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 倻

제7의 가야,다라국

吾心竹--오심죽-- 2010. 2. 2. 12:19

제7의 가야,다라국 | 다라왕국 2010.01.24 09:20 하늘사랑

 

실제로 12개 이상이나 존재했던 가야의 여러나라를 삼국유사가 6가야로만 서술했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금관,아라,고녕 또는 비화,성산,대,소등의 6가야 이외에도 저명한 가야국이 있었다.

이미 일본서기에 12개 이상의 가야국명이 기록되어 발굴조사 결과 가야고분군이 발견되었고,

엄청난 내용의 가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다라리의 다라국

고분군이 발견된 곳이 합천군 쌍책면 다라리였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다라국은 6세기 전반에

함안의 아라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여,가야 여러나라와 함께 백제와 신라에 대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562년 무렵 신라에 통합되었던 북부 가야왕국의 하나였다.

다만 이러한 기록에서 보이는 다라국의 위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왜냐하면

다라국에서 파견되었던 사신의 신분이 다른 가야국에 비해 낮았기 때문이다.낮은 신분의 인물을

보내 높은 신분의 다른 가야국 사신과 동등하게 정책을 논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라국의 위상은 중국에까지도 전해진다.양나라의 무제가 백제 사신의 내왕을 그린

양지공도에도 다라는 대가야나 신라와 함께 백제 인근의 저명한 나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다라리라는 현재의 지명이 얼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신라 때에 합천이 대량 또는 대야로 불렸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대량은 대라 또는 다라로

발음됐을 것이며,대야는 대라와 통하는 말로,크다는 대와 많다는 다의 뜻이 서로 가깝다.

더구나 고분군이 있는 성산리는 다라리의 이웃으로,함안의 성산산성과 같이 성산이란 지명은 고대의

왕도에서 유래된 경우가 많다.

 

옥전고분군의 위치

이러한 다라국의 실체를 확인시켜주게 되었던 것이 옥전고분군의 발견과 발국조사였다.

옥전,그러니까 구슬밭이라는 지금의 지명은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던 많은 옥구슬들로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고분군이 발견되었던 쌍책면의 옥전마을은 황강 하류가 굽이쳐 낙동강으로 나가는 물길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다. 고분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황강은 율곡면과 쌍책면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가,상포나루에서 동쪽으로 돌아 성산리와 다라리를 지나고,적포에서 낙동강과 합쳐진다.

옥전고분군 코밑의 상포나루가 그렇고,합류지점의 적포는 상.중.하로 나누어질 만큼

낙동강 수로의 요처였다.

이러한 교통의 요지에 다라국이 위치했던 것은 필연이었고,백제와 신라,또는 창녕과 함안의

가야국과 활발한 교류를 가졌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이런 다라국의 위상과 대외교류의 증거가

옥전고분군에서 확인되고 있다.

 

 

 

용봉문환두대도는 삼국시대에 가야국과 신라국에서 왕들이 소장했던 칼이다. 

끝부분에 봉황문양이 있어서 봉황문환두대도라고 한다. 환두대도를 고리자루큰칼이라고 하는데

장식으로 4가지 유형이 있다.  삼엽환두대도(세잎고리자루큰칼), 삼환두대도(세고리자루큰칼),

봉황문환두대도, 용봉문환두대도이다.

그 중에서 합천 옥전 M3고분 출토의 봉황문환두대도가 아름답다. 

이 환두대도는 고귀한 신분의 상징. 환두대도의 완벽한 복원은 첨단기술의 결집체

-뛰어난 문양의 아름다움, 칼날은 최소한 철판을 수십 회 접어 만들고, 문양의 섬세함, 둥근 고리와 그 주위의 여러 문양에 장시간의 노력, 최고 기술이 결집된 종합예술품이었다. 

 

 그러면 다라국의 성격은 무엇일까. 옥전고분군은 4세기 중엽에서 6세기 전반까지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유물과 무덤의 구조 등으로 볼 때,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진으로 흩어지던

금관가야의 세력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다라국을 세운 것으로 고고학계는 정리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여기서 출토되는 토기나 무덤 축조 방식이 김해와 부산지역에 있었던 금관가야의

그것들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앞 시기에 비해 무덤의 규모가 커지고, 부장 유물이 증가한 것으로 볼 때 이 시기에 다라국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는 해석이다.

 

다라국은 대가야와 비슷할 정도의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서로 연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서기' 흠명기 2년(541)과 5년(544)조에 보이듯이 이른바 제1, 2차의 '임나부흥회의'에 대가야와 다라국이 함께 참석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조 학예사는 "특히 회의에 참석한 나라들의 대표자 칭호를 보면 가락국, 안라국, 다라국만이 신하인 상수위, 이수위 또는 상한기, 하한기 등을 보내고 나머지 나라들은 국의 수장이 직접 가거나 수장의 아들이 갔다는 점에서도 가라국, 안라국, 다라국의 위상이 다른 나라들보다 높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