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대륙백제설 - 중국사서를 중심으로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5:51

대륙백제설
-중국사서를 중심으로-
*사서에 대한 내용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사서에 실린 내용을 위주로 다루었습니다.



『송서(488년)』 :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진평군과 백제군의 위치는 중국 〈복단대학역사지리연구소〉에서 간행한 『중국역사지명사전』을 보면 진평군은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에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남제서(南齊書, 537년 이전)』 :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晉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

『양직공도(梁職貢圖, 526 539년)』 : 백제는 예부터 내려오는 동이의 마한에 속한다. 진(晉)말에 구려(駒麗)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양서(梁書, 629 639년)』 :
백제란 조상이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54국이나 된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10여만 호가 되는데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후대에 점점 강성해져 모든 조그마한 나라들을 병합했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남사(南史, 627 649년)』 :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리에 있었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통전(通典, 801년)』 :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을 차지했다.

『남제서』〈백제전〉과 『자치통감』에 의하면 488년과 490년에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크게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488년의 전쟁은 『남제서』의 앞 부분이 멸실되어 잘 알 수 없지만 490년의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해(490)에 위군이 다시 수십만의 기병들로 백제의 지경을 공격했다. 백제 모대(동성왕)는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4명으로 하여금 위군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495년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경오년에 험윤이 저희들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침범해 오므로 사법명 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요격하여 크게 이겼고 그들을 베어 적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습니다.'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최치원전〉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고구려 백제가 강성할 때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는 오, 월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연, 제, 노국 들을 괴롭혀 중국의 큰 우환거리였다.'


『자치통감』 :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했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衰散)해져서 서쪽으로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송서』 :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후한서』 :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백제)과 예맥의 군사 수천 기(騎)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했다. 


『삼국사기』〈개로왕전(蓋鹵王傳)〉의 대토목공사에 관한 내용

① 연와로 성을 쌓고 화려한 궁궐을 지었다.
② 도리하(郁里河)에서 돌을 가져다 아버지의 뼈를 장사지냈다.
③ 하수(河水)를 따라 사성(蛇城)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제방을 쌓았다.

이들 기록에 나오는 지명은 중국의 황하(黃河)지역에 존재한다. 황하에는 제방이 있으며 숭산이라는 지명도 있고 제방의 서북쪽에 백제 지명인 청하(淸河)가 있고 그 북쪽에 석문(石門), 광양(廣陽)이 있고 동쪽에 성양(城陽)이 있으며 숭산의 북쪽에는 백제가 요서에 설치했다는 진평2군(晉平二郡)이 있다.

2008.03.31 21:43 | 원사료자료[펌] | 히스토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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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백제설
-중국사서를 중심으로-
*사서에 대한 내용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사서에 실린 내용을 위주로 다루었습니다.



『송서(488년)』 :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진평군과 백제군의 위치는 중국 〈복단대학역사지리연구소〉에서 간행한 『중국역사지명사전』을 보면 진평군은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에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남제서(南齊書, 537년 이전)』 :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晉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

『양직공도(梁職貢圖, 526 539년)』 : 백제는 예부터 내려오는 동이의 마한에 속한다. 진(晉)말에 구려(駒麗)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양서(梁書, 629 639년)』 :
백제란 조상이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54국이나 된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10여만 호가 되는데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후대에 점점 강성해져 모든 조그마한 나라들을 병합했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남사(南史, 627 649년)』 :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리에 있었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통전(通典, 801년)』 :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을 차지했다.

『남제서』〈백제전〉과 『자치통감』에 의하면 488년과 490년에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크게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488년의 전쟁은 『남제서』의 앞 부분이 멸실되어 잘 알 수 없지만 490년의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해(490)에 위군이 다시 수십만의 기병들로 백제의 지경을 공격했다. 백제 모대(동성왕)는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4명으로 하여금 위군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495년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경오년에 험윤이 저희들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침범해 오므로 사법명 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요격하여 크게 이겼고 그들을 베어 적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습니다.'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최치원전〉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고구려 백제가 강성할 때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는 오, 월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연, 제, 노국 들을 괴롭혀 중국의 큰 우환거리였다.'


『자치통감』 :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했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衰散)해져서 서쪽으로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송서』 :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후한서』 :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백제)과 예맥의 군사 수천 기(騎)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했다. 


『삼국사기』〈개로왕전(蓋鹵王傳)〉의 대토목공사에 관한 내용

① 연와로 성을 쌓고 화려한 궁궐을 지었다.
② 도리하(郁里河)에서 돌을 가져다 아버지의 뼈를 장사지냈다.
③ 하수(河水)를 따라 사성(蛇城)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제방을 쌓았다.

이들 기록에 나오는 지명은 중국의 황하(黃河)지역에 존재한다. 황하에는 제방이 있으며 숭산이라는 지명도 있고 제방의 서북쪽에 백제 지명인 청하(淸河)가 있고 그 북쪽에 석문(石門), 광양(廣陽)이 있고 동쪽에 성양(城陽)이 있으며 숭산의 북쪽에는 백제가 요서에 설치했다는 진평2군(晉平二郡)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