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 倻

다라국`의 부활을 꿈꾸는 합천박물관

吾心竹--오심죽-- 2010. 2. 2. 12:35

lovelymoon | 2005-12-12 10:40

다라국`의 부활을 꿈꾸는 합천박물관
다라국`의 부활을 꿈꾸는 합천박물관
▲ 합천 박물관 정문
60년대 중반이었다. 내가 삼가 중학교에 다닐 적의 이야기로 벌써 40여 년 전의 일이다. 식목일이었던 것 같다. 그때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야산에 나무를 심으러 갔다. 그 산엔 수많은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을 파헤치는 사람이 있었다.

전직 면장이었던 아무개씨가 무덤에서 그릇을 파낸다고 했다. 그때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아무렇게나 파헤쳐진 이곳 무덤에서 토기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인근 마을에서는 토기 몇 점씩 집안에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소문도 들렸다.

지금의 기억으로는 왕릉 같은 큰 봉분은 없었던 것 같다. 주로 서민의 무덤이 아니었던가 싶다. 당시만 해도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조금도 없었던 때라 무덤 속에 들어있는 그 더러운 그릇을 왜 파내는 것인지, 그 더러운 그릇을 파서는 무엇에 쓰려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더구나 면장까지 지낸 사람이 무슨 할 일이 없어 공동묘지를 파헤치는 그런 더러운 짓을 하는지 우습기만 했다.

그 뒤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어느 대학박물관에서 삼가 고분을 발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많은 토기들이 없어지고 난 뒤였겠지만 그런데도 많은 토기들이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너무도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오천년 긴 역사에서 수많은 문화재가 이렇게 무지한 국민의 의식을 딛고 파헤쳐지고 소실되어 갔는가 보다.

▲ 용봉문 큰 칼자루 모양의 분수대

▲ 합천 박물관
2004년 12월 9일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에 합천 박물관이 개관됐다. 대지 7900여평에 연건평 435평,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이다. 국비 지원 등 88억 원을 들여 지었다. 이 박물관은 유물 전시실과 기획 전시실, 시청각실로 되어 있다. 마침 시청각실에 들르니 유인촌이 나오는 KBS 역사 스페셜 '황금칼의 나라 제7가야 다라국'을 방영하고 있었다.

다라국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외국의 역사책인 양직공도와 일본서기에는 전할 뿐이다. 양직공도는 6C 경의 기록으로 양나라 사신도이다. 합천군 쌍책면에 다라라는 마을이 있어 그때의 이름이 전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합천은 삼국시대(가야를 인정한다면 사국시대라고 해야겠지만) 가야가 있었던 곳으로 대양이나 대야, 다라가 같은 땅이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라국은 서기 400년 전후 고구려 광개토왕 남정 전후 성립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광개토왕의 말발굽을 피해서 신라의 한 세력이 이곳 옥전에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닐까.

서라벌 6촌의 한 축이었던 경주 정씨의 일파가 이곳으로 밀려나 새로운 나라 다라를 세운 것이라면 지나친 비약일 것인가. 옥전이 오랫동안 초계 정씨 문중의 소유로 내려온 것과는 관련이 없는 것일까.

여기 옥전에 얽혀서 전해오는 이야기로 문화 유씨 문중에서는 '유가야 죽지마라, 죽으면 정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곳은 정씨 가의 무덤으로 이곳에 묻히면 정가가 된다고 했으니 다라국은 초계 정씨의 왕국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옥전은 상당기간 초계 정씨의 선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옥전고분군

▲ 옥전고분군 안내도
1000여기가 넘는 옥전고분군, 지름이 20~30m가 넘는 무덤이 27기나 되는 것으로 보아 다라는 작지만 강한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이 작은 고을에도 하나의 강한 나라가 있었고 한반도 남동부에 6가야가 아닌 7가야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면 백성들의 곤궁이 얼마나 심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합천박물관 내부
옥전고분군은 1988년 7월 사적 제326호로 지정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토기류, 철제무기류, 갑옷, 장신구류 등이다. M2호분에서는 2000개가 넘는 구슬이 나왔다고 한다. 옥전이란 이름도 구슬밭이란 말이니 이곳에서는 오래전부터 밭에서 구슬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국 시안에서 진시황의 병마용을 농부가 밭에서 우물을 파다가 발견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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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문 환두대도
신라와 백제의 틈새에서 200년 이상 존속한 나라 다라는 황금칼의 제7가야로 독자적인 정치, 경제, 외교 활동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 작은 시골, 합천에 수천년 전에 이렇게 작아도 강한 나라 다라가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용봉무늬 환두 대도는 이래도 믿지 못하겠느냐는 듯 찬란한 황금빛을 뿜는다.

팔만대장경과 같은 기록문화를 남긴 우리 조상이지만 우리 역사 기록은 왜 이렇게 빈약한 것일까. 유물과 유적은 있는데 역사 기록은 거의 없다. 유물과 유적은 없앨 수 없었지만 책은 쉽게 없앨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삼가를 지나오면서 또 하나의 문화재를 만났다. 기양루다. 삼가면 금리에 있는 기양루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조선시대 삼가현청 안에 있던 관청의 부속건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일전쟁(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건물로 추정한다. 15C 조선시대 지방관공서를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때 지은 건물인지도 모른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드높아가는 요즘이지만 기양루 앞에는 규산질 비료가 방치되어 미관을 더럽히고 있다.
 
 
 
 
 
 


 
▲ 철제갑옷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때 삼가는 삼기현에서 강양군으로 바뀌었다. 기양루란 이름은 여기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 누각은 합천군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기와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2층 마루 둘레에 닭벼슬 모양의 난간을 둘러 안전과 미학을 고려한 것을 볼 수 있다. 연회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이 누각은 함양군 안의면에 있는 조선 태종때 세운 광풍루과 비슷해 보인다.

▲ 삼가면 금리에 있는 기양루

▲ 삼가면 금리의 기양루, 합천군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이다.
기양루 앞길을 건너 몇 걸음 안 되는 곳에 30여년 전에 지은 퇴락한 수정정이란 정자가 있다. 바로 그 옆에는 삼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비를 모아놓았다. 보호를 위해서 한 곳에 모은 것이긴 하지만 내 눈에는 가두어 놓은 것 같았다.

여기 비들 가운데 광해군의 치적을 담은 비문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대원군 이하응 공적 영세 불망비가 눈에 뜨인다. 뒷날 해독하는 기회를 기다리며 발길을 돌렸다.
내용출처 : 엠파스 블로그- 대한민국에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