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中國 史書에 나타난 百濟 始祖觀과 始國者 仇台

吾心竹--오심죽-- 2010. 2. 2. 14:44

中國 史書에 나타난 百濟 始祖觀과 始國者 仇台

 

김 병 곤 (동국대 사학과 강사)

 

 

- 목 차 -

 

Ⅰ. 머리말

Ⅱ. 中國 正史 百濟傳의 始祖觀

1. ?魏書? 以前의 百濟 始祖觀

2. ?梁書?·?周書?·?隋書?의 百濟 始祖觀

Ⅲ. 仇台廟의 成立과 始國者 仇台

1. 三禮의 導入과 仇台廟의 成立

2. 始國者 仇台의 史的 實體

Ⅳ. 맺는말

 

 

Ⅰ. 머리말

 

한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건국 시조가 지닌 사적 위상의 중요함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사의 시작이자 건국 주체인 건국[시국]자는 국내와 중국 사서 등에 온조·비류·구태 등으로 달리 전하고 있다. 더욱이 ?삼국사기? 등에 언급된 건국시조 온조와 비류의 경우, 건국 과정에 대한 행적은 상세한 편이나, 전반적인 초기 기록의 불신 속에 그 실체를 의심받는다. 반면 구태는 ?주서?나 ?수서? 등의 중국 사서에 시국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행적이 매우 소략하며, 국내에는 관련 기록이 전무한 탓에 ?三國史記?의 편찬자조차 그 존재를 ‘不可信’한 것으로 평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 필자는 중국 사서에 등장한 백제 시국자로서 구태의 출현 과정과 그가 백제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규명하여, 그 실상을 구체화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중국 사서에서만 구태가 확인되는 현실을 고려, 중국 정사 백제전의 시조 관련 기사의 출현 양상을 분석해 보겠다. 사실 이러한 분석은 매우 평면적일뿐 아니라 선학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전에 나타난 백제 先이나 始祖 관련 기사의 출현 양상이 당대 백제 지배층의 시조관을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어 이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백제와 중국이 東晋代(317~419)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한 이래, ?위서?에 이르러서야 ‘백제국 선의 출자가 부여’이며, ?주서?에 비로소 ‘시국자로서의 구태’와 그를 제례한 ‘구태묘’가 기록될 수 있었는지 하는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한명일 수밖에 없는 시국자가 불분명한 것은 백제 초기 왕실이 범부여족의 시조인 동명을 시조로 설정하며 건국자의 위상이 일찍부터 정립되지 못했거나, 왕계의 잦은 변화 속에 이와 관련된 사료의 불충분 등 다양한 원인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사서에 반영된 백제 시조관의 변화상과 시조묘에 대한 기존 학계의 견해를 인정할 경우, 시국자 구태는 중국과의 외교적 내지 정치적 관계 속에 새로운 시조관을 수용한 결과 창출될 만한 소지가 충분하다. 곧 구태묘는 성왕대 ‘삼례’로 대표되는 중국식 예제를 도입하며 시국자로서의 구태 위상이 정립되고 그를 치제하는 가운데 설치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시 중국적 예제의 영향 하에 구태묘가 설립되었다면, 우리는 ‘삼례’에 규정된 태조나 시조관의 이해를 통해 구태의 실체를 추적할 만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태가 일정시기 백제 지배층으로부터 시국자로서 인정받고 묘까지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 ?삼국사기? 등의 국내 사서에서는 구태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실체를 구체화해 보고자 한다.

 

 

Ⅱ. 中國 正史 百濟傳의 始祖觀

 

1. ?魏書? 以前의 百濟 始祖觀

 

중국 사서의 편찬에 있어서 兩晉六朝期가 편찬된 사서의 수량과 數千家에 이르는 史家의 존재로 보아 중국 사학사상 최전성기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편찬된 ?후한서?에 마한의 일국이던 百濟(伯濟)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후한서?는 5세기 초중반 劉宋의 范曄이 후한시대(A.D. 24~220년)를 대상으로 편찬하였는데, 본서의 韓條에 ‘모두 78개의 나라로서 伯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라는 기사를 통해 당시 백제가 韓의 一國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당시’는 후한시대 사람들의 인식인지, ?후한서?가 편찬되던 송대의 인식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대체로 3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백제는 마한 54개국 중의 일국으로 인식되던 중국인들의 시각에 비추어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백제의 선을 마한이나 삼한에서 찾던 남조계 사서의 전통적 시각의 일단일 것이다.

이후 西晋代(265~316)부터 백제가 진에 사신단을 파견하며 진 왕조에 알려졌었을 가능성도 있다. ?晋書? 마한조를 보면 西晋의 武帝 咸寧 3년(277년 ; 백제 고이왕 44)과 太康 원년(280년 ; 백제 고이왕 47년)·2년·7년(286년 ; 책계왕 1년)·8년·10년 및 太熙 원년(290년 ; 책계왕 5년) 등에 걸쳐 馬韓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고 하며, 帝紀에는 더 많은 東夷 諸國의 內附 기사가 찾아진다. 당시 마한에서 사신을 보낸 국가를 백제로 보기도 하며, 백제의 고이왕이 3년(236) 西海大島에서 수렵하였음을 참고하면 한반도 중서부의 제해권을 장악한 백제가 당시 남조인 진과 통교하였을 지정학적 여건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서?의 서진대 「제기」·「마한전」·「장화전」에 등장하는 來·內附·貢方物 來獻 등으로 표현된 주체는 馬韓일 뿐이며, 실제 ?삼국사기?에 백제가 직접 서진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사도 없다. 그러므로 백제라는 국명이 서진시대 중국에 알려지지 못했었다는 견해가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백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인식이 보다 명확히 확인되는 것은 東晋代(317~419)이다. 東晋 簡文帝 咸安 2년(372) 정월의 백제 조공기사와 6월 책봉기사를 필두로 孝武帝代와 「慕容皝傳」 및 「符堅傳」의 기록 등에 의해 4세기 중엽 백제가 중국에 알려진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백제가 진대로부터 누대에 걸쳐 조공했음은 「양직공도」·?建康實錄?·?통전?의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한편 ?삼국사기?상에도 372년 근초고왕이 처음으로 중국 왕조인 東晉에 사신단을 파견했음이 보인다. 그런데 백제가 동진에 꾸준히 조공하였음에도 ?晋書?에는 독자적인 백제전이 입전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진서? 四夷傳의 경우 武帝代(265~289)에 入貢한 경우만을 立傳한다는 언급이 있지만 당연히 들어가야 할 고구려가 누락되어 있다. 그 결과 ?진서?에 고구려·백제 양국이 입전되지 못한 원인을 고구려는 중국의 失地로 여겨 朝貢의 대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양국 모두 ?진서?를 편찬할 당시 唐의 정벌 대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진서?에 백제전이 존재하지 않은 이유는 중국 정사에 韓條나 馬韓條와 더불어 백제전이 동시에 설정된 예가 없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후한서?·?삼국지?에는 (삼)한조가 ?진서?에는 마한·진한조가 있다. 반면 ?송서? 이하 ?남제서?·?양서? 등에는 삼한과 관련된 독립전이 없이 고구려·백제전 등만이 있다. 이러한 동이전의 체제는 중국 사가들이 지닌 삼한의 국가 발전관과 연관이 있다. 곧 백제가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 마한의 대부분을 직간접적으로 통합하며 동진과 외교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3세기말까지 동이 및 마한으로 표현된 제국들이 서진에 朝獻·來獻·歸化했다는 기록들이 ?진서? 帝紀에서 다수 발견된다. 곧 서진대에 마한 제국이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신흥하던 백제와 상관없이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사가들이 이러한 마한을 포함한 삼한을 백제의 전신으로 이해하고 있다. 곧 당태종의 칙명에 따라 ?진서?보다 10여년 앞서 편찬된 ?梁史?·?南史?와 같은 남조계 사서를 보면 백제의 선을 지리적인 연속선상에서 동이삼한에서 찾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역시 진서의 편찬자들도 동일하게 동이삼한을 백제의 선으로 이해하였으며 마한·진한전이 설정된 이상 별도의 백제전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후 백제의 마한 통합에 따른 마한 諸國의 독자적 외교력의 상실과 宋代(420~479) 꾸준히 전개된 백제의 외교 활동에 의해 ?宋書?에 독자적인 백제전이 입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송서?는 南朝 宋 武帝 永初 元年(420)에서 順帝 升明 3년(479)까지 약 6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齊 永明 5년(487)에 명을 받고 1년도 못되어 완성했다. ?송서?와 더불어 약 30년가량 늦게 편찬된 ?南齊書?는 蕭道成이 齊를 건국한 479년부터 蕭寶融이 폐위된 502년까지 7帝 23年의 南朝 齊의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514~526년 사이에 梁의 蕭子顯이 편찬하였다. 이 두 사서는 대체로 송·제와 백제와의 외교 관련 기사들이 주를 이룬다. 특히 ?송서? 백제전에는 ?삼국사기?에 실리지 않은 양국의 조빙 왕래·책봉 등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를 보면 義熙 12年(A.D. 416 ; 百濟 제18대 腆支王 12년, 중국 사신 래)·少帝 景平 2년(A.D. 424 ; 百濟 제19대 久爾辛王 5년, 백제 사신 왕)·元嘉 2년(A.D. 425 ; 백제 구이신왕 6년, 중국 사신 래)· 원가 7년(A.D. 430 ; 백제 제20대 毗有王 4, 백제 사신 왕, 중국 사신 래)·원가 27년(A.D. 450 ; 백제 비유왕 24년, 백제 사신 왕)·世祖 大明 元年(A.D. 457 ; 백제 제21대 蓋鹵王 3년, 백제 사신 왕)·2년(백제 사신 왕), 太宗 泰始 7년(A.D. 471 ; 백제 개로왕 17년, 백제 사신 왕) 등의 사신 왕래가 그것이다. 한편 ?남제서? 백제전에는 前文이 망실되어 있지만, 그 逸文이 실린 ?冊府元龜? 「外臣傳」을 참고하면 백제왕 牟大(제24대 동성왕)가 武帝 永明 8년(490 ; 동성왕 12년)·明帝 建武 2년 ; A.D. 495, 동성왕 17년)이 거듭 사신을 파견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상기 내용을 살펴볼 때, 적어도 백제는 제13대 근초고왕이 372년 진에 사신 파견을 시작한 이래 제18대 腆支王 12년인 416년부터 제21대 개로왕 17년인 471년까지 송과 사신단을 교환했다. 더불어 남제에는 제24대 동성왕이 12년(490)과 17년(495) 거듭 사신을 보냈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양 사서에는 오로지 양국 간에 이루어진 외교 관련 사실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 백제의 내력이나 문화적 특색 등에 대한 민족지적 서술은 없다.

물론 양국의 사신이 왕래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시조나 출자 등에 대한 정보가 송이나 제의 지배층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했었다고 보인다. 더구나 前例가 될 만한 ?삼국지?나 ?후한서? 외이전의 편찬 양상은 민족지적 서술에 제법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송서?나 ?남제서?는 편찬 시기와 편찬자가 상호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치 동일인에 의해 작성된 것처럼 외교 관계 기사가 주를 이루고 시조나 출자 등의 민족지적 내용은 전적으로 탈락되는 공통점이 보인다.

이러한 원인은 양 사서의 편찬 경향에서 비롯되었거나 아니면 실제 관련 정보가 전달되지 못한 자료의 부재에서 기인하였던 듯하다. 이에 대한 해답은 ?송서?와 ?남제서?의 동이전에 실린 고구려전을 참고해 보면 일단의 실마리를 얻는다. 양 사서에는 장수왕이 거듭 송과 남제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확인되며, 초두의 강역 관련 기사 이외에 대부분 외교 관련 기사이다. 그런데 당대의 고구려 왕실은 「광개토왕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뚜렷한 시조 및 출자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고구려의 왕실은 송·제와 사신단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들의 출자나 시조에 대한 정보의 교환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양 사서의 고구려전에 민족지적 서술이 전무함은 아마도 후술할 ?위서?와 더불어 天子의 勅命을 받고 편찬되었지만 실제 개인 저술로 이루어지며 관련 자료의 부재에서 부득이하게 동이전의 편찬 방향이 외교 기사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자료 확보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송서?·?남제서?와 달리 ?위서?에서는 양국에 대한 기록에 어떤 차별성이 나타난다. 北齊 文宣帝 天保 2~5년간(551~554)에 魏收가 칙명을 받들어 편찬한 ?魏書?는 北魏 道武帝의 건국(386)에서 東魏 孝靜帝의 즉위(550)까지 약 165년간의 위나라 역사를 담고 있는데, 본서의 「백제전」은 ?송서?·?남제서?와 같이 주로 외교 관계 기사가 주를 이룬다. 특히 延興 2年(A.D. 472 ; 백제 제21대 蓋鹵王 18년) 백제왕 餘慶이 보낸 國書의 전문이 실려 있다. 그런데 본서 백제전의 서두에는 ‘百濟國 其先出自夫餘’라 하며 처음으로 백제의 출자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학계에서는 이 기사가 개로왕이 보낸 국서의 ‘臣與高句麗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이라는 내용에서 유래하였다는데 이견이 없다. 이후 본서에서는 백제 강역의 대략과 간단한 민족지적 기록을 제외하면 모두 외교 관련 기사이다. 곧 ?송서?·?남제서?·?위서? 등은 황제의 명으로 찬술되었지만 대부분 사찬의 성격이 강하고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이족에 대해 외교 관계 기사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위서」의 「고구려전」은 백제전에 비해 훨씬 풍부한 출자나 시조 관련 기사를 싣고 있다. 특히 시조에 대해서는 ‘高句麗者 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朱蒙母河伯女’이라 하여 「광개토왕릉비」(본 논문의 주 18 참고)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차이점은 「광개토왕릉비」의 경우 출자가 북부여이고 추모(주몽)가 천제의 아들임을 천명하나, ?위서?에서는 고구려의 출자가 부여이고 시조 주몽이 천제의 아들임을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실린 주몽의 탄생신화를 적기하고 있는 와중에 日光感應에 의해 그를 잉태하였다고 하여 은연중 천제의 아들임을 밝히고 있다. 이로 보아 4~5세기 완성된 고구려 왕실의 출자관과 시조관이 전달되어 ?위서?에서 비로소 이를 적기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본 사서에서는 주몽의 사후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閭達(子)-如栗(孫)-莫來(曾孫)로 이어지는 초기 왕계까지 밝히고 있다. 그 다음에는 주로 고구려와의 외교 대립 관계가 주를 이루지만 일부 민속지적 기록이 일정 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고구려의 경우를 비추어 볼 때, 북위는 비록 약소국으로 인식했을지 모르는 백제국의 왕실 시조와 같은 사안에 관심을 가질 만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근거로는 우선 ?위서? 단계에서부터 중국 정사 동이전이 지닌 서술의 패턴이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삼국지?·?후한서?·?진서?·?송서?·?남제서? 등은 그 서두부분이 강역-출자-민속지적 기록의 패턴을 보이지만, ?위서?·?양서? 이후의 사서들은 선(출자)-건국시조-강역의 순으로 패턴이 조정되고 있다. 곧 ?남제서?가 편찬되던 6세기 초반까지 중국 사가들의 동이에 대한 관심은 강역이 가장 우선적이었고 다음이 출자 순이었다. 그러나 6세기 중반 편찬된 ?위서?에서부터 각 국의 선(출자)-건국시조-강역-민속지적 기록 및 외교 관계를 언급하는 순으로 외이전의 체제가 변화된다. 그리고 ?양서?와 ?주서?를 거치며 이러한 패턴이 고착화한다. 외이전에 대한 남조와 북조의 관심 차이 등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주요 관심사가 이전의 강역에서 선(출자)-건국시조로 옮겨지며 나타난 새로운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서?의 백제전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백제국 先의 출자가 부여’라고 간단히 언급하고, 고구려전과 비교할 때 더 이상의 구체적 시조나 왕계 등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러한 차이는 백제와 달리 고구려가 오랜 기간 위와 국경을 접하고 누차에 걸쳐 대규모의 사신단이 왕래한 것에서 기인하였다고 여겨진다. 사실 동이전의 말미에 “고려가 해마다 職貢을 닦음이 東藩의 으뜸이었으므로, 吉凶事에 중국 조정에서 보내는 것 또한 넉넉하였다.”고 평한 것에서 북위가 가진 대고구려관과 인식을 알 수 있다.

반면 백제는 북조인 위와 쉽게 교류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송서?나 ?남제서?와 같이 ?위서? 편찬시의 활용 자료가 대부분 외교 관계 문서였으므로 이러한 양상이 나타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기 제시된 견해에 따르면 북위에서 백제의 내부 사정에 대한 자료가 적은 것은 외교 관계가 1회에 불과하며, 북위 자신이 백제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던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가 백제 왕실의 시조나 백제 내부 상황에 대해 고구려와 비교될 정도로 지나치게 무지했었다는 것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당시 餘慶(제21대 개로왕)이 보내 表에 대한 魏의 답서 중에 “(백제)풍속의 온후함과 군사·마필의 강성함은 모두 (사신) 餘禮 등에게서 직접 보고 들은 바 있소. … 卿(개로왕)은 强弱의 형세를 갖추어 진술하고 지난 시대의 자취를 모두 열거(具列往代之迹)하였으니…”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상의 문구가 답서의 상징적 문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문면 그대로라면 당시 백제 사신이었던 여례가 백제의 풍속 및 군사력에 대해 설명하였고 더불어 백제의 과거사를(往代之迹) 모두 열거하였던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백제 사회와 과거에 대한 내용이 전혀 ?위서?에 기록될 여지가 없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위가 지닌 백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미약했거나 또는 특기할 만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 우선 관심의 미약에서 기록의 부재가 비롯되었다면 더 이상의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위서? 동이전의 각국조가 그 先-건국시조-강역에 대한 서술로 시작되는 패턴임을 감안해 본다면. 오히려 특기할 만한 사실의 부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더욱 많다. 그렇다면 고구려전과 차별적인 백제전의 시조 기록의 부재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면 건국 시조에 대한 기록 부재의 원인을 생각해보자. 고구려전을 참고할 때 백제 사신 여례나 개로왕이 지난 시대의 자취를 열거하는 가운데, 건국자에 대한 언급을 했었다면 당연히 백제전에 언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 각종 사서에서 시조로 등장하는 동명의 사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거나, 아직 시조로서 동명의 위상이 명확치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 개로왕의 표문에 보이는 백제 지배층의 부여 출자 의식과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고구려 지배층의 백제에 대한 의식[百殘]을 감안할 경우, 당시 백제 지배층이 부여의 후예임만을 강조하는 선에 머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시조묘가 가지는 종교적·정치적 기능을 생각하고 동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를 참고하더라도 백제의 건국 초기 시조묘[동명묘]의 설치는 당연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이는 동명묘의 설치와 제사지 등에 보이는 치제 기사를 전적으로 부정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당시 백제왕실은 건국 초기부터 범부여족의 시조인 동명을 그들의 시조로 주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위서? 백제전에 동명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이의 불합리를 깨달은 ?위서?의 찬자들이 ‘百濟國 其先出自夫餘’라고 기록하는 것에 만족했던 까닭일 것이다. 동시에 당시까지 백제 왕실은 동명 이외에 대외적으로 천명할 만한 시조상을 갖지 못했을 가능성이 제시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백제가 위와의 외교 관계 속에서 단지 관념상의 시조인 동명만을 언급했을 가능성도 있다.

 

2. ?梁書?·?周書?·?隋書?의 百濟 始祖觀

 

당 태종에 의해 이전 왕조에 대한 일련의 역사편찬사업으로 마련된 ?양서?·?주서?·?수서?의 백제전은 이전 사서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 사서의 백제전은 특히 원류관련 기사가 충실하게 기록되며 민족지적 내용의 급증이 큰 특징인데, 지식의 증가와 찬자들의 역사 편찬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우선 태종의 명에 의해 정관 3~10년간(629~636)에 姚思廉이 502년 蕭衍이 梁을 건국한 시기부터 557년 蕭方智의 亡國에 이르는 56년간의 역사를 대상으로 ?양서?를 편찬하였다. 본서의 백제전은 백제의 先이 東夷三韓이었음과 晋·宋·齊代를 거치며 사신의 왕래 및 백제 왕위 계승, 그리고 고구려에 의해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사실, 이후의 내부 정세와 민속지적 내용을 약술했다. 그리고 梁 당대의 일로 武帝 普通 2년(A.D. 521 ; 백제 무녕왕 21년)·보통 5년(A.D. 524 ; 백제 성왕 2년)·中大通 6년(A.D. 534 ; 백제 성왕 27년)·大同 7년(A.D. 541 ; 백제 성왕 19년)·太淸 3년(A.D. 549 ; 백제 성왕 27년) 사신의 왕래를 기록하며 백제왕의 책봉과 문물 전수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 ?양서? 백제전은 이전 晋代에 백제왕 餘映이, 宋代에는 餘毗가, 梁 당대에는 餘隆이 사신을 파견했음을 기록하고 있어, 양 지배층과 백제전 편찬자는 백제왕실이 채용한 ‘(부)여’씨 성을 통해 그들의 先이 부여계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先을 삼한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누차 지적된 바와 같이 ?삼국지?나 ?후한서?의 한전의 기록을 존중하는 남조계 사서의 일반적 특성이다. 당시 양과 백제는 정치·문화 등 폭넓은 방면에 걸쳐 상당히 긴밀하였으며 무녕왕대부터 성왕대까지 사신단이 꾸준히 왕래하였다. 또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백제왕들이 ‘(부)여’씨를 천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백제의 출자나 건국 시조에 대해서 본 사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반면 ?양서? 고구려전에는 ‘高句麗者 其先出自東明’이라 하며 송대 배송지가 찬술한 ?위략?의 동명신화와 유사한 내용을 소개하고 ‘그 후손의 한 支派가 句麗의 종족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북조계 사서에서 언급하는 시조 주몽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또한 ?양서?에서 처음으로 독립적인 신라전이 입전된다. 아마 법흥왕 8년(521) 신라사신이 백제를 따라 조공했던 결과로 보이는데, 신라의 先[출자]에 대해서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사를 바탕으로 辰韓 種族·秦의 流亡人·辰韓의 王은 馬韓人이라는 출자관과 왕실의 시조관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일괄하여 ?양서? 동이전의 편찬 태도를 보면, 우선 편찬자가 취득했던 관련 사료는 상당부분 당대의 정보들에 의거한 흔적이 보인다. 백제전에서는 都城을 固麻라고 하고 邑을 檐魯하고 하는 등의 웅진시기 22담로에 대한 최초의 서술이 있다. 신라전에서는 王城인 健牟羅의 명칭과 그 內의 六啄評·外의 52邑勒이라는 당시 왕경과 지방제도 그리고 子賁旱支 등의 관직명을 기술하고 있어 6세기 전반 신라사 연구의 한 準據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조계 사서와 북조계 사서가 보여주는 백제 시조관의 전통 내지 일관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기존 사서를 답습하는 한계를 노정시키기도 한다.

동시대에 편찬된 ?주서? 백제전의 대략을 살펴보자. 우선 ?주서?는 北魏 孝武帝 大統 元年(535)에서 北周 靜帝 大定 元年(581)까지 약 47년간의 北周 역사를 令孤德棻 등 21명이 태종의 명을 받들어 貞觀 10년(636) 완성하였다. 백제에 대한 실질적인 최초의 관찬사서인 ?주서? 백제전은 대부분 백제의 건국과 사회상에 대한 소개를 통해 民族誌的인 서술을 하고 마지막에 백제가 北齊(백제왕 隆 ; 무녕왕)와 北周(建德 6년 ; A.D. 577 ; 백제 제27대 威德王 24년 / 宣政 元年 ; A.D. 578 ; 백제 위덕왕 25년)에 사신을 보낸 것을 기록했다. 이러한 ?주서? 백제전에는 ‘百濟者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 有仇台者 始國於帶方 故其地界東極新羅 北接高句麗 … 王姓夫餘氏 號於羅瑕 民呼爲鞬吉支 夏言竝王也 妻號於陵 夏言妃也 … 其衣服 男子畧同於高麗 若朝拜祭祀 … 其王以四仲之月 祭天及五帝之神 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라고 하여 백제가 본래 마한의 속국이자 부여의 별종이고 구태라는 사람이 대방에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하여 백제 시국자로서 구태를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본고의 주안점인 구태에 대해서는 후술하고 그가 나라를 일으켰다는 대방에 대해 잠깐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주서?에서는 ‘始國於帶方’으로 ?수서?에는 ‘帶方故址’라고 하여 구태가 백제를 건국한 지역을 구체적으로 적기하고 있다. 이에 백제는 帶方郡外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 밀접하고 뒤에 군이 백제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이를 막연하게 기록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반면 이러한 기록의 역사성을 중시하여 음상사와 대방고지를 실질적으로 확보한 왕은 근초고왕(餘句)이라 하며 구태를 근초고왕에 비정하고 건국시기를 366년경으로 보거나, 313년 낙랑과 대방군이 요서지역으로 이동하자 浿河(대동강)를 경계로 하는 대방 고지의 영역인 현재 黃海道 載寧의 長壽山城 일대에 백제의 초기 수도가 건설되었다는 견해, 또는 비류가 ‘浿帶二水를 건너 彌鄒忽에 이르렀다.’는 전승을 통해 비류의 父인 優台와 구태를 동일인으로 이해하고 비류의 건국지를 대방군의 인근이자 한강 이북의 黃海道 鳳山郡 文井面의 智塔里土城에 비정하는 견해 등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기사는 백제에 대한 책봉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후대 인식의 차원으로 간주함이 통설이며, 구태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직접적인 연결성이 부족하므로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상론하지 않겠다.

또한 ?주서?에는 백제의 제례를 설명하며 시조 구태묘를 세우고 사시로 제사한다고 하여 제례상으로도 구태가 시조임을 명확히 하였다. 더불어 백제의 강역을 삼국과의 관계 속에 서술하고 중앙과 지방제도 왕과 왕비의 고유 호칭(어라하, 건길지 ; 어능) 및 16관등과 22부에 대한 서술도 하였다. 백제와 북주의 외교 관계는 일방적으로 백제에서 견사한 것으로 실제 중국인의 견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확신하기 어렵지만, 백제국에 대한 상당한 지식의 증가에서 비롯되어 이전의 백제전과는 차별될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북주의 존속 기간은 25년에 불과하며 양국의 외교적 교섭도 드물었으므로 ?주서? 백제전의 기사는 북제·북주에서 수대에 이르기까지 수집되었던 정보에 기초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과적으로 백제가 제13대 근초고왕대인 372년부터 중국의 진과 통교하기 시작한 이후, 557~581에 존립한 주대의 교류 상황을 바탕으로 당 태종 정관 10년(636)에 편찬된 ?주서?에 이르러서야 백제 건국 시조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확인된다. 사실 고구려의 경우는 대무신왕 15년(A.D. 32)부터 중국 후한과 통교하였지만 6세기 중반 편찬된 ?위서?에 이르러서야 건국 시조 주몽의 이름이 명기된다. 곧 중국의 여러 왕조와 고구려 백제 간에 사신이 왕래하는 과정에서 양국의 시조가 전해지고 ?사서?에 기록되는 데는 고구려는 약 520여년, 백제는 260여년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와 같이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시조에 대한 문헌 기록상의 정착이 오래 걸리는 현상은 우선 중국의 제왕조가 동이 諸國의 사적에 무관심했거나 또는 열전을 갖추는 과정에서 이전 사서의 내용을 존중하는 보수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백제전이 설정된 ?송서?·?남제서?·?위서? 백제전에는 단편적인 출자 기록은 있지만, 시조에 대해서 함구하는 이유가 ?삼국지?와 ?후한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참고한다면, 사서 편찬의 보수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동시에 전술한 바와 같이 동명 이외의 실질적인 건국 시조를 언급하지 않았거나 혹은 백제 왕실의 뚜렷한 건국 시조 관념의 형성이 늦게 형성되었던 까닭에서 기인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원인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동시에 고려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건국 시조 구태의 출현 과정을 이해해 보자. 우선 ?위서?-?주서?로 이어지는 북조계 사서의 일관성 속에 ?주서?는 ?위서?와 같은 ‘부여 별종’ 기사와 더불어 남조계 사서의 ‘마한(삼한)의 속’이라는 내용을 연결하여, 최종적으로 ‘백제의 선은 마한의 속국이자 부여의 별종이다’라고 하여 백제의 지정학적 내력과 출자를 정확히 소개하였다. 그리고 ?주서?에서는 여기에 ‘구태라는 이가 대방에서 국가를 시작하였음’을 부기하고 있다. 그런데 백제는 위(386~550)와 통교하며 지난 시대의 자취를 갖추어 열거(具列往代之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서?에는 그들의 건국 시조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위의 뒤를 이은 북주의 사서 ?주서?에서는 구태가 대방에서 국가를 건국하였음을 명기하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이 논의의 핵심이 될 수 있는 곳이다.

중국 정사 동이전에 실린 백제전의 시조 관련 기사의 등재 양상만을 고찰하여 볼 때, 백제는 북위와 교류하며 그들의 선으로 부여를 언급했다. 물론 추론이지만 여기에 부여족의 공동 시조인 동명을 함께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백제가 북주와 교류할 때는 여기에 실질적인 건국자로서 구태를 언급하였다. 이러한 ?위서?와 ?주서?의 시조 관련 기사의 차별상은 당시 백제 왕실이 지닌 시조관의 변화를 일정부분 반영한다. 곧 위대에는 백제의 지배층이 백제국의 선으로 부여와의 관계만을 언급하였는데, 주대에는 시국자로서 구태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 구태의 위상은 바로 위대 말로부터 북주 존속기에 정립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주서? 백제전을 통해 구태가 백제의 건국 시조로 정립되거나 전해진 구체적인 시점을 찾아보자. 우선 ?주서?는 북주의 존립기인 557~581년간의 짧은 시기를 서술 대상으로 하나 異域傳에 따르면 西魏(535~556)와 북주의 자료를 정리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주서? 백제전은 北齊에 백제왕 隆(제25대 무녕왕)이 사신을 보냈던 것과 北周(建德 6년 ; A.D. 577 ; 백제 제27대 威德王 24년 / 宣政 元年 ; A.D. 578 ; 백제 위덕왕 25년)에 누차 사신을 보낸 것을 기록하며 마무리된다. 이를 문면 그대로 이해할 때 본 전의 관련 기사는 제25대 무녕왕으로부터 제27대 위덕왕대의 정보로부터 취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주서? 백제전 융의 사신 파견 기사는 ‘齊氏擅東夏 (百濟)其王隆亦通使焉’이라 되어 있지만, 북제의 건국 연대는 550년이고 무녕왕 륭은 523년에 崩하였으니 중대한 착오가 있다. 대체로 본서의 찬자가 북제의 국명을 착각할 가능성보다 백제왕의 이름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북제에 사신을 보낸 백제의 왕은 성왕 또는 위덕왕일 것이다.

그럼에도 일차적으로 무녕왕대 구대를 건국시조로 하는 관념이 성립될 수 있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그것은 무녕왕과 성왕대에 ?삼국사기?나 ?양서?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와 양의 사신단이 상호 왕래하였다. 그런데 상술한 바와 같이 ?위서?와 ?양서?의 동이전의 서술 패턴을 감안할 때, 아마 무녕왕대 백제의 건국 시조가 구태였음이 정립되었다면 이 내용이 양에 전해졌을 것이고, ?양서?나 「양직공도」 등에 기록되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양서?나 「양직공도」 등에서 구태에 대해서 논한 바 없다. 물론 양 기록이 남조계 사서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틀 속에 구태가 부여와 밀착되어 있던 인물이므로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무녕왕대 구태의 시조 전승이 존재하여 전달되었다고 볼 만한 뚜렷한 근거도 없다.

그렇다면 보다 가능성있는 왕은 성왕과 위덕왕이다. 누차 지적되었듯이 ?주서? 백제전에 백제의 5방을 열거하며 북방=웅진성이라 한데서도 당시 자료가 성왕 16년(538)에 이루어진 사비천도 이후의 것임을 시사한다. 특히 ?주서? 백제전 대상 시기의 백제 왕 중에 구태묘의 성립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받을 만한 왕은 성왕이다. 주지하다시피 성왕이 사비 천도와 더불어 이룩한 치적에 대해서 이미 많은 연구 성과들이 제시되어 있다. 특히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성왕대의 정치 개혁 중에 국가적 차원에서 중국의 예법에 입각한 종묘제가 마련되며 구태가 건국시조로서 출현했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과 국내의 기록에는 성왕이 양에 거듭 사신을 파견했음을 기록하고 있으나 북주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없다. 단지 북주에는 위덕왕이 2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런데 위덕왕은 ?北齊書?를 참고하면 571년 북제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북제는 거듭 위덕왕을 ‘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로 삼았다. 이로 볼 때 ?주서? 백제전에 북제에 사신을 파견한 왕은 무녕왕 隆이 아니라 위덕왕일 것이다. 더구나 ?수서?와 ?삼국사기?를 보면 위덕왕은 새로운 통일 왕조인 수에도 거듭 사신단을 보내며 대륙과의 외교 관계에 많은 힘을 쏟았다.

마지막으로 隋 文帝 開皇 원년(581)부터 煬帝 大業 14년(618)까지 38년간의 역사를 魏徵과 長孫 無忌 등이 태종의 명을 받들어 당 정관 10년(636) 완성한 ?수서?의 「백제전」을 간략히 보자. 본서 백제전의 전반부에는 민족지적 서술을 후반부는 외교 관계 중심으로 開皇(A.D.581~600 ; 백제 제27대 위덕왕 28~제30대 무왕 1년)초 백제왕 餘昌(위덕왕)의 사신 파견·개황 9년(589년 ; 위덕왕 36년)·개황 18년(598년 ; 백제 혜왕 1년)·大業 3년(607 ; 백제 무왕 8년)·대업 7년(611 ; 무왕 12년)·대업 10년(614 ; 무왕 15년) 등의 사신 왕래를 기록하고 있다. 백제 시조에 대해서는 그 先代가 고려국에서 나왔음과 더불어 동명 신화를 기록한 후, 동명의 후손인 구태가 대방에 시국했음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마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건국자 온조의 父가 고구려를 건국한 朱蒙이며, 온조가 동명왕묘를 시조묘로 삼아 제례하던 양상과 흡사하다. 그러나 ?수서?에는 온조가 구태로 대치되어 있고, 더불어 요동태수 공손도와 결혼한 부여왕 위구태의 행적을 부기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백제의 先世와 建國에 관련하여 唐初 집중적으로 편찬된 ?양서?-?남사?와 ?수서?·?주서?-?북사?로 종합된 두 종류의 기록은 南北朝時代 史書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대세이다. 이는 7세기 수당시기에 존재한 인식의 표출이며, 특히 ?수서? 백제전의 동명신화는 백제로부터의 傳聞에 의거하였다거나, ‘시조 仇台說’은 7세기에 비롯된 인식으로 수대에 이루어진 삼국과의 교섭에서 확보한 풍속 정보를 바탕으로 편찬된 ?諸蕃風俗記? 혹은 ?諸蕃國記? 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수서? 백제전에는 시조 동명과 시국자 구태가 병립화 내지 이원화되어 있다. 다음 장에서 후술하겠지만 신이한 탄생담을 지닌 시조 동명과 시국자 구태가 분리 설정되는 양상은 바로 중국적인 예제에 따른 시조관과 태조관에 입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 방식은 상기 견해들을 전적으로 인정할 때, 백제 위덕왕대로부터 무왕대에 이르는 수대(581~618)의 전시기에 걸친 양국의 외교 관계를 통해, 이 시기 백제 왕실의 시조관 및 태조관이 전달되어 본 서에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볼 때, 중국 정사 백제전에 나타난 백제의 선대와 실질적인 건국자에 대한 기록은 ?주서?와 ?수서?의 사료적 가치가 가장 높다. 이러한 상황 하에 백제전에 반영된 백제 지배층이 지닌 시조관의 출현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본다면, 일찍부터 백제 지배층은 그들의 선을 부여에서 출자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성왕대 구태를 실질적인 시국자로 삼아 國城에 구태묘를 설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바로 위덕왕대 북주와 이후 수와의 외교 관계 속에 전달되어, ?주서?에 仇台가 始國하였고 더불어 구태묘를 세우고 이곳에 제례했음이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서? 백제전에는 시조인 동명과 시국자인 구태를 이원화하였는데, 이는 중국적인 예제의 수용에 따른 백제 왕실의 시조관과 태조관이 정립되었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서?와 ?수서?에서 정립된 동명과 구태의 시조 전승은 ?통전? 및 ?당회요? 등 당 중기의 문헌 그리고 ?태평환우기?·?책부원구? 등 북송대까지도 이어진다.

 

 

Ⅲ. 仇台廟의 成立과 始國者 仇台

 

1. 三禮의 導入과 仇台廟의 成立

 

지금까지 중국 정사 백제전을 분석해 본 결과 대체로 위덕왕대 북제와 북주에 구태가 시국자로서 알려졌고, 이에 당 정관 연간에 편찬된 ?주서?에 기록될 수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를 기반으로 본 장에서는 백제사에 있어서 시국자로서 구태의 위상이 형성된 시기를 추적해 보자. 근래에 제시된 견해를 보면 백제 건국시조를 동명으로 보는 신화는 근초고왕대의 서기 편찬과정에서 최종 성립되었다가, 5세기초 부여의 멸망과 고구려와의 대결 속에 시조 동명과 건국시조를 분리하여 왕실의 혈연적인 연관 속에 구태(=온조)전승이 출현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기 제시된 학계의 견해와 상기 분석을 기반으로 백제 성왕대 중국적인 예제의 도입 속에 기존의 전통적 시조관과는 다른 입장에서 구태가 시국자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고 동시에 구태묘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제8대 고이왕대 설치되었다는 좌평제도나 16관등제를 포함한 22부 제도가 정비된 것은 사비 천도를 통해 나라를 재건하고자 했던 성왕의 치적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성왕대 이룩된 22관부 등에 대한 기록이 중국 정사 백제전에 처음 실린 사서도 ?주서?이다. 곧 성왕대에 정비된 백제의 중앙 관제가 위덕왕대부터 꾸준히 이루어진 북제와 북주와의 외교 관계 속에 전해져 ?주서?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론적이지만 이러한 이해 방식은 성왕대 시국자로서 구태 위상의 정립과 더불어 구태묘가 설치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이 중국에 알려져 ?주서? 백제전에 기록되는 방식과 동일하다.

그러면 성왕대에 이르러 먼저 구태묘가 설치될 수 있었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 성왕이 정력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관제 정비를 통한 중앙집권화 시책은 바로 양 왕조를 통해 유입된 예학과 관련된다고 한다. 특히 다음 기사가 성왕대 예학 도입 노력과 그 과정을 잘 보여 준다.

 

“中大通 6年(534년)과 大同 7년(541년) 거푸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아울러 涅槃經 등에 대한 義疏와 毛詩博士 및 工匠 畫師 등을 구하므로 모두 공급하여 주도록 詔敕하였다.”

 

“陸詡는 어려서 崔靈恩의 ?三禮義宗?을 배웠는데, 梁나라 때 백제국이 表文을 올려 講禮博士를 구하니 詔書를 내려 육후로 하여금 가도록 했다. 그가 돌아오자 給事中, 定陽令을 제수했다. 陳의 天嘉年間(560~566)初에 그는 始興王 伯茂(세조의 2자)의 侍讀이 되고, 尙書 祠部郞中으로 옮겼다.”

 

당시 성왕은 양에 열반경과 모시(강예)박사 등을 요청하여 호응을 받았는데, 특히 예학과 관련해서는 백제에 파견된 육후에 대해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당시 육후가 익혔다는 ?삼례의종?은 현전하지 않아 ?주례?의 天神·地祇·人鬼의 3禮를 가리킨다는 이설이 있지만 ?주례?·?예기?·?의례?의 뜻을 풀이한 서적으로 이해되며 아마 이상의 ‘삼례’를 백제에 전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그가 귀국해서 진으로부터 받은 사부낭중의 직책은 교사나 종묘 제의를 담당한 사부의 장관으로 4품관이었다. 이를 통해 육후가 국가 예제의 전문가였으며 백제 파견 시 국가 제사에 대한 조언과 사전 정비에도 일익을 담당했을 것으로 이해한다. 더구나 남북조 시대의 남조에서는 삼례에 대한 연구가 매우 유행했을 뿐 아니라, 특히 당시 미증유의 성세였다는 양 무제대(502~549)에는 예학 발달 사상 하나의 정점을 이루던 시기라고 한다.

더구나 학계에서는 구태묘의 종교적 위상을 중국적인 종묘로 파악하고 있어 ?예기? 등의 제례 규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국성에 시조 구태묘를 세우고 일년에 4회에 걸쳐 제사지냈다.”는 ?수서?·?북사?·?한원?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종묘에 대등될 수 있다는 견해가 일찍이 제시된 바 있고, 웅진 천도 이전의 동명묘는 부여족이 표방하는 공동의 시조신을 숭배하였지만, 사비 천도 이후의 구태묘는 諸侯宗廟之祭의 四祭에 비교되는 백제왕실의 종묘적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또한 근래 거듭하여 구태묘의 설치는 무녕왕계를 중심으로 국왕 직계를 중심으로 하는 배타적인 왕족의식 속에 왕실의 종묘로서 구태를 시조로 삼아 위덕왕대에 정기적으로 제사지냈다는 견해들도 제시되어 있다.

또한 구태묘는 백제의 중흥조 고이왕으로 여겨지는 구태가 한성시대말 개로왕대 대고구려 악감정이 고조되며 왕실의 권위와 자존의식을 고양키 위해 백제의 실질적 건국주이자 시조신으로서 고이왕, 즉 구태묘에 대한 제사로 구체화되었거나 사비시대 백제왕실의 직계조상으로 여겨진 구태를 부각시키고 구태묘를 설치 치제하였다고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백제 성왕 전반기, 사비 천도를 전후하여 양으로부터 오제신앙을 수용하며 사전의 개편을 단행하였는데 이때 구태묘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동명묘가 위치한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부여는 고구려에 병합되었으므로 동명묘의 부활에 의미를 둘 수 없는 백제 왕실이 새로이 부여계 신격에 해당하는 사당을 건립하니 그것이 구태묘라는 견해도 있다.

?일본서기?를 보면, 관산성의 패배 이후 사신으로 갔던 왕자 惠가 백제 부흥의 방책을 물었을 때, 일본의 蘇我卿이 웅략천황 때에 왜의 권유에 의해 백제가 건방지신을 모시고 제향하여 누란의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하며 다시 국가를 세운 신에 제향하면 국가를 구할 수 있다고 조언한 기록이 있다. 본 서의 건방지신의 실체는 일본의 건국신으로 이해하기도 했으나, 백제의 건국신 내지 백제 왕실의 조상신이라는 견해도 있으며, 구체적으로 동명으로 보기도 한다. 만일 건방지신이 동명이라면 왕계의 분지화 이후 동명묘보다 구태묘를 중요시하던 백제 왕실의 상황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와 상관없이 구태묘를 서술하고 있는 ?수서?나 ?북사?에는 구태가 동명의 후손임이 명시되어 있어 양자를 동일시 할 수 없다. 기능적으로 동명묘와 구태묘는 모두 백제의 시조묘로 이해될 여지도 있지만 동일체로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동명묘에 대한 제례는 제18대 전지왕대를 마지막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한강 유역 상실이후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동명묘 제례는 신화상에 동명이 도래하여 건국한 곳에 세워져 있었으므로 한수 유역 상실 이후 더 이상 제례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하거나, 반고구려의식의 강화와 더불어 오랜 세월과 왕계의 변천 등에 의해 시조의 감화력이 약화된 결과라던가 남천 이후 금강 유역의 토착세력들을 지배 세력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동명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서 결과적으로 동명묘제가 쇠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태묘는 전통적인 시조관에 입각한 동명묘와는 구별될 만한 오히려 중국식 예제와 관련된 종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성왕대 수용된 ‘삼례’ 중에서 종묘의 대상으로 시조 내지 태조에 대한 관념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 자료들을 찾아보자.

 

“天子는 七廟이니 三昭 三穆과 太祖의 廟로써 七이 된다. 諸侯는 五廟이니 二昭 二穆과 太祖의 廟로써 五가 된다(鄭玄云 太祖는 始封之君으로 王者의 後는 始封之君廟로 삼지 못한다). … 天子 諸侯의 宗廟 祭祀는 봄에는 礿, 여름에는 禘, 가을에는 嘗, 겨울에는 烝이라 하는데, 天子는 天地에 제례하고 諸侯는 社稷에 제례하며 大夫는 五祀에 제례한다.”

 

“禮에 따르면 王이 아니면 禘하지 아니하니 왕은 그 祖의 (신이하게) 태어난 바에 의해 그를 配享하고 禘한다.(무릇 大祭을 일러 禘라고 하는데, 大祭는 그 先祖의 태어나는 바로 인해 天에 郊祀를 지낸다. 王의 先祖는 모두 大微五帝의 精에 感應하여 태어난다) 諸侯는 그 太祖에 (제사가) 미친다(太祖는 受封之君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즉위 2년(524) 양 고조로부터 ‘持節都督百濟諸軍事緩東將軍百濟王’으로 책봉받았던 성왕이 541년 백제의 요청으로 도래한 육후의 도움 하에 ?예기?에서 규정한 제후의 격식대로 종묘를 구성하고자 했다면 소위 오묘의 설립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예기?에 따르면 제후의 오묘는 二昭二穆과 太祖之廟로서 구성되며, 이에 附註한 後漢代의 鄭玄(A.D. 127~200)에 따르면 태조는 ‘始封之君’이다. 이보다 앞선 前漢代 예학의 대가인 韋玄成도 天子의 경우에는 ‘始受命의 王’, 諸侯의 경우에는 ‘始封의 君’을 太祖로 정의했다. 물론 백제에서 오묘제를 시행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구태묘가 시조묘 동명묘를 대치하는 시조묘 또는 종묘로서의 기능을 가졌다면 구태묘의 주인공은 바로 오묘에서 수위를 점하는 태조와 연결될 수 있다.

 

2. 始國者 仇台의 史的 實體

 

역설적이지만 성왕대 중국적 예제의 도입 속에 동명묘인 시조묘를 대치하며 종묘로서 구태묘가 설립되었다면, 새로운 예제 관념에 입각한 인물이 그 위상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종묘제와 관련된 ?예기?와 후술한 ?의례? 규정을 참고해 보면, 태조는 결국 ‘시봉지군’이므로 당시 이러한 입장에서 백제 태조로서 책정될 수 있는 인물은 우선 무녕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재위 12년(512)년과 21년(521) 거듭 양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에 521년 12월 양 고조가 무녕왕을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으로 책봉한 바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중국으로부터 책봉받은 백제왕이 있었지만, 양에서 파견된 육후의 존재를 볼 때, 타왕조가 아닌 양으로부터의 시봉지군인 무녕왕이 태조로써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녕왕(휘는 斯摩·隆)과 구태를 동일시할 만한 사적이 전혀 없으며, ?주서? 백제전에 백제왕 융(무녕왕)이 북제에 사신을 보내왔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주서 편찬자들은 구태와 무녕왕을 동일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梁은 건국 직후 武帝의 皇考를 文皇帝로 추존하고 종묘의 태조로 삼았으며, 郊祀에서도 配祀했다. 이러한 양의 경우에 비추어 본다면 무녕왕의 父도 종묘의 태조로 배향될 수 있다. 그런데 무녕왕의 出系가 기록마다 달라 어려움은 있지만, 일단 ?삼국사기?와 ?양서?·?남사? 등에는 무녕왕의 부가 동성왕으로 휘가 牟大였다. 모대는 ?양서?에 牟太로 표기되기는 등 구태와 음상사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百濟新撰?을 전거로 ?日本書紀?에는 무녕왕이 (문주왕의 아우) 琨支王子의 아들로서 末多王(동성왕)의 異母兄이라고도 하며,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설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이설에 대해 武寧王陵의 발굴 이후 출토된 買地券의 生沒年代를 참고하여 ?일본서기?의 내용이 사실에 近似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고, 이후 매지권의 내용과 ?일본서기?의 무령왕 생몰연대가 일치함을 들어 무녕왕은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라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현재 당시 중국 사료에 나타나는 백제왕계 인식은 外交上의 관점에서 처리된 철저한 直系父子相續王系라는 점에서 그 사적 가치가 의심된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 시기를 기록한 ?양서?나 ?남사? 등은 동성왕과 무녕왕의 관계에 대해 함구하는데, 이는 무녕왕의 형제 상속에 따른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백제왕실의 의도적인 침묵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한다. 만약 이러한 논지가 과거 사실에 적중한 것이라면 무녕왕의 子로서 왕위에 오른 성왕은 양의 후원 속에 중국의 예제를 수용하는 가운데, 무녕왕의 실제 아버지 곤지가 아닌 부자 직계의 정통성을 천명하며 동성왕(모대·모태)을 태조로 내세운 결과, 중국 사가들에게 모태가 시국자로 이해되었을 수 있다.

사실 선대 군왕에게 후사가 끊겨 방계에서 왕위를 잇게 하는 入繼大統의 원리는 입계한 군왕과 선대 군왕 사이에 종법적 부자 관계를 설정케 하여 국가 권력의 지속성을 도모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이러한 경우 종묘제에서 親廟를 결정하는 것은 가변적인 현실 정치 상황, 곧 신왕계의 왕권 강화와 이에 대한 반대파의 견제 와중에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특히 입계대통한 군왕의 生父를 친묘에 포함시켜야 하는 문제 등은 禮制가 중국 황실에서 본격적으로 적용된 前漢代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송대와 원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의 논쟁거리였다.

이외에도 약간의 추론을 더한다면 ?후한서? 부여전에는 이전부터 漢에 대해 부여가 조공하였지만 永寧 원년(A.D. 120) 嗣子 尉仇台가 와서 조공하자 天子가 위구태에게 印綬와 金綵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冊封印綬와 朝服衣幘의 賜與를 통한 외교 관계의 수립은 중국이 漢代로부터 주변 조공국과의 관계에서 널리 이용했던 정형화된 외교적 책봉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嗣子인 위구태는 조공시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한의 천자로부터 인수금채를 받는 와중에 책봉받은 최초의 부여 왕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위구태는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모두 인명이 전하는 최초의 부여왕으로 그의 행적은 유독 부여사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정통 왕조인 한으로부터 부여사상 시봉지군이라고 할 수 있고 후대에까지 그 행적이 널리 전하는 위구태를 부여족의 일파가 건국한 백제 왕실이 중국적인 예제에 입각해 종묘를 구성하며 태조로 옹립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추론이 과거 사실에 적중한 것이라면 ?수서?에서 ?삼국지?상에 보이는 부여왕 위구태의 행적(공손도의 딸과 혼인)을 백제 시국자 구태의 행적으로 부기하였던 사실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상기한 동성왕 모대 또는 부여왕 위구태 등이 삼례에 입각한 종묘의 구성 과정에서 태조로 추존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논란의 여지가 남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적인 예제의 수용 속에 새롭게 시조 내지 태조의 위상을 가진 인물로 비교될 만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신라의 제13대 未鄒王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제36대 惠恭王代 五廟制가 정비되며(?삼국사기?에는 始定으로 표현) 미추왕을 김성 시조로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곧 오묘의 수위인 태조위에 김씨왕으로서 始登王位(始封之君)한 미추가 시조로서 새로이 인식되어 모셔졌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삼국유사?를 편찬한 一然은 미추왕에 대하여 ‘그의 陵을 始祖堂이라 하는데 그가 시등왕위한 까닭이며 후대의 金氏 諸王이 모두 미추를 시조라 여겼다.’고 언급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해 방식이 구태와 구태묘에서 적용될 수 있다.

중국적 예제에 따르면 太祖와 始祖는 엄격한 구분이 가능하다. 그런데 ?주서?나 ?수서? 등의 백제전에 나오는 구태는 ‘시국’하였다고 하여, 오히려 논자에 따라 시조의 위상에 더 가깝다고 이해할 소지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대 백제 지배층이 지닐 수 있는 시조 관념의 이해가 필요하며, 이는 당연히 성왕대 수용된 ?삼례? 중의 하나인 ?의례?를 참고할 수 있다.

 

“諸侯(의 제례)는 그 太祖에까지 미치고 天子(의 제례)는 始祖의 말미암아 나온 바에 미친다”(鄭玄 註 太祖는 처음 冊封받은 君이며 始祖는 神靈에 感應해서 태어난 자이니 稷과 契같은 경우이다).

 

여기에도 정현의 주가 있는데 제후는 천자에게 冊封받는 존재이므로 최초의 책봉자인 태조로부터 그 신분이 비롯되므로 그 태조까지 제사를 지내고, 천자는 시조의 (신이한) 탄생에서부터 그 신분이 비롯되므로 그러한 시조까지 제례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로 파악된다.

당시 백제왕은 양의 천자에게서 책봉받는 候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므로 천자의 격에 맞출 수 없지만, 만일 ?주서? 백제전의 편찬자들이 정현설에 입각하여 구태를 백제의 시조로 인식했다면 구태는 ?예기?나 ?의례?에서 언급하는 시봉지군인 ‘태조’가 아니라 신이한 탄생을 가진 ‘시조’로 간주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주서?에서는 구태가 대방에서 시국했다는 기록뿐이다. ?주서?의 관련 내용이 당시 백제 지배층의 시조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면, 이는 ?삼례?를 수용한 성왕대의 백제 왕실이 구태를 신이한 탄생담을 가진 시조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대상 시기는 후대이나 동시기에 편찬된 ?수서?에도 구태에 대해서는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으며 공손도의 딸과 혼인했다.’는 것 이외에 신이한 탄생담은 없다. 그런데 ?수서? 백제전에는 신이한 탄생담을 가진 동명신화가 구태의 시국 앞에 기록되어 있다. 곧 본 전에는 중국의 전통적 시조와 태조관에 입각한 것처럼 신이한 탄생을 가진 동명을 ‘先’(시조)으로, 구태를 ‘시국’자로 분리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는 ?수서? 편찬자가 임의로 설정한 결과일 수 있으나, 위덕왕대로부터 무왕대에 이르기까지 백제와 수의 활발한 외교 관계를 감안하면 오히려 백제 왕실이 지닌 시조관이 전해진 결과일 것이다.

곧 성왕대 전래된 ?삼례?에 보이는 중국의 시조관과 다를 바 없는 동명에 대한 시조관이 백제와 수의 외교 관계 속에 전해졌던 것이다. 물론 신이한 출생과 행적을 가진 시조관은 오로지 중국적인 시조관만은 아니며, 오히려 동명신화는 부여족 고유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국 정사 백제전만을 고려해 볼 때, 물론 부여족 고유의 것이나 외형상 중국적인 예제에 입각한 신이담을 지닌 백제의 시조 동명과 시봉지군(태조)으로 시국자로 인식된 구태가 중국 사서에 정착된 것은 ?수서? 「백제전」이었다. 그러므로 후대의 중국 사가들은 이러한 ?수서? 백제전의 시조 및 태조관을 전적으로 인정하여 여러 사서의 백제전에 이를 별다른 變改없이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백제사에서 시국자로서 구태와 직결될 만한 사적을 가진 인물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므로 일찍이 구태를 부여왕 위구태로 이해하거나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인 優台로 파악하였고, 근래에 고이왕·구수왕·비류왕·근초고왕·우태·온조왕 또는 수장의 일반명사이자 온조왕 등 백제사 속의 왕들에 비정하거나, 막연히 동명후예로서 실존했던 온조계 왕실의 태조라거나, 인명상 부여계 인물, 부여 성씨에 대한 이표기로 보는 견해 등등이 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이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 많은 이설이 있으나 현재까지 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얻는 견해는 없다. 다만 제26대 성왕대 건국 시조로서 인정된 구태묘가 설립되었고 제27대 위덕왕 이후 왕계의 변화가 없었음을 인정할 경우, 멸망기인 제31대 의자왕대까지 구태는 당연히 건국시조로서 그 위상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제사지에 거듭 실린 구태에 대한 편찬자들의 소감은 당시까지 전승되어 그들이 참고할 수 있었던 국내측 사서에 백제 시조로서 구태란 인물에 대한 기록이 전적으로 부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는 곧 백제 멸망기나 그 후 백제 지배층이 구태라는 인물을 시조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구태의 실체에 대해 필자는 성왕대 양으로부터 수용한 삼례에 입각해 종묘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기존 백제의 전통적인 시조관과 상관없이 출현한 인물로서 동성왕 모대 또는 부여왕 위구태 중의 일인에 비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양자는 백제사상 실질적인 건국자로서의 위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왕대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 시국자 구태가 지닌 사적 위상의 허구성으로 인해 종묘에서 훼철된 결과, 멸망기나 그 이후 전혀 사적에 남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Ⅳ.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