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중국을 지배한 '흉노의 선우',초기영토 북경주변 난하 [3]
2008/04/02 [19:05] ⓒ pluskorea
1. 흉노족,단군조선의 장자국 고구려(백제)에 대한 제후국 흉노족의 반란
중국인들이 지들 나름대로 지역적으로 구분하기위해 사용하여 문헌에 기록한 예맥이니 동호니 흉노니 말갈이니 하는 용어는 별 의미가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유목생활을 한 북방 동이족, 그리고 농경생활을 한 남방동이족, 그리고 동이족과 백인들이 피가 섞인 투르크족(터키)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이들 종족은 모계사회인 마고성의 여성 지도자 마고할머니 시대를 계승한 한인의 한국-한웅 배달국-단군 조선의 계보를 잇는 부여와 고구려-대진국-고려-조선-대한민국을 장자국으로 삼는 범동이족으로 볼 수 있다. 고리(부여.고구려)족의 후예 징기즈칸이 유라시아 전역을 통일하여 단군민족의 통합을 이루어냈듯이 21세기 한국연방의 부활이 우리 민족의 사명이라 할 것이다.
[한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중국이 '소란한 오랑캐'로 비하한 흉노는 단군3조선 중 번한에 속한 제후국으로 내몽골 초원지역에서 발원한 북방동이족으로 중국과 유럽을 위협하고 지배한 단군조선.부여.고구려의 제후국이다. 또한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을 지배한 투르크족의 선우였다.
흉노족의 조상은 아시아 최초 유목민으로 기록된 스키타이족으로 내몽골 초원지역에서 일어나 서진하여 유라시아 초원지역을 지배하고 알타이산의 황금으로 세련된 샤머니즘을 반영한 황금문화를 이룩하였으며, 백인들과 피를 섞여 투르크족을 형성한 것 같다. 그래서 흉노족이였던 신라 김씨왕족들이 중앙 아시아 투르크족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중앙 아시아인들(투르크인들)이 경주에 많이 거주한 배경이기도 하겠다. 땅길수 밖에 없는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니까!!
중국을 통일하고 300만에 달하는 인해전술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900년의 천자국 고구려에 대적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선비족이다. 그런데, 선비족도 북방유목민들로 반이상이 흉노족이다. 그런데, 신라 김씨왕족의 혈통이 흉노족아닌가?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공멸시킬 수 밖에 없는 혈통적인 배경이 있는 것이다. 같은 동이계라고 하더라도 고구려.백제의 구성종족상 정통적으로 만주와 한반도를 기반으로 하는 오리지날 동방의 동이족이며, 백민들이 사는 지역이며 천자국이며 대인국다.
흉노족(선비족)인 신라 김씨왕족과 수.당나라가 협공하여 고구려를 공멸시킨 역사적 사건은 단군민족사에서 심판하자면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장자국에 반역을 저지른 패륜적 사건이라 하겠다! 즉, 자식이 천륜을 저버리고 부모를 살해한 패륜적 사건과 동일하다 하겠다.
2.단군조선의 제후국 흉노(곰족.편두.동복.투르크족의 수장)의 역사
흉노족의 국가형태는 연제․호연(呼衍)․수복(須卜)․난(蘭)․구림(丘林) 등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노 부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였으며, 선우의 지위는 연제씨족에게 세습되었고, 알씨(閼氏)라고 불린 황후는 원칙적으로 여타의 4씨족에서 나왔다.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부족의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천행사를 거행하였고, 동시에 국사를 의론하였다. 유목과 수렵생활로 양․말 등의 가축을 방목하고,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 사이를 이동하며 천막식 원형(圓形)가옥에 거주하였다. 또한 P.K.코즐로프 일행이 노인울라(Noinula)에서 발굴한 귀족분묘는 기원 전후의 것인 듯한데 그 곳에서 스키타이-시베리아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견직물․칠기․옥기 등의 중국제품, 이란계의 동식물 무늬와 인물상을 수놓은 모직물 등이 출토되어 흉노의 지배층에 대한 중국․서방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흉노의 기원과 시조에 대해서 한단고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과사전]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기원전 86년)는 한나라의 흉노족 출신 관료이다. 자(字)는 옹숙(翁叔)으로, 본래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다. 한 무제(漢武帝)로부터 김씨 성을 받았다.
곽거병(霍去病)의 흉노 정벌 때, 한나라에 포로로 끌려와 말 기르는 일을 맡던 중, 무제의 눈에 띄어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시중(侍中), 부마도위(附馬都衛),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다. 키가 8척 2촌, 용모는 위엄이 있었다. 무제의 두터운 신임이 있었음에도 신중하여 과실이 없었고, 망하라(莽何羅)의 무제 암살 시도를 막아 그 공으로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이어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흉노족을 배신한 김일제 세력은 이미 한나라의 충성스런 신하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에 흉노족과 김일지 세력들은 원한관계일 수 밖에 없었으며, 왕망과 손잡고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개국한 김알지세력은 흉노족을 멸망시키고자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하나 고구려는 거부했다.
흉노 편을 든 고구려, 동족을 몰살시키려던 왕망과 김일제 흉노세력
김수로.김알지.김유신 등 신라.가야의 김씨왕족들은 흉노족 감일제의 후예들로 김일제후손과 친척이던 김왕망세력과 손잡고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개국하여 동족이던 흉노족을 몰살시키려고 했다.이에 신나라 왕망이 고구려에 원병를 요청하는데, 고구려는 거부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단군의 후예로써 피를 나눈 동족이기 때문이였다.
중국 고대문헌에는 청동기문명의 주역은 예맥족이며, 이들이 부여와 고구려의 조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한웅족과 곰족이 융합한 단군족을 예맥족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 부여.고구려의 선조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혈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부여와 고구려가 단군조선을 계승한 적통국가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자료]한국사는 북만주 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계(濊貊族系)의 국가로 인정받는 부여(夫餘)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계루부, 桂婁部)이 나왔다고 추정한다. 고구려의 기원과 성립과정에 대한 기록은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주몽(동명)의 건국내용(남하 및 정착)에 관해서는 대동 소이하다(‘광개토태왕비’에 추모(鄒牟)로 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흉노와 동이에 속하는 예맥(부여)의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는 데도 두 나라가 교전한 기록이 단 한군데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노는 유목 생활을 하면서 기후나 식량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곧장 약탈에 나섰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서로 이웃한 종족간에 충돌이 없었다는 점은 다소 이상할 수밖에 없다.
부여와 흉노처럼 고구려와 흉노의 관계 또한 특별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왕망이 중국 전한(前漢) 왕조를 파하고 신(新, 8∼23)을 세운 후 흉노를 정복하겠다며 고구려에 병력을 요청하자 고구려는 이에 응하기는커녕 거꾸로 요하(遼河)를 넘어 신(新)을 공격해 요서태수 전담을 전사시키고 지속적으로 왕망의 영토를 유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왕망은 흉노의 일족인 휴도왕의 후손으로 중국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웠으므로 흉노도 자신의 세력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동·서 흉노로 갈라졌는데, 여기서는 동흉노로 볼 수 있다. 왕망은 동흉노가 그의 지배를 거부하자 흉노의 다른 일파이자 고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으로 하여금 동흉노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는데, 소수맥은 동흉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망을 공격한 것이다.
한편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흉노 휴도왕의 후손이라는 것이 문무왕의 능비문에도 적혀 있다. 여기에는 김알지가 흉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백산학보’ 제67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남만주 및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목축, 수렵 및 조방경작(粗放耕作)을 하던 선비(鮮卑)는 고구려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민족이다. 선비는 동호가 흉노에게 격파된 후 선비와 오환으로 분리된 다음 북중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왕조를 건설한 북방 기마민족이다. 선비가 건립한 왕조는 전연, 후연, 남연, 남량,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등이며 선비의 문화가 당대까지 존재했던 점 등을 미루어보아 선비가 중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중국에서는 북방 기마민족이 할거하며 중원을 지배하던 시대를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라 부른다. 이러한 선비가 고구려와 특별한 유연 관계가 있는 것이다.
역사에서 선비와 고구려의 특별한 관계는 여러 차례 발견된다. 우선 고구려 유리왕 11년(기원전 9년)에 고구려가 선비를 격파하고 속국으로 삼은 일이 있다. 또 후한 광무제가 요동태수 채동으로 하여금 고구려가 부용(附庸)세력화하여 지배하고 있던 선비족 일부를 책동, 고구려로부터 이탈하게 한 일도 있다(48년). 이에 고구려는 모본왕 2년(49년) 후한제국이 대흉노 소극정책에 따라 북쪽방어선을 화북 산서선으로 후퇴시킨 것을 틈타 후한 영역 깊숙한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 공세를 펼쳤다. 이에 당황한 후한은 고구려에게 철수의 대가로 상당한 물질적 급부를 제공하는 동시에, 선비족 일부를 책동하여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도록 사주한다.
고구려의 태조 대왕은 더 이상의 선비족 이탈을 막기 위해 동왕 3년(55)에 ‘축요서십성(築遼西十城)’이라는 군사적 대응 조치를 취하였고 동왕 69년(121)에는 선비세력과 합세, 한제국의 요동거점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군사행동 폭을 확대시켰다.
선비(鮮卑)는 고구려의 부용세력
부용(附庸)이란 원래 소국(小國) 그 자체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대국(大國)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로마제국이 당시 해방 노예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하는 부용민(clientes) 제도를 제국의 피정복지 통치방식으로 채용했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도 이러한 보호-종속관계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지배집단은 전쟁을 주체적인 생존방식으로 인식하고 군사역량을 제고하는 데 주력하여 전사국가(戰士國家)화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세력에 대한 군사적 팽창정책을 관철시켜 나가면서 내부적인 통합으로 정치사회적 중앙집권화정책을 견지해갔던 것이다.
고구려는 이런 내외 정비를 통해 후대에 들어서 ‘전제적 군사국가’에서 탈피,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독자적 생존권을 확보한 하나의 제국(empire)을 성립한다.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흉노가 동서 및 남북으로 나뉘기 전의 흉노를 의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작전에 수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피정복민이 부용 관계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말갈 선비 거란 지두우(地豆于) 같은 이종족(異種族)에게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세금을 받고, 특히 노역과 군역을 확보했다. 이를 공납적 수취관계(貢納的收取關係)에 기반한 속민제도(屬民制度) 또는 이종노예제(異種奴隸制)라고도 한다.
고구려제국은 복속된 기마민족들을 유효 적절하게 구사하였으므로 새롭게 탄생한 한족의 국가 수·당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수·당이 고구려와 혈투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북방에 산재한 흉노의 후예들과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경우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수·당은 고구려와의 전투를 한-흉노간 전투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수나라 문제가 30만명을 동원하고도 참패했음에도 그의 아들 양제가 또 다시 고구려 침공에 매달린 것은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족을 지배하고 있는 동북아의 패자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결심하게 된 것은 607년 양제가 돌궐 가한의 막사를 방문했을 때 때마침 고구려 사자와 마주친 후 고구려와 돌궐이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부용세력 간의 연합을 방해하는 것이 양제로서는 급선무였다. 마침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한 백제와 신라가 원조를 요청하는 등 침공 명분까지 만들어주자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는 고구려와 말갈 연합 세력에게 패퇴했고 당 태종의 공격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역사는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나 통일신라와의 항쟁에서 패배해 한반도의 주도권을 신라에 넘겨주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왕을 흉노의 선우로 인정
중국인들은 ‘북방 소수민족 세력의 궐기’였던 5호16국이 중국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중국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북방 기마민족이 중국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동북방에 위치한 기마민족 고구려는 흉노가 동북아시아를 지배했을 때는 흉노에 속했으나, 점차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해 흉노가 멸망한 후에는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이 같은 사실은 고구려가 5호16국을 건설한 주도 세력인 선비 등을 부용세력화하여 속국으로 취급하면서 북방 기마민족의 맹주 중에서도 맹주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한 사료가 이러한 정황을 확인해주고 있다.
중국 중원이 오·촉·위 삼각 관계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을 때 ‘삼국지’의 주역인 오나라 황제 손권은 동천왕 7년(234), 당시 요동반도를 장악하면서 오나라와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인 공손연을 협공하자며 사굉(謝宏)과 진순(陳恂)을 고구려에 파견한 일이 있다. 이때 손권은 고구려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單于)’라 부르면서 의복과 보물을 함께 보냈다. 이화여자대학교 신형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233년 오(吳)의 손권이 사신 진단, 장위, 두덕 등을 공손연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진단과 황강 등이 달아나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가서 자기들은 원래 손권의 밀명을 받아 고구려로 오던 중에 풍랑으로 요동해안에 표류해 공손연의 관헌들에게 문서와 방물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살아서 고구려로 들어왔다고 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간계를 모르고 그들을 오나라로 돌려보내면서 예물을 보냈다. 이에 오의 손권이 234년 사자 사굉, 중서, 진순을 고구려에 보내 동천왕을 선우에 책봉하고 예물을 보낸 것이다(책봉이란 정식 수교(修交)의 외교적 관례로 주종 상하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삼국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견사자사굉(遣使者謝宏) 중서진순(中書陳恂)
배궁위선우(拜宮爲單于) 가사의복진보(加賜衣服珍寶)
그러나 손권의 정략은 실패했다. 동천왕은 236년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魏)로 보냈으며 238년 위의 태위 사마선왕이 요동지역의 공손연을 공격할 때 구원병 수천 명을 보내 지원했다. 그러나 동천왕 16년(242), 고구려의 지원으로 요동의 공손연이 멸망했음에도 위가 요동지역 전체를 차지하자 동천왕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246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으로 비류수에서 이들을 맞아 격파한다. 그러나 관구검을 격파한 동천왕이 여세를 몰아 개마무사로 무장된 철기병 5000명으로 관구검을 계속 공략했다가 크게 패하여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으며 고구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고구려는 변방 소수세력 아니었다
고구려가 아시아의 동북방에서 세계를 주름잡던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 오나라 손권이 동천왕을 선우로 인정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과 특성을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흉노가 중국과 끊임없이 혈투를 벌여 흥망성쇠를 겪는 동안 고구려는 중국과 당당히 맞서 싸우거나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등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국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중국의 천자를 자임하는 손권이 고구려 왕을 선우라 칭하며 협력하자고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이 흉노의 수장급이란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손권이 이미 인정하였듯, 고구려는 중국에 종속된 변방 소수세력이 아니었다. 즉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끼워넣으려는 시도에 원천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바로 중국인이 기록한 사료가 제시한 셈이다.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KL&qid=2eFBk&q=%C8%E4%B3%EB+%B0%F8%BC%D5%BF%AC&srchid=NKS2eFBk
스키타이-스키타이는 아시아의 유목민으로 BC 8∼BC 7세기에 동방에서 서쪽으로 진출, 볼가강가에 출현하여 원주민 킴메르인을 내쫓고, 남러시아 초원에 강대한 스키타이국가를 건설했다. 그리고 BC 4세기에는 돈강 동쪽에서 온 사르마트인의 공격을 받아, 북카프카스의 쿠반지방을 포기하고 본거지를 서쪽으로 옮겼다. 스키타이의 세력권은 크림반도와 드네프르강·돈강 하류지역 등 흑해 북쪽 기슭 일대를 포함하여, 서쪽으로는 다뉴브강 남부, 동쪽으로는 카프카스지방을 넘어 소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BC 3세기 중엽에는 사르마트의 압박을 받아 세력을 잃었다.
훈(흉노) 제국-기원전 760년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언덕에서 출발하여 거대제국을 건설하고 천여 년에 걸쳐 세계를 지배하며 서구문명의 초석을 마련한 대로마제국, 어느 국가나 어느 기업도 이처럼 강대하면서도 장기간 존속한 조직은 인류역사상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이제 로마제국은 이전의 영토확장 만을 추구하던 공격적인 로마공화국이 아니었다. 사실 수백 년 동안 로마인들이 두려워할 만한 나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근동지방의 페르시아 제국과 북쪽에 게르만족이 있었으나 군사적인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른바 태평성대의 시절이고 제국은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맑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모이더니 성을 향해 몰려왔다.잠시 후 구름은 비를 뿌리는 대신에 화살을 쏟아냈다. 그 뒤에 흙먼지가 일었고 말발굽소리가 들린 이후에야 보초병들의 고함이 뒤를 따라 왔다.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 "우리는 신의 징벌자로 왔다"
작은 키에 떡 벌어진 체구, 큰 머리통, 노랗고 거무튀튀한 피부 그리고 찢어진 눈, 처음 그들을 본 로마사람들은 그들이 괴물인줄 알았다. 그들은 말을 탄 채 밥을 먹었고 그곳에서 용변을 보았으며 거기에서 잠도 잤다. 희한한 등자위에 서서 활을 쏘았으며 한 사람의 기병이 여러 마리의 말을 몰고 달렸다.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의 괴물조차도 그들만큼 사람과 말이 한 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훈족이었다. 제사용 청동가마솥인 &039;동복&039;을 말에 싣고 다니는 훈족은 검은 머리에 키가 작고 편두풍습을 가진 몽골리언들이였다. 편두풍습과 동복은 김해.경주지역 김알지.김수로세력의 고분에서도 발굴됨으로써 신라.가야 김씨왕족이 흉노족임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훈족의 아틸라
훈족의 왕, 아틸라 상상도
로마인들에 의해 묘사된 훈족의 왕, 아틸라는 검은 머리에 키가 작았으며, 왕관을 쓰지 않을 만큼 권위적이지 않고 부하들과 밥을 같이 먹고 동고동락하는 소박하고 검소한 사람이였다. 서구인들 스스로가 기록한 문서 중에는 아틸라를 무척 수수하고 소박하며 인자한 사람이라는 관찰이 많이 있다. 아틸라를 살해하려는 음모자가 발각되었을 때였다. 아틸라는 그를 용서하는 대신에 금자루를 목에 걸고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알현하도록 지시하였다. 살해하는 대가로 동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금을 받기로 했던 것이다.적국의 왕과 내통하여 자신을 시해하려했던 부하를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틸라였다
아틸라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만큼 리더쉽과 전략전술이 뛰어 났으며, 아틸라에 참패한 로마는 영토를 훈족에게 이양할 만큼 전쟁에 능했다.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민족의 훈족과 무거운 갑옷을 두른 로마군대와의 전쟁에서 당연히 기동성과 로마군단의 조직력을 무너뜨리는 훈족의 다양한 전술은 승리의 원천이였다. 즉, 질서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조직시스템을 살리되, 리더들의 군림과 권위를 내세우기위한 지나친 통제와 간섭을 지양하고, 각자의 적극적인 기동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면 승리한다는 이치가 그것이다. 이러한 기마술의 기동성은 이후 몽골족에 의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유럽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고대 북방 유라시아 한국인들(동이족=맥궁)
1. 스키타이(황금문화) ==> 2.흉노(훈)족 ==> 3.몽골족
▶훈족은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북방동이족으로서 훈족은 곰족의 후예임을 알 수 있습니다.
* 훈족은 머리모양을 길쭉하게 만드는 편두풍습을 가지고 있었다.그리스.이집트.인더스.로마 문명의 뿌리가 되는 슈메르 초기 유적지인 아모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몽골리언 슈메르인들의 유골형태에서도 증명되었듯이 편두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편두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 편두풍습은 시기적으로 신시 배달국.단군조선.부여의 중심지역이였던 송화강지역에서 시작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으며, 중국문헌에서도 조선의 오래된 풍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편두풍습은 단군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이 두뇌를 좋게 하기위해 태어나자 마자 머리모양을 길게 만들었다. 이러한 두상은 가야인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골에서도 증명되었다.
신라 김씨왕족의 조상들인 소호금천씨의 뿌리를 찾아서
일제 식민사관과 중국 동북공정론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기때문에 정사로 인정하지 않는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사와 인류사에 대해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버리면 끝나는 문제다. 한단고기에 신라 김씨왕족의 조상들인 흉노족의 기원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본래 황금문화가 특징인 흉노족은 아시아 초원지역에서 발원한 스키타이족의 후손들이나, 서진하여 그리스까지 공략한 유라시아 초원의 최초 유목민족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스키타이족의 조상들의 땅인 초원지역인 내몽골 지역에 살고 있는데, 중국 한족들은 "소란스런 오랑캐"로 비하하는 의미로 &039;흉노&039;로 부른 것 같다. 그러니까 흉노라고 부르는 우리 스스로가 중국 한족들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흉노족 스스로 자신들을 무엇이라 불렀는지가 중요하다. 흉노족 스스로 자신들을 부른 이름을 불러 주어야 흉노족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스키타이 원족에 해당하는 흉노족이 사는 내몽골 약수에 단군조선의 신하였던 색정이 유배가서 결국 족장이 된 모양이다.그래서 한단고기에서는 색정을 흉노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마치 4대 단군 오사구의 동생 오사달이, 훗날 몽골제국의 푸른늑대를 상징하는 몽고리(몽골)의 족장이 된 것 처럼 말이다.
따라서 신라.가야의 김수로.김알지.김유신 등 흉노족 김알제 후손들은 혈통자체가 스키타이족이 아니라, 고대 만주에서 산동지역으로 이동하여 대문구 문명으로 중원문화를 꽃피운 소호금천씨의 후손들인데, 이들 소호금천씨족의 일부가 중국 북부지역으로 이동정착하여 스키타이족들과 피를 섞여 결국 흉노족이 된 것 같다. 김유신 비문을 보면 김유신은 소호금천씨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 이를 증명하고, 중국 산해경에 [소호금천씨의 나라는 동해밖에 있다]고 했으니 동해밖이면 중국방향기준이니 서해밖으로써 한반도를 의미한다. 한반도를 고대한자사전에는 한반도.한국.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반도(중남부 지역) 땅이 군자불사지국.동방예의지국이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고로 소호금천씨는 한반도 사람들인데, 만주를 걸쳐 중국 산동지역으로 건너갔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따지고 보면 중국 한족이 흉노라고 부른 종족도 유목생활을 하던 우리 북방 동이족이다. 흉노족도 단군조선의 풍습과 동일했다. 내몽골지역이면 단군3조선 중 번한에 속한다 하겠다. 한단고기에도 흉노족이 번한의 제후국이 되겠다고 공물을 바친 기록이 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유목생활을 하고 알타이산의 풍부한 황금을 이용하여 뛰어난 황금문화를 이루었던 스키타이(흉노=훈)족은 유라시아 초원지역을 지배했던 최초의 북방 동이족이며, 그 후손들인 흉노(훈족)또한 중국은 물론이고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군조선-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에 대해서는 함부로 하지 못하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적통국가임을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왕에 보낸 편지에 고구려를 "흉노의 선우"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중요한 건 한반도-만주-일본-중국-유라시아 흩어져 있는 단군민족을 한국연방으로 대통합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지역과 민족을 분열시키고 미국의 개가 되어 동족을 대적하는 반민족 친일숭미 반민족 진보개혁세력들은 일거에 반드시 청산해야할 한민족 통합의 걸림돌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윤복현)
신라 김씨왕족과 선비족 당나라와의 혈통적인 친연성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당나라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다. 흉노족인 신라 김씨왕족이 선비족인 당나라와 함께 만주와 한반도의 토착민들로서 동이족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백제를 공멸시키고, 경주왕릉에 세워진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의 석상들이 세워진 친연성을 혈통적으로 알 수 있는 배경에는 신라 김씨왕족이 혈통적으로 고구려.백제인들보다는 흉노족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족에 훨씬 더 친연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선비족은 사실상 반은 흉노족이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의 선비족의 나라인 북위를 가르킴, 후한서에서는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이 인구는 당시 선비족의 인구보다 10만정도 많은 인구다. 즉 선비족의 반은 흉노족이었다는 결론이다.
김왕망과 함께 전한을 무너뜨리고 개국한 신나라가 10년후 멸망하자 한나라의 멸족이 두려워 산동을 걸쳐 해양루트를 따라 한반도 남부 김해.경주지역으로 들어온 흉노족 김일제 후손들(가야.신라 왕족)은 만주와 한반도의 토착민들(동이족)로 구성된 고구려.백제인들의 무덤양식(고구려.백제:한반도 남방식 고인돌양식의 적석총/신라 김씨왕족:유라시아 유목민의 적석목곽분)이나 문화자체(신라는 고조선의 옛 부족 중의 하나인 흉노의 갈래이다. 신라 김씨왕족은 초기에는 스키타이 황금문화이고, 같은 혈족인 고구려.백제,일본은 부여계 어족이며 부여계 문화다)가 차이가 난다.
일례로 신라의 금관은 백제의 그것과 약간 다르다. 나갈 출자 문양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흉노의 스키타이 문명의 상징이다. 사슴뿔 문양인 것이다.신라 김씨왕족의 무덤인 황남대총의 유물들이 증명하듯 상이하게 중앙 아시아적인 요소가 강하였으며, 신라 김씨왕족의 경우 중앙 아시아 투르크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그러한 고고학적 증거자료는 경주 김씨왕족의 무덤들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투르크인들의 석상들이 증명한다.
사진자료처럼 투르크인들은 대부분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나, 흰색깔의 얼굴색과 얼굴모양은 백인형태를 뛴다, 즉 황인종과 백인종의 혼혈족이다. 이들 투르크족들을 지배한 종족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던 흉노족이다.
[자료]단군조선의 제후국 흉노에 종속된 투르크족
백인종과 황인종의 혼혈족인 투르크인들은 현재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서아시아, 유럽 일부에 살며 터키어를 주요 언어로 하는 민족이다. 기원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사서에는, 바이칼호 남쪽에 있으며 흉노에 종속된 집단으로서 ‘정령’으로 기술되어있다. 그후 ‘철륵’, ‘칙륵’ 등의 한자음을 단 집단의 존재가 나타난다. 6세기 경에는 돌궐족이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북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내분으로 인해 동서로 분열된 후 몽고고원의 셀렌가강 부근에서 터키계 위구르족이 대두하면서 멸망의 길을 걷는다.
9세기에는 위구르족도 북방에서 남하한 키르기스족에 의해 붕괴되고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오아시스지대에서 정주생활을 한다. 위구르의 서방 이동에 따라 그 때까지도 서서히 진행되어오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가 결정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그 결과 중앙아시아는 투르키스탄(투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중앙아시아에는 상인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해져 많은 터키인들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도 진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된 동투르키스탄의 주요 주민들은 후후 카라 키타이, 몽골의 지배를 거친 위구르인이다.
중앙아시아의 벨라사군을 중심으로한 지역에는 투르크족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카라한왕조(840~1212)가 성립했다.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터키화와 이슬람화는 더욱 결정적인 것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세기 말부터 11세기까지 투르크인이 대규모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부터 서쪽으로 이동한 것은 이슬람세계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중앙아시아는 ‘투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으로 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투르크인은 그 활동의 장을 더더욱 서쪽으로 넓혀나갔다.
서방에 이주한 투르크인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것은 셀주크라는 수장에 의해 인솔되었던 일족이었다. 1055년 셀주크의 손자 투그릴이 대군을 이끌고 바그다드에 쳐들어와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지배했다. 그는 오랜 역사를 가진 땅과 주민을 지배하기 위해서 칼리프의 권위를 빌어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아 이슬람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술탄이란 ‘권위를 지닌 자’라는 뜻으로 이후 투르크의 군주는 이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란, 이라크를 중심으로 하는 서아시아일대에 셀주크투르크제국이 성립되었다. 압바스왕조 칼리프는 술탄의 보호 아래 바그다드와 그 주변의 얼마 안되는 지역만을 지배하게 되었다.
아나톨리아에는 1071년 만지케르트전투에서 비잔틴군이 패배한 결과 중앙아시아로부터 많은 투르크계민족이 이주를 개시했다. 또 비잔틴군의 용병으로 참가한, 북쪽에서 흑해를 돌아온 것으로 추측되는 투르크인도 정주생활에 들어감으로써 피폐했던 아나톨리아는 급속히 투르크화되었다.
몽고의 서방원정으로 셀주크왕조가 쇠퇴하자 투르크인들의 지방세력은 자립하여 각지에 군주국을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비잔틴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오스만왕조가 기독교국가인 비잔틴제국으로의 영토확장 가능성을 이용하여 발칸반도로 영토를 확대하는데 성공했다. 이 힘을 배경으로 아나톨리아의 투르크 군주국을 병합한 오스만투르크는 한때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단절되기도 했지만 다시 부흥하였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1453) 이어 오스만투르크는 마물루크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칼리프의 지위까지 손에 넣고(술탄-칼리프제의 성립) 아시아․아프리카․유럽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완성하였다.
그후 이슬람세계는 16세기에 들어 이란 지방의 시아파 사파비조(1501~1732)와,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가 인도에 건국한 무굴제국(1526~1856), 이스탄불의 오스만제국(1281~1924)으로 크게 3분되었다.
슐레이만 1세(재위 1520~66) 치하에 극성기에 달한 오스만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 3대륙에 걸친 영토를 확보했으며, 그 군대는 한때 빈까지 육박하였다. (1529) 또한 국내에서는 군사적 봉건제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법류. 학예. 공예 등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출처 http://cafe.daum.net/minhamsa/868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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