다는 것과 성(현)의 수가 크게 증대된 것을 들 수 있다. 웅진도읍기의 22담로제와 비교할 때 행정구역의 수가 대폭 증대된 것이다.

 

 

 

 

 

 

 


 

 

 



그림:해상제국 백제의 무역거점지역(22담로지역:담로책임자는 황족들)

백제22담로는 무녕황릉을 통하여 그 역사적 실체가 드러났다.

백제는 22개의 제후국을 가지고 있는 황제국가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황릉]은 [무녕왕릉]이 아니라,

[무녕황릉]으로 변경되야 한다.

 

'담로'로 대변되는 아시아 해상제국 백제의 통치지역 - 당시 백제가 동남 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동아시아 해상제국 백제

 


 위 사진자료가 증명하듯이 1996년 10월 중순 중국 허난성(하남성) 수도 정주에 버스 노정을 알리는 차창 간판에는 고대 백제와 한문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 ‘백제’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그러한 흔적은 고대 백제가 중국대륙에 진출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베트남 인접지역인 광서성(廣西省) 장족자치구(壯族自治區) 일대에는 「백제향(百濟鄕)」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에서 전남지방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 서낭당 문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광서 장족 자치구(광서성) 성도 (省都)인 남녕(南寧)시 와 백제향(鄕) 사이를 오가는 버스도 있다.

역사가 남긴 흔적이다.
 


향소부곡(鄕所部曲)은 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존속한 특수한 지방하급 행정구획이다. 향·소·부곡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양민과 달리 그 신분이 노비奴婢·천민에 유사한 특수한 계급이다.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장족자치구 사람들의 명절 지내는 풍속은 고대한국 마한사람들(한반도 사람들)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들은 정월 보름과 단오절을 최대의 명절로 경축하고 있다. 장족의 민속춤인 「삼현춤」을 출 때는 춤꾼들이 둥근 원을 그리는 가운데 춤을 이끄는 남자가 삼현금으로 반주하면, 그밖의 사람들은 박자에 따라 노래하고 춤추면서 원을 줄이기도 하고 확대하기도 하면서 긴 소맷자락을 내 젓는다. 이 춤은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 동이전(東夷傳) 마한편에 나오는 강강술래와 흡사한 것이다. 후에 마한을 지배한 백제가 마한의 문화와 풍습을 계승했음은 당연한 일이고, 이를 중국대륙과 동남 아시아까지 전파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위 사진자료가 증명하듯이 백제향(鄕)에서 영업중인 삼륜 택시에도 백제라는 문구가 적혀져 있다.

 

 






<수서>에서 『(백제에는)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도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백제는 해상교역활동의 중심지로 성장해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잡거하는 국제화를 일찍부터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황해바다를 토대로 한 백제의 영역은 이후 더 확장돼 나간다.

『백제의 중이 중인도로 들어가 불경을 얻어 귀국했다』(조선불교통사) 『 백제가 부남(扶南: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일본서기) 『백제 사인(使人)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교섭을 시도한) 곤륜(崑崙: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일본서기) 
 


위의 기록들은 백제가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구축한 교역망의 범위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백제의 범위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뿐만 아니라 기원후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는 「탑등(tapen,tapeten)」이 보이는데, 이것은 양모를 주재료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이다. 또 일본 나라시에 있는 백제계 후지노키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있었는데, 이 마안구야말로  한반도, 대륙,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지역과 연결되는 6세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주는 물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모두가 당시 백제의 광범위한 국제해상활동을 알려주는 단편들이다.

이도학씨는 『백제의 동남아시아 항로는 금강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하면서 대만해협을 통과, 중국 남부 연안의 복주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해상실크로드』였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씨는 백제의 해상실크로드와 관련해 최근 주목받고 있는 존재가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펼친 흑치상지(630`~689년)라는 백제 장군이라고 말한다.


중국.동남아 지역을 지배한 백제


백제는 광범위한 해상력을 장악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까지 진출하게 된다. 백제가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한 기간(475~538년)에는 남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한 때였다. 당연히 백제의 남중국에 대한 거점 확보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송서>는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였는데,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郡) 진평현(縣)이라고 하였다』라고 전한다. 또 <양서>에서는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을 차지하였는데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라고 씌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백제의 요서경략설이다.


그러나 요서지역에 설치되었다는 진평군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불명확해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논란이 많은 문제다. 진평군과 백제군은 과연 어디일까. 중국 복단대학 역사지리연구소에서 간행한 <중국역사지명사전>을 보면 진평군은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에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위치 추정을 인정한다면 백제가 해상항로와 관련하여 중국 복주시 지역에 설치한 진평군은, 이곳을 둘러싼 유송(劉宋)과의 갈등으로 인해 3년만에 폐지되었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유균인(劉鈞仁)의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 의하면 진평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진평은 현 이름인데, 진(晉)나라가 설치하여 광주(廣州) 울림군에 소속시켰고, 남송(유송을 가리킴)과 남제도 그대로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광서(廣西) 경계에 있었다』 바로 여기가 백제의 문화유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광서 장족자치구 창오현 일대인 것이다.

이어서 백제군에 대해서는 『백제는 지명인데, 광동 흠현 서북쪽 1백80리에 소재하였고, 터가 있는데 오문과 계림 2성의 경계가 교차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 역시 광서 장족자치구내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점은 진평군이 설치된 지역은 북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팥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팥 문화는 한반도와 백제가 진출한 일본 열도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에서 문화의 공유를 발견하게 된다.게다가 이 지역과 인접한 운남성에서 김병호박사가 이끈 <중앙일보>탐사팀이 우리 민족 고유의 지게를 발견한 것도 우연의 일은 아니다. 탐사팀은 운남성의 첩첩산골인 호도현을 지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인 나시족 처녀들이 지게에 나무를 져 나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지게는 한국민족의 독창적 발명품으로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운반도구다. 한국식과 모양 하나 다르지 않은 지게를 바로 나시족 여자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간 진평군에 대한 어느 기록이 맞든 간에 이들 지역이 백제군과 더불어 해변이거나 해변과 가까운 지역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신라말의 대유학자인 최치원이 지은 <상대사시중장>에서는 『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절에는 강한 병사가 1백만명이나 되어 남쪽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범하였다』 했는데, 그 오월지방과 관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도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던 것이다. 다른 말로 백제의 국경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해안지방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중략)

또한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전한다. 백제 정복왕 근초고왕 맏아들인『(백제)근구수 왕이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1차 평야의 침입만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중국)대륙을 경략하여, 선비 모용씨의 연과 부씨의 진을 정벌, 지금의 요서·산동·강소·절강성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하였다…』(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