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 鮮

명량해전의 울돌목

吾心竹--오심죽-- 2010. 1. 30. 18:04
명량해전의 울돌목| ☞여행추천명소
동문 조회 134 | 09.09.05 07:50 http://cafe.daum.net/GS75/5ODt/1748

▲ 명량의 물은 하루에 네 번씩 몸의 흐름을 바꾼다. 물살의 변화가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채
택한 유일한 전법이다.
ⓒ 안현주 기자

정유년 4월1일 그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옥문을 나왔다.’
그 해 2월26일 이순신은 죄인의 몸으로 함거(檻車·옛날에 죄인을 호송하는 데 쓰던 수레)에 올랐다. 한양으로의 압송이었다.

단순하게 설명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모함이었다. 그는 억울했지만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밧줄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는 3월4일 한양에 도착해 곧바로 의금부에 투옥된다. 28일 동안의 옥고였다. 그는 죽지 않을 만큼 문초를 당했고, 거의 죽어 있는 목숨이었다. 겨우 살아서 옥문을 나왔다. 죽음의 자리를 빠져나와 그는 삶의 자리를 만든다. 삶과 죽음은 따로 있지 않다.
명량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걸음의 끝에 명량이 있었다. 그 거친 물살 위에서 그는 죽음의 색깔을 삶의 무늬로 변환시킨다. 명량의 거센 물살은 포악하다. 대처의 시간도 없고, 오르지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다.

▲ 명량해전기념관에 전시된 명량대첩 모형도.
ⓒ 김태성 기자

그가 명량에서 돌파한 것은 스스로의 안위나 따르던 병사들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그 바다에서 숨이 멎기 직전의 조선이 기적처럼 살아난다. 물살이 바뀔 때마다 삶과 죽음의 전복이 일어난다. 그것이 명량의 물살이며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채택한 유일한 전법이다.

그는 애초에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 잃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자신의 바다를 잃고 군사도 잃었다. 전선을 잃고 어머니를 잃고 한낱 병사의 몸으로 백의종군했다. 명량에서의 전투가 있기 직전 다시 삼도수군통사에 올랐지만 허울뿐이었다. 그가 가진 배는 13척이 전부였고, 군사는 겨우 2000명이었다.

다만 그는 죽음과 삶이 거센 물살로 얽혀있는 그 바다 속으로 들어가 13척으로 외롭게 일자진을 폈다. 김훈의 수사학은 그 전법을 두고 ‘죽음과 삶이 전환하는 전법, 죽음을 각오하는 전법, 살아남기를 희망하지 않는 전법’이라고 표현한다. 명량해전은 물살과 사람의 싸움이었고 적과 이순신의 싸움이었으며 죽음과 죽음의 싸움이었다.

▲ 녹진전망대에서 바라본 진도대교와 울돌목.
ⓒ 안현주 기자

물살 속의 복병, 철쇄는 있었을까?

판이 복잡하다. 이순신의 전투는 사실 해석이 어렵지 않다. 배가 강했고, 무기가 월등했다. 무엇보다 전술의 싸움에서 미리 이겼다. 이순신은 23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그러나 결코 놀라울 일은 아니다. 그는 지는 싸움은 하지 않았다. 수많은 첩보와 전술을 집합시켜 기필코 이길 수 있도록 전황을 만든 다음에야 비로소 전선에 올랐다.

그러나 명량해전은 그렇게 판이 단순하지 않다. 이순신이 꼭 한 번 질 수도 있는 싸움, 오히려 지는 게 당연한 싸움을 했던 곳이 명량의 바다였다. 그 거센 물살 위에서 13척으로 133척과 전투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설정이다. 더구나 물살의 흐름이 군사의 세가 더 강성한 쪽 편이라면 싸움은 성립되지도 않는다. 순류의 물살 위에 전함을 올려두고 밀어붙이면 그것으로 전투는 끝이다.

적장 구루시마와 도도는 끊임없이 벽파진으로 척후선을 보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의 왜소함을. 전투를 할 의향도 별반 없었다. 비좁은 명량의 해협을 통과해 한양으로 올라가는 것이 적들의 1차적 목표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거짓말처럼 명량에서도 이겼다. 기적의 열쇠로 지목되는 것이 철쇄다. 그는 정말로 물살 속에 적들이 알지 못하게 복병을 감춰 놓았을까. 철쇄의 존재 유무는 여전히 의문이며 명량해전이 만든 논란의 정점에 있다. 명량은 바다 이쪽에서 저쪽까지의 거리가 280∼320m 정도다. 넓은 해협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철쇄를 놓기에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다. 문제는 물살과 시간이다.

▲ 명량해전기념관에 전시된 <난중일기>.
ⓒ 김태성 기자

이순신이 장흥 회진포에서 배설로부터 12척의 배를 인계받은 날이 정유년 음력 8월18일이다. 명량해전은 9월16일에 있었다. 한 달의 시간도 되지 않는다. 진도의 벽파진에 들어온 날은 8월29일이다. 17일 동안 최소 300m의 철쇄를 만들고, 거센 물살 속에 걸어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지만 신은 아니었다. 이순신은 부서진 전함을 고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간이 버거웠다.

기록 또한 미진하다. 이중환의 《택리지》, 김억추의 후손들이 펴낸 《현무공실기》, 일본의 역사학자 아오야기 쓰나타로의 저서 《정한역일한사적(征韓役日韓史蹟)》 등에 잠시 철쇄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그러나 모두 후대의 기록이다. 전투 당사자가 아니고, 당대의 사람들도 아니다.

정작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철쇄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는 기록을 신뢰했던 사람이다. 싸움의 승패를 결정한 철쇄에 대해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못할 연유가 과연 있었을까.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지금의 진도대교가 있는, 명량의 가장 비좁은 해협이 아니었다. 그럴 개연성이 높다. 전투가 있기 전날(9월15일) 이순신은 함대를 벽파진에서 해남 우수영의 임하도로 이동시켰다. 그는 넓은 바다에서 적을 맞았다. 철쇄도 없었다. 임하도는 명량의 비좁은 해협이 목포 쪽 넓은 바다와 연결되는 그 지점이다.

해군사관학교 해전사 담당 이민웅 교수는 “명량해전이 있던 9월16일의 《난중일기》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전투 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왜선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 울돌목에서는 물살이 너무 빨라 포위가 불가능하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다. 처음 전투가 시작된 곳은 임하도 앞 바다다. 철쇄는 처음부터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 거북선.
ⓒ 김태성 기자

하루 네 번씩 바뀌는 물살 힘으로…

해남 우수영을 지나 진도에 간다. 바람은 차갑고 날은 먼 곳에서부터 흐리다. 녹진에 올라도 명량 전체를 굽어보기 힘든 날씨다. 역류하는 진도의 바다는 순결하다. 배반을 모른다. 물의 떨림을 제대로 아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 반대로 물길을 모르고 배를 몰아온다면 그 무모함을 강하게 응징한다. 거친 바다는 무엇이든 수장시킨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명량해전이 있던 날 날씨는 아주 맑았다. 눈이 깨끗하니 조선 수군의 두려움도 그만큼 컸을 것이다. 멀리 집채처럼 몰려오는 적이 너무나 선명했다. 133척 대 13척의 싸움, 죽음이 너무 선명했다.

1597년 음력 9월16일 상오 7시 적들은 해남 어란진을 출발한다. 어란에 집결한 왜군의 전함은 모두 330여 척이었다. 병력은 12만 명으로 추산된다. 적장은 네 사람이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기요마사다. 그 날 명량으로 건너온 적은 구루시마와 도도가 이끄는 133척의 전함이었다. 남은 200척은 뒤를 받쳤다. 그들은 해남에서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에 몸을 맡겼다. 배는 순류를 타고 빠르게 서진했다. 그 날은 보름 바로 다음날이었다. 명량의 물살이 가장 거친 날이다.

김훈은 그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명량의 바다를 이렇게 표현한다. <명량에서는 순류와 역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함대가 그 흐름에 올라탄다 하더라도 마침내 올라탄 것이 아니었다. 때가 이르러 순류의 함대는 역류 속에 거꾸로 처박힌 것이었다. 순류 속에 역류가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적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여기는 사지였다.>

그렇다. 오로지 물살 속에서만 전투의 해답이 있었다. 이순신도 적의 수장 구루시마도 모두 명량의 물살을 잘 알고 있었다. 명량과 같은 물길이 조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시코쿠의 미야쿠보 지역은 왜(倭) 수군의 탄생지다. 그곳의 물살 또한 명량처럼 거세게 운다. 적장 구루시마는 그 해협을 근거지로 성장했다.

이순신은 어란을 떠나온 8월29일부터 미동도 없이 벽파진에 머물렀다. 그는 울돌목의 사지로 적이 들어와 주기를 바랐다. 전선 13척으로 싸울 수 있는 방법이 그것말고는 없었다. 일부러 울돌목의 바다를 비웠다. 벽파진은 적을 맞아 싸울 수 없는 공간이다. 벽파진 동쪽의 드넓은 해역은 이순신만의 사지였으나 울돌목은 적과 이순신 모두의 사지였다.

명량은 수심이 얕다.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폭도 좁다. 뭍과 가까운 곳에 무수한 암초가 숨어 있다. 밀물 때는 남해의 바다가 좁은 명량의 해로를 타고 한꺼번에 서해로 밀려간다. 썰물 때는 그 반대다. 물살은 빠르고 거세다.

명량에서 바다는 6시간마다 몸의 흐름을 바꾼다. 밀물 때는 해남에서 목포 쪽으로 그리고 썰물 때는 목포에서 해남 방면으로 흐른다. 바다는 그 일을 하루에 네 번씩 반복한다. 물살이 바뀔 때는 물의 흐름이 정지한다. 그러나 잠시다. 30분이 지나면 물의 속도는 10km가 된다. 다시 30분 후에는 20km가 된다. 물의 흐름이 바뀌고 3시간이 지나면 물살은 최대가 된다. 그때 물의 속도는 시속 40km이다. 이순신의 전함 판옥선의 최대 속도보다 물살이 더 빠르다. 명량해전은 이런 물살의 흐름 위에 배를 올려두고 전개됐다.

적에게도 이순신에게도 물살은 같은 조건을 부여했다. 명량해전의 모든 것은 물 흐름의 순환 속에 있다. 죽음의 자리가 삶의 자리로 변하는 길목도 거기 놓여 있다. 명량의 바다는 아는 만큼 들켜준다.

▲ 충무공벽파진전첩비, 이순신은 적을 명량으로 유인하기 위해 명량해전이 있기 전날까지 벽
파에 머물렀다.
ⓒ 김태성 기자

‘너희들은 추호도 살려는 생각을 품지 말아라’

전투가 있기 전날(9월15일) 이순신은 부하 장졸들과 신념과 같은 약속을 한다. 《난중일기》는 그 장면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그는 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 하면 죽는다고 하였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능히 당해 낼 수 있다 하였는데,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들은 추호도 살려는 생각을 품지 말아라.> 그는 살려는 생각 없이 적의 본진을 돌파함으로써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병사들은 달랐다. 적의 숫자는 13척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16일 상오 11시 적은 명량에 모습을 드러냈다. 좁은 해협을 가득 덮었다. 보이는 것은 모두 왜군의 주력 전함 안택선이었다. 양쪽의 함대는 밀물 위에서 대치했다. 적이 이순신의 일자진을 포위했지만 공격을 크게 주고받지는 않았다. 서로가 거센 물살에 시달렸다.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보다 배의 균형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전투 초기 이순신은 홀로 싸웠다. 우수사 김억추는 2마장 밖으로 물러났고, 미조항첨사 김응함과 거제현령 안위의 배도 적선과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다. 이순신은 안위를 불러 말했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그때서야 안위는 황급히 적진 속으로 돌격했다. 김응함 또한 이순신의 꾸중으로 싸울 힘을 얻었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을 향해 정면돌파를 시도하자 비로소 송여종과 정응두가 싸움에 합세했다. 가장 멀리 물러나 있던 김억추도 돌격에 가세했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에서 함포가 불을 뿜었다. 그때였다. 바다에 비단옷을 입은 적장의 시신이 떴다. 놀랍게도 왜군의 수장 구루시마였다. 이순신은 구루시마의 시체를 토막내 목을 높이 걸었다. 조선군의 사기는 올라갔고, 적군은 싸울 힘을 급격히 잃었다.

ⓒ 김태성 기자

그리고 하오 1시께 썰물이 시작됐다. 물은 서에서 동으로 흘렀다. 전투가 시작되고 줄곧 왜선들의 순류이던 물길이 이때부터 거짓말처럼 조선 수군의 순류가 됐다. 조선 수군의 총공세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순신은 적의 함대를 비좁은 명량의 해협 쪽으로 몰아갔다. 물살이 바뀌는 순간 적들의 퇴로도 막혔다.

이순신 함대의 포는 멀리 후미의 왜선을 겨냥했다. 뒤가 먼저 깨진 왜선은 퇴로가 막혀 자기들끼리 부딪치고 조각이 났다. 이순신은 13척으로 일본 수군 5만 명이 올라탄 133척을 이겼다. 적선 31척이 부서졌고, 91척이 파손됐다. 적 8000명이 그 바다에 수장됐다. 해질 무렵 전투가 완전히 끝났고, 이순신은 새벽에 당사도로 진을 옮겼다. 그는 명량에 머물고 싶어했지만 물결이 높고 바람은 거셌다. 이순신은 그 싸움의 승리를 두고 단 한 줄의 의미부여만 한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한 일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소상히 기록했지만 극도로 말을 아꼈다.

명량해전의 참패로 서해안을 돌아 서울로 올라가려던 일본 수군의 전략은 좌절됐다. 조선은 잃었던 제해권을 다시 찾았다. 무엇보다 7년 조일전쟁의 결과가 명량의 승리로 윤곽을 드러냈다. 명량의 참패로 왜군의 기본 전략이 무너졌다. 배로 서해를 우회해 한양을 치려던 계획을 폐기해야 했다.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량의 참패 직후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한 줄의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순신도 이듬해인 무술년 11월 자신의 전선 위에서 죽었다. 그 바다는 노량이었다. 조선의 명줄을 연장한 한 사내의 아름다운 퇴장. 조선이 남긴 역사의 여백은 그 날, 그 바다로 영영 잠겼다.

▲ 이층 구조의 판옥선. 아래는 노꾼들이, 위는 전투원이 탔다.
ⓒ 김태성 기자

23전23승, 그 비밀을 풀 열쇠
판옥선과 함포

이순신의 승리를 있게 한 전법은 학익진(鶴翼陣)이다. 한산대첩도 결국 학익진의 승리였다. 아군은 일단 거짓으로 패한다. 적은 일렬로 늘어서 도망치는 조선의 전함을 추격한다. 어느 순간 조선 함대는 적을 향해 돌아선다. 그리고 신속하게 완만한 V자 대형을 이룬다. 학이 날개를 편 듯한 진형이다. 무차별적으로 함포 사격을 가한다. 적은 금방 궤멸된다.

적은 절대로 포로 맞대응을 하지 못한다. 진형이 일렬로 늘어서 있기 때문에 포를 쏘면 아군이 맞는다. 대단한 전술이다. 이 전술을 가능하게 한 두 가지 핵심이 판옥선과 함포다. 판옥선은 이층이다. 아래는 노꾼들이 탔고, 위는 전투원들의 공간이다. 아래는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아무리 전투가 격렬해도 배를 움직이는 노꾼들은 안전하다. 배의 동력은 꺼지지 않는다.

판옥선에는 전투원보다 노꾼들이 더 많이 탑승했다. 16자루의 노가 장착돼 있었으며 노꾼은 대략 100명이었다. 이제 답이 나온다. 빠르고 좌우 회전능력이 좋다. 무엇보다 판옥선은 강하다. 왜군의 주력함대는 안택선이었다. 이 배는 이음새를 쇠못으로 연결했다. 다들 안다. 쇠는 바닷물에 취약하다. 금방 녹이 슬고, 배는 헐거워진다.

반면 판옥선은 참나무 못을 깎아 사용했다. 참나무는 독특한 나무다. 바닷물을 머금으면 점점 더 단단해진다. 또한 참나무 못은 ‘L’자 형태로 구부러져 있다. 충격에 강하다. 이 특성은 곧바로 함포의 우위와 다시 연결된다.

왜군은 조일전쟁 초기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한 뒤 대책 마련에 고심한다. 패배의 원인은 조선군의 강력한 함포였다. 그러나 일본의 주력 전함 안택선으로는 답이 없었다. 포의 반발력을 배가 견뎌내지 못했다. 겨우 두 대의 포를 배에 장착할 수 있었다. 수십 대의 함포 사격에 두 대의 함포로 맞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선군은 싸울 때마다 이길 수 있는 조건이었다.
무엇보다 강력한 전술이 또 있다. 이순신은 판옥선의 강함을 미리 알았다. 전투가 시작되면 이순신은 돌격명령을 내렸다. 판옥선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 왜군의 전함을 들이받았다.

판옥선은 멀쩡했지만 안택선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왜군은 배에 탄 채로 바다에 수장됐다. 그렇다. 23전23승의 힘은 판옥선과 함포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