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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 홍대용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8:37

우리나라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 홍대용

2008.04.17 12:59 | 한국사인물열전 | 히스토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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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 홍대용

홍대용 (洪大容 1731∼1783(영조 7∼정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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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대용은 영조임금에서 정조임금때 까지 활동하였던 조선시대 후기 실학의 선두주자였으며, 북학파(北學派) 계열 실학자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과 친분이 깊었다.

 북학파란 청국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던 학파로,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청국의 문화만은 단호히 배격하고 있던 당시 보수적 정치풍토로 볼 때 매우 급진적인 학파라 볼 수 있다.
그는 전통적인 유학보다는 군국(軍國)·경제에 관심이 깊었고, 신흥 상공인의 입장에서 사회개혁사상을 폈다. 
  그러나 그의 빛나는 업적은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 천문학을 도입한 것에 있다.

 그가 먼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수학이다. 이는 서양 과학이 우수한 이유가 수학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홍대용은 훗날 남긴 ‘주해수용’(籌解需用)을 통해 우리나라 수학이 ‘구장산술’(九章算術)즉 구구법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비판하며 “새로운 창조와 경험으로 풍부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대용은 구장산술 외에도 수학계몽, 수학통종, 수법전서 등 많은 책을 정리하고 연구해 당시 수학을 집대성했다. 주해수용에서 그는 당시 수학의 거의 모든 부분을 망라해 잘못을 지적하고 분석했으며, 비율법, 약분법, 면적과 체적 등 근대적인 표현을 썼다. 

 과학 기기 창고 농수각(籠水閣)

나이 29세에 호남의 학자 나경적을 만난 뒤로 홍대용의 관심은 천문학으로 옮겨간다. 나경적과 함께 혼천의를 제작하고 자명종, 혼상의도 만들었다.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는 물을 사용해 움직이던 이전 혼천의와는 달리 기계시계를 톱니바퀴로 연결해 움직이게 한 것이다.

*홍대용이 발명하였다고 전해지는 톱니바퀴식 혼천의, 혹은 혼천시계라고도 부른다. 현재 숭실대 박물관에 소장중으로 알려지고 있다.


 홍대용은 더 나아가 사비를 털어  ‘농수각’(籠水閣)을 짓고 천체 관측 기구인 측관의, 구고의 등을 제작해 설치했다. 
  1766년 북경 방문에서 돌아온 뒤, 더 많은 관측기구를 갖다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문집 〈담헌서 湛軒書〉 외집 제6권에 있는 농수각의기지(籠水閣儀器志)에 나오는 통천의(統天儀)·혼상의(渾象儀)·측관의(測管儀)·구고의(勾股儀) 등의 관측기계가 그것이다.

홍대용이 천체 관측 기구 제작에 열심을 낸 이유는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관찰과 실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못에 설치된 농수각에서 홍대용은 천체 관측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홍대용의 친구인 김이안(金履安:1722~91)이 쓴 〈농수각기 籠水閣記〉에 의하면 "각에 올라 그 만들어진 제도를 살피니, 혼천의가 대소 각각 하나씩 2개에다 환(環)이 열이고, 축(軸)이 둘이며 반(盤)과 기(機)가 각각 하나였다. 또 환(丸)이 둘이요, 윤(輪)과 종(鐘)이 약간 있고, 기계의 톱니바퀴는 저절로 돌아 밤낮으로 쉬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혼천의는 옛 제도를 토대로 하여 서양의 설을 참고하여 활용한 것인데, 사람의 솜씨가 이에 이르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고 한다.

 북경에서의 100일

1765년 홍대용의 나이 35세에 떠난 청나라 북경 여행은 그의 사상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게 된다. 홍대용은 서장관이었던 작은 아버지의 군관 직책으로 북경에 약 3개월 간 머물렀다.
 군관이란 서장관을 보좌하고 때에 따라선 경호까지 맡아야 하였지만, 실제로는 달리 하는 일이 없었다. 홍대용 이전까지만 해도 단순한 외유성 시찰목적으로도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홍대용의 생각과 행동은 달랐다. 그는 일찍부터 각종 수학과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조선내에서 관련서적을 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유리창(琉璃廠)이라고 불리는 북경시내 대형 서점 골목을 매일같이 뒤지는 한편, 엄성(嚴姓)·반정균(潘庭筠)같은 청국의 신지식인과도 교류하였다. 그리고  천주교 성당인 ‘남천주당’에 자주 방문하면서 서양 선교사를 통해 서양의 진보한 과학을 접하게 되었다.

새로운 하늘을 열다

 이런 그의 노력은 귀국 후 그의 수많은 저술중 가장 빛나는《의산문답(醫山問答)》을 완성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실옹(實翁)·허자(虛子) 두 사람이 주도 받는 대화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인류의 기원, 계급과 국가의 형성, 법률, 제도 등에서부터 천문·율력(律曆)·산수·과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가령 일식과 월식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고찰하였다.

허자=예부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고 했소. 선생은 어찌해 땅이 둥글다 하시오?
실옹=일식이 왜 일어나는지 아시오? 일식이 일어나면 태양에 둥근 고리가 생기오. 그 고리의 실체가 뭐겠소?
허자=달이오.

실옹=일식은 달이 해를 가리기 때문에 생기는 거요. 즉 달이 둥글다는 얘기요. 그럼 월식은 어떻소? 월식이 일어날 때 생기는 고리는 어떤 모양이오?
허자=둥글었소.

실옹=월식은 지구가 태양을 가리기 때문에 생기는 거요. 달에 비친 땅덩어리가 둥글다는 건 지구의 모양도 둥글다는 뜻이오. 월식을 보고도 땅덩어리가 둥글다는 걸 모르는 건,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고도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것과 같소.

하지만 허자라는 사람이 반문도 만만치 않다.
허자: 땅이  둥글면, 모든 사람은 옆으로나 거꾸로는 살지 못하니 아래 떨어지지 않겠소?

 그러자 드디어 실옹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최고의 이론은 지구가 하루에 1번씩 자전하여 낮과 밤이 생긴다는 지구회전설이 등장하게 된다. 

실옹: 그렇다면 사람과 물 같은 미물도 아래로 떨어지는데, 무거운 땅덩이는 어찌 아래로 떨어지지 않겠는가? ( 허자의 말대로라면 땅도 계속 아래로 떨어져야 된다는 뜻으로 보임)   太虛(태허 - 거대한 허공)는 천지사방의 구분이 없는데 어찌 상하좌우의 구분이 있겠는가?....
무릇 해, 달, 별 땅등은 허공에 영구히 머물러 있으니 태허에 상하 구분이 없다는 것도 분명한 것이다. 대저 땅 덩어리는 9만리나 되는데, 12지간에 맞추어 도는 것을 보면 그 속도는 번개나 포탄보다 빠르오
.

 땅덩이가 이처럼 빠르게 회전하기 때문에 지력이 생기며 땅에서 멀어질수록 이 힘은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또한 자석이 쇠를 끌어 당기고 호박이 먼지를 끌어 당기듯, 같은 본류끼리 서로 감응되는 것은 물의 이치이오.

 비록 지구중력이 지구 자전에 의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홍대용은 지구 자전설뿐 아니라, 지구 자기장설, 그리고 우주 공간론에 이르기까지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반 사대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통적인 도가사상이라던가 유학사상을 적절히 사용하였다.

미완으로 남은 그의 연구

홍대용의 이론은 1543년 나온 쿠페르스쿠스의 지동설에 비해서도 다소 늦은 시기에 제시된 학설임은 분명하다.  또 홍대용의 우주 공간론이라던가 지구 중력 이론이 뉴턴이 제시한 만류인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우주 천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전혀 정립되지 않는 조선의 사정을 고려 해 볼 때, 그의 학설은 매우 진보적일뿐 아니라 탁월한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거대한 땅덩어리 즉 지구가 우주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리나 태허라고 표현된 우주의 한없이 넓고 큰 공간속에 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이렇게 넓은 우주 속에 다른 생명체도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처럼 천문학의 개척자이었던 그였지만, 과거 시험에서 수차례 낙방한 경험과  음보(가문의 배경으로 벼슬을 얻음)로 출사한 이후의 관료재직 생활을  통해 누구보다도 조선의 열악한 인권실태와 과거제의 폐해, 그리고 교육의 부재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농촌에서 양반관료의 농민에 대한 횡포를 막기 위해 균전제(均田制)·부병제(府兵制)를 주장하였고, 신분제도 개혁을 위해 과거제를 폐지하고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 등용 및 신분에 관계없이 8세 이상 모든 아동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혁신적 개혁사상을 주장하였다. 

   홍대용 그는 분명 새로운 하늘을 개척한 우리나라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이다.

  하지만 그는 1783년 나이 53세에 홍대용은 중풍으로 상반신이 마비돼 죽음에 이른다. 

 
<-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 있는 홍대용의 묘소.


친구였던 실학자 박지원은 추모하는 글에서 “식견이 원대하고 사려 깊고 독창적인 기지가 있었으며 사물을 종합해 체계적으로 분석한 사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