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 倻

대가야연맹(大伽倻聯盟)의 멸망(滅亡)

吾心竹--오심죽-- 2010. 2. 2. 13:46

第1篇 鄕土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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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야(伽倻)의 건국(建國)과 발전

  삼한사회를 모태(母胎)로 하여 성립.발전했던 백제∙신라와 북방의 부여족사회(扶餘族社會)에서 건국한 고구려를 합쳐 흔히 삼국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변한 12국을 모태로 하여 성립.발전한 가야사회도 여기에 포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삼국시대라는 개념에는 이전의 삼한사회에서 한 단계 발전하여 새로운 정치 사회를 지향하는 세습적(世襲的) 왕권이 확립되고 중앙집권적 율령국가(律令國家)로 성장.정립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 삼국 및 가야사회는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고 이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공방전(攻防戰)이 일어나 국경개념이 더욱 확실해져 갔다고 보겠다.
  ‘가야’라는 명칭은 출전(出典)과 시대에 따라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伽羅.迦羅).가락(伽落 .駕洛)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또 이들 가야제국들은 때에 따라 5가야.6가야 혹은 가라7국.포상8국.임라(任那)10국 등 연맹체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다만 중국사서에서는 구야(狗耶)∙가라(加羅)로.≪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임나가 가야 전역을 가르키는 용어로서 대체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가야’에 대한 문헌사료 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차자(借字)는 加羅(47회)이고. 그 다음으로 加耶(31회).伽倻(28회)와 駕洛(15회).伽耶(14회)등이며 기타는 1~2회만 나오는 예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삼국지≫∙≪삼국유사≫의 ‘狗耶’∙‘駕洛’은 언제나 김해의 금관국(金官國)을 가르키고 6세기 이후를 주로 다루는 ≪일본서기≫의 ‘加羅’는 대부분 경북 고령(高靈)의 대가야(大伽倻)를 가르킨다 하겠다.
  가야는 김해의 가락국을 모태로 하여 성립한 것인데. 그 내용은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잘 나타나고 있다. 즉 김해지역의 토착세력인 9간(干)이 수로(首露)를 김해 가락국의 왕으로 삼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가야의 여러 지역으로 보내어 6가야가 성립했다고 한다. 이중에 소가야(小伽倻)가 고성지역인데 사천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경역을 동은 황산강(黃山江:낙동강 중.하류)으로 서남은 창해(滄海.남해안).서북은 지리산(智異山.智異山).동북은 가야산(伽倻山).그리고 남으로 나라의 끝을 삼았다 하였으니 이로 보아 사천지역도 가야경역안에 포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계기로 가락국은 A.D.42년에 건국하여 6가야연맹을 형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삼국사기≫초기 기록에는 이처럼 김해가 중심이 되어 신라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경쟁관계로 묘사되고 있고 또한 3세기초엽에는 앞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서남해안에 별도로 형성된 포상8국과의 경쟁관계로 대두되어 이 시기 남부지역 세력권의 동향을 이해하는데 시사하는바가 크다.

  고려시대의 기록인 <가락국기>의 내용과 ≪삼구사기≫초기 기록의 연대 및 개별적 사실까지 모두 신빙성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초기가야의 성립을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 어느 정도 실마리는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마한(馬韓)의 목지국(目支國.肢國이라고도 함).진한(辰韓)의 사로국(斯盧國)과 함께 구야국은 김해를 중심으로 변한의 대표세력으로 나타나는데. 수로왕(首露王)의 등장은 바로 구야국의 성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활발한 대외교역활동을 통해 철기류∙한경(漢鏡)등을 독자적으로 수입하여 이들 물자를 가야 여러지역에 공급하는 재분배 관계가 성립되어 있어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구야국이 중심이 되어 가야지역으로부터 철(鐵)의 원료를 집산하여 중국의 군현과 왜(日本)와의 교역을 통해 그 경제적 이익을 공유했을 것으로도 보여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구야국 뿐만이 아니라 남해안의 해상세력인 사천∙고성∙함안지역의 소국들도 해상교역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듯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김해 구야국을 중심으로 6가야 연맹을 행성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6가야라는 것도 어느 특정시기의 가야제국 수를 가르키는 것인지 알 수 없고.≪삼국유사≫에 나오는 5가야조자체에서도 이설(異說)을 소개하고 있는 바다.≪일본서기≫에도 가라7국∙임나10국 등으로 나오기도 하여 전체 가야국 수는 10여 국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는 확정적인 수를 가지고 연맹체 자체를 논할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는 실정이고 변한 12국이라는 ≪삼국지≫<위서>의 기록이 보다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다만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국가 형성요인 가운데 경제적 측면에서 주목되는 물자재분배 활동을 통해 김해 구야국이 초기가야제국내에 중추적 구심체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될 뿐이다. 어쨌든 이 무렵 가야사회는 구심체 역할을 통한 정치의식이 생겨났슴은 분명하고 중국측에서 변한 12국이라고 지칭한 것도 그 바탕에는 이같은 의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군∙현과의 접촉을 통해 가야지역의 정치적∙정치의식이 보다 성장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2.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사물국(史勿國)

  김해 구야국이 경제적 측면의 대외교육주체로서 초기가야제국내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라는 바탕은 ≪삼국지≫<위서>한전에 전하는 바와 같거니와 이 지역은 철이 많이 나서 군∙현 즉.낙랑과 대방을 통하여 중국에도 교역하고 마한과 왜와도 교역하였다 함을 앞절에서와 같다. 그런데 가야제국내의 해안지방에는 포구(浦口:오늘의 港口)가 많아서 이들 지역도 물자교역의 중계 역할을 활발히 이룩했을 것이라는 점이다.따라서 이 시기를 전후하여 가야제국내에는 별도의 이탈한 지역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이 지역이란 경남 서남부 해안에 형성된 해상세력 즉. 이른바 포상8국의 세력이 아니였나 한다. 그러한 근거로는 ≪삼국사기≫초기기록인 신라 내해왕 14년조에 “포상8국이 연모하여 가라를 공격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이 그것이다.
  기록에 나오는 가라는 8국과 인접한 김해지역으로서 이전의 변진구야국으로 상정된다. 그런데 초기가야제국의 중추적 역할을 다해 왔다는 가라(구야국)가 왜 이들 8국과의 다툼을 벌렸던 것일까. 그 원인이야 여하간에 당시 이들 세력들은 얼마나 강성했던지 가라는 스스로 포상의 침공군을 막을 수가 없어서 왕자를 보내어 사로국(신라)의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건은 위에서 말한바≪삼국사기≫신라본기와 열전 물계자(勿稽子).≪삼국유사≫물계자전에 각각 전함으로서 그 기록을 전재(轉載)하면 다음과 같다.

  (1)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 與伊代滄利音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還之”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제2 내해 이사금 14년조)

  (2) “奈解尼師今時人也... 時浦上八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請救... 遂敗八國兵... 後三年 骨浦, 柒浦, 古史浦三國人來攻竭火城 王率出救 大敗三國之師...” (≪삼국사기≫ 권48 열전 제8 물계자전>

  (3) “第 十奈解王 卽位十七年壬辰 保羅國, 古自國(今固城), 史勿國(今泗川) 等 八國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㮈音 將軍一伐等 率兵拒止 八國皆降... 十年乙未 骨浦國(今合浦也) 等 三國王 各卒兵功竭火(疑屈弗也今蔚州) 王親率禦之 三國皆敗...” (≪삼국유사≫ 권5 물계자전)

위 기사 (1)의 대강은.신라 내해왕 14년(209) 7월에 포상8국이 연합하여 가라를 침공했는데 이때 가라는 스스로 막아낼 힘이 없어서 왕자로 하여금 신라의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신라는 이의 6부의 군사를 움직여 8국의 장국들을 모두 격살한 후 이들에게 사로잡힌 6천인(가라사람)을 빼앗아 되돌려 보냈다는 내용이다.
또 (2)의 열전 물계자조에 물계자는 신라 내해왕 때의 사람으로서 포상의 8국이 함께 모의하고 아라국 (가라의 잘못인 듯)을 치니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왕)이 왕손 내음(내音)으로 하여금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케 하여 드디어 8국 군사를 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물계자의 공이 컸다고 하고 그 후 3년에 골포∙칠포∙고사포 3국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와 갈화성을 공격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구원하여 3국 군사를 크게 파하였다고 하였다.
마지막 (3)의 물계자전에는 (1).(2)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10대 나해왕의 즉위 17년(212)에 보라국(미상).고자국(고성).사물국(사천)등 8국이 힘을 합해 변경을 쳐들어 왔다.왕이 태자 내음과 장군 일벌에게 명하여 군사르 거느리고 이를 막게하니 8국이 모두 대패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포상8국중 어느 지역이 중심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세력들이 연합하여 가라국을 공격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가라국을 공격했던 반면에 ≪삼국유사≫의 기록은 마치 신라의 병경을 침범한 것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여기서 어느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건간에 포상 세력은 남해안 일대의 포구를 끼고 있는 세력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두 기록에서 보이는 부족국 즉. 골포국은 지금의 창원∙마산지역.칠포국은 칠원 또는 진동지역.고사포국은 고성지역(삼천포 지역 포함). 그리고 사물국은 사천에 비정된다.
한편 하동∙남해∙곤양지역에도 포상국이 있을 듯 하나 상고할 길이 없다. 다만 앞서 잠간 말한 바 곤양지역은 곤미국으로서 포상세력이 포함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여하튼 막연한 이야기이나 포상 8국은 지금의 하동 이동에서 창원 이서간에 존재한 포상의 부족소국들이라고 보아 무난하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이같이 3세기 초엽 포상세력의 등장과 아울러 남해안을 진감(震撼)시켰던 까닭은 김해지역의 가라국이 가야연맹권내에서 맹주적 구심체로서의 위치가 위태롭게 된 상징적인 큰 사건으로서 뿐만 아니라 신라세력의 팽창과 영향으로 가야세력권 내의 분열이 그 주된 요인이라 생각된다. 종래에는 이 기사를 설화적인 기록으로 다루거나 기년(紀年) 자체를 의심하여 믿을 수 없는 사건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가야세력권 내부의 전쟁에 관한 유일한 기록일 뿐 아니라 당시 해상세력으로 대표되는 수로집단 중심의 변진구야국.경주 중심의 사로세력권.그리고 포상8국으로 대표되는 경남 남서해안의 소국집단 등 남부지방의 세 세력권의 변동상황을 나타내는 주용한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의미분석은 3세기 초반 남부지방의 정치사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하겠다. 기사 내용상 주목되는 점을 다시 간추려 보면.
첫째. 포상 세력이 맹주격인 김해지방의 가라국을 공격한다는 점.
둘째. 그 침입을 기해세력의 요청에 의해 경주의 사로세력권이 막아주는 점.
셋째.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김해세력은 사로세력권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어 친연관계(親緣關係)를 맺음으로써 그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점.
넷째.이 사건 이후 가야관계기사는 당분간 자취를 감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포상 8국의 등장에 관한 몇가지 특징들을 추출해 보았는데 그 저변에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해지역 세력으로 대표되던 변진구야국이 맹주로서의 역할인 해상교역상 경제적 재분배기능의 상실로 인해 일어난 사건으로 파악되어 진다. 그리고 포상 8국의 기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모두에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포상’의 의미를 가라성(伽羅城)으로 해석하여 포상8국을 가라성 8국으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위치 비정을 낙동강하류에서 동쪽 지역 즉 양산.기장.동래(부산포함)등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는 언어학적으로나 역사지리상으로 전연근거가 없는 주장이라 밖에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8국의 지명을 모두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적어도 사천지역을 비롯 고성.합포지역만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사물국(史勿國)이 사천의 연원이 되는 근거로는 먼저 ≪삼국사기≫눌지왕(訥祗王) 25년(441)2월조에 “사물현에서 꼬리가 긴 흰 꿩을 왕에게 바쳤다.(史勿縣進長尾白雉)”는 기사에서 ‘사물현’ 운운이 그것이고 다음은 ≪경상도 지리지≫ <사천현> 건치연혁조에 “고지 사물현(古之史勿縣)”이라 하여 이후 사천의 연혁 서두에는 반드시 사물이라 기록되고 있는 점.그리고 이두식 표기의 사물이 음훈으로 사수(泗水)가 되는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포상8국 중의 사물국은 지금의 사천지역의 연원임에는 틀립없다고 하겠다.

 

 

 

3. 사물현(史勿縣)의 장미백치(長尾白雉)기사

  삼국시대에 있어 우리 고장 사천과 관련된 사료(史料)에는 먼저 포상팔국(浦上八國)이 연모(連謀)하여 가라(加羅:金海)를 공격하였다는 사건 기사와 둘째.사물현(史勿縣)이 꼬리가 긴 흰꿩을 신라왕에게 진상(進上)했다는 내용 셋째.악성(樂聖) 우륵(于勒)이 가라(대가야시대)의 망국음(亡國音)을 따서 지었다는 12곡 중의 사물곡(思勿曲)의 ‘사물’은 음운상(音韻上) 사물국의 명호로 추정될 뿐 무헌의 빈약으로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다만 흰꿩에 관해서만 살피고자 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눌지왕(訥祗王) 25년(441)2월조를 보면 “史勿縣進長尾白雉.王嘉之.賜縣史설”이라 하였다. 이말은 즉. ‘사물현에서 꼬리가 긴 흰꿩을 바치매 왕은 기특히 여기어 그 고을 관리(官吏)에게 곡식을 내렸다’고 한 것이다.
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 당시 사천지역은 이미 신라에게 복속되어 있었슴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은 비교적 신빙성(信憑性)이 두터운 것으로 이해되나 이 사물현 운운하는 기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상고(詳考)를 요하는 점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초기의 신라본기 기록에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기록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상식적으로나 대세론(大勢論) 상으로 보아 아직 신라의 성격이 그곳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생각되는 지역과 통교(通交)를 하고 혹은 영역(領域)으로 편입하였다는 따위의 기록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눌지왕대(417~458)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직 사천지역에까지 신라의 세력이 직접 미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신라세력이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하여 낙동강(洛東江)을 건너서 서진(西進)한 것은 6세기 초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기가야(前期伽倻)의 주축이던 금관가야(金官伽倻:金海)가 신라에 복속된 것은 법흥왕(法興王) 19년(532)이고 고령을 주축으로 하는 후기가야 즉 대가야가 망한 것은 진흥왕(眞興王) 23년(562)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눌지왕대에 있어서 ‘사물현’의 표현은 마치 신라에 복속되어 군현인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논리(論理)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장미 백치(長尾白雉)의 진상기록을 전적으로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그 까닭은 위에서 언급한바 신라가 국력(國力)을 축적하고 밖으로 활발하게 뻗어나가고 있는데 반해서 가야지역에서는 아직 집권적(集權的) 통일 왕국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부족연맹(部族聯盟)의 형태에서 대가야(고령)로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제왜(濟倭)의 세력이 작용하고 있을 때이므로 이 지역 사람들이 일치단결할 구심점(求心點)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右往左往)하게 되었고 따라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신라에 개별적으로나마 혹시 육지나 해상을 통해 교환(交驩)하여 친영성(親綠性)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진기(珍奇)한 토산물(土産物)인 흰꿩을 진상하여 환심을 사고자 하였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포상8국의 하나이던 사물국이 전술하였던바 가락국과의 싸움에서 신라를 알고 또 신라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친교(親交)를 두텁게 맺으려 하였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러므로 사물국과 신라사이에는 일찍이 해상로(海上路)를 통한 통교의 왕래가 있었으리라 미루어 짐작된다.

 

 

 

4.대가야연맹(大伽倻聯盟)의 멸망(滅亡)

  가야사의 복원은 낙동강 하류지역의 가야국(金官國:金海)을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와 5세기 후반부터 562년대의 대가야(大伽倻)가 멸망할 때까지 낙동강 서안의 내륙산간지대에 거점을 둔 고령(高靈)의 대가야연맹의 맹주로서 군림한 후기가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전기가야의 맹주격이었던 김해가야(金官國)는 왕족 묘역으로 생각되는 김해 대성동(大成洞) 유적의 발굴.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하여 중국이나 왜국 등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서 부(富)의 축적을 이루는 동시에 인근 각국의 문화를 섭취함으로써 가야권 내의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낙동강 하류지역의 대표저 유적인 김해 대성동유적이나 양동(良洞)유적의 무덤 규모나 그 출토 유물을 보면 그들의 국력과 문화수준을 짐작할 수 있슴은 물론 백제나 신라 문화에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북방 고구려의 세력을 등에 업고 급성장한 신라가 5세기 전반대에 들어서 김해의 가야국(金官國) 등 낙동강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 연맹의 세력들을 차츰 약화시키거나 혹은 시라의 영향력내로 편입시킴으로써 이 지역내의 가야세력도 사실상 와해(瓦解)되고 말게 된다. 이후 5세기 후반대에는 낙동강 동안(東岸)의 가야세력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서 통제.간섭을 받는 일종의 신라연맹체로 편입되고 낙동강 서안(西岸)의 가야세력들은 다시 고령을 중심으로 부흥 결집되어 대가야연맹을 형성하기에 이르는데 사천지역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대가야가 가장 번성(繁盛)을 보인 것은 4세기 중엽이후 꾸준히 이들 지역에의 진출을 시도하던 백제가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도읍을 옮기는 등 가야에 대한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면서부터라고 생각 되어진다.

  고구려의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의하면 영락(永樂) 10년(400년)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이 기록되어 있는데 직접적으로는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의 구원요청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실제 의도는 백제를 치기 위한 것이었는데 침략 이유로는 약속을 어기고 왜와 친연관계를 도모했기 때문이다.≪일본서기≫흠명기(欽明紀)에 기록된 백제 성왕(聖王)의 회고에 참고하면 백제와 왜의 친연관계는 4세기 중반경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교섭은 함안.창원 등 가야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 지고 있는데 남정 당시 고구려가 백제.왜 뿐만 아니라 임나가라(任那加羅).안라(安羅:함안지역)등도 정벌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상화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제 가야는 남정에 의해 직접적인 타격을 입고 신라의 정치적 성장에 의해 세력권의 변동을 가져와 고령의 대가야가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5세기 후반이후 낙동강중류 및 서부경남지역에서의 고령식토기(高靈式土器)의 확삭은 이것을 반증하는 것인데. 묘제상으로도 고령 지산동고분(池山洞古墳)의 경우 하나의 봉토내에 주∙부곽(主副槨)이 좌우로 배치된 수혈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墓)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소형 덧널(石槨)들이 배치되고 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고령식토기의 분포는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권의 범위를 나타내는 것이고 대형 나무덧널무덤(石槨墓)에 이어 등장하는 수혈식돌방무덤은 한층 강화된 지배자의 막강한 힘을 상징하고 있다. 고령 대가야의 등장은 농업생산력에 기반한 점진적인 사회발전이 이루어 졌고.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한 백제.신라의 대가야 대응자세에 기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백제의 섬진강(蟾津江) 유역에 있어서의 영향력의 약화는 고령이 이지역을 통해 중국.왜등과 교섭을 가능케 했고 479년 가라국왕의 이름으로 남제(南濟)에 사신을 보내어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받은 것(≪南濟書≫加羅國傳)은 가야의 유일한 대중견사(對中遣使)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가야의 일국이 중국에 사신을 보낼만큼 국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5세기 후반대에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하류지역의 가야세력들이 신라의 진출에 의해 그힘이 약화되고 신라양식의 토기가 낙동강 동안 지역에 확산된다. 반면 낙동강 이서지역에 이던 가야세력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마침내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하는 연맹체의 형태로 세력을 규합하여 신라의 세력팽창에 맞서는 한편 백제와 유대관계(紐帶關係)를 가지면서 백제의 한성함락(漢城陷落)과 웅천천도(熊川遷都:公州)라는 힘의 공백을 틈타 한동안 급성장을 보인다.
  이들 대가야 연맹체는 동일한 문화기반내에서 성장하던 합천∙삼가∙거창∙함양∙산청∙하동∙사천∙고성 등지 및 함안∙창원∙김해등의 소국들을 포괄하는 후기가야연맹을 이륙하였다. 이중에 하나였던 합천의 다라국(多羅國)은 ≪일본서기≫에 전하는 바와 같이 백제가 중재하여 541년 두차례에 걸쳐 열린 가야부흥회의(伽耶復興會議)의 참석자 현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맹주국인 고령의 대가야.함안의 안라가야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나라였다. 예컨대 합천국 쌍책면(雙冊面)성산리(城山里)에 소재하는 구슬밭(玉田)유적으로 이러한 다라국의 중심세력들이 묻힌 무덤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에서는 4세기대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나무덧널무덤.대형수혈식 돌덧널무덤 등이 조영되어 묘제상 다라국 자체의 꾸준한 성장과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대형수혈식 돌덧널무덤으로 이 지역 고분문화의 독특한 일면을 보여준다.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한 대가야연맹의 세력판도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령계토기가 출토된는 합천∙함양∙남원등 지리산주변은 물론 진주∙사천∙고성 등 섬진강유역에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서부 경남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세력판도이나 연맹의 각소국들은 독자적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고령계토기의 분포권과 아래 그림에서 보는 고배(高杯)와 수평구연장경호(水平口緣長頸壺)를 표지로 하는 소위 사천식(泗川式) 및 고성식(固城式) 토기의 분포권으로 알 수 있다.
본면 예수리에서 출토된 가야시대의 토기 3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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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평구연장경호 (2)고배 (3) 유개고배
  이들 양형식 토기의 분포범위는 상당부분이 겹쳐 있어서 서로 밀접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를 통해 보면 이들 두 형식토기의 분포범위는 고령을 비롯해 합천∙거창∙산청∙남원∙진주∙사천∙하동∙고성∙창원 등지에 이르며 이들 토기가 출토되는 시기는 대체로 5세기말에서 6세기 전반대로서 대가야연맹이 전성기 때에 해당된다. 특히 사천 예수리(禮樹里)유적의 수평구연장경호.남원 월산리(月山里) 유적에서는 용봉문환두대도(龍鳳紋環頭大刀)나 은상감환두대도(銀象嵌環頭大刀).종장판주(從長板冑) 등 대가야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유물들이 공반되어 주목된다.
  그러나 가야의 이같은 성장도 6세기초 무령왕(武寧王).성왕(聖王)대의 백제가 국가 체제 정비와 함께 가야의 남부지역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를 꾀하며 이 지역에 재진풀함에 따라 그 세력권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신라의 겨우도 법흥왕대(法興王代)에 접어들면 가야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기도함에 따라 이제 고령 대가야세력권은 독자세력으로 존속하기는 매우 어렵게 되었다. 고구려에 대한 나∙제동맹(羅濟同盟)의 결성은 가야지역에 대한 백제의 직접적 개입에는 유효한 방패막이가 되었으나.이후 이 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빼앗은 신라앞에서는 그 세력을 온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 중에 대가야는 522년에 신라와 혼인동맹(婚姻同盟)을 맺어서 국제적 고립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결혼을 둘러싼 신라의 책략에 의하여 후기가야연맹은 내부분열의 조짐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녹기탄(睩己呑:영산.밀양)이 529년 전후하여 신라에게 병합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가야남부제국은 대가야로부터 떨어져나와 안라를 중심으로 다시 통합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531년 백제의 안라 진주.532년 신라의 남가라(김해)병합.534년 백제의 구례산성(久禮山城:칠원)축성등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가야남부지역은 신라.백제에 의하여 동.서로 분할 점령당하고 말았으며 그 남부지역의 소멸로 인하여 가야는 다시 분열 약화되었다.
  이후 541년과 544년의 두 차례에 걸쳐 대가야와 안라 등 7~8개 소국의 대표들은 백제에 모여 성왕과 교섭을 하였다. 여기서 가야연맹은 백제 군령(郡令)∙성주(城主)의 축출과 자신들의 안전보장을 요구하였고. 백제는 가야독립 주장세력의 핵심인 안라를 무력화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백제의 뜻이 관철되면서 550년을 전후하여 가야연맹은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야제국의 망국음(亡國音)을 따서 지었다는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신라에게 투항하였다. 우륵이 지은 12곡중에는 사물곡(思勿曲)도 포함되는데 이 사물곡의 ‘思勿’은 사천의 연원인 ‘史勿’의 음차(音借)로 여겨진다.
  554년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가야.왜 연합군은 신라에게 패배하였으며.특히 상당히 많은 수의 군대를 잃은 가야연맹은 멸망 직전에 몰렸다. 그리고 백제의 성왕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신라가 한강유역을 경영을 마치고 가야지역 병합을 시도하자.562년(신라 진흥왕 23년)에 고령의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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