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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들이 산으로 간 까닭 - 지배신앙에서 민중종교로

吾心竹--오심죽-- 2010. 1. 31. 17:41

역사 게시판

   (2002-06-29 20:49:52, Hit : 640
 절들이 산으로 간 까닭
절들이 산으로 간 까닭 - 지배신앙에서 민중종교로


지금(서기 2000년, 단기 4333년)의 절들은 대부분 산이나 계곡에 있습니다. 도시에 있는 절도 있습니다만 아주 적은 숫자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전부터 절들이 산이나 계곡처럼 사람들이 찾기 어려운 곳에 처박혀서 세속과는 담을 쌓은 모습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조선시대부터 만들어진 것입니다. 조선시대 쯤 되어서야 절들은 깊숙한 산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때부터 비로소 불교는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서 민중의 종교로 거듭났습니다.

우선 남아있는 터부터 봅시다. 평양이나 개성, 부여, 익산, 경주에는 절 터가 남아 있지요. 그런데 이들 절터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너른 벌판에 절이 자리잡았다는 점이죠. 그리고 그것도 도성(오늘날로 치면 도시 한가운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더라도, 태국이나 버마, 일본, 중국, 티베트에는 절이 산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신도들이 드나들기 쉬우라고 사람이 많은 곳에 짓지요. 그리고 태국이나 버마에서는 불교가 나라의 믿음( : 국교) 이고 권력의 후원을 받기 때문에 굳이 사람들이 드나들기 힘든 산골짜기에 절을 짓지 않아도 되지요.

삼국시대나 남북국시대,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나라를 지키는 믿음’으로 자리잡아 왕실이나 귀족들의 후원까지 받으니 당연히 왕실과 가까운 곳에 절을 짓게 되고, 그러다 보니 왕성( : 도성)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 경향은 불교가 들어온 뒤에 계속 이어져서, 고려 시대까지도 절들은 대부분(오늘날의 교회나 성당처럼)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잡게 되지요. 이 때의 절의 모습은 세속과 거리를 둔 오늘날의 암자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고구려의 승려 도림은 고구려 왕실의 첩자로 활약했고, 백제의 승려 도침은 백제 부흥군을 이끌고 당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또 승려 도선은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 풍수학상으로 - 했지요. 이 당시만 하더라도 불교 승려들은 대부분 - 서유럽이나 러시아, 인도의 사제들처럼 - 권력층이고 기득권층이었지 압박을 받는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자학을 받들고 불교를 싫어하는 신진 사대부들이 지배층이 된 조선이 들어서면서 불교가 시련을 겪게 되지요. 당시 타락했던 불교는 사회를 뜯어고치려는 사대부들에게 좋은 ‘공격 대상’이 되었고 사대부들이 불교를 ‘타락한 신앙’으로 몰고 탄압하면서 절들은 더이상 도성 한가운데에 자리잡지 못하게 됩니다.(조선의 주자학은 주자학 이외의 학문을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주자학만이 진리이고 다른 학문은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했지요. 그 맥락에서 불교나 도교도 부정되었습니다)

승려는 천민 취급을 받았고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이 불상을 때려 부수고 절을 헐어버리며 절에 특별세를 거두는 마당에 고려시대처럼 당당히 절을 시내 한가운데에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절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산골짝으로 갔지요.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오만한 자세를 버리고, 민중 속으로 불교가 녹아들어 갔으며 전통 신앙과 함께 공존하게 되었습니다.(절에 있는 산신각이나 칠성신을 모신 칠성각, 그리고 단군을 모신 독성각이나 산신, 칠성 - 북두칠성 - 신, 단군을 한꺼번에 모시는 삼성각이 좋은 예입니다)

결과적으로 절들이 산 속으로 숨어든 것이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국난 때 국난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인재들을 내보내는 곳이 되는 결과를 낳았지요.(예를 들면 임진왜란 때의 승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