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고대 한일관계: 구다라( 百濟 ) 야마도( 倭 )

吾心竹--오심죽-- 2010. 1. 29. 15:26

고대 한일관계: 구다라( 百濟 ) 야마도( 倭 )

파워 boolingoo
2009.05.25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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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일관계: 구다라(百濟) 야마도(倭)
서울대학교 사회대 洪元卓 **

(0) 요약

일본서기는 야마도 왕국이 기원전 660년에 수립 되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지만 일본 사학자들도 이를 믿지 않는다. 15대 왕이라는 오오진(應神)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서기 기록내용을 분석해 보면 오오진은 390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동경대의 에가미 교수는 대략 375년경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말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혀 발굴되지 않지만, 그 이후에는 말뼈, 말 안장, 말 등자, 말 재갈 등의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근거로,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세웠다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했다. 컬럼비아 대학의 레드야드 교수는 346년에 부여가 멸망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에가미가 말하는 기마민족이 바로 부여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전편에 흐르는 기록 내용들을 근거로 에가미가 말하는 기마민족이 바로 백제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1) 야마도 왕국의 창건 시점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야마도 왕국이 4세기 말경의 오오진(應神)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712년에 완성된 고사기와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에 의하면, 오오진은 야마도 왕국의 15대 왕이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오오진은 서기 390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 1873-1961년) 교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오오진 이전의 왕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야마도 왕족을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쯔다가 첫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시조 진무 이후 신공 왕후의 남편이라는 추우아이 왕까지의 (즉 2대부터 14대 왕까지의) 13명의 왕들은, 단지 죽은 다음에 만들어서 부여된 시호(和風諡號)로만 기록이 되어 있다. 그 명칭들을 검토 해 보면, 전혀 각자의 고유성이 없다. 반면, 15대 왕이라는 오오진 부터는, 각기 왕자 때부터 실제로 사용된 특유한 이름을 그대로 왕의 시호로 기록했다. 오오진의 왕자 때 이름은 “호무다”이고 (和風)시호도 “호무다”이다. 진무나 오오진이라는 중국식 명칭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원본에 기록된 명칭들이 아니라, 8세기 후반에 새삼 중국식(漢風)으로 만들어 부친 시호들이다.

쯔다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14대 왕이라고 하는) 추우아이 까지의 왕위 승계 형식을 보면,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대 중국왕조의 전통인) 부자간의 왕위 승계란, 7세기 후반 덴지 왕 이후에도 제대로 확립이 안 되었던 것이다. 오오진 이후 덴지 이전의 왕위 승계는 대부분 부자간이 아니라 (투르코-몽골 유목민족의 전통인) 형제간의 승계이었다.

이와 같은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쯔다는 오오진 이전의 왕들에 대한 기록은 모두 허구라고 주장했다. 나는 야마도 왕국이 오오진(호무다)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쯔다가 제시하는 근거에 추가해서) 네 가지 더 제시하려 한다.

첫 번째의 추가 근거. 쯔다는 오오진 이전의 왕위승계가 모두 부자간의 승계라는 특이점에 의혹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왕위승계가 아주 “평화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오진 이후를 보자. 오오진에서 닌토쿠로 승계될 때, 한바탕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닌토쿠에서 리츄우-한제이 형제로 승계되어가는 과정에서도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한제이에서 닌교오로 승계될 때, 유혈극은 아니지만,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닌교오에서 안코오-유략쿠 형제로 승계되는 과정에서도, 또 한바탕 골육상쟁의 유혈극이 있었다. 유략쿠-세이네이에서 겐조오-닌켄 형제로 승계될 때에도, 또 닌켄-부레츠 에서 게이타이로 승계될 때에도,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형제간의 왕위승계가 대부분이었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왕위승계가 항상 순탄치 못했다는 점이, 오오진 이후의 고사기-일본서기 기록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 준다.

두 번째의 추가 근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14대 왕이라는 주우아이 가 죽었다는 해로부터 15대 왕이라는 오오진의 즉위까지 장장 71년에 달하는 공백 기간을, 자타가 공인하는 가공의 존재인 신공 왕후가, 섭정을 하며 채우고 있다. 따라서 오오진(호무다)부터가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이 더욱 합리적으로 보인다.

세 번째의 추가 근거. 712년에 고사기가 편찬 완료되자, 야마도 조정은 즉시 전국에 명을 내려, 각 지방의 현황과 옛부터 전해오는 온갖 이야기 등을 기록해 올리도록 했다. 이들 기록들은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를 편찬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들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하리마 풍토기는, 713-715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 하리마 풍토기를 보면, 독자로 하여금 호무다가 야마도 왕국의 시조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수많은 기록들이 있다. 예컨대, 호무다는 수없이 순행과 사냥을 하고, 수많은 지명들이 호무다의 사소한 언행들과 연관 지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다른 왕들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언급이 없다.

네 번째의 추가 근거.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모든 왕들 중에 유독 진무와 오오진(호무다)만이 규우슈우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진무는 천손 니니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후에, 또 오오진은 모친(신공왕후)이 한국으로부터 배를 타고 와서 규우슈우에 상륙한 직후에 각기 태어난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오오진이 야마도 왕국의 시조이며 토착세력이 아니라고 믿게 하는 기록들이다.

(2) 일본 천황가의 근원

Model Building

그렇다면 390년경에 야마도 왕조를 세운 일본 천황가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도대체 야마도(倭) 왕국은 어떻게 창건이 되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의 해답이 있다. 우선 “일본인”이란 이 세상의 어느 민족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고유한 민족”인데, 야마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수천 년에 걸친, 점진적인 정치적 사회적 발전단계”를 거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순수한 토착 지배세력”인 천황가 선조들의 노력으로, 야마도 지역을 본거지로 해서 성립된,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얘기다.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은, 과거에도 또 현재에도, 이 모범답안을 다양한 형태로 포장해서 일본 국민에게 제공을 해오고 있다. 수요가 공급을 창조한다는 고전적 경제 법칙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북중국-내몽골 지역의 기마 유목민족 전문가인 동경대학 교수 에가미(江上波夫: 1906-2002)의 기마민족설은, 아주 이례적으로, 야마도 왕국의 근원을,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 민족에 의한 정복에서 찾으려했다.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대략 4세기말을 전환점으로 해서 새삼 발견되는, 말과 관련된 다양한 고분 발굴 물이다.

하지만 에가미는,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일본 국민에게 주는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그 기마 정복민족의 정체를 최대한 애매모호하게, 또 신비하게 만들었다. 즉, 구체성을 제거함으로서, 자신의 학설에 대한 일본 대중의 거부감을 최소화 하려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나라에서 말을 타고 건너온 왕자와 그 일행에 의해 야마도 왕국이 창건되었다면, 오히려 낭만과 신비감이 극대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기마(騎馬)민족설이란 바로 “천황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귀에 익은 (고사기-일본서기) 얘기에다, “말을 타고” 내려왔다는 수식어를 하나 더 추가한 꼴이었다.

에가미 교수가 1948년 이래 끊임없이 주장해 온 이 기마 민족설은,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아주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야마도 왕국이 대륙에서 도래한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정복 왕조라면, 과연 그 도래인 집단은 누구였을까?

컬럼비아 대학교수인 레드야드(Ledyard)에 의해 1975년에 수정된 기마민족설은, 에가미가 말하는 그 기마 정복자들의 근원에 대한 일차적인 구체화 작업이었다. 레드야드의 “수정판 기마민족설”에 의하면, 4세기 후반에, 만주 땅의 기마 민족인 부여 사람들이, 조국의 멸망의 슬픔을 뒤로하고 한반도를 쳐 내려오면서, 백제지역을 지나 곧바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일본열도를 정복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고분 발굴물의 성격이 크게 바뀐다는 시기와도 시대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이 된다.

레드야드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서기 346년에 부여가 망하게 되었다는 기록과,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조에서 발견되는 (대략 350-380년 기간에 해당하는) 종잡을 수 없는 기록들이다. 레드야드 말대로, 만약 이 부여 사람들이 한반도를 종횡무진으로 쳐 내려오는 길에, 한국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 말 뒤에 묶어 끌고 일본열도에 건너와서, 산같이 큰 천황 묘들을 만드는데 부려먹었다면, 현대 일본 사람들의 기분도 아주 크게 상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애당초 부여라는 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천황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나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것이다.

필자가 1988년, 1994년 2003년에 출판한 저서들에서 주장한 것은, “4세기 후반에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건너와 야마도 왕국을 세웠고, 천황족의 근원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것이다. 필자의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내용이다. 보완적인 성격의 근거는 신찬 성씨록, 속일본기, 풍토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국 왕조의 정식 역사 책(정사) 등의 기록들과, 다양한 고고학적 물증들과,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결과 등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상권에 해당하는 신들의 시대 (신대) 기록을 읽어 보면, “일신(해의 신)”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 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나는 상권의 니니기 와, 중권에서 등장하는 시조 이하레(진무)와 15대 왕 호무다(오오진), 이 세 명의 상이하게 기록된 존재가, 야마도 왕국의 실제 시조인 호무다 한 사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기록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A1 참조)

즉,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야마도 왕국의 시조에 대한 설화적인 기록은 니니기 부분이 담당하고, 전투와 정복의 기록은 진무(이하레) 부분이 담당하고, 백제 사람들의 대규모 도래 기록은 오오진(호무다) 부분이 담당하고 있다.

Historical Facts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를 보면, 하다 씨족의 선조인 궁월군이, 오오진 16년[405년]에 120개 현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또 오오진 20년 조는, 야마도 아야 씨족의 조상인 아찌 오미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데리고, 일본에 건너 왔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A2 참조)

이들 하다 와 야마도 아야 두 씨족은, 백제의 부  (部)제도를 본 따서, 야마도 조정의 재정출납 등 온갖 행정 기능을 맡아보게 되었고, 그 덕으로 야마도 왕실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815년에 완성된 신찬 성씨록에 의하면, 5세기 후반 유랴쿠 치세 때, 하다 씨족 사람 수가 (92개의 부를 구성하며) 총 18,670명에 달 했다고 한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아찌 오미가 [2대왕] 사자키 에게 청하여, 아야 사람들(漢人)을 위해 이마끼 고을(今來郡)을 세웠다고 한다. 이마키 고을은 후에 다케치(다카이치) 고을(高市郡)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야마도 왕국의 중심지역 이었다. 아스까 촌주(村主), 누가다 촌주, 구라쓰쿠리 촌주, 하리마 촌주, 아야 촌주, 이마끼 촌주 등이 그 아야 씨족의 후예들이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아야 씨족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다케치 고을이 너무 협소해져서, 셋쯔, 아후미, 하리마 등 각 지역으로 이들을 다시 분산 배치했다고 말한다.

속일본기는 다케치 고을이, 일찍이 아찌 사주가 데리고 온 17현 사람들로 넘쳐 나서, 다른 씨족은 열사람 중에 한 두 명도 안 되었다고 기록을 했다.

일본서기 유랴쿠 7년[463년] 조를 보면, 안장을 만드는 사람,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비단을 짜는 사람 등이 그 해에 대거 “백제에서” 건너왔다. 이들 새로 도착한 기술자들을 오오진 때 이미 건너와 있던 (야마도 아야 씨족의)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새로 건너온 “이마끼” 아야(今來漢, 新漢)라 부르고, 기존 아야 씨족이 관할토록 했다. (A3 참조)

동경대학 교수이었던 문화인류학자 이시다(石田英一郞: 1903-68년)는, 야마도 왕국이 한국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수립된 것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 것도 자유지만, 그렇게 되면 오오진 시대에 한반도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온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백제 왕실과 야마도 왕실이 아주 가까운 친족 관계일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예컨대, 야마도 궁중에는 백제 왕족 가운데 누군가가 거의 항상 체류를 하고 있었다.

백제 아신왕(392-405년)의 태자인 전지는, 397년부터 405년까지, 오오진과 함께 야마도에 살았다. 그는 405년에 부왕이 서거하자 백제로 돌아와, 그 뒤를 이어 전지왕(405-420년)이 되었다. 백제 전지왕은 자신의 누이동생 신제도를 야마도에 보내, 오오진을 모시게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오오진의 아들 닌토쿠 치세 때의 기록을 보면, 백제 왕자 주군이 야마도 궁중에 와서, 매를 길들이고, 닌토쿠와 함께 매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백제 개로왕(455-475년) 때에는, 유랴쿠 왕에게 모니부인의 딸을 택해서 왕비 감으로 보내주었는데, 그녀가 부정한 짓을 해서 그만 화형을 당하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개로왕은 자신의 동생 곤지를 야마도 조정에 보내 유랴쿠 왕을 돕게 했다. 479년에 백제 삼근왕(477-479년)이 죽자, 이 곤지의 둘째 아들이 백제로 돌아와서 동성왕(479- 501년)이 되었다. 일본서기는 유랴쿠가, 백제로 떠나는 곤지의 아들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작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505년, 무녕왕은 왕족 사아군을 보내 야마도 조정에서 일을 돕도록 했다. 597년 4월, 백제 위덕왕은 아좌 왕자를 보냈다. 일본서기는, 의자왕의 아들 풍장이 631년에 건너 왔다고 기록했다.

야마도 지배씨족 1,182개의 조상을 기록하고 있는 신찬 성씨록을 보면, 마히또(眞人)가 황족 중에서 으뜸이기 때문에, 수도지역의 마히또 씨족들을 제1권 첫머리에 수록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록 내용을 검토해 보면, 모든 마히또 씨족을 백제왕족의 후손으로 간주 할 수 있다. (A4 참조)

660년, 백제의 수도가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왜에서 돌아온 왕자 여풍장은 복신과 함께 주유성 에서 항전을 계속했다. 당시 사이메이(655-661년) 여왕과 태자 덴지(662-671년)는, 규우슈우 까지 나와서, 백제 구원 작전을 진두지휘 했다. 663년, 야마도 조정은 구원병 만 여명을 보냈는데, 이들 왜군은 백촌강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주유성은 당군에게 함락되었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은 서로들 다음과 같이 말을 주고받았다: 주유가 함락 됐구나.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오늘로서 백제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말았구나. 이제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 곳을, 어찌 다시 찾아 가 볼 수 있을 것인가?”

(3) 야마도 왕국 건국설화와 고구려 건국설화의 유사성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인용된 위략(魏略)을 보면, 부여의 시조가 바로 동명이고, 고구려 주몽의 건국 설화는 바로 부여의 건국 설화를 차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략의 부여 시조에 관한 얘기는 이러하다.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왕의 시녀가 임신을 했다. 왕은 시녀를 죽이려 했는데, 그녀는 “계란과 같은 기운이 내려 와서 그 때문에 임신을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그 다음은 삼국사기-구삼국사 에서 기록하는 유화의 얘기와 아주 흡사하다.) 그녀 아들의 이름이 바로 “동명”인데,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송화강?)를 건너 부여의 땅에 도읍을 하고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사기 에서는, 야마도 왕국의 시조인 “니니기-진무”와 직접 혈연관계가 있는 인물들에게, 천신의 아들 혹은 일신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북)위서에 의하면, 주몽은 자기 자신을 해의 아들(日子)이며 강의 신 하백의 외손자라고 불렀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무의 할아버지는 천신이고, 어머니는 해신이다. 진무의 형은, 자신이 일신의 아들(日...子) 혹은 일신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대 기록을 보면, 진무의 조부뿐만 아니라, 그의 부친(즉 진무의 증조부)이며 아마테라스의 손자라는 니니기 역시 둘째 아들 이었다. 인대 기록에 의하면, 진무(이하레)의 형은 일본열도 정복 길에 나섰다가 첫 번째 육지전투에서 전사하고, 함께 떠났던 동생 이하레가 야마도 왕국을 창건한다. 시호가 오오진 이라는 호무다 역시 신공왕후의 둘째 아들로 기록이 되어 있다. 백제의 건국설화에서 나타나는 비류-온조 관계와 유사한 것이다.

이규보의 구 삼국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기록하는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기록하는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는 그 핵심적인 주제들(motives)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고구려 건국설화와 야마도 왕국 건국설화를 보면, 하늘나라에서 천신 혹은 일신의 아들이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구명되지 않은 장소로) 내려오고, 그 땅의 토착 통치자는 자리를 피해준다. 이 천제(天帝) 혹은 천신의 아들은 물의 신, 즉 하신(河神) 혹은 해신(海神)의 딸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는다. 천제의 아들 혹은 천손(天孫)이, 명을 받고 하늘나라에서 내려(降)와 지상의 세계를 다니다가 (물의 딸인) 미인을 만나고 (그녀의 부친으로부터) 정말로 신의 아들인가 시험을 받은 다음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는 대목에서는, 양쪽의 표현 기법까지도 똑 같다. 그런데 하늘의 아들과 물의 딸 은, 완전히 인간화 된 아들을 낳은 다음, 백년해로를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한다. 건국 시조를 낳는 역사적인 역할이 끝나면, 이들 남녀가 각기 제 고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숙명 역시 똑같은 구도인 것이다. 그들의 로맨스는 지상 인간세계 왕국의 시조를 낳아주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한다. 여기까지가 신대에 속하는 신화가 된다. 그 다음에는, 하늘의 아들과 물의 딸 사이에 태어난 아이(혹은 그의 아들)가 자라나서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장소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이 부분이, 완전히 인간화 된, 인대(사람들의 시대)의 전설이 된다. 인간세계의 시조는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구명된 장소로 가는 도중에 거북들 혹은 거북을 탄 사람의 도움을 받고, 동행 한 형은 새로운 왕조의 창건에 실패를 하고 동생이 성공을 한다는 공통 주제를 발견한다. 본질적인 사고의 틀을 분석해 보면, 동일한 문화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서술한, 같은 유형의 건국 설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유를 해 본다면, 현란하게 피어 있는 꽃들과 무수한 잔가지들을 다 처 버리고, 나무의 원형(原形)을 쳐다보면, 두 개의 나무 모양이 아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즉, 누군지 부여-고구려 건국 설화에 아주 친숙한 사람들이, 일본 땅에 신천지를 개척한 다음에,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서 독창적인 건국 설화를 쓴다고 쓴 것 같은데, 결과를 보니 그 근본이 되는 틀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부여- 고구려-백제의 건국설화와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는 모두 동일한 계통에 속한다고 말 할 수 있다.

(4) 한국어와 일본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며 언어(言語諸事)등이 부여와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후에 금나라를 세운 흑수말갈 생여진족의 선조로 추정되는 숙신-읍루 종족의 언어는 부여-고구려와 다르다고 분명하게 기록을 했다.) 양서 백제전은 백제사람들의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고 말한다(今言語服章 略與高麗同).

알타이 어족(語族) 중에서도 부여-고구려-백제어는 한 계통의 동일한 언어이며, 이들과 가장 가까운 친족관계의 방언(方言)으로 가야(변한)어, 신라(진한)어, 마한어 등을 들 수 있다. 이기문 교수에 의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이들 언어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어와 고대 일본어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공통 어휘를 가지고 있다. 특히 고구려어의 수사(數詞)로서 3의 밀(密), 5의 U(于次), 7의 나넌(難隱), 10의 턱(德) 등이 확인되는데, 이들은 고대 일본어의 미(三), 이츠(五), 나나(七), 터워(十) 등과 유사하다. 이기문 교수는“알타이 언어들 사이에 수사의 일치는 매우 드문 사실인데, 유독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에 이처럼 많은 일치가 존재하는 것은, 이 두 언어의 분리 년대가 그다지 오래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구려-백제어는 알타이 계통의 언어로서 고대 일본어와는 각별한 친족관계에 있었다. 즉 백제어와 고대 일본어의 분리 년대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반도에서는 신라 방언을 중심으로 언어적 통일을 이루어 현대 한국어를 형성하게 되었다. (신라어 계통의) 현대 한국어와 (부여-고구려-백제 계통의) 현대 일본어는, 어휘적으로 또 음운론적으로는 좀 거리가 있지만, 형태론적으로 또 구문론적으로 보면 지구상에서 이들 두 언어사이보다 더 가까운 언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신라어와 고구려-백제어의 친족관계를 알 수 있다.

(5) 맺는 말

대흥안령 산맥의 동쪽, (서쪽 선비-거란 거주지역과 동쪽 말갈-여진족 거주지역 중간에 위치한) 만주 송화강 유역 평원에서 밭농사를 짓고 있던 (예-맥 계통의) 반 유목국가인 부여국 (북부여 혹은 동부여) 왕실의 특이한 구성원인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거느리고 남쪽 졸본 부여 지역으로 내려와, 장백산맥의 끝자락 동가강(佟佳江)-압록강 변에, 고구려라는 새 왕국을 세운다. 주몽의 아들 중 온조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당시 마한 사람들이 논농사를 지으며 완전한 정주 농경사회를 영위하고 있었던 한강변에, 백제(남부여)라는 새 왕국을 세운다. 그로부터 4백여 년이 지난 후, 백제 왕족인 호무다는, 백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남쪽 바다를 건너, 일찍이 가야(변한)에서 건너와 (아이누-말라요폴리네시안 선주민들과 어울려) 정착을 한 사람들이 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야요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부여-고구려-백제 계통의) 새로운 왕국을 세운다.

근초고왕 (346-375)과 근구수왕(375-384) 재위 중의 백제는 군사적으로 가장 강성하고 가장 큰 영토적 확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요서에 진출하고, 평양에 쳐들어가서 고국원왕을 전사 시키고 (371), 마한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백제사람들이 야마도 왕국 건설을 위해 일본 열도로 진출을 한 것도 모두 이 시대에 이루어 진 것으로 생각된다. (A5 참조)

698년에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말갈족과 함께 세운 발해의 사신이 727년에 최초로 야마도 조정에 도착했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발해란 옛날의 고구려이고, 발해 산신은 자신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여 부여의 습속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부여-고구려-백제 계통인 야마도 조정에 온 발해 사신은, 신생국가내의 말갈족 성격을 되도록 덮어두고, 부여-고구려 성격만을 강조 했던 것이다.

** 본 논문은 본인의 저서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in the Early Period: Paekche and Yamato Wa (Ilsimsa, 1988), Paekche of Korea and the Origin of Yamato Japan (Kudara International, 1994), 百濟와 大和日本의 起源 (구다라, 1994), 百濟倭 (一志社, 2003)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며 참고 문헌들은 이 네 권의 저서의 참고문헌들과 동일하다.



참고자료

(A1) 호무다

호무다는, 후세에 하찌만(八幡)이란 이름의 군신으로 모셨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일본열도를 정복해 통일 왕국을 수립한, 군사적 영웅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 전국에는, 2만 5천여 개의 하찌만 신사가 (진무가 아니라) 호무다를 군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이다.

(A2) 阿智使主之黨類 自百濟國來歸

409년 가을 9월, 야마도 아야 아타헤(倭漢直)의 조상인 아찌 오미(阿知使主)가 그의 아들 쓰카 오미(都加使主)와 더불어 17현의 사람들을 인솔하고 [백제로부터] 건너 왔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어째서 “한나라, 물 이름, 은하수” 등을 뜻하는 한(漢)이라는 글자를 써 놓고 “아야”라고 읽었는지 알 수가 없다.

고사기를 보면, “백제왕이 말 한 쌍을 아찌(阿知)키시 편에 보냈고, 또 큰칼과 큰 거울을 보냈는데, (호무다가) 백제국에게 만약 현인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하자 와니키시를 보내주었고, 또 기술자 두 명을 보냈으며, 또 하다 미야츠코(秦造)의 선조, 아야 아타헤(漢直)의 선조 및 술을 만들 줄 아는 니호라는 사람 등이 도래 했다”라는 한 개의 길 다란 문장이 있다. 이 한 개의 문장 속에 나타나는 하다 씨족의 선조와 아야 씨족의 선조는 당연히 모두 백제에서 도래한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과연 일본서기는 하다 씨족의 선조인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도래했다고 분명하게 기록을 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아야 씨족의 선조 역시 “백제”로부터 도래했다고 새삼 명확하게 재확인을 해 주지 않았다. 이 재확인의 누락을 근거로, 또 신찬성씨록이 하다 씨족의 경우처럼, 아찌 사주가 후한 령제의 3 혹은 4세손이라며, 아야 씨족을 중국(漢)에서 건너온 씨족으로 분류한 것을 근거로,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아야 씨족 역시 중국에서 건너온 씨족이라고 주장을 한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아찌 오미가 [2대왕] 사자키 에게 청하여, 아야 사람들(漢人)을 위해 이마끼 고을(今來郡)을 세웠다고 한다. 이마키 고을은 후에 다케치(다카이치) 고을(高市郡)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야마도 왕국의 중심지역 이었다. 아스까 촌주(村主), 누카타 촌주, 구라쓰쿠리 촌주, 하리마 촌주, 아야 촌주, 이마끼 촌주 등이 그 아야 씨족의 후예들이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아야 씨족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다케치 고을이 너무 협소해져서, 셋쯔, 아후미, 하리마 등 각 지역으로 이들을 다시 분산 배치했다고 말한다.

하리마 풍토기는 오시카하 지역 이야기를 하면서, 호무다 치세 때, 이즈모 대신(大神)이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절반쯤을 잡아 죽여 버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왕이 사람을 보내, 이즈모 대신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제사도 지내고 잔치도 베풀어 주었다 한다. 그런데, 후에 아야 씨족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이 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이즈모 대신을 받들어 모시기 위한 제사를 지내 화해를 했다는 것이다. 신생 야마도 조정이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 로 대표되는) 이즈모의 신라계 정착자들 과의 화해를 하는데, 아야 씨족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7대왕] 하쯔세 치세 때, 카후치 아야(西漢) 씨족의 콴인치리의 제안에 따라, 백제한테 기술자들을 보내달라고 청했었다. 당시 백제가 새로 보내준 이마끼 기술자(今來才伎)들을 이마끼 아야(新漢) 또는 아야 기술자(漢手人)라 불렀다. 이들을 처음에는 야마도 지역에 거주하게 했다가, 후에 야마도 아야(東漢) 씨족의 아타히 쓰카 에게 명해, 모모하라 와 마카미하라에 옮겨 살게 했다. 모모하라 와 마카미하라는 모두 현재의 나라현 다케치(다카이치)군 아스카 촌에 있다.

하쯔세 치세 때 백제에서 새로 건너온 아야 기술자들을, 앞서 호무다 치세 때 건너온 아야 기술자들과 구별하려고, “이마끼(今來, 新)” 아야(漢) 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냥 “아야”씨족 이건, 이마끼 “아야”씨족 이건, 모두 일차적으로는 다케치 고을에 배치되었었다. 수많은 현대 일본 사학자들은 이 기록을 보고서도, 아야 씨족이 중국계라고 한다. 속일본기는 다케치 고을이, 일찍이 아찌 사주가 데리고 온 17현 사람들로 넘쳐 나서, 다른 씨족은 열사람 중에 한 두 명도 안 되었다고 기록을 했다. 신찬성씨록 대로라면, 야마도 왕국의 핵심 본거지가 중국 사람들로 넘쳐 났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아도, 당시 광개토 대왕의 고구려와 전성기의 백제, 신라, 가야 제국들이 버티고 있는 만주와 한반도를, 17현 혹은 120현의 수많은 “중국”사람들이 무인지경을 지나듯 내려와서, 한국 남단의 바다를 건너, 아무 연고도 없는 야마도 땅으로 몰려 올 수가 없는 것이다. 5세기 초라는 시기는, 한반도가 무주공산의 빈 땅인 시기가 아닌 것이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했었는데, 그로부터 389년이 지난 371년에 근초고왕이 도읍을 한성(漢城)으로 옮겼다 한다. 위례성이나 한성이나 모두 한산(漢山)과 한수(漢水)의 인근 지역이다. 한성 백제는 그로부터 105년이 지난 후 (475년에 장수왕이 왕도 한성을 포위하고 개로왕을 잡아 죽였을 때) 문주왕이 웅천으로 천도를 하면서 끝이 났다.

5세기 초, “한성”백제에서 건너온 아찌 사주와 그 백성들을 “아야 사람(漢人)”들 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다. 물론, 어째서 한(漢)이라는 글자를 “아야”라고 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일본삼대실록의 세이와(淸和) 죠오간 4년(862년) 조는, 사카우에 라는 씨족이 (후한 효령황제 4대손)“아찌 사주”의 후예인데, 이 아찌 사주의 무리들은 (중국으로부터가 아니라) “백제”로부터 건너왔다고 분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阿智使主之黨類 自百濟國來歸也). 일본삼대실록은 우다 천황(887-897년)의 명에 의해 편찬된 세이와-요오제이-고오코오 3대 29년 간(858-887년)의 역사책이다.

하리마 풍토기는 오야케 라는 마을 이야기를 한다. 그 마을은 본래 아야 씨족 사람들이 와서 살았기 때문에 아야베 마을이라고 불렀었다. 그런데 후에 와카사 라는 사람의 조부가 오야케의 하다 씨족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510년에] 와카사의 손자 치마로가 이장이 되었을 때, 마을 이름을 처가 쪽을 따라 오야케로 바꾸었다고 기록했다.

(A3) 도래인의 분류방식

속일본기의 기록과 일본서기, 고사기의 기록들은 모두 왕인이 백제에서 건너 왔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유독 신찬성씨록 만은 왕인이 중국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찬성씨록은, 하다 씨족과 아야 씨족도 중국(漢)에서 도래한 씨족으로 분류를 해서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왜 그랬을까? 이제 그 이유를 캐 본다.

신찬성씨록이 편찬되고 있었던 8세기 말과 9세기 초 라는 시대는, 야마도 왕국 전체가 아직도 중국의 문물을 동경하며 열심히 견당사를 파견하고 있던 시기였다. 한반도의 백제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중국의 모든 것이 부럽고, 중국과의 역사적 연관성이 그저 좋아 보이기만 할 때였다.

신찬성씨록에서 제번(諸蕃)이라고 부르는 도래인 씨족들의 기록은, 중국의 한(漢) 나라에서 건너왔다는 씨족부터 시작을 해서,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의 순으로 기록을 했다. 한 나라에서 건너왔다는 씨족들의 출자는 진 시황제(秦始皇帝), 한 고황제(漢高皇帝), 후한 광무제(光武帝), 령제(靈帝), 헌제(憲帝), 위 무제(魏武帝), 등 엄청난 존재들이다.

그런데 신찬성씨록에 기록된 (수도와 주변 5개 구니의) 1,182개의 지배 씨족들의 조상들을 검토 해 보면, (“천손 강림”원칙에 따라) 문서상으로 완전하게 “토착화”시켜놓은 백제계 지배 씨족들을 제외하고서도, 너무나 백제를 주축으로 하는 한국계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신찬성씨록의 편찬자들은, 인위적으로 왜곡을 해서라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찌 사주, 궁월군, 왕인 같이 분명하게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중국(한 나라)에서 온 것으로 억지 재분류 했다.

신찬성씨록에 실린 1,182개 씨족 중, 335개가 고오베쓰(皇別), 403개가 신베쓰(神別), 328개가 쇼한(諸蕃), 116개가 기타(未定雜姓) 씨족으로 분류되어 있다. 403개의 신별은, 373개의 천신(天神) 씨족과 30개의 땅의 신(地祇) 씨족으로 나뉘어 있다.

아주 내놓고 도래 씨족이라고 분류를 한 328개의 제번 씨족의 조상은, 104개가 백제, 42개가 고구려, 9개가 신라, 10개가 가야, 163개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도래했다는 씨족 중에는, 왕인, 궁월군, 아찌사주 등의 후손을 포함하는 54개의 백제 계통의 씨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바로 잡으면, 제번 중, 백제에서 도래한 씨족이 158개로 증가되고, 중국에서 도래한 씨족은 109개로 감소된다. 116개의 기타 미정잡성 씨족 중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출신이 (각각 18, 7, 8, 1) 모두해서 34개가 포함되어있다.

우리가, 야마도 왕국 초창기에 도래한 백제 왕족의 후손을 고오베쓰(皇別)로 간주하고, 그들과 함께 도래한 비왕족 지배층의 후손을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천신 씨족의 신베쓰(神別)로 본다면, 신찬성씨록에 실린 1,182개의 지배씨족 중, 한국 도래인과 직접관계가 없는 씨족은, (토착 세력인) 땅의 신(地祇) 씨족 30개, 중국 출자 제번씨족 109개, 비(非) 한국계 미정잡성씨 82개 등, 모두 합해 전체의 20%도 안 되는 221개 씨족에 불과한 것이다.

신찬성씨록 자체의 기록에 의하면, 5세기 초에 궁월군이 이끌고 건너온 120현 하다 씨족의 수가, 5세기 후반 하쯔세 왕 때에 와서는 18,670명에 달했다고 한다. 아찌 오미가 데리고 온 17현의 아야 씨족 사람들도, 처음에는 이마끼 고을(후에 다케치 고을로 개명)에 정착했으나, 그 장소가 너무 협소할 정도로 사람 수 가 많아, 셋츠, 아후미, 하리마 등 각 지역으로 분산 배치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분산 배치 된 마을의 촌주는 거의 모두 아야 씨족 사람들이 담당했었다. 신찬성씨록의 편찬자들은, 무엇보다도, 이렇게 규모가 큰 하다 씨족과 아야 씨족의 출자를 백제로 그냥 놓아둘 수가 없었다.

(A4) 신찬성씨록의 마히또(眞人) 씨족

일본 고대사에서는 소위 텐표(天平) 문화 시대라고 부르는 기간(749-757년)이 있다. 당시 주요 씨족들의 계보가 심각한 혼란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소위 천평승보(天平勝寶) 말기에 와서, 주요 씨족들의 시조(出自) 기록을 정리하기 위해 저명한 학자들이 소집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이 절반도 끝나기 전에, 정부가 어떤 곤란에 처하게 되어, 이들 학자들은 해산되었다. 그 후 799년, 간무의 명령을 받고, 그의 아들 만다(萬多親王, 783-830년)가 주도하는 위원회에서 성씨록의 편찬 작업이 재개되어, 사가(嵯峨, 809-823년) 재위 기간 중인 815년에 드디어 완성이 된 것이다.

이 성씨록에는, 경기(京畿) 즉 당시의 수도(京)와 야마토, 셋츠, 카하치, 야마시로, 이즈미 등 키나이(畿內) 지역에 거주하는 1,182개의 주요씨족의 조상(出自)들이 수록되어 있다. 제1부에는 천황, 황자의 후손이라는 335개 황족들(皇別)의 조상이 기록되어 있다. 제2부에는 천신과 지신의 후예라는 신족들(神別)의 조상이, 그리고 제3부에는 중국과 한국 사람의 조상을 가졌다는 번족들(諸藩)의 조상이 기록되어 있다.

성씨록의 서문은, 마히또(眞人)가 황별 중에 으뜸가는 왕실 직계 씨족이므로, 수도 지역의 마히또 씨족을 제1권 황별의 첫머리에 수록했다고 말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텐무 왕은 “아마 노 누나하라 오끼 노 마히또”라고 불렸다.

성씨록 제1권의 바로 첫머리에 실려 있는 4개의 마히또 황족들은 오오진 왕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5번째는 케이타이 왕의 후손, 6번에서 12번까지는 비다쓰 왕의 후손, 13번에서 20번까지의 마히또 황족들은 “백제 왕자”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2번째 씨족은, 즉 백제 왕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는 씨족들의 바로 앞에 기록되어 있는 마히또 황족은, 비다쓰 왕의 후손일 뿐 아니라 동시에 백제왕의 자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6번부터 12번까지의) 비다쓰 왕의 후손은 백제왕의 자손과 동일하다는 말이 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비다쓰 왕은 케이타이 왕을 계승한 킨메이 왕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케이타이 왕은 또 오오진 왕의 5세손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첫 번째에서 20번째까지의 모든 마히또 황족들이 백제왕의 자손들이었다고 성씨록이 기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센쿠와 왕은 케이타이 왕의 둘째 아들, 요오메이 왕은 킨메이 왕의 넷째 아들, 죠메이 왕은 비다쓰 왕의 손자, 텐지 왕은 죠메이 왕의 맏아들, 텐무 왕은 텐지 왕의 동생이다. 그런데 21번째부터 44번째까지의 나머지 24개 마히또 황족은, 오오진, 케이타이, 센쿠와, 비다쓰, 요오메이, 죠메이, 텐지, 텐무 왕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자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신찬 성씨록 첫머리에 실려 있는 전체 44개 황족들이 모두 진인(眞人)인 동시에, 백제왕의 자손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 오오진-케이타이 계통의 핵심적인 일본 황족 전체가 백제 왕족의 후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기록을 근거로 해서, 나는 야마토 왕국의 시조인 호무다의 “외가”는 (니니기-타카기 관계처럼) 백제 진씨 집안이며, (니니기-아마테라스 관계 같은) 그의 “친가”는 부여씨인 백제 왕실이라고 추정을 했다.

(A5) 요서, 진평 의 백제군

일찍이 송서는 백제가 요동의 동쪽 1천여 리 밖에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요서를 차지해서 진평군의 진평현을 통치했다고 기록을 했다. 양서, 남제서, 자치통감(영명6년 조) 등은 모두, 백제가 진 나라(317-420년) 때 요서, 진평 2개 군을 점거해서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는 동성왕 10년인 488년에, 북위(386-534년)가 군대를 동원하여 [요서의 진평 땅에 위치한 백제군을] 침공했으나, 백제군사에게 패하여 아무 소득이 없이 돌아갔다고 기록을 했다. 자치통감 영명6년(488년) 조에도 똑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남제서는 양 나라의 소자현(簫子顯)이 편찬한 남제(479-502년)의 정사이다. 이 남제서에 의하면, 백제의 동성왕은 490년에 남제 조정에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이번에 파견한 행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長史) 고달과, 조선태수 겸 사마 양무 와, 행 선위장군 겸 참군 회매 등 3인은, 지난 태시(泰始) 연간(465-471년), 함께 송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었고, 지금 또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게 되었으므로, 각자 가행 직을 내려 주었으니, 이제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 해 주십시요. 달(達)은 변경에서의 공적이 뚜렷하여 이제 가행 용양장군 대방태수라 하였고, 무(茂)는, 공무를 충실히 수행하므로 가행 건위장군 광릉태수라 하였으며, 매(邁)는 훌륭한 근무성과를 올렸으므로 이제 가행 광무장군 청하 태수라 하였습니다”라고 말하니, 남제 조정은 이를 모두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리면서, 장군 등의 호(號)를 하사해 주고, 태수 등의 관직을 제수 해 주었다.

남제서는, 490년에 북위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요서의 백제군을] 침공하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파견해, 북위 군사를 기습 공격하여 대파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남제서에 의하면, 백제 동성왕은 495년에 또 사신을 남제 조정에 보내 표를 올렸다. 북위의 침략을 물리친 사법명을 가행 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찬수류를 가행 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례곤을 가행 무위장군 불중후로 삼았고, 목간나는 과거 전투에서 세운 공이 있는 데다 이번에 또 성문과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행 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으니,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 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동성왕은 또 다시 표를 올려, 사신으로 보낸 행 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모견과, 행 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왕무와, 참군 행 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색과, 행 양무장군 진명 등에게,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 해 달라고 요청했다. 남제 조정은 조서를 내려 이를 모두 허락해 주고, 장군의 칭호들을 수여 해 주었다. 모두 남제서의 기록이다.

남제서에 나타나는 광양, 광능, 청하 등의 지역은, 당시 발해만 연안에서 거리가 얼마 안 되는, 요서의 내륙 지방이다. 백제는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북위와 여러 차례 전투를 하고, 그 때마다 전공을 세운 장군들을 그 지역의 태수로 임명하는 동시에, 남제 조정으로부터 공식적인 인증을 받은 것이다.

양 직공도를 보면, 동진 말년(317-420)에 백제가 요서에 진출을 한 것 같고, 자치통감 진기(晉紀) 목제(穆帝) 영화2년 기록을 보면, 근초고왕 원년(346년) 이전에 진출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간에, 자치통감 영명6년 조, 남제서, 삼국사기 등에 나오는 북위와의 충돌 기록을 보면, 동성왕 치세 기간(479-501년) 까지도 백제가 계속 요서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김부식을 비롯해 중화 사대사상에 얽매인 사학자들은, 백제가 요하 서쪽의 땅을 공략해서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그 많은 기록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감히 그 내용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삼국사기는, 북위가 불가사의하게도 장수왕 통치하의 고구려를 뛰어 넘어, 마치 한반도의 남서부에 위치한 백제 본토를 공격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아홉 글자(魏遣兵來伐 爲我所敗)를 거두절미 해 삽입하고 그만 둔 것이다.

최치원은 858년경 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태어나, 874년에 당 나라에서 과거급제를 하여 벼슬을 했던 유명한 문인이다. 삼국사기는 최치원이 쓴 문집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 한다: “고구려, 백제가 그 전성시기였을 때에는 강병이 100만에 달해, 남으로는 오 나라와 월 나라를 침공하고, 북으로는 유 나라, 연 나라, 제 나라, 노 나라의 지역을 흔들어서,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었다.”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백제의 요서 진출 기록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기로 작정을 하고, 소위 “논리적인 추리”라는 것을 전개한다. 흥미 있는 현상은, 자치통감의 영명 6년(488년) 조, 남제서의 영명 8년 조, 백제본기 동성왕 10년(488년) 조를 다루게 될 때, 그들의 병적인 상상력과 궤변이 극치에 달한다는 것이다.
출처
[기타] http://www.baedalguk.com/bbs/zboard.php?id=we&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