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군사 최근 인기를 더해 가는 KBS 1TV 사극 드라마 <왕건>. 나 역시 이 드라마의 팬으로 주말이면 자주 TV 앞에 앉게 된다. 남성미 넘치고 실감나는 전투 장면들과 세 영웅호걸의 박진감 넘치는 세력다툼이 여간 재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백제는 대단한 국력으로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세력을 떨쳤기에 그들의 고급스런 문화는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널리 실크로드를 통해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이 정도 국력이라면 현재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놀라운 수준이 아닌가.
최근 발굴된 풍납토성이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나 역시 이 한강 일대가 백제의 수도였으며 그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역사가들은 볼 수 없는 또 다른 백제의 모습을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영능력으로 목격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문제의 장소는 바로 지금 한강의 광나루터. 당시 광나루는 현재의 모습과 달리 한강 최고의 너른 백사장이 있어 서울 시민에게 최고의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옛날 영화 중, 방성자, 박노식 주연인 <징기스칸>의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멋진 곳이었는지는 짐작이 가실 터.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장안에 소문난 문제아였던 내가 그런 장소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나를 비롯해 의리로 똘똘 뭉친 몇 몇의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 텐트를 치고 각종 오락기구를 총동원해 환상의 밤을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와아아아!”하는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놀라 허공을 쳐다보는 순간, 어디선가 수백 마리의 군마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었다. “으악!”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엎드렸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백제군. 한밤중 나를 놀라게 한 그 수천의 군사는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채 훈련으로 밤을 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갑옷은 고구려의 것과 상당히 비슷해,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갑옷과 거의 흡사했으며 무기와 훈련 방식도 고구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출처 : www.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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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쳐들어오면서 발발했다. 당시 일본의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에 맞서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의 응원군 장수는 이여송이었다. 사실로 보자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고, 조명동맹군이 이를 격퇴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숨겨진 진실은 또 다르다.
대마도 제①편 [아비류(阿比留)의 백제]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미끄러졌다. 지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인들도 대마도의 아비류 통치만은 흔쾌히 인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온조는 백제를 세우고 비류는 죽은 것으로 나와 있지만, 비류가 그때 절멸했다면 왜 백제가 멸망하고도 수백 년 동안 백제의 비류 왕족이 13세기 중반까지 대마도를 지배하고 있었을까. 나그네에게 비류는 대마도의 비밀을 푸는 시간의 문이었다.
나당연합군을 막기 위해 대마국(對馬國)에 금전성(金田城)이 축성된 직후(667년) 동아시아엔 지금까지 없었던,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국제적인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이 백제로 건너가 백제 부흥운동을 지휘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도 이 시기(680년께)에 쓰기 시작함으로써 한반도의 백제와 완전히 결별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일본이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반도의 백제와 일본열도는 공동체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마도와 규슈 지방의 백제 유민들은 적대시한다. 백제 유민들의 본방 수복 요구는 끝내 외면당하고 만다. 나그네는 남북 대마도를 잇는 만제키 다리를 건너 북대마도로 향했다. 제주도의 약 5분의 2 정도 크기인 본섬과 98개의 작은 섬들로 구성된 대마도는 본래 커다란 하나의 섬이었다. 1900년 일본 해군이 대륙침략을 위해 군사용으로 아소만 근처에 인공 운하를 판다. 이때 만들어진 운하는 러일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05년 세계최강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항에 가기위해 대마도 앞 해협을 지나는 틈을 노려 일본 함대가 기습하여 발틱함대를 궤멸시키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장악하게 된다(쓰시마해전).
일본 열도에서 독도 망언이 터질 때마다 심심치 않게 대마도가 입에 오르내리더니 급기야 얼마 전에는 우리나라의 지방정치인들이 대마도에 와서 영토에 대한 정치적 발언을 해 눈총을 받은 바 있다. 소유권의 주장은 얼른 듣기에는 솔깃할지 모르지만 국가 간 영토분쟁이 인류 역사상 유익하게 해결난 적은 없다. 바야흐로 문화영토권 시대다. 누구의 것인가보다 누가 선용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문화의 시대다. 돌연 나그네의 눈에 대한해협 바다 밑으로 자동차가 오가는 장면이 스쳤다. 왠지 앞으로는 한일 양국 간에 대마도가 독도보다 더 뜨거운 감자가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 나그네가 이런 저런 감회에 젖어있는 동안 아스라이 부산항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해협이 태평양보다도 넘을 수 없는 그렇게 깊은 바다인지 되뇌어보았다.
백성들은 민심이 흉흉할수록 현실보다 미래에 기대하는 미륵신앙에서 위안을 받고 대안을 찾으려 했다. 민중들의 염원이 모인 모악산은 모든 사회 변혁운동 이념의 산실이었다. 미륵신앙은 이상사회의 통치이념으로 또는 민족종교로 변신하며 시대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견훤은 스스로 환생한 미륵임을 자처하며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된다.(900) ◇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정여립 그러나 후백제는 너무 짧았다. 내부 분열로 부흥운동마저 실패했던 백제의 전철을 후백제도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다. 견훤은 넷째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지만 이를 시기한 다른 아들들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다음, 신검(神劍)이 왕위에 오른다. 3개월 후,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고려로 망명, 태조와 협력하여 10만 대군으로 후백제를 총공격했고, 격전 끝에 후백제는 고려에 굴복, 93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상세계를 향한 꿈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1546년 모악산 부근 금평 저수지 위 구릿골에서 태어난 정여립(鄭汝立)은 영국의 정치가 크롬웰보다 50년이나 더 앞서 공화정(共和政)을 주장한 걸출한 선각자였다. 통솔력이 있고, 명석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했던 정여립은 24살에 과거 급제하여 십수 년간 순탄하게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나 유학의 계급관료적인 폐단을 꿰뚫은 정여립은 왕권 체제 하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는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혈통세습이 아닌 능력세습’이라며 왕권의 세습을 반대하였고,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그리고 신분철폐를 주장한다. 너무 시대를 앞선 탓일까. 정여립은 선조왕의 미움을 사 관직을 떠나게 된다. 낙향한 정여립은 구릿골 일대 제비봉을 중심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매월 보름날에 활을 쏘고 무예를 익히며 잔치를 베풀었다. 대동계원은 양반, 상놈, 승려 등 신분귀천이 없었다. 대동 계원 스스로 향토를 방어할 수 있는 군사훈련도 병행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향토방위대쯤 된다. 왕조 속에서도 모악산에 작은 공화국을 건설한 셈이었다.
정여립은 백제나 후백제가 세습 신분 계급을 근간으로 하는 왕조라는 한계 때문에 미륵 세상을 건설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신분이 아니라 개인 능력에 따라 등용하며, 민중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공화국이 정여립이 꿈꾸는 미륵 세상이었다. 1587년(선조 20) 왜군이 손죽도로 쳐들어오자, 정여립은 전주 부윤 남언경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여 대동계를 즉각 출동해 왜군을 물리친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군대의 출동은 조정에 보고되고, 대동계를 중심으로 역성혁명을 준비한다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백성들 사이에선 벌써 ‘이가(李家)는 망하고 정가(鄭家)는 흥한다’는 정감록이 횡행했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안악군수, 재령군수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고 만다. 무오·갑자·기묘·을사 4대 사화(士禍)를 합한 희생자보다 더 많은, 선비만 1000여 명이 처형당하는 피의 지옥이 연출되니,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등용에 제한을 당해야 했다. 이렇게 정여립의 거대한 미륵 세상 구현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무고한 원혼들의 저주였을까. 공교롭게도 3년 뒤인 1592년 조선은 비류의 백제가 세운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온 나라가 불타게 된다.(임진왜란) 임진왜란 때 호남평야를 지킨 것은 관군(官軍)이 아니라 의병(義兵)들이었다. 의병은 정여립이 대동계에서 조직한 향토방위대가 전신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근래 역사가들 중에는 정여립이 이이(李珥)의 ‘십만양병설’에 자극받아 임진왜란을 미리 준비했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역모로 조작했다고 재평가하기도 한다. 금산사에서 서편으로 한 시간 가량 걸으면,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전주로 넘어가는 모악산 자락에 창건했다는 귀신사(歸信寺)가 나온다. 1992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양귀자의 소설인 ‘숨은 꽃’의 무대가 바로 귀신사다. ‘그는 귀신사에 있었다. 나는 그를 귀신사에서 만났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은 귀신사를 이렇게 소개한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이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절이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종종 그 절을 찾는다고 했다.” 뒤뜰에 엎드려 앉은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돌사자상이 이채롭다. 모악산 동쪽 구이면 원기리에서 선녀폭포 쪽으로 가다보면 전주 김씨 시조묘 입구에 전주김씨 종가에서 세운 공덕비와 정자가 있다. 군사정권시절 이 묘는 공공연한 국가기밀로 접근이 금지되었다. 이곳을 찾으러온 풍수지리가들은 덩치 큰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김일성(金日成)의 32대 조상 김태서의 묘가 위치했기 때문이다. 일명 ‘김일성 조상묘’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접근 금지였다. ◇ 모악산에 자리한 ‘김일성 조상묘’ 육관 손석우씨가 지은 ‘터’라는 풍수지리책에는 ‘이 묘의 지기가 발복하여 그 후손이 장기집권을 하게 되며, 그 운이 49년 만인 1994년 9월에 끝난다’라는 내용이 예언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내용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예언한 날짜와 근소한 차이로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1994년 7월)부터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 모악산의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모악산을 동쪽에서 오르다보면 고려 밀교(密敎)의 본산지인 대원사(大願寺)가 나온다. 밀교의 특징은 불보살의 초월적인 가피력을 강조하는데, 병이 낫는다든지, 외적 침입을 격퇴한다든지 인간사의 각종 애환들을 치유한다. 강증산이 수도하여 도통했다는 대원사는 진묵대사(震默大師)의 자취가 여전하다. 진묵대사는 숱한 이적과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보였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으로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한국 불교사상 가장 신비로운 스님이다. 진묵대사는 전주의 장날에 가서 동중정(動中靜)을 시험했는데, ‘오늘은 장을 잘 보았다’하면 북새통인 장터에서도 내면의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이고, ‘오늘은 장을 잘 못 보았다’하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곡차(穀茶)란 말도 진묵대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던 진묵대사였지만, 같은 잔이라도 ‘술’이라하면 외면하다가 ‘곡차’라고하면 벌컥 들이켰다. 대원사에서 정상 쪽으로 도보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수왕사에는 지금도 송홧가루를 재료로 하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가 빚어지고 있고, 진묵대사가 술을 빚었던 도구들이 전해진다고 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 진묵을 보러 찾아왔는데, 그만 해가 질 때가 되어 밤길이 걱정되었다. 진묵대사는 어머니를 따라 나서지 않고 산문(山門)에서 배웅했다. 그런데 분명히 서산으로 져야 할 해가 집에 당도하도록 수 시간동안 걸려 있었다. 어머니가 대문을 열자 해가 뚝 떨어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진묵대사는 출가한 승려로서 대를 이을 손이 끊기어 그의 어머니 묘에 성묘할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어머니 무덤에 고사를 드리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된다는 말을 퍼뜨렸다. 효험이 입소문을 타자 오늘날에도 많은 참배객이 줄을 이어 이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40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잘 보존 되어 내려오고 있다. 후세들은 이 무덤 자리를 ‘무자손 천년향화지지(無子孫 千年香火之地)’ 즉 자손이 없어도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1000년 동안 이어지는 명당이라 부른다.
모악산③편 [문화예술의 젖줄]
진묵대사와 같은 시대에 활약하던 유명한 승려가 서산대사인데, 혹자는 서산대사를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호국불교의 상징이요, 진묵대사를 철저한 은둔자로 대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진묵대사의 일화는 미륵 세상을 구현하는 또 다른 차원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엿보게 한다. 하루는 진묵대사가 저명한 유학자 김봉곡(金鳳谷)에게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빌렸다. 하지만 봉곡은 곧 크게 후회했다. ‘진묵은 불법을 통한 자인데, 만일 유도(儒道)까지 정통하면 대적하지 못하게 될 것이요, 또 불법이 크게 흥왕하여지고 유교는 쇠퇴하여지리라’며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책을 도로 찾아오게 했다. 봉서사 산문(山門) 어귀에 이르기까지 한 권씩 떨어져 있는 책을 모두 주워 거두어갔다. ◇ 유학에까지 통달했던 진묵대사 나중에 봉곡이 책의 내용을 물으니 진묵대사는 한 줄도 틀리지 않고 줄줄 외웠다. 산문에 이르는 동안 이미 책을 모두 독파하여 그때마다 한 권씩 버린 것이다. 이를 시기한 봉곡이 진묵대사가 깊은 삼매에 빠져있을 때, 유체 이탈한 진묵대사의 육신을 그만 화장해버렸다. 허공에서 진묵대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각 지방 문화의 정수를 거두어 모아 천하를 크게 문명케 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봉곡의 질투로 인하여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되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이제 이 땅을 떠나려니와 봉곡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질을 면치 못하리라.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갔느니라.” 그때부터 서양문명이 융성했다고 한다. 근대 천지공사는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에 의해 펼쳐졌다. 구한말 세계열강들이 한반도를 농락할 때,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군이었다. 1860년 경주 출신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호남에서 미륵신앙이 더해지면서 급진 양상을 띤다. 백성이 주인이고, 터전은 내가 지킨다는 대동정신은 본래 동학의 지도부와 궤를 달리하여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우는 농민혁명군으로 거듭나 독자적인 무력혁명을 감행했다. 한편 증산은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모악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두승산 아래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일명 ‘손바라기 마을’에서 태어난 증산 강일순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때 김제에서 서당 훈장을 하면서 전봉준 등을 만나 동학농민군은 패망할 것이라 예견했다. 그의 예견대로 혁명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남기고 실패했다(1894). 외세는 그 공백을 틈타 더욱 기승을 부렸고, 증산은 절망에 빠진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골몰했다. 그때 논산의 김일부를 만나 후천개벽사상의 원리를 배우고, 모악산의 대원사에서 수도 정진하여 도통한다. 증산의 눈에는 조선 왕조 몰락의 근본원인이 누적된 원결(怨結)의 과보(果報)로 보였을 것이다. 금산 저수지 위에 위치한 구릿골(동곡리)의 광제국(또는 만국의원)에서 병든 사람과 사회를 치유하려 9년간 제자들을 모아놓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벌인다. 천지공사의 핵심은 해원(解寃), 즉 그동안 쌓여온 하늘 귀신과 땅 귀신과 사람 귀신 등 모든 신명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증산은 고대 삼국으로부터 누적된 전쟁으로 인한 개인적, 집단적 원한과 신분 계급 왕조의 누적된 폐해가 불러온 과보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했다. 증산 나이 38세인 190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신도들에게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였다. 대원사에서 도통한 증산이 최후엔 금산사 미륵불을 말한 것이다. 증산이 금산사 미륵불을 지칭한 것은 외양을 친견하라는 것이 아니라, 분별없이 민중 속에 살아 숨 쉬는 불성(佛性)을 보라는 것이리라. 증산이 죽기 1년 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차경석(車京石)의 집에서 천지 굿이라는 큰 굿판을 연 적이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억압되었던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해방을 상징하며 후천이 개벽이 되는 가히 혁명적인 의식의 굿이었다. 차경석은 동학농민혁명의 십대 접주 중의 한 사람이었고, 평민두령으로 이름을 떨쳤던 차치구의 아들이며, 훗날 보천교(普天敎)의 교주가 된다. 보천교도는 조선총독부의 집계로도 170만 명을 웃돌았고, 전해 내려오는 얘기로는 70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때 인구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보천교 신자였던 셈이다. 실의에 찬 민중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는데, 차경석(일명 차 천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 이후 보천교는 일제에 의해 급격히 와해된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 십일전 건물은 경매되어 서울의 조계사로 옮겨져 대웅전으로 겨우 남아있고, 신도들이 숟가락 하나씩을 모아 만들었다는 1만8000근짜리 종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모악산이 후천세계의 중심지라 하여 증산을 믿는 사람들이 집단 이주했고, 수많은 종단이 들어섰다. 모악에는 상극이 공존한다. 가장 대중적인 부처가 있는가 하면, 가장 은밀한 부처도 있다. 그래서 모악만이 감히 해원상생(解寃相生)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남은 ‘반역향(反逆響)’이란 멍에를 썼다. 미륵의 땅이자 반역의 땅 모악산. 상극의 평가가 엇갈리는 모악산의 진면목은 어떤 것일까. ◇ 태조왕건 ‘훈요십조’ 호남차별 명문화 후백제의 견훤과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여 승리한 태조 왕건은 왕권조차 평등한 미륵신앙을 두려워했을까. 호남 차별을 명문화한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겼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지역차별을 명문화한 훈시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광주사태라 할 수 있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벌어지자 정여립의 출생지인 해발 300m 제비산은 ‘역모의 땅’이라고 하여 땅을 파헤쳐 숯불로 혈맥을 끊고, 그 근처엔 집조차 들어서지 못하게 했다. ‘연려실기술’엔 정여립을 지금의 사탄(악마)에 해당하는 ‘악장군(惡將軍)’이라 기록하여 극렬히 폄하하고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호남은 산발사하(散髮駛河)의 풍토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호남의 강들은 저마다 흩어져 흘러 호남 기질은 끈기가 없다는 뜻이다. 반면 영남의 물은 모두 낙동강으로 흘러 합심이 잘 된다고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도 ‘지금도 지역이 멀고 풍속이 더러워서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심각한 지역적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풍수지리를 논하려면 차별 없는 자연의 눈을 가져야하고, 적어도 중용(中庸)의 미덕쯤은 잃지 말아야한다. 큰 눈으로 본다면, 호남 강물이 서해로 흩어져 나가든 영남 강물이 한 곳으로 모이든 결국 모든 강물은 머지않아 하나의 바다로 모이게 되어있다. 산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전체가 어울려 산하가 되는 것처럼, 평등 속에 차별이 있고 차별 속에 평등이 있다. 나그네가 본 평지돌출 모악산은 어머니의 풍성한 젖가슴 형국이다. 어머니의 젖을 빨며 꿈꾸는 아이처럼, 모악은 이상세계를 꿈꾸는 걸출한 인물들을 길러냈고 수많은 선각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왔다. 나그네의 지친 발걸음은 전주의 한정식 집으로 향했다. 지아비처럼 반기는 주인장의 환대 속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한 상이 차려져 나왔다. 동행한 지인들 그 누구도 전주가 맛의 본존임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모악산이 품고 있는 전주는 명실 공히 예향의 고장이다. 전주대사습놀이를 비롯해 하나같이 문화의 근간이 되는 빛, 소리, 음악, 글, 종이, 풍악, 맛에서 최상을 아우르고 있다. 이런 문화예술의 ‘끼’는 솟아나는 샘물처럼 절대로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다. 활짝 핀 꽃의 향기처럼 주변에 널리 널리 문화의 젖줄을 공급한다. 그래서 미륵의 꿈, 모악의 꿈은 문화의 꽃으로 찬란하게 피어서 한 시도 진 적이 없다. 이것이 미륵의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모악산은 내게 아버지의 산이자 어머니의 산이다. 금번 경찰종합학교 교재 ‘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선친 차일혁 총경은 모악산 자락에서 태어났고, 묘소도 그곳에 있다. 나그네 또한 전주 출생이고, 젊은 시절 만행을 하면서 한동안 대원사(大願寺)에 머문 적이 있다. 낙동강①편 [낙동강의 주인, 가야]
육로가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 낙동강은 단순한 강물 이상이었다. 영남지방의 대동맥일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잇는 국제 해상무역의 중간 기지였다. 1세기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 남부는 낙동강 수로 쟁탈전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倭)가 치열하게 자웅을 겨뤘고 끝내 낙동강을 차지한 신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잡았다. 통일 이후 비교적 잠잠했던 낙동강이 대운하 문제로 다시 꿈틀대고 있다. 낙동강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나그네는 이 의문을 품고 낙동강으로 향했다. 서기를 전후해 한반도에는 고구려(BC 37), 백제(BC 18), 사로(신라 BC57)에 이어 가락국(AD 42)이 자리 잡았다. 낙동강에 자리 잡은 주인은 제4의 제국이라 불리는 가락국(가야)이었다. 가야 연맹의 터전이었던 김해(금관가야 金官伽耶), 고령(대가야 大伽耶), 상주, 합천, 창령(비화가야 非火伽耶), 함안(아라가야 阿羅伽耶), 성주(성산가야 星山伽耶), 고성(소가야 小伽耶) 등은 모두 낙동강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다. ‘낙동강(洛東江)’이란 명칭은 ‘가락국(또는 가야)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란 뜻이다. ◇ 최근 고대 가야 유물 발굴로 연구 활기 가야에서 직접 남긴 사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여타 사료에 조금씩 기록되어있는데, ‘삼국사기’에 약간 남아있는 기록은 승자인 신라 관점에서 왜곡이 극심하다. 다만 1075~1084년 금관주(金官州 김해지방)의 지사(知事)였던 문인으로 추측되는 사람이 편찬한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있었으나, 이마저 전해오지 않고 그 내용의 일부가 ‘삼국유사’에 요약되어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락국기’가 한참 후대에 편찬되었고, ‘삼국유사’는 설화적인 윤색이 많은 야사(野史)라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광개토왕비문, 3세기 후반 중국에서 편찬된 ‘삼국지’와 7세기 이후에 쓰인 ‘일본 서기’에 남겨진 단편적인 사료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고대 가야 일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속속 축적되면서 한반도 ‘제4제국’으로서의 거대한 신비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나그네가 김해에 도착하자 모든 이정표는 수로왕릉과 왕비릉으로 통하고 있었다. 석탑을 받들고 있는 두 마리의 물고기를 그린 ‘쌍어문(雙魚文)’으로 유명한 수로왕릉은 김해시 한 복판에 위치한다. 각종 축조물들과 함께 5만9504.4m²의 대규모 공원으로 조성된 왕릉은 그 위용이 서울의 경복궁에 못지않았다. 도보로 몇 십분 거리에 ‘파사석탑(婆娑石塔)’으로 더 잘 알려진 부드럽고 단아한 수로왕비릉이 자리 잡고 있다. 나그네가 전에 본 백제의 유적지는 어딘지 쓸쓸하고 처연했지만, 가야의 유적지에서는 왠지 당당하고 늠름한 기운이 강했다. 모두 신라에 패망한 백제와 가야이건만 왜 그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고대 한반도 4개국 모두 건국 신화가 전하지만, 가락국만큼 신비하고 극적이진 못하다. 서기 42년(신라 유리왕 19) 금관가야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 김해 구지봉(龜旨峰)에 모였을 때, 하늘로부터 붉은 보자기가 내려왔다. 보자기를 펴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를 얻었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화하였다. 그 중 키가 9자(尺)이고 팔자 눈썹이며 얼굴은 용과 같이 생긴 인물이 생겼는데, 처음으로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였다. 황금알에서 나와 성씨를 ‘김(金)’으로 하고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김수로왕이다. 서기 48년 수로왕은 신하를 보내 포구에서 한 여인을 맞이하게 한다. 과연 바다의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한 척의 배가 다가왔다. 배 안에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 타고 있었다. 허황옥은 본국에 있을 때 부모의 꿈에 옥황상제가 계시한대로 가락국왕에게 시집오기 위해 배를 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파도가 높아져서 배를 다시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해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비방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파사석탑이다. 허황옥은 석탑을 배에 싣고야 무사히 가락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엔 호락호락하지 않던 허황옥은 수로왕이 직접 마중 나온 것을 보고서야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쳤다. 왕과 왕비는 설치한 장막에서 두 밤 한 나절의 허니문을 보낸 후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내고 대궐로 돌아왔다. 이후 수로왕비는 서기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묻힐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이로써 가락국은 서기 42년부터 532년까지 10대에 걸치는 왕들이 이끄는 490년 왕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파사석탑 설화는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파사석탑이 현재의 수로왕비릉에 위치한 것은 1873년이다. 원래 호계사(虎溪寺)에 있다가 폐사(廢寺)된 뒤 부사 정현석이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가 대리석처럼 박혀있는 파사석탑은 ‘신농본초(神農本草)’에는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해보니 피가 스미거나 굳지 않고 물방울처럼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확인 결과 가락국에서 나는 돌이 아님이 재차 확인되었고, 얼마 전 향토학자가 시험해보니 ‘신농본초’ 그대로 피가 스미지 않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현재 파사석탑은 탑의 부재(部材) 5층만 남아 있는데 그나마도 심하게 훼손되어있다. 일명 ‘진풍탑(鎭風塔)’으로 알려져 사람들이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조금씩 떼어가 배에 싣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 수로왕비의 국적 아유타국 의견 분분 과연 수로왕비가 왔다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은 어디일까. 기원전 1세기 인도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 건설한 식민국인 타이의 아유티야 또는 아요디아라는 설,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 지역으로 집단 이주해 살던 허씨족이 이주해 온 것이라는 설,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인 아유타국이었다는 설, 낙랑지역에서 도래한 유이민 혹은 상인이었다는 설, 불교 동점(東漸)의 신앙과 결부된 표현일 뿐이라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국외 인물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설화는 당시 가야국 연맹의 사회상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토착민이 아닌 이주민이었고, 결혼동맹을 통한 소국 연맹체였으며, 철(鐵)이 생산되고 운반되는 해상왕국임을 유추할 수 있다. 고대 국가에 있어서 철(鐵)은 곧 국방력이었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기구뿐 아니라 전쟁 무기의 재료였다. 철의 산지로서 명성 높았던 가야연맹은 고대 최상의 교통로인 낙동강을 확보해 이 해로를 통해 철을 수출하면서 일찌감치 해상왕국으로 자리 잡았다. 철의 바다란 뜻의 ‘김해(金海)’란 지명도 거기서 유래되었다. ‘삼국지’에는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로 가는 바닷길의 중심에 김해의 가야국이 기록되고 있으며 김해, 마산, 고성 등의 가야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동아시아의 중개 무역항이었다. ‘삼국지’ 기록엔 백제나 신라보다도 가락국이 소상히 기록되어있을 정도로 4국 중 가야는 최강의 국가였다. 102년 8월 가락국의 수로왕은 경주로 쳐들어갔다. 사로국(신라)의 동북쪽에서 일어난 국경분쟁을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분쟁을 조정한 수로왕을 위한 향연이 베풀어졌는데 한 기부의 촌장이 참가치 않자, 이를 괘씸하게 여긴 수로왕은 노비를 시켜 그 촌장을 죽이고 가락국으로 돌아 왔다. 대가야의 수도인 고령 지산리 일대는 마치 경주를 연상시키듯 거대한 고분 200여 기가 밀집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고분에서 철괴(鐵塊)는 물론이고 금관, 철제 투구와 갑옷, 말안장과 말 갑옷 등 북방 기마민족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3세기 중반까지 이렇게 강성했던 가야연맹이 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출처 : www.hooam.com
낙동강②편 [통합 정신이 흐르는 合水의 강]
영남지역의 모든 물은 낙동강으로 모여 흐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합수(合水)의 정신’이 낙동강에 있다.
역대로 낙동강을 차지한 자가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잡았다. 철기시대 최고의 자원인 철, 비옥한 퇴적 평야, 해상로 낙동강을 확보한 해상왕국 가야연맹은 3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맹주였다. 그런 가야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는 낙동강을 잃은 5세기 무렵부터다. 대륙에서 고구려가 강력한 중앙집권 왕국의 면모를 갖추면서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연방국가 체제인 해양세력의 동맹이 깨진 때는 신라 제17대 내물왕(내물마립간 356~402 재위) 시절이다.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내물왕은 고구려에 긴급 구원을 요청한다. 경주 김(金)씨의 시조는 김알지로서 흉노족(스키타이족)의 후예다. 내물왕 역시 대륙계 혈통이었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5만의 원군을 보내 파죽지세로 남하한다.(400) 고구려 별동대는 순식간에 임나가라(김해, 고령)의 성을 빼앗고 안라(함안)를 격파했다. 이때 고구려는 한반도를 통일할 국력이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륙에 더 야심이 있었기에 남방으로 국력을 분산할 수 없어서 신라에 대륙계 친고구려 왕조를 세우는데 만족하고 물러갔다. ◇ 고구려 등에 업은 신라, 낙동강 장악 큰 변화가 일었다. 내물왕은 기존의 해양세력이 아닌 대륙세력 고구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부의 가야는 쇠약해졌고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가 남부가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유역의 세력 균형추는 급격히 기울었다. 낙동강의 주인이 된 신라는 해양국가에서 대륙국가로 급격히 탈바꿈한다. 본래 신라는 박, 석, 김씨가 돌아가며 왕을 했지만 이때부터 대륙세력을 등에 업은 김씨가 고구려 체제를 본 따 부자세습으로 왕위를 독점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낙동강을 잃은 대가야는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522) 균형을 꾀하려하지만, 529년 서쪽의 백제가 섬진강을 따라 남하하여 다사(하동)까지 위협해오면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눈물겨운 외교를 펼친다. 결혼을 통한 대가야와 신라의 동맹관계는 끝내 파탄에 이르게 되었고, 가야는 최후의 동맹국으로 백제를 선택한다. 가야 최후의 결전은 554년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벌어졌다. 낙동강은 조금만 내륙을 거치면 섬진강, 금강, 한강과 모두 통할 수 있는 천연 수로였기에 낙동강 남부를 탈환하기 위해 백제, 대가야, 왜의 연합군은 관산성에서 신라를 향해 사활을 건 대공세를 감행한다. 그러나 관산성 싸움의 최후 승자는 신라였다. 이 전쟁에서 대가야연합군은 무려 4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낸다. 싸움의 참패로 마지막 남아있던 고령 대가야는 신라에 병합되어 멸망한다. 가야 유민들은 백제와 왜로 이주하고 신라에 투항하며 뿔뿔이 제 갈 길을 찾아갔다. 500여 년 왕국 가야는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학자들은 가야의 멸망원인으로 구심점 없는 소국으로 산재한 해양세력의 한계를 지적하곤 한다. 나그네는 고령의 대가야 박물관과 거대 고분군을 둘러보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지배층의 무덤이 크고 화려하면 왕조의 최후가 가까웠다는 징조다.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희생이 극심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가야에 여타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순장제도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그네가 가야 왕족고분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왕족을 따라 무고하게 생매장당한 가야 백성들의 원성이 귓전을 울렸다. 가야는 당시 선진 이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었고, 왕을 신격화시켜 백성들과의 괴리를 자초했다. 반면 신라는 난랑비문(鸞郞碑文)에서 보듯 유불선(儒彿禪)을 모두 받아들일 정도로 국가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폭넓었다. 신라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을 모두 포용할 정신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 합수정신의 절정은 경주 감포 앞바다에 위치한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이다. 문무대왕은 김춘추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김유신의 둘째 동생인 문명왕후(文明王后)다. 문무대왕의 아버지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무열왕(604~661)인데, 성골(聖骨)만이 왕이 될 수 있는 신라의 골품제를 개혁한 최초의 진골(眞骨) 출신 왕이다. 치열한 삼국 통일 전쟁 와중에서도 김춘추가 왕족의 범위를 확대하는 혁명적 골품제의 모험을 감행한 이유는 자명하다. 김춘추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삼국 백성들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통합의 의지를 확고하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했을 것이다. 내부의 혁명에 성공한 신라는 삼국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이념적인 우위를 선점하게 되었다. 이런 통합의 정신은 김춘추의 아들 문무대왕이 신라 왕위에 오름으로써 탄탄하게 계승, 발전되었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는 대륙계의 경주 김씨가 아닌 해양계의 김해(金海) 김씨다. 바로 가락국의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가야의 후예이니, 문무대왕 자신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간의 극적인 통합을 이룬 상징체였던 것이다. ◇ 대륙·해양세력 통합 이룬 문무대왕 문무대왕은 죽으면서 자신을 바다에 묻으라며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했으니, 과연 해양세력의 후예다웠다. 김해 수로왕비릉 내의 파사석탑(婆娑石塔)과 수로왕릉 안에 파사석탑을 호위하고 있는 두 마리의 물고기를 그린 쌍어문(雙魚文)은 600년이 지나 문무대왕 수릉(水陵)의 용으로 승천한 것은 아닐까. 결국 낙동강은 합수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신라에게 패권을 안겨주었다. 가야는 신라에서 다시 부활한 셈이다. 그래서 백제 유적지는 왠지 모르게 쓸쓸한 반면, 김해 가야 왕릉의 위용이 지금도 당당했을지 모른다. 낙동강은 신라의 삼국통일이후 안동까지 돛배가 드나들며 유유자적했다. 잔잔했던 낙동강이 다시 한 번 국제전으로 요동친 건 무려 1000년도 훨씬 지난 1950년 6·25에서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3개월 만에 아군은 낙동강까지 속절없이 밀렸다. 최후의 방어선이 낙동강에 설치되었다.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대구 북방 22㎞에 위치한 다부동에서 벌어졌다(다부동 전투). 다부동은 대구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다. 북한군은 약 2만1500명의 병력과 T34 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을 총동원해 이른바 8,9월 공세를 퍼부었다. 국군 제1사단은 보충 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으로 초반에 고전하다가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미 제1기병사단과 유엔군의 지원으로 B29 편대 (99대였다고 함)의 융단폭격을 전환점으로 다부동을 끝내 지켜냈다. 8월13일부터 55일간 전투 중에 무려 북한군 1만7500여 명, 아군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우리는 낙동강을 지켰기에 적화로부터 남한을 지킬 수 있었다. 나그네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架山面) 다부리 유학산(遊鶴山) 기슭의 다부동전적비를 찾았다. 이제는 다부동전적비만이 묵묵히 그날의 피비린내 나는 전황을 웅변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노인이 전적비문의 이름을 쓰다듬으며 먼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다부동전투의 참전 용사들이었던 것이다. 어제의 용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낙동강은 남북으로 동서로 분열하여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작금의 시국을 한탄하며 천둥처럼 꾸짖고 있지는 않을까.
4세기말만 해도 일본 열도의 왜(倭)는 백제 해상왕국 연방 중 하나였다. 고구려의 계속적인 침략을 받은 백제는 일본 열도 남부로 대규모 이주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백제의 본격적인 일본 열도 개척의 역사가 시작됐다.
풍수지리(風水地理)의 발상지가 바로 월출산이며, 백제의 왕인박사와 고려의 도선국사를 배출한 걸출한 국사(國師)의 땅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엔 높고, 수려하고, 오묘하고, 장대한 산맥이 지천인데 왜 하필 말단인 아담한 월출산에서 한국과 일본의 건국 운을 튼 국가의 대스승이 탄생했을까.
출처 : www.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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