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백제 부흥군 지원한 왜 왕가 정체는?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

吾心竹--오심죽-- 2009. 10. 30. 19:11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 왕가 정체는?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기 전 왜는 백제와 어떤 관계인가?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3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왕가의 정체는?
(2부) 칠지도와 응신을 통해본 왜왕가의 비밀은?
(3부)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


강력한 해양대제국 백제는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과 신라의 기습으로 의자왕이 붙잡히고 660년 한순간에 나라가 망한다. 그러나 왕족인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 등이 주도한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200여성을 차지함으로서 백제성의 거의 대부분을 회복하자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출병시킨다. 복신은 왜왕에게 의자왕의 비보를 전하고, 부여풍왕자의 귀국을 청하면서 원병을 요청한다.    

왜국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이 돌아와 왕위에 올라 백제는 다시 부활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백제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까지 죽이려다 오히려 복신이 부여풍에게 처형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결국 왜병은 백강 어귀에서 당나라에게 4번 싸워 다 패하고 만다. 배 400척이 불타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어 해수가 붉어졌다고 <삼국사기>는 적고있다. 전투에 패한 부여풍 왕은 고구려로 도망을 간다. 이 때가 663년으로 <일본서기>는 이 해를 백제 멸망의 해로 적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왕자가 왜국에 있다가 돌아와 백제왕이 되고, 복신이 왜국에 원병을 청하자 조건 없이 군대가 왔고,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백강에서 전투를 벌인다. <구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왕자가 왜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에 투항했다는 내용이 있다. 백제 왕자가 뭐길래 왜군을 거느리고 지휘하는가?

그리고는 <일본서기>에 이상한 기록을 남겼다. “백제 주유성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 이 때에 국인이 서로 말하길 “주유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이하생략)”(百濟州柔城, 始降於唐, 是時, 國人相謂之曰, 州柔降矣, 事无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 

그리고 668년 고구려까지 멸망하고 고구려의 부흥운동까지 실패하자, 670년 12월 왜국(倭國)은 일본(日本)으로 국호를 고친다. 그들 말이 “해돋이와 가까운 곳이어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고 <삼국사기>에 적혀있다.

백제와 왜국과의 관계가 도대체 어떤 사이이기에, 백제의 요청에 의해 아무 조건 없이 원병을 보내고, 백제의 왕자가 왜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에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가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이라는 이런 기록을 <일본서기>에 남긴단 말인가? 지금부터 백제와 왜국과의 관계를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周留城).  일본서기에는 州柔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부흥운동과 왜국의 지원

백제 멸망 시인 660년의 왜왕은 제명(齊明)여왕이었다. 제명여왕은 백제에서 온 사신으로부터 의자왕이 잡혀갔다는 비보를 접하자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즉각 군대파병을 결정하고 이를 위해 군선을 건조하게 한다. 우선 수천 명의 왜병을 보내 복신의 군대에 합류시킨다.

백제부흥군의 군세가 얼마나 강했던지 신라군은 연패하여 많은 장수들이 처벌을 당한다. 급기야는 무열왕 김춘추마저 전사한다. <삼국사기>에는 661년 무열왕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6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변하여 피가 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 넓이가 5보쯤 되었다. 왕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열왕 김춘추가 죽고, 한달 뒤 왜의 제명여왕도 68세의 나이로 죽는다. 제명왕은 백제 복국을 유언으로 남기고 이를 위해 왜에 와있던 부여풍 왕자를 귀국케 한다. 662년 1월 왜국은 복신에게 화살 10만본, 군복용 면포 1천필, 군복용 견사 1백근, 솜 1천근, 가죽 1천장, 종자용 벼 3천석을 보내 부흥운동을 돕는다. 부여풍은 662년 5월 군선 170척과 군사 17,000명을 이끌고 귀국한다.

부여풍 왕은 복신을 반역혐의로 참형하고 그의 목을 소금물에 절이는 해형(醢刑)에 처한다. 부흥군의 내부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이 때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왕자 부여융이 당나라로부터 백제왕을 제수 받고는 나타난다. 부여융은 당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제후국이라도 백제라는 국호와 사직을 보존하려고 했으나 나중에 당나라에게 철저히 이용당했음이 들어난다. 

흑치상지는 복신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가 부여융의 설득을 받자 당군에 투항해 버린다. 이로서 백제부흥군은 급격히 힘이 약해진다. 한편 왜국에서는 군선의 건조가 완료되자 왜군 27,000명이 400척의 군선에 나누어 타고 백강으로 향한다. 당나라 군선 170척과 4차례의 수전을 치뤘으나 참패를 당하고 400척이 전멸하고 만다.

<일본서기>에는 백강이 백촌강(白村江)으로 나오며, <중국장수전전>에 보면 백강이 양자강이남 호남성 기양으로 나온다. 지금은 상강(湘江)으로 부르고 있으며, 기양과 백수 사이로 동정호로 흘러드는 큰 강으로 호남성의 대표적인 강이며 가장 큰 강이다. 이곳은 당시 왜가 위치하고 있던 광동성과 가까운 곳이고, 또한 호남성은 아마 백제의 서도(西都)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어 이 기록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기록으로 보인다. 당시 백강은 산동성 백마하와 지금의 상강 두 군데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도(東都)인 산동성의 백강이란 이름을 서도(西都)인 호남성으로 가지고 간 것이 아닐까 한다.

▲  중국장수전전에는 백제와 왜의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백강이 호남성 기양으로 나온다.  이곳은 왜의 근거지인 광동성과도 가깝고, 흑치상지의 고향인 백제서부하고도 가까워, 백제의 서도(西都)로 추정되는 곳이다.

665년 당 고종은 유인원장군을 보내 웅진성에서 신라의 문무왕과 백제의 부여융을 모이게 하여 백마의 피로서 서약을 맺게 한다. 이로써 백제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고 당과 신라의 식민통치에 환멸을 느낀 많은 백제인들이 중국과 왜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왜왕가는 백제와 어떤 관계인가?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아니 왜 왜국은 온 국력을 기울여 아무 조건 없이 백제를 도왔을까? 당나라가 왜로 직접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백제가 멸망한다고 당장 왜국에 위기가 오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는 그리고 국익에 전혀 보탬도 되지 않는 백제의 전쟁에 왜국은 왜 대군을 보내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다른 이유가 없다. 단 한 가지 이유라면 왜왕가는 백제왕가의 혈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왕가의 혈통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2001년 일본의 아키히토(明仁)왕이 “옛 칸무(桓武: 781~806)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라고 공식 발언한 것이다.

이 발언은 만세일계(萬世一係)라고 믿고 있는 일본왕가의 혈통에 대해 일왕 자신의 입으로 고대에 백제왕족의 피가 왜왕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확인시켜준 것이었다. 즉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의 직계후손 중 화을계는 일본조정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중신이었고, 화을계의 딸이 고야신립으로 칸무왕의 생모라는 것이다. 
 
▲ 2001년 기자회견에서 일왕가의 혈통을 밝힌 아끼히도 일왕. 오른쪽은 일왕의 가족으로 백제의 후예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일왕의 발언대로 칸무왕의 생모가 백제 무녕왕의 자손이라는 것하고, 백제부흥운동을 도운 제명/천지왕하고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그 정도의 혈연관계 때문에 제명/천지왕이 군수물자도 저렇게 많이 보내고 대병을 보내 무조건 백제를 구원하려 했을까? 독자들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필자는 아끼히도 일왕이 거짓말을 한 것으로 본다. 분명 일왕이 한 말 이외에도 백제왕실의 피가 일본 왕가에 있다. 그것을 규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백제부흥운동을 도운 제명여왕과 그녀의 아들 천지(天智)왕인 것이다. 지금부터 제명여왕과 천지왕의 혈통을 찾아 가보기로 한다.

우리에게 의자왕의 누이로 알려져 있는 제명여왕은 2번이나 왜왕위에 오른 인물로 이름은 보황녀(寶皇女)라고 <일본서기>에 기록이 되어있다. 남편인 서명(舒明)왕의 뒤를 이어 여왕에 올라 황극(皇極 642~645)왕이 되었다가, 시동생인 효덕(孝德)왕에게 양위했다가, 효덕의 사후 다시 37대 제명(齊明 655~661)왕에 오른다. 백제를 구원할 전쟁 준비를 하던 중 661년 68세의 나이로 죽자 아들인 천지(天智)왕이 그 뒤를 잇는다.

<일본서기>에서 제명여왕을 보황녀(寶皇女)라 한 것은 황제의 딸로 이름이 보(寶)란 말이다. 백제황가는 대대로 외자 이름을 쓴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제명여왕의 이름은 부여보(夫餘寶)이다. 여하튼 그녀는 남동생인 백제 의자왕이 당나라에 잡혀갔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복신의 지원요청에 의해 무조건 군대파병을 결정한다.

이 때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 왕자는 백제에서 파견한 일궁부(日宮府)의 대사로 있으면서  655년 1월 고모를 다시 왕위에 올려놓은 후 측근에서 보좌하기 위해 일궁부대사의 자리를 아우인 부여용에게 맡기고는 실질적인 야마토왜(大和倭)의 행정부를 이끌던 인물이었다. 백제 의자왕이 잡혀가자 부여풍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왜병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제명여왕의 남편인 서명왕은 민달왕의 손자이고, 민달왕은 계체왕의 손자이다. 일왕실의 직계계보를 정리해 보면 즉 26대 계체(繼體)왕 --> 29대 흠명(欽明)왕 --> 30대 민달(敏達)왕 --> (彦人大兄王子) --> 34대 서명(舒明)왕 --> 38대 천지(天智)왕으로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 즉 실질적으로 왜군을 백제에 파견한 천지왕은 계체왕의 5세손이며, 민달왕의 증손자이며, 서명왕의 아들로 백제왕족이었던 것이다.  

일본 고대왕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의 황족항목에 따르면, “대원진인(大原眞人)은 민달왕의 손자이며 백제왕족이다.(大原眞人, 出自 諡敏達孫 百濟王也).”라는 기록이 있다. 대원진인이 백제왕족이면 민달왕도 백제왕족이다. 따라서 민달왕의 조부되는 계체왕과 손자되는 서명왕도 백제왕족인 것이다. 천지왕은 서명왕의 아들이므로 그도 당연히 백제왕족이다.

신찬성씨록에는 26대 계체왕 때 왜왕실의 성이 바뀐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계체왕은 어느 왕의 몇째 아들이라는 기록도 없이, 그저 막연하게 남대적(南大迹=계체)왕은 응신왕의 5세손이며 언주인왕(彦主人王)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찬성씨록의 기록대로 왜왕실의 성이 계체왕 때 바뀐 것이다.

신찬성씨록으로 본 백제왕족인 왜왕들

1) 26대 계체왕 (繼體 507~531)
왜왕가를 백제왕족으로 새로 연 인물이다. 일본의 국보 2호인 인물화상경의 남제왕(男弟王)의 주인공이다. <일본서기>에 82세로 죽었다고 되어있어 무녕대왕의 동생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으나, 일본학자들도 남제왕이 계체왕이라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형제국관계의 동생나라의 왕인 것임은 틀림없다 하겠다. 

2) 29대 흠명왕 (欽明 539-572)


백제 26대 성왕은 직접 백제와 왜국을 넘나들었으며, 554년 이후에는 왕자인 위덕왕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완전히 백제를 떠나 왜국으로 건너가 왜왕인 킨메이왕(欽明, 흠명왕)으로 군림했다는 주장도 있다. (홍윤기교수 ‘일본 고대사 문제점의 새로운 규명’ [일본학] 24집,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발행 논문집, 2005.12.)  

3) 30대 민달왕 (敏達 572-585)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대정(大井)에 궁을 지었다. 홍윤기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우에다 박사는 2007년 5월 14일 자택에서 815년 일본왕실에서 편찬한 <신찬성씨록>을 직접 꺼내서 보여주며 “일본 제30대 민달왕의 생부는 백제 제26대 성왕이며, 민달왕은 백제 제27대 위덕왕의 친동생이다. 백제 제24대 동성왕과 제25대 무령왕은 두 분 모두 일본에서 모국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왕이 되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증언했다 한다.

▲ 33대 추고왕의 백제관련 기록인 부상략기
4) 33대 추고여왕 (推古 592-628)
흠명왕의 딸로 오빠인 민달왕의 왕후가 되고 나중에 추고여왕으로 등극한다. 스이코 여왕은 찬란한 백제의 불교문화인 일본 '아스카 문화'를 일으킨다. 13세기에 편찬된 <부상략기>에 따르면, “여왕 원년 1월, 한창 건축 중이던 아스카데라 찰주를 세우는 법요 때 만조백관이 모두 백제 옷을 입었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5) 34대 서명왕 (舒明 629∼641)
민달왕의 손자로 의자왕의 누이인 부여보(나중에 황극왕과 제명왕)를 왕후로 맞아들인다. 11년 7월 “금년에 대궁(百濟宮) 및 대사(百濟大寺)를 만들겠다.”고 말하였고, 백제천(百濟川) 곁을 궁처로 하였다.
13년 10월 백제궁에서 승하하고, 궁 북쪽에 빈궁을 설치하였다. 이를 백제의 대빈(大殯)이라 한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인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교수는 "조메이천황은 '구다라천황(百濟天皇)'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 라고 1970년 '신찬성씨록연구'를 발표했다.




 
위에서 보다시피 왜왕실의 혈통이 계체왕 때부터 백제왕족으로 확실히 바뀐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계체왕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 지금부터 왜왕가의 혈통을 바꾼 계체왕에 대해서 인물화상경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자. (계체왕 이전의 왜왕의 혈통에 대해서는 나중에 응신대왕을 설명하면서 하기로 한다.)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이란 무엇인가?

일본 와가야마현 하시모토시에 있는 스다하찌만(隅田八幡)신사에 보관되다가, 1951년 일본정부로부터 국보 2호로 지정되어 현재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인물화상경’이라는 유물이 있다. 이 거울에는 9인의 인물상과 48자의 명문이 뚜렷이 새겨져 있는데, 이 명문은 한일 고대사의 사실(史實)을 밝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의 하나이다. 


▲   일본의 국보 2호인 '인물화상경'이 보관되어 있던 스다하찌만 신사
 
명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으며, 이 명문에 대한 일본 학계의 통설인 후꾸야마(福山)교수의 판독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 八月 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紫沙加宮時, 斯痲念長壽
遺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대왕년 계해년 팔월 십일에 사마(斯痲)는 의자사가궁에 있는 남제왕(男弟王)의 장수를 위해, 개중비직 예인 금주리와 다른 한 사람을 시켜 양질의 백동 이백간으로 이 경을 만들었다.” 

▲   백제 무녕대왕이 남제왕에게 장수를 기원하며 하사한 인물화상경. 한일고대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었다.

일본 학계에서도 남제왕은 26대 계체왕이 확실시된다고 했다. 후꾸야마교수는 고사에 나오는 계체왕의 휘(이름)인 남대적(南大迹)는 놀랍게도 남제(男弟)의 훈인 ‘오오도’로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계체왕은 남대적(南大迹 오오도)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타 사서에는 ‘오오도’와 발음이 비슷한 ‘오호도’의 여러 한자표기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기타 사서의 기록에서 남제(오오도)를 고의로 지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후꾸야마교수는 계미년을 A.D 503년으로 단정했다. 그러나 거울을 남제왕(오오도)에게 하사한 대왕인 사마가 누구인지를 밝혀내지는 못했었다. 그러던 중 원광대학교 정치학과 소진철교수가 거울의 사마(斯痲)는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 무녕왕릉의 지석에 있는 사마(斯痲)와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밝혀냈고, 이 거울은 무녕대왕이 남동생 격인 계체왕에게 하사한 일종의 신임장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무녕대왕의 즉위 다음해인 계미년(A.D 503년)에 무녕왕은 아우격인 남제왕(계체왕)에게 거울을 하사하면서 장수를 기원한 것이다. 무녕왕은 자신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간지기년(干支紀年)을 사용했다는 것이 무녕왕릉의 지석과 인물화상경에 동시에 나타났다. 당시 거울(鏡)이나 칼(刀)을 하사함은 오늘날의 임명장이나 신임장과 같은 의미로 봐야 한다.

거울이 만들어진 503년으로부터 4년 후인 507년 남제왕의 신상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왜의 25대 무열왕이 후사없이 타계하자, 백제계 호족들에 의해 계체왕이 옹립되고, 수백향황녀를 왕후로 맞아들인다. 재야사학자 문정창씨는 이 수백향왕후의 출자(出自)를 <일본서기>에 자세히 적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녀를 무녕왕의 딸로 보아 계체왕이 무녕왕의 사위이고, 흠명왕이 외손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하튼 계체왕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왕실의 혈통은 만세일계(萬世一係)의 전통을 세워가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현 일왕실의 혈통은 결국 백제 왕실의 혈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2001년 아끼히도 현 일왕은 “옛 칸무(桓武: 781~806)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라고 공식 발언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아끼히도 일왕은 일왕가의 핵심을 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학계의 가장 큰 금기사항은 일본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으로 어떠한 경우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 때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한 조선사편수회의 맥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직도 이 나리 식민사학계는 일제치하이기 때문이다.

일왕실의 혈통을 밝히는 일은 백제의 역사를 밝히는 일로 지금까지 잘못된 역사왜곡을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없애버린 백제 왕실의 비밀은 언제쯤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의 건국은 백제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일본은 아직도 백제왕가의 비밀이 밝혀지기를 극도로 꺼리고 있다.


2008/06/25 [02:08] ⓒ plu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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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운 응신왕도 백제 왕족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2부)입니다. 
(1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왕가의 정체는?
(2부)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3부)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


2007년 하반기에 MBC에서 <태왕사신기>라는 24부작 판타지 역사드라마를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였던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그린다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드라마 제작비는 대략 약 450억원이 들었다고 발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역사드라마에 일본 자금이 들어와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제작사측은 MBC에 24부작을 50여억원에 팔고, 나머지는 해외 수출 특히 일본 수출로 제작비를 충당하겠다는 의도였다. 일본 흥행이 성공해서 제작사가 돈을 벌었는지 손해를 받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한국의 역사드라마 제작을 일본 자금으로 했다는 불상사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결국 드라마의 내용 즉 광개토태왕의 진실된 역사가 일본에 의해 훼손되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제2의 광개토태왕 비문훼손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에 일본 자금이 개입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국민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이 드라마가 연말에 시청자가 뽑은 드라마대상을 받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것은 이 나라 매국식민사학자들이 역사의 진실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우리나라 국민들의 역사인식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시청자 투표에 의해 2007년 올해의 드라마로 선정된 <태왕사신기>
 
일본의 자금이 <태왕사신기>에 들어온 이유는 단순한 상업적인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일본의 배급사가 한국의 역사드라마가 일본에서 흥행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그 큰 돈을 투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전혀 되지 않는다. 일본은 다른 목적이 있어 자금을 집어넣고는, 흥행을 위해서 일본 아줌마들에게 큰 인기가 있는 배용준을 캐스팅하라고 주문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배용준을 캐스팅해서 겨울연가와 같이 돈이 적게 들어가는 현대극으로   만들어도 일본에서는 흥행이 된다. 단지 흥행이 목적이었다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역사드라마를 만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왜 일본은 한국의 역사드라마에 엄청난 자금을 집어넣었을까?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당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라이벌이었던 야마토왜국 응신왕에 대한 비밀이 한국드라마에서 언급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자금을 집어넣고는 금기시되어있는 응신왕에 대한 이야기를 아예 드라마에서 빼버렸다. 최초 백제 아신왕 역으로 캐스팅되었던 송일국씨가 도중하차된 것이 그 이유라 하겠다.

광개토태왕 당시 중국은 5호16국으로 잘게 쪼개져 있어 고구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광개토태왕의 유일한 적수는 바로 중국대륙의 동부를 지배하고 있던 백제뿐이었다. 당시 백제는 왜의 응신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아신왕과 응신왕에 대한 이야기가 태왕사신기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밝혀지기를 꺼린 응신왕이란 과연 어떤 인물인지 지금부터 하나하나 밝혀보기로 하겠다.

왜왕가의 혈통을 이룬 응신이란 인물은?

지난 주 (1부)에서는 응신왕의 5대손인 26대 왜왕인 계체왕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내려오는 현 일본왕실의 혈통에 대해 알아보았다. 일본왕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과 일본의 국보인 인물화상경을 통해본 왜왕가의 핏줄은 백제에서 건너간 왕족임이 확실히 밝혀졌다. 그렇다면 계체왕 이전의 25명의 왜왕의 혈통은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 백제왕족으로 야마토왜국을 세운 응신왕
<일본서기>를 보면 신대(神代)를 거쳐, 1대왕인 신무(神武)왕으로부터 14대 중애(仲哀)왕까지 나오고 다음 신공왕후의 대를 거쳐, 15대 응신왕이 집권하여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야마토왜국은 응신으로부터 시작하여 25대 무열왕까지 11명의 왕이 있었고, 무열왕이 후사 없이 죽자 백제 무녕대왕의 남동생 격인 계체왕이 추대된다.

그러한 응신왕의 혈통이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일본서기>를 보면 화려한 수사구어를 가진 일왕의 명칭이 15대 응신조에 와서 간단히 된 것은 왕조의 교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응신왕의 즉위는 2주갑(120년)을 올린 390년으로 보아야 옳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있다.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운 사람이 응신왕이면 그 이전에는 국가라는 형태가 없었다는 말인데 어떻게 응신왕이 15대 왕이 될 수 있는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그 이전의 14명의 왕과 신공왕후는 허구의 인물이란 말인가? 아니면 야마토왜 이전에 다른 형태의 국가가 있었단 말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일본서기>의 초기 왕통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허구로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일본 역사에 있어 신(神)자가 사용된 왕은 1대 신무(神武)왕, 10대 숭신(崇神)왕, 신공(神功)왕후, 15대 응신(應神)왕 이렇게 네명 뿐이다. 이들은 모두 건국자 또는 정복자를 의미한다.

중국의 <남사>와 <양서> 왜전에 보면 “진 안제 때 왜왕 찬이 있었고, 찬이 죽자 동생 미가 섰고, 미가 죽자 아들 제가 섰고, 제가 죽자 아들 여가 섰고, 여가 죽자 동생 무가 섰다.(晋安帝時 有倭王讚, 讚死 立弟彌, 彌死 立子濟, 濟死 立子與, 與死 立弟武)”는 기록이 있다. 진안제의 재위기간은 AD 396~418년이다. 따라서 왜왕 찬은 응신왕이다. 참고로 맨 마지막 立弟武의 무는 무녕왕을 밀함이다.

<일본서기 신대 하의 제11단 신황승운>에 보면 신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협야(狹野)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협야는 ‘사노’로 발음되며 바로 찬(讚)의 음인  ‘산’에서 온 것이고,  이 찬(讚)을 훈독하면 응신의 이름인 호무다(譽田)의 ‘호무(譽)’와 일치한다. 즉 왜왕 찬(산)이란 이름을 음으로 읽으면 1대 신무왕의 협야(사노)가 되고, 훈으로 읽으면 호무다의 호무 즉 응신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응신(應神)의 일본식 이름은 호무다(譽田)로 <신찬성씨록>에 보면 진(眞 또는 眞人)씨의 시조가 된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1대 신무왕은 바로 15대 응신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게서에 따르면 숭신왕은 담담허존이고, 신공왕후 이후 120년은 공백기(실제로는 백제왕의 직할통치기)이며 응신왕이 곧 시조인 천무왕이라는 이론이 있을 정도로 왜(일본)의 역사는 아주 짧다 하겠다. 결국 일본서기의 응신 이전의 14명의 왕은 허구의 왕이던가, 아니면 조그만 부족의 부족장이었기 때문에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일본(왜)의 역사를 길게 하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14대 중애왕의 왕후였던 신공왕후가 섭정하여 69년 100세의 나이로 죽고 태자 응신이 즉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5대 응신왕은 신공왕후의 섭정 3년에 태자가 되고, 신공왕후의 사후 AD 270년 70세에 등극하여 110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응신왕은 66년간을 태자라는 신분으로만 있었고, 신공왕후는 아들 나이가 70살이 되도록 섭정한 모후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믿어야 하는지? 

▲   1991년 출판되어 일본서기 속의 노래인 와가(和歌)가 한국어임을 밝힌 책
 
김성호선생은 1982년 <비류백제와 일본국가의 기원>에서 응신대왕을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묘사하는 이론을 펼친 적이 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아까운 이론이었으나, 필자는 김성호선생의 이론은 두 가지 관점에서 오류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백제를 한반도로, 왜를 현 일본열도로 설정하여 역사의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고
둘째는 온조백제(십제)와 비류백제(백제)를 별개의 국가로 본 것이다.

이 두 가지 점만 보완되었더라면 김성호선생의 이론은 천하제일의 이론이 아닌가 한다. 분명 현 일본열도는 백제와 관련 있던 당시 왜국의 땅이 아니다. 그 이유는 백제의 주무대는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백제와 왜의 유기적인 교류도 결국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부에서 설명)

그리고 온조백제와 비류백제를 별개의 국가로 볼 것이 아니라 비류의 죽음 이후 하나의 백제 안에 온조계와 비류계가 공존하고 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실제로 백제에서 비류계로 분류되는 왕은 8대 고이왕,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 12대 계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대왕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김성호선생의 <비류백제와 일본국가의 기원>을 연구한 ‘잃어버린 한국고대사연구회’의 홍순주회장이 최인호씨의 <제4의 제국>이란 책과 TV 다큐멘타리를 비판한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온조계는 북부여 해모수 계열이라 해(解)씨이고, 비류계는 졸본부여 계통으로 진(眞)씨를 쓴다. (이 이론대로라면 비류와 온조의 부계가 다르다) 온조계인 13대 근초고왕은 전왕인 계왕(비류계)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중국 사서에는 당태종이 대륙백제의 역사를 말살하였기 때문에 선비족 모용수가 세운 전연이 부여족을 침략한 기사로 위장되어 있다고 한다).

계왕의 아들인 진정과 손자인 응신은 근초고왕을 피해 가야로 옮겨갔다가, 왜로 건너가 왜에 정착하며 세력을 규합한다. 근초고왕에게 계속 저항하던 비류계 진정/응신 세력은 1차로 AD 368년 근구수태자에게 밀려 가야인와 함께 왜로 도피하고, 2차로는 AD 396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패하여 응신 세력이 자신의 본거지 왜로 달아나, AD 405년 야마토 왜(大和倭) 정부를 세우게 된다.

가야인들은 광개토태왕의 공격 이전 수십년 전에 이미 북방 기마민족으로 표현되는 비류계 백제인인 진정/응신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일본서기>에서는 응신의 아버지인 진정이 아라사등(阿羅斯等)과 동일 인물로서 아라가야왕으로 나온다. 그래서 AD 400년 호태왕 비문의 종발성 전투에서는 가야 + 왜의 연합군이 고구려 + 신라의 연합군과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류계 세력이 백제를 떠나 가야의 외래 지배세력이 되었기 때문에 현지 원주민인 가야 세력과 겹치게(Overlapping)되어 결과적으로 이 최인호씨의 “제4의 제국”이란 다큐멘타리에서는 응신을 토박이 가야인으로 착각하였고 이들 제4의 제국인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  비류계 진정과 응신은 온조계 근초고왕에게 쫓겨 가야로 도망온다. 근구수태자가 계속 추격하자 왜로 간다.

금관 가야국에서 초대 김수로 왕처럼 갑자기 외부에서 나타나 귀지설화의 주인공이 되어 의문시 되었던 그리고 현지 가야 지방을 정벌한 북방 기마민족의 정체는 온조계 근초고왕 세력에게 왕권을 빼앗긴 비류계 진정과 응신으로 대변되는 백제인이었다.

AD 350년 경 이들에게 패하여 왜로 이동한 첫번째 가야 세력이 숭신왕 계열의 가야민족이라고 추정되며, AD 396년 경 광개토태왕이 왜의 응신과 연합한 아신왕의 백제를 침공하였을 때 응신이 자신의 지배아래 있었던 가야인들과 함께 두번째로 왜로 이동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백제의 아신왕은 광개토태왕에게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해 버리고, 응신은 패해 왜로 돌아왔으나 앞으로 광개토태왕 때문에 백제로 돌아갈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A.D 405년 아예 왜 땅에 눌러앉아 국가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인 것이다.

이러한 응신왕의 역사적 사실인 응신왕 = 백제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일본은 태왕사신기에 엄청난 자금을 집어넣고는 응신왕의 이야기를 드라마에서 아예 빼버리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태왕사신기는 광개토태왕의 전쟁이야기인 아신왕과 응신왕의 이야기를 언급하지도 못하고, 두 자매 사이에서 방황하는 연애쟁이로 묘사된 것이다.

▲  가야를 집중 조명한 최인호씨의 소설 '제4의 제국'
 
칠지도는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신임장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대왕을 꼽으라면 단연 13대 근초고대왕과 24대 동성대왕이다.  근초고왕은 당시 동북아의 강자인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국세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대륙 깊숙이 요서.진평지역 뿐만 아니라 대륙 남부인 왜 땅까지 정벌하는 등 많은 담로(식민지)를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식민지 중의 하나가 바로 왜(倭)였다.

근초고왕은 계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고는 계왕의 아들인 진정과 응신을 계속 추격한다. 최초 가야지방으로 들어간 진정/응신 세력은 근구수태자의 공격을 받자 다시 왜 땅으로 쫓겨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백제는 천하무적이었다. 왜로 도망간 응신은 같이 왜로 들어간 가야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반격의 기반을 마련한다.

백제 역시 왜로 들어간 응신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왜에 식민지(담로)를 건설한다. 이렇게 왜에 식민지를 건설한 백제는 왕자를 보내 왜왕으로 삼아 통치하게 한다. 부왕 근초고왕으로부터 왜왕으로 임명된 인물은 근구수태자였다. 그러면서 그 신임장으로 하사한 것이 그 유명한 칠지도이다. 칠지도란 과연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일본 나라현 이소노가미(石上) 신궁(神宮)에는 고대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한자루의 희귀한 칼이 있는데 그 이름은 칠지도(七支刀)라 한다. 이 칼은 75cm 되는 주 몸체 양 옆에 각각 3개의 가지칼(支刀)이 있는데  그 형태는 사슴뿔이나 나뭇가지 모양의 창(槍)과도 같은 이상한 형태의 칼이다.

이병도도 이런 형태의 칼을 중국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칼이 주목을 받은 것은 형태도 형태이지만, 바로 그 칼에 새겨져 있는 명문 때문이다. 명문은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도합 61자이다. 이 중 7자는 글자의 훼손이 심해 전혀 알아볼 수 없으며, 다른 8자는 글자의 획이 확실치 않을 뿐 글자체는 그런대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앞면) 泰X四年 X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七支刀 生辟白兵 
         宜供供 侯王XXXX作

(뒷면) 先世以來 末有此刀 百慈王世X 
         寄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일본학자들의 통설(通說)은  '泰X'를  중국 황제의 연호로 단정하고 동진의‘太和’라는 연호를 끌어들였다. 이는 369년으로 <일본서기> 신공기 52년조의 ‘칠지도헌상’의 기사와 맞는다는 억지 이론이다. 여하튼 일본 금석 명문해석의 대가인 후꾸야마(福山)교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태화 4년 정월 십일일의 순양일중의 때에 백련의 철로 칠지도를 만든다. 이것으로서 백병을 벽제(辟除)하고 후왕의 공용(供用)에 마땅하고.....만든다.
선세(先世) 이래 아직 본 일이 없는 이 칼을 백제왕과 왕세자는 같이 삶을 임금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왜왕의 상지(上旨)에 의해서 만드니 길이 후세에 전할 것이다.


후꾸야먀교수의 해석은 있지도 않은 중국의 연호를 끌어들여 <일본서기의 신공기>를 합리화하는 해석이다. 학자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해석으로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의 사학을  따르는 이병도조차 “칠지도 명문의 泰자 아래 글자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중국 연호가 아닌 백제의 연호이다.”라는 단호한 주장을 했다.   

▲   나라현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 백제대왕이 왜왕에게 하사하는 신임장의 증표이다.


칠지도의 명문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하행문(下行文)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즉 대왕(황제)인 백제왕이 후왕(제후)인 왜왕 지(旨)에게 하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泰X 四年’은 중국의 연호가 아니다. 여러 해석이 있으나 원광대 정치학과 소진철교수의 해석이 가장 눈길을 끌고 정확한 것으로 본다.  

泰X사년 X월십육일 병오일의 정오에 무쇠를 백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백병(재앙)을 피할 수 있어 마땅히 후왕에게 줄만하다.

선세이래 아무도 이런 칼을 가진 적이 없는데 백자왕은 세세로
기생성음(吉祥語)하므로 왜왕 지를 위해서 이 칼을 만든다.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다.


소교수는 백제왕이 만일 중국의 연호를 쓰는 제후급의 왕이었다면 왜왕 지를 후왕으로 부르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왜왕 지(旨)는 외자를 이름으로 쓰는 백제왕가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여러 근거를 이유로 칠지도는 백제의 대왕인 근초고왕이 왜로 떠나가는 제후왕인 왜왕 지를 위하여 제작 하사한 것으로 본다. 참고로 백제대왕들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백제의 고문서가 1996년 9월 일본 큐슈 미야자끼현의 미카도(神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독자들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니 사학과 교수도 아닌 정치학과 교수가 어떻게 백제와 왜의 역사에 대해 논할 수 있느냐? 그거 믿을 수 있는 학설이냐?”라는 것인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소진철교수의 이론은 백제와 왜의 역사적 관계를 정치학 교수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사학과 교수들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 하겠다.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를 계승하며 그 이론인 반도사관을 그대로 추종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절대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다. 즉 한국의 식민사학계는 일본이 정신적 이론적 고향이기 때문에 일본에게 불리한 이런 주장을 절대로 할 수가 없으며,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폄하하면서도 일본 역사에 대해서는 불리한 이론을  말하지 않는 특수성이 있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본 학계는 백제가 왜의 신속을 받았거나, 서로 문화를 주고받은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우리 학계는 백제가 왜에 선진 문명을 전수해준 정도로 보거나, 삼국이 모두 왜와 막연하게 상당히 깊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상세한 내용은 금기사항이라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왜)의 고대유물인 ‘칠지도’와 ‘인물화상경’의 연구로 백제와 왜는 대왕국과 후국 즉 황제와 제후의 정치적 관계였다고 소교수는 설명하고 있다. 이 연구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양국 관계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어, 특히 일본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백제와 왜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정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왜는 백제의 담로로부터 출발

일본(왜)의 출발은 담로로부터의 출발로 보인다. <일본서기>의 신대 제4단 육팔주생성(六八州生成)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아이를 낳을 때에 이르러서 먼저 담로주(淡路州)를 포(胞)로 하였다. 뜻이 불쾌하여 고명(故名)으로는 담로주라 하니 다음으로 대일본(야마토)라 한다." 이 문구는 일본의 역사는 (백제의) 담로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달라왕 4년(157년) 동해의 빈(濱)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가 있어 부부가 되어 살았는데, 세오녀가 후에 신공왕후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즉 세오녀 = 신공왕후 = 비미호(卑彌呼)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김성호선생과 문정창선생은 주장한다. 두 사람의 이름에 다 까마귀 오(烏)자가 있음을 눈여겨 볼 일이다.

13대 근초고왕 때는 왜왕으로 근구수태자가, 14대 근구수왕 때는 침류태자가, 15대 침류왕 때는 아신태자가 왜왕으로 갔다. 즉 대대로 태자들은 백제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왜에서 정치 실습을 미리 한 것으로 보인다. 아신태자가 왜에 간 것을 두고 <일본서기>에서는 “응신 15년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 양마 2필을 바쳤다”고 은유적으로 기술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일본에 백조삼능이라는 능이 있는데, 이 능의 주인은 바로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이라 한다. 당시 왜는 일본열도가 아니라 대륙의 남부나 큰 섬에 있었으므로, 이 능은 나중에 이장했거나 가묘로 보여진다. 여하튼 백제의 두 영웅인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응신을 정벌하다가 오히려 반격을 당해 왜 땅에서 붕어한다.

침류왕이 붕어하자 백제에서는 아신태자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오른다. 이에 격분한 아신태자는 응신과 결탁하여 왜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온다. 아신은 응신에게 도움을 청하며 아신은 백제의 왕에 그리고 응신은 왜왕에 나누어 오르기로 서로 밀약을 맺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결국 숙부인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빼앗긴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광개토태왕에게 매번 패하고 만다.

396년 병신년은 당시 동북아의 정세가 뒤바뀌는 해였다. 광개토태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백제의 수도를 공격했다. 백제의 주력군을 북방경계선에 배치한 아신왕은 광개토태왕의 후방기습공격에 허를 찔려 패하고 만다. 결국 아차산에서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광개토태왕에게 항복하고 만다. 

▲    태왕사신기에서 방영된 백제 아신왕의 항복장면.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한다.
 
응신은 정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변복을 하고 가야로 들어갔다가 왜로 도망간다. 이것을 <일본서기>에서 기록하기를, “16년 왕인이 왔다. 태자의 스승으로 하였다. 여러 전적을 왕인에게서 배웠다.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書首) 등의 시조다.”라는 기록인데 응신(應神)과 왕인(王仁)은 일본 발음으로 다 ‘오오진’으로 발음되어 동일인물이라고 김성호선생은 지적했다.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 태왕에게 항복하는 절대절명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일본서기>처럼 백제가 한가로이 왕인을 보내 문물을 전했다는 것은 솔직히 이해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 그래서 정황적으로 볼 때 김성호선생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의 내용은 상당 부분 맞을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의 가공할 위력 때문에 응신은 백제로 돌아갈 꿈을 접고, 아신왕이 붕어하는 해 인 A.D 405년 왜 땅에서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인 것이다. 즉 일본의 역사는 바로 백제왕족인 응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 백제왕족과 그 후손이 왕위에 오르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  법륭사의 비밀문서인 '성예초'에는 백제 성왕이 왜왕을 겸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백제 근초고왕은 귀족인 진모진을 왜에 파견하여 일본 최초의 백제조복(朝服)을 만들게 한다. <부상략기> 기록에 따르면, 당시 15대 오오진(응신)왕이 일본왕 최초로 백제조복을 입었으며, 그 후에 대대로 일본왕들이 입었고, 33대 스이코여왕 등극 때에는 참여한 만조백관 모두가 백제 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백제와 왜와의 명령체계는 백제대왕 → 백제왕자 → 실권자 소가씨(또는 왜왕)이었다. <일본서기>기록에 따르면  당대 최고실권자인 소가우마코(蘇我馬子)는 일본에 온 백제왕자에게 향응을 제공하고, 백제왕자와 친히 대화(보고)했다는 기록을 볼 때 백제왕이 대리인인 백제왕자를  통해 왜국을 간접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소가(蘇我)씨 가문은 당대 실권자로서 사실상 최고권력을 약 100년간 누리는데, 미즈노 유우의 저서 <천황가의 비밀>에 “이 소가씨 가문은 본래 한국에서 건너온 가문이다”라고 되어있다. 왜왕도 백제왕족이고 최고실권자도 백제귀족이면 당시 백제의 일본에 대한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와 왜국의 정치적 관계는 단순한 중앙정부와 지방정권이라기 보다는 매우 가까운 형제국 이상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즉 “왜국(일본)은 작은 백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일본인은 百濟라는 글자를 발음대로 ‘햐꾸사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구다라’라는 고어로 발음하고 있다. ’구다라‘는 대국(大國)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아직도 왜 그렇게 발음하는지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있다.

▲     백제가 멸망한 이후 8세기 중반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扶餘勇)의 자손들이 만든 백제왕신사. 역대 백제왕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아직도 일본에는 백제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긴키(近畿)지방의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와 백제사(百濟寺)가 가장 유명하다. 백제왕신사는 백제가 멸망한 이후 8세기 중반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扶餘勇)의 자손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역대 백제왕들의 위패가 모셔졌다고 한다. 그리고 오오사카(大阪)에는 백제역(百濟驛), 백제천(百濟川), 백제교(百濟橋), 백제대교(百濟大橋) 등이 있으며 나라(奈良)에도 백제촌(百濟村) 등이 있다. 

▲   일본 오사카에 남아있는 백제의 흔적인 백제역. 현재 화물만 취급하고 있는 역이다.
 
고구려계와 신라계도 왜왕이 된 적이 있다.

백제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계도 왜왕에 오른 적이 있다. 5세기 초반 고구려, 신라, 왜국 간에 다년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구려계의 왜왕으로는 18대 반정(反正)왕이 있다. <일본서기>에 반정왕은 담로궁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 군이 왜군을 추적하여 담로도에 쳐들어가 승리한 고구려의 세력이 백제계 이중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다. 

고구려계 반정왕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라계 윤공(允恭)에게 제거당한 것으로 보인다. 19대 윤공왕은 씨성(氏姓)을 바로잡아 고구려세력을 제거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윤공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걱정하여 사절단과 조물을 보내고 그들이 행한 상례 등을 보면 윤공왕이 신라계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민족사학자 문정창선생은 설명한다.

신라계 윤공왕 이후 20대 안강왕이 죽은 후 윤공왕의 5자를 칭하는 백제계 대박뢰(大泊瀨)황자가 재빨리 행동을 개시하여 왕위에 오른다. 21대 웅략왕부터는 다시 백제계로 왕권이 넘어간다. 이가 곧 송나라 순제에게 상표문(上表文)을 바친 왜왕무(倭王武)로 나중에 백제로 돌아와 무녕왕이 된다.   

이와 같이 역사가 짧은 섬나라 일본이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상의 나라인 조선을 식민지배 하려면 조선의 역사말살이 필요했다. 이런 역사를 그대로 남겨두어 조선인들이 이러한 백제와 왜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로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일왕 특명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정책을 펴게 되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설치되는 기관이 바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였다.

그런데 해방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조상의 역사를 엉터리로 왜곡하고 있다. 단군은 아직까지도 신화이며, 삼국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이 아직도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전혀 대응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역사 이론 자체가 엉터리인데 어떻게 중국과 일본의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도 말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설명한 백제와 왜의 모든 상황은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아닌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다음 주에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가 연재됩니다.   
2008/07/02 [00:52] ⓒ plu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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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분국(分國)인 왜의 위치는 어디?
왜의 위치는 일본열도가 아닌 양자강 이남의 대륙과 큰 섬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3부)입니다. 
(1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왕가의 정체는?
(2부)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3부) 백제의 분국(分國)인 왜의 위치는 어디?


지금까지 (1부)와 (2부)에서 백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왜왕가(倭王家)에 대해 알아보았다시피, 백제와 왜의 관계는 일반적인 황제국과 제후국의 관계가 아닌 가까운 직계 혈통으로 맺어진 분국(分國)이라는 단어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더 나아가 왜왕은 백제의 왕족이었으므로 당연히 ‘왜 = 작은 백제’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작은 백제인 왜라는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A.D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기 전 일본은 왜 또는 왜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식민사학계에서는 이 왜의 위치를 일본열도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매국적인 식민사학이론인 반도사관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왜가 당연히 일본열도에 있었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말해 일제가 망국의 사관인 반도사관을 이 땅에 정착시킨 이유가 바로 왜가 일본열도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일왕 특명으로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역사조작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으나, 그에 버금가는 다른 이유의 하나가 바로 왜의 위치를 일본열도로 정착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본은 서기 390년이 되어서야 응신왕에 의해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가 세워질 정도로 원래 역사가 짧은 민족이다. 왜는 응신왕 이후로 줄곧 백제의 왕실에 의해 통치되다가 (물론 잠시 고구려계와 신라계가 왜왕을 한 적도 있음),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자 670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다. 따라서 670년 이전은 왜(倭)라 하고 이후는 일본(日本)으로 불러야 한다.

▲    663년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서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국인이 서로 말하길 “주유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 왜는 백제의 분국이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중국 25사>에는 670년 이후 공식적인 외교문서 상에는 일본국이란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예전부터 통상적으로 쓰던 왜인(倭人)이란 명칭도 사서에 많이 등장한다. 1404년 명나라는 그동안 국가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현재의 일본(大和州)에게 "일본"이라는 국호를 주면서 동이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왜의 역사까지 현재 일본에 주어버린다.

따라서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현재 일본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 일본으로 부르고 있어 혼돈이 되고 있으나, 기간에 따라 아래와 같이 셋으로 분명하게 나누어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예로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도 ‘임진신일본란’으로 불러야 역사적으로 맞지 않겠는가라는 논리이다. 

1) 670년 이전의 왜(倭)의 시대 (대륙 남부에 위치)
2) 670 ~ 1404년의 일본(日本)의 시대 (대륙 --> 대만 --> 점차 열도로 옮아감)
3) 그리고 1404년 이후의 신일본(新日本)의 시대 (현 일본열도에 정착)


<한단고기> 기록으로 본 왜의 기원

왜(일본)의 역사를 알려면 <일본서기>를 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로 필자가 일본서기를 정독해 본 결과 일본서기에는 왜의 기원조차 제대로 기록이 되어 있지 않고 15대 응신왕 전후의 왕통이 많이 조작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게다가 670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 사실도 기록이 되어있지 않다. 한마디로 <일본서기>는 그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서인지라 그것을 진짜 왜의 역사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고 하겠다. 

<한단고기>가 일본에서 출간되어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일본인들이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했다. 일본인들의 조상의 뿌리를 잘 밝혀주어 일본민족이 역사 없는 민족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책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한단고기로 인해 일본의 기원을 약 1,000년 가까이 끌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고 여긴 것이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기로 하자.

<한단고기 단군세기> “36세 매륵단군 갑인 38년(B.C 667년) 협야후 배반명(陜野侯 裵幋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이 바다의 도적인 왜를 정벌한 기사로 인정해 일본인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삼도란 본시 일본열도를 나타내는 말로 여겼기 때문에 평정당하고 안 당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때까지 열도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1대 신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일본서기>에 협야(狹野 사노)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로 인해 1대 신무왕이 응신왕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비록 협야의 협자가 陜과 狹으로 서로 다르지만 같은 인물이라는 가정 하에, 여하튼 <한단고기>로 인해 그 같은 주장을 불식시키고 일본의 기원을 B.C 7세기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고 본 것이기에 환호를 올렸던 것이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고주몽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해 졸본으로 같이 오는 사람들 중의 한명인 “협보(陜父)는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 (중략) 협보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拘耶韓國)에 이르니 곧 가라해(加羅海)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라 한다. 

▲   주몽과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는 오이, 마리, 협보 (좌측 부터). 이 협보가 나중에 다파라국의 시조가 된다. 따라서 왜의 기원은 빨라야 기원전 58년 이후가 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 하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구야국의 사람들이 모여 산 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치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이웃하며 성이 같다. (이하생략)

왜의 위치에 대해 <한단고기>에 적혀 있다. 우선 협보(陜父)가 구야한국으로 가기 전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는 마한은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하해 세운 한(韓)이 있던 곳이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은 연나라에서 온 정치망명객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조상인 기자가 살던 땅인 서화(하남성)와 몽성(안휘성) 근처인 해대(海岱; 대는 태산)의 해(海) 지방으로 남하하여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대륙의 동부)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와 왜가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비미국과 구노국은 나중에 왜(倭)로 발전된다. 

▲ 양자강 이남 오.월의 위치가 왜가 있던 곳. 양자강 이남 월 지역에 회계라는 지명이 보인다.
 
참고로 사로의 泗는 泗水 지역으로 장보고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고,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라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아주 중요한 기록은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로 이것으로만 봐도 왜는 분명 육지(뭍)와 섬(바다)에 걸쳐 있었지, 결코 섬나라인 일본열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임나는 한반도 남부가 절대 될 수가 없기에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은 한단고기로 인해 허구라는 것이 밝혀졌다 하겠다.  

▲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는 사실 대륙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으며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那覇)에 이른다. 또 다시 천리를 건너서 근도(根島)에 이르른다. 근도는 역시 저도(柢島)라고도 한다. 때에 구노인(狗奴人)은 여왕과 서로 싸워 길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구야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자는 진도(津島) 가라산(加羅山) 지가도(志加島)로부터 비로서 말로호자(末盧戶資)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쪽 경계는 곧 구야한국의 땅이다. (중략)

오.월(吳.越)은 본래 구려(九黎)의 옛 읍이며, 산월(山越)과 좌월(左越)은 모두 그 후예가 나뉘어 산 땅이다. 항상 왜와 왕래하며 무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매우 많았다. 진 때 서불(徐巿)은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에 이르러 종도(種島)를 거쳐 뢰호내해(瀨戶內海)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세(伊勢)에 옛날 서복(徐福)의 무덤이 있었다. 단주(亶州)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서 왜의 위치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회계군은 절강성에 있는 지명으로 그 동쪽인 동야현의 동쪽이 바로 왜였던 것이다. 회계군이란 기록은 아래에 나오는 <중국 25사>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오.월은 왜와 항상 왕래하는 곳이라 했다. 오와 월은 대륙의 남부지방(현 광서장족자치구, 광동성, 복건성, 절강성)을 통칭하는 지역이다. 즉 오.월이란 양자강 이남에서 대륙의 동남부 지역을 말함이다. 

진사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쪽으로 배를 타고 떠난 인물인 서복의 무덤이 현재 일본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서복은 현 일본 열도에 간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무덤들은 가짜임에 틀림없다. <한단고기>에도 나와 있듯이 서복은 분명 절강성과 복건성/광동성 앞바다에서 왔다리 갔다리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서복이 일본열도에 왔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일본은 현 일본열도에 서복의 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즉 왜의 위치가 대륙 남부가 아니고 일본열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한 짓이나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이어서 <한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를 보면, “일본은 옛날 이국에 있었나니 역시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맺었다. ...(중략)...

때에 왜인들은 갈리어서 산도에 근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가장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위.만.월의 무리들 모두 통상했다. 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쯤 된다. 또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리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이하 생략)

이 기록에서 이상한 점은 일본이 왜와 이웃한 별개의 나라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대진국(발해)이 존재했을 당시에는 왜가 이미 670년에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고 한참이 지난 후인데 일본과 왜가 이웃했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여하튼 양자강 이남 대륙의 동남부인 오.월과 통상했다고 하니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왜(일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겠다. 현재의 일본열도를 여기에 대입하는 것은 분명한 넌센스라고 할 수 있다.

<중국 25사> 기록으로 본 왜의 위치

중국 25사의 기록에 보면 분명 왜는 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동이(東夷)에 포함되어 있다. 즉 같은 계통의 민족이란 말이다. 실제로 현 일본인들이 쓰는 일본어는 어순이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계로 중국어를 쓰는 지나족과는 어순이 확연히 구별된다 하겠다.

그리고 왜왕들은 백제왕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필자는 지금까지 백제의 위치를 대륙의 산동성으로 비정했다. 산동성에 있던 백제가 왜와 그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려면 왜의 위치는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백제와 가까운 대륙으로 와야 한다. 그리고 역사 기록도 왜가 대륙 남부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동이 왜가 대륙 남부에 있었다는 역사 기록을 놓고 지금의 일본열도에서 배를 타고 양자강 이남에 진출하여 오랫동안 광대한 지역을 다스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일본인들은 역사 날조에 능한 민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일 열도에 있으면서 대륙을 경영할 정도의 항해술을 가졌더라면 아마 당시 왜는 세계를 제패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분명한 것은 670년 이전의 왜는 일본열도와 전혀 상관없는 국가였던 것이다. 역사의 기록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  중국대륙 근처의 해류의 흐름. 대만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일본열도로 흘러간다.  이러한 해류를 거슬러 일본열도에 있던 왜가 대륙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의 항해술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결국 왜는 대륙 남부에 있었던 것이다. 후에 대륙에서 밀려난 왜가 대만에 있다가 일본열도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라를 중심으로 왜의 위치를 표시한 기록도 있지만 너무 광범위해 방위를 알기 어려운 점이 있어 인용치 않겠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나마 확실한 지명을 중심으로 해서 왜의 위치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삼국지 동이전>과 <진서> <남제서>에 “왜인은 대방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라고 기록하였고, <양서>의 동이전에는“왜는 스스로 태백의 후손이라 말하고 그들의 풍속은 모두 문신을 하였으며 대방에서 거리가 12,000리에 있고 대개 회계의 동쪽에 있다 (倭者自云太佰之後俗皆文身去帶方萬二千里大抵在會稽之東)”고 기록하였다. 

여기서의 회계란 지명은 절강성에 있는 지명으로, “왜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다”는 위의 <한단고기>의 기록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왜인의 풍습은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이라 기록했는데, 실제로 홍콩 주변의 광동성 주민들의 풍습도 몸에 문신을 많이 하고 있다. 그리고 기준이 되는 대방의 위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한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한사군의 하나였던 이 대방의 위치를 반도사관에 찌들어 황해도로 비정하고 있다 (물론 인접한 석문이 어디라는 정확한 설명도 없다). 그러나 그 대방의 위치는 결코 한반도의 황해도가 될 수 없다. 대방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으나 가장 확실한 것 하나만 들기로 하겠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보면 “문무왕이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어 토벌케 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은 말갈병과 함께 석문(石門)의 들에 진영을 만들고, 신라왕(문무)은 장군 의복. 춘장 등을 보내어 방어케 하였는데 대방(帶方)의 들에 군영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 당나라와 전투를 벌여 당나라를 백제 땅에서 몰아내는 광경이다. 여기서 석문(石門)이라 함은 현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石家庄)이고, 대방은 석문 아래로 접한 곳으로 황하와 가까운 곳이며 초기 백제의 도읍지와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사서 기록의 기준이 되는 대방의 위치를 확실히 알고 나면 왜의 위치가 보인다. 대방의 동남쪽이면 대충 가까운 곳부터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순이다. 여기서 백제와 신라의 영역을 빼면 절강성 쪽이 된다. 게다가 절강성은 회계군이 있는 곳이므로 그 조건이 충족된다 하겠다.  

▲   왜의 기준이 되는 대방은 하북성에 석문(석가장)과 붙어잇는 곳.  대방의 동남쪽에 왜가 있었다.
 
이렇게 대방의 위치를 통해 왜의 위치를 확실히 밝혔음에도 “아직도 왜는 일본열도로 일본열도도 대방의 동남쪽은 동남쪽이다”라고 우기는 식민사학자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만일 일본열도가 왜였다면 많은 사서의 기록이 왜는 대방의 동남쪽이 아니라 대방의 동쪽 대해중이라고 해야 방위상으로 맞지 않을까? 여하튼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펴는 일본족(?)들을 위해 아래와 같이 "왜"에 대한 사서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1) 삼국지 동이전
회계 주애 회계동치지동 담이(會稽 朱崖 會稽東治之東 憺耳)가 함께 있으며,  이 모두 대방(帶方)의 동남쪽에 있다.

(2) 후한서
회계동야지동 회계동야현 주애 이주 단주 봉래가 담이(會稽東冶之東 會稽東冶縣 朱崖 夷州 亶洲 蓬萊가 憺耳)와 함께 기록되었다.

(3) 양  서
회계지동(會稽之東) 주애(朱崖)와 함께 담이(憺耳)가 기록되어 있고, 대방지왜(帶方至倭)가 기록하고 있다. 

(4) 북  사
회계동여담이(會稽東與憺耳)의 기록이 있고 이주(夷州)의 기록이 있는데 낙랑대방 에서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5) 남  사
주애(朱崖)와 함께 담이(憺耳)가 기록되어 있다. 

위 사서의 내용 중 ‘왜’ 관련 지명을 최고(最古)의 중국고지도인 ‘우적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우측부터 보면
- 회계(會稽)는 양자강 이남 절강성에
- 남월(憺耳本南越地 - "담이는 본래 남월지 이다"),
- 해남도에 있는 주애(朱崖),
- 진번(珍, 眞番 - "파담이진번군(罷憺耳眞番郡)")
- 이주(夷州)는 "대만"이다. 
 
▲     © 성훈

어떻게 왜(倭)와 관련된 이러한 지명이 양자강 이남에 남아 있는가? 결국 이 지역은 A.D 670년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하기 전 왜의 땅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왜인의 두드러진 풍습중 하나가 ‘斷髮文身(용문신)’ 습관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시아에서 문신습관은 홍콩지역이 제일 많이 남아 있다. 그러한 홍콩 주위에 주애, 담이, 이주, 회계, 남월, 주산, 태 등 왜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겠는가!!! 

▲  양자강 이남 오.월 지역에 있는 왜의 지명들.

왜가 대륙 남부 또는 큰 섬에 있었다는 가장 확실한 근거로는 <천하고금대총편람도>를 들 수 있겠다. 이 지도는 1666년 제작된 지도로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지도에 보면 대마도와 일본국이 현 일본 열도에 그려져 있지 않고, 중국의 양자강 이남 동부 해안 대만 땅에 그려져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1666년 제작된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 일본국의 위치가 현 대만 위치에 그려져 있다.
 
일식기록분석으로 본 왜의 위치

사서의 기록으로 일본(왜)이 언제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갔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래 박창범 교수의 일본서기의 일식기록분석이 주는 결론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박창범교수는 편의상 일본사서의 일식기록을 시대별로 아래와 같이 분류하였다.

ㄱ) 709년 이전의 야마토시대의 일식 10개
ㄴ) 710 ~ 792년의 나라시대의 일식 36개
ㄷ) 794 ~ 1,183년의 헤이안(平安)/후지하라(藤原)시대의 일식 132개

ㄹ) 1,189 ~ 1,326년의 카마쿠라(鎌倉)시대의 일식 38개
ㅁ) 1,343 ~ 1,599년의 일식 80개
ㅂ) 1,600 ~ 1,899년의 일식 119개

이 6개의 시대구분 중
ㄱ)의 결집 위치는 남지나해상이고,  결집도가 매우 높아 실제로 관측된 자료로 보인다.
ㄴ) 일본의 전 역사기간 중 가장 결집도도 낮고, 결집 위치도 일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 관측에 의한 자료로 보기 어렵다.
ㄷ) 만주 지역에 약간의 집중이 되고 있으나 결집도가 아주 낮다.

ㄹ) + ㅁ) + ㅂ) 시대는 결집도도 높고, 정확히 일본 열도나 가까운 곳으로 결집위치가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ㄱ)으로 A.D 709년 이전의 야마토시대의 일식 10개를 분석한 것인데, 결집도가 높아 실제로 관측된 자료로 보인다 하는데 그 위치가 현 일본열도가 아닌 남지나 해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중국 25사>나 <한단고기>에 나오는 왜의 위치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박창범교수의 일본사서 일식기록분석. 좌측 상단이 ㄱ) 야마토시대는 남지나해상으로 결집되며,   ㄴ)과 ㄷ)은 불확실하다.   ㄹ) 부터는 열도로 결집된다. 

기타 기록으로 본 왜의 위치

그리고 신라와 왜 사이에 특이한 기록이 있다. 왜에서 신라로 온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신라에서는 호공을 대보(大輔)에 임명을 한다. 참고로 대보는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 정도의 직위로 脫解王도 대보에 있다가 왕이 된다. 현재의 일본인이 한국에 와서 국무총리를 할 수 있다고 보는가? 상식적으로 이것은 동족일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결국 동이 5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왜는 전부 같은 민족 즉 동족(同族)인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왜가 신라를 무려 30번 넘게 침공한다. 만일 왜가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배타고 이러한 해외원정 전쟁을 그렇게 자주 할 수가 없다. 결국 이는 신라와 왜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실제로 아래의 <삼국사기> 기록에 보면  왜가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기록으로 보인다. 

지마이사금 10년 “왜인이 동쪽 변방을 침략하였다.”
내해이사금 13년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
조분이사금  4년 “왜병이 동쪽 변두리를 침략하였다.”
실성이사금  6년 “왜인이 동쪽 변방과 남쪽변방을 침범했다.”
눌지이사금 10년 “왜병이 와서 동쪽 변방을 침범했다.” 
                24년 “남쪽 변두리를 침범하고 동쪽 변두리를 침범했다.”

▲  전후 일본의 지진피해 기록. 일본서기엔 이런 지진의 기록이 없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일본열도는 지진이 잦은 곳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은 몇 번 있으나 지진의 피해 정도가 기록된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이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지진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로 경미한 지진인 것이다. 왜가 만일 현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관동대지진이나 고베 지진 같은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 지진의 기록이 안 씌어졌을 리가 없다.

즉 <일본서기>는 일본열도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인 왜인(倭人)들의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왜는 열도에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륙에 있던 왜는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륙에서 대만으로 쫓겨 간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에게 밀려 쫓겨 가듯이.... 명나라 초기까지 대륙에서 왜구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왜의 본토수복 작전이 아니겠는가? 현 대만에는 A.D 1,600년 이전의 역사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 일본의 고대사는 분명 조작된 것이 많다. 그토록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자기네 역사를 새로 만들려는 일본민족의 처절한 몸부림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역사가 짧다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보이나, 이러한 일본의 의도에 동조하며 자기네 역사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의 행동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그렇다면 대륙에 있던 왜가 열도로 오기 전 열도에는 누가 있었을까? 일본의 원래 원주민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 홋까이도오(北海島)로 쫓겨가 살면서 곰을 숭상한다는 아이누(倭奴)족은 언제 어디에서 열도로 건너간 종족들일까? 그리고 아스카 문화로 대표되는 일본의 고대 문화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한반도의 역사를 보면 고조선--> B.C 195년부터는 낙랑국 --> A.D 32년부터는 고구려 --> A.D 503년부터는 동신라 순으로 주인이 바뀐다. 따라서 고조선/낙랑국/고구려/동신라 시대에 일본 열도로 문화가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낙랑(樂浪)국의 문화가 나라(奈良)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동신라의 문화가 일본열도로도 전해지고, 왜의 주인이었던 백제계가 대륙 남부에서 열도로 오면서 독자적인 일본의 문화가 발달하게 되나 그 근본은 역시 백제 문화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원래 일본민족의 조상인 ‘왜’는 670년 이전까지는 대륙에서 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활동하던 같은 민족이었다. 명나라는 역사과대망상소설인 삼국연의(三國演義)를 보급하면서 동이의 역사를 한반도로 밀어내려고 했고, 일본민족은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싶었던 이해관계의 합치로 양자강 이남의 ‘왜’의 역사를 명나라 때 지금의 일본지역으로 넘김으로써 동이역사의 말살을 시도 한 것은 아닌지?

역사적 사실이 이럼에도 일본인들은 당시 왜는 일본열도에 있으면서 양자강 이남으로 가서 대륙을 지배했다는 엉터리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왜의 항해술로 보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사서의 기록이나 천문학적 분석으로나 관습/역사적 인물 등을 통해서 보더라도, 670년 이전 ‘왜’가 지금의 일본 열도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는 분명 같은 동이의 일부였으며,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민족은 우리상고사의 비밀이 밝혀지면 자기들의 조작된 역사가 송두리 채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의 상고사를 그토록 왜곡/조작하려고 노력하는지 모르겠다. 일본민족이 예전에도 열도에 있었다는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 때 조작된 반도사관에 우리는 아직까지 농락당하고 있다. 반도사관을 탈피해야만 왜와 백제/신라와의 모든 역사 기록이 제대로 읽혀지고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망국적인 반도사관을 훌훌 털고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찾아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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