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 濟

백제開國 숨은주역 소서노

吾心竹--오심죽-- 2010. 1. 30. 12:51

한국여성향토문화원 발췌 (www.soseono.co.kr)

 

[ 다시 읽는 여인열전 ] 고구려 - 백제開國 숨은주역 소서노
(2002.4.16)

 개국을 다른 말로 천명(天命)이라고 한다. 이성계가 파옥(破屋)에 들어가 세 서까래를 지는 꿈을 꾼 것이 임금이 될 천명으로 전해지는 것은 개국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나라를 창업한 인물이 있다. 소서노(召西奴)라는 여성이다.

 2000여 년 전 만주 졸본천(졸본천(卒本川·중국 요녕성 혼강)에 살던 소서노에게 객관적으로 미래는 없었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던 전남편 우태는 졸본 지역의 유력한 토착세력이었지만 이미 사망했고 그녀는 두 아들 비류·온조만 둔 과부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상화된 고대사회에서 여성에게 사회적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때 그녀는 북부여에서 망명한 주몽을 만난다. 기원전 37년 경 스물 아홉의 소서노와 부여에 임신한 부인 해씨를 두고 망명한 스물 한살의 주몽의 만남이 회오리를 몰고 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손부(孫婦) 소서노에게 북부여에서 망명한 주몽은 시가의 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의 악연보다는 미래를 위해 주몽과 손을 잡았다.

 그녀는 당시 졸본 지역의 시대적 과제는 통합에 의한 국가 창업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 과제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주몽을 내세워 졸본의 토착세력들을 통합해 나갔다. 처음에 졸본의 토착세력들은 주몽을 무시했다. 오이·마리·협보라는 세 부하만 데리고 부여에서 도망친 주제에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물의 신)의 외손이라고 떠벌이는 주몽을 달갑게 보는 토착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토착세력의 눈으로 주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토착세력의 대표 연타발의 딸이었지만, 정체된 현실에 만족하는 기득권자의 시각이 아니라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도전자의 시각으로 주몽을 바라보았다.

 주몽이라는 이름 자체가 명사수라는 뜻일 정도의 뛰어난 무술과 부여왕의 말을 기르며 준마를 굶겨 마르게 만든 뒤 자신이 차지한 명석한 두뇌, 그리고 북부여라는 기존의 터전을 과감하게 버리고 망명한 벤처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주몽이 지닌 이런 콘텐츠를 높이 산 소서노는 그를 과감하게 CEO로 등용했다.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소서노와 벤처정신의 소유자 주몽의 결합은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했다.

 소서노
가 없었다면 스물 한 살의 망명객이 토착세력의 텃세를 극복하고 고구려를 건국하기는 불가능했다. 고구려는 말하자면 소서노라는 자본주가 주몽이라는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건국한 신흥 국가였다. ‘삼국사기’ 백제건국기사에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많았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별한 사랑으로 후대(厚待)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처럼 여겼다”라는 기록은 여성에게 인색한 ‘삼국사기’로서는 이례적이다. 그만큼 고구려 창업에 소서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고구려를 창업한 그녀의 공은 기원전 19년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 유리가 찾아오면서 부인된다. 고구려는 해씨와 유리가 아니라 소서노가 두 아들 비류·온조와 함께 세운 나라였음에도 후계자는 유리가 된 것이다. 이때 소서노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유리왕과 권력투쟁에 나서는 것이었다. 유리왕은 졸본 지역에 자기 세력이 전무했다. 토착세력인 소서노가 두 아들과 손잡고 유리왕 축출에 나선다면 그가 승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내부 다툼 대신 다른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나라 창업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장남 비류가 그녀의 뜻에 동조해 동생 온조를 설득했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오셨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가진 재산과 노력을 모두 기울여 나라를 세우도록 도왔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여기에서 불필요한 혹처럼 우울하게 지내느니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 지방으로 가서 좋은 땅을 선택해 나라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

 ‘삼국사기’는 이때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소서노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주를 떠나 한반도로 남하한 소서노는 푸르게 넘실대는 한강을 보고 새 나라의 도읍지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장남 비류는 바닷가가 새로운 도읍의 적지라고 주장했다. 소서노는 아들에게 얽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장남 대신 차남 온조와 한강 유역에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 서울 풍납토성)을 쌓고 새 나라를 창업했다.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요서를 아우르는 해상왕국 백제는 이렇게 시작됐다.

 소서노
는 온조와 함께 백제의 기틀을 잡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낯선 망명객 주몽과 함께 고구려를 건국했던 그녀의 경험과 능력은 백제 창업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한강 유역을 도읍지로 정한 그녀의 선택은 미추홀을 선택한 비류가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이 편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후회했다는 점에서도 탁월함이 입증된다. ‘삼국사기’ 온조왕조 13년(서기전 6년)은 “왕모(王母)가 61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왕모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극히 희소하다는 점에서 소서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 준다. 비록 고구려 개창의 공은 남편 주몽에게, 백제 개창의 공은 아들 온조에게 돌아갔지만 이 두 나라의 창업에 소서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남성 중심의 역사관 때문에 그녀의 이름은 역사서에서 점차 지워져 그 편린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사기’가 일설(一說)로서 그녀의 이름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소서노의 활약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던 고대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국가를 창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도 한 나라가 아니라 두 나라를 개창한 인물은 세계 역사에도 그 유례가 드물다. 남성우월주의에 밀려 우리 역사에서조차 묻혀졌지만….

 ▶‘미추홀’ 지명을 지은 이는 소서노(召西奴)일 가능성 높아

 백제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미추홀의 ‘추’자는 추모의 ‘추(鄒)’자이다.
고어에서 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변이처럼 미추홀에서 ‘미’(물)와 ‘추’, ‘홀(땅)이 합성돼 ’미추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소서노(召西奴)는 어업자원의 풍부하고 해상발전에 입지가 좋은 바닷쪽을 도읍으로 선택하고 싶어하는 장자인 비류 쪽에 기울어 그 곳은 ‘너희 이 곳도 추모와 이어지는 땅’ 이라고 지명을 제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녀는 노련한 정치가이기에 새 나라를 경영해 나가기 위해서는 보다 안정된 국력을 가진 추모와 고구려와의 연대를 내외에 알리는 정치적 포석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소서노는 추모와 연계되는 미추홀이란 이름을 명명하는데 대해 추모에게 섭섭해 하며 호의를 갖지 않을 수 밖에 없는 비류, 온조 외 자신의 추종세력들에게 건국과 운영의 묘를 힘들여 설득해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 고구려 건국,백제 시조와 관련된 기사에 의하면 ‘ 소서노는 고구려의 첫 번째 왕비(王妃)정도로 기술돼 있다.
그러나 실은 소서노가 10대말 ~ 20대초의 추모와 비류 온조를 지휘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내지 세 나라를 세운 주인공이다.
 따라서 소서노는 최소한 두 나라의 여왕이며 건국자이자 역사적으로도 희귀한 세계적 여걸(女傑)인 것이다.

그러기에 왜곡과 은폐 속에 가려져 있던 우리 여선조들의 삶을 조명해 봄에 있어 소서노는 첫 번째 여성이 될 수 있다.
그간 소서노란 이름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등과 소서노란 이름은 거론치 않고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여성을 지칭하여 결국 소서노를 언급하고 있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종동명성왕 등의 자료가 전부였다. 본격적인 논문은 필자가 2002년 ‘아시아 고대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 처음이다. 소서노는 당시 계루부를 비롯한 다섯 부족의 연합 형식으로 나라가 이뤄진 압록강변 졸본부여의 연타발이 둘째 공주였다.

 연타발은 아들이 없어 어려서부터 영특한 소서노에게 여제수업을 시켰다. 백제가 나중에 부여씨를 갖고 있는 것으로 봐서도 정치 철학으로 고조선, 단군, 홍익인간을 설피했을 것이다. 다섯 여성이 적군 500명을 물리친 지명(중국확인)이 오녀산성(五女山城-졸본성)인 그 곳의 여성들은 원래 기개가 대단했다.

추모는 동부여에서 말을 키우는 일을 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껴 가진 것과 따르는 사람도 거의 없이 도망 와 소서노의 땅 한편에 있는 강에 피신한 도망자에 불과하다.

 건국의 모든 자원을 가진 소서노가 도망자 주몽과 결혼한 해를 고구려 건국의 해로 인정하고 있는 것만 봐도 소서노가 건국의 주체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소서노는 오녀산성에 고구려를 세워 19년간이나 추모가 아프자 동부여에서 온 추모의 아들 유리와 전 부인 예씨 부인에게 자신의 땅과 백성을 신하 일부에게 남겨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첫 남편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 그리고 경륜있는 신하들을 설득하고 따르는 백성을 통솔해 갖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녀의 외교적/경제적 지원으로 극복하면서 중원과 대방을 거쳐 한반도에 미추홀국과 십제(백제)를 세웠다.

  소서노와 그 무리는 환인지역을 떠나 낙랑사군을 거의 거치며 남하한다.

 <주서(周書)>에는 왕을 뜻하는 ‘어라하’하는 어휘가 있다.

  소서노는 백제를 세운 후 주몽은 ‘어라하’라는 책호를 보냈다.(王姓夫餘氏號於羅瑕心 民戶爲吉支夏言王也<周書>,異城傳,백제)

  또 <환단고기(桓檀古記)>고구려국 본기에는 ‘ 소서노가 기원전 3패수와 대수 사이의 땅이 기름지고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남으로 진번지간(眞番支間)’의 바닷가 외진 곳에서 10여 년간 살면서 사람들과 재산을 축적해 북쪽은 대수, 서쪽은 큰 바다에 임하여 500여 리를 차치했는데 주몽에게 사신을 보내자 그가 소서노를 ‘어라하’에 책봉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는 ‘미추홀을 도읍지로 선택한 비류가 위례성으로 돌아 와 부끄러움 속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소서노는 만주 근처 고구려 땅과 중원, 한반도 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에도 영향을 미친 그야말로 동아시아적으로 주목받을 여성이 된다.

 단재 신채호는 그의저서 <조선상고사> 제 2장 3절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제 1항의 제목을 ‘백제 소서노 여대왕의 백제건국’이라고 했고, 이어 “ 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이”라고 평했다. 일부 사학자들 역시 ‘고구려 건국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여인’이라며 신채호 선생의 평가에 주저없이 동감을 표한다. 그러나 이런 대인물 소서노가 정작 한국에서 부각되지 못하다보니 세계적으로도 부각되지 못했다. 이는 백제보다는 신라중심의 서술, 비류보다는 온조와 남성중심의 역사 평가관습 때문이다.

 남성인 주몽과 온조만 부각시킨 채 소서노에 대한 평가를 은폐하고 비하함으로써 관련 자료를 중시하지 않고 폐기하거나 유의미하게 자료화하지 않은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의 ‘2월에 왕도에서 노파가 사내로 변하고 다섯 호랑이가 입성하니 61세의 왕모가 돌아갔다’는 기사로 보아 호랑이 같은 인물을 범으로 지칭했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사료를 참고할 때 소서노는 대략 기원전 55년에 태어나 기원후 6년 2월에 숨졌다. 음력 2월이니 양력으로 3월말~4월초가 된다.

 따라서 소서노의 생물기간은 기원전 55년~기원후 6년 2월이 된다.(혹은 기원전 66년~기원후 6년 2월로 보기도 한다.) 비류 쪽에서 보면 문학산성을 오르는 한길이 ‘사모(思母)고개’로 돼 있음도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인천지역 근처의 짠물과는 달리 유독 단물이 나오는 문학산성 정상에 비류우물은 고대 신앙지로도 적합한 곳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역사적 기술의 한계, 편견, 자료의 불충분을 극복하고 소서노에 관한 자료들을 꾸준히 찾아 세밀히 연구/발굴하는 일은 한민족과 한국의 위상을 새롭게 다지는 일과 긴밀히 연관되는 것으로 우리 후손들이 앞으로 풀어 나가야 할 과제이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 드라마 속의 소서노와는 사뭇 다른 역사속의 소서노입니다.

숙명여대에서는 1월의 여성리더로서 '세상을 바꾼 부드러운 힘, 소서노'를 선정하기도 했는데요.. . (출처http://blog.naver.com/100sookmyung?Redirect=Log&logNo=10012568047) 드라마 속에서도 역사 속의 냉철하고 현명한 소서노스러운 모습이 좀 더 잘 표현되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하지만, 주몽을 통해서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서구 어느 나라보다 앞서 이렇게 위대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무척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