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 倻

김수로왕과 히미코 여왕 ‘부녀지간’

吾心竹--오심죽-- 2010. 2. 2. 13:32

일본 최초의 여왕은 가야인

2006 09/19   뉴스메이커 692호

가락국 시조 수로왕 설화와 스리랑카 비자야왕 설화 ‘이렇게 닮았다’

 

경북 고령읍 지산리에 있는 가야 고분군. <김영민 기자>


사마태(邪馬台, 일본어발음은 ‘야마타이’) 비미호, 또는 비미크 (卑彌呼, 일본어 발음은 ‘히미코’) 일여(壹與, 일본어 발음은 ‘이요’) 임나(任那)(일본어 말음은 ‘미마나(彌摩那)’ ) 등.

한국의 가야(伽倻)나 일본의 사마태국(邪馬台國)등 한일(韓日) 고대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명과 지명이 일본어 발음은 물론 우리말 발음과 똑같이 나타나는 나라가 있다. 바로 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비자야(Vijaya, 재임 기원전 543~504 )에 의해 싱할리 왕국을 수립한 스리랑카다.

비자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승리(victory) 또는 정복(conquest)의 뜻에서 정복자(Conquerer)로 발전한 비자야 왕의 이야기는 아시아권 정복개국설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힌다. 한반도에서 수만리 멀리 떨어진 스리랑카의 역사와 지리에서도 거의 똑같은 내용이 있다. 기원전 6세기 스리랑카 최초 왕 비자야 설화와 수백년 뒤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金首露, 42~199)왕 설화를 비교하면 그 수수께끼가 풀린다. 비자야 왕의 설화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바꿔 넣으면 정확히 일치

“인도 대륙 북동부가 고향인 한 공주가 사자와 사랑에 빠져 아들 비자야를 낳았다. 이 왕자는 행실이 불량하다고 추방당한다. 비자야는 인도땅을 떠나 추종자 700명과 함께 거북 모양의 선박에 올라타고 바다 건너 스리랑카 서부해안에 도착한다. 기원전 543년 비자야는 추종자에 의해 스리랑카 최초의 왕으로 추대되고 인도 최남부에 있는 타밀인의 판디야 왕국(Pandya Kingdom)에 왕비감을 청원, 타밀 공주 야쇼다라(Yasho dhara)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추종자도 타밀인 하녀와 결혼한다.”

김수로왕의 설화는 주지하다시피 “기원 42년 가야지역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하 수백명이 김해 구지봉(龜旨峰)에 모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하자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나왔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변했는데 김수로는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이 돼 ‘수로(首露)’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48년 인도에서 바다 건너 온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필자는 허왕후를 타밀 출신으로 본다)

두 설화를 비교하면 비자야 왕과 김수로왕 모두 거북과 관련있고 새 땅에 도래, 첫 왕국을 열었으며 추종자 수백명의 추대에 의해 초대 왕위에 올랐고 바다 건너 인도 땅에서 (타밀인) 왕비를 맞이한다는 점에 있어서 두 설화는 아주 비슷하다.
정복개국설화의 원형인 비자야 왕 이야기는 구전으로 동남아시아에 널리 펴졌으며 종국에는 한반도까지 영향을 끼쳐 수로왕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가야인이 이를 모방해 ‘대위법’에 의해 수로왕 설화 형성에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수로왕과 히미코 여왕 ‘부녀지간’

수로왕(42~199) 장남인 금관가야 제2대 거등왕(199∼253) 사이, 즉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중반에 걸쳐 재임했던 일본 최초의 여왕 ‘비미호(卑彌呼)’는 비자야 왕 시절 국무총리를 의미하는 ‘비미호(Pimiho)’ 또는 ‘비미크’(Pimiku, 대부분의 언어에선 ‘ㅎ(h)’ 와 ‘ㅋ(k)’는 음성학적으로 호환 가능)와 일치한다. 또 그녀가 통치했던 ‘사마태 (邪馬台)’는 비자야 왕의 수도 탐바판니(Tambapanni)에 국무총리가 주도해 건설한 왕궁의 이름 ‘사마테(Samate), 또는 ‘사마타이(Samatai)’와 각각 일치한다.

아울러 비미호 여왕이 죽고 잠시 남자 왕이 재위한 뒤 등극하는 여왕 ‘일여’(壹與, 일본어 발음은 ‘이요’)도 비자야왕의 조카로 스리랑카 제2대왕이 된 판두바사(Panduwasa, 재위 504~474 B.C.)의 부인 이름 ‘일여(Ilyo)’왕비와 일치한다.

비자야 왕 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나타나는 ‘비미호(비미크)’ ‘사마태’ ‘일여’ 등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 기록에 나오는 명칭이 일본어발음이 아니라 우리말 발음과 똑같다는 것은 일본이 가야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있음을 시사한다.

‘사마태(邪馬台)’ 국의 한자 ‘邪’는 일본어 음독으로 ‘자’로, 훈독으론 ‘요코시마’로 읽으며 예외적으로 감기를 뜻하는 ‘風邪’만 ‘가제’로 읽는데 ‘야마’로 읽는 경우는 邪馬台뿐이다.

당시 당시 최고 하이테크였던 철 제련 능력과 토기 생산기술를 갖춘 가야는 중국과 일본 등에 철을 수출하면서 동시에 기동력있는 항해술로 한반도 남부 및 일본 열도를 아우르는 막강한 해상세력으로 부상했다. 세계 최초로 고대 철제 말(馬)갑옷의 실물이 발견된 곳은 다름아닌 한반도 남단 가야다.

이는 일본땅에 가야의 분국이 있었다는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 1915∼1996) 교수가 1960년대에 내놓은 ‘삼한(三韓) 분국설(分國說)’과 일맥상통한다. 김교수의 제자인 조성희 박사도 ‘일본에서 조선 소국의 형성과 발전’(1990년)이라는 저서에서 혼슈(本州)섬 오카야마(岡山)현 기비(古備)지방에 가야의 소국이 있다고 주장했다.

가야와 일본의 관계 연구에 평생을 전념한 재야사학자 이종기 선생(1929~1995)은 김수로왕의 딸 묘견(妙見)공주가 서기 103년 거북선을 타고 규슈(九州)로 건너가 남동생 선견(仙見)왕자와 또 다른 가락국을 세우니 그것이 야마타이국이며 히미코 여왕이라고 주장한다. 가야의 한반도 남부지역과 규슈지역에서 발견된 파형동기(巴形銅器)나 신어문(神魚文)등이 거의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이도흠 교수(한양대 국문학과, 한국학연구소장)도 “고대 일본 첫 여왕인 ‘히미코(卑彌呼)’가 가야국 공주로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의 두 딸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3세기 일본 규슈 사마태국은 가야와 같은 2모작을 했고, 철기공방이 있는 점 등으로 미뤄 이는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민들의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특히 “일본은 한국 역사를 기술하면서 청동기시대 없이 석기시대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이어진 것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기 712년과 720년에 잇따라 편찬된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日本書紀)’ 등 일본인이 펴낸 고대 일본역사서에 두 여왕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들이 왜국 토착민을 무너뜨리고 왕국을 건설한 해외 도래인일 가능성이 커 아예 삭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선 비미호와 일여 얘기를 없애고 비미호를 신공황후(神功皇后)로 동일화하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120년을 삽입하는 억지를 피우고 있다. 연대(年代)도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양식있는 학자는 ‘일본서기’를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고 혹평한다.

일본의 일부 학자는 신공황후를 히미코와 동일한 인물로 간주하지만, 이는 여러 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첫째 ‘삼국사기’는 히미코가 173년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일본서기’ 기년으로 신공황후가 정권을 장악한 때는 201년이고, 2갑자 더한 연도로는 321년이라는 점이다.
가야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된 대가야 박물관. <김영민 기자>

일본 역사서에 여왕이 없는 이유

둘째, ‘삼국지’는 히미코가 결혼하지 않고 남동생의 보좌로 왕위를 유지했다고 했는데, 신공황후는 제14대 주아이(仲哀) 천황의 황후이며, 그의 아들 오진(應神) 천황을 낳았다.

셋째, 히미코는 공식적인 왜의 왕이고, 239년 중국의 위(魏)에서 내린 조서에도 ‘친위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공황후는 히미코와 동일 인물일 수 없다.

경악할 일은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를 지칭하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다라국(多羅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졸마국(卒麻國) 걸찬국(乞飡國) 사이기국(斯二岐國) 염례국(稔禮國) 탁순(卓淳) 탁기탄(啄己呑) 등 12개 소국(小國)이름이 비자야왕과 타밀 출신 둘째 부인 야쇼다라(Yashodhara) 왕비 사이에 낳은 12 자녀 이름과 일치한다. 영어로 표기하면 Kara, Anla, Tara, Kocha, Chata, Sanbanha, Cholma, Kolchan, Saigi, Yomrye, Taksun, Takkitan이 된다. 가야지역 12개 소국의 이름이 비자야 왕의 자녀 이름과 일치한 것은 당시 가야인이 비자야 왕 이야기를 금과옥조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당시 일본이 369년부터 562년까지 가야지역을 정복, 통치했다며 ‘일본서기’에서만 언급돼 조작으로 간주되고 있는 임나(任那)일본부의 ‘임나’, 즉 일본어로 미마나(彌摩那)도 비자야 왕이 수도 탐바판니에서 동부 내륙으로 들어가 개척한 마을 임나(Eemna)와 미마나(Mimana)등 인접한 두 마을의 이름과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임나(미마나)가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지역이 아니라 비미호 여왕의 통치 지역 ‘사마태국’ 부근에 있던 것이란 해석이 훨씬 합리적이다.
더구나 한 지역의 명칭을 두고 임나와 미마나 등 두 가지 한자표기가 존재한다는 것도 비자야 왕이 건설한 인접한 두 마을 이름을 하나로 묶으면서 나타난 결과로 분석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면 비자야 왕 설화가 어떻게 한반도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산스크리트어로 ‘승리자’를 뜻하는 비자야 왕의 설화는 기원전 6세기 새로운 땅에 세운 정복왕조설화의 원형이라 동남아시아 등에 널리 퍼졌다. 당시 해양로는 동남아시아및 중국을 거쳐 타이완(臺灣) 위쪽에 흐르는 흑조(黑潮·쿠로시오)난류를 타면 쉽게 한반도 남부와 일본 서부 해안까지 연결될 수 있어 비자야 왕 이야기가 극동아시아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토론토/김정남 통신원 namkimm@hanmail.net>
 
 
 
 
 
 
만남의 인연을 맺어준 허황옥
 
[한겨레] 천축국 공주

임찾아온 뱃길2만리


2천년 전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로 이 땅에 온, 현숙한 외방 여인

허황옥(許黃玉:허왕후)은 지금도 우리 속에 살아 있다. 2년 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에서는 36억 아시아인의 하나됨을 상징하여 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이 재현되었다. 해마다 치러지는 김해의 수로제에서 왕은 왕후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몇 해 전에는 인도의 한 점성가가 한국에서 차기

‘구국의 큰 별’은 가락 김씨 가문에서 나올 것이라는 솔깃한 점괘를 내려 대선

정국에 흥미를 더한 일도 있었다. 모두가 시조 할머니의 가호와 보우를 비는

발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허황옥은 살아 있는 설화의 주인공으로

오늘날까지도 맥맥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설화의 얼개를 보면, 16살의

아유타국(阿踰陀國:아요디야) 공주 허황옥은 하늘이 내린 가락국 왕을 찾아가

배필이 되라는 부모의 분부를 받들고 기원후 48년에 2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붉은

돛을 단 큰 배를 타고 장장 2만5천리의 긴 항행 끝에 남해의 별포 나룻목에

이른다. 영접을 받으며 상륙한 다음 비달치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는 장유사(長遊寺)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에 가서 상면한다.

하늘이 내린 황금알에서 태어나 배필도 역시 하늘이 점지할 것이라고 믿어오던

가락국 시조 수로왕은 허황옥을 반가이 맞이한다. 둘은 2박 3일의

합환식(결혼식)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온다. 그 후 140여 년을 해로하면서 아들

10명과 딸 2명을 두었는데, 둘째와 셋째에게 왕비와 같은 허씨 성을 따르게 하여

그들이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아들 가운데 7명은 지리산에 들어가 선불이

되고, 왕후는 189년 나이 157살에 생을 마감한다. 한국의 ‘국제결혼 1호’로 피의

만남(섞임), 곧 혈연이다. 그 만남이 있었기에 수백만 김해 김씨와 허씨가 왕후를

시조 할머니로 모시고, 오매불망 할머니의 고향을 찾아가기도 한다.

사실 허황옥설화는 수로왕의 천강난생(天降卵生) 같은 신화소는 거의 없고,

역사적 사실에 바탕하였거나 그것을 반영한 설화다. 단, 어떻게 그 시대에 멀고먼

인도에서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 올 수 있었는지, 왕후의 내한이나 불교적 행적을

말해주는 물고기 무늬나 석탑 등은 후세의 ‘조작’이 아닌지 등등 몇 가지 왕후의

정체성과 관련된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논란을 내용별로 묶어보면,

기원전 3세기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서 크게 번성한 태양조 불교국 아요디야에서

왔다는 설, 아요디야에서 중국 쓰촨(사천)성 푸저우(보주)를 거쳐 양자강 하구에서

황해를 건너 온 일족이라는 설, 타이 방콕 북부의 고대 도시 아유타와 관련이

있다는 설, 일본 규슈 지방에서 도래했다는 설, 기원초 중국의 전후한 교체기에

발해 연안에서 남하한 동이족 집단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종합하면, 다들

외래인이라는 데는 견해를 같이하고 있으나, 외국 어디인가에서는 크게 인도와

비인도의 두 지역으로 나뉜다.

달마가 서쪽에서 왔듯이 열여섯살 아유타국 허황옥이 서쪽에서 온

까닭은‥

‘고운임 수로왕과 백년해로 위해서’

불교와 차 씨앗을 싣고

붉은 돛배 남해에 닻내렸네


다들 나름의 전거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나, 몇 가지 현존하는 문헌기록과 유물들을

근거로 하는 인도설이 좀 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주로 상황론에 입각한

연역법을 따르는 비인도설 쪽 논리는 짐짓 미흡해 보인다. 철학과는 달리 역사를

연역법으로 추리하면 왕왕 빗나가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는 항시 일회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만남, 문명의 만남이라는 교류사관에서 본다면, 그녀가 어디에서 온

누구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우리는 세계와 어떻게 만났는가,

세계에 대한 우리 마음의 여닫이는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일이다. 설혹,

그녀의 정체가 허구라고 할지라도 우리네 선조들은 어떻게 그녀라는 ‘허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와 만나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제를 짚어보는 의미인 것이다.

허왕후는 혈연뿐만 아니라, 우리와의 불연(佛緣), 즉 부처님과의 인연, 불교와의

인연도 맺어주었다. 우리의 많은 고대국 건국신화에서 유독 가락국만이 그 건국이

불교와 관련지어진다. 수로왕은 건국한 다음해에 궁성터를 찾아다니다가

신답평(新畓坪)이란 곳에 이르러 이 곳은 비록 땅은 좁지만 16나한과 7성이 살

만한 곳이어서 궁성터에 적격이라고 말한다. 16나한이란 석가의 16제자이고, 7성은

도를 깨우친 사람들로서 모두가 최고의 불자들이다. 그리고 4년째 흉년이 들자

왕은 부처님께 청하여 설법을 하니 흉년을 몰아온 악귀들이 제거되었다고 한다.

가락국을 일명 ‘가야국’이라고 하는데, 이 ‘가야’란 말은 인도어로서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나 코끼리, 가사 등에서 그 어원을 찾고 있다.

수로왕의 이러한 행적은 불교국 아요디야의 공주, 허황옥과의 결합에 따라

가락국 불교의 초전을 더욱 굳혀간다. 특히 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 보옥선사는

가락국의 국사로서 불교의 가락국 초전에 디딤돌을 놓는다. 김해 불모산(佛母山)

장유사에 있는 선사의 화장터와 사리탑 및 기적비, 그리고 왕과 왕후가 만난 곳에

세워진 명월사(明月寺) 사적비에는 선사의 초전활동을 말해주는 유물과 기록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지리산에 들어가 왕후의 일곱 아들을 성불케 하고 칠불사를

짓기도 한다. 그 밖에 가락국의 불교 초전을 알리는 유적유물은 적지 않다. 이

모든 것은 왕후의 도래를 계기로 일어난 불사들이다. 이러한 불사들은 가락국에

국한되지 않고, 200년께는 딸인 묘견(妙見)공주를 통해 일본 규슈까지 파급되니,

백제 불교의 일본 공전보다 무려 250년이나 앞선 일이다.

비인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체로 이러한 불교의 가락국 초전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시대에 인도로부터 뱃길이 트일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서〉‘지리지’에 보면, 기원전 3세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때부터

중국은 남양 각지와 해상교역을 하며, 기원 전후에는 지금의

부남(扶南:베트남)으로부터 인도 동남단의 황지(黃支:칸치푸람)까지 해로가

개척되어 11개월이면 오갔다.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뱃길이 한반도 남해안까지 이어졌다고 한들, 무리 무근이라고 일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허황옥의 내도는 문물의 교류라는 또 하나의 결과를 가져왔다. 왕후가 소지한

옥합에는 수놓은 비단옷이나 갖가지 금은주옥의 장신구 패물과 함께 차의 씨앗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흔히들 9세기 초 신라 흥덕왕 때 대렴(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종을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보다 900년 전에 허왕후가 최초로

가져다 심은 차종에서 유명한 죽로차(竹露茶)가 자라났고, 머리, 귀, 눈을 밝게

한다는 등 가야인들이 구가한 차의 9덕은 오늘의 다도로 이어지고 있다.

묘견공주는 불교와 함께 차의 씨앗과 부채도 일본에 건네주었다고 한다. 수로왕은

왕후 일행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빚은 향기로운 술을 대접하고,

무늬와 채색이 고운 자리에서 잠을 자게 배려하며, 비단옷과 보화까지 하사한다.

왕후가 타고 온 배의 뱃사공 15명에게는 각각 쌀 열 섬과 비단 삼십 필씩을 주어

돌려보냈다. 가야인들의 열린 마음과 너그러움이 밴, 첫 인도인들과의 만남이고

나눔이었다.

왕후는 올 때 파신(波神)의 노여움, 즉 풍랑을 막고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배에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싣고 왔다. 높이가 120㎝ 정도밖에 안되는 이 자그마한

석탑은 고려 중엽까지는 김해의 호계사에 보존되어 있다가 지금은 허황옥릉에

인치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귀중한 석탑은 한낱 뭉그러진 돌덩어리

다섯개를 쌓아놓고 무슨 탑이냐고 하는 비아냥거림까지 받아왔다. 그러나 한

후손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오늘은 그 원상이 거의 복원되었다. 김해의 한 병원

원장인 허아무개씨는 200회나 넘게 탑을 찾았고, 돌이 우리나라에 없는

파사석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며, 탑은 초기 인도 스투파의 축소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렇게 보면, 이 석탑이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불탑인 셈이다. 허씨는

평범한 의사다. 역사와 그 해석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몫이다. 이와

같이 2천년 전 이 땅에 온 허황옥은 혈연과 불연, 그리고 교류의 인연을 맺어준

메신저와 교류인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와 함께 있다. 문명은 이러한 메신저와

교류인들에 의해 알려지며 서로 주고받는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