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스크랩] 양직공도의 백제국사(百濟國使)기록 재해석.

吾心竹--오심죽-- 2010. 2. 2. 14:35

 

양직공도(梁職貢圖) 개략.
양나라의 원제(元帝) 소역(蕭繹:508-554.江蘇武進人)이 양에 조공 온 외국인 사절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까지 남경박물관(南京博物館) 소장본이 양직공도로 가장 많이 소개되었으나, 대만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소장된 <남당 고덕겸 모양원제번객입조도(南唐顧德謙摹梁元帝蕃客入朝圖)>와 <당염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 2종은 양직공도의 모사본이라 한다.
남경박물관 소장본은 완본이 아닌 잔결본으로 현재 12개국 사신의 그림과 각국의 정황이나 중국과의 교통 사실을 적은 제기(題記)로 구성되어있는 데 반해, 고궁박물원 소장본 2종은 우측 상단에 국명을 명기한 사신도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당 고덕겸 모양원제번객입조도>는 이욱(李昱)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남송 이종(理宗)에 의해 <양원제번객입조도>로 이름이 붙여진 후 여러 과정을 거쳐서 청나라 내부(內府)에 수습된 것이다. 노국(魯國)부터 부남국(扶南國)에 이르기까지 총 31개국 33인의 사신이 묘사되어 있는데 중천축(中天竺)과 위국(爲國) 사이, 임강만(臨江蠻)과 고려국(高麗國) 사이의 사신도에는 국명이 없어서 2명의 사신이 한 조를 이루어 파견된 것으로, 또는 국명이 빠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당염립본왕회도>는 견본채색한 것으로 노국(虜國)부터 여단국(女蛋國)에 이르기까지 총 24개국 사신의 그림과 기사가 실려 있다. 남경박물관 소장본이 고궁박물원 소장본과 동일한 양직공도 모사본을 모본(母本)으로 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고궁박물원 소장본 2종은 채색의 유무나 사신의 구체적인 묘사에서 차이가 있지만, 노국(魯國, 북위) 황제 일행의 형상 등에서 볼 때 모본이 같았을 가능성도 있다.

북송대의 모사본인 남경박물관 소장본은 청 내부에 수습될 당시 이미 앞 부분이 결손되어 있었으나, 양직공도에 원래 수록되어 있었던 나라 수는 최소한 25국 이상이었을 것이다. 남경박물관 소장본에 남아 있는 12국의 명칭은 활국(滑國)·파사국(波斯國)·백제국(百濟國)·구자국(龜玆國)·왜국(倭國)·낭아수국(狼牙修國)·등지국(鄧至國)·주고가국(周古柯國)·가발단국(呵跋檀國)·호밀단국(胡密丹國)·백제국(白題國)·말국(末國)이다. 그러나 왜국과 낭아수국 사이에 있는 왜국에 관한 제기 중 일부분은 탕창국(宕昌國)에 관한 것이므로 탕창국의 사신도와 그 제기의 전반부가 빠졌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13국에 대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13국의 명칭은 고궁박물원 소장본 2종에도 모두 등장하지만 <남당 고덕겸 모양원제번객입조도>에서는 말국, <당염립본왕회도>에서는 활국만이 빠져 있다.

직공도 원본의 제작시기와 작자, 제작내력에 관련해서는 남경박물관 소장본의 제기를 참조할 수 있다. 직공도에 나타나는 국명이 『송서(宋書)』와 『남제서(南齊書)』에는 보이지 않고 『양서(梁書)』 제이전에만 보이는 점, 중국과의 교통 사실을 나타낼 때 송이나 제의 연호를 기록할 때는 왕조명을 앞에 쓰나 양나라는 연호만을 기록한 점, 대통(大通) 2년(528) 이후의 교통 사실은 기록되지 않은 점에서 양나라 때의 것임이 확인된다. 또한 원제 소역이 직공도를 저술했다는 기록이 『양서』 『남사』 『구당서』 등에도 보이므로 원본의 작자는 소역임이 분명하다. 양 무제(武帝)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각국에서 조공을 온 정황을 기록하기 위해 당시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주재하던 소역이 형주에 온 외국인의 용모·풍속을 관찰하고, 경사인 건강(建康)에만 온 사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사람을 보내 조사시켜 편찬한 것이다. 양 무제의 재위연대(502-541)와 소역이 형주자사로 재임한 시기(526-539)를 고려하면 양직공도의 제작시기는 530년대 후반경이 아닐까 한다. 원제가 직공도를 편찬할 때는 친교가 있었던 배자야(裴子野)의 방국사도(方國使圖)를 참조한 듯한데, 방국사도의 제작연대는 백제(白題)가 입조한 보통(普通) 3년(523)에서 멀지 않은 시기이다.

남경박물원 소장본에는 백제국 사신도만이 남아 있고 고구려나 신라 사신도는 없으나, 고궁박물원 소장본 2종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사신의 모습이 모두 그려져 있다. 남경박물관 소장본에 묘사되어 있는 백제국 사신은 약간 좌측을 향하여 두발을 나란히 하고 있는 모습이다. 단아한 용모에 관을 쓰고, 왼쪽 여밈의 대수포(大袖袍)를 무릎을 살짝 넘게 착용했으며, 그 아래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있다. 이는 <당염립본왕회도>의 백제 사신도와도 상당히 유사하다. 사신도에 붙은 제기는 모두 7행 160여 자이다. 삼한의 사회상태에 대한 간단한 기술, 백제의 요서지방 진출설, 백제의 중국 역대왕조와의 교통기사, 담로(담魯) 관계기사, 백제에 부용되었다는 방소국(旁小國) 기사, 언어·풍속에 관한 기사 등이 실려 있는데 방소국 기사는 이것이 유일하고, 담로 기사는 『양서』의 내용과 거의 부합한다.

양직공도는 후대의 모사본이기는 하지만 원본은 양 무제 때에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6세기대 여러 나라 사신의 풍모·복식을 엿볼 수 있고, 다른 데에서 볼 수 없는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어 이 시기 각국의 정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상 참고글 출처 : 문화재학술연구정보지식센터
http://www.nrich.go.kr/kr/data/dic/dicview.jsp?id=10140

 

양직공도(梁職貢圖)

작자 : 양나라 원제 소역(蕭繹:508-554.江蘇武進人)

외형 : 비단 채색, 26.7 x 402.6 cm

소장자 : 중국 남경박물원.

*소역의 원본은 전해오지 않고 현재의 양직공도는 송나라 시기에 모사된 것임.

 

 

양직공도(梁職貢圖) 전체도.(확대 : 클릭)

 

 

*12국 사신 : 활국(滑國)·파사국(波斯國)·백제국(百濟國)·구자국(龜玆國)·왜국(倭國)·낭아수국(狼牙修國)·등지국(鄧至國)·주고가국(周古柯國)·가발단국(呵跋檀國)·호밀단국(胡密丹國)·백제국(白題國)·말국(末國)

 

 

백제국사(百濟國使)기록 부분.(고해상, 확대 : 클릭)

 

 

百濟國使
百濟舊來夷馬韓之屬晉末駒旣畧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
平縣自晉巳來常修蕃貢義熙中其王餘腆宋元嘉中其王餘毗齊永明
中其王餘太皆受中國官爵梁初以太爲征東將軍尋爲高句驪所破普
通二年其王餘隆遣使奉表云累破高麗所治城曰固麻謂邑曰檐魯於
中國郡縣有二十二檐魯分子弟宗族爲之旁小國有叛波卓多羅前羅
斯羅止迷麻連上巳文下枕羅等附之言語衣服畧同高麗行不張
拱拜不申足以帽爲冠襦曰複袗袴曰褌其言參諸夏亦秦韓之遺俗.

 

백제는 옛 이(夷:東夷)에서 나왔으며 마한의 무리이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취하여 다스리니,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晉平郡 晉平縣)을 취하였다.
진나라 이래 이웃국가로서 공물의 예를 갖추어 왔는데 진(晉)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그 왕

여전(餘腆:전지왕), 송나라 원희(元嘉) 연간(424-453)에는 여비(餘毗:비유왕), 제나라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여태(餘太:동성왕)이 모두 중국으로 부터 관작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는 여태(餘太:동성왕)을 정동장군에 제수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였다.
양나라 보통(普通) 2년(521년)에 백제왕 여융(餘隆:무녕왕)이 보낸 사신이 와서 표를 올리며, 수차례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고하였다. 백제는 궁성을 고마(固麻) 라고 하고, 읍을 담로(檐魯) 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것이며, 22곳의 담로가 있는데 왕의 자제등 존속들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나라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나, 사라, 지미, 마연, 상사문, 하침라 등이 있어,백제에 부용(附庸)하고  있다.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유사하나 걸을 때 두 손을 맞잡으며, 절을 할 때에는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는 관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복삼, 바지를 곤이라고 한다.
백제의 말에는 중국의 말이 섞여 있는데 이는 진한(秦韓)의 습속에서 유래된 것이다.

 

 

 

------------끝.

 

 

 

 

출처 : 향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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