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나의 광서(廣西) “백제향(百濟鄕)” 방문記- 소진철 교수

吾心竹--오심죽-- 2009. 10. 30. 18:54

내용출처 대륙고려홈  http://kym5006.new21.org


오늘부터 소진철 교수의 백제 관련 글을 연재합니다
지도 등을 보완하여 읽기 쉽게 재구성 해 보았습니다


먼저 소진철 교수 약력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출처는 동아일보 인물정보입니다


(소진철 蘇鎭轍)






1930/05/09 생(음력)
전북 익산시 신용동 344-2 원광대학교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사무실전화 063-850-6580

195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957 미국 남일리노이대 대학원
  

(경  력)
  
1953 -  행정고시 합격
1964 -  국무총리비서실 비서관
1982 -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관 총영사
1984 -  외무부 본부 대사
1986 -  미국 버클리대 초빙교수
1987 - 1995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5 -  (현) 원광대학교 객원교수
1995 -  (현) 대전방송 백제문화재단 이사

  
(저  서)
  
1992 일본문화의 뿌리와 한국(공저)
1994 金石文으로 본 百濟武寧王의 世界
1996 한국전쟁의 기원




나의 광서(廣西) “백제향(百濟鄕)” 방문記



「이먼곳에는 어이 오셨나요?」

소진철(蘇鎭轍)  (원광대 교수, 정치 외교사)



1) 옛날「백제」는 광서지역에도 진출


오래전부터
廣西(광서)지역의 지도상 에는 ‘百濟(백제)’라는 표기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또한
그곳 주민들은 수백년동안 그 땅의 이름을
「百濟墟(백제허)」라고 불어왔는데

진작 우리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년전
모방송사의 한 프로그램에서 그 지역의 역사를 처음으로 보도함으로서
비로서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광서지역의 ‘백제’ 마을 사람들은 주로 ‘장족(壯族)’들인데
그들은 1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서
옛적 「백제」의 영화를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이다.


「廣西壯族自治區 邕寧縣 百濟鄕 百濟墟(광서장족자치구 옹령현 백제향 백제허)」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기도하다.


▒ (운영자 보완지도) 옹령현 백제 지도위치







그 동안
우리와 일본의 역사사서는 대부분이 「백제」 의 ‘실체’를 축소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에 익숙해온 사람들에게

「백제」는 참으로 큰나라로서 먼 남방의 지역에까지 진출하였다고 해도
그것을 믿을 사람은 그리 많치 않을 것이다.

(주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는 왜왕(倭王)이라는 천황(天皇)에게 해마다 조공을 받쳐 왔으며
또한 그들의 왕자들은 천황에 ‘인질’로 와 일본에서 어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도(海南島)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산간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옛 「대백제」의 향수를 한 몸에 안은 체 살아가는
한 무리의 중국 소수민족 ‘장족’이 있다.

(주; 한 주민(장죽)의 말에 의하면 이지역의 ‘장족’들은
오래전에 山東(산동) 반도의 白馬江(백마강) 지역에서 온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이 여기에 오게된 이유는 전쟁 때문에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한 장사를 하러 왔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 (운영자 보완지도) 산동성 백마강의 위치







(운영자 주)

본 홈페이지에서는 여기가 백마강 전투의 장소로 추정하고 있다
바로 대륙백제의 흔적 아닌가 ?


송(宋)나라 이후의 남조(南朝)사서에는
의래히 「백제」의 대륙진출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백제」는 진말(晉末;서기 400년 전 후경)에
‘요서군’과 ‘진평군’에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하고
그것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梁書』百濟條 「晉時句麗旣略有 遼東, 百濟亦 据有 遼西;晉平郡 矣, 自置 百濟郡」)

그러므로
당시의 「백제」는 상당히 큰 세력을 가진 해양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이것을 직접 행사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광서 지역의 ‘백제허’도
「백제」가 실지로 진출한 지점으로 보이며
‘진평군’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백제군’의 한 도읍지로 추정된다.

(주;『中國古今地名大辭典』 晉平縣條 「南朝宋置 南齊因地 今當在廣西境」)


▒ (운영자 보완지도) 진평 2군의 위치





본 홈페이지에서는 고평, 진성을 진평 2군으로 보고 있다


(계 속)



▒ (참고지도) 남제서에 나오는 백제 7태수의 위치





나의 광서(廣西) “백제향(百濟鄕)” 방문記


▒  옹령현 백제 위치







2) 「옹령현 백제향(邕寧縣 百濟鄕)」으로 가는 길


필자가 ‘백제허‘ 를 ‘진평군’ ‘백제군’의 옛 도읍지로 추정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백제허(墟)’라는 그 지명 자체에 있는 것이다.

여기의 ‘허(墟)’는 사전에 의하면
그 뜻은 ‘성터’ 또는 ‘유적지’로써
그것은 ‘백제군’의 옛도읍지가 아니고서는 생길 수 없는 지명이다.

그러므로
‘백제허’는 동북아시아의 고대사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필자가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을 꼭 한번 방문해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던 심정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는 지난달 초(10월 초) 桂林(계림)을 경유해서
같이 갈 사람(통역)을 대동하고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단신으로는 여행을 할 수 없는 오지마을인 것이다.

필자는
계림(桂林)에서 고속버스 편으로 南寧(남영)을 경유해서
근교에 위치한 邕寧(옹령)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桂林-南寧간의 거리는 약 500km인데 5시간정도의 운행시간이 소요되었다.
버스는 비교적 새차로서 편리한편이었다.

차내에는 이차는 우리 나라의 대우(大宇) 자동차가 만들었다고 하는 표시가 있어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비교적 잘 정리가 되어있는데,
통행차량이 거이 없기 때문에 운전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었다.

차도 연변에는 한참 자라고 있는 사탕수수로 밭은 꽉 차있어,
중국 남부 지방의 풍요로운 농촌 풍경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南寧의 외각도시인 邕寧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백제향‘ 행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침날씨는 화창하고 선선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지역은 열대지대라서 하루에도 한두 차례씩은 ‘스콜 squall’이 온다고 해
나는 비에 대한 대비를 하고 떠났다.
이 지역주민들의 생활을 볼 겸 나는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차체가 워낙 고물이라서 외국인이 여행하기에는 적합치 않은 편이 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로도 포장이 되고 도로 사정이 좋아져서, 운행시간은 퍽 단축되었다.
‘백제허’까지의 거리는 약 150㎞인데, 종전에는 3, 4 시간걸였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그절반인 1시간 30분 정도 면 그곳에 갈 수가 있다.


3) 마을에는 ‘백제’ 기명의 간판으로 일색


필자가 방문한 ‘백제허’는 인구가 약 1,300명정도의 작은 농촌 마을이다
(‘백제향’의 총인구는 3,300명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장족’들로서,
그들은 오랜 세월을 「백제」의 역사를 간직하고 사러온 중국의 소수민족이다.

’백제허‘는 오지(奧地)마을로써,
주민들의 생활여건은 아주 열약한 편이고
왜지인의 왕래도 거의 없는 편이라서 여행자가 묵을 만한 수박시설은 전무하고,
또한 식사를 제데로 할 만한 식당도 눈에 뛰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마을에도 소위 근대화와 개발의 바람은 불어 거리는 말끔히 포장이 되고,
하수공사등 여러가지 지반 공사가 한참 중이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마을 유지로 보이는 한 청년이 다가와서
외지 에서 온 우리일행을 근처의 한 골목길로 안내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백제허’에서는 제일 번화하다는 골목인데
그 이름은 ‘百濟街(백제가)’라 하였다.

골목 양측에는 제법 깨끗한 벽돌집이 줄서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그곳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다른 주민들보다는 난 편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에서는 ‘향’ (우리의 면(面)에 해당)의 이름도 ‘백제’이고
마을의 이름도 ‘백제’

그리고
마을의 유일한 골목길의 이름까지도 ‘백제’ 라고 하니
그야 말로 ‘백제’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동네에는 그밖에도 많은 간판이 눈에 띄었는데,
모두 ‘백제’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 것 뿐이었다.

「邕寧縣地方稅局 百濟稅務所(옹령현지방세국 백제세무소)」,
「邕寧縣百濟鄕 人民政府(옹령현 백제향 인민정부)」
등의 지방정부의 간판과,

「百濟文化院(백제문화원)」,
「百濟旅社(백제려사)」
등 수없이 많은 간판들은 모두 ‘백제’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많은 ‘백제’ 라는 이름을 표기한 간판은 본 일이 없다.

나는 수년전
일본 九州(큐슈) 宮崎縣(미야사끼현)의 南鄕村(난고촌)이라는
한 작은 산간마을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마을의 전설에 의하면 「백제」 멸망후 「백제」를 탈출한
한 왕족의 가족들이 망명해서 이곳에 와서 살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옛날에는 ‘백제왕 신사’도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도 ‘백제’의 이름이 들어 있는 간판은 여기저기에서 볼 수가 있었다.
먼저 마을에 들어서면 보이는 것은 「百濟の里(백제마을)」라는 대형 입간판이 보이며
마을 큰길가에는 마을 회관으로 보이는 큰집이 있는데
그것은「百濟の館(백제관)」이다.

그리고「百濟茶室(백제다실)」, 과「百濟書店(백제서점)」등등이 눈에 뛰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숫자로서는 廣西지역의 ‘백제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운영자 주 : 사진을 본적이 있는데 입수 되는대로 올려드리겠습니다)


(계 속)

나의 광서(廣西) “백제향(百濟鄕)” 방문記


▒  옹령현 백제 위치






4) ‘장족’들은 지금도 ‘백제’를 「大百濟(대백제)」로 호칭


필자가 이 마을에 와서 더 큰 감명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 ‘장족’들은 마을의 이름을 ‘백제허’ 라고 쓰고
그것을 발음할 때는 우리말로
「대박제;DaejBakcae」라고 해, 글자 그대로 발음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일본에서
「백제(百濟)」라고 쓰고 그것을 「구다라;くたら」라고 발음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일본 학계는「구다라;くたら」의 어원을 밝히기를 꺼려하는데,

이것은 ‘큰 나라’라는
우리의 고대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주;우리말에는 큰 뱀을 가리켜 ‘구렁이’라고 하는데 이 ‘구’자는 크다는 우리의 고어이다)

그 옛날 「백제」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실체’였던 것이다.

‘백제향’의 ‘장족’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백제」의 위엄을 잊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지워져 없어지게 마련인데,
이곳 ‘백제허’ 사람들은 「대백제」의 찬란한 영화를
‘백제墟’라는 고(古)지명으로 이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허’ 주변에는 많은 고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단성”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사람들은 거기에 가면 옛 성터와 같은 유적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시간 관계상 그곳에는 들리지 못했다.

또한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그 지역에서는 제일 큰 마을인 ‘大王灘(대왕탄)’이 있는데
그 지명을 통해서 볼 때 지금의 尺江(척강)은 그 옛날에는 大王川이라 불이었을 것이다.

백제인 들은 어디를 가나 의래히
‘대왕천’, ‘대왕포’, 나 ‘대왕궁’, 또는 ‘백제궁‘ 과 같은
「대백제」의 존재를 상징하는 이름을 여기 저기에다 표시하곤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고대 일본(왜국)에서 본바가 있다.
’백제허‘에서 동쪽으로 얼마를 가면 ’那樓墟(나루허)‘가 있는데
’장족‘들은 이것도 우리말로 「대나루;DaejNaru」라고 부른다.

지명(地名)의 생명력은 강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곳 “백제향”의 고지명도 그 숨은 뜻을 통해서 볼 때,
「백제」는 분명 그 옛날 이 지역에서 「대왕국」으로서의 위엄을 떨친 것으로 보인다.

武寧王(무녕왕) 대의 「백제」를 말한 것으로 보이는
『양직공도(梁職貢圖)』에 의하면

이 시대에 「백제」는 22개의 “담로”로 나라를 경영했다고 하는데
이 지역도 그런 담로지역의 하나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지역에서도 「백제」는 왜국(倭國)땅에서 본바와 같은 「大王年;대왕년」의 년대를
통용했을것으로 보인다.
(주;『오사카 가이드』 ( 오사카府 경찰부 편) 에 의하면 현재의
나마노區(옛날의 百濟野)는 1천년전에는「百濟郡 百濟鄕」으로 불렀다고 한다)

(계 속)

(보충자료 : 백제의 22담로가 나오는 양서원문 소개)


(중국정사 원문) 양서 권54 제이전 백제


백제의 22담로가 나오는 양서 원문입니다

주요내용으로는
- 백제는 동이다
- 요서와 진평2군을 점유하고 있었다
- 22개의 담로가 있었다
- 왜와 가까워 문신의 습관이 있었다

등 입니다

이하 참고바랍니다











(관련지도)




나의 광서(廣西) “백제향(百濟鄕)” 방문記


▒  옹령현 백제 위치




(운영자 주)

중국 현지에서 입수한 “중국장수전전”에 나오는 백제와 흑치상지의 기록을
대륙고려홈페이지 김용무 선생님이 소개한 것을 재인용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연결되어 소개될줄은 몰랐습니다

자료 아랫부분에 재소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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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제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고향은 어디?


나는 최근 중국에서 발간된 『中國將帥全傳(중국장수전전)』이라는
일종의 장군에 관한 사전을 본 일이 있다.

이 책에는 그 동안 우리에게는 수수께끼로만 알려진
‘흑치상지’의 고향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백제사의 지평을 크게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구당서』,『신당서(新唐書)』와 『삼국사기』등 여러 사서에서는
그를 그저 ‘백제서부인(百濟西部人)’ 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를 그저 사비지역의 서쪽사람으로만 여겨 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람(당(唐)나라)이 말하는 ‘백제 서부인’ 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것은 중국에 있는 ‘요서군’이나 ‘진평군’과 같은 ‘백제군’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백제인을 통칭하는 말로 보인다.
(주 ; 일찌기 신라인 최치원은 백제의 대륙진출을 인정한다)

이 「장수전전」은 놀랍게도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인’이며
그는 지금의 廣西 ‘백제향’ 지역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黑齒常之 (? ~ 689年) 唐高宗李治武則天后時名將 百濟(今廣東欽縣 西北)西部人)

그러니까
‘흑치상지’는 그의 묘지명에서 발힌 바 와 같이
(묘지명은 약 70년 전 중국 洛陽(락양)에 발굴)

그의 조상 문덕(文德), 덕현(德顯), 사차(沙次)등은 백제인 으로서
대대로 「흑치국」의 왕에 봉해진 백제왕의 후왕(侯王)으로서
자신은 그들의 후손으로서 지금의 ‘백제향’ 지역에서 출생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의 출생은 629년으로 추정)

그렇다면
그의 출생은 백제사에 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의 하나인
「흑치국」의 위치를 비정(比定)하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과연「흑치국」은 어디에 위치했는지에 대한 답은
기록을 통해서 찾기는 어려운게 사실이나,
정황을 종합해서 볼 때 「흑치국」의 도읍지는 오늘날의 ‘백제향’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번 내가 이 지역을 방문한 주된 이유도
「흑치국」의 소재를 확인해 보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그래서 나는
이 지방의 한 유지에게 “옛날 이 고장에도 ‘흑치인’들이 살지 않았느냐?” 고 물었더니

그는 (60살은 된 듯함) 내질문에 성큼 답하기를
“자신의 세대에서는 볼 수가 없었지만 조부의 세대에서는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조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조부의 소년 시에는 거리에서 종종 이빨이 검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부의 말은 “그들은 게을러서 이를 딱지 않아 그리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러니까
100여 년 전만 하드래도 마을의 거리에서는 ‘흑치인’들을 볼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흑치국」의 도읍지도
이 지역의 어디엔 가에는 있었을 것이라는 나의 추정은
그리 빗나간 이야기는 아닌 상 싶다.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는 동안에 해는 저물러 가고
나도 이만 ‘백제허’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흑치상지’의 조상들의 유물도
이 근방 어딘가 에는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간직하고
후일 다시 이곳을 방문할 것을 기약하고 ‘백제향’을 떠났다.

(주;옛날 중국의 양자강 이남의 여러지역(대만도 포함)에서는
이빨이 검은 ‘흑치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서부지역 및 서남방과 월남경내에는 많은 ‘흑치인’이 살았다고 한다)

(계 속)

(운영자 보완자료)



< 흑치상지 (黑齒常之) >


우리가 알고 있는 흑치상지(黑齒常之)는

☞ 자료출처 : 야후 백과사전

"660년(의자왕 20)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달솔겸 풍달군장(達率兼風達郡將)으로서 임존성(任存城:大興)을 근거로
패잔병 3만여 명을 모아 나당연합군에 반격을 개시,
백제부흥운동 초기의 중심인물이 되어 200여 성을 수복, 군세를 떨쳤다.

그 후
백제군 내부에 분열이 생기고 나당연합군이 총공격을 해오자
주류성(周留城)이 함락되었으며, 백제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그때 당나라 고종(高宗)이 보낸 사신의 초유(招諭)를 받고
유인궤(劉仁軌)에게 투항, 임종성 공략 때 당나라 군사에 끼어 참전,
이를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佯州刺史)가 되고,
678년(당 의봉 3) 토번(吐蕃) 정벌에,
681년(당 개요 1) 토번의 잔도(殘徒) 찬파(贊婆) 토벌에 참가,
그 후 돌궐(突厥)의 정벌에 공을 세웠다.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를 거쳐 연국공(燕國公)의 작위를 받고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에 올랐으나,
이를 시기한 주홍(周興) 등의 무고로 조회절(趙懷節)의 역모사건 때 옥사했다"

라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 명장 흑치상지를 "광동성 흠현 서북의 백제 서부인"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광동성이 백제땅이라는 것인가 ?


▒ 출처 : 대륙고려 홈 (http://kym5006.new21.org/ccc1.htm)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이라는 책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흑치상지(?∼689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 당고종 이치, 측천무후 때 명장.
- 백제(지금 광동성 흠현 서북) 서부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 흑치상지는 백제서부인인데, 반도의 충남서부인인가 아니면 광서장족자치구인인가 ?  






< 원문 >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中國將帥全傳}(권中 劉仁軌), (北京, 工商出版社, 1997), p.947,

- 黑齒常之(?∼689年), 唐高宗李治, 武則天時名將.
- 百濟(今廣東欽縣西北)西部人 : 백제(금광동흠현서북)서부인
- 身長七尺有余, 驍勇善戰, 有謀略.

黑齒常之早先在本蕃任達率兼郡將. 顯慶五年(660年), 唐高宗派蘇定方破灰百濟, 黑齒常之率部下前去送降款, 遭到唐軍兵士的 劫殺戮, 黑齒常之見狀, 忙帶了十幾人逃回本部, 不幾日收羅兵士三萬余人. 蘇定方破兵圍攻, 黑齒常之率部報死相 , 唐軍大敗, 黑齒常之一擧收復失地二百多 城池. 龍朔三年(663年), 唐高宗下詔招降黑齒常之, 常之隨卽率部降唐, 被任左領軍員外將軍.

※ 百濟는 今廣西壯族自治區 南寧市에 속함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中國將帥全傳}(권中 劉仁軌), (北京, 工商出版社, 1997), p.933

龍朔三年(663年) 劉仁軌所率的水軍及運粮船隊與敵兵大戰于白江(今湖南祁陽)之上, 接連四戰, 均茯大 , 焚燒敵船四百余 , 一時江上火光 天, 江水都被染紅了. 敵兵大敗, 百濟王危惶逃避, 其余敵都歸降了唐軍. 劉仁軌因功任帶方州刺史, 鎭守百濟. 乾封元年(666年) 任右相. [원문에는 敵(舌+ )임]

白江은 今湖南永州市祈陽縣



<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 소개 >


이책은
중국인 학자들이 중국정사인 25사에 남아있는 장군들의 업적을 여러가지 문헌을 토대로
간략하게 기술해 놓은 위인집으로 상중하 3권으로 구성

최원용 선생님이
99년 3월에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서점에서 발견하였다가 2001년 2월 국내로 반입한 책임


# 저자 등 소개 #

정복전 가영설 양효춘 주편 {중국장수전전}(권중 유인궤),
(북경, 공상출판사, 1997), p.933,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中國將帥全傳} (권中 劉仁軌),
(北京, 工商出版社, 1997), p.933, 龍朔三年(663年)


< 원 문 >




當時,唐將蘇定方奉詔(고할,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알릴 조)
兵討高麗,戰敗而ㅇ(이 簡字는 모르겠음),
高宗下詔給劉仁軌,
"我們(우리들 吾等 문)的大軍己(자기, 다스릴 기)經撤回,
稱們一城孤守,十分不利,看情況離以守下去,不幸的活就渡海回來(아이다툴,어조사 파)."

龍朔三年(663年) 劉仁軌所率的水軍及運粮船隊與刮兵大戰于白江(今湖南祁陽)之上,
接連四戰, 均茯大 , 焚燒刮船四百余 , 一時江上火光 天, 江水都被染紅了.
刮兵大敗, 百濟王危惶逃避, 其余刮都歸降了唐軍. 劉仁軌因功任帶方州刺史, 鎭守百濟.

乾封元年(666年) 任右相.



< 해 설 >


당시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고려(=고구려)를 토벌하는 병사를 일으켰으나,
전쟁은 패색이 되어, 고종(당 고종)이 유인궤를 보내면서 조서를 내리기를,

"우리의 대군이 철회를 하여야할 수 밖에 없음이,
외로이 1개성에 의지하여 지키고 있으니,
정황을 볼 때,
지키지 말고 물러가 불행적으로, 바다를 건너 돌아올 활로를 찾으라(찾을 수 밖에 없다)"
하였다.

유인궤가 가서 장수와 군사를 모아 놓고 말하기를,
"우리는 고구려로 출병하였는데, 이는 국가적 대업인데,
현재, 공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가게 되었으니,
우리는 장차 조정을 어떻게 바라 볼것이냐,
장졸들은 죽기로서 싸워 국가에 보답할 공을 이루라" 하였다.

유인궤가 객관적으로 세밀하게, 적과 아군 쌍방 형세를 분석해 보고는,
백제를 견고히 지키고 살펴 나가기로 결정하였는데 오래 가지 않았다.

유인궤는 병사를 데리고 진현성 야습에 나서 등나무 줄기를 잡고
성위로 올라 단번에 공격하여 성아래 연못에 이르러,

통로를 만들어 신라(지금의 복건성 장정현 ①)의 군량 운반 도로로 갔다.

이후,
유인궤, 유인원은 웅진(지금의 남조선  대전 서북 ②)의 동쪽에 있으며 백제군대를 연속 3년 패배시키고 또, 성이 앉은 곳의 연못을 공격하여 없앴다.

용삭삼년(663년) 유인궤는
소속한 수군과 운량선대와 병사를 인솔하여, 백강(지금의 호남성기양 ③)의 위에서,
연속 4전(四戰)에 접하여, 균일하게 크게, 전선 4백여를 불태우고 깨트려서,
일시, 강 상류에 화광이 빛나고 하늘은, 강물이 빨갛게 물듦이 배었다.

병이 대패한, 백제왕은 황급히 도망하여 도피했는데,
우리가 그 도읍을 쳐부수고 당군은 그 항복을 받았다.

유인궤는 그공으로 인해서 대방주자사에 임명됐고, 백제의 진을 수비했다.

건봉원년(666연) 임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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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원문 생략 : 원본책자사진 참조 >

유인궤가 백제를 통수하는 기간중에,
그 지대에 이어지는 (백제)수복의 전투에 힘을 다 쏟았다.

다른 중점은
호적의 새로운 정리, 관청(행정 조직) 설치,도로 개통,교량 건설, 제방 보수, 경작 육성을 하여,
백제 일대가 사람이 편안하고 생업에 종사하도록 힘썼다.

유인궤는 고종에게 상서를 올려,현재 당군 초모병역중의 문제에 진술하여,
그중에 이로운 것과 폐할것을 세밀히 분석하였는데,
다른 건의도 같이 고종은 채납(채용하고 받아들여)하였다.

함형 5년(674년), 유인궤는 명림도 대총관 부임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쪽 신라를 공격했다.(지금의 조선 반도 동남부 ④)


위에서 언급한 내용중

① 1은 신라(지금의 복건성 장정현),
② 2는 웅진(지금의 남조선 대전 서북)
③ 3은 백강(지금 호남성 기양),
④ 4는 신라를 공격했다. (지금의 조선 반도 동남부),

한족의 동이족 말살정책의 일환인
"동이역사 반도 밀어내기 정책"의 영향으로 지명의 위치가
대륙과 반도를 오고감을 알수 있다


(운영자 주)

이는 대륙백제의 기록임을 왜 모르는가 ?

“광서장족자치구에 있는 백제인 흑치상지가 반도의 백제로 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가서 묻혔다“

이것이 말이되는가 ?
바로 대륙에 백제의 본토가 있었음을 말함이다

수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부분이다



< 기양 = 치양 >

호남성 면적 : 21만 천평방킬로미터, 인구 : 6300만명 (1995년 지도자료)
상강(湘江)의 유역에 있는 광서장족자치구
전주 --> 호남성 영주 --> 호남성 치양 (稚陽: QiYang)
稚陽 ---> (원문에는 祁땅이름치 陽=언덕부변+日) 祁陽縣



< 흑치상지 묘비명 >


- 출처 : 율곤학회 http://www.sanggosa.com 한희수님이 올리신 글


하늘을 위로 이고 있으면서 천도(天道)에 순응하는 것은 땅이고,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은 자라도 쓰여질 수 있는 것은
군율(軍律)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운수에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름다운 옥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밀산(密山)위에서 노닐어야 하고, 지혜와 덕을 쌓은 사람이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면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부군(府君)은 이름은 상지(常之)이고 자(字)는 항원(恒元)으로 백제인(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부여씨(夫餘氏)로부터 나왔는데 흑치(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씨(氏)로 삼았다.

그 가문은 대대로 달솔(達率)을 역임하였으니,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같으며, 본국에서는 2품 관등에
해당한다.

증조부는 이름이 문대(文大)이고, 할아버지는 덕현(德顯)이며,
아버지는 사차(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부군은 어려서부터 고상하였고, 기질과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으니, 가벼이 여기는 것은 기호와 욕망이었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가르침이었다. 가슴 속에는
길은 마음을 가졌으니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맑았고,
정감의 폭은 너무나 넓었으니 그 거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대하였다.

여기에 신중함과 성실함을 더하였고, 온화함과 선량함을
포개었다.

이런 까닭으로 친족들이 그를 존경하였으며, 스승과
어른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나이 어려 소학(小學)에서 공부할 적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및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읽었다.

이에 탄식하여 "좌구명(左丘明)이 이를 부끄럽다고 하였고,
공자도역시 부끄럽다 하였으니, 진실로 나의 스승들이다.

이보다 더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찌 많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20세가 안되어 가문(家門)의 신분에 따라 달솔(達率)을 받았다.

唐 顯慶(당 현경 : 656∼660) 중에 당나라에서 형국공 소정방(邢國公 蘇定方)을
보내어 그 나라를 평정하자, 그 임금(실제는 태자)
부여융(夫餘隆)과 함께 천자를 알현하였으니, 당에서는 이들을
만년현인(萬年縣人)에 소속시켰다.


인 덕(麟 德 : 664∼665) 초년에 인망(人望)을 얻어 절충도위(折衝都尉)를 제수받고
웅진성(熊津城)에 진수(鎭守)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함형(咸亨) 3년(672)에는 공적에 따라 충무장군(忠武將軍),
행대방주장사(行帶方州長史)를더하였다.

얼마 안 있어 사지절(使持節), 사반주제군사(沙泮州諸軍事), 사반주자사(沙泮州刺史)로
관직을옮기고 상주국(上柱國)을 제수받았다.

이에 지극히 공평한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사사로움을 잊어버리는 것을 커다란 강령으로 삼았다.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겸
웅진도독부사마(熊津都督府司馬)로 직책을 옮기게 하였고, 부양군 개국공(浮陽郡 開國公)과
식읍(食邑) 2천 호(戶)를 더하여 봉하였다.

이 때에 좋은 평판으로 물망(物望)에 오르내렸고, 조정의
인망이날로 높아졌다.

마침 포해(蒲海)에서 재앙이 일어나고 난하(蘭河)에서 사변이 벌어져
부군으로 하여금 하도경략부사(河道經略副使)로 삼았으니, 실로 그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다.

부군은 품성이 빼어나고 굳셌으며, 자질이 뛰어나 사리에
통달하였다.

힘으로는 능히 무거운 문 빗장을 들어올릴 수 있었으나
힘센 것을 자랑하지 않았고, 지혜로는 능히 외적을 방비할
수 있었으나 지혜있는 것을 떠벌리지 않았다.

매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드러나게
하였고어리석은 듯이 함으로써 인격을 도야하였다.

그러므로 그 때에 행실이 산처럼 똑바로 서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어질되 간사함을 가르지 않았고, 위엄을 갖추되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니, 상주고 벌주는 것은 반드시
원칙에
따랐고, 선을 권하고 악을 말리는 데에는 어긋남이
없었다.

또한 5륜(倫)의 커다란 본보기를 이루었고, 3군(軍)의 크나큰
복이되었으니, 이에 병사들은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고,아랫 사람들은 그 잘못을 용납받을 수 없었다.

고종(高宗)이 매번 그의 선함을 칭찬하여 그를 지조와 학식있는
사군자(士君子)로서 대우하였다.

서도(潟:청해靑海지방)에 있을 때에는 크게 공훈을 세웠다.

이 때에 중서령 이경현(中書令 李敬玄)이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가 되자 군사들이
그의 지휘권을 빼앗았고, 역시 수군대사(水軍大使), 상서 유심례(尙書 劉審禮)가
이미 패하여 죽자 장수들 중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 중에 부군이 홀로 높은 산마루와 같은 공훈을
세우면서 그 곤경을 극복함에 따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직책을 옮기고 이경현을 대신하여 대사(大使)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에 대한 풍문에 따른 것이다.

부군은 곁에 음악과 여색(女色)을 두지 않았고, 평상시에
노리개를 가지고 즐기지 않았다.

경서(經書)를 베개삼았으니 제준(祭遵)과 같이 예의를 중시하였고,
뛰어난 지략을 품었으니 두예(杜預)가 깃발을 많이 세워 적을
혼란에 빠뜨린 것과 같은 꾀를 지녔다.

오랑캐의 티끌이 깨끗하게 치워지니 변방의 말이 살찌고,
중원의 달이 훤하게 비치게 되니 하늘의 여우 기운이
사라졌다.

전쟁터에 출정하면 칭송이 뒤따랐고, 전쟁터에서
개선하면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리하여 좌응제위대장군 연연도부대총관(左鷹提衛大將軍 燕然道副大摠管) 으로벼슬을옮겼다


수공(垂拱:685∼688) 말년에 천명(天命)이 장차 바뀌려 하였는데,
돌궐(突厥)의 골졸록(骨卒祿)은 미친 도적으로 이미 자신의 미미함을
살피지못하였고, 서경업(徐敬業)은 반역자로서 또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남쪽으로 회음(淮陰)과 해릉(海陵)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오랑캐
군사를섬멸하는 데에 모두 큰 힘이 되었으니, 그의 위세와
명성이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천자가 제(制)를 내려 이르기를 "재간과 도량이
온화하고 우아하며, 기질과 정기가 고상하고 밝았으며,
일찍부터 어질고 의로운 길을 밟았고, 마침내 깨끗하고
곧은 곳을 밟았구나.

말한 것은 분명히 행하고 배운 것으로 자신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여러 차례 군사를 통솔하여 매번 충성스러움을
드러냈도다.

그러므로 겸국공(연국공:兼國公 燕國公)과 식읍(食邑) 3천 호를 봉할 만하다.

그리고 다시 우무위위대장군 신무도경략대사(右武威衛大將軍 神武道經略大使)를 내리고
나머지는 그 전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이곳의 포효하는 용감한 병사들을
통솔하여저곳의 흉악하고 미친 무리들을 전멸시킴으로써,
오랑캐의 말이 남쪽에서 목축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중국의 사신들이 북쪽으로 가는 원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영주와 하주(靈州와 夏州)는 요충지로서 요사스런 오랑캐들이
가득하였으나, 부군의 위세와 명성은 이를 대신할 자가
없었다.

다시 회원군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로 자리를 옮겨 떠도는 요기를
막기도하였다.

마침 재앙이 악한 무리로부터 흘러나와 고고한 품격을
가진 부군에게 거듭 미치니, 의심이 마치 명백한 사실인
양 되어버려 옥과 돌이 섞여 구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옥에 갇혀 이윽고 하늘을 등지게 되니,의로움은
목을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러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

이 때 나이 60세였다.

맏아들 준(俊)은 어려서 집안이 재난을 당하자 아버지의
분함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세웠다.

오랑캐의 조정에서 목숨바칠 것을 맹세하다가 천자가
보낸 사신에게 몸을 맡기니, 여러 차례 충성스러움을
드러냈고 누차 공명을 떨쳤다.

성력(聖曆) 원년(698)에 원한이 쌓여 풀지 못함을 천자가
바르게살피시고 制를 내려 이르기를, "고인이 된
좌무위위대장군 검교좌우림위 상주국 연국공 흑치상지
(左武威衛大將軍 檢校左羽林衛 上柱國 燕國公 黑齒常之)는
일찍이 가문의 지위에 따라 벼슬을 이어받아 군진(軍陳)에서의
영예를 두루 거쳤으며, 누차 군율(軍律)을 담당하여 공훈을
받들어 떨쳤도다.

지난 번에 사실 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더니,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지만
의심받았던 죄는 판별되지 못하였었다.

근래에 이를 검토하여 살펴보니 일찍이 모반하였던
증거가없고, 오로지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실로한탄스럽기 그지 없도다.

마땅히 분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니, 총애하는 표시로 관작을
더하여 삼가 죽은 이를 영광스럽게 만드노라.

따라서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으로 추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라.

그 아들 발격장군 행란주광무진장 상주국 준
(渤擊將軍 行蘭州廣武鎭將 上柱國 俊)은
어려서부터집안에서 명성을 날렸고(?), 누차 진실된
정성을 드러냈으며, 아주 위급한 상황에도 이를 피하지
않았고,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도다.

마땅히 이를 포상하여 기록해둠으로써 크게 칭송함을
보이고자 하노니, 우표도위익부좌랑장(右豹韜衛翊府左郞將)에 봉할 만하다.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아아, 성력(聖曆) 2년(699) 1월 22일에 천자가 칙을 내려
이르기를, "연국공(燕國公)의 아들 준(俊)이 아버지를 이장(移葬)하겠다고
요청하였으니, 물건 100 가지를 내리고, 그 장례 일에
필요한 휘장, 일꾼 등 일체를 관청에서 공급하라.

그리고 6품에 해당하는 경관(京官) 1명으로 하여금 가서
살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즉 그 해 2월 17일에 망산(邙山)의 남쪽, 관도(官道)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에 받들어 이장하였으니, 이것은 예에 맞는
것이다.


생각건대, 부군은 외따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처럼
뛰어나기
이를 데 없었으니 재간있는 사람들 사이에 표상이 되었고,
거울을 걸어 놓은 것처럼 허상과 융화되었으니 선인의
도리와 합치되는 사람들 사이에 우러름의 대상이 되었다.

말은 곧고 뜻은 넓었으니 지엽적인 일들이 근본적인 것을
가리는 일이 없었고, 계획을 세우면 일이 이루어졌으니
처음의 일들이 마지막과 일치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밤낮으로 나태하지 않았고 마음은 항상 윗사람을 섬기는
데에 두었으며, 곤경에 처하여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고
뜻은 항상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데에 두었다.

군자가 관여할 바가 아니면 그 생각은 아예 고려도 하지
않았고, 선왕이 물려준 바가 아니면 그 교훈은 아예 마음
속에 두지 않았다.

군문(軍門)에서 스스로 수레를 밀어 변방에서 절개를 이루었다.

그러니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나쁜
말을 하지 못하였고, 아무리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좋은 말을 찾지 못하였다.

지혜있는 사람이 그를 보면 지혜롭다 하였고, 어진
사람이그릇 보면 어질다 하였다.

재물을 멀리하고 자신을 잊어버렸으며, 의를 중시하고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목이 달아날지라도 이해를 따지지 않았고,
몸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올바른 길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겁많은 사람도 그로 이해 용감하게
되었고,
탐욕스런 사람도 그로 인해 청렴하게 되었다.

이것은 굳이 저울을 논하지 않아도 잘못된 무게를
바로잡는 것과 같았고, 준족을 가진 빠른 말로 인하여
느린 말이 원대함을 알게 되는 것과 같았다.

관리로서 마음이 곧고 재간이 있었으니, 글을 쓰매
쌍벽을 이룰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스스로
자책하였고, 인륜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능력을
갖추었으니, 잠자코 있더라도 천금이 그 값어치를
발휘하였다.

진실로 지금의 시대에만 본받을 바가 아니었고, 대체로
뭇사람으로부터 우뚝 솟은 인물의 표준이 되었다.

영예와 굴욕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삶과 죽음은 타고난
것인데, 어차피 귀착하는 바가 동일하다면 어찌 부인의 손
안에서 목숨을 마치겠는가?

내가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삼의소(參義所)에 있었는데, 그의
도리에 감복하였고 그의 공훈을 칭송하였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5악(嶽)을 말하는 사람은 천태산(天台山)이 병풍처럼 첩첩이 서 있는
모습을 알지 못하고, 4독(瀆)을 바라보는 사람은 운주(雲洲)에 핀
붉은 꽃을 깨닫지 못하네.

삼가 듣건대 김일(金日)제는 한나라의 칼집이 되었고, 백리해(百里奚)는
진나라의 사다리가 되었도다.

참으로 사리에 밝다 말할 수 있으니 뭇사람을 즐겁게 할
정도로 뛰어났고, 가는 곳마다 보배가 되었으니 어디에
간들 명석하다 아니할 것인가.

공이 동쪽으로부터 왔도다, 마치 봄바람 불어 오듯이.

예악(禮樂) 제도가 그로 인해 본색을 드러냈고, 소리와 광채가
그를 기다려 뜻을 이루었도다.

끝이 없구나 군사들의 깃발이여, 가지런하구나 수레들의
덮개여.

커다란 종을 치니 북이 울고 퉁소가 화답하는구나.

이는 누구의 영화인가 나를 두고 덕이 있다 하는
소리로다

사방에 걸쳐 오랑캐의 근심을 없앴고, 천 리에 걸쳐 공(公)과
후(侯)들의 성을 지켰도다.

공훈을 이미 펼치니 충성과 의로움이 벌써 드러났도다.

그러나 만물에는 곧고 굳건한 것을 꺼리는 일도 있고,

행실이 높으면 도리어 해를 당하는 일도 있구나.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그 높이를 잃게 되었고, 어두운
무덤속에는 빛이 사라지게 되었구나.

천하가 그를 위해 애통해 하였고, 4해(海)가 그의 현량(賢良)함을
애처롭게 여겼도다.

천자가 이를 깊이 헤아리니, 살아있을 때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포상이 미쳤도다.

내가 실로 감모하여 그를 기리는 글을 짓노라.

그에게 바쳐진 말들이 영원할 것이며, 그의 명성은 끝이
없을 것이로다

(끝)


나의 광서(廣西) “백제향(百濟鄕)” 방문記


▒  옹령현 백제 위치






6) 방문 소감


비록 짧은 시간의 방문이기는 하나, 여기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처음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내마음한 구석에는
“과연 백제인 이 이 먼 곳에 까지 올 수 있었을까?”,
“왜 왔을까?”,
그리고 “‘장족’들은 왜 여기 와서 살고 있을까?” 등등의 의문이 교차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곳의 ‘장족’들이 1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옛날 백제인 들의 생활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조상은 이땅에서 백제인과 더불어 오랜 세월에 걸쳐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 하게 되었다.

그곳의 집집에는 데게 방앗간이 있는데,
그 방아는 쌍다리가 아니라 ‘외다리 방아’였으며,
또한 부엌(옛 날 우리의 부엌과 같이 안지는 것)의 ‘맷돌’은
주둥이에 홈이 파진 맷돌인데 ]

이것들은 모두 옛날 백제인 들이 사용했던 양식 그대로인 것이다.
오늘날은 전라도나 일본의 오지농촌에서 나 볼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는 큰 고목의 느티나무가 서있는데,

주민들은
그 옛날 백제인 들이 나무에 제단을 채려 놓고 마을의 소원을 빌었던 것처럼
지금도 제를 올이고 있으며,
한편
집안에는 조상을 모시는 조그마한 재단이 있는데
(일본에서도 집집마다 재단을 차려 놓고 있다)
이런 관례는 옛날 백제인 들의 생활양식 그대로 인 것이다.

찾아보면 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이 몇가지의 사래만 보도라도 그런 것은 하루이틀만에 동화(同化)되는 것은 아니고
오랜 습관의 반복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지역에 있어서의 「대백제」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장족’들은 「백제」를 부를때는 아직도 “대박제”라고 하는데,
다소 변음은 되었으나 이것은 옛적부터 불러오던 습관일 것이다.
(중국말 발음으로는 ‘빠이지’(Baijixu) 라고 해 전혀 다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백제향’ 지역은 옛 ‘백제군’의 한 도읍지로 보이며,

또한 그곳은 동시에 ‘흑치상지’의 조상이 왕으로 봉해졌다고 하는
「흑치국」의 도읍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주;魏志倭人傳;위지왜인전(서기 240년 경의 말)에는 「흑치국」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왜국’에서 남쪽으로 1년의 뱃길에 있다고 한다.
그것이 어디인진는 확실치 않으나 전술한 「흑치국」과는 무관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백제人이 이지역을 출입하였다는 사실은 『일본서기』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推古紀(스이고기) 22년 (614년)-백제는毘崙(곤륜·캄보디아지역)에서 -온 사신을 바다에 던져 넣어 죽였다)

(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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