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百 濟(BC.213∼AD.660년:873년)

吾心竹--오심죽-- 2009. 10. 30. 19:24

百 濟(BC.213∼AD.660년:873년)  
율곤학회

百  濟(BC.213∼AD.660년:873년)

 

 


                  

 소해는 몽고지방의 바이칼호를 지칭하는데,
수나라 때까지 북해로 표기되어 오다가,
당나라 이후의 지도에는 소해로 표기되어 있다.

 ◀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백제는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 양서(梁書) 송서(宋書) 통전(通典)에 의하면, 고구려는 요동(遼東),
     백제는 요서(遼西) 진평이군(晋平二郡)에…
 ◀ 백제의 북쪽 국경선에는 끊임없는 말갈의 침입…

 

 

① 건국

             처음에는 십제(十濟)로…
             북사(北史) 수서(隋書) 통전(通典)에는 시조를 구태씨(仇台氏)로…

         ※ 백제는 BC.213년에 건국하여 AD.660년에 망하였으므로 873년간 존속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한나라 제홍가(帝鴻嘉 BC.21∼17년 辛丑) 3년이라 했다.
             그러나 백제본기 내용으로 보아서, 고구려와 같이 백제의 연도도 실제 195년의 차이가 있었다.

         ★ 백제의 마지막 왕은 의자왕이 아닌 풍왕(豊王 AD.659년)으로, 재위기간 1년이다.

         ※ 삼국사기 의자왕편에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선조는 동일하며, 조상(雲祖)은 堯임금의 아버지인
             제곡고신씨(帝 高辛氏)라고 기록하고 있다.

         ※ 백제에는 여덟 성(姓)이 있었다.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 氏)·해씨(解氏)·정씨(貞氏)·국씨(國氏)·목씨(木氏)·묘씨(苗氏).
             백제의 성을 지닌 후손들이 한반도에 살지 않는 것도, 백제가 대륙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백제(百濟)는 처음 십제(十濟)라 하여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진평이군(晋平二郡)에,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그리고 10명의 신하들이 건국했다.

         ※ 수서(隋書)와 통전(通典)에는, 백제는 십제(十濟 BC.213년) 때 구태씨(仇台氏)가
             진평이군(晋平二郡)에 도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양서(梁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百濟. 卽後漢末夫餘王尉仇台之後.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백제는 후한 말 부여왕이었던 구태씨(仇台氏) 이후에 백가(百家)가 모여 바다를 건넜다.
             그로 인해 백제(百濟)라고 했다.

         ※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을 간략하게 소개해 본다.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或云高句麗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中略.
               未畿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此曰溫祚. 中略.
               遂與烏干. 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中略.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中略.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 帝鴻嘉三年也. 中略.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 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帶方故地. 中略.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이다. 혹 고구려 주몽(朱蒙)이라 했다.
              스스로 북부여에서 험난한 길을 따라 멀리 도망갔다.

          ★ 北扶餘:그 당시 내몽고의 창도현(昌圖縣). 만주에 있는 長春의 西南이며 심양(瀋陽)의 西北인
                         내몽고의 과이심사지(科爾沁沙地) 지방이다.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도망쳐 온 곳은 졸본(卒本)이 있는 부여(扶餘) 땅이다.
              언제인가 부여왕이 죽고 주몽(朱蒙)이 왕위에 올랐다. 주몽의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자는 비류(沸流)였고, 차자는 온조(溫祚)였다.
              비류와 온조는 오간(烏干)과 마여(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南行 길에 올랐다.
              많은 백성들이 따라왔다. 열 명의 신하가 말하기를, 오직 하남(河南)의 땅이 좋다고 하였다.
              북쪽에는 대방(帶方)과 한수(漢水)가 있었다.

           ★ 帶方:後魏가 있던 곳. 즉 지금의 洛陽縣 東北二十里.

           ★ 漢水:春秋戰國時 河水임. 지금의 黃河支流.

              한수(漢水)는 섬서성(陝西省) 영강현 북쪽 파총산(播 山)에서 흐르는 물을 말한다. 중략.
              열 명의 신하들이 말하여도 비류는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나뉘어졌다.
              비류(沸流)는 미추홀에서 살게 되고, 온조(溫祚)는 하남(河南) 땅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했다.
              그 후 열 명의 신하가 날개처럼 도왔다. 그리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이때가 漢나라 제홍가(帝鴻嘉)가 3년이었다. 중략.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 의하면, 고구려 동명왕의 후손 구태(仇台)가 있었다. 인의가 돈독했다.
              처음에 나라를 대방의 옛 땅에 세웠다. 중략.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百濟가 河南 땅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유차하남지지(惟此河南之地)라 했으므로, 분명히 중국 河南省 땅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 1474년 成宗 5년에서 1530년 중종 25년간에 저술된, 동국사략(東國史略) 본문을 소개해 본다.
             삼국의 신라, 고구려, 백제 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百濟始祖溫祚立. 漢鴻嘉三年新羅始祖四十年. 父高句麗王朱蒙以在東扶餘時. 所娶禮氏女子.
               類利爲太子. 溫祚與兄沸流. 恐不相容南行. 沸流居彌鄒忽今仁川府. 溫祚都河南慰禮城今稷山縣.
               國號百濟. 初以烏干等十人從行. 初號十濟後以百姓樂浪從改百濟. 後徙南漢山城今廣州.
               又徙南平壤城今漢京』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漢나라 제홍가(帝鴻嘉) 3년이며, 신라 시조 40년(BC.18년)이다.
            아비는 고구려 왕 주몽인데, 주몽이 동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 성을 지닌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유리(類利 또는 琉利)라는 태자를 두었다.
            온조(溫祚)와 형 비류(沸流)는 태자 유리와 서로 용납되지 않음을 두려워하여 南行 길에 올랐다.
            비류는 미추홀에 살게 되었다. 그곳은 지금의 인천부(仁川府)였다.

           ★ 미추홀의 仁川府는 三國 당시 중국 안휘성(安徽省) 영벽현(靈壁縣)임이, 필자의 조사 결과 밝혀졌다.

            온조는 하남성(河南省)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 지금의 직산현(稷山縣)이다.
            그리고 국호를 백제라 했다.

           ★ 하남 위례성이 있는 직산현이라면, 지금 중국 산서성(山西省) 안읍(安邑)과 하현(夏縣)의
               북쪽에 있는 곳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56대 경순왕(敬順王)이 935년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항복한 곳이
               중국 산서성 안읍(安邑)이란 사실이, 新羅本紀 第十二 敬順王八年에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1066쪽 運城 참고)
               본문에서 河南慰禮城이라고 기록한 것은 하남성에 있는 위례성임을 뜻하는 것이다.

               백제는 처음 오간(烏干)과 열 명의 신하가 함께 남행 길에 올랐으므로 십제(十濟)라는 나라
               이름을 썼지만, 훗날 낙랑(樂浪)의 백성들이 모두 따라왔으므로 국호를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그 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은 지금 광주(廣州)이다.

           ★ 현 중국 홍콩 북쪽 남해부(南海府) 자리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사간 곳이 남평양(南平陽)이 있는 지금의 한경(漢京:五代時 十國 중 하나였던
              南漢의 서울을 말함)으로 옮긴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1987년 10월에 간행된 중화인민공화국 지도집 89쪽, 廣西壯族自治區에는 百濟라는 지명이
               그대로 적혀있다. 新華書店上海發行.

               앞 본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百濟의 미추홀이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한반도가 아니라
               분명히 중국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中國地圖集에도 있지만 낙랑(樂浪)의 백성들이 모두 따랐으므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고쳤다는 점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보면 계림(鷄林)을 낙랑(樂浪) 땅이라고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② 도읍지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위례성(慰禮城)

         ※ 삼국사기에는 도패대이수(渡浿帶二水)라고 하여, 온조와 비류가 도망올 때 대수(帶水)와
             패수(浿水)의 두 강을 건넌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 이르면 미추홀(彌鄒忽)이며, 미추홀은 즉 지금의 조선의 인천(仁川)이라고 되어있다.
             한반도에 있는 인천(仁川)이 미추홀(彌鄒忽)이 아니라, 패수(浿水)와 대수(帶水)가 있는 곳이
            조선의 인천이며, 이곳이 미추홀(彌鄒忽)이라는 것이다.

         ※ 패수를 찾아보자. 패수는 한(漢)나라, 위(魏)나라 때 있었던 물이다.
             수(隋)나라, 당(唐)나라 때까지도 패수(浿水)라고 했다.

            수서(隋書) 고려전에 의하면 도읍지인 평양성에서 동남쪽으로 흘러가는 물이라 했다.
            옛 백제국의 북쪽 경계로 흐르는 물이 패수이다.
            패수를 혹 예성강(禮成江)이라고도 하고, 혹은 임진강(臨津江), 대동강(大同江)이라고도 부른다.

         ※ 대수(帶水)는 대방(帶方) 지역으로 흐른다고 하여 대수라 했다.
             대방은 진(晉)나라가 도읍한 낙양이다. 낙양 지방에서 황하의 본류와 다른 물줄기가 옆으로 흐르는
             강물을 대수라 한다.
             이 두 강물의 물줄기를 타고 남쪽으로 왔다면 이곳은 분명히 대륙의 하남성(河南省)이다.

         ※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유차하남지지(惟此河南之址)라 했으므로, 두 번째로 남하하여 중국대륙인
             하남성(河南省) 땅에 도읍을 옮겼음을 나타내고 있다.
             유차(惟此)는 오직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남지지(河南之址)라는 뜻이다.
             지지(之址)라는 말은 터이다. 즉 그 땅이라는 뜻이다.

             지(址)란 기(基)와 통한다. 지(址)는 지( )자와 같다. 그리고 지(趾)자와 통한다.
             그렇다면 강의 남쪽이 아니라, 하남성의 땅에 위례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篇에는, 백제가 하남성(河南省)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고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溫祚都河南慰禮城以十臣爲輔異國號十濟』

          ※ 하남성(河南省)임을 알 수 있는 글귀가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2백1권 당기(唐紀) 17권 1938쪽에『高麗百濟河北之民』이라고 적고 있다
              자치통감은 삼국사기를 기록할 때 고증본으로 사용된 책이다.
              고려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를 말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은 지금의 지나대륙 하북성 백성들이라고 되어있다.

 

 


                  

  고대 사해(四海)의 위치.
  황해(黃海)와 동해(東海),
  청해(靑海)와 서해(西海)가 함께 표기되어 있고,
  홍콩 앞 바다를 남해(南海)로,
  몽고지방의 바이칼호를 북해(北海)라고 표기하고 있다.
  북해는 당(唐)나라 이후부터 소해(小海)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③ 강 역

         ※ 구당서(舊唐書) 一白九十九上 列傳 第一百四十九上 東夷篇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國.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 中略.
              又外置六帶方管十郡. 中略.』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한 갈래다. 일찍이 마한의 옛 땅이다.
            백제의 서울에서 동쪽으로 6천리다(중국 四川省 萬縣에서 보면 上海까지 6천리이다).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동북으로는 신라가 있었고, 서해(西海)로는 월국에 이르고, 남해(南海)로는 왜국에 이르며,
            북해(北海)로는 고구려에 이른다.
            왕이 거하는 곳으로는 동서에 두 개의 성이 있었다. 중략.
            그리고 나라 밖으로 여섯 대방(帶方)을 두어 십군(十郡)의 관할을 두었다. 중략

         ※ 양서(梁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百濟.... 晉時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 晋平二郡.』

            진(晉)나라 때에 고구려는 요동(遼東)에 있었고, 백제는 요서(遼西) 지방의 진평이군(晋平二郡)에
            있었다. 위서(魏書)에 의하면 부여국의 북쪽 천리에 고구려가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 통전에 의하면 백제가 있었던 곳은 요서(遼西)에 있는 진평이군(晋平二郡)이다.

         ※ 송서(宋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 有遼東. 百濟 有遼西.
               百濟所治謂之. 晉平郡晉平縣.』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후 고려는 요동에서 다스렸고, 백제는 요서의 진평군, 진평현에서 다스렸다

         ※ 이것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기록은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 예전편에,
             중국 곤륜산 길 서쪽의 가까운 길목에 고구려와 백제가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목천자전(穆天子傳) 예전편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 백제(百濟)는 약 1백 나라라는 방대한 국가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중국 신강성(新疆省) 토노번현(吐魯番縣)과 선선현을 서주(西州)로 나누어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의 작은 나라는 사방 1백 리였으므로 약 1만 리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三國의 역사를 자세히 발표함).

         ※ 백제는 기원전 213년 진(秦)나라가 건국된 후 마한 땅에 십제(十濟) 또는 백제(百濟)라 하여
             건국되었다. 진나라가 세워진 후 8년 후의 일이다.
             이때는 흉노의 잦은 침략으로 하북 지방에 있던 백성들이 남쪽인 홍콩, 광주, 남해 그리고
             월남 북쪽 지방으로 약 5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전란을 피해 이주하던 시기였다.

             흉노들은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를 시작하였다.
             흉노들은 하남성 땅까지 내려와 모두 점령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백제는 이런 와중에 차츰차츰 남하를 시작했고, 강대한 국가를 건설했다.
             강성기의 백제 강역은 대단했다. 패수(浿水)의 북쪽이 거의 모두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면,
             남쪽의 거의 모두라 할만큼 백제의 강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의 대도(大道), 즉 큰 섬인 필리핀, 보르네오, 자바, 기타 동남아시아에 널려 있는
             모든 큰 섬들이 백제의 영토였으며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다.(史記 五帝 夏本紀 참고)

             그러나 남조(南朝)의 진통으로 백제의 국운이 쇠해 갈 무렵, 당나라가 건국하면서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와 백제에 야금야금 침공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때부터 사방에서 소모적인 전쟁이 끊일 사이 없이 없었고, 강역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변화가
             심화되어 갔다.

             한때는 하북성, 산서성 북방까지 성을 쌓을 정도로 강했던 백제가 당과 신라의 틈새에서 점차로
             그 강역이 좁아져 갔다.
             결국 백제는 당과 신라의 합공, 그리고 말갈과 해(奚), 왜(倭)의 틈새에서 결국 견디지 못했다.
             백제의 많은 백성들이 주류성에서 굴 집을 짓고 끝까지 항쟁했다.
             그러나 주류성에서 왜인(倭人)과 만나 싸우고, 백강구에서는 4번 싸워 이겼지만, 4백여 척의 배가
             불타는 바람에, 백제 32대 마지막 왕인 풍(豊)이 몸을 피해 도망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AD.660년을 넘기지 못한 채, 망하고 말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의 북쪽 경계에는 말갈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갈의 전(남북조시대) 이름은 물길이다.
 
삼국사기에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 
기존 역사서 대로라면, 낙랑은 당연히
백제의 북쪽에…

 

④ 말갈(靺鞨)과 백제와의 관계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말갈이 백제의 북쪽 국경선과 맞물려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 온조왕 2년의 기록을 보자.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에 맞닿아 있다.
          그들은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역시, 북쪽 국경선과 접한 말갈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 백제 의자왕 15년의 기록을 보자.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侵我北界. 沒三十餘城.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리기를,백제와 고구려 말갈이 우리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 신라본기의, 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14년의 기록을 보자.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말갈이 북쪽 경계에 크게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 그런데 수(隋), 당(唐) 시의 지도를 보면, 말갈은 요동 흑수(黑水)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 그리고 각종 정사(正史)에는 고구려의 북쪽에 말갈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자.

      ★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靺鞨蓋肅愼之地. 中略. 東至於海. 西接突厥. 南界高麗.』

          말갈은 숙신의 땅에 있다. 중략.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서쪽으로는 돌궐과 접해 있다.
          남쪽 경계에는 고구려가 있다.

      ★ 수서(隋書) 말갈(靺鞨)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靺鞨在高麗之北』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 그런데 정작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는 말갈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말갈에 대한 기록】

      ▼ 1대 온조왕(溫祚王)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三年秋九月. 靺鞨侵北境.
         八年春二月. 靺鞨賊三千 來圍慰禮城
         十一年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十三年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十八年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二十二年秋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四十年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釜峴城.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선에 연이어 있는데,
         사람들이 용맹스럽고 속임수가 많아..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에 침입했다.
         8년 봄 2월. 말갈의 적 3천 명이 위례성을 포위했다.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부수었다.
         13년 여름 5월.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땅을 침범하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 역사서에 보면, 낙랑은 평양, 황해도 일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존 역사서 대로라면, 낙랑은 당연히 백제의 북쪽에 있어야할 것이다.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엄습했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칠중하에서 맞아 싸웠다.
        22년 가을 9월. 왕이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부현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말갈의 적과 마주쳤다.
        한번 싸워 물리쳤다.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했다. 동 11월에 또다시 부현성을 습격했다.

      
       ▼ 2대 다루왕(多婁王)

          三年冬十月. 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四年秋八月. 古木城昆優與靺鞨戰 大克.
          七年秋九月. 靺鞨攻陷馬首城.
          二十八年秋八月. 靺鞨侵北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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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겨울 10월. 말갈과 마수산 서쪽에서 싸워 이겼다.
          4년 가을 8월. 고목성의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7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을 공격하여 함락 당했다.
          28년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방을 침입했다.

       ▼ 3대 이루왕(已婁王).

       ★국사 교과서와 국사대사전에는 기루왕(己婁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원본에 의하면, 기(己)자가 아닌 이(已)자였다.

          三十二年 秋七月. 靺鞨入牛谷.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救之.

          32년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성에 침입했다.
          49년.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아, 글을 보내어 병사를 청하므로,
          왕은 다섯 장군을 보내어 구원하게 했다.

       ▼ 5대 초고왕(肖古王)

          四十五年冬十月. 靺鞨來攻沙道城. 不克.
          四十九年. 襲取靺鞨石門城. 冬十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45년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을 침공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49년.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말갈이 날랜 기병을 이끌고 쳐들어와
          술천성까지 이르렀다.
 
      ▼ 6대 구수왕(仇首王)

          三年秋八月. 靺鞨來圍赤峴城
          七年冬十月. 靺鞨寇北邊. 遣兵拒之.
          十六年十一月. 靺鞨入牛谷界.

          3년 가을 8월. 말갈이 적현성을 포위했다.
          7년 겨울 10월. 말갈의 도적이 북쪽 변방에 침입하므로, 병사를 보내어 방어했다.
          16년 11월. 말갈이 우곡성 경계에 침입했다.
  
       ▼ 8대 고이왕(古爾王)

          二十五年春. 靺鞨長羅渴. 獻良馬十匹
        
          25년 봄. 말갈의 추장 나갈이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 16대 진사왕(辰斯王)

         三年秋九月. 與靺鞨關彌嶺. 不捷
         七年夏四月. 靺鞨攻陷北鄙 赤峴城.

        
         3년 가을 9월. 말갈과 관미령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7년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경계의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25대 무령왕(武寧王)

          三年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古木城.
          六年秋七月.靺鞨來侵. 破古木城.
          七年夏五月. 立二柵於古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高老.
          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戰退之.

         3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책을 불사르고, 진격하여 고목성을 공격했다.
         6년 가을 7월.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을 쳤다.
         7년 여름 5월. 고목성 남쪽에 2개의 성책을 세우고, 장령성을 쌓아 말갈을 방비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모의하여 한성을 치려고 진격하여 횡악 하에 주둔했다.
         왕이 병사를 출전시켜 물리쳤다.

       ▼ 31대 의자왕(義慈王)

         十五年 八月. 王與高句麗靺鞨侵攻破新羅三十餘城.

         15년 8월. 의자왕은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다.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侵我北界. 沒三十餘城.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리기를,
         백제와 고구려 말갈이 우리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⑤ 백제의 성(城)을 통한 고찰

           마지막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백제의 성을 조사하여, 그 강역을 대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한다.
           삼국사기에 백제본기에 나오는, 백제의 성을 조사하여, 대략 뽑아보았더니 65개였다.
           1. 위례성(慰禮城). 하남성(河南省)에 있다.
           2. 독산성(禿山城). 독산현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사천성 유양주(酉楊州)로, 청(淸)나라 때
               독산현이라 함
           3. 남한산성(南漢山城). 대륙의 남쪽 광주(廣州) 옆에 있는 남해(南海)를 말한다.
           4. 남평양성(南平壤城). 한경(漢京)이라 하며, 한양성(漢陽城)이라고도 한다.
           5. 구천성(狗川城). 독산성과 함께 낙랑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
           6. 도곤성(都坤城).
           7. 적현성(赤峴城). 적성현에 있다. 이곳은 한나라 때 상곡군(上谷郡) 북쪽 경계에 있다고 함.
              상곡군은 하북성 역현(易縣)이다.
           8. 석현성(石峴城).
           9. 관미성(關彌城).
           10. 수곡성(水谷城). 하북성 완현 서북이다.
           11. 쌍현성(雙峴城).
           12. 북한산성(北漢山城). 산서성 태원이다. 이곳은 백제 땅이었으나, 백제가 망한 후 모두 신라 땅이 됨.
           13. 대두산성(大豆山城).
           14. 한성(漢城). 한주(漢州)로 사천성 덕양군이다.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이다.
           15. 웅진성(熊津城). 웅이현(熊耳縣)이나 웅이산(熊耳山)에 있는 것으로 지명사전에는 적고 있다.
                이곳은 하남성 낙녕현(洛寧縣) 동북이며, 한 한 곳은 하남성 노씨현(盧氏縣) 서남 70리이다.
     
           16. 위대성(葦大城).
           17. 두산성(豆山城).
           18. 대두성(大豆城).
           19. 한산성(漢山城).
           20. 우산성(牛山城). 우산(牛山)에 있는 것으로, 강소현 동해현(東海縣) 서남 70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1. 우두성(牛豆城). 우두산에 있으며, 강소성 강녕현(江寧縣) 남쪽이다. 일명 우수산(牛首山).
           22. 우두산성(牛頭山城). 우수산(牛首山)이나 우두산(牛頭山)에 있다.
           23. 사비성(泗 城). 사주(泗州)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강소성 숙천현(宿遷縣) 동남이다.
           24. 사현성(沙峴城).
           25. 이산성(耳山城).
           26. 치양성(雉壤城).
           27. 괴곡성(槐谷城).
           28. 봉산성(烽山城).
           29.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
           30. 금현성(錦峴城).
           31. 원산성(圓山城). 복건성의 용계현(龍溪縣) 서남 10리.
           32. 사도성(沙道城).
           33. 우곡성(牛谷城).
           34. 와산성(蛙山城)
           35. 술천성(述川城).
           36. 부현성(斧峴城).
           37. 구곡성(臼谷城).
           38. 가림성(加林城).
           39. 가불성(加弗城).
           40. 장령성(長嶺城).
           41. 고목성(古木城).
           42. 웅천성(熊川城). 웅이산(熊耳山)에 있다. 하남성 노씨현(盧氏縣)에 잇다.
           43. 각산성(角山城). 각산(角山)에 있다. 강서성 파양현( 陽縣)에 있다.
           44. 송산성(松山城). 직예성(하북성) 청원현(淸苑縣) 서북 70리.
           45. 석두성(石頭城). 강소성 강녕현(江寧縣) 서쪽 석두산에 있다.
           46. 석토성(石吐城).
           47. 가잠성( 岑城).
           48. 모산성(母山城).
           49. 서곡성(西谷城).    
           50. 독산성(獨山城). 본래의 성 이름은 사비성(沙卑城) 또는 비사성(卑沙城)이다.
                당나라 정명진에 의해 격파당한 후 독산진(獨山陳)이라 했다가 독산성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 서남 18리.
           51. 무산성(茂山城).
           52. 감물성(甘勿城).
           53. 자사성(自蛇城).
           54. 아차성(阿且城). 기록이 없으나 말갈의 잡종이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말갈과 접하고 있는 북쪽 국경지역인 것 같다.
           55. 주류성(周留城).
           56. 석도성(釋都城).
           57. 신성(新城). 춘추시대 때 진(晉)나라가 있던 땅이라고 적고 있다.
                이곳은 산서성 문희현(聞喜縣) 동쪽 29리.
           58. 마천성(馬川城). 산서성 삭현(朔縣).
           59. 당항성(棠項城). 백제 때 옛 선인들이 살던 곳이다.
                청해성 청해(靑海)가 있는 대적석산(大積石山) 일대.
                백제인들이 고구려인들과 함께 뒤섞여 살았으나 당나라가 침공하면서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곳.

           이외에도 앵잠(櫻岑), 기잠(岐岑), 봉잠(烽岑), 속함(速含), 기현(旗懸), 용책(冗柵) 등의 성이 있었다.

 

 

 

百 濟 年 代 表

    百濟王(暎)(一名 溫祚王), 樂浪君 鎭東大將軍.
   (宋書卷九十七 列傳 第五十七 2392쪽 본문참고)
    건국: B.C.213년, 亡 A.D.660년. 873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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