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 鮮

조선의 배와 무기...한산,명량,노량해전

吾心竹--오심죽-- 2009. 12. 10. 15:15


[ 전선(판옥선) ] [ 거북선 1592 ] [ 거북선 1795 ] [ 사후선 ]
[ 방패선 ] [ 관선 ] [ 사견선 ] [ 조운선 ]
     
[ 북조선 ]      

조선시대에는 민간의 해양활동이 통제된 반면 수군제도와 조운(糟運)제도가 발달하였다.

특히 고려말부터 극성을 부렸던 왜구의 영향으로 전함이 발달하였는데, 조선시대 전함의 전형이 된 전선(戰船 ; 판옥선)을 비롯해 거북선, 방패선 우수한 성능을 갖춘 전함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조선 중기 임진/정유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우수한 전함의 건조 덕택이라고 볼 수 있다.

전함 이외에 세곡을 운반하는 데 활용했던 조운선, 통신사들이 타고 다녔던 사견선, 관에서 활용했던 관선 등 다양한 배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후기에는 수군이 해체되고 세곡 운송에 기선이 활용됨으로써 전통적인 군선과 조운선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또한 지토선(地土船) 등 민간 선박들도 소위 개량선박의 보급정책으로 인해 급격히 그 구조가 변경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를 전후해 순수한 우리의 한선(韓船)은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시대 조선시대 - 명종 14년(1559년)    
정의 조선시대 수군의 주력함으로 갑판 위에 2층으로 된 판옥을 올린 것이 특징.

전선(戰船 ; 판옥선)은 갑판 위에 상갑판을 꾸미고 그 위에 장대(將臺 ; 사령탑)를 설치한 구조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다층 전투함이다. 갑판 위로 올린 구조물을 '판옥'이라고 한 데서 '판옥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선은 조선시대 수군의 주력함으로, 막강한 화력과 튼튼함,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거북배와 비교할 때, 2층 판옥이 있다는 점만 다를 뿐 기본적인 구조는 유사했다. 다만 거북배의 역할은 적의 지휘선을 공격하고 적 함대의 전열을 흐뜨리는 기동돌격대의 성격이었다면, 전선은 그 뒤를 이어 막강한 화력으로 본전투를 이끄는 전함이었다. 대, 중, 소 세 가지 규모가 있었으며, 대형은 화포 중 천/지/현/황 총통을 모두 적재하였고, 중형은 지/현/황, 소형은 황자총통만을 적재하였다.

◎크기와 구조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왕에게 올린 보고서에 전선에 대해 언급된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치수와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영의 제일 큰 전선인 상선(上船 또는 座船 ; 통제사가 타는 배)의 치수는 배의 길이 105자, 너비 39자 7치이다. 아래층의 신방 도리에서 위의 패란(방패 위에 있는 도리를 말하며 언방(偃防)이라고도 한다)까지의 높이는 5자이다. 또한 수영(水營)에 속해 있는 각 관읍(官邑)과 진포(鎭浦)의 전선의 치수는 배밑 길이 65자, 한판 너비 15자, 이물 쪽 너비 12자 5치, 고물 쪽 너비 7자 5치이고, 배의 한판 높이 8자이다.

통영의 좌선이나 부선의 멍에는 16개씩이고, 배밑은 15개를 이어 붙였다. 각 관읍이나 진포의 전선의 멍에는 15개씩이고 배밑은 12~13개의 나무를 이어 붙였다. 이물비우는 직판(直板 ; 이물비우를 곡목으로 만든 전선도 있었다) 널빤지로 15쪽을 이어 붙였다. 그리고 뱃전 위에 멍에를 걸었다. 양쪽 뱃전의 멍에 뺄목에 큰 노를 9척씩 걸고 젓도록 되어 있다.

배밑은 네모진 통나무 15개를 이어 붙였는데 물 속에 잠겨 있으므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물돛대와 고물돛대가 있고, 고물꼬리에는 널판을 깔지 않고, 난간이 없이 비어 있다.

판옥전선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삼판 7쪽을 이어 붙여 올린 뒤 멍에를 걸고 그 위에 귀틀을 짜고 겻집을 깐 곳까지를 이른다. 2층은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를 걸고서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판옥이나 다락을 꾸민 데까지를 이른다.

상장 위에는 이물과 양쪽 뱃전을 따라가면서 여장을 설치하였다. 상장의 언방 위에 뱃집 멍에를 걸고 널빤지를 까는데 이것을 청판(廳板)이라고 한다. 상장의 청판에서 이물돛대와 한판돛대를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게 장치를 하였다. 또 청판 위 한가운데에 다락을 만들었고, 그 위에 좌대를 만들고 가마지붕을 씌운 뒤 장막을 쳤다. 통제사는 이 좌대에서 모든 배와 군사를 지휘한다. 이 좌대를 장대라고 한다.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면, 임진왜란 이후 전함이나 관용선의 이물비우는 세로다지 곧은 널판이나 곡목의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로다지로 되어 있는 보통 배와 구별된다. 또 전함 삼판의 꼬리 부분이 위로 솟구쳐 올라간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전함의 위용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나, 현호를 늘리기 위한 조선기법으로 볼 수 있다.

 

 

시대 조선시대(1592년)    
정의 임진왜란에서 큰 전과를 거둔 전함으로 갑판 위를 판자로 덮은 다음 그 위에 창칼을 꽂은 것이 특징.

거북선은 1592년(임진년) 임진왜란에서 사용되어 큰 위력을 발휘했는데, 그 구조와 성능에 대한 기록을 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장차 왜적의 침입을 염려해 따로 전선(戰船)을 만들었는데, 배 위를 둥그스름하게 판자로 덮고 그 위에 창칼을 꽂았다. 적군들이 배에 기어오르거나 뛰어내리면 창칼에 찔려 죽게 된다. 배의 앞에는 용두(龍斗)를 달고 그 용의 입을 통하여 대포알을 쏘았다. 뒤에는 거북꼬리를 달고 총구를 냈다. 배의 좌우에는 각각 6개의 대포구멍을 냈다. 거북배에는 돌격장이 타고 함대의 선봉이 되어 나아간다. 적이 에워싸고 덮치려하면 일시에 대포를 쏘아 가는 곳마다 휩쓸어 임진왜란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모습이 엎드린 거북과 같으므로‘거북배’라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거북선의 구조에 대한 자세한 설계도나 치수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와 장계(狀啓 ;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서신으로 임금에게 한 보고), 조카인 이분(李芬)의 행장과 몇 가지 단편적인 자료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거북선이라는 이름은 조선왕조 <태종실록>에 처음 나온다. 태종 13년 2월에 “왕이 임진나루를 지나가다가 거북배와 왜선으로 꾸민 배가 수전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태종 때의 거북선은 평전선만이 있을 때였으므로 임진년의 거북선과는 그 구조가 달랐다고 보아야 한다.

<난중일기>에서는 임진년 2월 초파일에 “거북배에 쓸 돛감(帆布) 29필을 가져왔다”, 4월 초하루에는 “돛을 만들기 시작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거북선에는 이물돛대와 한판돛대가 있다. 옛날에 삼베나 면포돛은 관선이나 싸움배에만 썼고 일반에서는 부들로 짠 돛을 달았다. 행선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면 돛을 올리고 출발하는데, 도중에 바람이 적거나 행선을 서두를 때는 큰노를 걸고서 노질을 재촉하여 행선한다.

거북선에는 약 90명의 노젓는 군사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식 큰노 1척에 4명이 둘씩 마주 서서 젓고, 우두머리 1명이 더 붙어서 모두 5명이 젓게 된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에는 한쪽 뱃전에 8척의 노가 달려 있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라좌수영에 영(營) 거북선, 순천 거북선, 방답 거북선 등 3척이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는 1593년에 추가로 만든 거북배를 포함하여 모두 5척이 있었다.

 

 

시대 조선시대(1795년)    
정의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에 따라 복원한 18C의 거북선.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돌격함이다. 전선(戰船 ; 판옥선)의 윗갑판을 떼어내고 대신 둥근 개판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적군이 배 위에 올라올 수 없도록 개판 위에 과선처럼 칼과 송곳을 꽃아두었다. 배앞과 좌우 방패판, 개판에 총포 구멍을 내고 대포를 장착하여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좌우에는 16개의 노와 2개의 돛이 있어 기동력(약11놋트)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승선 인원은 최대 150명이었으며, 내부가 2층으로 되어 있고 아래에선 노를 젓고 짐을 실었으며, 위에서는 총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앞 뒤 2개의 출입문과 지붕에 4개의 비상문이 있고 앞의 용머리에서는 유황과 염초를 태워 연기를 퍼뜨려 적을 교란시켰다.

◎구조와 특징
임진왜란이 끝난 지 197년 뒤인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통제영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45도 투시도 및 치수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거북선의 생김새와 만드는 방법, 전투 성능과 각 구조의 기능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자료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배밑의 10쪽을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이고, 머리 쪽(이물) 너비는 12자, 허리(한판)의 너비는 14자 5치, 꼬리 쪽(고물) 너비는 10자 6치이다.

2. 좌우 삼판은 각각 7폭을 이어 쌓아 올렸는데, 높이는 7자 5치이다. 맨 아래 첫째 판(부자리)의 길이는 68자이고, 차차 길어져서 맨 위 일곱째 판의 길이는 113자가 된다. 두께는 다 같이 4치이다.

3. 이물비우는 가로다지로 4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4자이고, 둘째 판 좌우에 현자총통 대포구멍을 각각 1개씩 뚫었다. 고물비우는 가로다지로 7장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7자 5치이고, 위쪽 너비는 14자 5치, 아래쪽 너비는 10자 6치이다. 여섯째 판 한 가운데에 직경 1자 2치가 되는 구멍을 뚫어 키(치)를 꽂았다.

4. 좌우 뱃전 밖으로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을 걸고 신방 머리 쪽에 멍에(가룡)를 가로로 걸쳤는데, 바로 이물(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맨 것 같다. 신방을 따라 가면서 안쪽으로 널빤지를 깔고 신방 위에 기둥을 세우고 방패를 둘러 세웠다. 방패 위에 또한 언방(살림집의 도리와 같음)을 걸었는데 신방(현란)에서 언방(패란)까지의 높이는 4자 3치이다.

5. 언방(패란)의 좌우 안쪽으로 각각 11장의 거북 잔등판을 겹쳐서 올려 덮었다. 그 잔등에는 1자 5치의 틈(등골)을 내서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 편하게 하였다.

6. 뱃머리(이물)에 거북머리(용머리)를 달았는데 길이는 4자3치, 너비는 3자가 된다. 안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입을 벌려서 마치 안개처럼 연기를 토함으로써 적을 혼란시켰다.

7. 좌우에 노가 각각 10척씩 있고, 방패가 14개씩 있다. 그 방패에는 대포구멍이 뚫려 있다. 뱃머리(이물)의 거북머리(용머리) 위쪽에 2개의 대포구멍이 있고, 거북머리(용머리) 아래에 2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 각각 1개씩의 대포구멍이 있다. 거북잔등판 좌우에 각각 12개의 대포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거북 ‘귀(龜)’자 기를 꽂았다.

8. 배의 좌우 겻집(포판) 아래에 방이 각각 12칸씩 있는데, 2칸은 철물을 쌓아두고 3칸은 대포와 활, 화살, 창, 검 등을 쌓아놓고, 나머지 19칸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곳으로 활용했다. 배 위 왼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에서는 선장이 생활하고, 오른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에서는 장교들이 생활했다.

 

 

 

<사후선>

 

시대 조선시대    
정의 본진보다 앞서 가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알리는 배.

사후선은 선단의 맨 앞으로 나가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적선을 발견하게 되면 신기전으로 신호를 보내 알리는 역할을 하는 척후선이었다. 전체길이 13.5미터 정도의 소형으로, 승선인원은 5~6명이었다. 신호를 보내기 위한 신기전통을 탑재하였고, 뱃전 좌우에 노 2척 씩을 걸었다. 사후선은 또 긴급한 군의 작전 명령 등을 쾌속으로 전하는 전령선과 연락선의 임무도 수행했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 ; 전라좌수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발행)에는, 1678년 전함의 제도를 기록해놓은 내용이 있는데 이 중 전라좌수영 본영의 사후선에 관한 것을 적어 보면 아래와 같다.
"제 1 사후선은 본판(배밑) 길이가 19자이다. 1636년 2월에 새로 만들었다. 현판 좌우에 노 4자루를 걸었고, 기선 인원은 사공 1명에 능노군(能櫓軍 ; 노젓는 군사)이 5명으로, 도합 6명이다."

임진왜란 이후 정비된 전함의 제도는 전선(戰船), 방선(防船), 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의 4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라좌수영 관하에 있는 5관(官) 5포(浦)의 경우, 전선(戰船)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으로 기본 전투 편대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방패선>

 

시대 조선시대    
정의 포판 위에 난간을 설치하고, 방패를 세운 배.

평선의 뱃전 밖에 신방을 걸고 난간을 세운 후, 난간에 방패를 세운 배이다. 선체 구조는 전함과 같았으며, 전투함인 동시에 적을 탐색하는 전투 정찰의 임무를 겸하고 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삼도수군조련도'(三軍水軍調練圖) 병풍에는, 방패선에 우탐선(右探船)이라는 깃발을 달았고 ‘탐(探)’이라 쓴 깃발을 깃대에 올린 것이 보인다. 작은 대포를 탑재하고 좌우에 노를 4척씩을 걸었다.

◎구조와 제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각선도본>(各船圖本)에는 방패선(兵船 ; 병선)을 45도 투시도법으로 그린 설계도와 제원(諸元)이 적혀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배밑의 길이는 39자, 너비는 6자 9치, 머리쪽(이물)의 너비는 4자 5치, 꼬리쪽(고물)의 너비는 4자이다. 뱃전 높이는 8자이다. 배밑은 7쪽을 이어 붙였는데 그림에서는 물에 잠겨 있어서 안 보인다. 뱃전 삼판은 7쪽을 이어 올렸다. 고물에는 난간을 하지 않아 비어 있고, 세웠다 뉘었다 할 수 있는 돛대가 2개 달려 있다.

고물에는 배의 방향을 잡아주는 키가 있고, 이물에는 배를 매두는 닻이 있다. 뱃전 위에는 고물머리 멍에를 포함하여 10개의 멍에가 걸려 있고, 이물머리에는 선멍에(덕판)가 있다. 가룡목은 삼판마다 좇아 내려가면서 양쪽 삼판을 꿰뚫어서 끼우는데, 멍에 바로 밑에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안 보인다.

◎승선 인원
1. 선장(船將) 1인 : 배를 운용하고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 고급 군관
2. 기패관(旗牌官) 1인 : 선장을 보필하고 배를 운용하며 군령을 깃발로 통신하는 선상 관리 군관, 통신사 겸 갑판 사관
3. 훈도관(訓導官) 1인 : 가르쳐 인도하는 향도 군관
4. 사부(射夫) 10인 : 활 쏘는 병사, 사수(射手)
5. 화포장(火砲匠) 1인 : 대포의 화약을 다루는 병사, 장약수
6. 포군(砲軍) 10인 : 대포를 다루고 조종하는 병사, 전포수
7. 사공(沙工) 1인 : 배를 조종하고 키를 잡는 병사, 항해사 겸 조타수
8. 능노군(能櫓軍) 30인 : 노를 젓는 병사, 노역군

 

 

 

 

< 관선>

 


시대 조선시대    
정의 관에서 사용하던 배.

관선(官船)은 관에서 필요로 하는 관수 물자를 조달하는 데 이용하기도 하고, 관원이 배를 타고 출장을 가거나 부임할 때 이용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관선의 모습은 김홍도의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 조선시대 관선의 구조
조선시대 관선은 영조 18년(1742년)에 홍계희(洪啓禧)가 평양감사가 되어 배를 타고 평양에 당도하는 모습을 그린 평양 대동강의 관선화(官船畵, 김홍도 작, 1770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배는 판옥 상장을 하지 않은 평선의 겻집 위에 정자를 세운 정자각선(亭子閣船)이다. 이 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식 큰 노를 이물의 양쪽 뱃전에 걸고서, 노군(櫓軍) 2명이 함께 젓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거북선의 노젓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거북선과 같은 큰 전함에서는 한쪽 뱃전에 조선식 큰 노 8척씩을 걸고서 노 1척에 대장을 포함해서 5명이 한패가 되어 저었다.
2. 삼판을 만들어 올릴 때 때려 박은 피새가 큼직하게 보인다.
3. 돛의 모양과 그 부속들을 잘 나타내고 있다.
4. 겻집은 가로 널로 깔았다.
5. 정자각은 뜸으로 지붕을 이었다.

다른 한 폭의 그림에서 나타난 관선은 가운데 정자각을 세우고 뜸으로 지붕을 올렸다. 정자각 안에는 평양감사가 도장 넣는 함을 옆에 놓고 앉아 있다. 이물의 좌우 뱃전에서 조선식 큰 노를 사공 2명이 한패가 되어 젓고 있고, 고물에서는 사공 3명이 한패가 되어 조선식 큰 노를 젓고 있다.

관선 좌우에는 청사초롱을 밝힌 호위배가 있고, 수많은 다른 배들이 주위에 있다. 강물 위 여기저기에 불을 밝혔으며, 강가에는 아이들이 봉화를 들고 주위를 밝히고 있다. 관선의 이물 칸에는 호위하는 군관과 나졸이 있고 악사들이 풍악을 울리고 있다. 장자각 안에는 기생(관기)들이 대령하고 있다. 대동강에 떠다니는 다른 강배(江船)들의 모습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다.

◎고려시대 관선의 구조
고려 때 송나라의 서긍(徐兢)이라는 사신이 1123년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 관선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를 통해 보면 조선의 관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뱃집 위에는 뜸으로 지붕(덮개)을 덮었고 아래 문짝과 창문을 달았다.
2. 둘레에는 난간이 있고, 가로 방향 나무로 양쪽 삼판을 서로 꿰뚫어 빼어 냈다.
3. 배밑은 평평하고 넓다.
4. 이물의 배 위에는 닻줄을 감는 닻줄물레(호롱)가 있고, 큰 돛대를 함께 세웠다.
5. 베(布)로 만든 돛은 20여 폭이 된다.

 

 

 

< 사견선>

 

시대 조선시대(1607~1811)    
정의 일본 통신사 파견 때 쓰였던 배로 통신사선이라고도 부름.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정상을 되찾자,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년동안 12차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게 된다. 이때 통신사 일행과 역관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간 배를 사견선(使遣船), 또는 통신사선(通信使船)이라 한다. 조선공학적 측면에서는 도해선(渡海船)또는 원양항해선이라고 할 수 있다.

6척의 선단이 함께 움직였으며, 겻집 위에 판옥 대신 객실을 꾸몄다. 또한 외국에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아름다운 깃발을 세우고 선체를 화려하게 꾸몄다.

◎사견선의 구조와 특징
<헌성유고>(軒聖遺稿)라는 필사본에는 사견선의 설계도와 배를 축조하는 데 필요한 재료, 제작 일정이 나와 있다. 배밑, 삼판, 이물비우, 고물비우 등에 대한 나무의 치수와 필요 수량, 나무못의 종류와 필요 수량, 쇠못의 종류와 수량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 배밑의 길이와 너비, 뱃몸의 길이와 너비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이 필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옛날 배에 대한 전개식 설계도 및 평면 설계도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었으므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발견된 설계도와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배밑은 너비가 한(一)자 반이 되는 네모진 통나무를 옆으로 열한 개를 잇고 가새를 박는다. 배밑 양쪽 가장자리에 일곱 쪽의 삼판(두께가 판마다 다르다)을 이어 붙인다. 이물 쪽에 귀삼(耳杉) 한 장을 더 올려서 이물을 솟아오르게 한다. 삼판에 박는 못은 섞어서 쓰는데, 바닷물에 잠기는 부분은 참나무 못을 쓰고, 반대로 마른 부분은 쇠못을 쓴다.

2. 이물비우는 세로 방향으로 대어 막는다. 한가운데에 곡목을 세우는데 아래는 배밑 사이에 꽂아 넣는다. 양 옆으로 각각 세 개의 곡목을 세운다. 가새를 옆으로 일곱 군데에다 박아 잇는다. 쇠못, 꺾쇠, 거밀못, 대갈못, 넓적쇠 등을 함께 쓴다.

3. 고물 비우는 가로 방향 널빤지 일곱 장을 대어 박는다. 배의 못은 참나무 못과 쇠못을 섞어 쓴다. 고물비우의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널빤지 이음새에 키 꽂는 구멍을 뚫는다.

4. 배밑의 길이는 66자, 이물 쪽 너비는 11.5자, 허리 쪽 너비는 16자, 고물 쪽 너비는 10.5자가 되고 뱃몸의 길이는 91자, 한 판의 너비는 22.5자가 된다.

5. 뱃몸이 완성된 다음에는 뱃전(삼판) 위에 멍에를 얹어 걸고, 그 위에 귀틀을 짜고 겻집을 깔며, 겻집 위에 선실을 짓는다.

6. 뱃전(삼판) 위에는 15개의 멍에를 가로로 건다. 양쪽 삼판 바깥 쪽 멍에의 뺄목 위에 신방(기둥을 세우는 밑도리)을 걸고 그 위에 난간 기둥을 세운 후 난간대를 건다.

7. 겻집 위에는 모두 14칸의 방을 배의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로 들인다. 이물 돛대와 한판 돛대를 세운다. 뒷간은 고물 맨 끝에 둔다.

◎ 그림에 나타난 사견선
1811년(순조 11년)에 통신사 김이교(金履喬) 일행이 타고 갔던 배가 오사카(大阪)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린 그림이 있는데, 그림 제목이 <한선앙면도>(韓船仰面圖)다. 일본측 수행원이 그린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씌여 있다.

“길이는 23~24칸(한 칸=3자), 너비는 6칸이고, 멍에는 각목으로 크고 굵다. 양쪽의 난간에는 칠을 했다. 뱃전과 난간 사이에 노를 걸고 저었다. 이물과 고물이 조금씩 높다. 노는 소나무로 만들었는데 길이가 길어서 풍랑에 부딪히면 자주 부러진다. 전체적인 형태는 매우 거칠다. 배가 큰 것에 비해 견고하지는 않은 것 같이 보인다.”

그림을 살펴보면, 이물에는 나무 닻이 있고, 고물에는 키가 있는 것이 보인다. 앞서 설명한 <헌성유고>에 나오는 사견선 설계도와 구조가 꼭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조운선 >

 

시대 조선시대    
정의 남부지방에서 거둬들인 곡식을 서울까지 운반하는 데 사용했던 배.

삼남지방(충청, 전라, 경상)의 세곡(稅穀)을 서울까지 운반할 때 사용하였던 선박을 조선(漕船)이라고 하는데, 이를 또 다른 표현으로 조운선(漕運船)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남부 지방의 세곡을 이 조운선에 싣고서 한양의 한강 하류에 있는 서강(西江)으로 운반한 후, 경창으로 납곡(納穀)을 하게 된다. 기본 구조 위에 삼판 두 장을 더 올려서 용적량을 늘린 것이 특징이다.

◎조운선의 구조와 특징
1. 배밑의 길이는 57자, 한판의 너비는 13자, 이물 쪽 너비는 10자, 고물 쪽 너비는 7자 5치이다. 뱃전의 한판 높이는 11자, 이물 쪽 높이는 10자, 고물 쪽 높이는 9자 5치이다. 2개의 돛대가 있다.

2. 뱃전 위에 4개의 큰 멍에를 건다. 이물에는 선멍에를, 고물에는 고물머리 멍에를 건다. 닻줄물레와 이물돛대, 그리고 한판돛대를 다루기 편하게 하기 위한 널판이 뱃전 위에 걸쳐 있다.

3. 이물에는 닻줄물레에 닻이 매달려 있다.

4. 고물비우는 가로 방향으로 10쪽의 널을 이어 붙였는데 밖에서는 안 보인다. 고물에는 키(舵)가 있다.

5. 뱃전에 삼(杉)이라고 써 놓았다.

6. 이물비우는 가로 방향으로 17쪽을 이어붙였다. 장쇠는 삼판(杉板)마다 좇아가면서 양쪽 삼판을 꿰뚫어서 끼우는데 멍에 바로 밑에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안 보인다. 배 안에 곡식을 싣는다.

이 같은 특징을 살펴보면, 배 안에다 곡식을 싣기 때문에 멍에가 전선처럼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조운선의 운행과 주변 관포
조운선이 삼남 지방의 조창(漕倉)에서 세곡을 싣고 상경하면 조운 해로(漕運 海路 ; 조운 운송 행로) 연안에 있는 관(官邑 ; 관읍)과 포(鎭浦 ; 진포)의 수령들은 조운선의 안전한 운항을 도모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항로에는 주/야간용 표지를 세워야 한다. 또, 조운 선단이 관내에 들어오면 마중을 나가 물길을 안내하고 주위를 경비하여 안전한 항해를 하도록 해야 한다. 삼남 지방의 지도에는 조운선의 항로 물길이 적혀 있고 항로 표지가 그려져 있다. 관할 해역도 명시되어 있다.

◎ 한강 노량진 배다리에 쓰인 조운선
노량진 배다리(舟橋 ; 주교)를 가설할 때에는 조운선이 징집되어 받침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배다리란 왕이 행차를 할 때 노량진 나루에 배를 연결하고 그 위에 널판때기를 깔아 만들었던 다리를 말한다.

<주교절목>(舟橋節目)에 기록된 배다리에 쓰이는 배와 그 밖의 소요 재목 및 부속은 아래와 같다.

띄우는 배(江船) 38척, 배 위에 걸치는 멍에 72주, 배 위에 걸치는 도리(道里) 175주, 다리 위에 까는 널판 1,039쪽, 난간 기둥 170개, 회룡목(回龍木) 108개, 거멀목(蛭木) 70개, 참나무못 175개, 크고 작은 쇠못 900개, 좌우에서 호위하는 배 12척, 배다리 좌우에 띄우는 배인 난간선 240척, 홍살문 3면 등이다.

배다리의 사무를 관장하는 관청을 주교사(舟橋司)라고 하고, 당상관(堂上官 ; 정3품 상관)을 우두머리로 삼았다. 왕의 행차가 끝나면 배다리를 해체해서 배는 원래의 용도인 조운선으로 쓴다. 재목과 부속들은 보관해 두었다가 일이 있을 때 다시 쓴다.

 

 

 

< 북조선 >

 

시대 조선시대    
정의 관북 지방의 세곡을 서울로 실어나르는 배.

조운선(漕運船)으로 세곡(稅穀)을 운반한 남부 지방과는 달리, 관북지방(강원도 함경도)의 세곡은 북조선(北漕船)으로 운반하였다. 북조선의 너비가 조선보다 넓은 반면, 뱃전의 높이는 조선이 한 자 정도 높았다. 조선이 세곡을 800~1000석정도 실어나를 수 있었고, 북조선은 약 1,000석~1,200석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관북 지방의 세곡을 북조운선에 싣고 동해안을 따라 남으로 내려간 후, 또 동남해(東南海)와 서해를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려면, 항해 기간이 두 달 정도는 걸린다. 그래서 관북 지방의 세곡은 함흥으로 납곡(納穀)을 하게 된다. 함흥은 이성계(李成桂)의 별궁(別宮)이 있는 곳이기도 한데, 이 별궁에서 세곡을 받아 관북 지방 재정에 사용한다.

◎북조선의 구조와 특징
1. 배밑의 길이는 57자 5치, 한판의 너비는 17자 5치, 이물 쪽 너비는 16자, 고물 쪽 너비는 15자이다. 뱃전의 한판 높이는 10자, 이물 쪽 높이는 9자, 고물 쪽 높이는 9자이다.

2. 두 대의 돛대가 있다. 닻줄물레, 이물돛대 그리고 한판돛대를 다루기 편하게 하기 위한 널판이 뱃전 위에 걸쳐 있다.

3. 이물비우는 가로 방향으로 16쪽을 이어 붙였다. 고물비우는 밖에서는 안 보인다.

4. 뱃전에 삼(杉)이라고 써 놓았다. 뱃전인 삼(杉)은 9쪽을 이어 붙여 올려서 만들었다. 가룡목(加龍木)은 삼판마다 쫓아가면서 양쪽 삼판을 꿰뚫어서 끼우는데 멍에 바로 밑에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배밑은 5개를 이어 붙였는데 물에 잠겨 있으므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 배의 구조 >

 


[ 뱃집 ] [ 뱃몸 ] [ 이물 ] [ 한판 ]
   
[ 고물 ] [ 기타 ]    

한국의 전통배, 한선(韓船)
우리 나라 배의 독특한 만듦새와 생김새를 갖춘 배를 한선(韓船)이라고 한다. 한선은 자연 환경과 지리적 요건 등에 의해 영향을 받아왔다. 한선의 특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배의 밑부분이 평평하다는 것인데, 이는 조석간만의 차가 심한 서남해안에 적응하기 위함이다. 배밑이 평평한 배는 만조 때 밀물을 타고 갯가로 들어와서 간조인 썰물 때는 그대로 갯바닥에 편하게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를 '평저선 구조'라고 하는데, 바로 한선의 기본적인 구조인 것이다.

시대에 따른 한선의 변화
원시 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뗏목배가 차츰 발달해 가는 거의 같은 시대에 통나무를 반으로 쪼갠 다음 돌도끼로 속을 파낸 구유처럼 생긴 통나무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쇠연장을 쓰게 되는 철기시대에 들어와서는 널판때기를 만들 수 있게 되고, 나무에 구멍을 뚫고 나무못을 박을 줄 알게 되어 바닷배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는 ‘거룻배’를 만들었다. 이후 더 많은 짐을 싣거나 사람을 더 태우기 위해서 노를 젓지 않고도 바람의 힘을 빌어 멀리까지 왕래할 수 있는 ‘야거리’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완전한 구조선(構造船; 자연 목재를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나무를 쪼개고 자르고 하며 결합하고 연결한 배)이 만들어진 것이다. 문명과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배의 필요와 수요가 늘어나고 점점 더 큰 배를 만들게 되자, 뱃전을 7쪽으로 올리고 돛대도 2대를 세우는 ‘당두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한선의 기본 선형이라 할 수 있다.

한선의 기본 선형
한선의 기본 선형은 평평한 배밑, 턱을 따내고 널판때기를 겹쳐서 쌓아올린 뱃전, 가로다지 널팔때기로 대어 막은 이물비우와 고물비우, 배의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멍에, 멍에 아래의 뱃전에 구멍을 뚫어서 꿰어 걸은 장쇠, 배밑을 가로로 꿰어 박은 길다란 나무창인 가새, 뱃전을 위에서 아래로 꿰어 박은 나무못인 피새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형태는 서양의 선형이나 중국의 선형과는 다른 것으로, 우리나라의 지리적, 지형적 조건과 형편에 알맞는 것으로 독특하게 창안되고 발달되어 온 것이다.

 

 

 

< 겻집>

 

시대 통시대    
정의 멍에 위에 귀틀을 짜고 그 위에 가로로 깐 널판. 너장이라고도 하며, 갑판 (甲板)에 해당함.

목선 선창(船艙) 위에서 선현 호선(船舷 弧線)을 따라 설치된 노천각판(露天殼板)을 이르며, 아래는 격창벽과 늑골이 받치고 있다. 대형선의 갑판 아래에는 탁량(托梁)이 있다. 창면(艙面)의 수밀성을 보증할 뿐 아니라 조작 장소(操作 場所)이며 보행로이기도 하다. 선체의 강도를 높이는 작용도 하며, 선수갑판, 선미갑판, 현갑판(舷甲板)으로 나눈다. 나무로 만든 갑파박(甲板駁)의 중부 창면판(艙面板)도 갑판이라고 하는데 움직일 수 있다.

선수갑판을 속칭 포두판(鋪頭板)이라고도 한다. 수첨창(首尖艙)의 위쪽에 종방향 혹은 횡방향으로 깔아 놓은 노천 수밀각판(露天 水密殼板)이다. 앞쪽은 봉두판(封頭板), 뒤쪽은 전화창(前貨艙), 좌우는 현변(舷邊)과 연결된다. 항행(航行), 고박, 하역, 투묘, 양묘, 교람(絞纜)등을 조작하는 장소이다.

선미갑판을 속칭 포소판이라고 한다. 미첨창(尾尖艙) 위쪽에 종방향으로 깔아 놓은 노천 수밀각판(露天 水密殼板)으로 키를 조종하는 곳이다. 일부 선박은 수미갑판 위에 누자(樓子) 혹은 솝붕을 설치한다.

현갑판을 평판(平板), 주간(走杆), 양교(陽橋)라고도 한다. 양측 현변(舷邊)과 창구위판(艙口圍板) 사이에 종방향으로 설치된 노천 수밀각판(露天 水密殼板)이다. 앞뒤가 수미갑판(首尾甲板)과 연결된다. 항행, 하역 작업을 할 때 사람이 다니는 길로 사용한다.

 

 

< 배밑 >

 

시대 통시대    
정의 배의 밑바닥. 한자로는 선저판(船底板) 또는 본판(本板).

◎형태
배밑이란 배의 밑바닥을 의미하는데, 한선의 배밑은 평평하고 넓적하게 생겼다. 한선의 특징은 평저선(平底船)이라는 데 있으며 이 평저선은 연안선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 전통 선박인 한선에 있어서 강선(江船 ; 강에서 다니는 배)이나 해선(海船 ; 바다에서 다니는 배)이나 배밑은 모두 평평하고 넓적하다. 한문으로 배밑은 선저판(船底板) 또는 본판(本板)이라고 하며 배의 기본이 되는 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남 해안은 간조와 만조 때의 변화가 심하고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크다.(인천 해역의 경우 평균 8m에 이른다.) 해안의 드나듦이 복잡하며, 평평하고 길이가 긴 넓은 갯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지리적, 지형적 조건에 가장 적응하기 쉬운, 즉 평평한 배밑을 가진 뗏목과 뗏목배가 발달하게 되었다. 배밑이 평평한 배는 만조 때 밀물을 타고 갯가로 들어와서 간조 때 썰물로 바닷물이 빠지면 배는 그대로 갯바닥에 편하게 앉을 수 있다. 제주도의 ‘티우’나 명주군 정동진의 ‘토막배’는 선체 자체가 한선의 배밑이 된다. 이러한 배밑의 만듦새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만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것이며 독특한 것이다.

◎통나무배와 배밑
원시 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뗏목배가 차츰 발달하여 가는 시대에 통나무를 반으로 쪼갠 다음 돌도끼로 속을 파낸 구유처럼 생긴 쪽배, 즉 통나무배(퉁궁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배는 호수나 강이나 바닷가 연안에서 물을 건너거나 고기를 잡는 데 사용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발달하여 온 통나무배의 유물로는 옛 가야 지방에서 출토한 통나무배 모양의 토용(土俑)과 경주 지방에서 출토한 통나무배 모양의 제사용 토기(土器)가 있고, 경주의 안압지에서 출토한 세 쪽으로 만든 통나무배가 있다. l930년경 두만강에는 통나무 나룻배가 있었는데 한 토막의 나무로 만든 것이다. 같은 시기에 한강과 대동강에는 ‘메생이’라고 하는 고기잡이하는 통나무배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평안도, 함경도 지방에서 ‘마상’이라는 통나무배를 많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유물은 찾아볼 수 없다.

위에서 넓적한 뗏목배 자체가 배밑이 된다고 하였는데 안압지의 세 쪽 통나무배의 조립 과정이나 완성된 통나무배의 겉모양을 보면 이 통나무배 역시 배밑이 평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우리 나라의 지리와 지형 지물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갯벌이 넓고 평평한 지형에서는 평평한 배밑이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러한 지형에 적응할 수 있는 배만이 운용될 수 있었고 발전될 수 있었다. 지리 지형에 적응하지 못하는 배는 어떠한 선형의 배라 할지라도 쓰이지 않았고 또는 쓰이다가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거룻배와 배밑
쇠 연장을 쓰기 시작하게 되는 철기 시대에 들어와서는 도끼로 통나무를 세로결로 쪼개어 널판때기를 만들 수 있게 되고, 끌이나 송곳 등으로 나무에 구멍을 뚫고 나무못을 박을 줄 알게 되었다.

배를 만드는 방법에서도 뱃전을 한 쪽에서 세 쪽까지 턱을 따서 겹쳐서 이어 올리게 되었다. 앞과 뒤의 공간도 얇은 널판때기를 대어 막아 물이 넘쳐 들어오는 것을 막았으며, 배 위에 살림집의 대들보와 같은 멍에도 얹어 놓게 되었고, 배의 삼판에 네모 구멍을 뚫고 여기에 장쇠도 걸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의 전통 선박인 한선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는 강이나 바다에서 쓰이는 제일 작은 배인 ‘거루’ 또는 ‘거룻배’이다. 말 할 것도 없이 ‘거루’는 평평한 배밑을 하고 있으며 평평한 배밑을 가진 강배는 바람을 받아 하류에서 강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특히 얕은 여울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거뜬히 올라갈 수 있었다.

◎거북선의 경우
1795년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책 머리에 쓰여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거북선에 대해, "배밑은 통나무 열 쪽을 이어 불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이고, 머리 쪽(이물) 너비는 l2자, 허리(한판)의 너비는 l4자 5치, 꼬리 쪽(고물) 너비는 lO자 6치가 된다”고 하였다.

 

 

 

< 이물 큰멍에 >

 

시대 통시대    
정의 이물돛대를 세우기 위하여 설치한 큰멍에.

다른 멍에보다 더 굵은 통나무를 가로로 대어 걸며, 두대박이 배인 당두리의 두 번째로 큰 멍에이다.

중국에서는 외각량이라고 한다. 외창 아래쪽에서 외저판을 받치는, 전후 두 가닥의 각량(脚梁)이다. 앞부분은 대자량(對子梁), 뒷부분은 포복량이라고 한다. 기타의 각량보다 배가량 두껍다. 각량으로 작용하는 외에 외저좌에서 오는 모든 압력을 받아낸다.

그 외에도 탁량(托梁)이 있는데 비교적 큰 목선에서 포판(鋪板)을 아래에서 받치고 있는 가로와 세로의 가름대 도리를 이른다. 포판의 부하능력(負荷能力)를 가강(加强)하거나 보강(補强)하는 작용을 한다. 일부 목질의 갑판박(甲板駁)의 갑판 아래에는 조립식 종향탁량(縱向托梁)을 설치한다.

 

 

< 한판 큰멍에 >

 

시대 통시대    
정의 배의 중앙(허리) 뱃전 위에 설치한 큰멍에. 한자로는 요횡량(腰橫梁) 또는 요 가목(腰駕木).

한판큰멍에는 당두리급 두대박이 돛대를 가진 배의 한가운데, 즉 배의 한판에 설치하는 멍에로서 다른 멍에보다 더 굵은 통나무를 가로로 대어 건다. 당두리의 첫 번째로 큰 멍에이다.

중국에서는 '면량(面梁)'이라고 하며 '양두(梁頭)'라고도 한다. 격창판 위 쪽에 있는 가로 방향의 두꺼운 판량(板梁)이다. 양끝은 현변(舷邊)과 구엽에 단단히 고정시킨다. 창면(艙面)의 횡향강도(橫向强度)를 보강하는 부재이다. 몇 개의 면량은 각자의 독특한 작용을 가지고 있다. 전면량(前面梁)은 계류용 나무 기둥이나 두외를 설치할 때 사용하며, 외면량은 주외를 고정할 때 사용하며, 타면량(舵面梁)은 타(舵)의 중량을 감당하며, 누자(樓子) 아래쪽의 면량은 상층건축(上層建築)의 기초가 된다.

그 외에도 탁량(托梁)이 있다. 비교적 큰 목선에서 갑판을 받치고 있는 가로 및 세로 방향의 가름대이다. 갑판의 부하능력(負荷能力)를 가강하는 작용을 한다. 일부 목질의 갑판박(甲板駁)의 갑판 아래에는 조립식 정향탁량(縱向托梁)을 설치한다.

 

 

 

< 고물 큰멍에>

 

시대 통시대    
정의 배의 뒷부분인 고물에 설치한 큰멍에.

멍에 뒤에 돛대를 세우지 않고 배의 횡강력을 가강(加强)하거나 보강(補强)하는 기능을 하며 아래에 고물비우를 대어 박는다. 배의 뒷부분에서 배의 앞부분에 설치한 선멍에와 같은 역할을 한다. 뒷쪽에는 선미옥란을 설치한다.

 

 

 

< 선미옥란 >

 

시대 통시대    
정의 배의 고물 꼬리에 설치한 난간과 보판.

◎용도
주로 전함이나 사견선, 관선 등에서 배의 고물 꼬리에, 즉 꼬리 날개에 걸쳐서 설치한 보판과 난간이다. 일반 수군들은 이곳에서 뒤(대소변)를 본다. 행선할 때에는 선미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키의 상태 등을 키를 조종하는 사공에게 알려 주는 장소이다. 배가 정박을 하였을 때는 이곳을 통하여 뭍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전함에서는 전투시 후미 경계를 이곳에서 하기도 한다.

◎중국배의 선미옥란
중국에서는 일부 목선의 선미 갑판에서 뒤로 뻗어나간 부재인 '출소', 즉 '도소'를 설치한다. 방형(方形)으로 된 두 가닥의 목재를 한 끝은 대칭되게 선미 갑판의 양측(兩側) 옆 뒤쪽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끝은 선미 방향으로 1m~2m 정도 나가게 한 후 횡방향의 가름대를 대고 그 위에 목판을 편다. 선미의 사용 면적을 확대하는 작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미범(尾帆)을 조종하고 계류를 매며 양묘할 때 아주 편리하다. 그리고 잡물을 놓아둘 수 있다.

한편 이곳에 안전을 위한 '현당판'을 설치한다. 이것은 일부 비교적 큰 목선에서 선수, 선미 갑판의 양현변(兩舷邊)에 세로 방향으로 설치한 왜입판(矮立板)이다. 높이는 약 20cm로 안전한 조작과 파도를 막는 작용을 한다.

 

<<< 조선수군 >>>

 


 
[ 군관 ] [ 전투병 ] [ 비전투병 ]  

조선 수군의 역사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일찍부터 수군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수군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고구려가 광개토왕 때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면서 서해를 제압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백제도 근초고왕 이후 바닷길을 통해 중국 및 일본과 교통하였고, 신라에는 선부(船府)라는 관청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통해 수군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9세기 통일신라의 장보고는 청해진(淸海鎭)을 완도에 설치하여 수군 기지로 삼았으며, 10세기 초 고려는 강력한 수군을 보유하여 서해안을 제압하고 남쪽에 있던 후백제의 영토[羅州]를 점거할 수 있었다. 고려 말에도 수군의 활동은 왕성하여 14세기 후반 최무선(崔茂宣)은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화약무기를 개발, 진포(鎭浦 : 錦江 입구)에서 왜선 500여 척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제도적으로 해상 방어를 전담하는 수군이 확립되어 육군과는 독립된 병종으로 정착된 것은 조선 전기의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의 수군은 육군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조선 전기 수군의 발전은 고려 말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수군이 재정비되었던 데서 비롯하였다. 조선건국 초 수군은 선군(船軍) 또는 기선군(騎船軍) 등으로 불리면서 그 군액(軍額)이 차츰 확장되었다. 세종 때에 이르면 군액과 함께 병선(兵船)·각포설진(各浦設鎭) 등으로 수군 규모와 편제가 제도상으로 정비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은 해상에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에 성공, 육상의 간선도로를 점령하면서 북상하였다. 육지에서 조선의 육군이 패전을 거듭한 것과는 달리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거느린 수군은 10여 회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하여 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과 더불어 조선 수군의 전선(戰船)과 화기(火器)가 일본 수군보다 우월하였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중 경상·충청·전라 3도의 수군을 통합하여 함대를 편성해야 할 필요에서 통제영(統制營)을 설치하고, 수군통제사의 지휘를 받는 연합함대를 편성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1627년(인조 5년)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하여 강화도에 설치한 통어영(統禦營)과 함께 후기까지 존속하였다.

조선 수군의 형태
조선의 수군은 그 역할을 중심으로 군관과 전투병, 비전투병으로 나눌 수 있다.
군관은 배를 지휘하는 선장을 중심으로 신호용 깃발을 가지고 신호를 담당하는 기패관, 도둑이나 범죄자를 관리하는 포도관, 훈육을 담당하는 훈도관이 있었다.
일반병은 전투에 참가하는 전투병과 배의 운행에 참가하는 비전투병으로 나눈다.
전투병은 화살을 쏘는 병사(사수), 화약을 쟁여주고 불을 붙이는 병사(화포장), 화약무기를 발사하는 병사(포군) 등이 있었다. 비전투병은 수심이 낮은 곳에서 배를 부리는 병사(사공), 노젓는 병사(능노군), 배를 지키는 배지기(선직) 등이 있었다.

 

 

시대 조선시대    
정의 배를 지휘하는 지휘관.

선장(船將)은 1척 이상의 배를 지휘하며, 장군복(將軍服)을 입는다.

 

 

 

시대 조선시대    
정의 화살을 쏘는 병사로 일명 사부(射夫), 사군이라고도 함.

사수(射手)에 대한 <풍천유향>의 기록을 보면 "사부는 활 쏘는 것을 전담하고, 아울러 요도를 휴대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순신의 각종 장계에서도 '사부'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만기요람>에서는 경상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경우, '사부'로 표현하고,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의 경우, '사수'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보면 사수와 사부가 같은 임무와 직책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전선(판옥선)의 경우 사부는 18명을 정원으로 하였다. <호좌수영지>에 규정된 사부는 15명으로 다소 적게 편성된 적도 있다.

 

 

 

시대 조선시대    
정의 물 속의 땅을 밀어서 배를 부리는 사람.

사공(沙工)은 수심이 얕은 곳에 배가 얹히거나 노를 저을 수 없을 때, 상앗대(삿대, 대나무)로 물 속의 땅을 밀어서 배를 부렸다.

 

 

 


김홍도 그림에 나오는 사공
김홍도 그림에 나오는 사공
김홍도 그림에 나오는 사공
 


제목 김홍도 그림에 나오는 사공
출처/소장 단원김홍도(중앙일보사)
설명 전선과 귀선에는 사공이 각각 8명씩 있다.
 


김홍도 그림에 나오는 사공 근거 자료
     


제목 김홍도 그림에 나오는 사공 근거 자료
제공자 단원김홍도(중앙일보사)/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설명 사공 복식 복원을 위한 근거 자료
복원과정 조선의 수군 복원(도면)은 ‘국사대사전’, ‘호좌수영지’, ‘읍지’, ‘이충무공전서‘, ’조선왕조군선연구‘,’한국의 배‘, ’이순신전사연구‘, ’한국의 갑주‘, ’단원 김홍도‘, ’충무공이순신전집‘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참고문헌 참조)
고증 : 최두환/해군충무공수련원 교수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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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도]
[ 임란의 일본배]

조선의 해전은 임진왜란의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으로 대표된다.
한산해전은 1592년(선조 25년)에 한산도 앞 바다에서 조선과 왜의 전력 대부분이 투입되었던 대해전으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략과 조류 및 역풍을 이용한 항해술, 천/지/현/황포 등 화공으로 일본의 함선 47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나포한 해상 전투의 가장 화려한 형태였다.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명량에서 왜선(倭船)을 쳐부순 싸움으로, 단지 12척의 전선(戰船)으로 적 함대 133척을 맞아 싸워 31척의 적선을 격파하여 크게 이긴 전투이다.
노량해전은 1598년(선조 31년)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병과 대결한 마지막 해전으로, 장군은 이 해전의 승리와 함께 전사하였다.

본 조선의 해전에서는 이상의 임진왜란 3대 해전과 더불어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것으로 유명한 학날개 모양의 학익진을 비롯하여 일자진, 첨자찰진 등 조선의 진법을 소개한다.

 

 

 

 

<<< 한산해전 >>>

 

 

시대 조선시대    
정의 조선 선조 25년(1592년)에 한산도 앞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워 크 게 이긴 전투. 임진왜란 때에 삼대첩의 하나로 일본의 함선 47척을 격침시키 고 12척을 나포함.

◎초기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동양 삼국(東洋 三國)의 병력 수백만 명이 동원된 전쟁이었으며, 이로 인한 인적, 물적, 정신적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측이 패한 것은 1592년 4월 중순 왜군이 쳐들어온 뒤부터 그해 6월 중순 평양이 점령당할 때까지의 2개월에 지나지 않으며, 대체로 소강 상태에서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다가 결과적으로 일본의 패배로 끝이 났다.

특히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2년 1월 6일 일본 전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서 동원한 왜군이 30만 110명(제 1선단 조선출정부대 9개 군(軍) 15만 8,700명, 제 2선단 대본영대기부대 8개 군 10만 2,960명, 병력수송 및 해상작전 수군 4개 대대 9,450명, 대본영 직속부대 5개 대대 2만 9,000명)이었다.
수군의 수에 대해서는 <중국역대전쟁사(中國歷代戰爭史)>(중화민국(中華民國) 3군대학(三軍大學) 편저, 1979, p.408)에 의하면 '9,200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유마성보(有馬成甫)의 <조선역수군사(朝鮮役水軍史)>(동경(東京) ; 해공사(海と空社), 소화(昭和) 17년, pp.44~45) 및 편야차웅(片野次雄)의 <이순신수길(李舜臣と秀吉)>(동경(東京) ; 성문당신광사(誠文堂新光社), 1983, p.69)에는 "조선국선수지세(朝鮮國船手之勢) ; 1,500인 구귀(九鬼), 2,000인 등당(藤堂), 1,500인 협방(脇坂), 1,000인 가등(加藤), 700인 내도(來島), 250인 관평(菅平), 1,000인 상산(桑山), 850인 굴내(堀內), 650인 삼약(衫若)으로 합계(合計) 9,450인"이라 되어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후자의 기록을 따랐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부임한 지 만 14개월만인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오후에 왜군의 제 1선단 중 제 1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거느린 1만 8,700명이 7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이튿날인 14일 새벽 왜군은 부산을 기습하고, 양산/밀양/대구/상주를 거쳐 왜란이 터진 지 19일 만인 5월 2일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으며. 이후 6월 13일에는 평양까지 함락시켰다. 제 2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거느린 2만 2,800명은 4월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경주/영천/신영/서울로, 제 3진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거느린 1만1,700명은 김해에 상륙하여 창원/성주/개령/추풍령/서울로 진격하였다.

◎이순신의 등장
아군은 부산진의 적군을 궤멸시키고,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80여 척의 배와 수군 8,000여 명으로 왜적을 방어하다가 초기에 왜적선 10여 척을 쳐부수기도 하였으나, 왜군의 예봉이 4월 하순(29일 경) 경상우수영 함대를 공격해오니 패전하여 도망하려 하였다. 육상 전투는 거의 패배로 일관되고 있었고, 이때 경상수사의 요청과 조정에서의 공격 명령으로 이순신이 5월 4일 새벽 자신의 판옥선(板屋船) 24척, 협선(夾船) 15척, 동원어선(動員漁船) 46척의 총 85척을 이끌고 출항해 원균의 전선 6척(판옥선 3척, 협선 3척)과 합류하였다. 9일까지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 6일 간 전함 42척(옥포 : 26척, 합포 : 5척, 적진포 : 13척 가운데 11척)을 격파하였고, 조선 수군의 피해는 경상자 1명뿐이었다.

◎거북선의 등장과 왜군의 전략 변경
2차 출전은 경상우수영의 원균 함대 3척과 6월 4일부터 가세한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憶祺)의 함대 25척으로 모두 51척의 규모였다.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11일 간 67척(사천(泗川) : 13척, 당포(唐浦) : 21척, 당항포(唐項浦) : 26척, 율포(栗浦) : 7척)을 침몰시키고, 적병 88명을 참획하였으며, 아군 피해는 전사 11명, 부상 26명이었다. 이 때 처음으로 거북선이 사용되었으며, 그 효능이 입증되어 그 이후 해전에서도 거북선은 계속적으로 활약하였다. 이로써 경상도 쪽으로 진격한 일본 수군이 소탕되어 일본은 조선 수군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이용하여 육상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였던 일본은 수군마저 주로 육전에 투입하고 있었다. 중촌질(中村質)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관련된 제문제(諸問題), 제2회 국방해양력(國際海洋力) 심포지엄 발표문집>(해군해양연구소, 1991, pp.46~48)에서 일본이 임진왜란 당시 수전보다 육전에 주력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즉 일본이 동원한 선수(船手)는 국내전인 소전원(小田原) 공격 때와 비교하여 5% 미만에 지나지 않았으며, 일찍이 왜구의 근거지였던 구주(九州)의 제번(諸藩)은 수군이 아닌 육군의 선봉으로 동원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바다에서는 단 한 번도 이겼다는 보고를 듣지 못하고, 사천해전 · 당포해전에서 가메이(龜井玆矩)·구루시마(來島通元)의 수군마저 패하자,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바 있고 육상으로 공격했던 수군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등에게 해전에 참가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하라고 명령하였다. 전략 집행에 변경이 요구되자, 이들은 육상에서 내려와 거제도 부근으로 즉각 항진하였다. 그 중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6월 5일 용인(龍仁) 전투에서 이기고, 6월 19일 웅천으로 내려와 해상 활동을 하다가, 7월 6일 73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발하여 7일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렀다.

반면 조선의 수군은 승리로 말미암아 전투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고, 육전에서도 사기가 올랐다. 수군의 역할과 중대성은 여기에서부터 나타났다. 왜군은 5월 2일 한강을 건너고 한성 천 리 길을 19일 만에 정복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채 평양까지 300리 길을 30일 걸린 6월 15일에 도착했던 것이다.

◎한산해전
이순신은 7월 5일부터 7월 13일까지 9일 간, 견내량에서부터 한산도 앞바다 및 안골포(安骨浦)로 3차 출전을 하였다.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선 49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6일 남해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7척과 합세하여 모두 56척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순신은 협소한 견내량이 해전에 적합하지 않음을 파악하고, 일본의 대선단(大船團)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각종 총통을 쏘아 먼저 2~3척을 격파하였다. 일본 수군이 겁을 먹고 도망하려 하자, 왜적선을 유인하여 도망가는 척 하다가 일시에 역회전하여 학익진법(鶴翼陣法)을 폈다. 이로써 층각선(層閣船) 47척을 쳐서 깨뜨리고, 12척을 나포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 견내량 싸움을 지휘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간신히 김해로 도주하였고 나머지 적선 14척도 겨우 도망갔지만, 이틀 뒤 안골포에 있던 적선 28척까지 모두 42척을 격침시키고, 육지로 도망한 왜군 150급을 참획하는 등 개전한 이래 가장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왜적선 90% 이상을 무찌른 이 전투가 바로 한산해전(閑山海戰)이다. 이 때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19명, 부상자 114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산해전의 승리는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왜의 호남 진출을 좌절시키고 나아가 왜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산도에서 패전한 뒤로 전략을 바꿨는데, 그 전략은 조선 수군을 만나면 도망가라는 것이었고 내륙에 올라가 방어 작전을 펴라는 것이었다. 방어 작전은 물론 성을 쌓고 조선 수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싸움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 해전으로 전쟁은 실질적으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순신의 해전 승리로 왜의 침략 전쟁은 활기를 잃었고, 더 이상의 큰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산해전 요약>

◎1차 전과
일자 - 1592년 7월 8일
해전명 - 견내량해전(見乃粱海戰)
조선 수군 - 이순신 함대 : 24척(판옥선 21, 거북선 3), 원균 함대 : 7척, 이억기 함대 : 25척 등 총 56척
왜군 - 73척
전과 - 47척 격침, 12척 나포, 14척 도주
피해 - 전사 19명, 부상 114명

◎2차 전과
일자 - 1592년 7월 10일
해전명 -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조선 수군 - 이순신 함대 : 24척(판옥선 21, 거북선 3), 원균 : 7척, 이억기 함대 : 25척 등 총 56척
왜군 - 42척
전과 - 42척 격침

 


한산해전 격전지 전경
한산해전 격전지 전경
한산해전 격전지 전경
한산해전 격전지 전경


제목 한산해전 격전지 전경
출처/소장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한산도 앞 바다로 적선을 유인한 후 이곳에서 학익진을 펼쳐 천.지.현.황 등
각종 총통을 쏘아 적선 47척을 당파하였다.

 


한산해전 복원 그래픽 Scene-1
한산해전 복원 그래픽 Scene-2
한산해전 복원 그래픽 Scene-3
한산해전 복원 그래픽 Scene-4
한산해전 복원 그래픽 Scene-5
한산해전 복원 그래픽 Scene-6
한산해전 복원 그래픽 Scene-7
한산해전 복원 그래픽 Scene-8
한산해전 복원 그래픽 Scene-9
한산해전 복원 그래픽 Scene-10
한산해전 복원 3D 애니메이션
 


제목 한산해전 복원 그래픽 Scene-1
개발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3D 애니메이션 복원과정 Scene-1
 

 

 

<<< 명량해전 >>>

 


시대 조선 시대    
정의 조선 선조 30년(1597년)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명량에서 왜선(倭船)을 쳐 부순 싸움. 12척의 전선(戰船)으로 적 함대 133척을 맞아 싸워 31척의 적선 을 격파하여 크게 이김.

◎칠천량해전에서의 패배
1597년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왜적선(倭敵船)에 대패하고 겨우 12척만 도망하여 남았다. 이 때 조정에서는 수군이 너무도 미약함을 알고, 8월 15일 이순신에게 육군에 종사(從事)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수군의 작전이야 말로 승리의 요체임을 단호하게 주장했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권13, 부록5 행록1에는 이러한 이순신의 주장이 잘 나타나 있다. “저 임진년(壬辰年)부터 지금까지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곧장 돌진해 오지 못했던 것은 실상 우리 수군이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게 전선이 아직도 12척이나 남아 있습니다.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모두 폐하여 버린다면 적은 천 번 만 번 다행한 일로 여길 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에까지 갈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제가 걱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전선은 비록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이상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 글은 현대적인 전략 개념으로 보면 '현존함대전략(現存艦隊戰略)' 이며, 또 열세할지라도 이길 수 있다는 결전전략(決戰戰略)의 의지이기도 하다.

◎명량해전(鳴粱海戰)
마침내 왜적선 8척이 8월 28일 새벽 6시쯤 어란진(於蘭鎭) 앞바다에 출현하였다. 이순신 함대는 장도(獐島)로 이동하여 밤을 지내고, 8월 29일 진도의 벽파진(碧波津)에 도착하여 보름 동안 머물렀다 9월 15일 조수를 타고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海南郡 門內面 右水營)으로 진을 옮기어 울돌목을 지켰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金億秋)에게 수중철색을 쓸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리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왜적선은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9월 14일 어란진에 도착하였고, 9월 16일 오전 11시쯤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차로 수중철색에 왜적선이 걸려 전진하지 못하자, 곧바로 뒤를 따라오던 왜적선이 그들의 앞 배에 충돌하게 함으로써 왜적선 133척 가운데 무려 31척을 깨뜨리는 전과를 올렸다.

<선조실록> 권 94, 선조 30년 11월 10일(정유)에 보면 “한산도(칠천량해전)에서 패전한 이후 전선과 무기가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신(臣, 이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함께 전선(戰船) 13척과 정탐선(哨船) 32척을 모아 가지고 해남현 바닷길의 중요한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적의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에서 이 쪽을 향하여 왔습니다. 신은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 등을 지휘하여 각각 전선을 정비하여 진도의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습니다. 그리하여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쳐부수고 쏘아 죽인 것만도 대단히 많았는데, 바다에 빠져 떠있는 적 8명의 목을 베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반면 조선 수군은 전선 13척, 초선(哨船 ; 협선) 32척으로 단 1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고, 다만 전사자 2명과 부상자 2명이 있었을 뿐이다. 이 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완전무결한 승리의 사례이다.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제목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출처/소장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1598년 9월 16일에 명량(울돌목)에서 왜적선 330척 대 조선 수군선 13척이 일대 격전을 벌여 승리하였다. 이로써 서해를 통하여 북진하려던 일본 수군의 계획이 두 번째로 좌절되고 말았다.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제목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출처/소장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이순신 함대는 진도의 벽파진에 도착하여 15일 동안 머물렀다가 9월 15일에 불어 나 는 조수(밀물)를 타고 우수영으로 옮기고 울돌목을 지켰다.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제목 명량해전 격전지 전경
출처/소장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왜 적선의 200 여 척 가운데 55척이 울돌목 가까운 어란진에 도착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명량해전 복원을 위한 근거 자료
     


제목 명량해전 복원을 위한 근거 자료
제공자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설명 울돌목(지금의 진도 대교가 걸려 있는 바다 가운데)에서 9월16일 11시경에 왜 적선선단의 선제 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순신 함대는 13척의 적은 함선으로 적선에 천.지.현.황. 포를 쏘아 31척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복원과정 해전의 복원(도면)은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각선도본’, ‘난중일기’, 임짐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한국의 배‘, ’충무공이순신전집‘, ’정한록’, ‘조선역수군사’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참고문헌 참조)

▷고증 : 최두환/해군충무공수련원 교수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겨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명량해전 복원 플래쉬무비
     


제목 명량해전 복원 플래쉬무비
개발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명량해전의 내용을 플래쉬무비로 응용 개발하였다.

 

 

 

<<< 노량해전 >>>

 

시대 조선시대    
정의 조선 선조 31년(1598년)에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왜병과 대결한 마지막 해전.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과 더불어 싸웠으며, 승 리와 함께 전사함.

◎왜군의 철수
노량해전(露粱海戰)은 임진왜란 7년의 전쟁 가운데서 마지막 전투이다. 1598년에는 4차례의 전투가 있었는데, 절이도전투(折爾島戰鬪, 7월19일), 예교와 유도전투(9월 15일~10월 4일), 장도해전(獐島海戰, 9월 20일~10월 9일) 등 일본군이 철수하기 위한 전초전이 있었고 이러한 전투가 연장된 것이 바로 노량해전이다. 특히 예교에는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지휘하는 일본군 15,000여 명이었는데, <초서체일기(草書體日記)>에 의하면 아군이 예교의 적군을 장도 뒤에서 10월 2일부터 나흘 동안 맹공격을 했으나, 불행히도 사선(沙船) 25척, 호선(號船) 77척, 비해선(飛海船) 17척, 잔선 9척 등 모두 128척을 가진 명나라 수군은 그 중 39척이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다. 조선 수군도 제포만호 주의수(朱義壽), 사량만호 김성옥(金聲玉), 해남현감 유형(柳珩), 진도군수 선의문(宣義問), 강진현감 송상보(宋相甫) 등 5명이 조총에 부상을 입었고, 사도첨사 황세득(黃世得)과 군관 이청일(李淸一) 등 2명은 전사하였다. 수병도 29명이 전사하였다.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지난 8월 18일 횡사하였으므로, 철수하려 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권 103, 선조 31년 8월 19일(임신(壬申))에 의하면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의 비밀 장계(狀啓)가 왔다.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이 말하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7월 초에 병사했으므로, 흉적(凶賊)이 장차 철수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고니시 유키나카 등 왜군들은 빨리 철수할 것을 바라고 있었고, 이순신은 석 달이 지난 11월 8일 예교성에 있는 왜적들이 10일 안으로 탈출하려 한다는 소식을 명나라 유정(劉綎)에게서 받았다. 이순신은 도망가는 왜적을 한 척도 돌려보내지 않을 비장한 각오로 11월 9일 고금도(古今島)를 떠나, 11월 11일 다시 유도에 도착하여 예교에 있는 왜적이 도망갈 길을 차단하였다. 이틀 뒤 왜적선 10여 척이 근처의 장도에 나타났다가, 이순신 함대의 추격을 피해 예교 가까운 포구인 신성포(新城浦)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군은 종일 예교 앞에서 왜적을 유인하기도 하고, 바짝 압박을 가하기도 하면서 해상 봉쇄선을 장도까지 확장하였다.

한편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왜군은 부하 8명을 통해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에게 돼지와 술 등 뇌물을 바치고 도망갈 길을 터 달라며 교섭을 시작했다. 진린은 손쉬운 전공을 세우려는 탐욕을 가졌음직 하나 이순신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그들의 의도를 성사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노량해전의 시작
1598년 11월 17일 저녁, 예교성에 갇힌 왜군은 횃불 신호로 남해 등지에 있는 그들의 아군에게 알리었다. 이에 호응하는 횃불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고성에 있는 다치바나(立花統虎), 사천에 있는 시마즈(島津義弘), 남해에 있는 무네(宗義智) 등이 모두 노량 바다로 집결하여 고니시를 구출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갈 최후의 전투를 감행할 작정이었다. 이순신 역시 최후의 결전을 할 요량이었다. 이순신은 18일 밤 자정이 되자, 문득 대야에 깨끗한 물을 떠와 손을 씻었다. 혼자 갑판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이 원수 놈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하늘에 빌었다.(<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卷) 9 부록(附錄) 31쪽「행록(行錄))

아무튼 이순신은 왜적선이 무수하게 이동한다는 정보에 명나라 수군을 지휘하여 11월 18일 밤 10시에 출항, 노량 앞 바다로 이동하였으며, 11월 18일 밤부터11월 19일까지 이틀 간 밤을 새가며 싸웠다. 11월 19일 새벽 2시쯤 아군 연합 함대는 왜적의 선단이 몰려오는 노량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왜군이 새벽 4시 노량을 거쳐 관음포(觀音浦) 앞 바다에서 이르자, 이순신은 요격전(邀擊戰)을 벌였다. 우리 수군은 전선 83척, 수군이 1만 7,000여 명이고, 명나라 수군은 전선 63척, 수군 2,600명이었다.

왜적의 병력은 대선 500여 척, 수군 6만여 명이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1년 11월 27일 도체찰사 이덕형의 장계)에 의하면 “적선이 3백여 척”이라고 하였지만,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권 9 부록 1「행록」과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에는 “적선이 5백여 척”이라 하였으며, <선조실록>(선조 31년 11월 24일)에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군문 형개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적선 100척을 나포하고 200척을 불태웠으며, 참수 500급, 생포 180여 명, 익사자는 아직 물위에 떠오르지 않아 알 수 없으며, 이총병(이순신)이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날 새벽 아군은 적들이 모르게 비밀리에 전진하였다. <명사(明史)>에서 본 노량 관음포 해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1598년 11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배를 내어 먼저 달아났다. 마귀(麻貴)는 드디어 도산(島山), 유포(酉浦)에 들어갔고, 유정(劉綎)은 예교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석만자가 수군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려 하자, 진린이 이를 맞아 쳐부수어 패배시켰다. 여러 곳의 왜군이 돛을 달고 모두 돌아갔다. 왜가 조선을 어지럽힌 지 7년 동안 잃은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고, 소모한 군량이 수백만이나 되었다. 중앙의 조선과 그 속국들은 이길 가망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도 관백(關白)이 죽고서야 전쟁이 비로소 종식되었다.”라고 되어 있다.(<명사(明史)> (권320「열전(列傳)」제208 외국(外國) 1 조선) 여기서는 진린의 역할로 왜적선을 패배시킨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이순신의 역할이 가장 핵심이 됨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순신의 전사와 해전의 마무리
마지막 전장(戰場)은 도산(島山), 유포(酉浦), 예교(曳橋)가 있는 곳이다. 이 최후의 전쟁은 이순신이 순국하였으므로 이순신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행록(行錄)>, <행장(行狀)>, <비문(碑文)>, <실록(實錄)> 및 모든 사료(史料)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날 새벽 조(朝) 명(明) 연합 함대는 좌우로 편을 갈라 행진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포구와 섬들마다 복병을 배치하여 적을 대비하도록 해가며 진군했다. 사천에 웅거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의 왜적들은 500여 척을 이끌고, 경상도 사천으로부터 남해 노량 사이에 있는 광주양(光州洋)을 지나 곧장 노량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조선 수군들은 대적선의 항로 전방인 죽도와 관음포 사이에 배치되었고, 명나라 수군은 죽도 북쪽에 매복하였다. 왜적선이 노량 수로를 지나 관음포 앞바다로 다가왔을 때, 우리 수군들은 좌우에서 번개처럼 나타나 일시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적들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갈팡질팡하다가는 이윽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우리 수군에게 대항해 왔다. 그러자 우리 수군들은 적선에 근접하여 불붙는 땔감(薪火)을 마구 던져 적의 배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적들은 날이 새기 시작할 무렵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관음포(觀音浦)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왜적선들은 이 바다에서 싸우다가 남해 관음포로 쫓겨 들어갔다. 거기엔 밖에서 보면 마치 툭 트인 바다요, 수로 같이 보이지만, 돌아서기만 하면 바다가 막혀 달아날 길이 없는 곳이다. 왜적선들은 다시 돌아서서 대항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앞장서서 전군을 지휘했다. 북을 힘차게 치게 했다. 쥐새끼도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돌아서서 고양이에게 달려들 듯이, 왜적선은 이순신의 배를 목표로 겹겹이 에워싸며 최후 발악으로 달려들었다. 이순신은 자못 위험해졌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본 진린은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이순신을 구해냈다. 이 때 진린의 배가 적선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적의 장수 세 명이 층각선(層閣船)에 앉아 전투를 지휘 독려하고 있는 것을 보고 총과 화살을 그쪽으로 집중 사격하게 하여 그 중 한 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을 본 적들은 자기 장수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 진린의 배에서 포위망을 풀고 그 쪽으로 몰려갔기 때문에 진린은 위급함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순신과 진린은 다시 힘을 다하여 호준포를 쏘아 적선을 계속 깨뜨렸다.

아군은 오전 10시경 이순신이 전사하자, 그의 명에 따라 죽음을 극비에 붙이고 곡도 하지 않았으며, 변함없이 독전기를 흔들며 지휘하였다. 유형(柳珩 : 해남현감)과 송희립(宋希立 : 이순신 전속부관)도 적탄에 맞았으나 잠시 기절했을 뿐, 다시 일어나 상처를 싸매고 싸웠다고 한다. 정오에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적선 200여 척을 불태웠다. 적병은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고, 살아남은 자들도 포로로 잡히거나 목 베여 죽는 등 대부분 전사하였다. 시마즈 등은 겨우 50척을 거두어 도망쳤다.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권下)에 의하면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틈을 타서 묘도(猫島 : 여천군 삼일면 묘도)의 서쪽 해협을 통과하여 몰래 남쪽 외양(外洋)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우리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은 쉬지 않았다. 이순신의 지휘 하에서 깨진 적선의 수만도 200여 척에 달하고 있었다. 적들은 패전의 빛이 짙어지자 관음포 앞을 벗어나 남쪽으로 도망칠 빛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적선 1척도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이순신은 스스로 앞장을 서서 달아나는 적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북을 더 힘차게 두들기게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바로 이때였다. 적의 탄환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을 맞히고 겨드랑이를 관통하여 나갔다. 심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제목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출처/소장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조. 명 연합 수군은 1598년 11월18일 밤에 명량 앞 바다에서 왜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노량 앞 바다에 방어진을 쳤다.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제목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출처/소장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11월 19일 새벽(4시경)이 되자 조.명 연합 수군은 왜 적선에 대하여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요격을 하였다. 노량. 관음포에서 왜 수군과 조.명 연합수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제목 노량해전 격전지 전경
출처/소장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이 노량해전에서 적선 200 여 척을 당파 또는 분멸했다. 왜선 50 여 척과 소서행장은 도망해 갔다. 조선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이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노량해전 복원을 위한 근거 자료
     


제목 노량해전 복원을 위한 근거 자료
제공자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설명 이로써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하였던 왜군은 조선 땅에서 패전을 거듭한 나머지 모두 도망가 버렸고 임진왜란 전쟁은 이렇게 하여 끝났다.
복원과정 해전의 복원(도면)은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각선도본’, ‘난중일기’, 임짐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한국의 배‘, ’충무공이순신전집‘, ’정한록’, ‘조선역수군사’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참고문헌 참조)
고증 : 최두환/해군충무공수련원 교수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노량해전 복원 플래쉬무비
     


제목 노량해전 복원 플래쉬무비
개발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노량해전 내용을 플래쉬무비로 응용 개발하였다.

 

 




 

시대 조선시대    
정의 학이 날개를 편 듯이 치는 진, 적을 둘러싸기에 편리한 진형.

◎학익진(鶴翼陣)의 두 가지 운용 형태
학익진은 좌승함과 중군함의 위치에 따라 두 가지로 운용되었다.

먼저 좌승함이 날개 중앙에 있으면, 중군함은 날개 중앙 앞으로 전진 배치된다. 중군함의 역할이 전진 배치됨으로써 적군의 이동 및 동태를 직접 확인하여 공격 의도를 좌승함에 전달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때의 좌승함은 직접 전투 대열에 서서 공격에 참가하게 된다. 즉 좌승함에서 직접 화포 등을 운용한다.

이 경우 좌승함이 공격 대열에 참가함으로써 공격이 방어의 최적 수단이 된다는 것에 장점이 있다. 그러나 좌승함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중군함이 적진 앞으로 배치됨으로써 적의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결함이 있다.

다음으로 좌승함이 날개 뒤에 별도로 호위함을 가지며, 중군함이 날개 중앙에 배치될 수 있다. 이 경우 중군함이 공격 대열에 참가하여 직접 화력을 운용하는 형태이고, 그 공격의 정도에 따라 좌승함에 정확한 보고를 할 수 있다.

이 경우 좌승함은 그만큼 전투력이 방어에 치중되어 화력의 운용에 있어서는 효용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날개 뒤에 별도의 호위함을 가지고 진형 전체를 지휘할 수 있으므로 지휘가 용이하고, 무엇보다 다른 전투진으로 바꾸고자 할 때 매우 효율적이다. 본디 좌승함 주위에는 언제나 호위진이 있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학익진과 첨자찰진
그런데 이러한 학익진은 어떤 진형에서 변환이 용이한가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전라우수영에서 발견된 전투진(戰鬪陣)을 살펴보건대, 학익진과 첨자찰진의 배 이름이 같다. 즉 첨자찰진을 학익진으로 배치하고, 그 역(逆)으로도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첨자찰진 진형을 이용하여 다른 진형으로 바꿀 때 역시 학익진이 가장 용이함을 알 수 있다. 즉 중군함 앞에 있는 배들이 학익진의 날개로 배치되고, 좌승함 뒤에 배치된 배들 역시 학익진에서 좌승함 뒤 또는 옆에 배치된다면 큰 무리가 없는 것이다. 특히 좌승함 주위에 있는 배들은 좌승함을 호위하고 있는 세력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좌승함 뒤에 배치된 배들은 학익진에서 또 다른 날개로 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첨자찰진과 학익진 진형이 배치된 자리를 서로 비교하여 첨자찰진에서 학익진으로 변형시키는 원리를 살펴 보면, 첨자찰진의 후진에 있는 배를 중군선 가까이로 옮겨 배치하고, 앞 열에 있는 배는 양쪽 날개 끝으로 벗어나게 배치한다. 이것은 곧 전투 편성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소속 부대별로 각기 한 가지씩의 임무를 수행했음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평소 그 부대의 특성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부대장이 지휘관이 되어 부하를 지휘한다는 것이다.

일자진에서도 학익진을 쉽게 배치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형태를 보이지 않는 것은, 해상에서 학익진이 일자진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가로 일렬로 늘어선다면 그 많은 배를 모두 배치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좁은 공간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첨자찰진을 이용했을 것이다.
 

 
학익진 참고 자료
학익진 참고 자료
학익진 참고 자료
 


제목 학익진 참고 자료
출처/소장 이순신종가
설명 좌선(기함)은 후방(몸통)에 있고 중군이 중앙 선두(머리)에 있으며 척후선과 돌격선이 좌우(양 날개)에 포진하는 진법이다.

 

 

 


학익진 참고 자료
학익진 참고 자료
학익진 참고 자료
 


제목 학익진 참고 자료
출처/소장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설명 한산양 해전에서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던 왜 적선을 먼저 유인하였다.
 

학익진 참고 자료
학익진 참고 자료
학익진 참고 자료
 


제목 학익진 참고 자료
출처/소장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설명 유인 전술로 위장하여 후퇴하는 동안 왜 적선의 선두와 중부 부대가 한산 앞 바다로 들어오게 되자 행선 방향을 180도(반대로)로 바꾸어 학익진을 전개하고 천,지,현,황 등 각종 총통을 쏘아 적선을 섬멸하였다.

 

 

학익진 복원 근거 자료
     


제목 학익진 복원 근거 자료
제공자 이순신종가
설명 학익진의 특징은 양 날개에 포진한 돌격선이다. 귀선이 돌격선으로 앞서서 돌진하여 천.지.현.황 대포를 쏘아 적의 장군선을 먼저 격파한다.
복원과정 수군 전진도의 복원(도면)은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각선도본’, ‘난중일기’, 임짐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한국의 배‘, ’충무공이순신전집‘, ’정한록’, ‘조선역수군사’ 및 ‘이순신전진도-고금도’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참고문헌 참조)
고증 : 최두환/해군충무공수련원 교수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시대 조선시대    
정의 일자로 늘어선 진형으로, 요즘의 횡렬진(橫列陣)에 해당.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10, 부록 22 에는 “공(公 ; 이순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일자진(一字陣)으로 진을 치고 대포와 화살을 사방으로 쏘아 대니, 적병은 쓰러졌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鳴梁海戰) 때 사용했던 전투진(戰鬪陣)이다. 이 때 조선 수군은 전선 13척으로 왜적선을 맞아 31척을 격침시켰으며, 아군은 단 한 척도 손실을 입지 않았다.

일자진은 육상에서의 학익진으로 볼 수도 있다. 육상에서의 학익진은 횡렬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일자진
일자진
일자진
 


제목 일자진
출처/소장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설명 임진왜란때 소서행장이 순천의 왜성에 갇혀 있을때 조.명 연합 수군은 일자진으로 광양만 수로를 가로막고 왜성을 공격하였다.

 


일자진
일자진
일자진
 


제목 일자진
출처/소장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설명

왜성에 갇혀있던 소서행장의 수군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광양땅과 순천땅 사이를 일자진 진형으로 포진하여 퇴로를 차단하였다.

 

 

일자진
일자진
일자진
 


제목 일자진
출처/소장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설명 고성의 당항포(긴 목으로 이루어진 포항)에서 적선이 도망하려는 것을 일자진으로
편대를 구성하여 방어하고 이어서 요격을 하여 왜 적선을 섬멸하였다.

일자진 복원을 위한 근거 자료
     


제목 일자진 복원을 위한 근거 자료
제공자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설명 일자진은 대형을 바꾸어서 학익진으로 편대를 형성하는 등, 신속한 전투 대형을 변경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복원과정 수군 전진도의 복원(도면)은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각선도본’, ‘난중일기’, 임짐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한국의 배‘, ’충무공이순신전집‘, ’정한록’, ‘조선역수군사’ 및 ‘이순신전진도-고금도’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참고문헌 참조)
고증 : 최두환/해군충무공수련원 교수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시대 조선시대    
정의 많은 배들의 이동이나 적군의 공격에 용이한 진.

첨자찰진(尖字札陣)은 중군함이 좌승함 앞에 배치되어 있으며, 맨 앞에는 척후선이 각각 좌우에 한 척씩 배치되어 있고 그 뒤에 중군의 직접 지휘를 받는 전위 대열이 있다. 그리고 좌승함 주위의 작은 배들도 쐐기진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뒤에 후열로 좌승함의 직접 지휘를 받는 듯한 후위 대열이 있다. 이 진형은 많은 배들의 이동이나 적군의 공격에 매우 용이하다.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제목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출처/소장 이순신종가
설명 선봉에는 척후선이 좌우에 각각 한 척씩 배치된다. 돌격선은 그 뒤에 배치된다.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제목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출처/소장 이순신종가
설명 중군은 선단의 몸통으로써, 선단의 중앙에 있게 되며 선봉 편대를 지휘하고 후방의 좌선을 호위한다.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제목 첨자찰진이 나타난 고문서
출처/소장 이순신종가
설명 좌선(기함)은 중군의 호위를 받으며 또한 후방의 호위 편대의 호위를 받는다.
 
첨자찰진 복원을 위한 근거 자료
     


제목 첨자찰진 복원을 위한 근거 자료
제공자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명예겸임교수,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설명 후방의 편대는 후방 방어에 임하고 좌선을 호위한다.
복원과정 수군 전진도의 복원(도면)은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각선도본’, ‘난중일기’, 임짐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한국의 배‘, ’충무공이순신전집‘, ’정한록’, ‘조선역수군사’ 및 ‘이순신전진도-고금도’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참고문헌 참조)
고증 : 최두환/해군충무공수련원 교수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첨자찰진 복원 3D 그래픽
     


제목 첨자찰진 복원 3D 그래픽
개발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고증된 자료를 통한 3D 그래픽 개발.
 
시대 조선 시대    
정의 1741∼1800년경에 당시 수군 편제(水軍編制)를 그린 병풍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朝鮮三道水軍操練戰陣圖) 병풍
병풍 속 그림은 조선 수군의 중추 역할을 하는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 수군이 조련을 하는 전진의 모습이다. 삼도 수군의 총사령부인 통제영은 경상도 통영에 있었다. 삼도 수군의 조련은 춘추, 즉 봄과 가을에 실시하였다.

그림의 제작 연대는 조선 시대 전함의 제도인 ‘전선(戰船), 방선(防船), 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이란 명칭으로 미루어 보아 1741년~1800년 경에 당시 수군 편제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거북선이 40여 척 있는데 이 제도는 정조 연간에 해당된다).

통제사가 삼도의 수군을 점호하고 조련하기 위하여 5방위(五方位 ; 前營, 左營, 右營, 後營, 中營)로 진을 벌리고 있는 그림이다. 배의 만듦새를 정확하게 잘 그렸고 의장도 잘 나타냈다. 그림 가운데 정자각을 세운 배(亭子閣船)가 있는데, 귀빈을 실어 나르는 배이다. 그림에서는 한가운데 통제사가 타는 좌선이 있고 그 아래쪽에 부선과 정자각선이 있다. 정자각선에서 노 젓는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 넣었기 때문에 이 배의 노 젓는 모습을 통해 거북선이나 판옥전선에서 조선식 노를 어디에 걸고, 어떻게 저었느냐 하는 의문이 풀어졌다고 할 수 있다.

삼도수군조련전진도에서 수군을 조련하는 전진에는 다섯 영이 있다. 각 영마다 그 아래에 다섯 사파총(司把摠 ; 전, 좌, 중, 우, 후)이 편성되어 있고, 또 그 아래에 다섯 초관(哨官 ; 전, 좌, 중, 우, 후)이 편성되어 있다.

◎통제영의 상전선(上戰船)
좌선은 조선수군의 전선 중에서 제일 큰 규모의 배이다. 이 배의 선급(배의 만듦새와 크기를 나타내는 것) 이름은 천자일호좌선(天子一號座船)이다. 1615년에는 배밑의 길이가 14발이었으나 그 뒤 차츰 길어져서 1800년에는 18발까지 늘어났다.

삼판은 7폭을 쌓아 올렸고, 이물비우는 곡목을 세로로 대어 박고 그 위에 용머리 그림(獸面畵)을 그렸다. 이 병풍의 모든 판옥전선의 이물비우에는 용머리 그림을 그렸다. 평선(平船 ; 1층 겻집까지만 되어 있는 배) 위에 판옥상장을 꾸미고 방패에는 꿈틀거리는 용의 그림을 그렸다. 각선도본에 있는 전선의 만듦새와 같다. 판옥 위에는 북을 받쳐 놓았고 많은 깃발을 세웠다. 돛대는 둘이 있는데 이물돛대에만 돛을 달아 올렸다. 배 한가운데 가마지붕을 씌우고 장막을 친 장대에는 도장을 넣어 두는 함이 3개가 놓여 있다. 앞 이물쪽과 뒷 고물쪽에 청백(靑白) 차일을 쳤다. 배 위에서는 수군들이 통제사가 선청(배의 마루)에 오르기를 기다리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조선식 큰노를 멍에의 뺄목 사이로 5척(隻)만 반쯤 걸어 놓았다. 노를 물에 내리지 않은 것은 닻을 올린 채로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키는 물에 내려 배의 방향을 잡고 있다. 방패를 성문 다락의 판문처럼 안으로 들어올리고, 군졸들은 점호를 기다리고 있다. 좌선의 왼쪽에는 군사들의 음식물을 마련하여 온 거룻배가 줄지어 있다. 판옥전선의 닻은 보이지 않으나 이물머리의 출입문 안에 밧줄이 보인다. 고물꼬리에도 겻집을 깔았다. 삼도 수군 통제사 휘하에는 충청수영, 전라좌수영, 경상좌우수영이 있었다.

◎전라좌수영 전선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가 타는 판옥전선으로 전진에서는 다섯 영의 앞쪽인 전영(前營)을 맡고 있다. 수군을 조련하는 전진에는 다섯 영이 있다. 각 영마다 그 아래에 다섯 사파총이 편성되어 있고, 또 그 아래에 다섯 초관이 딸려 있다.

전라좌수영을 호좌수영(湖左水營)이라고도 부르며, 별칭은 매영(梅營)이다. 본영(本營)은 지금의 여수시에 있었다. 영장(營將)들이 타는 읍진전선(邑鎭戰船)급인 이 배의 이물머리에는 배의 만듦새와 크기를 나타내는 선급(船級) 이름인 현자선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이 배의 배밑 길이는 13발(把) 정도이고, 배에 타는 군사는 164명 안팎이다.

◎정자각선(亭子閣船)
정자각선의 만듦새는 평선 위에 장자각을 세웠고, 지붕은 기와로 이은 것 같다. 뱃전에는 방패를 둘렀으며, 정자각 앞쪽에는 4기둥을 세우고 청백 차일을 쳤다.

이물의 양쪽 뱃전에서는 노군(櫓軍)들이 2척의 조선식 큰노를 멍에 뺄목 위에 걸어 젓고 있다. 고물에는 방향을 조정하는 키가 달려 있고, 배 위에는 킷다리를 받쳐주는 받침대가 있다. 이물비우는 세로로 대어 박았다. 그림에서는 선멍에에 가로로 널판대기 2장을 더 올렸다. 삼판은 5폭으로 쌓아 올렸다.

이 배는 직접 싸움을 하는 배가 아니고 통제사나 귀한 손님을 실어 나르는 배이다. 배 위에는 겻집을 깔았으며 차일밑에는 기생들이 대령하고 있다. 또 고물머리에는 선미판(鋪板)이 배꼬리까지 깔려 있다. 이 병풍에 그려진 모든 싸움배들에서는 노 젓는 모습을 볼 수 없었으나, 정자각선을 통해서 싸움배에서 노 젓는 법을 엿볼 수 있다. 옛 문헌 가운데는 노 젓는 방법에 대한 기록은 있었으나, 노 젓는 모습에 대한 그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통제영 거북배
통제영 본영에 소속되어 있는 거북선으로 각 수영에 소속되어 있는 거북선보다 그 크기가 크다. 거북등에는 가마지붕을 씌우고 장막을 친 장대가 있고, 깃대에는 '거북 귀(龜)'자 기(旗)를 매달았다. 이 거북선은 평선의 신방위에서 바로 거북 잔등판을 둥글게 씌웠다. 이물비우는 가로다지로 대어 박았다. 뱃전의 멍에 뺄목 사이로 조선식 큰노를 4척만 걸었다.

거북선에는 돛대(이물돛대와 한판돛대)가 2개 있는데 그림에는 그려 넣지 않았다. 신귀(神龜)의 입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발포진(鉢浦鎭)의 거북배
전라좌수영에 소속되어 있는 발포진(鉢浦鎭)의 거북선이다. 크기는 통영 거북선보다 작고, 만듦새는 통영 거북선과 꼭 같게 그려져 있다. 돛대가 2대 있는데 이물돛대에만 돛을 달아 올렸다.

전라좌수영에는 방답진(防踏鎭), 여도진(呂島鎭), 사도진(蛇島鎭), 발포진(鉢浦鎭), 녹도진(鹿島鎭)의 5진포와 순천부(順天府), 광양현(光陽縣), 낙안군(樂安郡), 보성군(寶城郡), 흥양현(興陽縣) 등의 5관읍이 소속되어 있었다. 발포진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는데 1580년에 이순신 장군이 이곳의 수군만호로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는 이순신 좌수사가 만든 영 거북선, 순천 거북선, 방답 거북선 등 3척이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에는 1593년에 더 만든 거북선을 포함하여 5척이 있었다.

이물비우를 가로다지 널판때기로 대어 박은 것이 다른 병풍이나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거북선의 세로 모양 이물의 그림과 다르다. 임진년 때 거북선의 만듦새를 그대로 그린 것 같다.

◎방패선
전선 다음으로 큰 싸움배인 방선(防船)이다. 방선은 평선의 뱃전 밖에 신방을 걸고 그 위에 방패만을 세운 배로 배의 만듦새는 전선의 몸체와 같다. 이 배는 우탐선(右探船)이라는 깃발을 달았고 ‘탐’이라 쓴 깃발을 깃대에 올렸다. 탐선을 탐망선이라고도 하는데 적군의 정황을 살피는 배이다.

이 배보다 좀 작은 것으로 사후선이라는 것이 있는데 본진에서 멀리 바다로 나아가 적군의 동정을 살피는 배이다. 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신기전(神機箭)을 쏘아 올려서 적의 상황을 알린다.

◎돛단 짐배
싸움배 외에도 군수품과 화약, 병기들을 실어 나르는 배가 있다. 이 배들은 전진에는 들지 못하지만 보조선으로 점호에 참가하고 있다. 돛단배라는 것은 어떤 종류를 일컫는 것이 아니고, 배에 돛을 달아맨 배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임진왜란 때 고깃배도 이순신 함대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전쟁 연습 때에는 가장한 적군의 배를 가왜선(假倭船)이라고 하여 돛단배를 대신 쓰기도 하였다.

◎거룻배 또는 거루
거룻배는 어미배(母船)에 딸린 새끼배(子船)인 경우도 있지만, 바닷배와 강배를 가릴 것 없이 물건이나 사람을 배와 배, 뭍과 배 사이로 실어 나르는 돛을 달지 않은 작은 배를 말한다. 그림의 거루는 물항아리를 싣고 물을 길어 나르고 있다. 이런 역할을 하는 배를 급수선(汲水船)이라고 한다.

싸움배는 한 달치의 군량을 항상 싣고 다니도록 되어 있다. 배의 한판멍에 바로 뒤편에 밥을 짓는 투석간이 있는데 이곳에 물독을 들여놓고 물을 담아둔다. 반찬거리도 저장하고 솥에 불을 지펴 밥도 짓는다. 그러나 물은 많이 싣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연안의 뭍에서 길어다 먹게 된다.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제목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출처/소장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설명 전진도에는 첨자찰진 진형으로 그려진 병풍도 있다.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제목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출처/소장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설명 중앙에 좌선(사령관의 기함)이 있고 그 전방에 중군이 포진한다. 좌선의 후방에는 후방을 방위하는 편대가 있다.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제목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출처/소장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설명 첨자찰진 병풍의 그림은 삼도 수군 함선의 편대 진형을 잘 묘사하여 놓았다.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복원을 위한 참고 자료
     


제목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복원을 위한 참고 자료
제공자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설명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복원 자료
복원과정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의 복원(도면)은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각선도본’, ‘난중일기’, 임짐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한국의 배‘, ’충무공이순신전집‘, ’정한록’, ‘조선역수군사’ 및 ‘이순신전진도-고금도’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참고문헌 참조)


고증 : 최두환/해군충무공수련원 교수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 복원 3D 그래픽
     


제목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 복원 3D 그래픽
개발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고증된 자료를 통한 3D 그래픽 개발.
 
시대 조선시대(16C, 일본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정의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주력함. 안택형선(安宅型船) 또는 장선(將船)이라 고도 함.

16세기에 일본은 축적된 수군전법과 배 축조 기술 집결하여 안택형선(安宅型船, 이하 안택선)라는 대형 전함을 만들어 수군의 주력함으로 활용했다. 안택선은 공격/방어력, 항행 성능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으며, 일본 수군을 다룬 많은 서적에서 '해상의 성'(海上之城)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안택선에는 여러 가지 크기가 있는데, 가장 작은 것은 500석, 일반적으로는 1,000석~2,0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크기였으며, 2,000석 이상을 적재하는 초대형선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구성은 안택선을 기함(旗艦)으로 하여 관선(關船 ; 세끼부네), 소조선(小早船 ;고바야부네), 작은 관선를 편입하여 함대를 편성하고, 이 함대에 병마와 병량을 운송하는 화물 수송 선단을 종속시키는 것이 기본 형태였다.

◎안택선의 구조
이물, 즉 선수(船首)가 견고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상갑판 위는 2층으로 되어 있다. 그 한 가운데 '누각'이라고 하는 사령탑이 있는데, 순판(楯板=방패)이라는 두꺼운 방패 널판으로 상갑판 위에서부터 상부의 뱃집 구조물 둘레를 대었다. 누각의 크기는 4방의 너비가 2칸(3.64미터)이며 높이는 2.5칸(4.5미터)이다.

방패판은 두께가 2치(6cm)~3치(9cm)정도 되는 박달나무나 가시나무로 판자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활과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었다. 이 방패판은 조립이 가능하며 그 일부는 판의 아래에다 돌쩌귀를 달아서 밖으로 눕힐 수 있게 되어 있다. 적선과 가깝게 붙어서 접전을 할 때 방패판을 바깥쪽으로 넘어뜨린 다음, 적선으로 올라 가는 사다리로 이용하기 위해서 고안한 것이다.

선수의 정면 방향으로는 대포를 장착한 것이 특이하다. 선수에 상자 모양의 상장판옥(上粧板屋)이 있기 때문에 이물의 상갑판의 너비가 넓다. 이처럼 정면이 넓었으므로, 대포를 설치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배밑은 석회로 물막이를 하여 견고하며 저판을 2중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몇 군데에 물을 막아주는 격벽(隔璧)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선체 일부가 파손되어 침수가 발생하였을 때에도 다른 선창(船倉)은 무사할 수 있었다. 즉, 현재의 강선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2중 저판 및 수밀격벽(水密隔璧)의 방식과 기법을 15~16세기의 일본 목조 군선에서 이미 실용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안택선은 가또기요마사(加藤淸正)를 시작으로 구로다(黑田), 구기(九鬼),혼다(本多) 등 여러 무장들에 의하여 건조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중소형이 많이 건조되었다.
 

회화첩 속의 안택선
병풍 속의 안택선
1635년의 안택선
 


제목 회화첩 속의 안택선
출처/소장 [선(船)] 석정겸치/세계문화사-일본
설명 검붉게 채색하고 각종 장식을 현란하게 하여 장식의 미를 자랑하고 있다.
 

회화첩 속의 안택선
병풍 속의 안택선
1635년의 안택선
 


제목 병풍 속의 안택선
출처/소장 [선] 석정겸치/세계문화사-일본
설명 조선을 침략할 때 그린 그 당시 최대의 대안택선의 병풍 그림이다. 1953년에 [비전명호옥성도병풍(肥前名護屋城圖屛風)]에 그려진 세 척의 대안택선 중에 가장 화려하게 치장한 함선이다.

회화첩 속의 안택선
병풍 속의 안택선
1635년의 안택선
 


제목 1635년의 안택선
출처/소장 [일본의 선]/선의 과학관-일본
설명 장군 덕천가광의 지시에 따라 1631년에 착공하여 1635년에 완공된 안택선으로서 그 당시 일본의 수도인 ‘강호(江戶-지금의 동경)’를 방위하기 위하여 건조된 수상 이동 요새이다.

 

 


안택선 복원 도면(축척 : 1/107)
안택선 복원 3D Data
   


제목 안택선 복원 도면(축척 : 1/107)
제공자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및 명예겸임교수, 원인고대선박연구소소장
설명 안택선을 복원하기 위하여 작성한 추정 복원 설계 도면

배의 길이 : 0.283cm
배의 너비 : 0.089cm
배의 깊이 : 0.028cm
복원과정 안택선의 복원 도면은 ‘선(船)’, ‘일본의 선’, ‘일본 화선사화’, ‘이충무공전서‘, ’조선왕조군선연구‘,’한국의 배‘ 등을 참고로 하고 일본 화선의 설계 기법으로 기본 도면과 공작 도면을 작성하였다. 일본의 ’이세가다부네‘의 선형을 인용하였다. (참고문헌 참조)

▷고증 복원 설계 :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안택선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안택선 복원 그래픽 - Front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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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택선 복원 그래픽 - Right view
안택선 복원 그래픽 - Left view
안택선 복원 그래픽 - Top view
안택선 복원 그래픽 - Bottom view
안택선 복원 QTV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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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택선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개발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3D 디지털 복원된 안택선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기함으로 크기가 가장 큰 전투함이었다.

 

[ 총통 ] [ 완구 ] [ 기타 화포] [ 화살 ]
     
[ 포탄 ]      

조선시대의 무기는 외적 방어에 초점을 두고 있어 창, 검 등 개인용 무기보다는 공용 무기에 관심이 집중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화약병기가 지속적인 발전을 보였다. 각종 화약병기는 고려시대 중국에서 화약제조법을 들여오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조선 태종 때는 화약제조를 전담하는 '화약제조청'이라는 관청을 둘 정도였다. 세종 때에도 북방정책 덕분에 화기 성능 개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6세기 후반에 임진왜란은 다양한 무기들이 활용되는 계기이자, 조선의 무기체계가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특히 다양한 화약병기가 사용되었는데, 가장 중심이 되었던 것은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총통류였다. 총통은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해 화살/탄환을 발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폭탄인 진천뢰, 명나로부터 도입된 호준포, 후장식 화포인 불랑기 등도 사용되었다.

특히 이 화약무기들이 임진왜란 때 수군용으로 넓게 쓰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애초 육상용으로 개발된 병기들이었으나 수군에서 광범위하게 쓰였고, 임란 당시 육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시대 조선시대    
정의 조선시대 사용된 화포 중 가장 크기가 큰 것.

천자총통(天字銃筒)은 해상에서 적선을 파괴하고 적군을 살상할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총통 중에서 가장 크다. 임진왜란 때 판옥선(板屋船)이나 거북선에 장착하여 사용하였다. 흑색 화약을 사용하는데, 그 사용량은 30냥(1,125g)이다.

사용되는 탄환은 대장군전(大將軍箭)과 철환(鐵丸)이다. 대장군전을 석화시(石火矢), 또는 봉화시(棒火矢)라고 불렀다.

◎천자총통의 제원(諸元)

육군사관학교박물관
1. 전장(全長) : 129cm
2. 구경(口徑)
2-1. 내경(內徑) : 13cm
2-2. 외경(外徑) : 22.5cm
3. 약통(藥筒) : 42cm
4. 죽절(竹節) : 10개
5. 무게 : 493근 3냥(296kg)
6. 제조년도 : 1555년10월

현충사유물전시관
1. 전장(全長) : 136cm
2. 구경(口徑)
2-1. 내경(內徑) : 11.8cm
2-2. 외경(外徑) : 24cm
3. 약통(藥筒) : 42cm
4. 죽절(竹節) : 10개
5. 무게 : 700근
6. 제조년도 : 1609년으로 추정

* 출처 : 국방군사연구소, 1994,<한국무기발달사>, pp.482~484.

◎천자총통의 사거리
사정거리는 대장군전이 900보(1.14㎞)였다. 조선후기에는 더 개량되어, 1,813년에 간행된 <융원필비>(戎垣必備)에 보면 대장군전은 1200보이고, 조란환(鳥卵丸) 100개, 수철연의환(水鐵鉛衣丸) 1개를 발사하면 10여 리를 나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임진왜란 직후에 기록된 <신기비결>(神器秘訣)에는 중연자(中鉛子) 100개를 쓴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천자총통의 사정거리는 실제로 복원하여 시험발사하였을 때 400~500미터 정도였다.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忠武公海戰遺物發掘團)에서 1994년 8월 5일 해군사관학교, 1994년 10월 22일 여천, 1994년 7월 28일 통영, 1995년 3월 24일 해군사관학교, 1995년 10월 1일 한강, 1996년 4월 13일 해군사관학교에서 모두 6회 발사 시험을 한 결과다. 1998년 9월 16일 전국 국궁무예대축제 때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발사된 대장군전은 석축을 거의 1m나 뚫고 박혔던 것으로 보아 그 파괴력은 대단히 컸다고 볼 수 있다. 1999년 3월 14일 한강에서 시험발사를 한 결과도 500~600미터였다. 아마 임진왜란 때도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자총통 모형
천자총통 모형
천자총통 모형
 


제목 천자총통 모형
출처/소장 이충무공수련원
설명 임진왜란 때 전선과 귀선에 천자총통을 탑재 장착하였다.

 

 

 

천자총통 복원도면
천자총통 복원 3D Data
   


제목 천자총통 복원도면
제공자 한국초기화기연구/일지사
설명 총통을 복원하기 위하여 작성한 추정 복원 설계 도면

복원 도면 제원 : 총통 구경 : 130mm
총통 외경 : 225mm
총통 길이 : 1290mm
철환 사거리 : 500m
대장군전 사거리 : 500m
복원과정 천자총통의 복원(도면)은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난중일기’, 임짐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대한조선학회 논문-이원식‘, ’한국의배‘, ’충무공이순신전집‘, ’화기도감의궤’, ‘융원필비’, ‘한국화기발달사’, ‘화포식언해’, ‘한국고화기도감’, 육사박물관도록‘, ’조선초기화기발달사‘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참고문헌 참조)

▷고증 : 최두환/해군충무공수련원 교수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천자총통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천자총통 복원 그래픽 - Front view
천자총통 복원 그래픽 - Back view
천자총통 복원 그래픽 - Right view
천자총통 복원 그래픽 - Left view
천자총통 복원 그래픽 - Top view
천자총통 복원 그래픽 - Bottom view
천자총통 사거리 3D 애니메이션
천자총통 복원 QTVR
     


제목 천자총통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개발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3D 디지털 복원된 천자총통 Camera view에 가상의 카메라를 설치하여 렌더링 한 그래픽

 

 

 

시대 조선 시대    
정의 유통식 청동제 화기로 진천뢰, 단석 등을 발사하는 데 사용함.

완구(碗口)란 박격포의 일종이다. 세종 때까지는 총통완구(銃筒碗口) 한 가지 뿐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로 세분화하여 대(大)/중(中)/소(小)/소소완구(小小碗口)의 4종으로 발전되었다. 이중 대완구(大碗口)는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후대에는 댕구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는 완구를 군선에 탑재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다가 1593년 4월 웅포해전(熊浦海戰) 때 충무공이 적의 해안 진지를 진천뢰(震天雷)로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진천뢰는 완구가 아니면 발사할 수 없는 것이므로 전함에 완구가 적재되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형총통은 평사포(平射砲)인 데 반해 완구는 구경에 비하여 부리가 짧아 곡사포(曲射砲)라는 점이 특징이다.

오늘날의 전함에서는 포술운용상 곡사포의 운용이 어렵기 때문에 평사포를 사용하고 있는데, 임란 때 곡사포인 완구를 사용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시대 조선 시대    
정의 점화 발사하는 유통식 화포의 일종으로 납탄알 혹은 철환을 쏘는 데 사용됨.

호준포는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에 설명되어 있는데, 호랑이가 걸터 앉아 있는 듯한 모양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발사 방법은 박격포처럼 포구가 하늘을 향하고 고각(高角)이 높이 주어져 있다. 좁은 공간에서도 운용이 편리했기 때문에 전함의 뱃머리에 탑재해 사용했다.

호준포에는 중약선과 여섯 냥(225g)짜리 화약을 쓴다. 토격(土隔)의 길이는 두 치(4.21㎝)이다. 납탄알 70개를 쓰는데, 한 알의 무게는 두 돈(7.5g)이다. 철환을 쓰게 되면 30개를 쓰는데 한 알의 무게는 역시 두 돈이다. 쏠 때 큰 납탄알 한 개를 통 맨 끝에 넣고 발사하는데, 무게는 다섯 냥(187.5g)이다.

융원필비에 나온 호준포
호준포
호준포
 


제목 융원필비에 나온 호준포
출처/소장 융원필비/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설명 총구에서 화약과 탄환을 장진 한다.

 

 

호준포 복원 근거자료
호준포 복원 3D Data
   


제목 호준포 복원 근거자료
제공자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및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설명 총통을 복원하기 위하여 작성한 추정 복원 설계를 위해 참고함
복원과정 호준포의 복원(도면)은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난중일기’, 임짐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대한조선학회 논문-이원식‘, ’한국의배‘, ’충무공이순신전집‘, ’화기도감의궤’, ‘융원필비’, ‘한국화기발달사’, ‘화포식언해’, ‘한국고화기도감’, 육사박물관도록‘, ’조선초기화기발달사‘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참고문헌 참조)

▷고증 : 최두환/해군충무공수련원 교수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호준포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호준포 복원 그래픽 - Front view
호준포 복원 그래픽 - Back view
호준포 복원 그래픽 - Right view
호준포 복원 그래픽 - Left view
호준포 복원 그래픽 - Top view
호준포 복원 그래픽 - Bottom view
호준포 사거리 플래쉬무비
호준포 복원 QTVR
     
시대 조선시대    
정의 활시위에 메워서 당겼다가 놓으면 그 반동으로 멀리 날아가도록 만든 물건. 한자로는 전(箭)이라고 부름.

조선시대 화살은 화살촉이 가느다란 유엽전이 일반적이었다. 길이는 80~85cm정도였으나 더 길게 만들기도 하고 작게 만들기도 하였다. 길게 만든 것을 '장전'이라고 하며, 작게 만든 것은 '편전' 또는 '동개살'이라고 한다.

'철전'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전투용 화살을 총칭하는 의미로 '육량전', '아량전', '장전'을 모두 포함한다.

 

 


화살 모형
화살 모형
화살 모형
 


제목 화살 모형
출처/소장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설명

화살은 활과 함께 개인 무기로 무사 개인이 소지한다.

 

 

화살 복원 자료 도면
화살 복원 3D Data
   


제목 화살 복원 자료 도면
제공자 한국초기화기연구/일지사
설명 화살을 복원하기 위한 근거 자료

사거리 : 200m
복원과정 화살의 복원(도면)은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난중일기>, <임진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대한조선학회 논문-이원식>, <한국의배>, <충무공이순신전집>, <화기도감의궤>, <융원필비>, <한국화기발달사>, <화포식언해>, <한국고화기도감>, <육사박물관도록>, <조선초기화기발달사>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논문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참고문헌 참조)

▷고증 : 최두환/해군충무공수련원 교수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화살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화살 복원 그래픽 - Front view
화살 복원 그래픽 - Back view
화살 복원 그래픽 - Right view
화살 복원 그래픽 - Left view
화살 복원 그래픽 - Top view
화살 복원 그래픽 - Bottom view
화살 사거리 플래쉬무비
화살 복원 QTVR
     


제목 화살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개발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3D 디지털 복원된 화살 Camera view에 가상의 카메라를 설치하여 렌더링 한 그래픽

 
시대 조선 시대    
정의 조선시대에 발명된 일종의 시한폭탄으로 완구에서 발사함.

진천뢰(震天雷)는 조선 선조 때 화포공(火砲工)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폭탄이다. 완구(碗口)에서 발사된 화기로, 임진왜란 때 널리 쓰여 위력을 떨쳤다.

진천뢰(震天雷)는 무쇠로 겉을 씌운 둥근 모양이다. 무게는 113 근(67.8Kg), 덮개 무게는 10 냥(375g)이다. 통허리(筒腰 ; 통요)에는 네 개의 구멍이 있다. 중약선과를 쓰며, 화약 5 근(3Kg)과 마름쇠 30개를 통에 넣고, 주격쇠로 통 밑에서부터 덮개쇠를 뚫어서 비녀못을 꽂은 후 네 구멍 선을 모아 주격쇠 끝에 붙여 맨다.

비진천뢰(飛震天雷)는 모양은 진천뢰와 같지만 크기가 훨씬 작다. 무게는 20근(12Kg), 덮개 무게는 4냥(150g)이다.

 


진천뢰 모형
융원필비에 나온 진천뢰
융원필비에 나온 진천뢰
융원필비의 진천뢰 도면


제목 진천뢰 모형
출처/소장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설명 진천뢰는 일종의 폭탄으로써 완구에서 발사하면 적진에 떨어진 후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폭발한다.

 

 

 

진천뢰 복원 3D Data
     


제목 진천뢰 복원 3D Data
제공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진천뢰를 디지털화하기 위한 3D 디지털 복원 작업

진천뢰를 복원하기 위한 근거 자료
사거리 : 378m
복원과정 진천뢰 복원 도면(정면, 좌측면, 우측면, 윗면, 아래면)을 토대로 3D 툴을 활용하여 모델링, 맵핑, 라이팅 작업으로 디지털 복원 하였다.

지천뢰의 복원(도면)은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난중일기’, 임짐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대한조선학회 논문-이원식‘, ’한국의배‘, ’충무공이순신전집‘, ’화기도감의궤’, ‘융원필비’, ‘한국화기발달사’, ‘화포식언해’, ‘한국고화기도감’, 육사박물관도록‘, ’조선초기화기발달사‘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참고문헌 참조)


진천뢰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진천뢰 복원 그래픽 - Front view
진천뢰 복원 그래픽 - Back view
진천뢰 복원 그래픽 - Right view
진천뢰 복원 그래픽 - Left view
진천뢰 복원 그래픽 - Top view
진천뢰 복원 그래픽 - Bottom view
진천뢰 사거리 3D 애니메이션
진천뢰 복원 QTVR
     


제목 진천뢰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개발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3D 디지털 복원된 진천뢰 Camera view에 가상의 카메라를 설치하여 렌더링 한 그래픽
 
<<< 출처---한국콘텐츠진흥원 & 코리아비주얼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