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소서노가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건

吾心竹--오심죽-- 2010. 1. 30. 12:39

현 인류문명의 시원밝히는 한반도중심사관 [0]

  • 윤복현 younbok****윤복현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510045 | 09.03.11 02:24
    • 조회 681 주소복사










     

    ▲인류4대 문화권,한반도에는 이 4대 문화가 중첩되어 있다.현인류문명의 시원지는 한반도

    유라시아 빗살무늬토기문화(지도상의 빗살모양 구역)의 시원지도 한반도다


    홍산문화의 대표적 특징은 옥 문화=옥문화는 한반도(마한) 문화다





    홍산문화 유적유물 -

     

    원형 제천단,여신상,대형 신전,비파청동검,빗살무늬토기,곰.뱀토템 등

     

    모계중심의 마고문화와 부계중심의 한웅문화가 중첩되어 있다.


     




    홍산유적지에서 출토된 여신상.한민족의 여성지도자 마고상징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고인돌은 마고전설로 가득하다
    마고문명의 중심지는 인류.유전학적으로도 한반도 서남해 지역이다
    태평양에서 사라진 뮤(마)문명과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도 필요


    마고를 상징하는 곰(북두칠성 상징)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한반도 마한인들은 고인돌.모계문화를 가지고 북상하여
    백두산문화와 홍산문화를 건설했다고 보아야 한다.

    일부 얼빠진 역사매니아들은 중국중심의 역사논리를 펼치고 있는데,
    그건 인류고고학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동북공정논리에 불과하며,
    우리 한민족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한반도 중심사관이 중요하다.
    고인돌 천국이라고 할 때는 고대부터 한반도는 비옥한 땅으로
    인구밀도가 높고 문명이 일찌기 꽃피운 지역이라는 것쯤은
    감으로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한반도 사람들이 북상하여
    만주와 중국, 유라시아,아메리카 지역에 한-문명를 꽃피운 것이다.


    [문헌과 고고학]중국문명은 동방족의 홍산문명없이 존재할 수 없다


    고리족(단군조선.부여.고구려)의 문화=홍산문명

    단군왕검(檀君王儉)은 14세의 나이로 웅씨국(熊氏國)의 비왕(裨王)이 되어 섭정을 하였다. 단군조선을 통치한 고씨 단군들과 해모수.두막.고추모 선조들인 고리(골=맥)족의 터전으로 요서지역의 홍산문화(紅山文化는 BC4,000~BC2,300)는 신시(神市) 환족(桓族)의 일원이 되어 중원지역에 신시문화를 전파시킨 웅씨국(熊氏國)의 유적으로 추정됨.

    단군신화의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는 주요유적은 홍산,우하량,좌가산,신락 문화가 있다.

    최근 중국 요녕성 지역에서 대규모로 발굴된 홍산문화 유적에는 지금까지 황하유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대형 제단, 여신묘, 적석총군, 석관묘, 빗살무늬토기,비파청동검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서기전 4000-3000년 경의 이 홍산 유적을 중국학자들은 삼황오제와 연결시켜보려하고 있다. 그러나 만주 요녕성 일대는 중국 정사에서 동이라고 하는 지역으로 고대에는 한국민족의 활동영역이었다. 이 유적들은 만들어진 연대인 오천년 전은 요녕성 지역과 황하유역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화권-정치권이었다.

     

    단군왕검이 단군조선을 개국할 때 초기 단군왕검(웅씨국 왕녀와 배달국 마지막 거불단 한웅의 아들)의 출생지로 추정되는 천청강 이남지역(세형청동검 문화가 시작되는 지점. 세형동검은 만주 홍산지역의 비판청동검이 한반도에서 변형된 청동검)인 북한 평양에 임시 수도를 정했을 수도 있으나, 3한 관경으로 구분한 후 단군조선(진조선=진한)은 수도가 송화강 아사달로 지금의 하얼빈[하늘물가=天河]이 확실하고(고고학적으로도 요서지역의 홍산문명이 쇠락하고 요동과 송화강 지역의 문명이 발전한다), 색불루단군이 수도를 정한 백악산 아사달은 녹산(鹿山)으로 상춘(=늘봄=눌견=눌현=장춘) 부근으로 추정된다. 구물단군이 수도를 정한 장당경은 개원(開原)으로 지금의 심양(심양)이나 심양 부근이다.

     
    고추모와 아! 고구려

    소서노는 고무서 단군이 아닌 연타발의 딸이다

     
    소서노에 대한 글을 보면 대부분이 한단고기를 인용하여 소서노가 골본부여의 2대 임금 고무서 단군(북부여를 세운 시조는 해모수. 한나라의 침략을 5천 결사대로 막아내고 민족영웅이 된 고두막이 해모수왕조를 무너뜨리고 골본부여를 개국한다) 의 딸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소서노를 고무서 단군의 딸이라고 하는 건 역사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한단고기를 보면 그 어디에도 소서노가 고무서 단군의 딸이라는 기록이 없다. 왜 소서노를 고무서 단군의 딸이라고 주장하는가? 소서노는 골본부의 수장 연타발의 딸이다. 연타발이 바로 그의 아버지이다.
     
    소서노가 연타발의 딸임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만약 소서노가 고무서 단군의 딸이라면 우태와 결혼하여 비류, 온조를 낳았다는 기록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 [한단고기]에는 고무서 단군이 주몽의 사람됨이 범상치 않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딸을 주어 사위를 맞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류와 온조는 고추모(주몽)의 자식인가?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건 아니다.
     
    만약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식이라면 비류와 온조는 동부여에서 유리가 왔을 때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비류가 온조에게 자신들이 용납되지 않으니 이 곳을 떠나자는 말은 무얼 뜻할까? 이는 적어도 비류와 온조가 친자가 아님을 나타낸다.  만약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라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비류와 온조는 소서노와 동부여 해부루 외손인 우태 사이의 소생이고, 우태가 일찍 죽어 과부가 된 소서노를 주몽이 거둔 것이다.
     
    그럼 주몽은 왜 자신보다 나이가 그것도 15세 많은 과부 소서노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을까?그건 아마 소서노 집안이 가진 부와 권력 때문일 것이다. 주몽은 동부여에서 쫓기듯 도망쳤다. 그런만큼 그에게 세력기반은 없다. 그가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되었어도  세력기반이 없는 그를 골본부여 지배귀족이 인정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주몽은 자신의 세력을 키워줄 든든한 후원자를 찾은 것이고 그 후원자는 바로 소금과 생선장사로 큰 부를 이룬 연타발 집안이었을 것이다. [한단고기]에는 연타발이 소금과 생선장사를 통해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서노가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건 그의 집안이 상업에 종사하여 막대한 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특출한 자질과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된 것, 그리고 막대한 소서노 집안의 재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즉, 소서노는 고추모의 부인이 맞지만 고무서 단군의 딸이 아닌 북부여를 계승한 골본부여의 유력한 귀족 연타발의 딸이며, 주몽은 적어도 소서노, 동부여의 예씨부인, 고무서 단군의 딸 이렇듯 부인이 3명은 존재했을 것이다. [윤복현]
     
     
    [자료]해모수의 북부여와 고두막한의 골본부여, 고추모의 고구려
     
    해모수는 서기전239년 임술년 4월 8일 웅심산(熊心山)의 난빈(蘭濱)을 수도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서기전232년 단군조선의 5가연정을 철폐 접수하여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이었다.
    해모수는 고씨단군의 종실이고 고리국(藁離國) 출신이며 고리국은 해모수의 고향으로 선조의 나라이다. 해모수 출현 당시 단군조선47대 고열가단군은 고씨단군의 마지막 단군으로서 44대 물리단군의 현손이 된다. 단군조선 22대 색불루단군[서기전1285~)부터 44대 물리단군(~서기전426)까지 모두 고씨단군이고, 47대 고열가 단군이 고씨단군이다. 45대 구물단군(서기전425~)부터 46대단군까지는 고씨인지 불명인데 고씨일 가능성이 많다. 구물단군은 백민성욕살로 물리단군의 명을 받아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정벌하고 추대받아 단군이 되었다.

    단군왕검이 건국한 단군조선은 처음에는 오가들이 화백으로 단군을 추대하였는데, 21대 소태단군으로부터 선양받은 색불루단군부터는 대를 이어 고씨단군이 되었다.

    색불루 단군의 할아버지는 고등(高登)으로 고구려가 시조신으로 제사를 지내는 인물이다. 고등은 우현왕(右賢王)이 되었고 세습하여 손자인 색불루가 우현왕이 되었다가 군사력으로 소태단군을 물러나게 하고 단군이 되었다. 이에 단군직위를 앞둔 소태단군의 종실인 기자세력이 대항하게 되나, 색불루 세력이 진압하고 결국 기자는 번조선의 단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자조선의 실체다. 연나라에게 망명한 위만세력에게 멸망당한 기자조선은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들어와서 기자후손의 맥이 끊길때까지 마한의 통치권을 행사했다.

    단군왕검이 단군조선을 개국할 때 초기 단군왕검의 출생지로 추정되는 천청강 이남지역(세형청동검 문화가 시작되는 지점)인 북한 평양에 임시 수도를 정했을 수도 있으나, 3한 관경으로 구분한 후 단군조선(진조선=진한)은 수도가 송화강 아사달로 지금의 하얼빈[하늘물가=天河]이 확실하고(고고학적으로도 요서지역의 홍산문명이 쇠락하고 요동과 송화강 지역의 문명이 발전한다), 색불루단군이 수도를 정한 백악산아사달은 녹산(鹿山)으로 상춘(=늘봄=눌견=눌현=장춘) 부근으로 추정된다. 구물단군이 수도를 정한 장당경은 개원(開原)으로 지금의 심양(심양)이나 심양 부근이다.
    해모수의 고리국은 단군조선의 구려국(句麗國)과 동일한 나라로 고구려라고도 한다. 그래서 해모수의 북부여를 고구려라고도 한다. 해모수의 원래 성씨가 고씨이기 때문이다. 고주몽의 성씨가 해씨이기도 하고 고씨이기도 하다. 즉 해(解)와 고(高)는 같다. 해는 태양으로서 하늘 높은 곳에 있어 세상을 다 비춘다. 고주몽이 고구려라 나라이름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모수가 단군조선을 접수할 수 있었던 것은 번조선의 기비(箕丕)의 도움이 컸다. 즉 해모수는 기비의 공을 인정하여 번조선왕으로 승진시켰다.

    서기전194년 번조선의 기준왕이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빼았기고 위씨가 나라를 차지하였는데, 서기전108년에 한나라의 침입으로 나라를 잃자 골본출신인 고두막(高豆莫)이 의병을 일으켜 동명(東明)이라 칭하고 한나라 도적들을 토벌하였다. 고두막한은 고열가 단군의 현손이라고 전해진다. 온조백제를 통합하고 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부국강병을 실현한 백제의 주역또한 고두막의 후손 구태다.

    이 동명을 한단고기 삼성기에서는 신라의 옛 땅이라 적고 있다. 즉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바로 동명왕 고두막한의 나라 출신이라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바로 고두막한의 거서간이었던 것이다. 거서간(居西干)은 서쪽 보루의 방어장을 뜻한다. 박혁거세가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파소를 따라 한반도의 동쪽 진한땅으로 가서 본국 즉 원래의 진한땅에서 온 연유로 추대를 받아 거서간이 되었던 것이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바로 북부여 제실녀[帝室女]였다. 제실녀란 공주가 아닌 신분을 가리키는데, 서기전57년에 박혁거세가 13세이므로 파소가 박혁거세를 출산한 때는 서기전69년이므로 북부여 단군 고두막한 때인데, 즉 파소는 고두막한의 손녀 즉 고무서의 큰딸로 추정되는 것이다.  파소는 박혁거세보다 약20세가 많다고 보면 서기전88년경이 되는 바, 파소와, 고추모와 재혼하게 되는 둘째 따님은 나이가 비슷하게 되며, 고무서의 차녀는 고추모와 결혼하여 황비가 되는 셈이고, 셋째는 불명이다.

    서기전87년에 북부여 4대 고우루단군 말기에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자를 보내어 고우루에게 나라를 비켜달라고 경고하였다. 이에 고우루 단군은 협박에 못이겨 병에 걸려 돌아가시고 동생인 해부루가 서기전86년에 북부여 단군이 되었다.

    서기전86년에 고두막한이 다시 사자를 보내 나라를 비키라고 경고하였다. 이에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이 해부루에게 권하여 동부여로 비키자고 하였으며, 이에 동부여가 되었다. 고두막한은 해부루를 동부여후로 강등시켰다.

    이상에서 고두막한이 사람을 시켜 고우루와 해부루에게 나라를 비키라고 한 역사적 사실이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그 아들로 하여금 나라를 맡길 테니 동부여로 나라를 옮겨라 하였다"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고두막한은 바로 고열가단군의 후손으로 역시 천제자이기 때문이다.

    고두막한이 서기전60년에 돌아가시고 고두막한이 번조선 지역을 점령하고 북진해오는 한나라군사를 물리치기위해 의병을 일으켰으며, 졸본부여의 수도였던 졸본천에 장사지냈으며, 아들 고무서가 서기전59년 북부여 단군이 되어 졸본을 수도로 삼았다. 이때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에 도착하여 고무서 단군의 둘째 따님과 혼인하여 고무서의 사위가 되었다. 하지만, [한단고기]에는 소서노가 재력가인 연타발의 딸이며 동부여 해부루의 서손(해부루 아들의 첩의 아들=왕손)인 우태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고 사별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어디에도 소서노가 고무서의 둘째 딸이라는 기록이 없음으로 고무서의 딸이라고 규정하는 일부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다음과 같은 고구려 야사도 전한다고 한다. 즉, 서기전 58년 고무서 단군이 고주몽에게 대통을 이어주었고 이에 고주몽이 소위 졸본부여의 왕이 되었다.물론 해모수의 혈통인 동부여 왕실에 비해 떨어지는 혈통적 정통성을 해모수의 혈통인 주몽을 통해 극복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황비인 고무서의 딸 (이하 그냥 졸본공주라고 함)은 주몽을 들러리로만 삼은 채 정권을 좌우하려고 하게 되고 결국 주몽은 왕비 및 졸본 토착귀족에 맞서기 위해 만주 일대의 유망한 재력가인 연타발의 딸과 혼인하게 된다. 이 연타발의 딸이 바로 유명한 여걸 소서노다. 당연히 이전의 부부의 정이고 뭐고 다 사라진 주몽과 졸본공주는 갈라서게 되고 주몽과 소서노는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 남쪽으로 도망가게 된다.황비일파를 제거하려다가 도망간 들러리 황제 주몽대신 주몽과 졸본 공주의 아들인 아달황제가 섭정인 어머니 밑에서 제대로 들러리를 서게 된다. 하지만 병약한 아달황제는 오래가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맞게되고 나라의 유일한 실권자인 졸본공주는 금와왕과 혼인하여 동부여와 졸본부여를 한 나라로 통합한다. 갈라졌던 부여가 국혼을 통해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그 사이에 남쪽으로 도망갔던 주몽은 장인인 연타발의 재력과 부인인 소서노의 수완에 힘입어 그 땅에 기반을 잡고 환국의 중심지역으로써 정통적인 환인지역을 수도로 삼고 졸본부여의 정통성을 내세우기위해 졸본성을 산꼭대기 암박위에 쌓아 수도성으로 삼고 북부여를 개국한 해모수 등 선조들의 국호였던 고리국(북경지역인 난하부근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고고리(고구려=고씨의 고리국)로, 고두막한의 졸본부여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두막한의 건국신화를 고고리 건국신화로 하여 개국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작은 나라는 정통성과 당당한 역사성을 자부심으로 삼고 주몽의 리더쉽과 소서노의 지략에 힘입어 순식간에 급부상하면서 부여를 압박할 만큼 성장하게 된다.
     
    고주몽은 서기전79년 5월 5일에 분릉 즉 동부여(가섭원)에서 탄생하였다. 금와는 서기전77년 동부여에서 해부루가 양자로 삼았다. 그래서 고주몽과 금와는 나이 차이가 많지 않다. 그래서 대소와 유리가 나이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유리는 서기전59년경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칠 때 이미 예씨와 혼인했던 터라 어린아이[유복자~5세 사이]로 자라고 있었다. 고주몽은 서기전79년에 태어나 22세이던 서기전58년에 졸본에서 북부여왕이 되었고 43세이던 서기전37년에 고구려를 창건하였으며, 서기전19년 61세로 돌아가시고 아들 유리가 고구려왕이 되었다.

    해부루이후 동부여는 비록 고두막한에게 쫓겨 가기는 하였으나 비옥한 땅을 기반으로 하여 금와을 거치면서 졸본부여까지 통합하여 나라가 강했다. 고주몽이 졸본에서 대통을 이은 이후 서기22년까지 동부여는 고구려에게 위협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부여의 금와는 약 36세경인 서기전 42년에 왕이 되었고 대소는 서기전 6년에 왕이 되었다. 유리는 약 41세경인 서기전19년에 왕이 되었고 대소는 약 53세 경에 왕이 되었다. 대소의 동부여는 대소가 약80세이던 서기22년에 고구려의 3대 대무신왕 때 병합되었다.

    광개토호태왕 비문에 광개토태왕은 17세손으로 나온다. 실제로 고구려의 19대왕이다. 그런데 고주몽의 직계로 따지면 13세손이다.
    비문에서 유리왕을 2세손으로 적지 않고 그냥 세자로 표기하고 광개토호태왕을 17세손이라 적었은데, 이것이 의문점이 된다.

    1. 광개토호태왕은 고주몽의 직계 17세손인가?
    2. 아니면 고구려의 직계 계산을 잘못 한 것인가?
    3. 고주몽을 북부여의 천제자라 하였으므로 북부여의 대수를 포함한 것인가?
    4. 고주몽의 직계를 해모수로부터 시작한 대수인가?
    광개토호태왕은 고구려 역사에서 고구려의 19대왕이며 직계로 고주몽의 13세손이 된다. 그런데, 북부여 시조 해모수로부터 계산을 하면, 북부여가 해모수로부터 고주몽까지 7세이며, 유리부터 광개토호태왕까지 12세이므로 19세라고 했어야 한다. 그러나 고주몽의 지계 선조를 계산하면, 해모수, 고진(고구려후), 0, 불리지(고모수.옥저후), 고주몽이 되어 5세가 되며 유리왕부터 따지게 되면 17세가 된다.
    그리하여 17손 광개토호태왕은 해모수로부터 고주몽을 거쳐 지계로 17세손이 된다. 즉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의 대수를 계산한 것이 아니라 고주몽의 직계만 계산한 것이 된다.
    북부여의 임금으로 하여 해모수, 모수리, 0 , 고우루(해부루), 고두막한, 고무서, 고주몽이 아니라,핏줄로 보아 1. 해모수, 2.고진, 3.ㅁㅁㅁ,  4. 불리지 고모수, 5. 고주몽,  6. 유리왕, 7. 대무신왕, ~ 17.광개토태왕이 된다.
     
    [고구려 기반세력-계루부]초기 고구려는 5개의 부(部)가 연맹하여 성립되었는데, 처음에는 소노부(消奴部)가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그 뒤 계루부가 주도권을 장악하여 왕실을 구성하였다. '계루'는 고구려에서 성(城)을 뜻하는 말인 '구루'(溝婁)와 음이 통하여, 계루부는 곧 도읍 성을 차지한 세력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계루부를 구성한 주몽집단의 유래에 대해서 〈삼국사기〉나 광개토왕비문에는 북부여에서 갈라져나왔다고 했는데, 아마 매우 뒤늦은 시기에 부여지역에서 압록강 중류지역으로 이동하여 송양 집단 같은 기존의 토착세력을 누르고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고추모이 골본부여에서 쫓김을 당할 때 고추모를 도와 함께 남하한 친 고추모세력이라고 봐야 한다. 계루부가 고구려국 전체를 통솔하게 된 시기는 늦어도 국내(國內:지금의 輯安)지역으로 천도한 유리왕대이며, 그 후 태조왕대에는 계루부를 중심으로 한 5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골본:중국인들의 비하적 표현으로 '고리본(골본)'이 맞다고 본다]부여의 동명성왕 고두막한이 도읍한 곳. 고구려의 다섯 부족 가운데 계루부가 있던 곳 으로,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는 ‘졸본’으로, 광개토왕비문에는 ‘홀본(발음상 골본=고리족의 뿌리.근원이라는 의미로 아마도 본래 지역은 송화강 지역을 의미. 고대에는 떠나 온 자신의 고향이나 부족명이나 나라이름을 정착지에 표기했다)’으로 전하며, 고구려로서는 유리왕 22년에 국내성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도읍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주몽설화 중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자 그 곳의 왕이 아들이 없어 주몽을 사위로 삼고, 주몽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는 전승(傳承)이 있어 [한단고기]의 고무서 단군 편 내용과 일치한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비류설화에는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졸본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와 결혼했다는 전승도 있는데, 여기서의 졸본은 졸본부여에서 남하하여 고구려를 개국한 압록강 중류지역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

     
     
    해모수.고추모 조상의 나라 고리국의 도읍지는 내몽골 [0]
  • 윤복현 younbok****윤복현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539744 | 09.05.01 00:48
    • 조회 475 주소복사


    [한단고기]천해동쪽 12한국-동방나라들(중동의 슈메르인들도 동방족)

     

    [한단고기]"해모수는 고열가의 황족이며,고리국의 왕족 사람이다"

    고리국 도읍지는 거란이 수도로 삼은 임황부로 오늘날 중국 내몽골자치부 치펑 시다. 대진국 개국시조 대중상도 서압록하에서 상제께 지내를 지냈고, 거란(요)도 서압록하에 도읍을 정한 것을 보면 요나라도 고리국 후예들임을 알 수 있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이달 16일 삼신일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하다. 서압록하는 고리의 옛 나라의 땅이다...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내용에서 고리국의 옛땅은 서압록하이고 서압록하는 임황현으로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선조의 나라 고리국의 도읍지는 바로 요나라 상경 임황부이며, 요나라 상경 임황부가 바로 서압록하이고 서안평임을 알 수 있다.

    "거란지리지도"라는 제목의 지도이다.가로로 길게 표시된 것은 "만리장성"임이 분명하다.오른쪽 아래에 파도가 표시되어 있는 영역은 北海라고 되어 있다. 오늘날의 "뽀하이" 즉 발해이다.봉우리가 셋인 산에는 갈석산(碣石山)이라 표시되어 있다.

    가운데 부분에는 燕京이라고 표시되어 있고, 그 위에 산과 함께 居庸이라 표시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古北口라는 지명이 보인다. 가운데 윗부분에는 上京이라 표시된 지명이 있다. 대궐과 동그란 성곽이 표시되어 있다.이곳은 거란의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 임황부로서 오늘날의 중국 내몽골자치구 치펑시(赤峰市)이다.

    위 지도 중 김나라 영역 중 임황이 바로 서압록하로 고리국 도읍지다

    고리국하고 고구려하고 일치시키면 분석이 왜곡된다. 고리국과 고구려를 일키시켜 고구려 도읍지를 서압록하로 비정하면 안되는 것이다. 고리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고, 해모수.고두막.고추모 선조들이 모두 고리국의 왕족이였다는 의미다. 동부여에서 대소세력의 추격을 피하여 북부여로 망명한 고추모가 고무서 단군의 둘째 딸(둘째딸은 자식이 없는 미혼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동부여 해부루의 손자의 우태의 부인이였던 소서노가 아님)과 혼인하고 북부여 단군자리에 취임했으나 결국 북부여의 토착세력에게 쫓겨서 남쪽지역으로 남하하여 계루부와 소서노세력의 도움으로 고추모가 개국한 고구려 도읍지는 지금의 환인지역으로 비류수가 흐르는 골본성이다. 환인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서진정책으로 서안평을 공략하는 배경자체가 바로 선조들의 나라인 고리국의 땅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였다.

    부여는 대무신왕때 동부여가 멸망했고, 북부여는 장수왕의 손자인 문자명왕때에 이르러서 항복하게 된다. 구태백제를 개국한 구태는 이 북부여의 왕자로 남하하여 동아시아 해상국가를 건설하는 주인공이며, 백제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정한 배경이기도 하다. 온조백제를 통합하고 구태백제를 개국한 시기가 바로 법치국가를 실현한 고이왕때부터다. 고이는 고리를 의미한다.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은 고리에서 나온 부여의 전통성을 두고 벌이는 패권전쟁이였던 것이다.

    대중상이 개국한 나라는 후고구려에서 대진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발해는 중국인들이 부른 국호임에 유의하라. 발해는 순우리말로 밝해로 태양을 의미하니 중국인들(당시 당나라)도 대진국을 태양의 나라로 높이 숭상했음을 의미한다. 현재 사학계는 중국인들이 표기하고 기록한 종족명과 국호를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흉노.거란.몽골 등은 모두 북방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했던 동일한 한국국인들이지 전혀 다른 민족들이 아니다. 마치 고구려가 망한 후에 대진국으로 나라이름만 바뀐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윤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