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공주의 무령왕릉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吾心竹--오심죽-- 2009. 10. 30. 18:50

독살당한 무령왕은 백제땅에 묻혔을까?
서자 성왕은 부왕이 독살당한 것을 감추고 왕위에 오르나?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장문이라 2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독살당한 무령왕은 백제 땅에 묻혔나?
(2부) 무령왕의 아버지(부왕)은 누구인가?

필자가 여러 가지 근거를 대며 백제는 대륙에 있었다는 글을 계속 게재하자, 식민사관의 이론을 무조건 추종하는 무리들이 충남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을 근거로 내세우며 “네가 아무리 떠들어도 백제는 한반도에 수도가 있었다. 무령왕릉이 그 증거다.”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무령왕릉이 있는 충남 공주가 과연 백제의 수도였는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현재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백제의 수도 변천사를 보면, 시조 온조왕이 하남 위례성에 도읍해 한성(서울)백제 시대를 열었으며,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자 아들인 문주왕이 남쪽인 웅진(熊津 공주)으로 천도했고, 26대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고치고 도읍을 사비(泗沘 부여)로 옮겼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식민사학계의 백제수도에 대한 지명 비정은 지금까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학계의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망국의 식민반도사관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끝없는 애국심(?)에 힘입어 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인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고 하는 데 싫어할 국민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식민사학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사학계가 파놓은 함정이라는 것을 선량한 우리 국민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오히려 필자처럼 역사의 진실대로 백제의 주무대가 대륙 산동성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이유는 필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이 땅 한반도가 삼국의 주무대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가관인 것은 “백제가 중국에 있었다면, 백제인은 중국인 아닌가? 나는 중국인의 후손이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국민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이 내세우는 “현재의 중국 땅에서 있었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다.”라는 논리와 같은 것으로 참으로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륙의 노른자인 동부평야지대를 호령했던 백제의 역사가 지금 그 땅이 중국 땅으로 바뀌었다고 중국의 역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중국 땅은 우리 역사 강역의 일부다.”라는 개념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혈연 즉 조상을 찾아 그 나라가 활동했던 지역을 우리의 역사 강역으로 봐야지,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는 국가영토가 역사구분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에게 묻고 싶다. 만일 중국 땅의 반 이상이 미국 땅으로 된다면, 지금 중국(한족)의 역사는 땅 임자인 미국의 역사가 되느냐? 역사란 그 영토의 현 소유자의 것이 아니라, 당시 소유하고 있던 자의 것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동이족의 역사가 중국 한족의 역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의 기준에서 볼 것이 아니라 당시의 기준에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동이가 활동했던 지역은 역사적으로는 우리의 강역이다.

무령왕릉에 대한 의혹제기
 
▲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과 왕비의 금관 장신구. 왼쪽이 왕의 장신구
무령왕은 백제의 25대 왕으로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왕이었다. 그런 위대한 왕의 무덤이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에서 발견되자 온 나라가 온통 흥분에 휩싸이고 들썩거렸다. 거기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며, 이중 국보가 12건에 이른다. 유물에는 지석, 석수,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류와 몇 점의 부장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덤의 주인공과 연대가 뚜렷하게 새겨진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이 출토되어 백제 역사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더구나 그 기록들이 <삼국사기>의 기록들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어 더 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단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던 삼국시대 왕의 무덤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와 신라의 왕릉은 어디에 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는 의자왕을 빼고는 왕릉위치에 대한 기록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 무덤이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을 더욱 정착시키는데 악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고분의 발견으로 충남 공주는 백제의 수도로 완전히 굳어지게 되며, 더불어 서울과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다는 이론(반도사관)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이 무덤은 대륙백제론을 주장하는 민족사학자들의 이론을 반격하는 결정적인 유물적 증거로 맹활약(?)을 하게 된다.

역사의 진실인 삼국의 대륙존재론을 주장하는 민족사학자들 중 일부는 그 무덤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가짜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의혹들을 제기했으나 그것을 가짜로 확정지울 수 있는 결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무령왕릉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면 할수록 오히려 억지를 부리는 이단아로 취급받아 왔다. 
 
▲  공주의 무령왕릉 발굴 당시의 유물 배치도

그런데 최근에 무령왕의 죽음에 관련된 역사 기록이 나타나 눈길을 끌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기 전에 먼저 민족사학계가 주장했던 <공주에서 발굴된 사마왕(斯麻王)에 대한 지석(誌石) 연구>란 제목으로 무령왕릉에 대해 의혹 제기한 것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전에 참고로 두 민족사학자의 글을 간략하게 인용해 본다.

첫째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저자인 송종성선생의 글이다. “(중략) 이런 위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물증까지 위작해 넣어 놓은 것이 무령왕릉 지석인 것이다. 斯麻라는 이름은 8세기 초에 일본서기 저자들이 지은 이름인데 어찌하여 6세기 초의 무령왕릉에서 그것이 새겨진 지석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송선생은 무령왕릉이 한번도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으로 발표되었으나, 발굴 시 무덤 내부가 엉클어져 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누군가가 지석을 위작해 넣은 것으로 본 것 같다.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나 그렇게까지 비약해서 지석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은 국회 국사청문회 속기록 내용 중에 있는 <무령왕릉의 묘제는 백제의 대륙진출을 입증한다.>는 제목의 임승국교수의 글이다. “무령왕릉에 관한 말씀도 했습니다마는, 중국 땅에 가보면 무령왕릉과 꼭 같은 양나라의 묘제가 많이 있는데 무령왕릉의 묘제는 이상하게도 양나라 묘제와 꼭 같습니다. 그렇다면 양나라와 백제는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이 거의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과거와 같으면 의래 이렇게 생각들을 했어요. 즉 "묘제가 같으니 아마도 양나라 쪽에서 백제를 쳐들어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나 반대로 「백제가 양나라에 진출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지는 못했습니다. (중략)”

임교수는 철저한 대륙론자답게 백제와 양나라의 묘제가 똑같다는 것은 아예 백제가 양나라에 진출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했다. 여하튼 무령왕릉에 대한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으나 역시 근거 부족으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 외 민족사학계의 대표적인 의혹은 아래와 같다. 

1. 백제 대왕릉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다.
우선 이 무덤이 과연 강성했던 백제 무령왕의 부부합장 능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무덤의 크기가 작다. 이 무덤의 크기는 1976년 평남 남포시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귀족이었던 유주자사 진의 무덤과도 확연히 구별된다. 덕흥리 고분은 전실(크기: 297 X 202 X 285)과 내실(328 X 328 X 290) =  48.3m3으로 2개의 석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은 부부합장 능임에도 불구하고 단칸으로 크기가 420 X 272 X 293 = 33.5m3에 불과하다. 
 
▲  왕과 왕비의 합장릉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크기가 작은 무령왕릉

2. 왕릉 옆에 다른 무덤을 쓸 수 있나?
게다가 보통의 경우 왕릉주위에 다른 무덤을 쓰려면 반드시 일정거리 이상 떨어지는 것이 상식인데 사마왕릉에서 약 20미터 떨어진 곳에 두개의 무덤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실제로 거의 붙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진짜 백제의 왕릉이었다면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   공주 무령왕릉 바로 옆에는 2개의 무덤이 붙어 있다.  '가'가 무령왕릉이고 2개의 피장자를 알 수 없는 고분이다.

3. 지석의 글씨체가 조잡하다
무덤 안에서 발견된 지석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글씨체가 마치 어린 학생이 졸필로 새긴 듯한 조잡한 글씨체이다. 대왕의 지석이란 당연히 당대 국가 최고의 명필이 쓰는 것이 상식 중의 상식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석의 글씨체는 성의를 다해 정교하게 조각한 것이 아니라 대충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서 글자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를 백제대왕의 지석으로 보기에는 미흡하다는 의견이다. 

▲  일국의 왕의 지석으로 보기에는 너무 조잡하고 졸필이다.
 
4. 왕의 이름인 사마의 마(麻)자가 기록과 다르다.
무덤의 내부에서 발견된 지석에는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이란 문구가 있다. 그리고 사마를 존호로 쓴 왕도 없고 휘(이름)로 쓴 왕도 기록상으로는 무령왕 뿐이기 때문에 이 무덤의 주인공은 당연히 무령왕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사마(斯麻)의 마자가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에 나와 있는 사마(斯摩)의 마자와 다르다는 것이다. 일개 귀족의 무덤에도 오자(誤字)를 내지 않거늘, 하물며 일국의 국왕의 이름에 오자를 새겼다는 것이 말이나 될법한 이야기냐는  것이다. 

발음이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이두문 이라면 가능하다 하겠으나, 여하튼 왕의 칭호를 글자를 다르게 썼다는 것에 의문이 남는다. 양서에는 여융(餘隆)이라는 이름 밖에 없다. 그렇다면 斯麻가 시호인가 아니면 휘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의 휘는 분명히 사마(斯摩)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지석의 사마왕(斯麻王)은 시호가 아닌 휘(이름)를 쓴 것으로 봐야하나, 광개토대왕비등 어느 곳에도 ‘휘’를 기록하지 않고 ‘시호’를 기록하여 능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석에 있는 사마왕은 휘가 아닌 시호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도 의문점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무령왕의 장례를 분명 아들인 성왕이 치렀을 것이다. 그런데 지석에다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썼다는 것이 이상하다. 분명 부왕이 붕어하면 묘호나 존호를 정해 올려 쓰는 것이 당연한 자식의 도리이다. 일개 서민의 집안에서도 “저희 부친은 X자 Y자를 함자로 쓰십니다.”라고 말하듯 아비의 이름인 XY를 함부로 부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석에 부왕의 이름을 함부로 썼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로 여겨진다.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의문으로 인해 이 무덤은 백제 무령대왕의 무덤이 아니라 대륙백제의 한반도 담로의 총독인 사마왕의 무덤이 아니냐는 강한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 그리고 중국 25사의 하나인 수서에는 왜국의 위치에 대해 설명하는 이런 기록이 있다. 즉 백제에서 왜국으로 가는 중에 사마국(斯痲國)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다.
倭國度百濟行至竹島 南望聃羅國 經都斯麻國 逈在大海中 又東至一支國 又至竹斯國 又東至秦王國 其人同於華夏以為夷洲 疑不能明也 又經十餘國 逹於海岸 自竹斯國以東 皆附庸於倭”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지석의 내용 중 나오는 붕(崩)이라는 글자로 인해 설득력을 잃고 만다. 중국에서도 천자(황제)의 죽음에만 붕(崩)자를 쓰고, 제후(왕)의 죽음에는 훙(薨)자를 쓰기 때문이다. 공자가 <예기>에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천자가 죽으면 崩, 제후는 薨, 대부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錄) 서인은 사(死)”라고 교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광서장족자치구에 있었던 흑치국의 왕인 흑치상지의 묘비(낙양 망산에서 발견)에는 제후에게 쓰는 훙(薨)으로 기록되어 있다.
 
▲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구리거울. 일본의 인물화상경과 관련이 있다. 
지석의 이 붕(崩)자로 인해 피장자의 신분이 밝혀진 이상 피장자가 백제의 제후국의 왕이니 총독이니 하는 논쟁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피장자는 백제국의 제후가 아니라 대백제국의 대왕(황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대백제국의 정식 대왕으로 사마라는 글자를 쓸 수 있는 왕은 오로지 무령대왕 뿐이었다.

일본의 국보인 인물화상경에 새겨진 명문의 사마(斯麻)는 무령왕릉 지석의 사마와 같은 글자이다. 이 사마라는 글자를 쓴 장본인이 무령왕으로 밝혀짐으로서 인물화상경을 통하여 백제는 왜의 상국이고, 왜는 백제의 제후국(분국, 봉국)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래서 무령대왕의 휘는 斯摩가 아니라 斯麻가 맞던가 아니면 왜에서는 麻자를 摩자의 약자로 쓰지 않았나 하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참고로 <삼국사기>와 남당선생의 <고구려사략/사초>에는 斯摩로 쓰고 있다.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

그렇다면 지석의 내용이 도대체 어떠한지 독자들은 많이 궁금해 할 것이다. 지석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돌아가시고)
을사년(525년) 8월12일에 올려 모셔 대묘에 기록하기를 이상(다음)과 같다.

丙午年十二月百濟國王大妃壽復終居喪在西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改葬還大墓立

병오년(526년) 12월 백제왕대비가 수를 다해 돌아가시니 서방(서쪽 땅)에 사매장했다가(모셔졌다가)
기유년(529년)  2월 12일에 개장하여 다시 대묘를 만들었다.


錢日万文右一件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以前件錢訟
土王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不從律令

전일만문(錢一萬文)의 우건(右件)에 대하여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전건(前其件)의 전(錢)으로
토왕과 토백 토부모 상하중관에게 이천석을 주고
신지(땅)를 사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을 작성하노니 앞으로 이 토지에 관해서는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
(번역 : 학술원논문집 1972년 11호, 백제문화 1991 제 21집 참고에 (  )는 필자의 번역 추가)

그런데 우리가 이 지석의 명문에서 유의해서 볼 문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백제 사마왕은 돈(錢) 이천석을 주고 신지(申地 땅)를 사서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을 작성하노니”라는 문구이다. 이 글의 내용은 무령왕이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땅을 사서 묘를 썼다는 것이다. 왕의 묘지에 쓸 땅을 자기나라 백성에게 돈을 주고 토지를 사는 경우도 있는가!!! 현대에도 국왕이나 현직 대통령이 죽으면 보통 국가 소유의 땅에 묻힌다. 하물며 왕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던 봉건왕조시대인데 왜 돈을 주고 땅을 샀을까?

여기서 무령대왕이 이천석이란 돈을 주고 토지를 샀다는 것은 무령왕의 묘지가 있는 곳(공주)이 백제의 땅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지석의 토왕/토백/토부모 상하중관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여하튼 무령왕이 남의 나라 땅에 와서 묻히다보니 묘지를 확실히 할 매지권을 작성하여 같이 묻은 것으로 보인다. 만일 묘지(공주)가 백제 땅이라면 왕이 돈을 주고 땅을 산 후 굳이 매지권을 작성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주가 백제의 수도로 알고 있는데 무령왕릉의 지석은 공주가 백제의 땅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 말은 공주가 백제의 수도이기는커녕 무령왕도 돈을 주고 땅을 사야 할 정도이니 분명 다른 나라의 영토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건 현재의 식민사학계의 이론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말인 것이다.

하지만 백제의 주무대가 대륙의 동부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민족사학 측에서는 한반도가 백제의 주무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공주가 백제의 수도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자 그거 가짜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동성대왕에 이어 대륙 동부평야지대를 호령하던 무령왕릉의 능이 한반도 공주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주의 무령왕릉을 부정하기에는 사료가 워낙 없었다. 그러다보니 근거를 대지 못하면서 무령왕릉이 가짜라는 주장을 하다보니 그런 주장을 하면 할수록 궤변론자가 되는 형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궁금점 즉 “대륙이 주무대인 백제의 무령왕의 능이 왜 한반도 공주에 있는가?”란 의문을 말끔히 해결해 줄 사료가 번역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   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인이다. 광서장족자치구는 백제의 후국인 흑치국이 있던 곳으로 흑치상지의 고향이다.

▲  광서장족자치구는 흑치상지의 고향으로 백제의 제후국인 흑치국이 있던 곳이다. 중국 정부는 거기서 발견된  적실 고분을  한나라  때의 고분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분명 저 무덤은 백제 양식으로 공주 무령왕릉과 같은 방식이다.  
▲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 위 사진의 한나라 고분과 무엇이 다른가 찾아보라.
 
 
무령왕릉의 비밀을 밝힌 남당의 고구려 사초/략

백제 무녕왕릉의 비밀을 풀어줄 기록이 나왔다. 그것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일본의 왕실서고에서 일하던 남당 박창화선생이 틈틈이 필사본으로 베껴놓은 고구려 사략 23대 안원대제 편에 보면 백제왕 사마에 대한 의미심장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사마>의 처 <연>씨가 <사오>의 처 <백>씨를 투기하다가 <사마>를 독살하였고, <사마>의 서자 <명농{聖王}>은 상을 당한 것을 숨기고 보위에 올랐다. 상이 <사마>가 제삿날에 사냥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명농>이 과연 아비 죽인 것을 숨겼다. 이에 <고노>와 <복정>에게 명을 내려 죄를 묻게 하여서, <한{漢}수>를 건너 <쌍현>을 무너뜨리고, <지충>을 <금천{金川}>에서 대파하였으며, 남녀 1만여 구를 사로잡았다. <명농>이 <연희>를 보내서, 명마와 미녀를 바쳤으며,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던 것을 사죄하였다. <명농>에게 입조하라 명을 내렸다. (<斯摩>妻<燕>氏, 妬<沙烏>妻<苩>氏, 毒殺<斯摩>. <斯摩>庻子<明穠>秘其喪而自立. 上悪<斯摩>祭日出獵, <明穠>果秘其殺父. 乃命<高老>・<卜正>問罪渡<漢水>壊<雙峴>大破<志忠>於<金川>, 虜獲男女万余口. <明穠>, 遣<燕喜>献名馬・美女, 以謝失臣之禮. 乃命<明穠>入朝.)

이 기록에 따르면 사마왕은 부인에게 독살을 당하고, 아들인 성왕이 아버지가 죽은 것을 숨기고 왕위에 올랐으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패륜을 계속 숨기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무령왕이 독살을 당한 후 그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유배 형식으로 한반도로 옮겨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 남당의 고구려사초를 번역한 청송 김성겸선생의 의견이다. 추가로 위의 기록은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속국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무령왕이 독살당한 후 남의 나라 땅인 한반도로 옮겨져 남의 나라 사람의 손으로 장례를 지내다보니 감히 대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지석에 함부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부왕이 정상적으로 죽었다면 지석에 존호인 무령왕을 안 쓰고 이름(휘)인 사마를 함부로 쓸 자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남당이 남긴 고구려 사초의 내용대로라면 무령왕이 한반도에 묻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고구려 사략/사초는 곧 책으로 출간되어 조만간 국내 유명서점에서 판매된다고 한다. 현재 출판 준비 중이라 하니 무더운 여름이 가기 전에 우리는 고구려인들이 쓴 고구려 역사책을 접하게 되는 행운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 기록의 분량이 <삼국사기>의 3배가량이고, 내용이 삼국사기와 많이 비교된다고 하니 역사 메니아들은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무령왕릉의 비밀에 대해 정리를 하자면, 무령왕이 독살당하고 패륜을 저지른 성왕이 보위에 오르고, 장례팀은 무령왕의 죽음을 비밀에 붙여야 했기 때문에 무령왕의 장례를 백제(대륙)에서 치르지 못하고 한반도 공주로 옮겨와서 치른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또 하나의 근거는 서쪽 땅(대륙)에 모셔졌던 왕대비를 옮겨다가 합장했다는 지석의 기록이다.

그리고 사용된 목관의 재질은 금송(金松)으로 한반도에서 나오는 나무가 아니다.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이 금송의 산지가 일본 긴끼지방의 고야산에서 수입된 것으로 소개되었으나, 이 나무는 중국 절강성 태주(台州)에서도 생산되는 나무이다. 당시 일본열도는 무령왕의 역사무대가 아니고 절강성은 백제의 활동무대이기 때문에 무령왕의 관은 절강성에서 나온 금송으로 만들어 진 것이 확실하다 하겠다. 
 
▲ 발굴 당시의 내부 모습. 관에 사용한 목재는 금송(金松)으로 한반도에는 나지 않는 나무이며, 중국의 절강성과 일본 긴끼 지방이 주산지이다. 사학계에서는 일본에서만 나는 나무라 한다.

여하튼 백제 땅이 아닌 한반도 공주에 장지를 쓰려다보니 무료로 안되고 일정 금액(이천석)을 주고 토왕/토백/토부모 상하중관에게 토지를 매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후에 도굴이 되거나 묘지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묘지의 구입경위와 매지권을 지석에 명기함으로서 안전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이며, 외부에서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위장한 것으로 보인다.

매지권(買地券) 얘기만 나오면 백제 땅이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것(자신들이 지금까지 거짓말만 했다는 것)이 두려운 식민사학계는 긴장을 하며 신지(申地)란 남서쪽의 땅을 샀다고 둘러대고 있으나 토지의 방향하고 한반도 공주가 백제의 주무대(수도)가 아니라는 것 하고 무슨 관련이 있다고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위 남당 선생의 고구려사략의 기록이 무령왕릉의 숨겨진 비밀을 완전히 풀어주었다  하겠다. 이 기록에 대입하면 무령왕릉에 대한 모든 궁금점이 눈 녹듯 술술 풀려 버린다. 이 외에도 청송 김성겸선생이 번역한 남당선생의 유고집인 <고구려 사략/사초>는 잃어버린 고구려의 역사와 더불어 백제/신라의 역사의 일부도 함께 복원될 수 있으리라 본다.

지금까지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의 이론을 지키는 유물적 도구로 철저히 이용되었던 무령왕릉의 비밀이 위와 같이 깨끗이 밝혀짐으로서 더 이상 백제의 주무대(수도)가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것도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당시 한반도는 누구의 땅이었을까?  

2부에 계속됩니다. 


원문 주소 - http://www-nozzang.seoprise.com/board/view.php?table=forum1&uid=4197

 

 

 

 

공주의 무령왕릉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무령왕릉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삼국시대의 왕릉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독살당한 무령왕은 백제 땅에 묻혔나?”(1부) 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무령왕릉 지석의 새로운 해석
 
앞에서 언급한 것을 종합한다면, 무령왕릉은 백제인이 백제 땅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의 손을 빌어 타국 땅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가 지석의 명문인 “토왕과 토백 토부모 상하중관에게 이천석을 주고 신지(땅)를 사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을 작성하노니 앞으로 이 토지에 관해서는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라는 문구이다.

왕릉 조성에 필요한 토지를 매입하고 매지권을 작성하여 훗날 파묘될 지도 모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조치를 미리 지석의 명문으로 새긴다는 것은 분명 무령왕릉지인 공주가 백제 땅이 아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혹자는 실제적인 토지거래로 돈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지신(地神)에게 고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글쎄 과연 그럴까?

지신에게 고하는데 이천석이란 정확한 금액이 표시되고, 매지권을 작성하여 “이 토지에 관해서는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라는 문구가 과연 필요할까? 이 문구로 인해 필자는 이 토지의 거래는 주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거래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아마 무령왕릉은 지석을 능 안에 넣는 대신 피장자의 신분을 밝히는 비석은 안전상 외부에 세우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결국 이 문구는 “지신에게 돈을 주고 토지를 산 것이므로 소유권이 있으니 어떠한 경우가 있더라도 아무도 이 묘를 건드릴 수 없다”라는 내용으로 혹시 있을지도 모를 파묘로부터 안전을 담보해 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문구가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본다.  

▲ 무령왕릉 발굴 당시를 재현해 놓았다. 처녀분으로 발표되었으나 유물이 많이 흐트러진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미리 침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 몰래 지석을 넣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그리고 지석에는 무령(武寧)이라는 시호를 쓰지 않고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이라고 새겨 놓았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 따르면, 영동대장군은 양나라에서  책봉한 것으로 되어 있고, 사마(斯摩)는 대왕의 휘(이름)이다. 백제인들이 지석에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들인 성왕의 주관 아래 정상적으로 장례를 지내고 능을 조성했다면 즉 백제 땅에서 백제인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다면 이런 문구가 당연히 들어갈 수가 없다.

<삼국사기>에도 “23년 여름 5월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무령으로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夏五月 王薨諡曰武寧) 참고로 김부식은 삼국의 모든 왕의 죽음을 崩이라 안쓰고 薨이라 썼다. 왜 지석에 523년 왕의 시호인 무령을 안쓰고, 왜 굳이 양나라로부터 책봉받은 벼슬인 영동대장군과 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썼을까? 이유는 단 하나 뿐으로 공주의 무령왕릉은 백제인이 능을 조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 

고구려 장수왕은 부왕인 광개토태왕 비문에 다음과 같이 새겨놓았다. 아래에 다시 언급한 무령왕릉 지석의 문장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략).전하여 17대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렀다. 18세에 천자의 자리에 오르니,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불리셨다. 그 은혜로움이 황천(皇天)과 같고, 무예와 위엄은 사해(四海)에 떨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평안히 그 생업(직업)에 종사할 수가 있었다.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번성하여, 오곡이 풍성하였다. 삼십구세에 승하하시니, 갑인년 9월 29일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워 그 공훈과 업적을 기록하여 새겨서, 후세에 보이는 것이다.”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시고, 을사년(525년) 8월12일에 올려 모셔 대묘에 기록하기를 이상과 같다. 병오년(526년) 12월 백제왕대비가 수를 다해 돌아가시니 서쪽 땅에 모셔졌다가 기유년(529년) 2월 12일에 개장하여 다시 대묘를 만들었다.

전일만문(錢一萬文)의 우건(右件)에 대하여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은 전건(前其件)의 전(錢)으로 토왕과 토백 토부모 상하중관에게 이천석을 주고 신지(땅)를 사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을 작성하노니, 앞으로 이 토지에 관해서는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

위의 광개토태왕 비문과 무령왕릉 지석 명문의 차이는 뚜렷하다. 광개토태왕 비는 아들인 장수왕과 고구려 백성들에 의해 고구려 땅에서 능지가 조성이 되었고 온 국민이 추모하는 마음으로 비석을 세웠기에 시호와 연호가 당연히 들어가 있고 온통 태왕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문구뿐이다. 여기서 호태왕의 휘인 담덕(談德)이란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인 '금동신발'
그러나 무령왕릉은 왕이 독살 당한 사실을 아들(성왕)이 감추느라고 쉬쉬하다보니 결국 타국에서 다른 나라사람에 의해 능지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양나라에서 일방적으로 책봉한 벼슬(영동대장군)과 왕의 이름(사마)이 함부로 쓰이고, 업적 찬양의 문구는 없고 지극히 사무적으로 매지권을 작성해 안전권을 확보한 문구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령왕의 죽음에 관한 남당의 고구려 사략/초의 기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남당의 고구려 사략/초보다 무령왕릉의 의문점을 속 시원하게 밝혀줄 기록이나 다른 유물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엔 어떤 나라가 있었나?

고구려.백제.신라의 주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고 하면 많은 한국인들은 오히려 믿기 싫어하며, 역사의 진실에 대해 말하는 필자의 글에 심하게 항의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국민들 가슴 속에는 뜨거운 애국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으로, 그래서 그런지 망국의 반도사관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호응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민족사학자들의 이론은 한반도가 삼국의 주 활동무대가 아니라는 것이지 한반도가 삼국의 영토가 아니란 말이 아니다. 한반도는 삼국의 변두리 강역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지대 즉 대대로 신성한 소도(蘇塗)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에 무수히 널려 잇는 고인돌이 그 증거이기도 하며, 한반도에서는 고대 전쟁 유물이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즉 우리 조상들은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에서 활동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족에게 밀려 변방인 한반도와 만주로 쫓겨 들어온 것으로 본다. 그 시기는 고려 초로 보이며 근세조선 때까지도 만주를 잃은 적이 없었다. 명나라 사서인 <명일통지>에도 분명 “조선의 땅은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이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 기록은 간도(만주)가 조선의 영역임을 분명히 말해주는 물적 증거인 것이다.  

▲   명나라 사서에 기록된 조선의 영토는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이다. 이것이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결정적 증거이다.
  
한반도는 대대로 단군조선의 영역이었다가 단군조선 이후 BC 195년 최숭이 낙랑국을 세워 한반도는 낙랑국의 강역이 되었다가, A.D 32년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망하자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A.D 503년 신라의 지증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속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립국가의 길을 걷는다. 무령대왕이 붕어한 A.D 523년 경에는 한반도는 동신라의 강역으로 보인다.

▲ 신라의 전신인 사라가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양직공도
신라는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도 왕이 아닌 마립간(麻立干) 이사금(尼師今) 등으로 불렀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속국에서 벗어나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 때 비롯되어 왕이 죽자 지증이란 시호를 처음 쓴다. 

신라는 503년 이전에는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태왕비문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기인 광개토태왕 시절부터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가, 백제의 전성기인 동성대왕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대륙신라는 백제의 속국으로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양나라의 공직공도로서 백제 사신의 그림과 함께 백제를 설명하는 글에 보면,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는 문구가 있어 신라가 당시 백제의 속국(부용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한반도에서는 동신라가 원래부터 속국으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는데 지증왕 시기부터 한반도에서 신라세력이 커져 고구려로부터 자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한반도에서 A.D 450년 이후의 고구려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지증왕 이전의 신라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남당선생의 고구려 사략/초의 기록을 연결시키면 무령왕릉의 의문점이 풀리게 된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백제 성왕이 두려운 무령왕의 추종세력들이 독살당한 왕의 시신을 3년상을 치르기도 전에 몰래 빼내, 얼마 전까지 속국이었던 대륙신라에게 장례를 부탁했던 것 같다. 대륙신라 역시 성왕에게 탄로날 것을 염려해 한반도의 동신라에게 무령왕의 장지를 부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설은 물론 기록에 근거를 두었지만 필자의 추정일 뿐 역사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 아니고서는 현재 무령왕릉에 대한 의혹을 해소할 수가 없다. 분명 백제의 주 활동무대인 대륙에 있어야 할 왕의 무덤이 느닷없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된 이 기이한 일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무령왕릉은 가짜다. 누군가가 고의로 지석을 만들어 넣은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던 것이다. 

삼국의 주무대가 대륙이라고 해서 한반도에 삼국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보았다시피 이 살기 좋은 금수강산 한반도에는 고조선 마한의 도읍 --> 낙랑국의 도읍 --> 고구려의 영역 --> 동신라의 영역으로 대를 이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백제는 장기간이 아닌 짧은 기간 담로라는 형태로 뭔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삼국의 왕 중 유일하게 무령왕릉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근거가 <삼국유사>의 무왕편에 나오는 무강왕이라는 칭호인데,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중략)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이다 (이하생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하면서 정식 왕이 된 인물을 과부의 아들이라고 함부로 쓸 수는 없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무강왕을 무왕이라고 단정했으나, 주해자는 무녕왕이 아니겠냐는 견해이고, 아니면 혹자는 무강왕은 백제의 본국왕이 아니라 한반도 백제 담로의 총독(왕)이 아니겠냐는 하는 것이다. 여하튼 백제가 한반도에 흔적을 남긴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본다.

그리고 남당 고구려 사략/초를 번역한 청송 김성겸선생은 <산해경>과 <남서>에 언급되어 있는 평화지역이며, 함초가 나는 지역이며, 불교가 전래된 동쪽지역인 부상국(扶桑國)이 한반도이며 부상국=우산국(于山國)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부상국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망국의 반도사관을 믿으면 안되는 이유

식민사학계는 무령왕릉의 발굴을 계기로 더욱 더 매국적인 반도사관을 확장지어 버린다. 자신들의 엉터리 이론을 무령왕릉이란 확실한 유물이 뒷받침해 주니 이거보다 더 낭보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필자가 툭하면 식민사학이니 반도사관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데 그게 그렇게 매국적인 것인지 반문할 수 있다.

반도사관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혼을 빼기 위해 만든 역사이론이다. 당시는 일제치하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 하겠으나, 문제는 광복 62년이 지난 오늘까지 국사교과서에 식민사관의 이론을 버젓이 실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민족혼을 빼고 있으니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일제의 추종자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  망국의 한국의 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한사군의 위치도
그것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에 의해 기용된 이병도/신석호/홍희로 대변되는 국사학계의 큰 독나방 몇 마리가 뿌리고 간 독가루가 이 나라 역사를 온통 흑탕물로 뒤범벅 시켜놓았기 때문이다. 학교의 강단을 점령한 그 후학들은 아직도 똑같은 독가루를 온 국민들에게 뿌려대고 있다, 여하튼 조상의 역사를 좀먹는 나쁜 독나방들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특효약의 개발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다. 

왜 국민들이 반도사관을 절대로 신봉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역사를 거꾸로 올라가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백제의 주무대(수도)가 한반도라면 마한으로 대변되는 삼한(三韓 마한 진한 변한)이 한반도 남부란 이야기이다. 나중에 삼한으로 발전하는 한(韓)을 세운 왕은 번(기자)조선의 마지막왕인 기준으로, 기준은 위만에게 패해 수도를 넘겨주고 남하하여 한을 세운다.

그렇다면 기준의 번(기자)조선은 한반도 남부인 한의 북쪽이므로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되며, 이 말은 위만조선이 평양에 있었다는 말과 같고, 위만조선이 망하고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섰으니 결국 한사군은 북한 지역 특히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이론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반도사관이라고 한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식민반도사관의 이론이란 다음과 같다.  고조선의 단군은 국가가 아닌 신화이고, 북한 땅에 중국인이 세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나타나고,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인 한나라가 식민지인 한사군을 설치한다. 따라서 조선의 조상들의 역사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시작되므로, 지금은 천손민족인 천황의 일본이라는 이민족에게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한 이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일본서기>에만 나와 있는 신공왕후의 삼한정벌론(三韓政伐論)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기고 있다. 결국 반도사관의 주제는 북한 땅에는 한사군이 있었기에 중국 땅이고, 남한에는 신공황후가 삼한을 장벌했기에 일본 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땅은 어디 있는가? 그래서 반도사관은 무서운 이론이며, 망국적인 식민반도사관을 추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오히려 중국 사서가 한사군의 위치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한국의 사학계는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중이다.

식민사학계는 반도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기자조선/위만조선을 대동강 평양으로 끌고 오려다보니, 진조선/막조선이 발전한 북부여와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패륜을 범하게 된다. 번조선의 수도는 하북성 창려(진황도시)였다. 그곳을 위만에게 빼앗기자 기준이 어디로 남하했느냐가 우리 역사의 최대 핵심 포인트이다. 왜냐하면 망국의 반도사관의 핵심은 기준이 한반도 남부로 내려가 삼한을 건설했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기준이 남으로 내려 간 곳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번조선의 영토였던 중국대륙 동부평야지대의 중심인 황하와 회수 사이로 간 것이었다. 그 땅은 기준의 조상인 기자가 산 하남성 서화(西華) 땅과 죽어서 묻힌 안휘성 몽성(蒙城) 땅과 가까운 곳이다. 기준은 비록 수도인 창려를 위만에게 빼앗겼지만 자기와 연고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한(韓)을 세웠던 것이다. 

▲     © 성훈 칼럼니스트

결국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한에는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반도사관은 역사적 사실도 아닐뿐더러 이렇듯 우리의 강역을 이민족에게 내어 주어야 하는 무서운 망국의 이론인 것이다. 역사적 진실에 근거해 중국대륙 동부가 원래 우리의 강역이었음을 알리는 것만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을 무력화시키고 분쇄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루빨리 식민사학을 추방하는 길만이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임을 국민들은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망국의 반도사관을 이 땅에 확정시키는 유물로 철저히 이용된 것이 바로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이었다. 이제 새로이 무령왕릉 지석을 해석함으로서 반도사관은 허구라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는 바이다.



2008/08/05 [13:53] ⓒ pluskorea


원문 주소 - http://www-nozzang.seoprise.com/board/view.php?table=forum1&uid=4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