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백제를 그리며 '큰 나라'(구다라)라고 한데서 유래

吾心竹--오심죽-- 2010. 1. 29. 15:30

[이남교의 일본어 源流 산책 29]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
일본에 건너간 유민들이 조국 백제를 그리며 '큰 나라'(구다라)라고 한데서 유래
 
 
 
일본 고대사에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뭐니뭐니해도 백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 근초고왕대 405년에 왕인(王仁) 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왔고, 성왕(聖王)대 552년에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가 불교를 처음으로 전파했다'고 되어 있다.

660년 8월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고, 663년 6월 백마강의 마지막 결전 때까지의 3년간에 수천의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들 대부분은 지식 계층이었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새로운 농기구와 토목기술, 불사, 불경, 신의술인 침술, 고대 국가를 형성하는 율령체제 등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대부분의 백제문화가 유입되어 일본은 바야흐로 새로운 신문명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일본으로 건너간 당시의 백제인들은 크게 우대되어, 백제의 직위를 그대로 인정받아 관료나 장군 등으로 임명되었는데, 일본 정부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행정조직을 16관위에서 20관위로 확대 개편까지 하였다. 당시 일본정부의 요직인 국방대신, 문부대신 등을 모두 도래한 백제인들로 임명한데서 생겨난 말이 '아마쿠다리'(天下り) 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란 뜻으로, 오늘날에도 고급 관료가 퇴직하고 관련기관의 간부 등으로 내려가는 것을 '아마쿠다리'라고 한다. 그 당시 일본의 수도는 시가현(滋賀縣) 오오미(近江-지금의 교토 근처)였으며, 673년에 아스카 지방으로 천도하고, 또다시 710년에 '나라'로 이전하는데 이때부터 784년까지를 '나라(奈良)시대'라고 한다.

'나라'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줄임말로서,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이곳을 백제 유민들은 '나라'라고 불렀고, 후에 한자의 아데자를 붙여 '나라'(奈良)가 되었다. 백제 유민들은 사라진 조국 백제를 '큰 나라'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변해서 '쿤나라→구다라'(百濟)가 되었고, 백제를 '구다라'라고 하는 것은 이에 기인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은 신라(新羅)는 '시라기', 고구려(高句麗)는 '고쿠리'라고 하면서도 백제(百濟)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하쿠사이'라 하지않고, '큰 나라' 즉 '구다라'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그들의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말에 대한 집착은 우리의 고유한 풍습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러 형제가 있을 때 큰집은 조상에 대한 제사나 모든 것을 주관하기 때문에 재산을 전부 물려주므로 다른 형제들 보다 넉넉하고 많은 것을 내포한다.

따라서 지금 백제 유민들이 살고 있는 일본이 '나라'라면, 백제는 맏형격인 '큰 나라'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 '구다라'다.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는 말은 직역하면 '백제에 없다'가 되는데, 이 말뜻은 '시시하다'이다. "좋고 훌륭한 것은 다 백제에 있는데, 이것은 백제에 없어. 그러니 시시한 거야"라는 말이다.

경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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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07월 22일 -

 

 

 

 

 

[일본 속의 백제 혼](2)오사카의 구다라(百濟)

 

 

1300년 흘렀어도 백제정신 오롯이…아! 경이롭도다
▲오사카 히라카타시의 주택가에 자리잡은 왕인박사의 묘지. 2004년 세워진 백제문의 모습(위). 왕인박사 묘의 비석. 지난 달 29일 방문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추모하는 위패와 꽃이 놓여 있었다(아래).

일본 속의 백제 혼을 찾아 현대에서 고대로 떠나는 시간여행은 각별하고 경이롭다. 그 옛날 백제인들이 첫 발을 디딘 이후로 십 수세기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사카는 ‘구다라(百濟)’의 정신과 숨결을 오롯이 품고 있다. 오사카의 넓은 뜰은 고대 백제 도래인들의 터전이었음을 웅변하는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일본에선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른다. 일본 사학계의 거두, 우에다 마사하키 교토대 명예교수는 “구다라라는 말은 고대로부터 일본에서 백제를 ‘큰 나라’라고 부른데서 생긴 말이다”고 했다. 구다라로부터 ‘구다라나이’라는 말이 나왔다. ‘백제 물건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백제 것 만이 최고라는 칭송이다.

‘큰 나라’ 백제의 흔적은 일본 제2의 대도시인 오사카에 넓게 펼쳐져 있다. 오사카 철도역인 ‘백제역’, 시내버스 정류장인 ‘백제’가 있고 오사카시의 공립학교인 남백제초등학교는 1894년부터 남백제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백제교라는 교량도 오사카에는 2곳이나 된다.

백제역은 여느 철도역과 다른 게 없는 모습이다. 백제 왕도인 공주, 부여에서 사라진 명칭이 망각의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일본 땅에서 당당히 위용을 뽐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앞에서 서면 고대 백제인들이 오사카의 땅을 일구며 선진 문물을 전하던 모습을 저절로 떠올리며 머리 숙이게 된다.

오사카는 고대에 백제주(百濟州)로 불렸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서에는 백제군이라는 명칭이 전한다. 당시 백제계 왕이 살던 백제궁과 백제대사라는 절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16세기 말엽부터 갑자기 백제군이라는 행정 지명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홍윤기 백제사 정책특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임진왜란을 일으키던 시기라는 점을 주목한다. 이번 탐사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어로 국가를 뜻하는 나라는 일본 나라(奈良)현의 지명이고 나라현에는 ‘나라’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이지메(따돌림)’을 받았다는 게 현재도 나라 성을 쓰고 있는 일본인들의 전언이다.

오사카의 백제 유적은 실로 방대하다. 그만큼 고대 백제의 뿌리 깊은 일본 진출을 실감케 한다. 고대 백제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인(王仁)박사의 유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왕인은 고대 일본의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 묘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오사카 히라카타(枚方)시의 꼬불꼬불한 주택가 길을 헤맨 끝에 왕인박사의 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1938년 오사카부 사적으로 지정된 600여㎡ 규모의 묘지는 잘 단정돼 있다. 입구에는 5년 전 한일문화친선협회를 중심으로 기금을 모아 세운 ‘백제문’이 세워져 있고 그 안으로 들어서자 비석이 보인다. 비석 앞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는 글과 함께 꽃이 놓여 있었다. 묘지는 무궁화공원이 감싸고 있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파한 왕인의 위업을 추모하듯 논어와 천자문의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묘지는 이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왕인 묘를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 30여명이 매일 청소하는 등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오사카 다카이시(高石)시에는 왕인 박사를 제사 모시는 사당도 있다. 국가 사당인 다카이시신사(高石神社)는 650년 창건돼 1635년 재건됐다.오사카부 다카이시시 교육위원회에서 편찬한 문헌집에는 “왕인 박사를 제사 모시는 사당으로 알려져 온다”고 밝히고 있다. 오사카 외에도 왕인 박사의 유적과 유물은 일본 전역에 퍼져있다시피하고 최근에도 관련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일본에서의 왕인박사의 문화사적 위상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오사카에는 ‘백제’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유적이 여럿 있다. 오사카의 한 복판에는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가 있고 그 옆으로는 ‘백제사적’이 일본에서의 백제사를 지탱하고 있다. 백제왕신사는 의자왕들의 아들인 선광왕(善光王)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선광왕은 백제 멸망 이전에 일본에 건너와 있다가 백제 멸망 이후에 일본 왕실에서 백제왕이 됐고 그의 일족들도 높은 벼슬을 차지하는 등 상류 귀족으로서 번성했다는 기록이 일본 문헌을 통해 전한다. 당시 오사카에서는 선광왕족을 중심으로 백제인들이 거주지역이 더욱 확대됐다고 한다. 백제왕신사는 수 백여개의 표석들이 신사를 감싸고 있고 중앙에 사당이 있다. 백제왕신사에서 지금까지도 매년 한 차례씩 궁중아악을 연주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백제왕신사를 방문한 시간은 평일 오후. 주변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참배를 하고 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백제왕신사 옆의 백제사적은 오사카에서는 오사카성과 함께 단 2곳 뿐인 국가 지정 특별사적이다. 백제사적도 백제와 인연이 깊다. “일본 조정의 중신이던 백제왕남전(百濟王南典)이 서거하자 쇼무왕(聖武王, 724-748)이 애통해 하며 사묘(祠廟)와 백제사를 세우도록 조칙을 내림으로써 일본 왕실이 관장하는 새로운 성지가 됐다”고 전한다. 백제왕신사와 함께 수 백년된 소나무로 둘러쌓인 백제사적은 언덕지대에 위치해 있어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가람 터에는 주춧돌이 웡래 있던 자리에 놓여 있어 금당과 동탑, 석탑, 중문, 서문 등의 위치와 함께 그 웅대한 면모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1952년 특별사적으로 지정된 뒤 지난 2005년 11월부터 유물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오사카의 백제계 유물과 유적은 절과 신사, 고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백제계의 후손을 모시는 신사도 구마타신사(杭全神社) 등 여러 개나 되고 백제계 가문에서 세운 사찰도 후지이데라(葛井寺), 노나카데라(野中寺) 등도 있다. 또 백제의 왕족 출신 또는 귀족 추린 여승들이 불교를 전파했던 백제니사(百濟尼寺)도 유서깊은 백제계 유산이다.

글=이용 기자 yong6213@daejonilbo.com

사진=장길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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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한 복판에 있는 백제왕신사의 입구.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왕(善光王)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백제왕신사의 사당. 신사를 찾은 일본인이 참배하고 있다.

이 용기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