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 倻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제7의 가야, 다라국

吾心竹--오심죽-- 2010. 2. 2. 12:48

 글쓴이 : 배달국   ( 2008-06-16 14:07:50 , Hit : 243 )  
제목 :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2> 제7의 가야, 다라국-상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2> 제7의 가야, 다라국-상
대가야·신라와 함께 백제 인근의 저명한 나라로 기록
합천 쌍책 다라리서 대규모 고분군 발견
일본서기 기록 일치
여러 가야국·백제 신라와 활발히 교류

 
  하늘에서 굽어본 경남 합천의 옥전고분과 황강.

일곱 째 가야?

'제 7의 가야, 다라국(多羅國)'을 아십니까? 조금 오래 되긴 했습니다만, KBS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되었던 고대사 다큐멘터리의 타이틀이었습니다. 우선 '제7'이란 실제로는 12개 이상이나 존재했던 가야의 여러 나라를 '삼국유사'가 6가야로만 서술했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금관(金官), 아라(阿羅), 고녕(古寧) 또는 비화(非火), 성산(星山), 대(大), 소(小) 등의 6가야 이외에도 저명한 가야국이 있었음을 강조하여 시청자의 눈을 끌기 위한 카피였습니다. 물론 이미 720년에 편찬되었던 '일본서기'에는 12개 이상의 가야국명이 기록되고 있으니까, 일곱 번 째의 가야국이라는 표현에 그리 새삼스러울 게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보이는 많은 가야국들의 실체가 제대로 밝혀진 것도 없었고, 그 상세한 역사는 말할 것도 없이, 각국의 위치에 대해서조차 설왕설래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일본서기'가 전하는 가야국과 같은 이름의 땅에서 대규모의 가야고분군이 발견됐고, 발굴조사 결과 엄청난 내용의 가야 유물이 쏟아져 나왔던 겁니다. 따라서 잃어버렸던 가야왕국 하나를 분명하게 확정할 수 있게 됐다는 '발견의 기쁨'이 포함됐던 타이틀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라리의 다라국

이러한 고분군이 발견된 곳이 합천군 쌍책면의 다라리(多羅里)였고, 이렇게 찾아지게 되었던 나라가 다라국(多羅國)이었습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다라국은 6세기 전반에 함안의 아라국(阿羅國)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가야 여러 나라와 함께, 백제와 신라에 대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562년 무렵 신라에 통합되었던 북부 가야왕국의 하나였습니다. 다만 이러한 기록에서 보이는 다라국의 위세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라국에서 파견되었던 사신의 신분이 다른 가야국에 비해 낮았기 때문입니다. 낮은 신분의 인물을 보내, 높은 신분의 다른 가야국 사신과 동등하게 정책을 논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라국의 위상은 중국에까지도 전해집니다. 양나라의 무제가 백제 사신의 내왕을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에도 다라(多羅)는 대가야나 신라와 함께 백제 인근의 저명한 나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라국과 같은 지명이 합천의 다라리였고, 거기에서 엄청난 가야의 보물들이 발견됐던 겁니다. 물론 다라리라는 현재의 지명이 얼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신라 때에 합천이 대량(大良) 또는 대야(大耶)로 불렸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대량은 대라 또는 다라로 발음됐을 것이며, 대야는 대라와 통하는 말로, 크다는 대(大)와 많다는 다(多)의 뜻이 서로 가깝습니다. 더구나 고분군이 있는 성산리는 다라리의 이웃으로, 함안의 성산산성과 같이 성산(城山)이란 지명은 고대의 왕도(王都)에서 유래된 경우가 많습니다.

옥전고분군의 위치

이러한 다라국의 실체를 확인시켜주게 되었던 것이 옥전고분군의 발견과 발굴조사였습니다만, 옥전(玉田) 그러니까 구슬밭이라는 지금의 지명은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던 많은 옥구슬들로 다시 한번 확인되었습니다.

옥전고분군이 발견된 합천군 쌍책면의 옥전마을은 황강 하류가 굽이쳐 낙동강으로 나가는 물길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분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황강은 율곡면과 쌍책면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가, 상포나루에서 동쪽으로 돌아 성산리와 다라리를 지나고, 적포에서 낙동강과 합쳐집니다. 옥전고분군 코밑의 상포나루가 그렇고, 합류 지점의 적포는 상·중·하로 나누어질 만큼 낙동강 수로의 요처였습니다.

이러한 교통의 요지에 다라국이 위치했던 것은 필연이었고, 백제와 신라, 또는 창녕과 함안의 가야국과 활발한 교류를 가졌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다라국의 위상과 대외교류의 증거가 옥전고분군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 물적 증거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다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

 

글쓴이 : 배달국   ( 2008-06-16 14:08:36 , Hit : 223 )  
제목 :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3> 제7의 가야, 다라국-하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3> 제7의 가야, 다라국-하
소통으로 꽃피운 다라국 문화의 보고 옥전고분군
신라 축조법 닮은 4세기 경 목곽묘
5세기 중엽 유물엔 서역 물건도 보여 활발한 교역의 증거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경남 합천군 옥전고분에서 발굴된 말투구. 이곳 다라국 세력의 위상을 짐작케한다.
옥전고분군의 발견

요즈음의 발굴조사는 고속도로나 철도 또는 댐이나 주택단지의 건설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에 떠밀려 시행되는 긴급조사가 대부분입니다만, 다라국(多羅國)의 존재를 웅변해주는 옥전고분군은 보기 드물게도 학술적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되었습니다. 1984년 합천댐의 건설로 수몰될 황강 상류의 조사에서 많은 유적이 확인되자, 경상대박물관은 낮은 하류지역에는 보다 중요한 유적이 많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1985년 여름 지표조사를 통해 왕릉 급의 거대고분과 특이한 가야토기, 금동제(金銅製) 투구 파편 등을 수습하게 되자, 서둘러 대학의 예산 지원을 확보하고 발굴조사 허가를 얻어 본격 발굴에 착수하게 됩니다. 이후 모두 5차례의 발굴조사와 1차례의 시굴조사가 시행되었고, 그 결과는 조사개요 1권과 조사보고서 10권이라는 엄청난 분량으로 공표되었습니다. 발굴시작부터 보고서의 간행까지 17년이란 세월이 걸렸답니다. 발굴조사와 보고서 간행의 모든 과정을 이끌었던 경상대박물관장 조영제 교수의 회고담입니다. 요즘같은 세상에서 보기 힘든 끈기있는 노력의 산물로, 참여했던 연구자들과 합천군의 의지에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쏟아진 다라국의 보물들

발굴조사된 119기의 고분에서는 무려 3000여 점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형봉토분 9기, 목곽묘 80기, 석곽묘 37기, 석실묘 2기가 조사되었고, 그 안에서는 금·은·동 장식의 관(冠)·큰칼·투구·허리띠, 금귀걸이, 아라비아 계통의 로만글래스, 8벌의 철판과 철 비늘의 갑옷, 15벌의 투구, 6벌의 말투구와 2벌의 말갑옷, 호화로운 말안장 장식들, 많은 가야토기들이 출토되었습니다. 고분군 아래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는 합천박물관에 가시면 이러한 유물의 내용과 의미를 쉽고 자세하게 아실 수 있습니다. 합천박물관은 설립 동기가 그러했고, 거의 대부분이 옥전고분군의 내용으로 가득한 일종의 고분박물관이지만, 박물관 이름은 합천군 전 시대의 역사를 보여줄 것 같은 것으로 되었습니다. 다라국의 옥전고분군이라는 특징이 포함되지 못한 이름이라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만, 유적의 현장에 만들어진 군 단위 지자체의 박물관이라는 점이 소중합니다.

옥전고분군이 말하는 다라국사

옥전고분군의 규모나 유물상의 변화는 다라국의 발전상을 보여줍니다. 옥전에서 처음 만들어지는 고분은 4세기 전반경의 49·52·54호분과 같은 목곽묘입니다. 나무방 바깥을 돌로 채우는 축조법은 신라와 통하고, 함안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가 출토됩니다. 수장묘의 출현으로 보는 견해와 그렇지 않은 생각으로 나뉘고 있지만, 다라국사의 시작으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4세기말~5세기 초가 되면 23호 목곽묘와 같이 규모와 수량이 커지고, 갑옷과 투구, 말장식과 금제품 같은 새로운 문물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발굴자는 다라국 최초의 왕릉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머리를 황강이 낙동강으로 빠져나가는 남동쪽에 두고 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북향이나 풍수지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남동쪽에는 창녕의 비사벌국과 신라가 있는데, 굽다리접시 중에 창녕 것이 많고, 신라 것이 섞여 있는 것과 관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5세기 중엽의 M1호분이 되면 이전까지 5~6m에 불과하던 것이 20m 전후로 대폭 확대되고 돌방으로 변합니다. 돌방의 가운데는 벽을 쌓아 주인공과 부장품의 공간을 구분하게 되는데, 부장품 중에는 너무나 화려하고 이국적인 아라비아 계통의 로만글래스가 들어있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서역의 물건이 신라를 통해 들어 온 것으로 짐작되는데,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다라국 왕릉으로 생각해도 좋을 겁니다.

다라국은 5세기 후엽의 M3호분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관 밑에 쇠도끼를 가득 깔고, 14자루나 되는 큰칼 중에는 금동(金銅)과 은(銀)의 용(龍)과 봉황(鳳凰)으로 장식된 손잡이의 용봉환두대도도 여럿 있고, 금동제의 말안장과 금귀걸이도 나와, 최전성기 다라국왕의 위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6세기 중엽이 되면 M11호분과 같이, 공주의 백제고분과 같은 석실에서 금귀걸이, 금동장식신발, 연꽃모양 목관장식과 같은 백제 계통의 문물이 보입니다. 친 백제적이었던 고령 대가야의 마지막과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