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철의 바다란 뜻의 ‘김해(金海)’란 지명도

吾心竹--오심죽-- 2010. 2. 12. 14:54
Re: 백제의 모습을 찾아서| 자유게시판
불로장생 조회 14 | 09.12.18 19:44

백제의 군사


 최근 인기를 더해 가는 KBS 1TV 사극 드라마 <왕건>. 나 역시 이 드라마의 팬으로 주말이면 자주 TV 앞에 앉게 된다. 남성미 넘치고 실감나는 전투 장면들과 세 영웅호걸의 박진감 넘치는 세력다툼이 여간 재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진짜 까닭은 따로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나는 그 시대로 들어가, 실제로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영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럼 영능력을 통해 본 우리의 고대사는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지금처럼 4강의 틈에 끼여 제대로 국력을 펼치지 못하는 형국이 아닌, 당당하고 세련된 외교술로 동아시아의 패권다툼에 있어 그 주역을 놓친 적이 없는 강대국 중 하나였던 것이다.

특히, 백제는 대단한 국력으로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세력을 떨쳤기에 그들의 고급스런 문화는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널리 실크로드를 통해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이 정도 국력이라면 현재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놀라운 수준이 아닌가.

 

최근 발굴된 풍납토성이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나 역시 이 한강 일대가 백제의 수도였으며 그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역사가들은 볼 수 없는 또 다른 백제의 모습을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영능력으로 목격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문제의 장소는 바로 지금 한강의 광나루터. 당시 광나루는 현재의 모습과 달리 한강 최고의 너른 백사장이 있어 서울 시민에게 최고의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옛날 영화 중, 방성자, 박노식 주연인 <징기스칸>의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멋진 곳이었는지는 짐작이 가실 터.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장안에 소문난 문제아였던 내가 그런 장소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나를 비롯해 의리로 똘똘 뭉친 몇 몇의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 텐트를 치고 각종 오락기구를 총동원해 환상의 밤을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 유일하게 통행금지 외곽지역이 바로 이 광나루였으니 그 설레임이 오죽했을까. 맞은편 워커힐호텔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백사장에 터를 잡고 연신 통기타로 노래를 부르고 트위스트 댄스를 추다 잠이 들었는데, 워낙에 밤잠이 없던 나는 텐트에서 부스스 일어나 그 넓은 광나루 백사장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와아아아!”하는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놀라 허공을 쳐다보는 순간, 어디선가 수백 마리의 군마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었다. “으악!”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엎드렸다.
‘이제 죽었구나’ 싶어 모래가 콧구멍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고개를 파묻고는 꼼짝도 안하고 있는데, 군마의 질주는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호령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슬슬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니 족히 수천은 됨직한 군인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백제군. 한밤중 나를 놀라게 한 그 수천의 군사는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채 훈련으로 밤을 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갑옷은 고구려의 것과 상당히 비슷해,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갑옷과 거의 흡사했으며 무기와 훈련 방식도 고구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백사장에 엎드려 그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친구 한 놈이 다가와 내 뒤통수를 팍 치더니 “길진아! 너 뭐 훔쳐먹었냐? 왜 여기 납작하게 엎드려 있어!”라고 말하며 웃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사라진 백제군의 환상……. 그 놀라운 백제군이 기상을
다시 한번 떨칠 날이 돌아오길 바라며, 현재 계획 중인 ‘풍납토성 문화재보존 사업’이 이루 고대사의 중요한 획을 긋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되길 기대한다.

 

 

 출처 : www.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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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쳐들어오면서 발발했다. 당시 일본의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에 맞서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의 응원군 장수는 이여송이었다. 사실로 보자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고, 조명동맹군이 이를 격퇴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숨겨진 진실은 또 다르다.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영주였으며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일본의 고니시는 그의 성(姓)인 ‘고니시(小西)’가 귀화한 백제인들이 사용한 성(姓)이라는 점. 당시 귀화한 백제인들이 ‘왜국’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의 이여송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가장 큰 이유는 명나라의 시조인 주원장이 고려인이기 때문. 이여송은 본래 경주 이씨로 귀화한 명나라 장군이었다.

한편 청의 시조이자 임진왜란 당시 여진의 족장이었던 누르하치는 누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조선에 응원군을 보내겠다고 자청했다. 세종대왕 당시 기록에 의하면 함경도인들의 대부분은 여진족이었으며, 여진족은 같은 조선인으로 생각했다.

사실상 여진이 세운 금, 청의 누르하치 본인도 경주 김씨로 조선과 한 핏줄이었던 것. 사실로 따지면 임진왜란은 한중일 삼국의 대혈전이었지만, 진실은 고대에 피를 나눈 형제국끼리 벌인 부모나라 쟁탈전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알려진 사실과 알려지지 않은 진실은 엄청난 간극이 숨어있다. 최근 북한에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경제난으로 체제붕괴가 예상된다는 사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진실은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폭탄을 우리가 이고 있는 꼴이다. 북한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을까.

너무 퍼주기만 해도 안 되지만 너무 야박해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북한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풀어주면서 극심한 경제난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어야만 우리도 북한도 살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바로 옆에 살고 있다. 사실과 진실 사이, 미묘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인연의 뿌리가 단단히 연결되어있다. 

 

 

 대마도 제①편 [아비류(阿比留)의 백제]

부산 갈매기들은 익숙한 선원처럼 진작부터 바람결에 몸을 떠올려 망을 보고 있었다. 나그네가 탄 대마도(對馬島)행 쾌속선은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미끄러졌다.

일본열도에서 대륙으로 통하는 관문인 대마도에는 역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고대 일본에서 파견된 동성왕과 무령왕이 백제의 왕이 되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부여가 함락되자 고대 일본 천황이 직접 나서 백제에 수만 군대와 수백 척의 전함, 어머어마한 물자를 동원해 국운을 건 전쟁에 뛰어들었다.
원정에 실패하자 ‘본방(本邦)’ ‘조상의 무덤을 모신 곳’을 잃었다며 애통해 했다. 단지 한반도에 국한된 통상의 역사교과서

지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대마도는 10세기 이후 해적의 근거지로 변했다. 호시탐탐 대륙에 상륙하려는 왜구는 명나라까지 진출하며 끊임없이 한반도를 약탈하여 고려를 기울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세종이 대마도에 대규모 정벌군을 보내자 일본에서는 규슈(九州)의 제후들을 총동원하여 방어에 나섰다. 거제도보다 멀지만 제주도보다는 가까운 대마도는 왜 지금 일본 영토가 되어 있을까. 역사의 미스터리를 풀기위해 나그네는 대한해협을 건넌 것이다.

요즘 말로 ‘허걱!’이었다. 벌써 대마도의 히타카스항 도착이라니…. 맑은 날엔 대마도에서 개 짖은 소리가 부산까지 들린다더니만 최단 거리 49.5㎞는 나그네가 이국의 정취에 잠길 틈을 주지 않았다. 만약 번거로운 입국 수속마저 없었더라면 홍도나 흑산도쯤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대마도 주민들도 응급환자가 생기면 132㎞ 떨어진 규슈의 후쿠오카보다도 부산으로 먼저 달려간다고 한다.

안내원은 얼마 전 대마도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부산 광안리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 광경이었다. 일본인은 부산에서 대마도에 들어오는 뱃삯을 지불할 때 한국인보다 5만 원을 더 내야 한다. 내국인을 역차별하고 한국인을 더 우대하는 대마도국의 정책이 신기하기만 하다.

대마도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유적이 널려있다. 백제 승려가 창건했다고 알려지고 있는 수선사(修善寺), 대한제국 말기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국한 최익현 선생 순국 기념비, 구한말 비운의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조선통신사 유적지 등등이 대마도 전역에 산재해 있다. 그래서인지 관광객의 9할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민가에 걸려있는 문패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아비류(阿比留)! 4만여 명의 대마도 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부옥(釜屋·가마야)’ ‘부산’ ‘아비류(阿比留)’를 성씨로 한다. ‘부산’씨는 일본에서도 대마도에만 있는 성씨이고, ‘아비류’는 ‘아사달’ ‘아직기’ ‘아사녀’ ‘비류백제’ 등과 어원이 같은 백제 계통의 성씨이니 대마도민들의 혈통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대마도 도주로 종씨(宗氏)가 들어서기 전 1245년까지 대마도를 통치한 성씨는 바로 아비류(阿比留) 가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인들도 대마도의 아비류 통치만은 흔쾌히 인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온조는 백제를 세우고 비류는 죽은 것으로 나와 있지만, 비류가 그때 절멸했다면 왜 백제가 멸망하고도 수백 년 동안 백제의 비류 왕족이 13세기 중반까지 대마도를 지배하고 있었을까. 나그네에게 비류는 대마도의 비밀을 푸는 시간의 문이었다.

소서노와 장남 비류를 중심으로 남부여족과 함께 세운 초기 형태의 백제국은 ‘어라하(於羅瑕)’라 하였다. ‘어(於)’자는 고구려가 숭배한 삼족오(三足烏)의 까마귀란 뜻인 동시에 ‘~에서 기인한다’는 뜻이다. ‘라(羅)’를 해자(解字)하면 새(隹)가 대열을 이뤄 줄지어 연결되어있다(糸)는 형상이 된다. 삼국이 본격적인 국가의 틀을 갖추기 전의 지역 명칭엔 ‘라(羅)’의 흔적이 남아있다. 경주지역엔 신라(新羅·새로운 문명인 흉노족들과 합류했다는 의미), 제주도엔 탐라(耽羅), 삼한지역엔 아라가야(阿羅伽倻·‘5가야조’에는 아야가야阿耶伽耶), ‘삼국사기’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 혹은 아나가야(阿那加耶), 광개토왕릉비와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 등 다양하게 칭해 전하지만 음운상 모두 비슷하다.

나그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임나(任那=任羅) 또한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비류는 죽은 게 아니라 고구려 유리태자와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을 포기하고 차라리 가문으로 분가하여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한반도 남단의 미지를 개척하여 새 왕국의 통치자로 분화해 간 것이다.

어라하는 백제(百濟)란 국호를 쓰면서 궤를 달리한다. 백제는 백가제해(百家濟海)를 줄인 말로 물을 낀 수많은 가문이 물(氵)을 다스린다(齊)는 뜻이다. 백제는 말 그대로 동아시아의 강과 바다를 지배하던 거대한 해상왕국이었다. 어라하는 일종의 고구려 속국 또는 형제국을 의미했으나 백제는 고주몽과의 단절인 동시에 온조를 시조로 하는 제2의 개국을 선언한 것이다.

백제의 최전성기인 13대 근초고왕 시절에는 일본남부는 물론이고 중국의 요서지역과 북경, 양쯔강 상해까지 지배하였고 백제의 지방 통치기관인 담로는 멀리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까지 흔적을 남겼다. 일본 나라현(奈良縣)이 소장하고 있는 칠지도(七支刀)도 이 무렵 만들어졌다.

일본 남부부터 동남아까지 흔적 남겨

비류가 일본 열도에 세운 대화왜(倭), 즉 비류계 백제인들은 근초고왕 이래로 또 한 번의 중흥 기회를 맞는다. 한반도 온조계 백제가 광개토대왕과의 거듭된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웅진 수복의 꿈을 접어두고 일본 나라에 강원궁을 지어 망명(나라백제)하자 일본의 비류 백제계는 발전된 대륙 문물을 더하여 확고한 정권을 세우게 되고 아스카(飛鳥)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는데, ‘구다라’는 다름 아닌 일본의 규슈(九州)지방을 일컫는다.

자동차는 대마도 남북을 관통하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내달렸다. 대한해협에 길게 누운 대마도는 리아시스식 해안이다. 북쪽과 달리 남쪽은 해발 300m 이상의 산들이 버티고 있는 남고북저(南高北低)다. 나그네가 느낀 대마도의 첫 인상은 두 남자를 섬기는 여자의 형국이었다.

황급히 찾은 곳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드문 오래된 산성이었다. 아소만이 바라보이는 미즈시마(美津島) 흑뢰성산(黑瀨城山) 꼭대기의 금전성(金田城·가네타노키)이었다. 예로부터 조선식 산성, 한식(韓式) 산성이라 불린 금전성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천지(天智) 6년(667)에 ‘대마국(對馬國)에 금전성(金田城)을 쌓았다’라고 명시되어 있어 성으로는 드물게 축조연대가 정확히 기록되어있다.

한식 산성은 자연석을 서로 엇물려 성벽을 쌓고 흙을 널빤지 성벽처럼 올려 흙망루를 지었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전통적인 성과 다른 점은 성안의 우물이다. 일본의 성 안에는 하나 같이 우물이 없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전초기지인 울산 왜성만 해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 포위되어 13일간의 ‘생지옥’을 맞보았던 적이 있다. 일본군은 본토에서의 습성대로 우물 없이 1만여 명이 진주하는 성을 축조했지만 연합군에 포위되어 물이 끊기자 꼼짝없이 갈증 지옥을 헤매야했다.

 


왜성과 달리 대마도 금전성은 성 안에 우물과 인공 개울이 있어서 장기 항전이 가능하다. 이는 한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토성들과 같은 특징이다. 나그네는 금전성이 백제식 산성임을 한눈에 직감했다. 왜 대마도에 이렇게 견고한 백제 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나그네의 눈에 부지런히 산성을 쌓는 백제인들이 어른거렸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을 당나라로 잡아가자 왜(倭)는 대대적인 원정을 준비한다. 왜는 매번 꺼져가는 백제를 되살린 세력이었기에 나당연합군은 부흥군의 근거지인 왜를 치기로 한다. 한반도에서 퇴각한 백제 유민과 고대 일본인들은 이에 대비하기위해 대마도, 규슈 등 서일본 각지에 백제식 산성을 쌓은 것이다(667). 대마도의 금전성은 그 최전선에서 맞서는 백제 결사대의 병참기지였다.

 

 

【서울=뉴시스】 아비류 阿比留 성씨 가문의 묘

 

 

 

 

 

 


 

 

나당연합군을 막기 위해 대마국(對馬國)에 금전성(金田城)이 축성된 직후(667년) 동아시아엔 지금까지 없었던,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국제적인 큰 변화가 일어난다.
660년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고 크고 작은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력이 쇠잔해진 왜(倭) 안에서는 심한 국론분열이 일었다.
이토록 왜가 국운을 걸고 백제를 지원했던 까닭은 왜 천황가가 비류 백제계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이 백제로 건너가 백제 부흥운동을 지휘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전쟁에서는 그래도 의리와 인정이 있었지만 나당연합군의 양상은 판이하게 달랐기에 내심 두려움에 떨던 왜는 ‘다시는 대륙을 넘보지 말라’는 나당연합군의 협상을 받아들이고 만다.
백제계 왜가 급작스럽게 일본(日本)으로 국명을 바꾼다. 반도 백제와의 정치적 연관성을 끊는 선언이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도 이 시기(680년께)에 쓰기 시작함으로써 한반도의 백제와 완전히 결별하는 순간이었다.

◇ 나당연합군 협상 받아들인 백제

이는 백제와 왜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 단절과 격동의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를 알리는 대격변이었다.

동시에 일본이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반도의 백제와 일본열도는 공동체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668년 고구려까지 무너뜨린 신라는 당(唐)군을 축출하기 위해 반도 내의 고구려, 백제 유민에게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쓰지만

대마도와 규슈 지방의 백제 유민들은 적대시한다. 백제 유민들의 본방 수복 요구는 끝내 외면당하고 만다.

나그네는 남북 대마도를 잇는 만제키 다리를 건너 북대마도로 향했다. 제주도의 약 5분의 2 정도 크기인 본섬과 98개의 작은 섬들로 구성된 대마도는 본래 커다란 하나의 섬이었다. 1900년 일본 해군이 대륙침략을 위해 군사용으로 아소만 근처에 인공 운하를 판다. 이때 만들어진 운하는 러일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05년 세계최강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항에 가기위해 대마도 앞 해협을 지나는 틈을 노려 일본 함대가 기습하여 발틱함대를 궤멸시키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장악하게 된다(쓰시마해전).

광개토왕이 기병과 보병 5만으로 대마도에 상륙한 이래 대마도는 일본열도의 해상 병참 요충지였다. 고모다(小茂田) 신사는 요충지였다. 고모다 신사는 고려시대 몽골군이 내습하였을 때 대마도주가 병사를 이끌고 직접 싸우다 이곳에서 수천 명이 모두 전사한 영령들을 모신 곳이다. 대마도는 크지 않은 섬이지만 한일 역사에서는 늘 분수령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약 200년간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 즉 조선통신사의 교류가 활발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으로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대마도를 거쳐야했다. 에도시대 (1600∼1868)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만든 고려문이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곳곳에 조선통신사가 방문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자랑스러워했다. 지금도 매년 8월에 ‘쓰시마 아리랑마츠리’란 축제가 열려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연되고 있다.

북대마도에 위치한 한국전망대를 돌아보고 있을 때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검은 비석이 나그네를 잡아끌었다. 조선역관사위령비였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주로 대마도에서 통역을 구했다. 대마도에서는 해마다 조선의 왜관에 유학을 겸하여 사람을 보냈는데 통계에 의하면 ‘대마도 남자의 절반이 일생에 한 번은 조선에 나왔다’고 하니 대부분이 조선어에 능통할 수밖에…. 대마도에서 통용되는 한국어가 300개가 넘고 한국식 성씨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역관사(譯官使)는 당시 일본 선비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친 일종의 교수였다. 1703년 음력 2월5일 한천석을 비롯해 108명의 조선 역관사와 4명의 대마도 선비가 탄 배는 아침 부산을 떠나 대마도를 향하고 있었다. 대마도 제3대 번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제4대 번주의 습봉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외교사절이었다.

저녁 무렵 대마도의 와니우라(鰐浦)로 입항하기 직전 항구를 바로 눈앞에 두고 갑자기 거센 폭풍이 불어 닥쳤다. 배가 침몰하여 전원이 익사하고 말았다. 조선역관사위령비는 그들을 기리고자 112명의 영??상징하는 112개의 초석으로 비를 세웠다.

나그네는 이국땅에서 불귀의 객으로 떠난 영령들의 비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였다. 홀연히 한줄기 바람이 휘익 불어왔다. 조선 선비의 단아한 음성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근래 들어 조성된 자신들의 추모비를 고마워했다. 조일외교관의 임무 수행자답게 나그네에게 따끔한 충고 한마디를 남겼다.
“막으면 터질 것이요, 뚫으면 통할 것이다. 그것이 통신(通信)이오.”

말이 조선통신사였지 사실 그동안 한일 양국은 ‘통신’이 거의 두절된 상태였다. 667년 대마국(對馬國)에 금전성(金田城) 축성 무렵을 시발로 한 일본의 대륙봉쇄 영향인지는 몰라도 활발한 조선통신사 행렬 와중에도 일본인은 한양에 입성할 수 없었다. 오직 조선만이 일방적으로 열도에 문물을 전해야했다. 일방적인 통신은 반작용을 낳게 마련이다.

◇ 신분증만 있으면 누구나 토지 소유

급기야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같은 적대적인 방식으로 불통의 역풍을 맞았다. 알고 보면 지금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철책, 남으로는 해협으로 장벽을 쌓고 있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누구 말대로라면 소통은 북쪽만이 아니라 남쪽도 시급할지 모른다.

일본은 백제와 결별했지만 대마도는 늘 어느 곳을 섬길지 눈치를 보고 있다. 강성했던 고려와 조선에 조공을 바쳤지만, 임진왜란이 터지자 일본을 섬겼다. 17~18세기 다시 조선이 융성하자 통신사를 맞이했다. 일본이 개화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자 다시 일본이 되었다. 이처럼 대마도는 늘 강한 쪽을 섬겨왔다.

최근 한일 해저터널 착공이 또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수십 년 전부터 거론된 이래 교착상태다.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와 일본과의 역사적 앙금 때문에 대한해협엔 풍랑이 심하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세계자유무역체결이 한창인 지구촌 시대에 50㎞도 채 안 되는 해협을 못 건너고 있다니 우리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인도 대마도의 땅을 살 수 있습니다.” 누구 말대로 신분증만 있으면 국외 외지인도 얼마든지 대마도의 땅을 구입할 수 있다. 이는 일본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점이란다. 일본은 하와이, 남미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 광대한 땅을 소유하여 일본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데 한국도 그런 식으로 대마도를 점거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나보다.

 

일본 열도에서 독도 망언이 터질 때마다 심심치 않게 대마도가 입에 오르내리더니 급기야 얼마 전에는 우리나라의 지방정치인들이 대마도에 와서 영토에 대한 정치적 발언을 해 눈총을 받은 바 있다. 소유권의 주장은 얼른 듣기에는 솔깃할지 모르지만 국가 간 영토분쟁이 인류 역사상 유익하게 해결난 적은 없다.

바야흐로 문화영토권 시대다. 누구의 것인가보다 누가 선용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문화의 시대다. 돌연 나그네의 눈에 대한해협 바다 밑으로 자동차가 오가는 장면이 스쳤다. 왠지 앞으로는 한일 양국 간에 대마도가 독도보다 더 뜨거운 감자가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 나그네가 이런 저런 감회에 젖어있는 동안 아스라이 부산항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해협이 태평양보다도 넘을 수 없는 그렇게 깊은 바다인지 되뇌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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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의 아미처럼 곱디고운 서쪽 지평선을 뒤로하고 탁 트인 호남평야를 달리다보면 별안간 산맥이 우뚝 가로막는다. 사방 백리가 넘는 평지에 가파르게 치솟아 호남정맥(湖南正脈)을 이루니 해발 793m 국사봉을 머리로 이고 있는 모악산(母岳山)이다.

모악산은 ‘평지돌출산’이다. 사방이 탁 트인 평지 돌출산은 선각자들의 보금자리다.
모악산은 ‘고려사’까지만 해도 ‘금산(金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산 이름은 고찰에서 유래하는 경우가 많기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연유했다고도 하고, 사금(砂金)이 많이 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미륵신앙의 메카 금산사

어떤 이는 정상 근처의 쉰 길 바위의 형상이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엄뫼’라고 부르다 금산으로 의역, 음역되었다고 하나 왜, 그리고 언제부터 모악이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주변 지명이 여전히 금구면(金溝面), 금평(金坪), 김제(金提)로 불리며 금산(金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모악산은 미륵의 땅이다. 모악산엔 미륵신앙의 메카 금산사가 있으며, 세상이 어지러우면 사람들은 여지없이 모악산에 모여들어 사회변혁의 이상을 충전해 갔다. 모악산은 이상세계를 꿈꾸는 수많은 인간 미륵을 품었다. 진표율사, 후백제의 견훤, 기축옥사의 정여립, 한국 불교 최고의 기승 진묵대사에서부터 근세의 전봉준, 증산 강일순, 보천교 차경석, 원불교 소태산, 대순진리회 조철제, 증산도의 안경전 등이 이 지역에서 태동했고 선도교, 태을도 등 증산계열만 해도 100여 개 종단이 난립했다.

그들 중에는 금산사 미륵의 현신임을 자처한 이도 있으며, 전용해의 백백교는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과연 미륵의 땅인 모악산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나그네는 금산사 쪽에서 출발해 전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금산사 들어가는 사거리에 앞 뒤로 ‘해원(解寃)’ ‘상생(相生)’이라고 새겨진 거대한 돌비석이 장승처럼 나그네를 맞이했다. 강증산은 모악산을 가리켜 ‘신도안의 계룡산은 수탉이고 모악산의 계룡봉은 암탉인데, 이 암탉이 진계(眞鷄)’라 하였다. 흔히 풍수지리가들은 모악산의 형상을 오공비천혈(蜈蚣飛天穴)이라 한다.

오공(蜈蚣)이란 지네를 말한다. 모악산 정상에서부터 산이 겹치면서 아래로 구불구불 급하게 뻗은 모양이 지네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내려오면서 머리를 쳐든 형국이라 그렇게 부른다. 그 오공비천혈 최고 혈자리에 금산사가 자리 잡고 있다.

599년(백제 법왕1)에 창건돼 1400년이 넘은 금산사는 송광사와 더불어 동양 최고의 사찰로 수많은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 미륵신앙의 성지다. 금산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나 인조 때 재건되었고 지금도 석련대, 당간 지주, 석종, 각종 탑 등 보물이 즐비하다.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상생신앙과 말세를 구제하러 미륵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신앙으로, 이상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인 미륵을 믿는 불교적 이상 사회관이다.

미륵의 금산사에는 백제의 혼이 깃들어 있다. 미륵신앙은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의 통치 이념이었기에 양국은 치열한 자웅을 겨루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는 금산사와 함께 익산 미륵사를 세워(601) 왕권을 강화했다. 이에 맞서 신라 선덕여왕은 황룡사에 거대한 9층 목탑을 짓는다(645).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미륵전쟁에서 백제가 멸망(660)하자 익산의 미륵사는 서서히 쇠락했다. 그러나 모악산의 금산사는 백제가 망한 뒤에도 복신, 도침과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扶餘 豊)이 중심이 된 백제 부흥운동의 한 거점이 되었다.

금산사의 백미는 역시 웅장한 미륵전이다. 미륵전의 겉모습은 3층으로 되어있고, 내부에는 층이 없는 한 통이며 동양최대의 실내입불인 미륵불을 봉안하고 있다. 백제는 정복자인 신라에 의해 철저하게 지워졌기에 지하에 잠자던 공주의 무녕왕릉마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금산사는 거의 유일한 백제 유적이 될 뻔했다. 미륵전 건축에 전해지는 설화는 얼마나 어렵사리 백제 혼을 되살렸는지 엿보게 한다.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663)하고 꺼져가는 금산사를 중창한 건 진표율사(眞表律師)였다. 진표율사는 패망한 나라 백제의 김제평야에서 태어나(734) 12세에 금산사로 출가한다. 진표율사는 부안 내변산 꼭대기 천 길 낭떠러지 모퉁이에서 찐쌀 스무 말을 가지고 죽음을 각오하고 정진한다.

백제 부흥군이 마지막으로 완강히 저항하던 곳이 주류성(周留城)이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지금의 부안군 우금산성(울금산성)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표율사가 미륵불을 친견하고 깨우침을 얻은 곳을 ‘부사의방(不思議方)’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주류성 길목이었다. 마지막 백제 부흥군이 처참하게 스러져간 곳에서 미륵불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진표율사는 부사의방에서 계시를 받은 후에 금산사로 돌아와서 미륵전을 짓기 시작한다.

백제의 멸망으로 쇠락한 미륵사

금산사에 커다란 연못(방죽)이 있었다. 진표율사가 이를 메우고 미륵장존불을 조성하려는데, 이상하게도 흙으로 메우면 다음날 어김없이 다시 파헤쳐지곤 했다. 연못에 사는 용이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이때 지장보살이 현신하시어 진표율사에게 숯으로 연못을 메우면 용이 떠날 것이라고 방도를 알려 준다. 하지만 연못을 메우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숯이 필요했다.

그때 갑자기 마을에 눈병이 창궐했다. 진표율사는 묘안을 냈다. 누구든지 연못에 숯을 한 짐 쏟아 붓고 그 물로 눈을 닦으면 낫는다고 널리 알렸다. 연못은 순식간에 숯으로 메워졌고, 신기하게 눈병도 말끔히 나았다. 1985년 미륵전 보수공사를 위해 굴착기로 땅을 팠더니, 실제로 검은 숯이 나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만들어진 지금의 미륵불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塑造佛)이다. 하지만 처음엔 쇠로 만든 철불(鐵佛)이었다고 한다. 금산사 미륵불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불상들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의 작은 크기의 반가사유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큰 대불(大佛)을 조성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 대불은 수많은 부처 중 미륵불이었을까.

금산사 미륵불은 소수 귀족층의 밀교에서 민중불교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소승불교에서 값비싼 금은으로 만든 작은 불상을 귀족들이 혼자 모시며 예불을 드렸다면, 대불은 누구나 친견할 수 있어 누구의 소유도 아닌 우리들의 부처를 뜻한다. 아무리 높은 계급이라도 거대한 부처 아래 평등함을 상징하고 있다. 부처의 눈엔 이미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륵전 자리를 십시일반 숯을 날라 메웠던 일화에서 짐작하다시피, 철불을 만들 때도 민중들이 하나씩 불사한 숟가락 같은 쇠붙이들을 한데 녹여 모두의 부처님으로 현신시켰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미륵신앙은 소수 귀족계층에서 온 백성의 미륵으로 거듭났다.

금산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금산사 경내의 송대(松臺)에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석종(石鐘)은 종 모양의 석탑이다. 고려 초에 조성된 걸로 추정하는 석종은 매우 넓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인 방등계단(方等戒檀) 위에 세워져있다.

호남의 모든 사찰이 신라 승려나 왕족들이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금산사만은 백제 사찰임을 분명히 명기하고 있다. 백제 왕족의 복을 비는 것으로 창건된 금산사임에도 불구하고, 백제 법왕의 창건임을 밝힌 이유는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략적인 포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왕족이 아닌 민중들의 땀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모인 미륵불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금산사는 백제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미륵의 성지로 면면히 백제의 혼을 이어나갔다. 200여 년 뒤, 백제는 다시 금산사에서 후백제로 부활한다(900).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16호(1월26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 백제혼 깃든 금산사 미륵전, 온화미소 민중염원>
 
 
 

<후백제의 성문인 홍예문. 후백제 44년에 축조한 금산산성이라는 전설이 전하며 금산사 입구 현 위치로 이전 복원했다.>

백성들은 민심이 흉흉할수록 현실보다 미래에 기대하는 미륵신앙에서 위안을 받고 대안을 찾으려 했다. 민중들의 염원이 모인 모악산은 모든 사회 변혁운동 이념의 산실이었다. 미륵신앙은 이상사회의 통치이념으로 또는 민족종교로 변신하며 시대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견훤은 스스로 환생한 미륵임을 자처하며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된다.(900)

견훤은 모악산 금산사(金山寺)를 자신의 복을 비는 사찰로 삼고 중수하여 백제의 계승자임을 선포한다. 견훤은 중국의 오(吳)·월(越)과 통교를 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였고 신라의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는 등 막강한 백제 재건에 성공한다.

◇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정여립

그러나 후백제는 너무 짧았다. 내부 분열로 부흥운동마저 실패했던 백제의 전철을 후백제도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다. 견훤은 넷째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지만 이를 시기한 다른 아들들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다음, 신검(神劍)이 왕위에 오른다. 3개월 후,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고려로 망명, 태조와 협력하여 10만 대군으로 후백제를 총공격했고, 격전 끝에 후백제는 고려에 굴복, 93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상세계를 향한 꿈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1546년 모악산 부근 금평 저수지 위 구릿골에서 태어난 정여립(鄭汝立)은 영국의 정치가 크롬웰보다 50년이나 더 앞서 공화정(共和政)을 주장한 걸출한 선각자였다.

 

통솔력이 있고, 명석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했던 정여립은 24살에 과거 급제하여 십수 년간 순탄하게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나 유학의 계급관료적인 폐단을 꿰뚫은 정여립은 왕권 체제 하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는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혈통세습이 아닌 능력세습’이라며 왕권의 세습을 반대하였고,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그리고 신분철폐를 주장한다.

너무 시대를 앞선 탓일까. 정여립은 선조왕의 미움을 사 관직을 떠나게 된다. 낙향한 정여립은 구릿골 일대 제비봉을 중심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매월 보름날에 활을 쏘고 무예를 익히며 잔치를 베풀었다. 대동계원은 양반, 상놈, 승려 등 신분귀천이 없었다. 대동 계원 스스로 향토를 방어할 수 있는 군사훈련도 병행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향토방위대쯤 된다. 왕조 속에서도 모악산에 작은 공화국을 건설한 셈이었다.

 

정여립은 백제나 후백제가 세습 신분 계급을 근간으로 하는 왕조라는 한계 때문에 미륵 세상을 건설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신분이 아니라 개인 능력에 따라 등용하며, 민중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공화국이 정여립이 꿈꾸는 미륵 세상이었다.


1587년(선조 20) 왜군이 손죽도로 쳐들어오자, 정여립은 전주 부윤 남언경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여 대동계를 즉각 출동해 왜군을 물리친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군대의 출동은 조정에 보고되고, 대동계를 중심으로 역성혁명을 준비한다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백성들 사이에선 벌써 ‘이가(李家)는 망하고 정가(鄭家)는 흥한다’는 정감록이 횡행했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안악군수, 재령군수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고 만다. 무오·갑자·기묘·을사 4대 사화(士禍)를 합한 희생자보다 더 많은, 선비만 1000여 명이 처형당하는 피의 지옥이 연출되니,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등용에 제한을 당해야 했다. 이렇게 정여립의 거대한 미륵 세상 구현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무고한 원혼들의 저주였을까. 공교롭게도 3년 뒤인 1592년 조선은 비류의 백제가 세운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온 나라가 불타게 된다.(임진왜란)
임진왜란 때 호남평야를 지킨 것은 관군(官軍)이 아니라 의병(義兵)들이었다. 의병은 정여립이 대동계에서 조직한 향토방위대가 전신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근래 역사가들 중에는 정여립이 이이(李珥)의 ‘십만양병설’에 자극받아 임진왜란을 미리 준비했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역모로 조작했다고 재평가하기도 한다.

금산사에서 서편으로 한 시간 가량 걸으면,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전주로 넘어가는 모악산 자락에 창건했다는 귀신사(歸信寺)가 나온다. 1992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양귀자의 소설인 ‘숨은 꽃’의 무대가 바로 귀신사다. ‘그는 귀신사에 있었다. 나는 그를 귀신사에서 만났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은 귀신사를 이렇게 소개한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이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절이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종종 그 절을 찾는다고 했다.” 뒤뜰에 엎드려 앉은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돌사자상이 이채롭다.

모악산 동쪽 구이면 원기리에서 선녀폭포 쪽으로 가다보면 전주 김씨 시조묘 입구에 전주김씨 종가에서 세운 공덕비와 정자가 있다. 군사정권시절 이 묘는 공공연한 국가기밀로 접근이 금지되었다. 이곳을 찾으러온 풍수지리가들은 덩치 큰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김일성(金日成)의 32대 조상 김태서의 묘가 위치했기 때문이다. 일명 ‘김일성 조상묘’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접근 금지였다.

◇ 모악산에 자리한 ‘김일성 조상묘’

육관 손석우씨가 지은 ‘터’라는 풍수지리책에는 ‘이 묘의 지기가 발복하여 그 후손이 장기집권을 하게 되며, 그 운이 49년 만인 1994년 9월에 끝난다’라는 내용이 예언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내용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예언한 날짜와 근소한 차이로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1994년 7월)부터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 모악산의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모악산을 동쪽에서 오르다보면 고려 밀교(密敎)의 본산지인 대원사(大願寺)가 나온다. 밀교의 특징은 불보살의 초월적인 가피력을 강조하는데, 병이 낫는다든지, 외적 침입을 격퇴한다든지 인간사의 각종 애환들을 치유한다. 강증산이 수도하여 도통했다는 대원사는 진묵대사(震默大師)의 자취가 여전하다. 진묵대사는 숱한 이적과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보였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으로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한국 불교사상 가장 신비로운 스님이다.

진묵대사는 전주의 장날에 가서 동중정(動中靜)을 시험했는데, ‘오늘은 장을 잘 보았다’하면 북새통인 장터에서도 내면의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이고, ‘오늘은 장을 잘 못 보았다’하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곡차(穀茶)란 말도 진묵대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던 진묵대사였지만, 같은 잔이라도 ‘술’이라하면 외면하다가 ‘곡차’라고하면 벌컥 들이켰다. 대원사에서 정상 쪽으로 도보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수왕사에는 지금도 송홧가루를 재료로 하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가 빚어지고 있고, 진묵대사가 술을 빚었던 도구들이 전해진다고 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 진묵을 보러 찾아왔는데, 그만 해가 질 때가 되어 밤길이 걱정되었다. 진묵대사는 어머니를 따라 나서지 않고 산문(山門)에서 배웅했다. 그런데 분명히 서산으로 져야 할 해가 집에 당도하도록 수 시간동안 걸려 있었다. 어머니가 대문을 열자 해가 뚝 떨어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진묵대사는 출가한 승려로서 대를 이을 손이 끊기어 그의 어머니 묘에 성묘할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어머니 무덤에 고사를 드리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된다는 말을 퍼뜨렸다. 효험이 입소문을 타자 오늘날에도 많은 참배객이 줄을 이어 이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40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잘 보존 되어 내려오고 있다.
후세들은 이 무덤 자리를 ‘무자손 천년향화지지(無子孫 千年香火之地)’ 즉 자손이 없어도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1000년 동안 이어지는 명당이라 부른다.
<세상을 바꾸려한 이상향 꿈들, 무산됐어도 정신만은 절절이.>

모악산③편 [문화예술의 젖줄]

수왕사에 모셔진 진묵대사의 영정. /뉴시스 아이즈
모악산이 품은 걸출한 인물들 중에 과연 누가 미륵의 세상을 펼쳤을까.
진묵대사와 같은 시대에 활약하던 유명한 승려가 서산대사인데, 혹자는 서산대사를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호국불교의 상징이요, 진묵대사를 철저한 은둔자로 대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진묵대사의 일화는 미륵 세상을 구현하는 또 다른 차원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엿보게 한다.

하루는 진묵대사가 저명한 유학자 김봉곡(金鳳谷)에게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빌렸다. 하지만 봉곡은 곧 크게 후회했다. ‘진묵은 불법을 통한 자인데, 만일 유도(儒道)까지 정통하면 대적하지 못하게 될 것이요, 또 불법이 크게 흥왕하여지고 유교는 쇠퇴하여지리라’며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책을 도로 찾아오게 했다. 봉서사 산문(山門) 어귀에 이르기까지 한 권씩 떨어져 있는 책을 모두 주워 거두어갔다.

◇ 유학에까지 통달했던 진묵대사

나중에 봉곡이 책의 내용을 물으니 진묵대사는 한 줄도 틀리지 않고 줄줄 외웠다. 산문에 이르는 동안 이미 책을 모두 독파하여 그때마다 한 권씩 버린 것이다. 이를 시기한 봉곡이 진묵대사가 깊은 삼매에 빠져있을 때, 유체 이탈한 진묵대사의 육신을 그만 화장해버렸다. 허공에서 진묵대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각 지방 문화의 정수를 거두어 모아 천하를 크게 문명케 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봉곡의 질투로 인하여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되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이제 이 땅을 떠나려니와 봉곡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질을 면치 못하리라.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갔느니라.” 그때부터 서양문명이 융성했다고 한다.

근대 천지공사는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에 의해 펼쳐졌다. 구한말 세계열강들이 한반도를 농락할 때,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군이었다. 1860년 경주 출신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호남에서 미륵신앙이 더해지면서 급진 양상을 띤다. 백성이 주인이고, 터전은 내가 지킨다는 대동정신은 본래 동학의 지도부와 궤를 달리하여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우는 농민혁명군으로 거듭나 독자적인 무력혁명을 감행했다.

한편 증산은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모악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두승산 아래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일명 ‘손바라기 마을’에서 태어난 증산 강일순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때 김제에서 서당 훈장을 하면서 전봉준 등을 만나 동학농민군은 패망할 것이라 예견했다. 그의 예견대로 혁명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남기고 실패했다(1894).

외세는 그 공백을 틈타 더욱 기승을 부렸고, 증산은 절망에 빠진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골몰했다. 그때 논산의 김일부를 만나 후천개벽사상의 원리를 배우고, 모악산의 대원사에서 수도 정진하여 도통한다. 증산의 눈에는 조선 왕조 몰락의 근본원인이 누적된 원결(怨結)의 과보(果報)로 보였을 것이다.
금산 저수지 위에 위치한 구릿골(동곡리)의 광제국(또는 만국의원)에서 병든 사람과 사회를 치유하려 9년간 제자들을 모아놓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벌인다. 천지공사의 핵심은 해원(解寃), 즉 그동안 쌓여온 하늘 귀신과 땅 귀신과 사람 귀신 등 모든 신명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증산은 고대 삼국으로부터 누적된 전쟁으로 인한 개인적, 집단적 원한과 신분 계급 왕조의 누적된 폐해가 불러온 과보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했다. 증산 나이 38세인 190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신도들에게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였다. 대원사에서 도통한 증산이 최후엔 금산사 미륵불을 말한 것이다. 증산이 금산사 미륵불을 지칭한 것은 외양을 친견하라는 것이 아니라, 분별없이 민중 속에 살아 숨 쉬는 불성(佛性)을 보라는 것이리라.

증산이 죽기 1년 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차경석(車京石)의 집에서 천지 굿이라는 큰 굿판을 연 적이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억압되었던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해방을 상징하며 후천이 개벽이 되는 가히 혁명적인 의식의 굿이었다. 차경석은 동학농민혁명의 십대 접주 중의 한 사람이었고, 평민두령으로 이름을 떨쳤던 차치구의 아들이며, 훗날 보천교(普天敎)의 교주가 된다.

보천교도는 조선총독부의 집계로도 170만 명을 웃돌았고, 전해 내려오는 얘기로는 70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때 인구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보천교 신자였던 셈이다. 실의에 찬 민중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는데, 차경석(일명 차 천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 이후 보천교는 일제에 의해 급격히 와해된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 십일전 건물은 경매되어 서울의 조계사로 옮겨져 대웅전으로 겨우 남아있고, 신도들이 숟가락 하나씩을 모아 만들었다는 1만8000근짜리 종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모악산이 후천세계의 중심지라 하여 증산을 믿는 사람들이 집단 이주했고, 수많은 종단이 들어섰다.

모악에는 상극이 공존한다. 가장 대중적인 부처가 있는가 하면, 가장 은밀한 부처도 있다. 그래서 모악만이 감히 해원상생(解寃相生)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남은 ‘반역향(反逆響)’이란 멍에를 썼다. 미륵의 땅이자 반역의 땅 모악산. 상극의 평가가 엇갈리는 모악산의 진면목은 어떤 것일까.

태조왕건 ‘훈요십조’ 호남차별 명문화

백제의 견훤과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여 승리한 태조 왕건은 왕권조차 평등한 미륵신앙을 두려워했을까. 호남 차별을 명문화한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겼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지역차별을 명문화한 훈시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광주사태라 할 수 있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벌어지자 정여립의 출생지인 해발 300m 제비산은 ‘역모의 땅’이라고 하여 땅을 파헤쳐 숯불로 혈맥을 끊고, 그 근처엔 집조차 들어서지 못하게 했다. ‘연려실기술’엔 정여립을 지금의 사탄(악마)에 해당하는 ‘악장군(惡將軍)’이라 기록하여 극렬히 폄하하고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호남은 산발사하(散髮駛河)의 풍토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호남의 강들은 저마다 흩어져 흘러 호남 기질은 끈기가 없다는 뜻이다. 반면 영남의 물은 모두 낙동강으로 흘러 합심이 잘 된다고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도 ‘지금도 지역이 멀고 풍속이 더러워서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심각한 지역적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풍수지리를 논하려면 차별 없는 자연의 눈을 가져야하고, 적어도 중용(中庸)의 미덕쯤은 잃지 말아야한다. 큰 눈으로 본다면, 호남 강물이 서해로 흩어져 나가든 영남 강물이 한 곳으로 모이든 결국 모든 강물은 머지않아 하나의 바다로 모이게 되어있다. 산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전체가 어울려 산하가 되는 것처럼, 평등 속에 차별이 있고 차별 속에 평등이 있다.

나그네가 본 평지돌출 모악산은 어머니의 풍성한 젖가슴 형국이다. 어머니의 젖을 빨며 꿈꾸는 아이처럼, 모악은 이상세계를 꿈꾸는 걸출한 인물들을 길러냈고 수많은 선각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왔다.
나그네의 지친 발걸음은 전주의 한정식 집으로 향했다. 지아비처럼 반기는 주인장의 환대 속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한 상이 차려져 나왔다. 동행한 지인들 그 누구도 전주가 맛의 본존임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모악산이 품고 있는 전주는 명실 공히 예향의 고장이다. 전주대사습놀이를 비롯해 하나같이 문화의 근간이 되는 빛, 소리, 음악, 글, 종이, 풍악, 맛에서 최상을 아우르고 있다. 이런 문화예술의 ‘끼’는 솟아나는 샘물처럼 절대로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다. 활짝 핀 꽃의 향기처럼 주변에 널리 널리 문화의 젖줄을 공급한다. 그래서 미륵의 꿈, 모악의 꿈은 문화의 꽃으로 찬란하게 피어서 한 시도 진 적이 없다. 이것이 미륵의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모악산은 내게 아버지의 산이자 어머니의 산이다. 금번 경찰종합학교 교재 ‘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선친 차일혁 총경은 모악산 자락에서 태어났고, 묘소도 그곳에 있다. 나그네 또한 전주 출생이고, 젊은 시절 만행을 하면서 한동안 대원사(大願寺)에 머문 적이 있다.

 낙동강①편 [낙동강의 주인, 가야]

【서울=뉴시스】 대가야의 도읍지인 경북 고령군 지산리 가야 고분군. /뉴시스 아이즈
낙동강은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이다.(521.1㎞)
육로가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 낙동강은 단순한 강물 이상이었다. 영남지방의 대동맥일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잇는 국제 해상무역의 중간 기지였다. 1세기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 남부는 낙동강 수로 쟁탈전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倭)가 치열하게 자웅을 겨뤘고 끝내 낙동강을 차지한 신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잡았다.
통일 이후 비교적 잠잠했던 낙동강이 대운하 문제로 다시 꿈틀대고 있다. 낙동강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나그네는 이 의문을 품고 낙동강으로 향했다.

서기를 전후해 한반도에는 고구려(BC 37), 백제(BC 18), 사로(신라 BC57)에 이어 가락국(AD 42)이 자리 잡았다. 낙동강에 자리 잡은 주인은 제4의 제국이라 불리는 가락국(가야)이었다. 가야 연맹의 터전이었던 김해(금관가야 金官伽耶), 고령(대가야 大伽耶), 상주, 합천, 창령(비화가야 非火伽耶), 함안(아라가야 阿羅伽耶), 성주(성산가야 星山伽耶), 고성(소가야 小伽耶) 등은 모두 낙동강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다. ‘낙동강(洛東江)’이란 명칭은 ‘가락국(또는 가야)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란 뜻이다.

◇ 최근 고대 가야 유물 발굴로 연구 활기

가야에서 직접 남긴 사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여타 사료에 조금씩 기록되어있는데, ‘삼국사기’에 약간 남아있는 기록은 승자인 신라 관점에서 왜곡이 극심하다. 다만 1075~1084년 금관주(金官州 김해지방)의 지사(知事)였던 문인으로 추측되는 사람이 편찬한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있었으나, 이마저 전해오지 않고 그 내용의 일부가 ‘삼국유사’에 요약되어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락국기’가 한참 후대에 편찬되었고, ‘삼국유사’는 설화적인 윤색이 많은 야사(野史)라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광개토왕비문, 3세기 후반 중국에서 편찬된 ‘삼국지’와 7세기 이후에 쓰인 ‘일본 서기’에 남겨진 단편적인 사료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고대 가야 일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속속 축적되면서 한반도 ‘제4제국’으로서의 거대한 신비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나그네가 김해에 도착하자 모든 이정표는 수로왕릉과 왕비릉으로 통하고 있었다. 석탑을 받들고 있는 두 마리의 물고기를 그린 ‘쌍어문(雙魚文)’으로 유명한 수로왕릉은 김해시 한 복판에 위치한다. 각종 축조물들과 함께 5만9504.4m²의 대규모 공원으로 조성된 왕릉은 그 위용이 서울의 경복궁에 못지않았다. 도보로 몇 십분 거리에 ‘파사석탑(婆娑石塔)’으로 더 잘 알려진 부드럽고 단아한 수로왕비릉이 자리 잡고 있다.
나그네가 전에 본 백제의 유적지는 어딘지 쓸쓸하고 처연했지만, 가야의 유적지에서는 왠지 당당하고 늠름한 기운이 강했다. 모두 신라에 패망한 백제가야이건만 왜 그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고대 한반도 4개국 모두 건국 신화가 전하지만, 가락국만큼 신비하고 극적이진 못하다. 서기 42년(신라 유리왕 19) 금관가야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 김해 구지봉(龜旨峰)에 모였을 때, 하늘로부터 붉은 보자기가 내려왔다. 보자기를 펴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를 얻었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화하였다. 그 중 키가 9자(尺)이고 팔자 눈썹이며 얼굴은 용과 같이 생긴 인물이 생겼는데, 처음으로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였다. 황금알에서 나와 성씨를 ‘김(金)’으로 하고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김수로왕이다.

서기 48년 수로왕은 신하를 보내 포구에서 한 여인을 맞이하게 한다. 과연 바다의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한 척의 배가 다가왔다. 배 안에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 타고 있었다.
허황옥은 본국에 있을 때 부모의 꿈에 옥황상제가 계시한대로 가락국왕에게 시집오기 위해 배를 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파도가 높아져서 배를 다시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해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비방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파사석탑이다. 허황옥은 석탑을 배에 싣고야 무사히 가락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엔 호락호락하지 않던 허황옥은 수로왕이 직접 마중 나온 것을 보고서야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쳤다. 왕과 왕비는 설치한 장막에서 두 밤 한 나절의 허니문을 보낸 후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내고 대궐로 돌아왔다. 이후 수로왕비는 서기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묻힐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이로써 가락국은 서기 42년부터 532년까지 10대에 걸치는 왕들이 이끄는 490년 왕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파사석탑 설화는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파사석탑이 현재의 수로왕비릉에 위치한 것은 1873년이다. 원래 호계사(虎溪寺)에 있다가 폐사(廢寺)된 뒤 부사 정현석이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가 대리석처럼 박혀있는 파사석탑은 ‘신농본초(神農本草)’에는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해보니 피가 스미거나 굳지 않고 물방울처럼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확인 결과 가락국에서 나는 돌이 아님이 재차 확인되었고, 얼마 전 향토학자가 시험해보니 ‘신농본초’ 그대로 피가 스미지 않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현재 파사석탑은 탑의 부재(部材) 5층만 남아 있는데 그나마도 심하게 훼손되어있다. 일명 ‘진풍탑(鎭風塔)’으로 알려져 사람들이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조금씩 떼어가 배에 싣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 수로왕비의 국적 아유타국 의견 분분

과연 수로왕비가 왔다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은 어디일까. 기원전 1세기 인도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 건설한 식민국인 타이의 아유티야 또는 아요디아라는 설,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 지역으로 집단 이주해 살던 허씨족이 이주해 온 것이라는 설,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인 아유타국이었다는 설, 낙랑지역에서 도래한 유이민 혹은 상인이었다는 설, 불교 동점(東漸)의 신앙과 결부된 표현일 뿐이라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국외 인물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설화는 당시 가야국 연맹의 사회상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토착민이 아닌 이주민이었고, 결혼동맹을 통한 소국 연맹체였으며, 철(鐵)이 생산되고 운반되는 해상왕국임을 유추할 수 있다.
고대 국가에 있어서 철(鐵)은 곧 국방력이었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기구뿐 아니라 전쟁 무기의 재료였다. 철의 산지로서 명성 높았던 가야연맹은 고대 최상의 교통로인 낙동강을 확보해 이 해로를 통해 철을 수출하면서 일찌감치 해상왕국으로 자리 잡았다. 철의 바다란 뜻의 ‘김해(金海)’란 지명도 거기서 유래되었다. ‘삼국지’에는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로 가는 바닷길의 중심에 김해의 가야국이 기록되고 있으며 김해, 마산, 고성 등의 가야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동아시아의 중개 무역항이었다.

삼국지’ 기록엔 백제나 신라보다도 가락국이 소상히 기록되어있을 정도로 4국 중 가야는 최강의 국가였다. 102년 8월 가락국의 수로왕은 경주로 쳐들어갔다. 사로국(신라)의 동북쪽에서 일어난 국경분쟁을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분쟁을 조정한 수로왕을 위한 향연이 베풀어졌는데 한 기부의 촌장이 참가치 않자, 이를 괘씸하게 여긴 수로왕은 노비를 시켜 그 촌장을 죽이고 가락국으로 돌아 왔다. 대가야의 수도인 고령 지산리 일대는 마치 경주를 연상시키듯 거대한 고분 200여 기가 밀집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고분에서 철괴(鐵塊)는 물론이고 금관, 철제 투구와 갑옷, 말안장과 말 갑옷 등 북방 기마민족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3세기 중반까지 이렇게 강성했던 가야연맹이 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영남 대동맥 낙동강은 가야의 마당, 철의 바다 누빈 해상왕국>
 

출처 : www.hooam.com

 

 
 낙동강②편 [통합 정신이 흐르는 合水의 강]

【서울=뉴시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영남지역의 모든 물은 낙동강으로 모여 흐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합수(合水)의 정신’이 낙동강에 있다.
역대로 낙동강을 차지한 자가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잡았다. 철기시대 최고의 자원인 철, 비옥한 퇴적 평야, 해상로 낙동강을 확보한 해상왕국 가야연맹은 3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맹주였다. 그런 가야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는 낙동강을 잃은 5세기 무렵부터다.

대륙에서 고구려가 강력한 중앙집권 왕국의 면모를 갖추면서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연방국가 체제인 해양세력의 동맹이 깨진 때는 신라 제17대 내물왕(내물마립간 356~402 재위) 시절이다.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내물왕은 고구려에 긴급 구원을 요청한다. 경주 김(金)씨의 시조는 김알지로서 흉노족(스키타이족)의 후예다. 내물왕 역시 대륙계 혈통이었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5만의 원군을 보내 파죽지세로 남하한다.(400)
고구려 별동대는 순식간에 임나가라(김해, 고령)의 성을 빼앗고 안라(함안)를 격파했다. 이때 고구려는 한반도를 통일할 국력이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륙에 더 야심이 있었기에 남방으로 국력을 분산할 수 없어서 신라에 대륙계 친고구려 왕조를 세우는데 만족하고 물러갔다.

고구려 등에 업은 신라, 낙동강 장악

큰 변화가 일었다. 내물왕은 기존의 해양세력이 아닌 대륙세력 고구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부의 가야는 쇠약해졌고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가 남부가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유역의 세력 균형추는 급격히 기울었다.
낙동강의 주인이 된 신라는 해양국가에서 대륙국가로 급격히 탈바꿈한다. 본래 신라는 박, 석, 김씨가 돌아가며 왕을 했지만 이때부터 대륙세력을 등에 업은 김씨가 고구려 체제를 본 따 부자세습으로 왕위를 독점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낙동강을 잃은 대가야는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522) 균형을 꾀하려하지만, 529년 서쪽의 백제가 섬진강을 따라 남하하여 다사(하동)까지 위협해오면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눈물겨운 외교를 펼친다. 결혼을 통한 대가야와 신라의 동맹관계는 끝내 파탄에 이르게 되었고, 가야는 최후의 동맹국으로 백제를 선택한다.

가야 최후의 결전은 554년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벌어졌다. 낙동강은 조금만 내륙을 거치면 섬진강, 금강, 한강과 모두 통할 수 있는 천연 수로였기에 낙동강 남부를 탈환하기 위해 백제, 대가야, 왜의 연합군은 관산성에서 신라를 향해 사활을 건 대공세를 감행한다. 그러나 관산성 싸움의 최후 승자는 신라였다. 이 전쟁에서 대가야연합군은 무려 4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낸다.

싸움의 참패로 마지막 남아있던 고령 대가야는 신라에 병합되어 멸망한다. 가야 유민들은 백제와 왜로 이주하고 신라에 투항하며 뿔뿔이 제 갈 길을 찾아갔다. 500여 년 왕국 가야는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학자들은 가야의 멸망원인으로 구심점 없는 소국으로 산재한 해양세력의 한계를 지적하곤 한다.

나그네는 고령의 대가야 박물관과 거대 고분군을 둘러보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지배층의 무덤이 크고 화려하면 왕조의 최후가 가까웠다는 징조다.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희생이 극심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가야에 여타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순장제도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그네가 가야 왕족고분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왕족을 따라 무고하게 생매장당한 가야 백성들의 원성이 귓전을 울렸다. 가야는 당시 선진 이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었고, 왕을 신격화시켜 백성들과의 괴리를 자초했다.

반면 신라는 난랑비문(鸞郞碑文)에서 보듯 유불선(儒彿禪)을 모두 받아들일 정도로 국가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폭넓었다. 신라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을 모두 포용할 정신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 합수정신의 절정은 경주 감포 앞바다에 위치한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이다. 문무대왕은 김춘추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김유신의 둘째 동생인 문명왕후(文明王后)다. 문무대왕의 아버지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무열왕(604~661)인데, 성골(聖骨)만이 왕이 될 수 있는 신라의 골품제를 개혁한 최초의 진골(眞骨) 출신 왕이다.

치열한 삼국 통일 전쟁 와중에서도 김춘추가 왕족의 범위를 확대하는 혁명적 골품제의 모험을 감행한 이유는 자명하다. 김춘추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삼국 백성들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통합의 의지를 확고하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했을 것이다. 내부의 혁명에 성공한 신라는 삼국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이념적인 우위를 선점하게 되었다.

이런 통합의 정신은 김춘추의 아들 문무대왕이 신라 왕위에 오름으로써 탄탄하게 계승, 발전되었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는 대륙계의 경주 김씨가 아닌 해양계의 김해(金海) 김씨다. 바로 가락국의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가야의 후예이니, 문무대왕 자신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간의 극적인 통합을 이룬 상징체였던 것이다.

◇ 대륙·해양세력 통합 이룬 문무대왕

문무대왕은 죽으면서 자신을 바다에 묻으라며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했으니, 과연 해양세력의 후예다웠다. 김해 수로왕비릉 내의 파사석탑(婆娑石塔)과 수로왕릉 안에 파사석탑을 호위하고 있는 두 마리의 물고기를 그린 쌍어문(雙魚文)은 600년이 지나 문무대왕 수릉(水陵)의 용으로 승천한 것은 아닐까.

결국 낙동강은 합수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신라에게 패권을 안겨주었다. 가야는 신라에서 다시 부활한 셈이다. 그래서 백제 유적지는 왠지 모르게 쓸쓸한 반면, 김해 가야 왕릉의 위용이 지금도 당당했을지 모른다.

낙동강은 신라의 삼국통일이후 안동까지 돛배가 드나들며 유유자적했다. 잔잔했던 낙동강이 다시 한 번 국제전으로 요동친 건 무려 1000년도 훨씬 지난 1950년 6·25에서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3개월 만에 아군은 낙동강까지 속절없이 밀렸다. 최후의 방어선이 낙동강에 설치되었다.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대구 북방 22㎞에 위치한 다부동에서 벌어졌다(다부동 전투).

다부동은 대구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다. 북한군은 약 2만1500명의 병력과 T34 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을 총동원해 이른바 8,9월 공세를 퍼부었다. 국군 제1사단은 보충 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으로 초반에 고전하다가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미 제1기병사단과 유엔군의 지원으로 B29 편대 (99대였다고 함)의 융단폭격을 전환점으로 다부동을 끝내 지켜냈다. 8월13일부터 55일간 전투 중에 무려 북한군 1만7500여 명, 아군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우리는 낙동강을 지켰기에 적화로부터 남한을 지킬 수 있었다.

나그네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架山面) 다부리 유학산(遊鶴山) 기슭의 다부동전적비를 찾았다. 이제는 다부동전적비만이 묵묵히 그날의 피비린내 나는 전황을 웅변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노인이 전적비문의 이름을 쓰다듬으며 먼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다부동전투의 참전 용사들이었던 것이다. 어제의 용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낙동강은 남북으로 동서로 분열하여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작금의 시국을 한탄하며 천둥처럼 꾸짖고 있지는 않을까.

 

 

 

 

 4세기말만 해도 일본 열도의 왜(倭)는 백제 해상왕국 연방 중 하나였다. 고구려의 계속적인 침략을 받은 백제는 일본 열도 남부로 대규모 이주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백제의 본격적인 일본 열도 개척의 역사가 시작됐다.

17대 아신왕은 지금의 일본인 왜에 태자 전지를 보내 백제의 안전을 도모했다. 왜왕은 13대 근초고왕의 왕명으로 왜 왕실에 머물고 있던 아직기(阿直岐)로부터 국사(國師)의 필요성을 듣고 본토(백제)에 훌륭한 학자를 청하게 된다. 아직기는 한 인물을 천거한다.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32세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왕인(王仁) 박사다.


왕인 박사는 백제 제14대 근구수왕(375~384) 때에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탄생하였다. 8세 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文山齋)에 입문해서 유학과 경전을 수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의 발상지가 바로 월출산이며, 백제의 왕인박사와 고려의 도선국사를 배출한 걸출한 국사(國師)의 땅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엔 높고, 수려하고, 오묘하고, 장대한 산맥이 지천인데 왜 하필 말단인 아담한 월출산에서 한국과 일본의 건국 운을 튼 국가의 대스승이 탄생했을까.


◇ 일본의 국사로 대접받는 왕인 박사

왕인 박사는 일본에 혼자 건너간 게 아니다. 경전뿐 아니라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였다.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들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飛鳥) 문화의 원조가 되었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사카(大阪)부 히라카타(枚方)시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열도 곳곳에 왕인박사의 신사가 조성되어 일본의 국사로 대접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근래 들어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영암일대에 왕인박사 유적지를 복원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월출산 서쪽 산 중턱에 왕인이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는 문산재와 양사재(養士齋), 학문을 수련할 때 쓰던 석굴인 ‘책 굴’, 일본으로 떠날 때 배를 탔던 상대포(上臺浦), 고향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보았다는 돌정고개를 정화하고 있다. 왕인묘(사당)에는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매년 양력 4월 초에 제사를 지낸다.

이번엔 같은 고장에 백제가 아닌 신라출신의 걸출한 국사가 탄생한다. 신라 말, 500년의 고려국운을 점지했고, 풍수도참설을 통해 여전히 지금까지도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도선국사(道詵國師)다. 도선은 탄생 설화부터 범상치 않다. 도선의 아버지는 ‘오이’였기 때문이다.

영암의 성기산(聖起山) 벽촌에서 처녀 최씨(崔氏)가 겨울철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오이를 건져 먹은 뒤 배가 불러 낳은 아기가 도선이다. 도선은 하늘이 점지한 아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처녀가 애를 낳는 일은 경(墨刑)을 칠 일이었다.
최씨는 신생아 도선을 대나무 숲에 버린다. 그러나 비둘기와 독수리들이 날개로 감싸 보호했다. 갓난아기 도선이 버려졌던 숲은 영암의 구림촌(鳩林村), 즉 비둘기 숲 마을이다. 아기를 뉘었던 돌 이름은 국사암(國師巖)이다. 지금도 영암의 특산물 중 하나가 오이다.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달통한 반신(半神) 도선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비쳤을까. 도선은 국토의 모든 산봉우리를 부처로 보았고, 우리나라의 지형을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짚었다. 국토 전체를 태평양으로 향하는 배(船)의 꼴로 요약한 것이다. 국토의 산세(山勢)를 살피던 도선은 장차 나라가 변란과 내분으로 평안치 못할 거라고 예감했다. 동해안인 관동지방, 영남지방은 태백산맥으로 산이 높아서 무거운데, 호서 호남은 평야가 많아서 가볍기 때문에 동쪽으로 나라가 기울어진 까닭이다.

도선은 비방을 쓴다. 월출산에서 조금 떨어진 화순의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에 1000개의 불상과 1000개의 탑을 조성하려한다. 뱃머리에 부처로써 짐을 많이 실으면 배가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며,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세우면 높은 탑은 돛대를 삼고, 천불은 사공이 되어 태평양을 향해 저어가면 풍파를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도선은 즉시 사동(使童) 하나를 데리고 와서 터를 다듬어 놓고, 도력(道力)으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흙과 돌을 뭉쳐 천불천탑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천상의 석공들은 ‘다음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란 단서를 달고 도선의 청을 받아들인다.

도선은 시간이 부족할까봐 절의 서쪽에 있는 일괘봉(日掛峯)에 해를 잡아 매놓았다. 그런데 심부름을 하던 사동은 일에 짜증이 나자 꾀를 부렸다. ‘꼬꼬댁’하고 닭 우는 소리를 질렀다. 닭 우는 소리를 듣자 석공들은 그만 지체 없이 모두 천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석공들이 떠난 뒤 살펴보니 탑과 부처가 각각 천개에서 하나씩 모자랐다고 한다. 지금도 운주사 근처에는 세우지 못한 거대한 부부불이 땅에 누운 채로 와불(臥佛)이 되어있고, 탑과 부처는 흙과 잔돌을 섞어 뭉쳐서 만들다 만 것처럼 거친 석질이며, 일대 돌들은 옮겨지지 않아 불상과 탑신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 고려의 500년 국운 보장한 도선국사

사람들은 만약 사동의 실수만 아니었더라면, 거대한 와불이 일으켜 세워졌고, 천불은 사공이 되고, 천탑은 돛대가 되어, 운주사 일대는 큰 도읍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온 나라가 태평성세가 되었을 것이라며 못내 아쉬워한다.

하지만 도선은 왕건(王建)의 아버지에게 명당 양택(陽宅), 즉 집터를 잡아줬다. 온통 눈 천지가 돼도 왕건의 집만큼은 보송보송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송악(松嶽)을 왕도(王都)로 점찍으며 500년 국운을 보장했다. 왕도만 세운 게 아니다. 산천의 혈맥 곳곳에 절이나 탑을 세웠는데, 이를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 한다. 도선이 월출산에 세운 절이 월출산 서쪽의 도갑사(道岬寺)다.

도선은 사후에 고려 왕실의 왕사로 모셔졌다. 선종의 한 종파의 조사로 추대되었지만, 후대는 풍수지리설의 비조로서 더 의미를 두고 있으니, 도선국사는 시대와 종교를 초월한 국사로 받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호남출신 도선을 개국의 국사로 모신 왕건이 왜 훈요십조(訓要十條)에 호남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고 명문화 했을까. 일각에서는 ‘차령 이남’을 다른 지역으로 해석했거나, 정치적 의도에 의해 후대에 조작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독자의 요청에 의해 나그네가 살펴보니, 왕의 정치적 성향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편차가 있긴 했지만, 관리등용이나 고려 국사의 수에서 적어도 고려 때에는 공식적으론 특별한 지역 차별 자취는 찾지 못했다.

후대에서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선의 풍수도참설을 오남용해서 지역 차별에 악용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훈요십조의 지역 차별 문구도 그런 악의적 편견의 한 흔적일지 모른다.

개태사는 고구려를 계승하고 후백제를 평정하면서, 백제인들의 민심을 달래고 새로운 통일된 세상을 건설하라는 도선국사의 뜻을 받들어 태조 왕건이 계룡산 아래 창건했다고 한다.

 

출처 : www.hoo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