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계루부(고씨)-비류나부(해씨)-계루부(고씨)

吾心竹--오심죽-- 2010. 1. 29. 17:50

고구려 초기 왕실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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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편집자 : sasin752 (level 10) l 2004-07-04 23:49 작성

고구려사를 공부하다보면 처음에 의문을 가질수 있는것이 바로 고구려 초기 왕실교체기 일것이다. 즉 계루부(고씨)-비류나부(해씨)-계루부(고씨)로 바뀌는 것에 대하여 말이다. 다시 풀어서 말하자면 시조 추모왕은 계루부 고씨였지만 그 다음 왕인 유리왕은 비류나부 해씨 그리고 모본왕에 이르기 까지의 왕들이 전부 해씨다. 그러나 모본왕이 두로에게 시해당한후 왕위에 오르는 태조왕은 해씨가 아닌 계루부 고씨다.

그런데 의문은 이것이다. 추모왕의 아들이 유리이다 그런데 이 유리는 추모왕의 뒤를이어 왕위에 오르는 인물이다. 그런데 추모왕은 계루부 고씨인데 유리왕은 비류나부 해씨인것이다. 그리고 더 의문스러운 것은 이 비류나부 해씨인 유리왕의 6번째아들의 자식이 바로 태조왕이라는 것이다. 추모왕이 전에는 해씨여서 나주에 고씨로 바꿧지만 유리왕은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손자인 태조왕은 왜 고씨였을까? 그이전의 유리왕의 자손들은 다 해씨 즉 비류나부인데 왜 유독 태조왕은 유리왕의 손지이면서도 계루부이며 또한 고씨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그의문에 대한 해답을 한번 풀어보도록 하자.
먼저 이 의문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추모왕이 어떻게 해서 고구려를 세웠냐 하는것이다. 비록 부여의 왕자라 하여도 도망나온 처지에 나라를 세운다는것은 실로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하지만 든든한 후원자 혹은 동맹자가 있다면 달라지게 된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도 바로 이런 경우에 속했다. 바로 추모왕이 온 지역인 졸본지역의 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된거냐하면 추모가 부여에서 도망쳐 나와 졸본에 이르자 졸본을 다스리는 졸본부여의 왕이 두번째딸을 추모의 비범함을 보고 결혼을 시킨것이다.그래서 졸본부여의 왕이 죽자 그다음왕으로 추모가 왕위에 올라 고구려라 나라를 칭하며 세웠던것이다. 그래서 성도 해씨에서 고씨로 바꾸었다.
이게 고구려의 건국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왜 졸본의 왕은 부여에서 나온 추모란 사람에게 자기의 딸은 주었기도 했으며 왕위도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졸본왕은 그당시 세명의 딸을 두고 있으니 당연히 세명의 사위도 있었을것이다. 물론 추모를 제외한 나머지 두명의 사위는 졸본지역의 유력자들이었을것이며 또한 세력도 컷을 것이다. 그렇지만 졸본왕은 그들에게 왕위를 주지 않고 떠돌이나 마찬가지인 추모에게 왕위를 준다. 왜 그랬을까? 이것에 대한 해답은 중국사서에 나와있다. "비류나부는 전 왕실로 (고구려에서) 고추가라는 칭호를 받있으며 스스로 영묘를 세울수 있었다."라고 나와있다는 점이다.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여기서 전 왕실 이라는것은 고구려가 세워지기 이전의 일이다.
즉 다시 말하자면 이 전왕실은 졸본부여의 전왕실 비류나부를 뜻하는말이다. 그당시 졸본부여의 왕실은 계루부였다.그래서 추모가 소서노와 결혼하자 계루부를 자기의 부로 삼은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것은 추모가 비록 부여에서 도망쳐 나온것이긴 하지만 추모를 따른 세력은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이 세력들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추모를 따라 부여에서 나오는 세명의 사람들 이다. 이들은 아마도 그 부족들을 대표하는 대표자였을것이다. 그리고 또한 졸본부여로 가는도중에 강을 만나 가지 못하자 추모가 나는 천손으로서 하백의 외손이다 하니 자라와 물고기가 올라와 다리가 되었다 그리고 부여의 군인들이 오자 다시 흩어졌다 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강주위에 사는 부족이나 혹은 어머니 유화의 아버지 세력이었던 화백의 무리들이었을것이다. 이들은 화백의 자손인 추모를 못본채 할수 없어서 배 같은것을 통해 추모를 건너가게 해주었지만 그다음에 오는 부여 군사는 못건나가게 하여 나중 부여 군사들의 해를 두려워 해 추모와 같이 따랐을가능성이 높다. 결국 추모는 졸본부여로 오는 도중에 세부족과 하백의 무리들을 합친 졸본부여의 계루부 못지 않은 세력을 가지게 ?

br> 퓸駭?그렇기 때문에 비류나부에서 계루부로 왕실이 바뀐지 얼마 되지 않은 졸본부여의 왕이 자기 부족의 왕권을 튼튼히 하기 위해 부여에서 내려온 추모와 과부인 둘째딸 소서노를 연계시킨것이다. 즉 비류나부와 견제 하기 위해 계루부(소서노 대표)+추모세력(세부족+하백무리)의 연합을 이룬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사위들중 추모를 자기 다음 왕위를 잇게 한것이다. 결국 부여에서 도망쳐온 추모는 나라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고구려 건국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왕이 된 추모는 비류나부란 전 왕실의 집단의 반란을 맞게 된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 동명왕편에 있는 내용으로 황룡이 골령에 나타난다는 내용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반란세력을 황룡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즉 계루부와 연합정권이 된 추모세력에게 비류나부가 반란을 일으킨거라고 볼수 있는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얼마가지 않아 5개월 되는 추모왕 3년 가을 7월에 진압되고 만다.
이것으로서 계루부(소서노)와 추모세력의 연합정권은 추모란 새로이 대표되는 한 인물로 인해 왕권의 튼튼함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즉 전왕실인 비류나부의 쇠약을 이룬다고도 할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역사는 반전의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비류나부는 이렇게 거의 정권을 포기해져가는 상황에서 한가지 다시 정권을 잡을수 있는 명분과 힘을 찾게 된다. 그거은 바로 부여에서 난 추모의 첫째아들 유리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왜 유리의 등장이 비류나부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을까?
이것에 대한 의문은 곧 풀리게 된다. 바로 유리의 등장은 추모왕의 후사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추모는 유리를 자기 다음왕위에 오르게 하고 싶었을것이다. 그렇지만 추모는 자기의 공동 세력인 소서노와의 의견 일치를 봐야 했다. 그렇지만 소서노에겐 전 남편의 자식인 비류와 온조가 있었다. 이말은 즉 만약 유리를 추모 독단적으로 다음 왕으로 세우면 그것은 현 공동정권 체제인 계루부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극단적인 경우 두세력(계루부-추모세력)의 대립으로 결국 전왕실인 비류나부가 다시 왕권을 찾이하게 되는 경우까지 발생하는것이다. 이것때문에 추모는 유리보다는 계루부의 대표인 소서노의 자식 즉 비류와 온주중 한명을 왕위에 세우려고 결정을했을것이다. 그렇지만 이 후사 문제는 그렇게 추모가 결정한다 해서 간단히 되는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리는 자기 아버지 추모처럼 욕심이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아버지와 마찬가리로 부여에서 빠져나왔을때 자기의 지지세력을 세부족 이상 가지고 고구려에 들어왔다.그리고 그는 고구려에 들어왔을때 고구려의 왕이 자기 아버지 추모이기 때문에 자기는 다음 왕이 될것이라고 생각했


을것이다. 그렇지만 실지로 보니 그런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되자 유리는 아마 초조했을것이다.그틈이 바로 비류나부에게는 절묘한 하나의 기회였던것이다. 그들은 이 틈을 타서 다시 권력을 잡을수 있다고 생각했을것이고 유리에게 접촉을 가했다.유리도 비록 자기의 지지기반이 있지만 계루부(소서노와 그의 아들 비류와 온조 세력)의 세력이 더 강함을 보고 세력의 강화에 힘을 기울이고 싶을 이때에 비류나부의 공동연합 조건은 참으로 좋은 조건이었을것이다. 그들도 이전의 추모와 계루부의 연합전선을 그대로 답습한 꼴인것이다.

결국 이 비류나부와 유리는 서로의 공동연합을 확인하며 큰 사건을 하나 일으킨다. 그것이 바로 추모왕 암살 사건이다. 여기서 추모왕을 암살했다고 적었는데 그 암살한 근거는 두가지가 있다. 첫째로 추모의 사망시기이다. 왜냐면 유리가 고구려에 오자 5개월뒤 추모는 유리가 다음 왕위에 오르라는 듯이 죽어버린다. 이것은 아마도 유리를 다음왕에 빠르게 새우고 계루부를 빠른 시간안에 누르기 위한 하나의 빠른 방법이었던 것이다.그래서 비류나부와 유리는 추모 암살에 적극 참여 했을것이다.(물론 유리는 참여 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의 나중에 행적 즉 자기 왕권을 위해서는 자기 자식도 죽이는 모습을 여러번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랬을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두번째로 광개토태왕릉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추모왕이 나라를 다스리기가 싫어져서 황룡을 불러 하늘로 올라갔다 란 대목이다. 이내용은 추모가 유리에게 죽임을 당한것을 가리기 위해 고단위적 술책인것이다.(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하는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아마도 고구려 왕실은 이것을 가림과 동시에 추모가 나라를 버리고 황룡을 올라 타고 하늘로 갔다 라고 하여 황룡을 마음대로


부릴수 있는 신과 맞먹는 존재 즉 추모는 천손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자기들의 현제 정권을 더욱 확고히 민중의 지지를 받을수 있고 신성화 할수 있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즉 이중효과를 노린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리는 졸본지역에 대하여 자기의 왕권을 강화 할수 없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데다 졸본지역은 계루부의 지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천도란 방법으로 자기의 세력을 강하고 자기 중심의 왕권으로 만들려고 한것이다.결국 추모왕은 살해 당해고 비류나부와 유리는 재빠르게 정권을 차지해 유리는 왕의 자리에 오르고 비류나부는 유리의 바탕이 되는 부가 되어 결국 계루부 추모왕 고씨에서 비류나부 유리왕 해씨로 왕실을 교체한것이다. 이렇게 해서 왕실 초기 교체 제 1 사건이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류나부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해서 완전히 잡은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그들의 세력과 맞먹는 전 왕실 계루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 추모세력과 계루부의 연계성을 연결하는 추모가 죽었다 해도 그들에게는 아직까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비류나부는 없에 버릴 의무가 그들에


게 있었다. 이것에 대하여 직감저긍로 계루부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류나부의 계루부 대 숙청을 두려워 하며 제 2의 건국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유리가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소서노를 주축으로 한 비류 온조 세력이 고구려를 버리고 남하 하게 되어 버리고 만다. 결국 비류나부는 많은 힘을 쓰지 않고도 계루부를 몰아내고 자기들이 권력을 지게 된것이다. 그리고 계루부는 비류나부의 숙청을 두려워 해 소서노를 주축으로 해서 대거 남하해 간것이다. 그래서 본국 고구려의 계루부 수는 격감했을것이다. 이제 다시 비류나부의 시대가 온것이다.그렇지만 유리왕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유리왕은 졸본에서 인심을 확고히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돼지를 통해 수도를 옮겨 새로이 자기 중심의 세력을 만든다.(여기서 돼지를 통한 것은 고의성이 다분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먼저 위에서 말했듯이, 유리왕은 졸본지역 민심 장악에 실패하였다는 점 그래서 그는 자기의 새로운 근거지가 필요했다.그러했기에 그는 수도를 천도해야했다. 두번째로 그는 돼지의신성함을 노렸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돼지는 다산을 뜻하는 풍족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귀중한 돼지를 하늘의 신인에게 바칠려고 한것이다. 이것은 더 돼지의 의미가 강해지고 신성시 되어 진다. 그러했기에 유리는 돼지를 통하

여 수도를 결정한것이다. 아니 결정이 아니라 이미 결정해놓구 돼지를 그쪽방향으로 유인하거나 혹은 풀어 그 지방에서 잡은것처럼 한것이다. 그래서 유리가 신에게 재사를 지내야 하는 신성한 돼지가도망가서 신의 뜻에 따라 그 지방에서 잡혔다. 이것은 즉 그 지방에 천도를 해야 한다는 신의 뜻이라고 하면 민심은 저절로 졸본 지역에서 옮아가게 되며 그것은 졸본지역의 몰락을 의미한다. 유리는 그것으로서 민심장악의 피해를 매꿀수 있었다. 세번째로 유리는 부여의 공격범위에서 피해 옮긴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수산물들을 쉽게 잡을수 있고 또한 해운업이 발달해서 상업이 발달하여 국민에게 졸본보다 더 이익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것이기도 하다. 졸본도 수비하기는 좋았지만. 신수도 국내성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방어하기 수얼하고 또한 부여로 부터 좀더 멀어진다.아까도 말했듯이 상업의 발달을 노려 천도하는데 발생하는 혼란을 위의 신의 계시와 함께 무마 시킨것이다.)그것이 이제 유리왕의 세력으로 변하게 되는 비류나부인것이다.
이렇게 해서 역사는 흘러 흘러 고구려 초기 제1차 왕실 교체를 이룬지 몇대 왕을 지나 모본왕까자 오게 되었다. 모본왕당시 모본왕은 삼국사기에는 특이하게도 서로 상이한 내용을 보여준다. 모본왕은 폭군인데 백성들이 굶주린것을 보고 백성들을 도와주고 나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어 북경까지 진격하며 한나라를 공격하여 많은 경제적인 이점을 찾고 그러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용이 서로 맞지 않게 되는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내요엔 역사적인 사건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제 2차 고구려 왕실 교체란 사건 때문인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본왕때 다시 계루부 고씨의 왕실로 콤백하는 것.
이 사건은 이렇다. 소서노의 계루부가 대부분 남하하여 본국 고구려에는 적은 수의 계루부가 남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시 정권을 원했고 은밀히 전 비류나부가 그랬듯이 힘을 길렀다.그 힘을 길러 왕을 뒤바꿀수 있는 시기가 바로 모본왕때 였던것이다.
그래서 모본왕은 성군이면서도 다시 정권을 찾은 계루부측에 의해 폭군으로 변모하게 된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사건은 이뤄 진것일까?
이사건은 모본왕을 두로란 자가 살해하여 왕실이 다시 계루부로 돌아가게 된것이다.
아마도 내 추측이건데 두로는 계루부 출신이었을것이다. 그래서 그는 계루부와 짜고 모본왕을 죽인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다시 정권을 차지한 계루부는 다음 왕을 세워야 하는 문제 섰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말을 잘들어 주는 허수아비 왕을 선택했다. 그가 바로 유리왕의 6번째 아들인 재사,그리고 그의 아들이 태조왕 궁인것이다.그래서 그들은 태조왕이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를 왕위에 세우지 않았다. 태조왕 나이를 그당시 생각해 본다면 그의 아버지는 당연히 정치를 하고도 남을 만한 나이였는데 말이다. 이것은 곧 왕이 될 가망성이 전혀 없는 유리와으이 막내아들을 선태 그리고 또 그의 아들인 태조왕 궁을 선택한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계루부 중심의 확고한 정권을 위해서 인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허수아비 왕 궁을 세웠다. 그렇지만 다 알겠지만 태조왕 궁은 대단한 인물로 많은 정복과 내부 안정을 이뤄낸 왕이다. 한마디로 계루부는 왕을 선택할때 어린것만을 판한한 잘못을 범한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래서 이전 왕실 교체기때와 마찬가지로 태조왕도 계루부 고씨를 쓰게 된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 초기의 왕실 교체는 이렇게 이뤄지고 성립된것이다.
서로 얽키고 설키고 하며 서로를 견제 혹은 도와주며 추모와 유리와 태조왕 궁의 세력은 이렇게 형성되면서 고구려 초기 왕실을 계루부(추모왕 고씨)-비류나부(유리왕 해씨)-계루부(태조왕 고씨)로 만든것이다. 즉 그들은 피줄은 똑같은데 자기의 지지 기반의 차이에 따라 성을 바꿔나가고 혹으 자기의 소속부를 바꿔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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